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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예선 Sep 04. 2020

몽상가의 기록술

전시 <<말하기의 다른 방법 >>에 붙여쓴 글 

1. 상상의 설계도




 『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은 제목과 다른 책이다. 존 버거가 선택한 사진이 궁금한 독자라면, 내가 그랬던 것처럼 페이지를 넘기면서 몹시 당황하게 될 것이다. 책을 아무리 들춰도 사진이라고는 첫 페이지에 흐릿하게 나온 단 한 점뿐, 스물여섯 개의 이야기들은 모두 빈 페이지에서 시작해서 오직 글자로만 이루어져 있다. 글자들이 상상의 이미지를 끌어내는 설계도 같은 책이다.  

 사진을 글자로 표현한 이 책을 읽으며 어떤 이미지들이 흐릿하게 떠올랐다. 나의 무의식은, 오래된 책이나 영화, 여행의 기억들, 그리고 어디에서 봤는지 기억도 없는 스쳐간 인상들까지 빛의 속도로 흡수하고 뒤섞으며 가장 그럴 듯한 무언가를 만들어냈다. 오로지 내 상상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존 버거가 설정한 이미지와는 전혀 관련이 없을 것이다. 


이 모든 이미지들은, 이 새로운 이야기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언제부터인가 시작도 끝도 없는 거대한 장면들이 나를 따라다녔다. 나비가 수많은 홑눈에 비친 각각의 장면을 모아서 하나의 장면으로 인지하듯이, 이 세계는 수많은 장면들의 결합이었다. 현실의 장면과 과거의 장면, 그리고 상상의 장면이 동시에 보였고, 그 사이에 이야기가 생겨났다. 나는 이 무수한 이야기들이 점점 몸을 불려가는 것을 느낀다. 그 이야기들과 나는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을 읽은 독자들은 모두 자신만의 이미지를 떠올릴 것이다. 글자는 이야기와 정신을 담은 매개가 되어 각자에게 어울리는 이미지를 던져주고 저마다의 사유에 빠져들게 한다. 글자는 인생, 세계, 진리, 사랑과 같은 무형의 것들로 바뀌어 내면에 깃든다. 어떤 이는 종이와 연필을 꺼내 떠오른 이미지를 그리고 싶을 테고, 어떤 이는 산들산들 바람 부는 곳에서 존 버거의 이야기를 하염없이 듣고만 싶을지 모른다. 나는 떠오른 이미지를 그릴 수밖에 없었을 누군가의 그림을 비어있는 페이지마다 붙여 넣는 상상을 해본다. 그리고 존 버거의 푸른 눈에 비친 청명한 숲을 상상하고, 그 언덕에서 자급자족의 삶을 꾸렸던 지식인의 삶을 상상하고, 존 버거로부터 영감을 얻었던 수많은 예술가들을 상상한다. 하나의 글은 수많은 상상을 이끌어낸다. 글은 상상의 다른 이름이다. 달리 말하면 상상의 틀을 견고하게 세우지 못하는 글은 온전히 독자의 것이 되지 못한다.   


 글을 쓰면서 상상하고 글을 읽으면서 상상한다. 당연히 글을 쓰기 전 상상이 먼저 등장한다. 글을 읽은 뒤 상상은 더 큰 상상과 결합한다. 아는 소설가는 마음에 품고 있는 장면이 있다면 소설을 쓸 수 있다고 했고, 긴 소설일수록 더 촘촘한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상상은 기억이 뒷받침하고 기억은 강렬한 감정에 의해 지속적으로 소환된다. 그러므로, 글로 쓰여진 상상은 어떤 순간의 강렬한 감정이다. 사유 속에 들어온 감각과 감정은 어떤 식으로든 깊이 연관되어 있다. 오직 작가만의 내적논리로 형성된 견고한 이야기의 성에서 독자는 빠져나올 수가 없다. 흑마술이건 백마술이건 인간을 홀리며 이야기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무자비하며 아름다운 언어다. 예술가는 호모 사피엔스의 상상력을 자유자재로 이용하는 존재들이 아닐까? 이때의 탁월함은 상상을 자신의 이야기라고 믿게 만드는 데 있다.






2. 순간과 영원



 결국 아름다운 순간이다. 아무리 독특한 은유를 찾고 벼린 칼날 같은 펜으로 수십 번 고쳐 쓰더라도 우리가 글로 드러내려는 건 눈부신 하루, 아름다운 어떤 날에 대해서다. 이와 비슷한 문장을 페르난두 페소아의 『불안의 책』에서 읽었다. 글은 꿈과 상상의 연장선에서 아름다운 순간을 발견하고 기록하려는 몽상가의 기억술이다. 글 쓰는 자들은 빛나는 세상이 먼 곳에 있지 않으며 지금 여기가 바로 그곳이라고 말하는, 지극한 몽상가들이다. 일상의 도처에 아름다움이 있고 그것을 알아보는 마음이 삶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 나 역시 그들과 같은 몽상가다. 살아가는 힘은 아름다운 순간들의 중첩에서 나온다고 믿고 있으므로. 


 글쓰기의 원천은 일상의 순간에 있다. 버지니아 울프는 소설 『등대로』에서 한 인간이 예술가로 거듭나는 상황을 그리면서 그 고귀한 순간을 누구나 누리는 일상적인 시간대에서 포착하고 있다. 실존하는 풍경에 부딪히며 내적 감각의 회오리에 빠진 화가의 뇌리에 펼쳐지는 거대한 사유의 세상. 이 엄청난 감흥과 감각의 세계를 울프는 아주 평범한 하루의 풍경과 병치하여 현실의 언어로 이야기한다. 화가의 내면에서 수많은 감정들이 서로 싸우고 기진맥진했다가 다시 부활하는 장면이 백여 페이지에 걸쳐 이어진다. 그러나 실재 그 시간은 빈 캔버스에 선 하나가 그려졌을 뿐인 찰나에 불과하다. 


 글은 현실적인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다. 찰나가 수백 페이지에 이르는 오랜 숙고와 머뭇거림과 싸움의 시간이 되기도 하고, 수십 년의 역사가 나뭇잎이 푸르러지고 꽃이 지는 몇 줄의 기록 속에 묶이기도 한다. 페이지로 기록되는 순간은 실제 흘러가는 시간과 조응하지 않는다. 페이지는 시간을 영원히 묶어둘 수 있는 유일한 장치다. 시간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다는 것. 이는 글 쓰는 자에게 허용된 가장 너그러운 혜택이다. 



3. 실패를 향한 여정



 그러나 글은 궁극적으로 실패의 수단이다. 표현하려는 감정이나 대상은 언제나 글보다 크고 풍부하다. 글자라는 상징은 말 그대로 상징일 뿐, 대상을 글자로 번역하는 일에는 간극이 존재한다. 글은 대상의 온전함에 더 가까이 가기 위해 온갖 수단을 사용한다. 수사와 법칙을 만들고 이미지를 투사한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은 결국 대상을 완벽하게 표현하지 못한다는 사실만을 깨닫게 한다. 글쓰기는 도달하지 못하는 세계라 할지라도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가려는 정밀한 실패담이다. 글 쓰는 자는 날마다 이카루스의 실패를 되풀이한다. 밀랍이 녹는 줄도 모르고 깃털 날개를 휘저어 더 높이 태양 가까이로 다가갔던 이카루스. 글쓰기는 조각조각 부서진 날개를 끌어안은 채 바다로 추락하게 되리라 알면서도 태양에 다가갈 수밖에 없는, 한계에 부딪힐 것을 알면서도 그 너머로 가려고 애쓰는 일이다.   


 온전하지 못한 수단을 선택했다는 것 역시 글 쓰는 몽상가들에게 측은하고 장렬한 감정을 갖게 한다. 불완전한 상태로 완전을 향해 끊임없이 밀고 나가는 것, 실패의 순간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다시 그곳으로 향해가는 것, 멜랑콜리와 애도의 감정에 허우적대며 소진되고 폐허가 된 세상에 다시 새로운 세계를 쌓아가는 것. 그것이 글쓰기의 과정이다. 작가라는 몽상가들은 폐허에서 옛 시절의 흔적들을 줍고 먼지를 털며 한참 응시하며 미학적 징후를 찾아낸다. 세계의 무너짐도, 사라짐도 그들에게는 중요하지 않다. 땅 위의 흔적을 모두 글로 쓸 수 없다는 사실만이 그들의 마음을 흔들어댈 뿐.





4. 과거의 매개체 



 상상의 영역을 파헤치는 일은 그만두자. 뇌에서 일어나는 일을 명쾌하게 규명하는 건 과학자들의 몫이다. 글 쓰는 자는 상상이라는 작용의 결과로 발생된 이미지들 사이에서 연결고리를 찾으며 이야기를 만들 뿐이다. 그 이야기는 애초 하나의 이야기, 내 머릿속으로 들어온 하나의 목소리에 의해 시작되었다. 처음에, 목소리가 있었다. 말하는 자가 있었고 듣는 자가 있었다. 글은 말하는 자가 아니라 듣는 자에 의해 쓰여진다. 고대의 예언서와 역사서, 신화에서 복음까지 예부터 전해지는 모든 글은 들은 이야기, 오래도록 전해진 이야기를 갈무리한 것이다. 말하는 목소리 위에 쓰는 자의 목소리가 겹쳐진다. 한 권의 책은 수많은 목소리의 겹침이다. 


 문학이 인생의 모방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과거의 삶을 담고 있다는 뜻이다. 글은 과거와 만나는 매개체다. 글과 관련된 공감, 기억, 회상의 과정은 과거의 경험과 결합되는 감각이다. 글은 잊고 있었던 사건, 놓쳤던 감정, 사라진 사랑, 무릎 꿇은 신념, 호도된 개념들을 만나게 한다. 그것이 얼마나 소중했고 가치가 있었는지, 얼마나 아팠고 설렜는지, 어떻게 삶을 견디게 했는지 슬그머니 건드린다. 


 그 순간 걸어오던 길에서 다른 골목으로 방향을 트는 사람들이 생길 지도 모른다. 글은 그 파생의 순간을 위해 존재한다. 제임스 조이스의 추방된 영웅과 버지니아 울프의 섬세한 생활예술가들에 의해 몸과 마음을 움직일 누군가를 위해서. 작가는 인생을 꿰뚫는 통찰을 갖고 있지도, 죽은 생명에 호흡을 불어넣지도 못한다. 과거의 흔적을 들추는 아름답고 연약한 장식가들이다. 모든 사람에게 필수적인 건 아니지만 어떤 이들의 삶에는 없어서는 안된다.  



5. 행간의 힘 




 말과 달리 글은 시각적 산물이다. 글에는 행간의 매력이 있다. 글과 글 사이의 간격, 띄어쓰기, 들여쓰기, 페이지의 레이아웃 등 글을 완성하는 시각적 요소는 글의 호흡과 의미를 무형의 것에서 유형의 것으로 바꾼다. 글은 하나의 메시지를 넘어서 시각적 아름다움을 갖는다. 


 소설가 한강의 글을 보면 내적인 목소리를 표현한 문장이 이탤릭체로 살짝 누워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기울어진 글자들을 읽어가는 동안 독자의 상념은 그 기울기 틈으로 미끄러져 작가의 목소리가 더욱 잘 들리는 지점으로 이동한다. 누운 문장은 반듯하게 서있는 문장과 어울려 감정을 조절한다. 일반적으로 이야기는 강물처럼 흐른다지만, 문장과 문장은 간극이 존재한다. 뒤이어 서있다고 해서 앞 문장을 그대로 받는 것은 아니고 시간적으로 그 다음이라고 볼 수도 없다. 문장은 갑작스럽게 빈 공간을 만나기도 하고, 무정한 문단나누기로 다음 글자를 한참 멀리서 발견하기도 한다. 글자의 사이 공간인 여백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다. 그 여백만큼의 시간을 침묵으로 보내라는 의미다. 


 문장의 간극과 여백을 행간이라고 부른다. 행간은 보이지 않는 의미로 가득 차 있다. 글쓰기는 행간을 아름답게 만드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문장은 간극을 가진다. 문장은 간극을 이용한다. 엇나간 간극에서 부조리를, 촘촘한 간극에서 세밀한 내면을, 비뚤어진 간극에서 공포와 불안을, 말해지지 않은 사건의 전말을, 깊고 풍부한 상상의 세계를 보여준다.  


 어떤 이야기는 말이, 어떤 이야기는 글이 더 현명하게 전달된다. 그러나 어느 시대보다 말과 글에 부여된 자유가 확장된 지금, 말하기도 글쓰기도 흔하디흔하다. 이 많은 말과 글은 양적 팽창 때문에 오히려 닿아야 할 곳에 닿지 못하고 사멸한다. 말이 노래이고 글이 시였던 시대도 있었건만, 지금의 말과 글은 일상의 감정을 표출하는 데 과도하게 사용된다.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써야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돌아갈 때다. 왜 우리는 예술과 아름다움과 일상의 소중함을 자연스럽게 말하지 못하는가? 시는 더 말해지고 노래는 더 불려야 한다. 그러나 듣고자 하는 사람을 신중하게 선택해야 하는 복잡하고 정밀한 내면의 이야기는 글로 쓰여야 한다. 한 인간의 이야기는 더 많이 적혀야 한다.  


 그렇다면 남은 질문은 이것이 아닐까? 내 글은 누군가의 상상을 폭발시킬 힘이 있는가? 나는 어떤 파생의 지점을 보여줄 것인가? 내가 쓴 글은 어두운 우주에 연약한 빛으로 존재하는 사람들을 연결해주는 데 사용되었으면 한다. 그것은 우리가 더 이상 외롭지 않다고 말하는 일이다. 나는 글로서, 무수한 시간을 거쳐온 사람들이 조우하는 지도를 만들 것이다. 그 빛의 항해도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당신에게 다가가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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