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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엽미술 May 19. 2021

요셉 보이스, 생각하기 싫으면 지구를 떠나십쇼.



모든 사람은 예술가이다

-요셉 보이스-


 20세기에서 가장 전위적인 현대미술작가를 뽑자면, 요셉 보이스를 뽑을 수 있지 않을까? 누가 죽은 토끼를 안고 3시간에 걸쳐 자신의 드로잉을 설명하고 있겠는가. 때문에 누군가는 이 사람의 작품을 보고 정말 미친 사람이었다고 평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여러 발언에서 예술을 혹은 그 개념을 일반화 및 보편화 시키는 동시에 확장시켰다고도 생각된다. 그가 하는 퍼포먼스에 있어서도 개념적인 요소가 상당히 많았는데, 이가 그가 개념미술 작가로 분류되는 이유일 것이다. 또한 그의 예술의 키워드를 두 가지 정도 뽑자면, 치유와 혁명일 것이다. 이 두가지 키워드를 그의 인생에서 찾아볼 것이다.


예술은 삶이며, 삶은 곧 예술이다

-요셉 보이스-


 1921년 5월 12일, 독일 크레펠트에서 태어난 그는 클레베에서 아비투어를 마치는데, 아비투어는 독일의 고등학교 졸업시험이자 대학 입학 자격 시험이다. 우리나라 수능과 비교되기도 하는데, 편하게 독일 수능 정도로 생각해두자. 그가 이 시험을 끝마치는게 바로 1940년인데, 사실 요셉 보이스는 의학을 공부하길 원했다. 그러나 때는 1940년대, 즉 세계 2차 대전이 일어나고 있었던 당시였다. 1941년, 막 성인이 된 요셉 보이스가 갈 곳은 군대일 수밖에 없었다. 언급되기 꺼려지는 경우도 있지만, 독일 태생이었던 그가 징병될 곳은 당연히 나치군이었다. 그는 공군 부조종사로 복무하였는데, 1943년, 그의 앞으로 예술 인생에 있어 중요한 사건을 맞딱드린다.

 요셉 보이스에게는 자전적 신화가 존재한다. 이는 그의 예술 활동에도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인데, 바로 1943년, 그가 탄 폭격기가 격추되었던 것이다. 당시 러시아의 크림 반도에 격추된 폭격기에서 요셉 보이스는 운이 좋게 살아남기는 했지만, 의식 불명 상태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 유목민족인 타타르족들이 자신을 발견해 지방을 바르고 담요로 감싸 치료해주었다고 한다. 이가 바로 동물성 지방과 담요가 이후 그의 예술 활동의 소재가 되는 기원이다. 이후 그는 얼굴에 고체 지방을 문지르는 행위를 보여주기도 하는데, 이가 이러한 경험에서 나온 퍼포먼스였다. 타타르족이 발라주고 감싸주었던 지방과 펠트 담요가 그에게 치유의 상징이 된 것이다. 바로 그의 예술의 두 가지 키워드 중 하나인 치유 키워드의 등장이다. 어쨌든 그렇게 살아돌아올 수 있었던 요셉 보이스, 그러나 나치에게 사고자를 전장에서 배제할 여유는 없었던 것 같다. 이런 사고 이후에도 1944년, 전장에 낙하산병으로 복귀했던 그는 서부전선에 배치 된 후, 1945년 5월 8일 패전 후 결국 영국의 포로가 되는데, 8월 5일에는 고향인 클레베로 돌아올 수 있었다.

 전후 세계에서 요셉 보이스가 선택한 것은 의학이 아닌 미술이었다. 클레베로 돌아오는 그는 1946년부터 먼저 클레베 미술협회의 회원이 된다. 또 1947년엔 뒤셀도르프의 미술대학에서 조소를 배우기 시작했다. 1953년이 되어 그의 나이 32세가 되어서야 그는 첫 개인전을 열었다. 이 전시에서 그는 나무조각과 불에 탄 재료를 사용했었다. 뒤셀도르프 미술대학과의 인연은 계속 되어 1961년부터는 그 곳의 교수가 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다음 해 그가 만나는 것이 바로 백남준이었다. 


사고하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지구를 떠나거라.

-요셉 보이스-


플럭서스

 존 케이지, 백남준, 요셉 보이스 등이 참여한 1960~70년대 반항적 전위 예술 운동이었다. 당시 2차 세계대전 이후 현대미술의 흐름은 미국을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었는데, 이 플럭서스는 1960년대 초 뉴욕과 유럽, 특히 뒤셀도르프에서 시작되었다. 이는 기존 예술, 문화, 제도에 대한 불신을 나타내는 반예술적이고 반문화적인 그룹 활동이었다. 이는 1950년대 잭슨 폴록으로 대표되는 추상표현주의의 지나친 형식주의에 대한 반발이기도 했다.


 요셉 보이스의 플럭서스 활동은 백남준을 만난 1962년부터 1965년까지 계속된다. 플럭서스 활동을 하며, 그는 우리 모두가 예술가이며, 예술을 통해 사회를 변혁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두 번째 키워드인 혁명의 등장이다. 여기에서의 혁명은 마르셸 뒤샹이나 앤디 워홀이 현대미술의 개념을 전복시킨 것을 넘어, 예술의 사회로의 확장을 선언한 것이다. 이에서 그는 다양성, 사회성, 소통을 강조하며 '사회적 조각', '예술작품으로서의 사회'라는 개념을 던져내었다. 그런데 이는 첫번째 키워드인 '치유'의 확장이기도 했다. 그는 왜 이런 혁명의 키워드를 가져왔을까. 그것은 그가 2차 세계대전의 상처를 치유할 것이 바로 예술이라는 직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회 조각

 요셉 보이스는 60년대 말, 조각의 개념을 정치 영역까지 확대하여 '사회 조각'이라는 개념을 세웠다. 또한 요셉 보이스 스스로가 실제 정치 활동까지 하며 자신의 사고관을 넓히기도 했다.


▣ 죽은 토끼에게 어떻게 그림을 설명할 것인가

1965년, 뒤셀도르프

 이 작품에서 그는 얼굴에 꿀과 금박을 바르고, 양쪽 발에는 펠트와 쇠로 밑창을 댄신발을 신었다. 이 몰골로 죽은 토끼를 품에 안고 세 시간여에 걸쳐 드로잉들을 보고 토끼에게 설명하는 샤머니즘적인 퍼포먼스 작품이었다. 관람객들은 보이스를 작은 창문을 통해서만 볼 수 있었다.

 그의 머리의 꿀은 생각과 관련이 있었다. 인간은 꿀을 만들 능력은 없지만, 생각을 하고 개념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 즉, 꿀은 새로운 개념을 만드는 인간 능력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능력을 통해 인간은 오래되고 병적인 본성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이러한 능력이 제대로 사용되지 못하고, 합리화에 빠지는 순간, 그것은 인간에게 치명적인 것으로 정치나 학문에 있어 인간을 죽음으로 몰고가는 것이었다.

  토끼가 그에게 재생과 부활의 상징이란 점은 유명하다. 그런데 또한 토끼는 그에게 육신화의 상징이었다. 토끼는 땅을 파서 지구의 그의 집을 만든다. 즉, 그렇게 해서 지구를 그 스스로 구체화 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는 토끼에게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그는 토끼에게 그림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 그저 훑어 보는 것이 필요할 뿐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또한 그는 완고한 이성주의로 무장한 인간보다 토끼가 더 잘 이해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플럭서스 활동 이후에도 그는 다양한 활동을 했다. 특히 주목받는 것은 1982년부터 시작한 7000그루의 떡갈나무 프로젝트였다. 이는 실제 떡갈나무 7000개를 거리에 심는 개념적이고 환경적인 생태 설치 작품이었다. 떡갈나무는 최소 800년의 수명을 가졌다고 하는데, 이 수명이 끝날 때까지 역사적 순간은 지속될 것이다. 그는 이러한 프로젝트를 통해 정치적 이데올로기나 자본주의, 공산주의, 혹은 산업화와 물질주의 아래 인간이 행한 폭력적인 황폐화를 벗어나고자 했다. 즉 떡갈나무를 심음으로써 자연에 생명을 부여함과 동시에, 사회생태학적으로도 생명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이 프로젝트를 끝마치지 못했다. 그가 1986년 1월 23일,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는 그의 아들은 벤첼 보이스가 1987년 5월, 마지막 나무를 심으며 마무리될 수 있었다.

 사실, 그가 사망하기 전에 그는 얼마 후 한국을 방문할 의사를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데, 그것이 실현되기 전에 그의 안타까운 사망 사건이 일어나, 한국으로써도 안타깝고 아쉬운 일이지 않을 수 없겠다.


요셉 보이스의 저작권

 또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요셉 보이스의 저작권에 대한 것이다. 그가 생전에 워낙 방대한 활동을 했기에 그의작품 활동들의 저작권도 상당했다. 이러한 저작권은 그의 유족에게 넘어가게 되었는데, 그들은 요셉 보이스 작품들의 자유로운 이용을 거부한다. 또한 이러한 저작권으로부터 나오는 수익이 상당하다보니, 오히려 이에 의존적이 되었다는 평도 있다. 이러한 모습이 요셉 보이스의 관점으로는 별로 좋지 않아 보일 수 있지만, 어쨋든 요셉 보이스 작품의 저작권에 있어서는 조심할 필요가 있겠다.


마치며

 Art for art's sake, 예술을 위한 예술, 굉장히 멋있어보이는 말이다. 그러나 예술이란 것이 대체 정확히 무엇일까? 예술의 개념이 확장됨을 멈추지 않는 이 시대에서 말이다. 오히려 누군가는 저 말에 취해, 예술이란 단어에 취해 현실은 보지 않고 있지는 않는가? 알코올 중독자가 알코올에 취해 현실에서 도피하듯이, 예술에 취해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것은 아닐까? 1945년 이후의 예술을 위한 예술 역시, 오히려 세계 대전의 상처를 회피하려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 시대에 예술을 통한 치유, 예술을 통한 사회의 치유를 말하던 요셉 보이스가 있었다. 그런데 우리 시대에도 많은 문제와 갈등이 존재한다. 또한 도피성 문화 역시 존재한다. 예를 들어 이세계물의 유행 역시 현 세계로부터의 도피를 원하는 욕구가 나오는 것으로 보기도 하지 않는가. 때문에 요셉 보이스를 다시금 되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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