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은 항상 쓰지만 여러 플랫폼들을 활용하다 보니 하나로 나를 표현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아쉽다. 물론 플랫폼마다 각자의 특성이 있어서 그에 따라 적절히 사용하는 것이 필요하겠지만 쓰고 나서 좋아하게 된 내 글들을 마음껏 내보일 수 없어 종종 속상하다. 어디까지 나를 오픈할 수 있을지를 생각한다. 브런치만큼이나 솔직하게 말하고 싶은데 아직은 용기가 없다. 혹시나 연관 검색으로 나의 브런치가 오픈되지 않을까 부담스럽다.
한번 글을 쓰면 에이포 용지 3장 정도를 쓴다. 조금만 써야지 하는데 글이라는 게 물꼬가 터지면 그다음 문장이 생각난다. 내가 가진 문장의 연결들이 소중해서 그다음을 놓치고 싶지 않다.
감사하게도 출판사에서 책 리뷰를 써달라는 제안이 종종 들어온다. 보통 신앙과 상실에 관련된 책이다. 큰일들을 겪어보니 다른 것은 상대적으로 느껴져서 비교적 솔직하게 쓰는데 그것도 남에게는 큰 것이었다. 자신을 치유하는 글쓰기란 나를 드러내는 용기에서 오는 것일 텐데 나는 아직 부분적인 용기로 살아간다. 나는 무엇이 두려운 걸까?
나를 아끼는 오빠가 내 글은 힘든 사람이 보면 힘을 얻는 글이라고 했다. 글의 호흡이 간결하고 명확한 용어들을 사용해서 진부하지 않다고 말했다. 나에 대한 관심이 고마웠다. 사람은 타인의 상실과 결핍을 통해서 자기를 비추이고 힘을 얻는 존재가 아니던가. 나의 상실이 누군가에게 살아갈 용기가 된다면 그 또한 감사한 일이다.
돌싱글즈에 나왔던 소라 님이 했던 말이 스치듯 기억났다. 자신이 커리어적으로 인정받고 있지만 이혼이라는 아픔이 있었다고. 그래서 돌싱글즈에 나와서 아픔을 겪는 사람들이 밖으로 나올 수 있도록 용기를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나도 그렇게 살고 싶었다. 그런데 나의 존재를 알지만 나를 모르는 불특정다수에게 상실을 드러내야 하는 게 아직은 망설여진다.
그날은 나의 생일이었다. 내가 가입한 시모임에서 내가 겪은 폭력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내 마음이 생각보다 담담했던 기억이 난다. 안전하고 고마운 공동체에서 정말 큰 위로를 얻었다. 나의 밝음 뒤에 가려진 수많은 상실과 상심을 극복하고 나아가는 과정들에게 감사했다. 모든 사람이 타인의 상실을 포용하고 그저 한 존재로 존재할 수 있도록 조금의 곁을 내어준다면 참 좋은 텐데 세상이 호락호락하지 않다.
쯔양은 어린 나이에 내가 겪은 일의 몇 배가 되는 고통을 겪은 것 같다. 그녀가 겪은 일들을 보면서 어찌나 나와 오버랩이 되는 것인지. 가해자가 죽고 나서 그녀가 비로소 느꼈을 자유로움이 느껴졌다. 가해자가 죽어야지만 끝나는 그 폭력 속에서 한 20대 여자가 버텨야 할 고통의 무게가 그 자신을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했던 그녀의 결핍에 연민을 느꼈다. 그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술집 여자로 만난 거면서 왜 억지로 한 것처럼 말하느냐는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왜 이렇게 세상은 잔인한 걸까? 그리고 이제라도 드러나서 다행이다. 쯔양의 남은 삶은 맘편하게 행복하게 살기를 진심으로 응원한다.
나의 미국 친구 J에게는 스스럼없이 나의 상황에 대해서 말할 수 있었다. J는 나에게 그런 사람과 이혼할 수 있어서 기쁘다고, 폭력은 절대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한국인 앞에서는 주눅이 들지만, 미국인 앞에서는 내가 이렇다고 말할 수 있어진다. 한국인은 정을 가졌지만, 남들 하는 만큼 하기를 바라는 것 같다.
가끔 내 친구들은 내가 이혼했다는 걸 까먹게 된다고 했다. 한국인이라도 나를 아는 사람들은 나를 안다. 내가 나를 알면 나를 이해한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나를 이해한다.
그리고 나는 꽤 동안이라 나를 20대로 보는 사람이 많기에 보통은 결혼을 안 했다고 생각하고 나를 대한다. 결혼할 때 뭐가 필요한지 예식장부터 시작해서 세세히 말해준다. 그러면 나는 그냥 잠자코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들어준다. 속으로는 억울하다. 남들은 몇 년씩 동거해도 혼인신고를 안 하면 헤어지면 싱글인데 나는 망할 혼인신고를 해서 돌싱이 된다는 게.
야속하게도 인스타그램은 내가 이혼한 것을 다 알고 있는지 알고리즘을 통해 돌싱의 삶을 드러낸 이들의 콘텐츠들이 종종 뜬다.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나 보다. 이혼한 지 얼마 안 됐을 땐 세상 사람들 모두가 나의 이혼을 알기를 바랐다. 일일이 설명하는 건 너무 지겨운 일이다. 그런데 또 내가 직접 얘기하기는 껄끄럽다. 이혼이 뭐 대수냐고 하지만 이혼한 사람은 그렇게 말하기가 쉽지 않다.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될 것을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 자신의 이야기를 출판으로 엮어낸 사람들이 새삼 대단해 보인다. 존경스럽다. 그들은 자신을 지키면서도 어떻게 상실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일까? 나는 아직 더 단단해져야 할 시간인 걸까? 내가 좋은 사람을 만나 꿈꿔온 가정을 이룬다면 나는 내가 겪은 상실에 대해 공개적으로 말할 수 있게 될까?
안정이란 무엇일까? 삶은 계속되고 인생에서 풀어야 할 숙제들은 매번 새롭게 찾아온다. 생명이 붙어 있는 한 괴로움은 피해 갈 수 없는 거라서 뚫고 나갈 힘이 필요하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전보다 극단적이지 않고 상황을 받아들이고 논리적으로 생각하려는 에너지가 생겨났다는 것이다. 한 번에 확 자라나면 좋으련만 시행착오를 겪는다.
사실은 다들 웃고 있지만 남몰래 숨기며 살아가는 게 있을 거다. 그게 어른의 삶인 거 같기도 하다. 나는 내가 수긍하지 않는 말들을 듣고 싶지 않다. 조언을 들을 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내 인생을 다 알지도 못하면서 이러쿵저러쿵 하는 게 싫다. 이런 면에서 아직 나는 너무 여리고 어리고 지혜가 부족하다. 나이가 더 들면 삶의 많은 일에 여유가 생겨나기를 바란다.
그래도 매번 다짐한다. 포기하지 말아야지. 늦더라도 의지를 내야지. 오히려 고난 중에 진정한 친구를 알아볼 수 있는 거니까 또 살아내야지 다짐한다.
여전히 내 안에는 옳고 그름의 기준을 내리고 싶고, 빨리 결정이 났으면 하는 조급함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안전하다고 느끼고 싶은 걸까. 하지만 바운더리를 세우고 나의 영역을 지키는 것은 소중한 거니까. 내 인생은 내가 경작해 나가는 것이니까. 하면서 주체적으로 선택하는 연습을 한다.
흔히들 말하는 '패를 까보이고 싶지 않은' 욕구인 것 같다. 다 자기의 것을 숨기고 살아가겠지만 왜 나는 이런 것에 죄책감을 느끼는 것인지 정에 너무 약하고 순진하다.
인간에게 상처받으면서도 그래도 믿고 싶은 마음인 걸까? 나는 아직 이혼을 약점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혼을 통과하고 싱글로 살아난 지금의 내 모습이 좋고 맘에 들면서도 이혼이라는 게 없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과 후회가 있다. 쓰다 보니 지금의 나의 과정은 당연한 거 아니겠냐 싶기도 하네.
어쨌든 나를 지켜봐 주고 응원해 주는 이들이 있다는 게 감사하다. 내가 잘 되기를 바라고 행복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감사하다. 인간이 어떤 인간을 무조건으로 아끼고 사랑할 수 있다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그래도 내 안에 있는 좋은 것들을 봐주고 신뢰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좋다. 나는 신뢰를 받으면 더 잘하고 싶어 진다. 나를 통제하려는 일말의 기미를 잘 견뎌내지 못한다. 이런 질문을 하다가 보면 나는 지금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고민한다.
세상의 모든 짐을 들고 벌게진 손으로 아등바등 살아오다가 모든 짐이 한 번에 다 불타 없어지는 것을 경험하고 그제야 나의 벌게진 손을 볼 수 있었다. 그러니 불타 없어지는 경험이야말로 나에게 자유를 준 것이다. 감당할만한 고통과 시련이었다면 나는 여전히 벌게진 채로 온몸을 부르르 떨면서 버티는 인생으로 매일을 불안 속에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지나고 보니 결국 고통을 버티고 살아있어 강해진 것도 사실이다.
돈이 있어야 살아갈 수 있는 세상에서 마냥 시간이 가는 것만 기다릴 수는 없다. 불안과 걱정이 몰려올 때 모든 게 다 사라져 버렸으면 하는 생각이 종종 들기도 한다. 예수님은 대체 언제 재림하시는 건지 주님을 재촉하기도 하지만 스스로 나를 놓지 않으려 애쓰는 것만으로도 나는 나 자신에게 무한 칭찬을 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