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름을 다시는 부를 수 없다.

김수현 사태를 보면서. 언론은 마녀사냥을 멈추지 않았다.

by 김광일

최근, 너무 많은 별들이 우리 곁을 떠났다. 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보려 해도, 목이 메어 차마 옮겨 적을 수가 없다. 남겨진 자리엔 깊은 상흔과 차가운 바람만이 맴돈다. 그들의 죽음 앞에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무엇이, 누구의 손이, 그들을 저 먼 곳으로 떠밀었는지를.


살인자는 누구인가. 칼을 든 이는 없었으나, 비난의 돌을 던진 이는 차고 넘쳤다. 언론은 ‘사실만을 전한다’는 이름 아래, 누군가의 삶을 소문이라는 흙탕물 속에 내던졌고, 대중은 그것을 진실인 양 받아들였다. 검증되지 않은 이야기들이 기사라는 탈을 쓰고 유포될 때, 그것은 한 사람의 영혼을 갉아먹는 흉기가 되었다. 정의를 부르짖는 듯했지만, 실상은 선동이었다. 누군가는 그것을 흥미거리로 소비했고, 누구는 쉽게 손가락질했다. 그렇게 한때는 빛나는 별이었던, 사람이 산송장이 되었다.


연예인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다. 때론 실수하고, 때론 잘못도 저지를 수 있다. 그들에게 완벽함을 요구하는 것은 신화를 강요하는 것이다. 그들이 모두 석가모니나 예수, 공자, 마호메트, 마틴 루터 킹 같은 성인과 같은 지혜와 도덕성을 갖춰야 한다고 믿는 것은 터무니없는 착각이다. 정작 우리는 정치인들에게는 그런 인격을 요구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실수에 잣대를 들이대는 우리의 기준은 왜 이토록 불공평한가.


예를 들어, 유력한 정치인이 음주운전 사고를 내면 언론은 중년 아저씨의 모자란 실수로 치부한다. 그러나 배우 김새론이 같은 잘못을 했을 때, 마치 입에 담을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른 것처럼 몰아갔다. 그날의 기사를 처음 접했을 때, 나는 그녀가 무슨 대규모 테러라도 저지른 줄 알았다. 성모 마리아가 예수를 낳을 때 욕설을 내뱉었다 해도, 그토록 가혹한 비난은 받지 않았을 것이다.


사랑하는 이를 잃어본 사람만이 죽음의 무게를 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빈자리를 마주할 때, 그 상실감은 쓰나미처럼 덮쳐온다. 떠난 이의 존재가 이 우주에서 완전히 삭제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그 슬픔과 공포와 공허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깊어진다.


언론도, 그 언론을 소비하는 우리도 결국 사람이기에, 한 번쯤은 멈춰 서서 생각해 봐야 한다. 한 줄의 기사, 한 마디의 댓글이 누군가의 생을 앗아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조회수를 위한 자극적인 기사 한 편이 누군가에겐 돌이킬 수 없는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걸. 만약 당신의 형제나 자매가 같은 실수를 저질렀다면, 그를 향해 돌을 던지는 대신, 따뜻한 손을 내밀었을 것이다.


그러니, 부디 기억하자. 한 사람의 삶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며, 우리에게 주어진 언어는 누군가를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제는 그 무게를 알고, 신중해질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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