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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naMilk Jun 14. 2022

Where do I belong?

We do not accept who you are

웨어 두 아이이 빌롱 시리즈는 필자인 내가 한국사회에 살아가며 느끼는 크고 작은 이야기들의 집합체이다. 지극히 주관적인 시선을 담고 있으나 꽤나 날카롭고 합리적이라 자부할 수 있다.


필자를 짧게 소개하자면, 90년대 초반에 서울에서 태어난 서울 여자다. 어릴 때부터 취미로 시작한 무용, 악기 그리고 미술에 관심을 발전시켜 대학교에서 순수미술을 전공했다. 그리고 예술론을 전공한 후 현재 다문화, 이민, 미디어 그리고 젠더 스터디스, 글로벌 스터디스 등과 같은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하고 싶은 일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어릴 때부터 누구한테 지시받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했고, 하기 싫은 일은 죽어도 못했다. 반면에, 오타쿠 기질을 발휘하여 내가 꽂힌 분야에 대해서 만큼을 최선을 다해 임했다. 그렇게 운 좋게 얻은 유학의 길을 통해 영국 런던과 옥스퍼드에서 너무 길지도 그렇다고 너무 짧지도 않은 시간을 보낸 후 한국으로 돌아와 학업을 지속했다. 그러던 중 한국에서 근무하는 미국계 영국인 교수 남편을 만나 현재 서울에서 거주 중이다. 우리 부부는 문화, 언어 그리고 예술, 정치 등 사회의 다양한 이슈와 모습에 관심이 많고 객관적이면서도 주관적인 의견을 공유해 왔다. 그리고 이제 조금은 비판적인 자아성찰을 통해 한국에 살아가며 겪는 많은 차별 그리고 한국의 강점과 이점에 대해 글로 풀어나가고자 한다.



Part 1

We do not accept who you are(나는 너의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겠어)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모를 때가 많다. 특히, 한국에 살아가며 기가 막힌 상황에 노출될 때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을 해야 이 사람들이 그리고 이 집단이 내 말을 알아들을까라는 생각을 끊임없이 하게 된다. 한국 사회가 다양한 이들의 다양성을 존중하기보단 이미 몇십 년 쾌쾌 묵은 잣대를 들이대고 그 좁은 카테고리에 맞지 않으면 ‘이단아’, ‘사회 부적응자’등의 꼬리표와 함께 그들을 사회의 마이너리티(minority)로 간주해버리다는 것은 너무 클리셰한 이야기이다. 어쩔 때로 정말로 사회의 주변부로 밀려난 마이너리티라면 사회 제도에 대해 타당한 비난 이라도 할 텐데, 조금 다르 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당하는 은근한 차별, 왕따 그리고 직장에서 행해지는 은따와 같은 사회적 불리(bully)는 결국 부메랑이 되어 현대 한국사회에 좋지 않은 결과를 만들어 낸다.  일명 꼰대들에게 된통 당한 세대는 최소 두 가지의 갈림길에 마주한다. 1. 그냥 사회 체계에 순응하고 시키는 대로 하자 2. 내 인생은 나의 것 돈이나 지위보단 다양한 경험이다 그리고 가끔가다 정말 운 좋은 이들은 자신의 자아실현을 이루면서도 돈과 지위를 획득한다.  물론, 어느 사회에는 ‘꼰대’. ‘선비’는 존재한다. 어느 사회나 쾌쾌 묵은 관습과 답답한 문화는 존재한다. 하지만, 현시대와 맞지 않는 방식을 바꾸기 위해 시도하는 ‘방식’에는 큰 차이가 있는 듯하다.  작년부터 쏟아져 나온 반복되는 뉴스 기사들의 키워드는 ‘MZ’ 세대의 잦은 퇴사와 이직 그리고 젊은 창업주, 인플루언서들의 ‘플렉스’에 관련된 이야기들이다. 실제로 젊은 층들이 코인, 주식 그리고 개인 사업을 통해 축적은 큰 부를 미술시장과 명품 패션시장에 소비하기 시작하며 새로운 소비문화를 만들어 냈다. 팬데믹으로 인해 여행에 제한이 생긴 것도 한 몫했겠지만, 젊은 층들의 플렉스 욕구와 욜로(YOLO) 마인드는 기성층에게 큰 충격을 안겨준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언제나 그래서 왜? 어떻게? 이러한 문화가 만들어졌으며 이 문화의 장점과 단점이 무엇인지 파악해야 한다. 젊은 세대들이 돈을 비싼 물건에 낭비한다고 해서 그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며, 젊은 사람들이 퇴직과 이직을 밥먹듯이 한다고 해서 그것이 그들의 끈기와 인성부족이라고 속단할 수 없다.  최근 뉴스에서는 그렇게 경쟁률이 치열하던 철밥통 공무원직의 인기도 많이 사그라들었다는 것이다. 최저치의 지원자 응시로 인해 한국 사회의 변해가는 문화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젊은 사람들이 퇴사를 일찍 하고 이직을 여러 번 하는 데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나의 경험으로 미루어볼 때에는 개성이 강한 젊은 세대들이 어떠한 작은 카테고리에 종속되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색깔과 모습을 부모님 세대들의 색채에 맞춰가고 싶지 않은 것이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우리는 팬데믹으로 인해 우리의 인생이 언제 어떻게 마무리될지 모른다는 것과,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 그리고 그 속의 미묘한 국제 관계 이로 인한 경제의 경고등이 켜진 그러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뭐 하나 확실하지 않다. 전 세계 도시의 집값이 올라갔고, 그중에서도 한국의 집값이 치솟았다. 많은 기득권층이 이로 인해 경제적 이득을 취했으나, 대부분의 젊은 층들은 평생 집 한 채도 장만하지 못할 거라는 소망 없는 현실에 살아가고 있다. 평생 모아도 나와 내 가족이 살 수 있는 집 한 채도 장만할 수 없다면, 이들의 목표가 과연 장기적인 투자 및 저금이 될 수 있을까?


많은 유튜버들의 자신들의 콘텐츠를 통해 수백, 수천, 수억 원의 재산을 축적한다. 일명 디지털 노매드의 삶이 실현되고 그들은 자신의 좋아하는 일을 하며 계속해서 일반 회사원 이상의 연봉을 만든다. 물론, 이것도 소수의 잘 나가는 유튜버들의 이야기지만, 우리는 이를 통해 새로운 직업의 미래를 보았을지도 모른다. 특히, 해외에서 거주하는 한국인들의 브이로그(Vlog)와 전 세계를 여행하는 여행 유튜브를 보다 보면 댓글에서 느껴지는 한국인들의 부러움이 가끔은 안타까울 때가 많다. ‘언니 저도 해외에서 살고 싶어요’, ‘저도 저렇게 여행하면서 살고 싶어요’, ‘자유로운 모습이 너무 부러워요’ 등등등.. 단순히 해외에서의 삶의 단편적인 모습만 보고 ‘아.. 부럽다. 나도 저렇게 자유롭고 싶다’라고 말할지도 모르나,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 ‘자유’를 갈구한다는 것이다. 회사에서 벗어난 자유, 학교에서 벗어난 자유, 돈에 찌든 삶에서의 자유, 육아에서 벗어난 잠시의 자유 등등 각자 갈구하는 자유는 다를 테지만, 결정적인 것인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단 한 번이라도 살아보고 싶다는 욕망에서 시작되는 자유에 대한 갈망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매일 아침 회색 건물로 출근을 해서, 직장 상사 그리고 회사에서 요구하는 시간에 맞춰 생활을 하고 맞춰진 시간에 점심을 먹고 맞춰진 시간에 퇴근을 하는 삶에 찌들다 보며 진정한 나의 색과 나의 꿈 그리고 삶을 목적을 잃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안정적인 삶이 그저 지루하고 별거 없는 삶으로 비하의 대상이 되어서도 안된다. 결국 우리 사회는 그렇게 매일매일 똑같은 일을 반복하며 자신의 일을 묵묵히 수행하는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흘러간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요구하는 단일된 색채는 한국의 발전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어디에 가든 똑같은 유니폼 똑같은 머리 똑같은 생각을 하게끔 만든다면 우리가 추구해야 할 다양성과 창의성의 진보에 큰 치명타만을 줄 것이다.  나라는 사람의 장점을 극대화하고 단점을 커버하며 내가 하고 싶은 일과 회사의 이득이 될 수 있는 그런 일은 할 수 없는 것일까? 그러면서 안정적인 월급은 받을 수 없는 것일까? 왜 꼭 안정적이라는 단어는 지루하고 재미없는 이미지를 동반하는 것일까.


필자는 1년의 시간 동안 3개의 회사를 다녔다. 직업 특성상 매우 전문적인 일을 하는 곳들이었지만, 내 학력과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비해 월급이 집 앞 편의점 아르바이트생들 수준의 월급이었다. 세 군대의 회사에서 이런저런 치고박고의 일들이 있었지만, 아직도 내 마음 한편에 남아있는 꼰대력 만렙의 충고가 있다.

두 번째로 이직한 회사는 해외에도 오피스를 두고 있는 테크 스타트업 회사였다. 나의 직장상사는 나와 10살 정도 차이나는 그래도 아직은 젊은 여성분이셨다.

그분의 고된 업무와 열정은 아직도 높이 산다. 하지만 나는 그곳에서 어느 날 갑자기 퇴사할 수밖에 없었다. 2개월의 수습기간을 지나며 진행했던 면담에서 이해할 수 없는 인신공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다음 편에서 한국인들의 서로에 대한 존중의 부재를 이야기하며 하나의 예시로 다루겠지만, 아직도 내 머릿속 남아있는 한마디는

“박사 학위가 없으면 글 쓸 때 조심하세요”였다.  웬걸….. 글 쓰는 업무를 본인이 시켜놓고 박사학위가 없으니 글 쓸 때 조심하라는데.. 내가 정치 사회적인 글을 쓰고 있던 것이 아니라서 어안이 벙벙했다. 이런 말을 하는 본인도 박사학위가 없었다. 석사 학위도 일명 학원 같은 학교에서 1년 다니며 받은 학위가 전부였다.

나는 아직도 내가 뭘 잘 못했는지 모르겠지만,  그 외에 다양한 인신공격성의 말을 들은 나는 그 길로 노동청에 직장 내 괴롭힘으로 신고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 세상의 글을 업으로 삼은 크고 작은 글쟁이들은 다 박사학위가 없으니 입 다물고 살아야 하겠구나.

석사 학위밖에 없는 비루한 나의 학위로 인해 이런 말을 들은 것이 아직도 화가 나지만, 그렇다. 물론 멍멍이 소리라는 것을 알지만, 실제로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내가 이런 말을 듣는다는 게 그냥 어안이 벙벙했다.


나의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는 건 부모님 밖에 없다. 아니 그마저도 운이 나쁘며 잘못된 부모를 만나 평생 시달린다.


내가 가지고 태어난 나의 기질과 모습은 사회의 구성원으로 때로는 극대화되고 때로는 깎이며 성숙한 시민의 모습으로 거듭나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각각 인간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색감까지 한 가지 색으로 통일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각자의 모습은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되어야 한다.

그게 패션이든, 메이크업이든 아니면 예술 작품이든, 글이든, 그 통로의 벽은 낮아져야 하고 사회는 다양한 이들을 수용해야 한다.


요즘에는 뒤늦은 MBTI의 열풍에 편승한 몇몇 회사들이, 직원을 뽑을 때에도 MBTI적성 검사 결과를 이용한다고 한다.

나 같은 인프피는 갈 곳이 없다고 한다.


우리는 편견과 차별에서 벗어나야 할 때에, 또 다른 벽과 또 다른 차별을 만들어 내고 있으니, 뭐든지 빨리빨리 적용하는 그 놀라운 적용력에 감탄할 뿐이다.


우리는 남에게 아주 관심이 많다. 이 오지랖 문화는 시도 때도 없이 동창생 누구는 몇십 평짜리 어디 아파트에서 신혼을 시작한다더라, 그 남편 시댁이 이렇다 더라 , 직업은 뭐라더라, 누구는 저번 달에 샤넬백을 샀다더라, 누구는 이렇다더라.  그 사람의 진정한 색을 들여다보려는 시도는 거의 없다. 끊임없이 비교하고 그렇게 되고 싶어 한다. 나의 색을 잃은 채로.


결국, 나가 누구인지 나 자신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문화에서 평생을 보내는 우리는, 당연히 타인이 누구인지, 알아보고 그것을 받아들일 여유조차 없는 것이다.

누구나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다. 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줄 누군가를 찾기 위해 평생을 헤매게 된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는 내가 누구인지 먼저 깨닫고 나에게 독이 될 것을 피하고 나의 강점을 살려줄 환경과 사람들 사이에서 행복하게 살아가야 한다.

그리고 성숙한 마음으로 상대의 색을 파악해야 한다. 그렇게 하다 보면 언젠가는 나의 이 오묘한 색도 받아줄 수 있는 누군가를 혹은 그런 무리를 만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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