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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엽미술 May 11. 2021

레오나르도 다 빈치, 호기심에 대한 욕구


르네상스 인간

‘르네상스 인간’이란 무엇인가. 바로 다방면에 재능이 있으며, 지혜 있는 자를 가리킨다. 바로 이러한 인간의 전형적인 사람이 레오나르도 다 빈치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예술뿐만 아니라 다방면에 재능이 보였는데, 때문에 그는 예술가인 동시에 과학자이며 철학자였다. 그는 외모도 번듯했으나, 그 지성과 매력은 더더욱 뛰어났다. 일부에서 그의 천재성이 과장이라는 말이 있으나, 이러한 다방면에서의 활동을 보면, 그를 천재라고 생각하게 되기 마련이다. 물론 그가 미완성이나 당시로서 실현하기 힘든 것들을 많이 남기긴 했으나, 그만큼 그의 머리에 호기심과 상상력이 가득했다는 것 아니겠는가. 거기다 그는 그 스스로를 항상 ‘무학자’라 말했다. 이는 자신이 모른다고 생각할 때, 호기심으로 세상을 대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만약, 레오나르도가 천재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가 호기심 많은 사람이었다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르네상스의 3대 화가

르네상스 전성기를 이끈 3명의 화가가 있다. 이들을 바로 르네상스 3대 화가라고 하는데, 바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파엘로, 그리고 미켈란젤로이다. 이 세 명은 더욱 엄밀히 구분하자면 르네상스 시기 피렌체 화파의 전성기를 이끈 사람들이며, 천재들이 활약하는 친퀘첸토 시기에 활약한, 바로 그 천재들이다. 이 중 레오나르도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다룰 텐데, 레오나르도는 이들 중에서도 남긴 완성작이 가장 적다. 그가 다방면에 호기심을 가졌던 영향일 텐데, 그는 그림을 그리던 중 다른 일에 빠지는 일이 많았다. 이는 그림과 상관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했다. 어쨌든, 흥미가 생기면 다시 그리기는 했지만, 흥미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다들 그 결과는 유추가 가능하리라. 그러면 이제 그의 일생부터 다뤄보겠다.




빈치 마을

레오나르도 다 빈치, 그의 성으로 보이는 다 빈치라는 부분은 사실 빈치 마을 출신이라는 뜻이다. 정확한 이름은 레오나르도 디 세르 피에로이며, 이 뒤에 빈치 출신이라는 의미로, 레오나르도 디 세르 피에로 다 빈치라고 하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가 그의 이름을 부를 때는 레오나르도로 부르는 것이 좀 더 정확하겠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빈치 마을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더 유명하고, 다빈치라는 것은 그를 부르는 말이 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니 어느 것을 써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어쨌든 빈치 마을에서 1452년에 레오나르도는 태어났다. 빈치는 이탈리아 중부의 소도시였는데, 그곳에서 부유한 변호사였던 아버지와 정식 부인이 아닌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모인 피에로와 카타리나는 신분의 차이로 결혼하지 못하고, 레오나르도는 어머니 없이 아버지 댁에서 자라야 했다. 그가 정부인이 아닌 어머니에게서 태어났지만, 적어도 집안에서 그는 아버지의 아들이었다고 한다. 즉, 적어도 집안에서는 어머니의 신분 때문에 차별을 받진 않았던 것 같다. 또한 5세부터는 그는 아버지의 집에서 정식 교육을 받았다. 레오나르도는 이 빈치 마을에서 17세가 될 때까지 살았다.



피렌체

1469년, 레오나르도는 아버지와 피렌체로 이사했고, 아버지는 레오나르도를 당시 화가이며, 금세공사이자 조각가였던 베르키오에게 받아달라고 부탁했다. 아마 레오나르도가 어릴 적부터 그림에 재능이 있어, 화가와 조각가가 되고자 했기 때문이리라. 레오나르도는 베르키오의 작업실에서 다른 견습생들과 함께, 그림과 조각 기술을 배웠다. 즉, 도제 과정을 지냈다는 것이다. 베르키오는 작품의 마무리를 제자들에게 맡기고는 했다. 도제 생활 시작 3년 후, 레오나르도는 작업실에 주문받은 그림을 완성하는 일이 많아졌다. 여기서 레오나르도는 ‘그리스도의 세례’를 그리기도 한다.


▣ 그리스도의 세례

이 그림에서 베르키오는 밑그림만을 그리고 나머지를 레오나르도에게 맡겼는데, 그는 왼편 부분을 없애고 전체 구도를 바꿔버렸다. 레오나르도는 새로운 그림을 그려 넣었는데, 웅장한 암벽과 흐르는 강, 그리고 왼쪽을 보고 있는 천사가 그것이었다. 이 왼쪽을 보는 천사는 동료인 보티첼리에게 맡기고,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예수의 옷을 들고 있는 천사는 레오나르도가 직접 칠했다. 또한 보티첼리에게 맡긴 다른 천사의 손 부분과 배경의 일부 또한 그가 직접 그렸다. 이 그림에서 레오나르도가 그린 것을 보고, 스승인 베르키오가 다시는 붓을 잡지 않겠다는 선언을 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러나 이후 베르키오가 작품 활동을 그만둔 것은 아니다. 소문이 사실이든 아니든, 레오나르도는 이를 통해 명성을 얻고 많은 주문을 받게 되었다.


 6년의 견습 생활을 마친 그는 성 누가 길드에 가입하고, 피렌체에 자신의 작업실을 차려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리스도의 세례’로 얻은 명성으로 그는 피렌체의 통치자, ‘위대한 로렌초’로 알려진 로렌초 메디치와도 알게 되었다. 로렌초는 레오나르도를 고용해 일을 착수했는데, 그의 초기 걸작으로 뽑히는 ‘수태고지’였다. 베르키오의 공방에서 주변 동료들을 도와주기도 하며 채색이나 밑그림, 조각품의 원형 만들기 등의 연습을 할 수 있었던 레오나르도는 실력을 닦을 수 있었다. 이 기간이 1475년~1480년이며, 그가 그리고 싶은 주제는 마음대로 그릴 수 있었다. 이 시기에 ‘꽃의 성모’와 ‘카네이션의 성모’를 그리기도 했다.



▣ 수태고지

이는 천사가 동정녀 마리아에게 신성한 임무를 알려주는 장면으로, 마리아는 못 믿겠다는 듯 놀란 모습이다. 그녀의 왼손은 이러한 긴장을 보여준다면, 오른손은 긴장을 풀어주는 역할을 하는데, 이러한 오른손은 베르키오 특유의 방식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또한 몸을 살짝 기울이고 있는 이 천사의 손을 따라가다 보면, 소실점을 볼 수 있다.



Web gallery of art

▣ 꽃의 성모와 카네이션의 성모

둘 다 인물 간의 거리로 정서를 표현한다. 신체적 가까움은 심리적 유대감도 나타내는 것이다. 둘 다 전통적인 기독교적 주제를 다루고 있다. 레오나르도는 매번 넓으면서도 섬세한 시각으로 대상을 묘사했고, 인상적 비율을 활용해 색조가 서로 섞여들게 했다.


 1480년, 28세의 레오나르도는 이미 그 명성이 피렌체에 널리 퍼졌다. 레오나르도는 그가 배웠던 것을 발전시키고 있었다. 우주의 신비와 수학을 결합한 세계관을 형성하고 있었고, 경험주의적 시도를 하고 있었다. 

 1481년에는 성 도나토 수도원에서 ‘동방박사들의 경배’를 주문했는데, 이는 레오나르도가 신앙과 인간 존재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 동방박사들의 경배

이 그림은 스케치 단계에서 중단했다가 황색 염료를 연구한 뒤 다시 그렸다. 또한 등장인물의 중심과 강조점만 밝게 처리했다. 동정녀 마리아를 둘러싼 인물들을 묘사한 부분에서 염세주의가 두드러진다. 이 그림은 밀라노의 군주인 루도비코 공작이 그를 불러, 그가 밀라노로 가야 했기에 완성되지 못했다. 어쨌든 당시 레오나르도가 그린 방식은 대상의 철학적 본질을 포착하는 방식으로 매우 대단한 것이었다.




밀라노

1482년 시작된 레오나르도 인생의 밀라노 시대였다. 그의 밀라노에서 첫 주문은 말 그림으로 루도비코 공작의 아버지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규모가 대단한데 말 높이만 무려 7m였다. 이 기마상은 미완성에 그치지만, 이 기념비적인 작품을 준비하며, 어려움을 맞게 된 레오나르도는 밀라노 궁정의 후원으로 작업장을 세우고 재능있는 젊은이를 모았다. 레오나르도는 제자들과 밀라노 교외를 산책하며 동식물을 연구하고, 강물이 흐르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새로운 호기심이 생기면 새 일에 착수했고, 하던 작품을  그만뒀다 나중에 흥미가 생기면 시작하기도 했다.

1483년, 레오나르도는 제단화를 의뢰받는다. 무염시태회의 주문으로, 성 프란체스코 성당에 놓으려고 했던 것이다. 바로 ‘암굴의 성모’이다.


▣ 암굴의 성모

1483년~1486년경

암굴의 성모는 ‘동굴의 성모’로 불리기도 한다. 어쨌든, 그림의 험준한 바위들은 예수가 오기엔 음침하고 적합하지 않아 보인다. 암굴의 성모는 레오나르도의 작품 중 빛을 가장 잘 조절한 작품이다. 작품의 빛은 인물들의 얼굴을 신성하게 비춘다. 또한 대상의 마음을 정확히 표현하려 몸가짐이나 표정 등을 활용하는 것이 레오나르도 인물화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 담비를 안고 있는 여인

1483년~1490년경

루도비코의 여인인 세실리아 갈레라니의 초상이다. 비스듬히 빛 쪽으로 여인이 눈을 돌린 모습은 플랑드르 초상화의 전형적인 기법이다. 그림에 같이 그려진 담비는 순결과 야생동물다운 관능을 동시에 표현하는 담비는 레오나르도가 즐겨 쓰는 상징물이었다. 이 담비는 관능과 순결, 선과 악, 믿음과 의심 같은 인간 본성이 지닌 복잡성과 모순을 전달한다. 또한 엑스레이 투시 결과, 세실리아의 어깨 뒤로 문 혹은 창문이 있었음이 밝혀졌다. 즉, 복원 과정에서 지워진 것이다.


 화가로 명성이 높아진 레오나르도는 루도비코 공작의 정부 세실리아의 초상화를 그리게 된다. 이 초상을 그린 후부터 루도비코 공작, 즉 루도비코 스포르차와 레오나르도는 가까워졌다고 한다.

담비를 안고 있는 여인은 이후 루크레치아의 초상화와 비교되는데, 루크레치아의 초상화는 전에 그렸던 세실리아가 딱 10년 정도 나이 든 모습 같다. 동일인이든 아니든 얼굴에서 강인함과 신중함이 보인다. 또한 20년 전 그린 세밀하고 사실적인 지네브라 벤치 초상화와 비교하면 다빈치의 표현 능력이 성숙해진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본질을 잡아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를 위해서 화가에게 손재주만으로는 부족하고 명민한 생각과 대상을 뚫어보는 능력, 즉 철학자나 과학자처럼 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게 바로 르네상스 정신이었다. 다빈치는 회화뿐 아니라 다른 분야에도 매진했다.


▣ 코디체 아틀란티코

아틀란티코 원고라고도 하는데, 이는 인체 구조에 대한 철저한 조사가 담겨있는 자료집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실은 자연과학적, 기계공학적 원고의 합본이었다. 여기에는 자동차의 원리와 설계, 잠수정, 비행 기계, 중력의 연구, 음향, 빛과 그림자의 문제, 평형, 천체, 지구, 전차, 포술, 축성, 운하, 흡상 펌프, 교량, 나침반, 지도, 지구 표면적의 측정, 교회 건축의 설계, 풍경 소묘, 초상 소묘, 색채론, 원근법의 연구, 미술학도를 위한 교훈, 동물담, 악기의 고찰 등 이 원고가 다루는 분야는 너무나 넓다.

포함된 것 중 특히 유명한 것은 대자로 펼쳐져있는 나체의 남자일 것이다. 이 남자가 레오나르도 스스로를 그린 것이라는 설이 있는데, 실제 바디빌더이기도 했던 그처럼 근육질에, 얼굴도 그와 매우 닮았다. 해당 그림은 마치 하늘을 나는 것처럼 팔을 쭉 펴고 있는데, 마치 하늘을 날고자 하는 듯하다. 실제로 비행은 레오나르도의 꿈이었다. 원고에서 비행체라고 적어둔 스케치가 있는데, 이는 오늘날 헬리콥터의 조상 격이다. 이외에도 물속에서 숨을 쉴 수 있도록 하는 도구 등이 있었다. 다빈치는 이러한 스케치를 고대 로마 물리학자 겸 건축가인 비트루비오의 논문 ‘건축’에 영감을 받아 만들었다고 한다. 이 중에는 실제로 만들진 못한 것들이 많지만, 그래도 그가 자연의 원리에 대한 전문적 지식이 있었고 역학과 물리학 법칙을 이해했음을 알 수 있다.


 밀라노에서 그는 여러 가지 기계를 설계하고 만들기도 했다. 루도비코 공작의 아들 ‘지안 갈레아초’가 1490년 1월 아라곤의 이자벨라와 올린 결혼식 축하연을 위해서였다. 그는 또한 정수 장치와 혁신적 군사 계획들도 고안했다. 이에는 요새 설계안, 투석기, 포탄에 방어하는 방법이 있었다. 물론 설계안 중 몇 개는 기술적 면에서 부족했다. 놀랍기는 하나 실현 가능성이 낮다는 것이다. 그래도 레오나르도가 과학을 공부했던 것은 사실이다. 젊었을 때 피렌체에서 브루넬레스키의 건축을 연구했고, 50세가 되던 해에는 친구였던 수학자 루카 파치올리에게 기하학을 배웠다.

 1495년, 다빈치는 ‘최후의 만찬’을 그리기 시작한다. 이는 어쩌면, 밀라노에서 그가 그린 것 중 최고의 걸작이며, 그에게 이후 활동을 위한 명성을 쌓는데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 최후의 만찬

이는 밀라노의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체 성당 벽화였다. 현재 복원되었지만, 원래 그림은 거의 사라졌다. 완성된 지 20년이 지났을 때 다빈치의 전기 작가 바사리가 희미한 얼룩만이 남았을 뿐이라고 지적할 정도였다. 원인은 다빈치가 그린 방식에 있었다. 다빈치는 벽화에서 새로운 답을 찾기 위해, 밑그림을 이중으로 그린 후 템페라와 유화물감을 섞어 썼다. 이는 전통적으로 벽화를 그리는 프레스코 기법과는 다른 방식이었다. 프레스코는 젖은 회벽 위에 안료를 칠해 회벽이 마르면서 그림이 보존되므로, 그 내구성이 뛰어났지만, 템페라와 유화를 쓴 ‘최후의 만찬’의 경우에는, 레오나르도의 생전에 이미 탈색현상이 나타났기 시작했다.

그림의 주된 특징으로는 입체감이 있다. 작품의 소실점이 예수에게 집중되도록 했기 때문에, 입체감은 물론, 우리의 시선 또한 자연스럽게 예수에게로 끌리게 된다. 이를 투시원근법의 완성을 보여준다고 하기도 한다. 예수 뒤로는 또 다른 배경을 배치해 창문 밖으로 끝없는 경치가 펼쳐지도록 했다. 종합적으로 이는 웅대하고 기하학적이며 수학적인 구성이라 할 수 있겠다.

왼쪽에서부터, 바르톨로메오, 작은 야고보, 안드레, 베드로, 가롯 유다, 요한, 예수, 도마, 큰 야고보, 빌립보, 마태, 유다, 시몬 순으로 그려져 있다. 각 제자들의 표정에서 사랑, 공포, 기대, 분노 등을 읽을 수 있다. 그에 비해 예수의 얼굴은 일부러 무표정으로 그려 놓았다. 예수의 모델을 찾고 싶지 않았던 다빈치는 그리스도의 얼굴을 어떻게 그릴지 생각하거나 알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러나 유다의 모델을 고르는 문제는 오랫동안 그를 괴롭혔다. 평범한 외모와 배신의 기미를 동시에 가져야 했기 때문이다.

프랑스가 밀라노를 점령했을 때, 루이 12세가 벽을 통째로 떼어 내어 그림을 프랑스로 가져가려 했다는 이야기가 그에게 들렸다. 계획이 실행되진 않았으나, 당시 다빈치의 명성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이후 건물은 마구간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 부분적으로 파괴되기도 했으나, 지금은 보수 작업을 통해 복구되어 있다.




두 번째 피렌체 시대

1499년, 프랑스 국왕이 밀라노에서 루도비코 공작을 몰아내며, 레오나르도도 밀라노에서 도망치게 된다. 그는 먼저 민토바로 갔다가 베니스로 향했다. 1500년, 그는 최후의 만찬으로 얻은 명성과 함께 피렌체로 돌아왔다.

1503년, 수천 명이 피렌체 산티시마 아눈치아타 성당에 몰려왔다. 바로 ‘성 안나와 성모자’ 밑그림을 보기 위해서였다. 밑그림뿐이지만 이는 예술계에 큰 반향을 불러왔다. 그 영향 중 하나로 미켈란젤로도 이 그림을 연구했음이 분명하다. ‘도니 톤도’에서 똑같이 꽉 들어찬 조각적 구성을 활용했기 때문이다.

10년 후, 1513년, 다빈치는 프랑스로 가, 이 ‘성 안나와 성모자’ 밑그림에 색채를 입혔으나 그림을 완성하진 못했다. 이 그림에는 조각과 회화과 완벽히 조화되어있다. 손과 머리 , 옷의 주름이 조화롭게 배치되어있고, 배경의 바위와 물은 웅장하면서도 생동감이 있어 생생하고도 당당한 자연의 모습을 전달한다. 밑그림에 색을 입히며, 아기 세례 요한을 빼고 대신 양을 그려 넣었다. 양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상징한다. 이는 1507년 라파엘로가 그린 ‘성가족’에서도 나타난다.

두 예술가는 같은 종교적 주제를 다르게 접근했다.

- 라파엘로 그림에서 마리아는 아기 예수에게 장래의 순교를 받아들이라며 부드럽게 밀어내는 것 같다.

- 다빈치의 작품에서 성모는 예수의 마음을 돌리려는 것 같다. 온 힘을 다해 아기 예수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려 한다.


PD-US/Web Gallery of Art 

▣ 성 모자와 성 안나

1508년경

이를 그릴 당시 레오나르도는 해부학, 지질학, 수력학 등에 깊이 탐구 중이었다. 해부학은 인간 생명의 본질과 그 재생의 비밀을, 지질학과 수력학은 그를 통해 끊임없이 지속되는 자연의 힘을 알고자 한 것이다. 결국 이 그림은 기독교적 교리와 자연과학적 인식의 결합으로 볼 수 있다.

이 그림에 대한 프로이트의 분석이 있는데, 사실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인 성 안나까지 그린 그림은 흔치 않다. 이것을 프로이트는 레오나르도의 출생에 얽힌 사연과 엮는데, 두 사람의 어머니를 가진 사실이 무의식적으로 표출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1504년, 피렌체 시장인 피에르 소데리니가 레오나르도에게 시청사 회의실 벽에 전투장면을 그려줄 것을 의뢰한다. 옆에서는 미켈란젤로가 카시나 전투 벽화를 그리고 있었다. 이는 피렌체 군이 숙적 피사 군을 기습하는 장면이었다. 피사 군은 아르노 강에서 쉬다가 놀란 모습으로 그려졌다.

1505년 6월 6일, 다빈치는 앙기아리 전투 벽화에 착수했다. 이는 피렌체와 교황령 연합군이 밀라노 군을 무찌른 전투였다. 여기서 다빈치는 새로운 벽화 기법을 다시 한번 도전하는데 결과는 최후의 만찬과 마찬가지로 대실패였다. 때문에 이 작품에 대해 남아있는 증거는 두 개뿐이다. 하나는 어떤 익명의 작가가 모사한 밑그림이고, 다른 하나는 이 밑그림을 바탕으로 루벤스가 모사한 것이다.



인생의 마지막

다빈치는 여생을 로마와 밀라노를 오가며 보냈다. 때문에 1506년부터 1513년을 2차 밀라노 시대, 1513년부터 1519년을 로마, 앙부아즈 시대로 부르기도 한다. 그렇게 로마와 밀라노를 오가며 여생을 보내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프랑스에 정착하여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또한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오로지 왕과 담소하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조르조 바사리의 저술에 따르면, 1519년의 봄날, 프랑수와 1세가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자신이 할 수 있을 만큼의 일을 다하지 못함으로써, 신과 인류의 뜻을 거슬렀다고 고백했다 한다.


▣ 세례자 요한

1513년경

세례자 요한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린 마지막 인물화로 여겨진다. 세례자 요한의 모습은 관능적이고 양성적으로 보이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 모나리자

1503년~1506년

이는 프란체스코 델 지오콘다의 부인, 리자 게라르디니 델 조콘다를 그린 초상화이다. 프란체스코 델 지오콘다는 피렌체의 상인이었다. 참고로 모나리자의 ‘모나’는 Mrs.를 가리키는 경칭일 뿐이다. 이 그림은 레오나르도 말년의 후원자였던 프랑수와 1세에게 팔려 프랑스 왕가가 소장하고 있었고, 이후 나폴레옹의 침실을 장식하고 있다가 1804년 루브르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또한 1911년, 이탈리아의 명작이 프랑스에 있는 것에 분노한 이탈리아인 노동자가 루브르에서 이 그림을 훔쳐 이탈리아로 가져간 사건이 있었는데, 2년 후 이 뒤틀린 애국자의 지저분한 방에서 발견되어 루브르로 돌아온다. 현재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입지를 가지고 있다.

다빈치는 몇 년간 이 그림에 매달려, 인물을 남성적이며 동시에 여성적으로 보이게 하는 특성과 명암을 연구했다. 다빈치의 다른 작품들처럼 전통적 정밀묘사에서 벗어난 이 작품의 배경은 부드러운 색조와 명암대조법을 사용해 분위기를 전달한다. 모나리자의 머리 뒤 소실점으로 모든 선이 집중되는 원근법이 사용되었으며, 삼각형 구도가 활용되었다. 또한 딱딱한 측면 초상을 자연스러운 3/4 포즈의 초상으로 전환한 계기가 되는 초상화이기도 하다. 또한 어두운 밑바탕에서 시작해 반투명한 유약을 엷게 겹겹이 칠해가며 3차원적 형체와 같은 착각을 주는 ‘스푸마토 기법’이 사용되었는데, 이를 통해 윤곽선이나 경계선이 없이 안갯속에서 떠 있는 듯한 효과를 보이며 인물과 배경간의 경계는 명확히 구분되지 않고 서로 녹아든다. 또한 모나리자의 신비로우며 매력적인 미소는 미술사 중 가장 폭넓은 연구와 무성한 추측을 낳았다. 다빈치는 대상의 내면이 없다면 그림은 죽은 거라 생각했는데, 이 말이 모나리자 미소의 담긴 비밀이 아닐까.



오늘날 화가를 꿈꾸는 사람들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그림을 보며 꿈을 꿀지 모른다. 그러나 그 외면만을 보아서는 다 본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외면만을 본 지망생들은, 그 뒤의 깊은 연구는 보지 못했기에, 그들은 그림의 영감은 받을지언정, 연구에 대한 영감은 받기 힘드리라. 그런데, 사실 레오나르도의 그림에 들어간 수많은, 그리고 깊은 연구들은 너무나 방대하다. 그런 것을 알고 나니, 화가를 지망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작품에 대한 연구를 더 열심히 해줬으면 하는 소망이 생긴다.

레오나르도의 이야기를 정리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썼지만, 그래도 찾아보려면 얼마든지 많은 것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대체로 그에 대해 아는 것이 화가로서의 단편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시간의 관계 상 나도 여기서 정리를 줄여야 하는 것이 못내 아쉽다. 레오나르도에게도 인생은 짧았으나, 우리에게도 그것은 마찬가지일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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