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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naMilk Jun 22. 2022

Where do I belong?

Let’s talk about education #2


웨어 두 아이이 빌롱 시리즈는 필자인 내가 한국사회에 살아가며 느끼는 크고 작은 이야기들의 집합체이다. 지극히 주관적인 시선을 담고 있으나 꽤나 날카롭고 합리적이라 자부할 수 있다.


필자를 짧게 소개하자면, 90년대 초반에 서울에서 태어난 서울 여자다. 어릴 때부터 취미로 시작한 무용, 악기 그리고 미술에 관심을 발전시켜 대학교에서 순수미술을 전공했다. 그리고 예술론을 전공한 후 현재 다문화, 이민, 미디어 그리고 젠더 스터디스, 글로벌 스터디스 등과 같은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하고 싶은 일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어릴 때부터 누구한테 지시받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했고, 하기 싫은 일은 죽어도 못했다. 반면에, 오타쿠 기질을 발휘하여 내가 꽂힌 분야에 대해서 만큼을 최선을 다해 임했다. 그렇게 운 좋게 얻은 유학의 길을 통해 영국 런던과 옥스퍼드에서 너무 길지도 그렇다고 너무 짧지도 않은 시간을 보낸 후 한국으로 돌아와 학업을 지속했다. 그러던 중 한국에서 근무하는 미국계 영국인 교수 남편을 만나 현재 서울에서 거주 중이다. 우리 부부는 문화, 언어 그리고 예술, 정치 등 사회의 다양한 이슈와 모습에 관심이 많고 객관적이면서도 주관적인 의견을 공유해 왔다. 그리고 이제 조금은 비판적인 자아성찰을 통해 한국에 살아가며 겪는 많은 차별 그리고 한국의 강점과 이점에 대해 글로 풀어나가고자 한다.


Let’s talk about education #2  


앞서 짤막하게 어떻게 유학을 결정하게 됐는지 나의 어릴 적 교육 환경을 설명했다.

그래도 아직 왜 굳이 유학을 갔어야 했는지에 대한 답은 아니겠지만(눈치 빠른 독자들은 이미 눈치를 챘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냥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며 항상 답답한 느낌이었다. 나의 가장 아름다운 10대 시절이 그저 학교-학원 그리고 입시만을 생각하면 흘러가는 것이 그때도 지금도 너무 아쉽고 싫었다.

특히, 예술 쪽을 공부하다 보니 한국의 답답한 입시 과정과 의미 없는 교육 방식들이 너무나 멍청하다고 생각되었다.

영국에서 5년 반 정도를 보내고 서울에 돌아와서 한국에서 대학원을 다니며 내 생각이 맞았다고 느꼈다. 그때라도 유학을 떠난 것이 앞으로 나의 삶에 큰 자양분이 되어줄 것이라고 확신했다.


런던에서 유명 예술대학 순수미술과를 입학했다. 부모님은 조금 더 좋은 대학을 가기를 기대하셨던 것 같다. 아무래도 한국에 좋은 예술대학이 거의 없다 보니, 유럽의 예술대학 수준에 대해 잘 모르시는 듯했다. 일단 내가 나온 학교는 졸업 전시에서도 가장 VIP들이 많이 찾아와서 학생의 작품들도 많이 구매하고 지원해주는 학교로 유명했다. 그리고 학교에 디자인 및 큐레이팅과(석-박사)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순수미술로 유럽 내에서도 매우 유명한 예술학교였다.

일단 런던의 대부분의 학교의 캠퍼스가 작고 아기자기한 것처럼, 내가 다닌 학교도 매우 작은 규모의 대학이었다. 하지만 과거에 루이뷔통 패션쇼도 할 만큼 매우 깔끔하고 예뻤다. 무엇보다, 원래 런던의 가장 부촌인 첼시 지역에서 출발해 계속해서 웨스트 센트럴 쪽 특히 웨스트 민스터와 영국 정보부 건물과 가까운 부촌 거주지역에 위치하여, 고급스러운 느낌 및 부자 백인들이 많이 가는 학교로 알려져 있었다.


영국의 학제는 대학교 3년(과에 따라서 내가 한 파운데이션 1년은 한국이나 미국의 1학년 과정과 비슷하다), 석사 1년 (과에 따라서 가끔가다 2년짜리 프로그램도 있으나 공식적으로 석사 과정은 1년이다), 박사 3년(논문까지 합해서 4년 정도 걸린다고 봐야 한다)이다.  과마다 다르겠지만 일단 예술학교에서는 교수님들을 튜터(tutor)로 부른다. 영국 대학교의 가장 큰 장점은 일대일의 튜토리얼(tutorial) 방식으로 흘러간다는 것이다. 그 튜토리얼 안에서 교수와의 대화 및 토론을 통해 작업에 필요한 레퍼런스 및 조언을 얻을 수 있다.


사실 학교를 다니며 중국 친구들 외에 누가 그렇게 부자고 누구 아빠가 누구고 이런 거는 신경도 쓰이지 않았고 알 수도 없었다. 다들 자유로웠고 자신들이 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작업에 쏟아부었다. 무엇보다 아직도 기억나는 말이 있다. 입학하자마자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그 당시 학과장이었던 교수님이, 우리는 너희를 예술가로 간주하지 학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그 정도의 학생의 작품과 생각에 대한 존중(respect)이 있었기에 성적에 상관없이 내가 하고 싶었던 다양한 작업들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한국에 돌아와 대학원을 다니며 졸업 논문을 쓸 때 내 논문은 약간은 정치적이고 논쟁적인 문제를 다뤘다. 그때 마주했던 벽이 ‘한국에서는 정치적이거나 종교적인 걸로 논문을 쓰는 걸 싫어한다’였다. 충격적이었다. 해외에 남아있던 주변 친구들도 도대체 정치적이라는 게 무슨 뜻이며 사회적 문제들을 다루는 논문이 아니면 뭘 써야 하냐고 되물었다. 물론 논문과 관련된 것은 아니지만, 대학교 1학년 때 종교적인 레퍼런스를 담은 작업을 하고 싶어 할 때 교수님과의 면담을 통해 나의 아이디어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 너무 종교적인 색이 짙은 일차원적인 작업이 아니라 조금 더 성숙하고 똑똑한 작업을 만들 수 있다면 작업과 에세이에서 종교적인 것을 언급하는 것이 금지 사항은 아니었다.


물론 영국 대학교들이 장점만을 가진건 아니었다. 물론 학교마다 달랐지만 내가 다닌 학교는 무척 자유로웠다. 방목 시스템이었달까. 그냥 학생들이 자유롭게 작업을 하고 한 번씩 전체 크리틱과 튜토리얼을 통해 과정을 검사받고 의견을 나누고 수정하여 학기말 과제(전시)를 통해 채점받는 형식이었다. 한국에서 선생님들과 부모님들이 떠먹여 주는 시스템이 체질이 맞는 학생들은 매우 어려워할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그리고 사실상 자신의 전공에는 전문가가 될 수 있는 특성화된 교육이었으나 그 오의 지식을 쌓기를 학교에 기대할 수 없었다(한국의 교양과목과 같은 개념이 없기에) 특히, 순수미술과는 정말로 런던 한복판에 스튜디오를 빌린 느낌으로 작업만 하다 한 학기가 끝나고는 했다.

사실 1학년 2학년일 때는 매일 학교에 와서 죽치고 있는 학생들을 향해 교수님들은 제발 나가서 놀고 펍가서 술도 마시고 나가서 사람들도 만나면서 아이디어를 얻고 많이 즐겨!!!!라고 조언을 해주고는 했다. 그들이 원하는 건 새로운 시도와 도전 그리고 다양한 창의성이었다.


어릴 때부터 예술가가 되고 싶었던 나는 한국에서 나름의 고난의 입시 시절을 넘어 드디어 원하는 학교에 입성했으나, 작업(studio practice) 대신에 더 관심 있는 분야를 발견했다. 바로 읽고 생각하고 쓰는 에세이 과목이 가장 흥미로웠다. 물론 영어가 나의 모국어가 아니었기에 아카데믹한 글을 영어로 쓰는데 항상 한계가 있었지만 그 부분은 주변 원어민 지인들에게 도움을 받으며 열심히 공부했다. 그때부터 석사는 미술이론 혹은 예술론을 공부하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렇게 마지막 학년이 되었을 때, 지난 4년간의 열심히 인해 번아웃이 왔다. 졸업전시와 졸업 눈문을 준비했어야 했다. 졸업논문을 쓸 때쯤 정말 하루하루가 너무 피곤했다. 그리고 미술 자체에 흥미를 잃었을 시점이라 그냥 대충대충 졸업만 하고 다른 걸 도전하자!라는 쓸데없는 생각이 내 마음에 자리 잡았다. 졸업 전시도 일반적인 파인아트가 아닌 뭔가 색다른 것을 해보고 싶었다. 그렇게 나의 강점이자 가장 킁 흥미인 글쓰기를 활용하여 짧은 에세이를 쓰고 그 에세이를 바탕으로 그 당시 패션을 공부하고 있던 친구와 협업하여 졸업전시를 진행했다. 내 에세이를 바탕으로 패션 디자인과 친구가 옷을 제작하고 나는 그것을 입고 사진을 찍었다.

중간 과정을 봤을 때만 해도 교수님들이 매우 좋아하셨다. 하지만 내가 학교를 졸업한 해는 영국의 브렉시트 레퍼 렌덤으로 유럽 정세가 매우 시끄럽고 혼란스러웠다.

졸업전시가 시작되자 학교의 민낯을 볼 수 있었다. 유명 콜렉터와 큐레이터 및 다양한 VIP들이 학교를 방문하자 몇몇 선생님들은 영국 백인 학생들 작업만을 보여주며 그들이 구매하고 후원하게끔 유도했고, 무엇보다 큰 상도 외국인 유학생은 배제되었다.

그때 본 영국의 민낯 특히, 백인 교수 및 학생들로 가득한 학교의 민낯은 철저히 구조적(institutional) 인종차별을 아무렇지 않게 시행하는 모습이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성적표와 졸업장을 받아 들었다.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받아보는 점수였다. 나는 나만 그런 줄 알고 자책했다. 하지면 며칠이 지나자 중국 학생들과 한국 학생들 사이에서 합리적인 의심의 루머가 돌았다. 평소에 열심히 하지도 않던 영국 애들은 최고의 점수를 받고 평소에 점수도 잘 받고 잘하던 동양인 학생들은 다 바닥의 점수를 받았다는 것이다. 중국 친구와 한국 동기들에게 연락을 해서 그들의 점수를 물어봤다. 충격적이었다. 정말 좋은 논문과 작업을 해온 학생들도 다 점수가 엉망이었다.

그냥 그러려니 했다. 뭐.. 졸업했고 많이 배웠고 나는 내가 하고 싶은걸 했기에 큰 후회는 없었지만, 깊은 속마음은 그게 아니었나 보다. 몇 달 내내 우울했다. 내가 하고 싶은걸 했지만 대다수의 파인아트 학생들과 다르게 조금 더 상업적이면서도 다양한 색채를 가진 작업을 진행했고, 실제로 주변에서도 그렇게 평가해 주었다. 하지만, 전통 영국 파인아트를 원하는 학교의 기준은 달랐나 보다. 내가 그걸 간과했다는 게 약간은 슬펐다. 하지만 그럴 때쯤, 1학년 때 교수님이었던 분의 이메일이 큰 도움이 되었다. 점수는 상관없다는 것이다. 예술가가 되고 사회에 나가서 살아가는데 석사학위 박사학위는 소용없다고. 그냥 꾸준히 내가 할 수 있는 작업들을 하며 살아가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대학교 동기들은 세계 곳곳에서 자신의 꿈을 펼치고 있다. 여전히 런던에 남아 최고의 아티스트 비자를 받고 작업을 하며 전시를 하는 작가 언니와, 한국에서 꾸준히 전시를 하며 살아가는 일러스트레이터이자 작가인 친구, 그리고 개인사업 및 아트디렉터로 자유롭게 살아가는 언니, 그리고 중국에서 계속해서 작업을 하고 전시를 하는 친구들, 영국에서 패션 회사 및 아예 다른 분야로 진출한 친구들까지. 정말 다양했다.


졸업을 하고 나면 , 특히 예술가가 된다는 것의 의미와 그것을 통해 내입에 풀칠이나 하고 살아갈 수 있을지에 대한 막연함은 어느 나라나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받는 학위 특히, 철학, 순수미술, 언어와 관련된 기본 학사 학위를 따기 전에 많은 고민이 동반되는 것은 사실이다. 사실상 지구 어디에서나 순수예술, 순수 인문학 학위를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드는건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순수학문 학위야 말로 다양한 가능성을 제공한다. 말 그대로 응용 학문을 탄탄히 받쳐주는 ‘가장 기본적인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과들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국에서도 파인아트 출신의 사람들이 아트 디렉터 및 다양한 시각 예술분야 에서 인정받고 승진이 빠르다(이건 실제로 뉴욕과 런던에서 광고회사를 다니는 분께 들었던 이야기). 그렇기 때문에 학교를 다니며 나의 강점을 잘 파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물론, 유학생활이 어느 학교에서 어떻게 공부를 해서 학위를 따고 고국으로 귀국하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런던이나 뉴욕 파리 같은 국제 도시들은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간다. 그리고 한국의 사회보다 더 개방적이며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분위기라는 것이 앞으로의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에 큰 영향을 줄지도 모르기에, 최대한 다양한 사람을 대하고 다양한 경험을 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교육 관련 시리즈가 끝나면 내가 어떻게 영어공부를 해왔는지(현재도 열심히 공부 중이다)에 대해서도 나누고자 한다.


유학생활에 후회가 없다면 거짓말이다. 아직도 하고 싶은 것이 많기에, 다시 돌아간다면 더 많은 것을 시도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곳에서 만났던 다양한 사람들과 문화, 그리고 언어에 대한 배움은 지금의 나를 있게 했으며 언제나 다시 돌아가고 싶은 좋은 경험이나 추억이 가득하다.


To be continun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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