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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나 Apr 12. 2023

소중한 작은 것들

장미는 없어?

우리 집 앞마당의 화단과 뒤뜰에는 갖가지 나무와 꽃들이 있었다. 벌레가 많아서 키우기 힘들다는 무궁화, 짙은 색으로 익어야만 먹을 수 있는 단감, 너무 달아서 혀가 아리던 무화과, 씨를 뱉는 게 전부라고 생각했던 석류, 저녁반찬으로 올라오던 둥근 호박, 내가 학교에서 싹을 틔웠던 옥수수, 튀김으로 먹었던 방아꽃, 엄마가 산에서 두세 개 캐와서 옮겨 심었더니 다음 해에 뒤뜰을 점령해 버린 금잔화, 아침이면 피고 저녁이면 지는 나팔꽃, 맛난 꿀을 담고 있던 사루비아, 붉은 연산홍, 하얀 철쭉, 소담한 하얀 수국, 골목 입구까지 향을 내뿜던 천리향, 큰 얼굴의 해바라기, 그리고 이름 모를 보라색, 하얀색의 가녀린 꽃들,,


봄이 되고 여름이 되면 생기를 찾고 피고 자랐던 그 식물들을 당연하게 생각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너무 감사한 존재들임을 깨닫는다. 살던 곳이 시골이나 산골은 아니지만 집 뒷마당에서 과일을 따먹고 꽃을 만지고 흙파며 놀았던 추억은 현재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나의 국민학교 시절에는 각 반의 학급위원들이, 아니 그들의 어머니들이 반 운영을 돕던 시절이었다. 그녀들 무리의 명칭은 새마을 어머니회. 지금의 녹색 어머니회의 조상이다. 학급과 학급 행사에 필요한 소소하지만 큼지막한 도움들을 준비하고 내놓는다. 교실을 싱그럽게 만들어 줄 화초(그 시절에 덩굴 식물 아이비가 유행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담임 선생님의 책상을 환하게 만들어 줄 꽃과 화병, 소풍 갈 때 담임 선생님이 드실 김밥 도시락과 치킨, 음료, 운동회, 학예회 때 우리 반 아이들이 먹을 과자, 떡과 음료, 학급에서 구입해야 할 비싼 물품들에 대한 비용들까지도 학급위원들의 어머니들이 내놓는 분위기였다. 거기에 덧붙여서 정기 모임에 들고 가야 할 촌지까지,,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다. 갑과 을의 경계가 지금보다 더 분명하게 드러났던 시절이었다.


우리 엄마는 내가 학급위원을 하는 것을 싫어했던 걸로 기억한다. 내가 막내라 여기저기 불려 다니는 것이 엄마 나이에 지치고 귀찮은 일이기도 했던 것 같고 챙겨야 할 돈이 많이 드는 것도 부담스러웠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런 엄마의 생각은 내게 중요하지 않았고 학기 초 학급위원을 뽑을 때마다 번쩍번쩍 손을 들곤 했었다.






4학년 , 어느 월요일 아침, 선생님 책상 위에 놓을 꽃을 내가 가져가야 하는 날이었다. 나는 엄마가 어떤 꽃을 준비했을지 궁금했다. 빨간 장미꽃과 뿌연 안개꽃? 백합?  이쁜 것들을 안고 학교로  것을 생각하니 아침부터 설레었다. "엄마,  어딨어?" 엄마는 잊었던  같다. 그날의 나의 임무를. 오만가지 승질을  내는 나를 뒤로 하고 엄마는 뒤뜰로 갔다. 거기에 피어있던 보라색꽃과  들국화 같은 , 잡다한 , 그리고 이파리들을 꺾어서 신문지에 둘둘 말아서 건네준다. ,,, 어릴  소꿉놀이   돌로 으깨서 상에 놓던 보라색 꽃인데,,  하찮은 것들을 선생님 책상에 놓으라니,, 망했다.

이런 걸 어떻게 학교에 들고 가냐며 온갖 신경질을 내는 나에게 이게 어때서 그러냐며 가져가라고 야단을 치는 엄마를 이길 수도 없었고 시간도 없었다. 하얀 종이에 감싼 장미나 백합은 사라지고 신문지에 싸인 이름 모를 소심한 꽃들을 숨기듯이 들고 학교로 갔다.


아이들 모르게 조용히 화병에 꽃을 꽂아 두고 자리에 앉았다. 아침 내내 그 꽃을 보며 심란해하던 중 담임선생님이 들어왔다. 선생님은 책상 위의 꽃을 보며 "어머! 이 이쁜 꽃들은 누가 가져왔어?"라고 하셨다. 저걸 이쁘다고 말해주는 선생님이 이상했지만 조용하고 당당하게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아침에 그렇게 짜증을 내며 학교로 간 막내는 집에 돌아와서 꽃에 대한 선생님의 반응을 엄마에게 알려주며 신이 났었다.


그때는 몰랐던 어른들의 취향. 화려해 보이는 장미나 백합보다는 길 한 모퉁이에 피어있을 것 같은 잔잔하고 소심한 작은 풀꽃들이 더 소중하고 이쁘다는 걸, 나이가 들면서 나도 알게 되었다.


자꾸 보면 볼수록 정이 가고, 한 번 보면 또 보고 싶은 그런 작은 존재들이 자꾸만 생각나는 봄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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