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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나 Sep 20. 2019

잘 나간 적도 없는데 제대로 슬럼프다

거의 매일 글을 쓰기 시작한 건 이십 대 초반부터였다. 내성적이고 소심한 데다 애정결핍까지, 안 좋은 성향을 두루 갖춘 탓에 나는 사람을 잘 사귀지 못했다. 작은 일에도 깊이 상처 받았고, 별 것도 아닌 일에 잔뜩 예민해져 나도 모르게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곤 했다. 타인과 관계를 맺고 푸는 일이 너무도 어렵다 보니 사는 일이 참으로 막막했다. 간신히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더 많아서 두려웠다. 시종일관 겁먹은 강아지처럼 살아 그런가 내면으로 잉크처럼 검고 물컹한 감정이 흘러들었다. 꺼림칙한 감정의 무게를 안고 사는 건 여간 피로한 일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해소할 방법이 없을까 여러 날 궁리했다. 이것저것 시도한 끝에 글쓰기에 안착했다. 가난한 나로서는 연필과 공책만 있으면 되는 글쓰기가 마음에 쏙 들었다. 저렴하고 간편한 시작과 달리 글쓰기에는 어떠한 구속도 한계도 없었다. 무엇이든 내 맘대로 끼적일 수 있었고, 춤추듯 글을 쓰고 있노라면 끓는 물처럼 와글대는 감정도 어느새 진정되었다. 해소의 감각에는 중독성이 있어서 나는 자주 글을 썼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 내집 없이 유목민처럼 객지를 떠도는 생활에서 글쓰기는 마치 세상 어디에도 없는 나만의 방을 갖는 것과도 같았다. 바깥에서 상처 입고 돌아오면, 내방에 숨어들어 문을 잠그듯 나는 글을 썼다. 글쓰기에 몰입할 때면 바깥의 일들이 저만치 뒤로 물러섰다. 물러난 현실과 나 사이에 나만의 시간과 공간이 있었다. 그 틈새는 작지만 큰 위로였다.


글쓰기를 시작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블로그가 유행했다. 나도 하나 개설해서 공적인 공간에 사적인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지극히 사적인 일기도 결국 누군가에게 읽히기 위해 쓰는 것이라고 하지 않나. 비밀도 결과적으로 말하여지기 위해 만들어지고 은밀히 누설될 때 진정한 비밀로 거듭나듯이 누군가에게 보이고 싶은 욕망이 없다면 세상엔 어떤 예술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내 글이 예술에 육박한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어림 반 푼도 없는 얘기지만, 한편으론 예술이 뭐 별건가 싶기도 하다. 작품과는 거리가 한참 먼 허섭한 글이지만 나는 꾸준히 블로그에 (지금 읽어도 오글거리고 부끄러운)글을 매일같이 올렸다. 이따금 누군가 찾아와 내 글을 읽고 공감을 주거나 진심 어린 덧글을 남길 때면 혼자 감동에 젖었다. 그때는 블로그가 지금처럼 상업적이진 않았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의 펜팔처럼 순정한 면이 있었다. 그래서 누군가의 덧글은 멀리서 온 답장처럼 설렘과 기쁨을 주었던 것이다. 고마움에 나도 그를 찾아가 그의 글들을 꼼꼼히 읽고 성심껏 덧글을 남겼다. 얼굴도 이름도 몰랐지만 그래서 왠지 마음이 놓였다. 당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하는 사람이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당신 글에 배인 감정과 이야기가 무엇인지만 중요했다. 인터넷의 바다에 둥둥 떠다니는 숱한 이야기들을 읽으며 알게 되었다. 나 혼자만 관계에 숨 막혀하는 건 아니라는 걸, 대부분의 사람들이 관계에 서투르고 사람에 치이고 넘어지며 신음한다는 것을. 그러니까 SNS에 범람하는 이야기들은 누군가가 타전하는 SOS에 다름 아닌 셈이었다. 일견 일방적으로 각자의 이야기를 하는 듯하지만 거기에는 내 짧은 글을 긴 호흡으로 들어주는 사람이 있었고 그래서 일상에서는 오히려 나누기 힘든 대화도 가능했다. 현실과는 사뭇 다른 관계이지만 나는 왠지 그쪽 세계가 더 마음에 들었다. 몸은 이쪽에 두고 마음은 저쪽에 두며 꾸준히 난삽한 글을 써댔다. 그렇게 나만의 시간 나만의 공간에서 누군가와 이어지는 모순이 좋았다.


어떤 일을 십 년 이상 꾸준히 하면 그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나에겐 해당사항이 전혀 없나 보다. 처음 연필을 잡은 후로 거짓말 조금 보태 스무 해 가까이 글을 깨작이고 있는데도 내 글은 아직 일기 수준에 머물러 있다. 내 생각과 감정 감각 경험들을 더 잘 묘사하고 생생하게 표현하고 싶어서 늘 책을 곁에 두고 시도 가까이하고 때로는 서너 달 넘게 필사도 해보았지만 영 발전이 없다. 나에겐 재능이 1도 없나 싶어 속상한 날들이 산맥을 이루고 누군가의 완벽한 글을 접할 때마다 일면식도 없는 그를 향해 솟구치는 질투심이 강을 이룰 지경이다. 글은 쓰면 쓸수록 어려워서 예전엔 어떻게 썼나 싶어 이전 글들을 찾아 읽으면 외려 옛 글들이 더 나은 듯하다. 투박해도 울림이 있다(나만 그런가). 아니, 오랜 세월 무언가를 반복하고 노력하면 조금이라도 더 나아져야지 어떻게 퇴보할 수 있을까. 이남이가 부른 [울고 싶어라]가 귓가를 맴돈다. 좋아하는 마음보다 잘하려는 욕심이 앞서서일까. 글 쓰는 일도 예전만치 즐겁지 않다. 그러다 보니 안 쓰는 날이 많아진다. 글이 뭐라고, 대단한 작가가 될 것도 아닌데 그까이꺼 다 내려놓고 몇 날 며칠 방탕을 즐기지만 지금껏 매달린 시간이 아깝기도 하고 글쓰기가 아니라면 또 무엇으로 나만의 오롯한 시공간을 마련할까 싶어 이내 컴퓨터 앞에 앉아 창을 연다.


길게 심호흡을 하고 피아니스트처럼 키보드에 손가락을 올리지만 실어증에 걸리기라도    문장도 나아가지 못한다. 왼쪽 상단에서 깜빡이는 커서는 뭐든 뱉어내 보라고 종용하는데 쓰고자 했던 생각들은 속절없이 흩어지고 하얀 바탕은 무한대로 확장하며 나를 집어삼킨다. 맞바람 속을 걸어가듯  단어를 간신히 나열해 보지만 원하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홧김에 Backspace 키를 찍어 누르고 손을 떼지 않는다. 빠른 속도로 단어들이 지워지고 커서는  마음처럼 막다른 벽에  부딪힌다. 얄궂은 커서를 한참 노려보다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바닥에 대자로 드러눕기를 두어  반복한 듯싶다.  나간 적도 없는데 제대로 슬럼프다.


깊은 한숨을 토하며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자니 이런 생각도 든다. 이제는 글쓰기가 마련해주었던 나만의 시간과 공간이 더는 필요 없는  아닐까.  만큼 살다 보니 지독한 외로움에는 그런대로 길이 들었고 타인과는  상처 받지 않을 만큼만 관계를 맺고 물질적으로도 이십 대만큼은 궁핍하지 않은, 어쩌면  생에 가장 평안한 시기를 보내고 있어서 딱히 해소할 감정도 없는  아닐까. 하지만 돌이켜보면 글쓰기는 단순히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한 수단만은 아니었다. 세상과의 소통을 조금이나마 가능하게    유일한 언어였다.


그래서  놓을  없는가 보다. 아직은 세상으로부터 잊히고 싶지 않아서 '요즘은  글이 써지지 않아요.'라는 근황을 이토록 장황하게 애면글면 끼적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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