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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광일 Aug 15. 2021

불의 왕

까마득한 옛날, 하늘 세계와 땅의 세계가 분명하게 나눠지지 않던 시절, 천사와 악마는 시도 때도 없이 싸우곤 했다. 마침내, 하느님이 둘 사이를 떼어 놓고는 활화산을 경계로 동쪽은 천사가 살고 서쪽은 악마가 살기로 정하였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 활화산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불칸이라는 마을이 생겼다.

천사는 인간을 좋아하여 이 마을에 자주 내려가 축복을 내렸다.   


마을에는 미르와 연이라고 불리는 소년과 소녀가 살았다.

소년은 또래보다 힘이 세고 키도 컸으며, 용감했다. 소녀는 예쁘지는 않았지만 친절하여 붙임성이 좋았다. 소녀의 심성에 소년은 소녀를 사랑했다. 소녀도 소년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봄이 온 어느 날이었다.

아침저녁으로 상쾌한 바람이 불었고, 천진난만한 어린아이 웃음처럼 명랑한 새소리가 들렸다. 천사도 나팔을 불며 대지에 축복을 내렸다. 사랑의 기운이 온 마을에 가득했다. 이날 따라 천사의 나팔 소리는 유난히 커서, 사랑의 기운이 활화산을 넘어 서쪽 세상까지 퍼졌다.  

악마는 불안감을 느꼈다. 서쪽의 어두운 세상에서 잠을 자던 악마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악마를 태운 먹구름이 서쪽 하늘에서 나타나 순식간에 불칸 마을의 하늘을 가득 채웠다.  

"이대로 당하고 있을 순 없지!"

악마가 외치는 소리가 천둥처럼 울렸다.

천사는 자신의 연주에 빠져서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여전히 언덕 위에서 하프를 뜯으며 노래를 불렀다. 

악마는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자기 키만 한 활에 얼음 화살을 물렸다.

 

악마는 열세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과 그 보다 어린 소녀가 아름드리 느티나무 그늘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소년은 소녀에게 꽃으로 만든 왕관을 씌워주고 있었다. 그  소년과 소녀는 미르와 연이었다. 왕관은 노란 민들레, 씀바귀, 냉이꽃으로 만들었다. 하얗고 노란 꽃은 소년의 따뜻한 마음이 담겨 있었다.


우르르 쾅쾅쾅.

화살이 요란한 천둥소리를 내며 날아갔다. 그제야 천사가 깜짝 놀라 하늘을 보았다.

"악마. 네. 이 녀석. 내가 요졸을 내줄 테다."

천사가 날개를 힘껏 펼쳐 하늘 위로 올라갔다.

하늘 위에는 악마의 군대가 새까맣게 진을 치고 있었다. 모두 활과 화살을 들고 불칸 마을을 겨냥하고 있었다. 얼음 화살이 비처럼 일제히 날아갔다.

천사는 악마의 군대를 보고 깜짝 놀랐다. 전쟁이 다시 시작된 것이었다. 천사는 하늘 높이 올라갔다.

'어서 빨리 다른 천사들을 불러야겠다.'


언덕에는 소년이 쓰러진 소녀를 붙잡고 어찌할 바를 못하였다.

방금 전까지 들꽃처럼 웃던 소녀가 갑자기 쓰러진 것이다.  

"연아. 정신 차려."

소년은 소녀를 흔들어 깨웠다. 조금 전 악마가 쏜 얼음 화살에 소녀가 맞은 것이다.

"미르 오빠."

소녀가 보랏빛 입술을 파르르 떨며 겨우 말을 내뱉었다.

"조금만 참아. 내가 의원님께 데려다줄게."

소년은 소녀를 업고 마을 아래 의원의 집으로 뛰어갔다.


의원의 집은 마을에서 숲으로 들어가는 길에 있었는데, 거북이 모습을 하고 있었다. 마을의 의원은 몹시 나이가 많았다. 나이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을에서 제일 나이가 많은 노인도 의원의 나이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가장 현명한 사람인 건 분명했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나 어린 사람들이나 궁금한 것은 의원을 찾아가 물었다. 의원은 누구든지 친절히 알려주는 인자한 할아버지였다.

의원의 집에는 이미 입구부터 많이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사람들은 다 달랐지만, 모두 같은 모습이었다. 깊은 잠에 빠진 것처럼 의식이 없었다. 애벌레가 번데기가 되어 깊은 잠에 빠진 듯이 사람들은 눈을 감고 깨어나지 못했다.

"할아버지. 연이는 괜찮을까요?"

소년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의원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악마의 화살에 당했구나. 이것은 보통의 약재로 구할 수 없단다. 정열의 샘물로만 고칠 수 있지."

"그것은 어디서 구할 수 있나요?"

의원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쉽게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야. 불의 왕이 사는 불의 궁전에 있단다. 그곳은 활화산 깊은 곳에 있는데 그 깊이가 너무 깊어 그 아래를 볼 수도 없단다."

"그래도 가겠습니다."

소년은 단호하게 말했다. 의원은 소년의 강렬한 눈을 보고,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그럼. 따라와라."

의원은 숲 속 앞에 있는 창고로 소년을 데리고 왔다. 창고문을 여니 선반에 빨간, 파란, 주황색의 형형색색의 약물이 있었고, 용의 발톱이나 마녀의 이빨과 같은 희귀한 것들이 유리병에 담겨 있었다.

"이걸 빌려주마."

의원이 검은 장막을 걷자, 그곳에서 거대한 기구가 드러났다. 기구에는 황금용이 하늘을 날아올라갈 듯 생생한 필치로 그려져 있었다.

"이걸 타고, 화산 속으로 들어가거라. 이 기구는 용의 가죽으로 만든 거야. 아마도 불의 궁전까지 가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다만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단다."

"조심할 거요?"

"그곳엔 마녀가 살고 있단다. 마녀는 다양한 모습으로 변신하여 널 유혹할 것이다. 절대 유혹에 넘어가선 안된다. 알겠니?"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소년이 떠나는 길에 몇몇의 마을 청년들도 따라갔다. 그들 중에는 화가, 시인, 대장장이도 있었고, 정치가도 있었다. 하지만 기구가 크지 않았기 때문에 소년을 포함하여 열두 명만이 마을을 떠났다.

기구는 동풍을 타고 날아갔다. 이 정도 기세면 하루 이틀이면 도착할 수 있을 터였다.

화산이 가까워지면 질수록 소년은 마음이 더욱 떨렸다. 그럴수록 마을에서 자신을 기다릴 연이를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연아. 조금만 기다려.'

소년은 아픈 소녀의 모습을 생각하며 속으로 외쳤다.

소년은 뜬 눈으로 밤을 새우다가 새벽에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소년은 소녀와 함께 용을 타고 날아오르는 꿈을 꿨다.


쿵.

쿵.

쿵.


소년은 엄청난 충격을 느끼고 놀라 화들짝 잠에 깼다. 기구에 있던 마을 청년들도 놀란 목소리로 웅성였다. 사람들 중 하나가 외쳤다. 곳곳에 짙은 안개가 싸여 있어서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었다. 누군가가 답답한 마음에 외쳤다.

"뭐야? 무슨 일이야?"

대장장이 털보 아저씨가 그 물음에 답을 하듯이 용감하게 기구 끝에 달린 밧줄을 타고 내려가 아래를 살펴보았다.

"한 사람만 도끼를 들고 따라와."

기구는 나무로 만든 탑에 걸려 있었다. 털보 아저씨가 기구에 매달려 있는 동안, 시인 아저씨가 도끼를 가져와 건네주었다. 시인 아저씨의 하얗고 부드러운 손이 달빛에 유난히 차갑게 보였다.

털보 아저씨는 땀을 뻘뻘 흘리며 밧줄을 끊어 내기 시작했다.

그 사이 안개가 서서히 걷혔다. 기구는 나무로 된 성채 위에 걸려 있었다. 그곳은 산적들의 본거지였다.

"빨리 서둘러!"

정치가 아저씨가 명령하듯 외쳤다.


기구 바로 아래서 커다란 함성소리가 들렸다. 산적들이 삽시간에 둘러쌌다. 털보 아저씨가 밧줄을 다 끊어내기도 전에 산적들 몇 명이 기구 위로 올라왔다. 저항하였지만, 싸움으로 단련된 산적들에게 싸움으로 이길 수 없었다. 기구는 산적들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마을의 청년들은 포로가 되거나 죽임을 당했다. 소년은 끝까지 저항했다.

산적 하나가 소년을 죽이려고 칼을 들이댔다.

"그 아이는 건드리지 마!"

산적들 무리 속에서 앳된 목소리가 들렸다. 머리에 양털로 짠 모자를 쓴 아이였다. 산적 두목의 첫째 아들이었다. 산적은 칼을 거두고 머쓱한 표정으로 소년을 풀어주었다. 아이는 소년에게 다가가 먼저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난 나합이라고 해. 너 이름은 뭐니?"

"난. 미르야. 올해 열세 살이야."

"그럼. 나보다 형이네. 나도 형이 있었으면 했는데, 내 형이 되어줄래?"

소년도 산적 아이가 마음에 들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여 소년은 산적 아이와 형제가 되었다. 소년은 산적 두목의 아이와 친했기 때문에 산적 중 어느 누구도 소년을 괴롭히지 않았다. 소년은 산적 아이와 매일 말을 타며, 놀았다. 하지만 저녁때만 되면, 마을을 바라보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 산적 아이는 그런 소년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 산적 아이는 소년을 진짜 형으로 생각했다. 마침내, 소년이 산적 마을에 붙잡힌 지 한 달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산적 아이가 어둑어둑한 밤 소년을 조용히 불러 말했다.

"미르 형. 내일 그믐달이 될 때, 이곳 산채가 빌 거야. 기구는 동쪽 창고에 있어. 그다음엔 알아서 해."

산적 아이는 그 말을 하고 조용히 돌아서서 걸어갔다. 산적 아이의 눈은 초승달처럼 가냘프게 떨렸다. 소년은 산적 아이의 눈이 눈물로 빛나는 것을 보았다.


다음 날 저녁, 평범한 사람들은 잠자는 시간, 소년은 잠을 자는 척하고 눈을 감고 있었다.

어디선가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났다. 산적 아이의 말대로 산적들이 산채를 떠나고 있었다. 소년은 깨금발로 소리를 내지 않고 걸어가 동쪽 창고에 있는 기구를 찾았다. 기구는 처음 이곳에 왔던 그대로 온전히 있었다. 뿐만 아니라, 모험에 필요한 물이며 먹을 것들이 쌓여 있었다. 산적 아이가 소년을 생각해서 준비해 둔 것이었다. 소년은 산적 아이의 정성에 눈물이 핑 돌었다.

소년은 여행에 필요한 물건들을 차근차근 기구에 실었다. 천천히 기구에 올라탔다. 바람도 소년을 돕는지 동풍이 불었다. 소년을 태운 기구는 천천히 바람에 미끄러졌다.


화산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화산은 분노한 짐승처럼 검고 뜨거운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소년은 의원 할아버지가 알려준 대로 사람 한 명이 들어갈 정도 크기의 물통에 들어가 앉았다. 기구는 용의 가죽으로 되어 있어서 불에 타지 않았지만 열기까지 완전히 막아주지 않았다. 화산 구덩이 속에 들어가자 열기 때문에 물통의 물이 말라갔다.

화산 입구에 들어가자 열기는 많이 사라졌지만, 물통에 물은 남아 있지 않았다.

소년은 갈증을 느꼈다.

그때 마술 빗자루를 탄 할머니가 나타났다. 마녀였다.

"꼬마야 어디 가니?"

소년은 귀를 막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꼬마야. 목이 마르지 않니?"

소년은 목이 말라서 '네'하고 대답할 뻔했다. 소년의 마음을 읽은 마녀는 기구 안에 들어와서 물 한 바가지를 소년 얼굴 앞에 갖다 댔다.

"목이 마르면 물 한 모금 마셔 보렴. 괜찮단다."

'물 한 모금 정도는 괜찮겠지.'

소년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마녀로부터 물바가지를 받아 한 모금 마셨다. 물은 얼음을 띄운 듯 이가 시리도록 차가웠다. 그리고 달콤했다. 소년은 어느새 물바가지를 벌컥벌컥 마셨다.

"한 바가지 더 주랴?"

"네."

소년은 두 번째, 세 번째 바가지 물을 연거푸 마셨다. 갈증이 사라졌는데도 멈출 수가 없었다. 소년은 물을 마시면 마실 수록 기억이 사라짐을 느꼈다. 자신의 이름도, 자신이 태어난 곳도, 사랑하는 연이도 기억나지 않았다. 덩달아 의무감이나 책임감도 사라졌다. 소년은 천근만근 같은 마음의 짐이 사라지자 오히려 기분이 좋아졌다.


마녀는 소년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갔다. 소년은 마녀의 하인이 되었다. 마녀는 소년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소년은 성실했고, 불평도 하지 않았다. 마녀의 청소는 물론이고, 마녀를 위해 따뜻한 목욕물도 데웠으며, 안마까지 정성껏 해주었다. 마녀는 소년이 가져온 물건들을 모두 화산 구덩이 밑으로 던져 버렸다. 소년이 다시 기억하지 못하도록 한 조처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마녀가 약초를 구하기 위해 집을 떠났을 때, 소년은 평소처럼 마녀의 부엌을 청소하고 있었다. 소년은 식탁 다리 밑에 낀 쓰레기를 빼내려다가 찬장을 건드렸다. 찬장이 흔들리며 유리병 하나가 떨어져서 깨졌다.

소년은 유리조각을 조심히 집어 들었다. 유리 조각 사이에 노란 민들레가 잠들어 있었다.

소년은 알 수 없는 슬픔을 느꼈다.

'왜 눈물이 나는 것일까?'

소년은 눈물을 참으려고 했지만 한번 쏟아진 눈물은 그칠 수 없었다. 소년이 흘린 눈물은 소년의 얼굴을 타고 소년의 입속으로 들어갔다.  

소년은 마을의 언덕과 연이와 함께 행복하게 지내던 시절이 생각났다.

'내가 여기서 얼마나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던 거야. 어서, 약물을 구해 가야 해.'


소년은 마녀의 집을 나왔다. 하지만 기구는 불타 없어진 지 오래였다. 소년은 마녀의 마법 빗자루를 탔다.

"빗자루야. 나를 불의 궁전으로 데려다 주렴."

빗자루는 소년을 태우고 공중을 한 바퀴 돌더니 빠른 속도로 불의 궁전으로 향했다.


불의 궁전은 바닥이며 문이 모두 뜨거운 불길로 덮여 있었다. 소년은 불길이 뜨거워서 가까이 다가갈 수도 없었다. 소년은 절망 속에, 두 손을 모아 간절히 기도했다.

"하늘에 계신 신이시여. 저를 굽어 살피시어. 저에게 마을 사람들과 연이를 구할 수 있는 힘을 주소서."

그러자 하늘에서 아기 천사들이 내려왔다. 아기 천사들은 천상의 황금 갑옷과 황금 신발 황금 투구를 가져와서 소년에게 입혀주었다. 이 옷은 불에 가까이 다가가도 타지 않았고, 불을 나무나 돌을 만지듯 아무렇지 않게 만질 수 있었다.

소년은 천상의 옷을 입고 불의 궁전의 문을 밀었다.

그러자 불의 궁전을 지키는 근위병들이 몰려왔다. 근위병들은 붉은 갑옷에 불타는 몸을 한 무사들이었다.

소년은 천상의 갑옷을 입고 열심히 싸웠다. 근위병들은 소년에게 칼과 창으로 공격했지만, 천상의 갑옷을 뚫을 수 없었다.

하지만 소년도 근위병을 무찌를 수 없었다. 근위병들의 수가 너무 많았다. 소년은 점점 지쳐갔다. 마침내 불의 궁전을 지키는 근위병들이 소년을 포위해왔다. 소년은 무기를 버리고 무릎을 꿇었다.

"하늘에 계신 신이시여. 저를 돕고 싶으시다면, 한번 더 도움을 주십시오."

근위병들의 수천 개의 창과 칼 끝이 소년의 목을 겨냥했다.

소년은 죽음을 예감했다. 하지만 더 이상 슬픔은 없었다. 소녀를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생각에 한은 없었다.

'이대로 죽는다고 해도, 나는 아무런 원망도 없다.'

소년의 목을 향하던 뜨거운 기운이 갑자기 멈췄다.

소년은 서늘한 기운을 느끼고 위를 바라보았다.

화산 분화구 위로 눈이 내렸다. 눈뿐만 아니라 우박이 쏟아졌다. 불의 근위병들은 눈과 우박을 맞고 쓰러졌다. 하지만 소년은 천상의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렇지 않았다. 신이 소년을 한번 더 구한 것이었다. 소년은 마법의 빗자루를 불렀다. 

"마법의 빗자루야. 나를 정열의 샘물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주렴."

빗자루는 구불구불한 나선형 계단으로 안내했다. 그 계단은 불의 궁전에서 가장 아래의 지하로 안내했다.

정열의 샘은 번쩍이는 다이아몬드로 된 우물 속에 있었다. 소년은 우물을 퍼서 물통에 담았다.

그때, 바닥이 울렸다. 지진이라도 난 듯한 울림이었다. 소년은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뒤에는 집채만 한 용이 서 있었다. 소년은 재빨리 마법의 빗자루에 올라탔다.

"빗자루야. 빨리 여기서 벗어나 줘."

빗자루가 소년을 태우고 날기 시작했다.

"잠깐만. 멈춰봐."

용이 외쳤다. 그 목소리에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 소년은 마법의 빗자루를 잠시 멈춰 세웠다.

"사실, 나는 이곳의 왕이었단다. 하지만 마녀의 꾐에 빠져서 이곳에 용의 모습으로 갇혀 있었지. 내 몸을 감싸고 있는 쇠사슬을 풀어주면, 너의 소원을 들어줄게."

소년은 망설였다. 용을 구하지 않아도 이대로 마을로 돌아가면 소녀와 마을 사람들을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소녀가 소년이 위험에 당한 이를 구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면, 어떻게 생각할지 걱정이 되었다.

"마법의 빗자루야. 저 용의 쇠사슬을 풀어주어라."

빗자루는 날아가 용의 몸을 감싸고 있는 쇠사슬의 자물쇠를 찾았다. 그리고 자신의 몸뚱이를 자물쇠 구멍에 넣어 돌렸다. 자물쇠는 강력한 마녀의 마법 때문에 쉽게 열리지 않았다. 마법의 빗자루는 안감힘을 쓴 끝에 자물쇠를 열긴 했지만, 마법의 힘을 너무 쓴 탓에 부러졌다.

소년은 털썩 주저앉았다.

"이제 어떻게 마을로 돌아가지."

소년은 앞이 캄캄했다. 괜한 일에 나섰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이 소년의 어깨를 안았다.

"날 구해 줘서 고맙네. 마을까지는 내가 안내해줄게."

소년은 고개를 들었다. 용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다이아몬드 보석으로 멋을 낸 곤룡포를 입은 왕이 서 있었다. 불의 왕은 소년을 데리고 자신의 황금 마차로 안내했다. 황금 마차는 붉은 루비 보석이 박혀 있었고, 황금 마차를 끄는 네 마리의 황금 들소가 콧구멍으로 검은 연기를 뿜으며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자. 소년이 사는 마을로."

불의 왕이 말하자 황금 마차는 분화구를 통해 하늘로 날아갔다. 엄청난 속도에 소년은 정신을 잃었다.

소년이 정신을 차리자 마을에 이미 도착해 있었다.

마을은 다시 봄이었다. 마을 언덕 어딘가에는 민들레와 씀바귀가 피어 있을 것이었다.

소년은 의원을 찾아가 불의 왕이 준 정열의 샘물을 주었다.

의원은 마을 사람들에게 차례차례 샘물을 떠먹였다. 샘물을 먹은 사람들은 차례차례 병상에서 깨어났다.

소년은 소녀에게 직접 샘물을 먹였다. 소녀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깨어났다. 소년은 소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불칸 마을은 그날 이후로 일주일 동안 축제를 열었다.

어느새 소식을 들은 천사가 내려와 하프를 연주했다. 마을에 사랑의 기운이 퍼졌다.

악마가 헐레벌떡 군대를 데리고 왔지만, 싸우지도 못하고 돌아가고 말았다. 불의 왕의 군대가 하늘을 덮고 있었던 것이다.

의원이 하늘을 보며 말했다.

"올여름은 무척 덥겠군."

어디선가 매미들이 일제히 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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