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다. 다시, 봄이다.
지난주부터 벚꽃이 피기 시작했다.
마치 억만 마리의 눈부신 하얀 나비 떼가 나무 위에 살포시 내려앉은 듯, 조용하고도 장엄하다.
부드러운 봄바람이 속삭이듯 지나가자, 나비의 날개처럼 하얀 꽃잎들이 일제히 퍼덕이며 하늘로 흩날린다. 그 모습은 마치 오래된 슬픔을 정결히 씻어내는 의식처럼, 고요한 환희로 가득 차 있다.
문득, 지난 12월의 기억이 떠오른다. 숨기고 싶었던, 그러나 잊을 수 없는 부끄러움의 순간.
계엄이라는 무자비한 폭력이, 국민의 자유와 재산을 짓밟으려 했던 그때, 나는 밤을 지새우며 눈을 감지 못했다. 국회 현장과 서울 도심 상황을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영상을 보며 잠을 못 이뤘다. 내일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막연한 공포가 잠을 깨웠다. 그때 나는 서울 도심의 거리를 가득 채운 사람들을 보았다.
길 위를 지키던 이들은 특별한 얼굴들이 아니었다.
옆집 아저씨 같은 친근하고 투박한, 혹은 시장통에 마주칠 것 같은 아주머니, 하굣길에 마주칠 것 같은 학생들의 얼굴이었다. 그들은 맨몸으로 국회 앞을, 도로 위를 지켰다. 군인들의 군홧발이 민주주의를 짓밟지 못하도록 장갑차가 탱크가 민주주의를 무너뜨리지 못하도록 거리를 빼곡하게 메웠다.
국가의 폭력 앞에서 떨면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시민들은 시대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한쪽 편에는 위기의 민주주의가 있었고, 가까이에는 참혹한 독재의 시대가 있었다.
우리 시대가 어디로 흘러갈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을 바라보며 나는 두려웠고, 조마조마했다.
앞날은 보이지 않았고,
나는 그 곁에 설 용기를 내지 못했다.
겨울의 바람 속에서, 나는 말없이 얼어붙은 채 서 있었다.
하지만, 기적처럼—사람들이 이겼다.
그 찬란한 승리를 나는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지금, 벚꽃이 피었다.
나는 벚꽃 잎이 흩날리는 길 위를 걸었다.
그 길은 마치 누군가가 붉은 비단을 조심스레 펼쳐놓은 것처럼
부드럽고, 따뜻했다.
발끝에 스치는 꽃잎의 감촉은
잠시나마 세상의 무게를 잊게 해 주었다.
나는 사람들의 용기가 만들어낸 그 경이로운 장면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벚꽃길을 걸으며,
나는 황송한 마음이 들었다.
이 아름다운 길은
누군가가 목숨을 걸고 지켜낸 계절의 선물이라는 사실이
마음 깊이 스며들었다.
황송하고, 또 황송하다.
벚꽃은 그저 봄의 상징이 아니라,
사람들의 믿음과 용기 위에 피어난
하얀 약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