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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엽미술 May 12. 2021

파블로 피카소, 그는 예술가가 아닌 천재에 불과하다?

 그는 예술가가 아닌 천재에 불과하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조각을 만든 사람이 되는 자코메티는 피카소에 대해 이렇게 생각했다. 자코메티는 예술가를 천재 위로 보았기에 피카소를 저평가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현대미술의 황제로 불리는 피카소에게는 꽤 굴욕적인 평가로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자코메티가 그에 대해 이렇게 말한 것도 이해가 가는 측면이 존재한다.     


그림은 집안을 장식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이것은 적에 대한 공격과 방어의 전쟁도구이다

-파블로 피카소-     


 Art for art’s sake, 예술을 위한 예술이란 말이 있다. 그러나 피카소에게 예술이란 예술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때문에 이를 느낀 자코메티는 큐비즘 작가인 브라크와의 대화에서 피카소에 대해 그저 천재에 불과하다고 말했던 것이 아닐까. 


 그는 미술 교사의 아들이었다. 때문에 그가 어릴 때부터 그림에 흥미를 가지기 쉬운 환경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 그는 이미 십대 전반기에 사진과 같은 정확한 사생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 피카소의 스스로의 말에 따르면, 어릴 적에 이미 라파엘로와 같이 그릴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1881년생이던 피카소가 19세가 되던 1900년, 파리에서는 만국박람회가 열렸다. 피카소 역시 이 곳에서 새로운 세계를 목격하는 기회를 가졌다.   

 

청색 시대

 이는 피카소가 20세가 되던 1901년부터 1904년까지를 일컫는다. 이 시기에는 인디고나 코발트 블루 등 청색 계열의 색을 위주로 그렸기 때문에 청색 시대로 일컬어진다. 이 시대를 나타내는 키워드는 좌절감과 우울감일 것이다. 우울한 느낌의 색뿐만 아니라 소재 역시 우울한 느낌을 풍기는데, 주로 맹인 거지나 방랑자, 가난한 사람들 같은 소재를 선택했다. 당시에는 아직 인정받는 화가가 아니었기에, 더욱 이러한 우울감을 보이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청색 시대도, 피카소가 최초로 독창적 스타일을 창조한 시기라는 의의를 가진다.      

장미빛 시대

 24세가 되는 1905년부터 1906년까지가 바로 장미빛 시대이다. 이는 서커스 시대로도 불리는데, 그는 이 시기에 주로 서커스 무대를 세련된 장밋빛과 갈색 위주로 그렸다. 춥고 배고프던 피카소에게도 봄이 왔다는 것이다. 청색 시대의 좌절감을 끝나게 만들어준 것은 무엇이었을까? 피카소는 1903년부터 파리 몽마르트에 있는 아틀리에에서 그림을 그리는데, 파리에 정착하고 페르난드 올리비에라는 여인을 만난다. 그렇게 연애의 힘으로 좌절감을 극복한 이 시대는 감상적이고 로맨틱하다고 표현할 수 있겠다.     


니그로 시대

 1907년부터로 보는 니그로 시대는 드디어 입체파, 큐비즘의 전조로 볼 수 있겠다. 이 시기를 ‘세잔이즘적 큐비즘’으로도 부르는데, 이 시기에는 세잔의 영향과 흑인 조각의 영향을 모두 받은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흑인 조각의 영향으로 그림에서는 인물들이 아몬드형 얼굴로 그려지고, 세잔의 영향으로 기하 형태의 단순화를 보인다. 이러한 특징을 보이는 그림이 바로 「아비뇽의 처녀들」일 것이다. 이는 르네상스 이래로 내려오는 서구 미술의 전통을 마감했다고 평가받는다.      


▣아비뇽의 처녀들

 큐비즘 최초의 작품으로 여겨지긴 하지만, 사실 입체주의의 전형적인 특징들이 나타나는 그림은 아니다. 게다가 이 그림은 1907년에 만들어졌음에도 사실상 유명해진 것은 미국 뉴욕의 현대미술관이 이 그림을 구입한 1930년대나 되어서였다.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이 작품을 간판 작품으로 쓰면서 말이다.

 이 작품이 무너트린 전통이란 즉, 투시법에 기초한 대상의 정확한 재현이라는 근본적 규범이었다. 또한 이전에는 여체를 이렇게 추하게 그린 예가 없었다. 흑인 조각처럼 묘사된 여성의 얼굴은 괴기스럽기까지 하다. 또한 여체의 이러한 평면적 표현은 이후 분석적 큐비즘의 전조로 볼 수 있겠다.     



분석적 큐비즘

 1910년부터 시작되는 이 시기는 이제는 진정 큐비즘의 시작으로 볼 수 있다. 화면의 색은 대체로 갈색과 녹색조의 어두운 색들이 사용되었다. 화려한 색을 쓰지 않음으로써, 관람자는 색에 빠져들기보다는 분석, 해체되어 있는 형체에 더 주목하게 된다. 대상은 무수한 입방체로 나뉘어 나아가서는 배경과 인물의 경계마저 사라지고 만다. 분석되고 수많은 파편으로 분할, 철저히 해체된 사물의 형태는 대상의 인식이 어려운 정도까지 나아간다. 우리는 큐비즘을 입체주의로 번역하지만, 사실 입체주의 그림이란 오히려 입체감을 부정하고 대상을 무수히 작은 입방체로 나누어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이러한 분석에만 초점을 맞추어, 작품이라기보다는 형태 탐구의 결과물에 더 가까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이도 결국에는 예술로 볼 수 있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피카소도 그 스스로가 위대한 화가인지는 잘 모르겠다고 했으나, 위대한 사생가이긴 하다고 했다는 점. 그리고 그런 점이 그림에 반영되어 나도 그렇게 느끼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짐작을 해본다.     


종합적 큐비즘

 1913년부터 시작된 이 시기는 1916년까지 이어지는데, 이 시기에 비로소 파피에 콜레와 콜라주라는 새로운 미술의 기법이 도입된다. 조합된 종이나 마분지, 신문 문자 등을 '종합'하여 대상의 구조를 이루는 기법을 사용하게 된 것이다. 이전의 큐비즘이 단순화와 제한된 색, 기하학적 환원을 사용했다면, 종합적 큐비즘에 와서는 과도한 분석으로부터 벗어나, 물질 콜라주를 도입하고, 풍성한 색이 사용되기 시작하는 시기로 볼 수 있다. 특히 이 물질 콜라주는 어떤 이미지를 재현하는 역할도 하지만, 동시에 그 물질 자체가 현존하는 기능을 가짐으로써, 새로운 조형의 가능성을 열었다 할 수 있겠다. 화면에서의 물질 도입의 시초라는 점에서 피카소가 미술사적, 혹은 미술 조형사적으로 의의를 큰 의의를 남기는 부분이라 할 수 있겠다.


신고전주의 시대

 이 시기는 고전주의와 큐비즘의 공존 시기이다. 1917년, 제1차 세계대전을 피해 이탈리아로 건너간 피카소는 고전주의 작품의 영향으로 1920년대에 고전주의 작품을 그리게 된다. 이 시기부터 지금껏 같이 큐비즘을 이끌었던 브라크와의 화풍과 크게 다른 화풍을 구사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고전주의풍의 그림을 그리는 동시에 큐비즘 작업 또한 했기에, 이를 고전풍과 큐비즘의 공존기라고 본다. 나는 이러한 공존이 앞으로 내가 피카소의 전성기로 부르는 시기의 밑바탕이 되었다고 본다.     


피카소 시대

 1930년대 이후로 생각되는 이 시기를 나는 진정한 피카소의 시대로 부르고 싶다. 이 시기에는 다양한 여인상들과 함께 피카소의 대표작으로 뽑히는 「게르니카」를 그리기도 한다. 그러나 혹자는 「게르니카」가 방법록적인 측면에서 미술사적 가치를 지니진 않고, 이 그림이 유명한 것이 그저 그가 유명한 화가였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또한 40대에 이미 엄청난 부를 축적했던 피카소가 상업자본주의 시대에서 예술가와 예술을 상품화하여 얻을 이익을 위해 과대평가 및 신화화되었다고 말하기도 하며, 미술사적으로 가치 있는 작품은 20세기 초반에 한정된다고 말한다. 때문에 그 이외 기간에는 그저 수요자의 요구에 부응한 동일 제품의 대량생산이었다고 말한다. 물론 동의하는 부분도 많으나, 나는 오히려 20세기 초반 이후의 피카소를 그의 전성기로 생각한다.

 20세기 초를 지난 피카소는, 그가 이전에 추구하던 큐비즘의 이론이나 제한으로부터 꽤나 자유로워진다. 또한 1920년대의 고전주의와 큐비즘의 공존기를 통해 이 둘을 작품에 조화시키는 것을 깨우쳤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1930년대부터의 그림들에서는 큐비즘의 요소를 자유롭게 응용할 뿐만 아니라, 색채에도 제한이 없이 창조적인 색을 마음껏 사용한다. 때문에 나는 이러한 시기가 오히려 분석주의의 이념이나 그 색채의 제한 등에서 자유로워져 그 스스로의 그만의 화풍을 만들어낸 피카소의 전성기라고 부르고 싶다. 덧붙여 이 시기에 만난 그의 연인 푸랑수아즈 질로에게 피카소는 이렇게 말했다. 그가 어렸을 적 그의 어머니는 그가 군인이 된다면 장군이 될 것이고, 성직자가 된다면 반드시 교황이 될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질로에게 이러한 얘기를 하며 그는 이렇게 말했다.     

“대신 나는 화가의 길을 선택했으며 마침내 피카소가 되었다.”      

그가 진정한 피카소가 된 시기, 피카소 시대가 바로 이때가 아니겠는가.

 이후의 시기에도 피카소는 「한국에서의 학살」 같은 전쟁의 참혹성을 알리는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그가 사랑했던 여인들을 그리기도 했다. 또한 그의 작품 생활은 회화에만 그치지 않고, 조각, 도자 등까지 확장한다. 그러나 나의 개인적 소감에 그의 조각이나 도자 등은 그저 조각이나 도자를 매체로 이용한 회화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는 특히 도자에서 더 강했다. 어쨌든 그는 그의 1973년까지, 즉 92세까지의 오랜 삶의 대부분을 예술을 위해 사용했다. 그 목적이 예술이 아니었더라고 해도 말이다.


마치며

 피카소가 예술을 예술 외의 목적을 위해서도 사용하려고 한 것은 사실일 것이다. 자코메티의 말처럼 그는 예술을 하는 사람이지만, 예술가는 아니었을지 모른다. 그는 어떻게 하면 역사에 남을 사람이 될지 아는 영리한 사람이었다. 그는 역사에 남을 혁명을 위해 혁명의 재료들을 모아야 하는 것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재료를 바탕으로 혁명을 실천했다. 그런데 사실 그의 시대보다 더 빠른 변화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그러한 혁명의 재료를 알아보는 눈이 아닐까? 아니면 피카소를 알아본 사람들처럼, 혁명을 알아보는 눈이라도 필요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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