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굿모닝선샤인 Jan 25. 2022

나의 즐거운 생활

내가 육아를 버티는 방법들


배움을 좋아한다. 새로운 분야를 배우는 일이 즐겁다. 결혼 전에는 꽃꽂이를 배우고 운동을 하고 영어회화 클럽에 주기적으로 참여했다. 살사도 반년 정도 배웠다. 새로운 배움을 마주하면 삶에 활력이 생겼다.


엄마가 된 후에는 배움의 문이 좁아졌다. 껌딱지를 데리고 어디에도 갈 수가 없었다. 속상했다. 아이 동반 영어회화 모임과 책모임을 만났다. 매주 한 번씩 돌아가며 각 집에서 만났다. 아이는 또래 친구를 사귀어 좋았다. 배움에 심취한 사람들을 만나 영어로 삶을 나누는 일이 즐거웠다. 책을 소재 삼아 신나게 수다를 떨었다. 그 시간들이 엄마 역할에 지친 나를 살게 해 줬다. 숨통이 트였다.



책 읽는 것을 좋아한다. 책장을 펼치면 시공간을 넘어 다른 세상으로 여행을 떠날 수 있어 좋다. 집 안에 발 묶여 비행기는커녕 가까운 곳으로 여행도 못 가는 지금. 책은 큰 위로를 준다. 책장을 펼치면 사막으로, 추운 아일랜드로, 거친 바다로, 조용한 숲 속으로 나는 언제든 어디든 떠날 수 있다. 조용히 혼자 숲으로 떠나고 싶으면 <월든>을 펼친다. 찬란한 태양과 나른한 낮잠이 그리우면 <콜미 바이 유어 네임>을 꺼내 든다. 지루한 현실은 잊힌다. 마법 같은 순간이동을 거친다. 어느새 남부 이탈리아의 익어가는 살구나무 아래 앉아 있는 나를 발견한다.



독서모임을 좋아한다. 모임을 통해 앎의 스펙트럼을 넓힌다. 혼자서는 절대 읽을 수 없었을 <코스모스> 같은 무거운 책들도 읽었다. 혼자 읽는 것과 차원이 다르다. 같이 공감하며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같은 책을 읽는 동지들이 있어 든든하다. 우리는 서로의 독서를 응원해주는 버팀목이다. 어느새 책 읽기를 넘어 서로의 일상과 인생을 응원하는 공동체로 살아간다.



피아노를 좋아한다. 작년 25년 만에 다시 피아노 배우기에 도전했다. 늘 마음에 담아두고 그리움처럼 남아있었다. 다시 시작할까 머뭇거렸다. 이 나이에 시작해서 뭐하나 고민이 들었다. 그러다 용기를 냈다. 작년 4월 어느 따뜻한 날, 새로 오픈한 피아노 학원에 전화를 걸었다. 더듬더듬 건반을 눌러봤다. 12살에 그만뒀던 피아노였다. 악보 보는 법도 잊어 까막눈이 되었다. 천천히 더듬거려 보았다. 피아노 소리가 하나하나 울려 퍼지자 깊게 묵혀있던 음악에 대한 짝사랑이 물결을 이루며 일렁거린다. 그렇게 매일 연습과 레슨이 시작되었다. 아이 둘을 등원시키자마자 아침 10시 피아노 연습실을 찾는다. 그 시간을 좋아한다. 커피를 한잔 내린다. 혼자 피아노를 마주한다. 엄마가 아닌 진짜 내 모습을 찾는 시간이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나만 생각하며 연주를 한다. 내가 살면서 좋아했던 노래들을 연주한다. 그 순간을 추억하고 그때의 나를 기억한다. 피아노는 이제 내 삶의 또 다른 희망이자 에너지다.



혼자 여행하는 것을 좋아한다. 처음에는 같이 갈 사람을 찾았다. 시간을 맞추기가 어려웠다. 시간이 맞는 사람을 찾기 위해 기다렸다. 그러다가 내 인생의 쉬는 날들이 그렇게 흘러가는 게 아까웠다. 혼자 다니기 시작했다. 꼭 누가 함께 있지 않더라고 떠날 수 있는 용기를 내기 시작했다. 한번 혼자 해보니 할만했다. 결혼 전 제주도를 자주 갔다. 겨울 방학마다 올레길을 걷기 시작했다. 서귀포는 따뜻해서 겨울을 즐길 만했다. 혼자서 걷고 또 걸었다. 미래가 불안한 30대 초반이었다. 달래주고 싶었다. 푸르게 펼쳐진 산을 오르고, 바닷물이 찰랑거리는 해변을 걸었다. 그 길 위에서는 숱한 고민과 걱정들이 사소하게 느껴졌다. 한동안 걷고 나면 마음은 잔잔해졌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솟아났다. 올레길은 나에게 마음의 안식처였다.


첫 아이 돌 무렵, 남편에게 혼자만의 시간을 달라고 했다. 1박 2일 짧은 시간이 생겼다. 토요일 새벽, 지체 없이 김포공항으로 향했다. 새벽 찬바람이 온몸을 들뜨게 했다. 혼자 여행을 가다니! 잃어버린 날개가 등 뒤에서 돋아나는 게 느껴졌다. 몸에 공기가 가득 차 떠오르는 것 같았다. 추운 공기 속에서도 날아갈 듯 가벼웠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책 한 권을 들고 비행기에 올랐다. 새벽 비행기는 조용했다. 태양이 떠오르고 나는 좌석에 기대어 책을 읽어나갔다.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협재를 찾았다. 바다가 보이는 카페 창가에 자리하고 책을 펼쳤다. 내가 꿈꾸던 광경이었다. 관광지를 돌고 맛집을 찾아가는 일정이 아니었다. 그냥 바다를 원 없이 볼 수 있는 창문 하나, 그게 소박한 소망이었다. 따뜻한 라테 한 모금을 마셨다. 책을 읽다가 올려다본 창문 밖 풍경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한동안 시선을 멈추었다. 탁 트인 바다에는 파도가 넘실거렸다. 나에게 다가왔다가 뒤로 갔다가 반복했다. 시원한 찰싹거림이 내 주름진 마음의 나이테를 씻어주는 듯했다.


'혼자서 책을 읽고 바다를 보고 커피를 마실 수 있다니!

주위에 신경 써야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니!'


결혼 전에는 당연했던 혼자라는 자유였다. 지금은 감탄해 마지않는 보석 같은 시간, 금세 사라지고 마는 신기루가 되었다.



인생은 날마다 벽에 부딪힌다. 두 아이의 장난과 다툼으로 해프닝은 끊임없다. 둘째가 뛰어다니다 벽 모서리에 부딪혀 코피를 흘렸다. 얼굴에 멍이 들었다. 교대로 감기에 걸려 밤새 간호했다. 장난치다가 그릇을 와장창 깨뜨렸다. 그 벽 앞에 무력했다. 육아하며 만나는 넘을 수 없는 수많은 벽을 몸으로 쓰러뜨리려고 안간힘을 썼다. 좌절했다. 이제는 안다. 벽을 만나면 쉬어야 한다는 것을. 그 앞에서 심호흡을 크게 한다. 내면의 힘을 기르기 위해 배우고, 읽고, 여행을 떠난다. 혼자 있는 시간 동안 내면을 다진다. 가슴속 단단해진 코어 힘을 모아 벽을 한발 한발 오른다. 벽에 올라서면 또 다른 벽들이 내 길 위에 놓여있는 것이 보인다. 다시 엄마로서 길을 걷는다. 엄마로만 살지 않고 내 이름으로도 산다. 온전히 나일 수 있는 시간을 찾아 모은다. 그렇게 오늘도 걸어간다.


매거진의 이전글 맥주와 육아의 상관관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