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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naMilk Jun 15. 2022

Where do I belong ?

Mind your own business

웨어 두 아이이 빌롱 시리즈는 필자인 내가 한국사회에 살아가며 느끼는 크고 작은 이야기들의 집합체이다. 지극히 주관적인 시선을 담고 있으나 꽤나 날카롭고 합리적이라 자부할 수 있다.


필자를 짧게 소개하자면, 90년대 초반에 서울에서 태어난 서울 여자다. 어릴 때부터 취미로 시작한 무용, 악기 그리고 미술에 관심을 발전시켜 대학교에서 순수미술을 전공했다. 그리고 예술론을 전공한 후 현재 다문화, 이민, 미디어 그리고 젠더 스터디스, 글로벌 스터디스 등과 같은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하고 싶은 일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어릴 때부터 누구한테 지시받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했고, 하기 싫은 일은 죽어도 못했다. 반면에, 오타쿠 기질을 발휘하여 내가 꽂힌 분야에 대해서 만큼을 최선을 다해 임했다. 그렇게 운 좋게 얻은 유학의 길을 통해 영국 런던과 옥스퍼드에서 너무 길지도 그렇다고 너무 짧지도 않은 시간을 보낸 후 한국으로 돌아와 학업을 지속했다. 그러던 중 한국에서 근무하는 미국계 영국인 교수 남편을 만나 현재 서울에서 거주 중이다. 우리 부부는 문화, 언어 그리고 예술, 정치 등 사회의 다양한 이슈와 모습에 관심이 많고 객관적이면서도 주관적인 의견을 공유해 왔다. 그리고 이제 조금은 비판적인 자아성찰을 통해 한국에 살아가며 겪는 많은 차별 그리고 한국의 강점과 이점에 대해 글로 풀어나가고자 한다.


Part 2

Mind your own business (Stop harrassing other people)


파트 1에서 잠깐 언급했던, 이직과 퇴사의 상황들을 통해서 한국 사회에 뿌리 깊게 남아있는 ‘존중’의 문화에 대해 생각해보려고 한다.

파트 1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필자는 1년의 시간 동안 3 군대의 직장을 다녔다. 물론, 직업 특성상 거대 기업이 아닌 작고 귀여운 규모의 회사들이었다.

처음에 다녔던 직장은 그런대로 재밌었다. 물론 월급에 대한 현타가 주기적으로 찾아왔지만, 내 전공을 살릴 수 있는 직장이었고 첫 직장임에도 불구하고 그곳의 대표님은 나에게 많은 권한과 기회를 주셨다. 하지만 가난한 회사는 직장인에게 독이다. 무엇을 해도 ‘돈’을 걱정하며 아껴 쓰고 아껴먹고 눈치 보며 일해야 하기 때문이다.

겨울에는 너무 추웠다. 다행히 여름에는 시원했지만.. 어느 순간 가장 기본적인 난방조차도 눈치 보며 키고 껴야 하는 상황에서 나의 가치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아직 젊었기에, 내 열정만 가지고 어떻게든 무엇을 만들어 보고 싶었다. 주변에서도 칭찬할 만큼 내 회사인 것처럼 일했고, 나의 개인 인맥과 능력을 동원해 회사에 기여했다.

근데 여전히 한 번씩 찾아오는 급여에 대한 현타보다도 힘들었던 것은, 어느 순간 내가 이 정도 규모에서밖에 일할 수 없는 사람인가? 와 같은 자아성찰과 제대로 짜여있지 않은 회사의 시스템과 규모 때문에 찾아오는 우왕좌왕, 주먹구구식의  분위기가 어느덧 너무 버겁게 다가왔다. 나도 아직 보고 배울게 많은데 직장동료들은 나보다 어렸고 나보다 실구가 잩았으며, 대표님은 너무 바쁘셨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내 퇴사 결정에 크게 영향을 끼친 것은, 나와 내 동료들이 존중받지 못한다는 느낌이었다. 일을 할 때 체계적으로 일을 정리해서 다른 동료에게 전해주고 소통하는 것은 서로의 시간에 대한 존중이자 자신에 대한 존중이다. 회사에서 실수를 최대한 줄여야 하는 것도 나로 실수로 인해 다른 직원이 피해를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직장 동료 및 직장에서 만난 관계이기 전에 한 인간으로서 서로의 기분을 상할 수 있는 말과 행동은 조심해야 한다. 하지만 휴무인 날에도 카톡을 통해 일이 날아왔고 무엇보다 서로에 대한 존중이 매우 결핍된 환경이었다.


그렇게 퇴사를 하고 아트-테크 회사로 이직을 했다. 강남 한복판에 좋은 건물에 나보다 경험 많은 여성 직장상사들까지. 너무 완벽한 환경이었다.

하지만 그 회사도 스타트업이기 때문에 아직 체계와 시스템이 중구난방이었다. 그래도 감사히 일했다. 배울게 많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 회사에서 힘들었던 것은 서로 결이 다른 일을 동시에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무엇이든 빨리 배우는 스타일의 사람이었지만 전혀 결이 다른 일을 동시에 처리하면서 답답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2달이 지났을 때쯤 상사 2명이 중간 면담을 진행했다.


면담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직장 상사 중 팀장이 나를 매우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다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몇 번의 실수가 있었지만 회사의 크게 피해가 갈 만큼 심각한 실수가 아닌 수습직원들이 흔히 반복하는 정신없음에서 발생하는 실수였다. 그리고 나는 중간중간 개인 메시지로 실수해서 죄송하다고 나의 마음을 표현했었고, 그 팀장은 사람 좋은 척 괜찮다 괜찮다 했었다.

하지만 2시간의 시간 동안 내가 들었던 말들은 업무와는 상관없는 개인적인 공격 및 결과적으로 맘에 안 들면 일찍이 자기들과 ‘손절’ 하라는 말이었다.


나는 기가 막혔다. 도중에 쌍욕하고 나오고 싶은걸 어디까지 하나 보자-라는 마음으로 쭉 들었다. 사회생활을 길게 해 본 사람이 아님에도 회사에서 해야 할 이야기와 아닌 이야기 정도는 구분할 수 있을 만큼의 상식은 가졌기에, 굳이 면담에서 2시간 동안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짐작되지 않았다.


어쨌든, 손절하라는 말에서 헛웃음이 나왔고 그렇게 면담을 마무리하고 퇴근을 하며 눈물이 앞을 가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이런 말들을 들을 만큼 실수한 게 없었고 그렇게 완벽한 직원이 필요했으면 왜 신입을 뽑은 것인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친구들에게 면담에 관해 짧게 상담했더니 모두가 경악했다. 그리고 그 당시 남자 친구였던 현재 남편의 얼굴을 보자마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데이트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부모님께 면담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자마자 부모님도 뒤집어지셨다. 모든 이들의 반응은 ‘아니.. 굳이 신입 중간 면담에서 왜 굳이 그런 말들을….’

나는 너무 충격을 받은 나머지 잠에 들 수 없었고, 마음이 너무 괴로웠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라면.. ‘내가 그 여자였다면 맘에 들지 않는 직속 부하 직원에게 어

떻게 말을 했을까..’.

너무 화가 났다. 너무 화가 났고 내가 당한 만큼 그녀도 당하길 바랬다. 그 마음으로 인스타그램에 면담에 있던 일들을 정리해서 올렸고, 워낙 좁은 직업군이라 금세 그녀의 귀에도 들어갔다.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 아침 일찍 회사에 가서 내 자리를 정리하고 사내 전체 메시지에 그날 면담에서 있던 일을 정리해서 올렸고, 그 길로 노동청에 직장 내 괴롭힘으로 신고했다. 물론 나의 행동도 책임감이 넘치는 행동은 아니었다. 여전히 계약기간이 남아있었고 그녀와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누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그 면담 당시에 무엇이 불편한지 표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면담에 들어왔던 에디터와 팀장은 10년 지기 친구였다. 둘이 신나서 짝짜꿍 웃으며 나를 공격하는데 거기서 게거품 물고 욕하지 않는 이상 이성적인 대화가 통했을까? 2:1의 싸움에서 계급장 때고 덤볐다면 승산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저 당혹스러웠다. 그리고 슬펐다.

그리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정신과 상담을 받아야 했다.


필자는 서울의 그래도 꽤 괜찮은 동네에서 여고를 다녔다. 워낙 교육열이 뜨거운 동네이다 보니 여자애들은 똑똑했고 야망이 넘쳤고 동시에 이기적이었다. 천성이 예술가 기질을 가져서 약간의 오타쿠 기질 및 감수성 예민하던 나는 여고의 힘든 환경을 통해 자연스럽게 ‘눈치’라는 걸 장착하게 됐다. 그리고 미대를 나오지 않았는가. 여자들의 목소리톤과 눈빛만 봐도 아…. 말이 통하겠구나 아니겠구나 바로 알아차릴 수 있단 말이다.


나한테 이 일은 두고두고 회자될 만큼의 큰 충격이었다. 우선, 면접 당시 그들은 꽤나 나를 마음에 들어 했고, 멋있는 여자 상사들이랑 일할 수 있음에 너무 설레고 기뻤다. 하지만 역시나 여자의 적은 여자라더니… 어떤 이유에서인지 나는 그들에게 예상치 못한 인신공격을 받았다.


사회생활 직장생활은 결코 쉽지 않다. 이것은 어딜 가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한국의 문화에서 이미 어려운 부분을 더 어렵게 만드는 요소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의 언어에서부터 위계질서가 표출되며, 여전히 유교문화 및, 결코 떳떳하지 못한 문화들이 사내 문화를 더럽히는 것은 사실이다.

직장 상사 및 고용주가 젊은 청년들의 시선을 조금만 더 고려한다면…. 반대로 젊은 직장인들이 회사 고용주의 어려움을 조금만 더 이해한다면…

나이에서 오는 차이들 그리고 성별의 차이 및 문화 차이의 간극을 조금은 극복할 수도 있지 모른다.

하지만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한 젊은이들을 위해 경험이 많은 직장 상사들은 조금 더 너그러워져야 한다.  

일을 그르치지 않는 선에서의 자유도 필요하다. 특히나 창의적인 일을 요구하는 회사라면 더더욱이 개개인의 특성을 조금은 받아줘야 한다.

그게 서로 ‘존중’ 하는 문화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대화를 많이 해야 하지만 정작 일만 하다 보면 대화할 시간도 없다.

어차피 사람이 하는 일인데 왜 우리는 서로를 공격하고 판단하며 의미 없는 기싸움을 해야 하는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적어도 한국에서 회사를 다니고 싶은 마음이 싹 사그라들었다.


이미 대학원 생활을 통해 한국 사회의 단면을 맛본 직후였지만 여전히 충격적이었다. 학생들 특히 대학원에서 학생들은 교수들의 노예처럼 살아가는 경우가 많으며, 논문 하나 쓰는 것도 교수의 입맛에 맞게 써야 할 때가 많다.

장학금은 학교에서 주는 거지만 장학금의 수혜는 교수들이 가져간다. 조교 생활을 하며 철저히 느꼈다. 본인이 장학금을 주는 것 마냥 학생들을 부려먹는다는 것이다.

필자는 학부를 외국에서 그것도 다양한 인종이 모여사는 런던이란 곳에서 예술학교를 나와서 그런지 이런 문화가 너무나 당혹스러웠다.

학생들은 교수들과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어야 하며, 학생이 있기에 교수라는 직업이 존재하는 것과 교수들은 진정한 사회의 지식인이자 학자로서 도덕적으로 지식적으로 성숙해야 한다. 그것이 내가 본 교육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내 분야로 유명한 학교의 대학원에 진학했음에도 , 시스템과 교수들의 태도는 정말 형편없었다.


내가 사랑하는 나의 나라의 교육 환경이 정말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인지 너무나 좌절스러웠다.

그 다음장에서 한국의 교육 시스템에 대해서 더 자세하게 서술하겠지만, 교육의 질은 교육자들의 태도에서 나온다고 믿는 사람으로서 실망감 가득한 대학원 생활 이후 마주한 진정한 사회의 벽은 나를 여러 번 서글프게 했다.


우리는 평생 무엇을 배우며 자란 것일까. 남에게 피해 주지 말라는 말은 단순히 타인의 인생에 물리적 피해를 주지 말라는 것이 아닌 정신적 피해와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항상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 나를 포함한 모든 이가 평생 실수를 하며 살아간다. 이 실수 속에서 진정한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는 것은 진정한 ‘사과’와 용서이다.


아직 내가 나를 괴롭힌 그들을 용서했다고 말할 순 없을 것 같다.

내 안에 트라우마처럼 자리한 기억들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인 노동청이 무서웠는지 사과하겠다고 했으나, 제대로 된 사과를 받은 적이 없으며, 결국 번복했다. 자기들은 잘못한 게 없다고. 노동청 감독관의 표현을 빌리자면...

'저도 이런 사람들은 처음 봅니다..'

였다.


하지만 나는 뿌린 대로 거둔다는 것을 믿는다.

인생은 짧으면서도 길기 때문에.


한국사회에 학교에서 직장에서 따돌림 및 언어폭력 성폭력을 당하고 자신의 생을 마감하거나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젊은 층뿐만 아니라 연세 많으신 분들도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하신다고 한다.

젊은 사람들도 못됐다.

이기적이다.

어른 공경은 어느 사회에나 필요한 거다.

모든 50대 60대가 꼰대는 아니다.


어떤 분은 정년퇴직을 1년 앞두고 자식뻘 되는 신입사원 때문에 우울증 약을 복용한다는 이야기까지 전해 들었다.


그냥 서글프다.

서로 조금만 더 존중해줄 순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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