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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naMilk Jun 20. 2022

Where do I belong?

Let’s talk about education #1


웨어 두 아이이 빌롱 시리즈는 필자인 내가 한국사회에 살아가며 느끼는 크고 작은 이야기들의 집합체이다. 지극히 주관적인 시선을 담고 있으나 꽤나 날카롭고 합리적이라 자부할 수 있다.


필자를 짧게 소개하자면, 90년대 초반에 서울에서 태어난 서울 여자다. 어릴 때부터 취미로 시작한 무용, 악기 그리고 미술에 관심을 발전시켜 대학교에서 순수미술을 전공했다. 그리고 예술론을 전공한 후 현재 다문화, 이민, 미디어 그리고 젠더 스터디스, 글로벌 스터디스 등과 같은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하고 싶은 일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어릴 때부터 누구한테 지시받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했고, 하기 싫은 일은 죽어도 못했다. 반면에, 오타쿠 기질을 발휘하여 내가 꽂힌 분야에 대해서 만큼을 최선을 다해 임했다. 그렇게 운 좋게 얻은 유학의 길을 통해 영국 런던과 옥스퍼드에서 너무 길지도 그렇다고 너무 짧지도 않은 시간을 보낸 후 한국으로 돌아와 학업을 지속했다. 그러던 중 한국에서 근무하는 미국계 영국인 교수 남편을 만나 현재 서울에서 거주 중이다. 우리 부부는 문화, 언어 그리고 예술, 정치 등 사회의 다양한 이슈와 모습에 관심이 많고 객관적이면서도 주관적인 의견을 공유해 왔다. 그리고 이제 조금은 비판적인 자아성찰을 통해 한국에 살아가며 겪는 많은 차별 그리고 한국의 강점과 이점에 대해 글로 풀어나가고자 한다.


Part 3

Let’s talk about education #1



한국에서 살아가다 보면 답답한 직장생활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그중에서 가장 큰 것이 ‘교육’에 대한 것이다.

교육은 많은 학부모님들의 가장 큰 고민이자, 당사자인 학생들에게도 너무나 중요한 부분이다.

필자는 서울에서 학구열이 가장 뜨거운 지역 중 하나인 동네에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나왔다.

필자의 부모님도 서울에서 가장 좋은 학교들을 나오신 전문직 종사자들이었고 나는 외동딸이었다.

어릴 때부터 바이올린, 피아노, 미술, 무용과 같은 예술 과목들을 배웠고 나는 특히 무용과 미술에 크게 관심이 있었다.

하지만 신체적 조건이 필수인 무용의 세계에서 어릴 적 빈혈과 코피를 달고 살았던 나는, 반 강제로 무용을 그만두게 되었고 취미로 미술은 계속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 동네에 자리잡기 전까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학원도 계속해서 옮겨야 했다. 여러 동네의 미술학원을 다녔지만 모든 선생님이 좋았던 건 아니다.


서울시 종로구 사직동에서 유치원을 다녔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당시 다녔던 미술학원은 마당 딸린 저택에서 미술 선생님이 동네 어린애들을 모아서 과외식으로 가리키던 학원이었다. 선생님은 너무 착했다. 나는 그때 당시 까칠까칠했던 아빠의 얼굴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아이들은 내 그림을 가지고 나를 괴롭히고 놀리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그 미술 선생님은 나를 칭찬해주시고 위로해 주시고 항상 토닥토닥해주셨다. 갑작스럽게 다른 곳으로 이사하면서 어느 날 갑자기 학원을 옮기게 되었다. 근데 그 학원 원장님이 한국무용 전공자였다. 그곳에서 한국무용과 미술을 같이 배울 수 있었으나, 선생님들이 너무 별로였다. 계속해서 나와 다른 학생들을 비교했다. 그러면서 미술에 대한 흥미를 잃었다.


그렇게 평생을 살게 된 동네로 이사를 왔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이사를 왔는데,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었다. 어릴 적 당시 나는 매우 내향적이고 몸집도 매우 작았다. 그리고 엄청 여리고 소심했다. 첫 몇 년 동안은 계속해서 왕따 아닌 왕따를 당하며 그냥저냥 학교에 다녔다. 어린 시절에도 우울증이 올 수 있다는 걸 지금에서야 깨닫는다.

부모님도 초등학교 때까지는 그렇게 나의 학업에 욕심을 부리 시진 않았던 것 같다. 그냥 한자-영어-국어와 같은 과목에 집중하셨다. 나름 재밌었다. 하지만, 만화책을 읽고 영화를 보는 게 난 더 재밌었다. 그렇게, 같은 동네에서 중학교로 진학했다. 중학교 생활은 지금 생각해도 너무 즐거웠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공부보단 다들 그냥 재밌게 놀았던 것 같다. 그래도 중3이 되자 외고와 예고 그리고 그 외의 특성화 고등학교로 진학하고자 하는 친구들이 입시 결과를 받아 들고 슬퍼하거나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조금은 긴장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동네가 동네인지라, 중학교 때 일찍이 유학을 떠난 친구들도 많았다. 주로 뉴질랜드-미국-캐나다로 유학을 떠났고 그 친구들과는 싸이월드 나중에는 페이스북으로 연락을 지속했다. 그때 당시 나는 일본 드라마에 빠져있었다. 일본병에 빠진 나는 일본으로 유학을 보내달라고 1년 정도 떼쓰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보내주시겠다고 약속까지 하시고서는, 아무래도 외동딸 혼자 타지에 보내는 것이 내심 막막하셨는지 결국 보내주지 않았다.


중학교 때 친구들이 예고를 준비하는 것을 보고 나도 한번 해볼까?라는 생각을 했다. 근데 그 당시 미술학원 선생님이 나에게는 재능이 없다 그랬다. 그 선생님은 어머니에게 내가 예고를 진학할 만큼 미술에 재능이 있는 것 같지 않다는 말을 했다고 전해 들었다. 사실 그때까지도 미술을 전공하겠다는 생각보단 그냥 재미로 , 취미로 학원을 다녔기에 그런 말들이 약간은 상처였지만 그래도 크게 신경 쓰진 않았다.


고등학교에 진학하자 부모님의 마음도 급해진 듯했다. 아버지는 내가 엄마처럼 의사가 되길 바랬다. 근데 나는 수학은 잼병이었다. 수학 과외와 수학학원을 다녀도 별로 흥미를 갖지 못했다. 아니 사실 공부 자체에 흥미가 하나도 없었다. 그냥 맨날 추리소설을 읽고, 영화를 보고 노래를 듣고 끄적끄적이는 것에 더 흥미가 있었다. 아! 그때부터 영어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다. 외국 드라마와 영화를 인터넷에서 다운로드하여 보다 보니, 자연스럽게 외국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  그때부터 현재까지 나는 만화책, 외화시리즈, 소설책 그리고 음악 감상, 영화 감상을 할때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다. 아 ! 성인이되어 떠난 여행들도 내 창의성 형성에 한몫하는듯 하다.


그렇게, 또 같은 동네에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다시 미술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때 잠깐 같이 살던 친척 언니가 홍익대학교 미대 입시를 준비하고 있었고, 언니를 따라 홍대 앞 미술학원에 등록했다. 그 언니는 홍대 3수생이었다. 그 당시에는 홍대가 최고였다.

처음에는 소주병, 맥주병, 콜라캔과 같은 기본 정물들을 그리는 것을 익혔다. 그렇게 6개월 동안 월화수목금 학교 끝나고 홍대 앞 학원으로 갔다. 너무 즐거웠고 재밌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도대체 왜 이런 석고상과 의미 없는 물건들을 기계처럼 그려야 하는가? 이런 물음이 내 안에 가득 찼다. 고등학교 2학년부터 3학년까지 일반고지만 미술로 특성화된 반에서 공부했다. 그 반의 대부분의 친구들이 홍대 앞 미술&디자인 학원을 다녔다. 그냥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가 인터넷으로 보는 예술작품들은 자유로움 그 자체인데 왜 나는 이런 의미 없는 물건들을 그려야 하는지.. 그렇게 다른 입시를 찾기 시작했고 그 당시 주목을 받기 시작했던 한국예술종합대학교 조형예술과를 준비하기로 맘을 먹었다. 그 당시 미술학원 선생님과 어머니는 반대하셨다. 그냥 공부랑 미술을 병행해서 적당한 대학에 가라는 것이었다. 이해되지 않았다. 왜 적당히 살아야 하는지.


나도 한 고집하는 10대였기에, 내가 알아본 포트폴리오 학원으로 옮기게 되었고 그곳에서 나의 창의력을 발전시키고 어려운 문학작품과 영화를 보며 토론하고 글을 쓰고 , 그것들을 시각화하는 연습을 익힐 수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내가 선택한 길은 너무나 좁았다. 그때도 지금도 그렇게 포트폴리오로 대학을 갈 수 있는 학교는 서울대-이대 수시- 그리고 한예종밖에 없었다. 그 당시에는 서울대나 이대 같은 4년제 명문대에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나의 목표는 한예종 아니면 유학이었다.

그렇게 고3이 되었고 나의 실력도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 선생님들은 나의 끈기와 성실함 그리고 창의성을 종종 칭찬해주시고는 했다. 그렇게 첫 입시를 치렀다.

수능 점수로 가-나-다군은 시도도 하지 않았다. 오로지 한예종과 유학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한예종을 떨어졌고, 그 길로 나는 유학을 가기로 마음먹었다.

솔직히 이해할 수 없었다. 왜 포트폴리오로 진학할 수 있는 학교가 이렇게 제한적이며 도대체 석고를 잘 그리는 것이 예술가가 되는데 어떤 영향을 끼친다는 걸까?

그렇게, 일본 유학을 준비하던 중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나고 나의 유학길은 막혔다. 어쩔 수 없었다. 그냥 이렇게 된 거 서구권으로 나가자는 마음으로 미국과 영국 학교를 열심히 알아봤다. 그 당시에 영국 드라마와 영화에 꽂혀있던 나는 영국을 가기로 마음먹었다.



아버지가 너무 싫어하셨다. 그 당시 친척분들이 미국에 계셨기에 나도 미국에 가서 케어를 받으며 유학생활을 하길 기대하셨다. 근데 나는 그냥 영국이 가고 싶었다. 그렇게 영국 유학길에 올랐다. 첫 9개월은 런던의 외각에서 어학연수와 영어 과외를 받았다. 그 과정에서 혼자 떠난 옥스퍼드 여행에서 중세도시 같은 분위기와 학구적인 분위기에 매료되어 옥스퍼드에 있는 사립학교에서 1년 공부하기로 했다. 하지만, 내가 본건 옥스퍼드 대학교들이 즐비한 옥스퍼드의 중심부였다. 내가 어학 다음에 진학한 영국 파운데이션 학교는 옥스퍼드의 할렘가에 위치해 있었다. 매우 암울했다. 중동과 동유럽 이민자들이 가득했다. 백인들도 별로 없었다.


내가 선택한 아트&디자인 파운데이션 학교에는 나까지 한국인 3명과 벨기에 친구 1명 그리고 말레이시아 친구 1명 홍콩 친구 1명이 전부였다. 그 외에 영국의 수능 같은 에이레벨 및 공부 쪽 파운데이션에는 러시아 & 프랑스 &독일 &중국인들이 많았다. 1년 코스였는데 정말 빡쌨다. 주말 빼놓고 매일 학교에 나가 포트폴리오를 준비하고 영어를 배우고 과제를 해야 했다. 옥스퍼드에서의 삶이 공부-공부였지만, 그래도 선생님들과 소통하는데 큰 문제는 없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나의 아이디어와 나의 생각을 들어줄 수 있는 선생님들이 있다는 게 얼마나 축복인지 새삼 느끼게 된다. 그들이 정식 교수가 아니었기에, 엄청난 지적 능력과 스킬이 있던 건 아니었지만 영국식 교육이 한국식보다 자유롭고 창의적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하지만 순수미술과를 진학하는 것에 관해서는 한국이나 영국이나 약간의 현실적인 문제가 존재하는 듯했다. 선생님들도 다들 말렸다. 영국에서도 파인아트를 전공하면 가난하게 산다고. 너무 힘들 거라고 조금 더 상업적인 일러스트레이션과를 추천해주셨다. 하지만, 순수미술 혹은 철학 혹은 영화과와 같은 순수 학문의 영역을 공부하는 것은 어릴 적 꿈이었다. 옥스퍼드에서의 삶이 공부-공부였지만, 그래도 선생님들과 소통하는데 큰 문제는 없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나의 아이디어와 나의 생각을 들어줄 수 있는 선생님들이 있다는 게 얼마나 축복인지 새삼 느끼게 된다. 그들이 정식 교수가 아니었기에, 엄청난 지적 능력과 스킬이 있던 건 아니었지만 영국식 교육이 한국식보다 자유롭고 창의적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하지만 순수미술과를 진학하는 것에 관해서는 한국이나 영국이나 약간의 현실적인 문제가 존재하는 듯했다. 선생님들도 다들 말렸다. 영국에서도 파인아트를 전공하면 가난하게 산다고. 너무 힘들 거라고 조금 더 상업적인 일러스트레이션과를 추천해주셨다. 하지만, 순수미술 혹은 철학 혹은 영화과와 같은 순수 학문의 영역을 공부하는 것은 어릴 적 꿈이었다. 영국 선생님들께 한국에서 배어온 드로잉 스킬과 아이디어에 대해 칭찬을 자주 받았었다. 나는 그곳에서 스킬도 좋고 아이디어도 좋은 학생이었다. 한국에서는 입시 기간에 시간을 맞춰놓고 제 시간에 그리지 못하면 회초리로 맞기도 했다. 정말 비굴했다. 여름- 겨울 방학때면 몇백만원씩 내고 다녔던 미술학원에서 돈주고 맞는 구조였다.


그렇게 다시 입시가 찾아왔다. 내 기억으로 영국에서는 총 5개의 학교에 지원할 수 있었다.

그렇게 런던의 유명 예술대학교 3 군대를 1 지망으로 지원하고 나머지는 비교적 들어가기 쉬운 학교들로 구성했다. 1 지망이었던 3 군대의 학교 중 2 군대를 떨어졌다. 마음이 급해졌다, 이대로라면 별로 유명하지 않은 지방에 있는 대학교(사실 영국에서 런던 외의 다른 지역에 있는 학교들도 한국의 스카이를 뛰어넘는 명문대가 많다 하지만 내 초이스들은 다 백업 플랜으로 중상위권 정도의 대학들이었다.)를 가기 위해 이 정도의 경제적 정신적 투자를 한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실력이 그렇게 엉망인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나의 1 지망 대학 중 마지막 대학에서 면접 요청이 왔다. 떨리는 마음으로 커다란 포트폴리오 가방을 들고 학교로 갔다. 고등학교 때부터 꿈꾸던 학교였다. 캠퍼스는 아기자기했고 우중충한 분위기가 예술이었다. 면접관은 매우 친절했다. 이것저것 내 작업과 나의 삶 그리고 한국에서 내가 받은 교육에 관해 물어봤다. 그리고 그렇게 면접이 끝나갈 때쯤, 기준 점수보다 잘 나왔던 내 아이엘츠 점수를 들이밀었다. 나는 입학허가서가 꼭 필요했다. 이 학교에 꼭 와야 했다. 그래서 나는 영어를 이 정도로 향상했고 , 한국에서 미술 선생님이 이 학교를 나왔다는 사실을 알려주자 면접관의 얼굴이 밝아지며 그래? 그럼 내가 너에게 언컨디셔널 오퍼를 줄게.라고 했다. 믿어지지 않았다. 유학생들 중에 언컨디셔널 오퍼를 받는 학생들은 많지 않았다. 말 그대로 지금 하고 있던 파운데이션 코스만 마무리하면 바로 입학할 수 있던 것이었다. 어안이 벙벙했다.


그렇게 나의 런던 생활이 시작됐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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