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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naMilk Jun 25. 2022

Where do I belong?

Let’s talk about education #3

웨어 두 아이이 빌롱 시리즈는 필자인 내가 한국사회에 살아가며 느끼는 크고 작은 이야기들의 집합체이다. 지극히 주관적인 시선을 담고 있으나 꽤나 날카롭고 합리적이라 자부할 수 있다.


필자를 짧게 소개하자면, 90년대 초반에 서울에서 태어난 서울 여자다. 어릴 때부터 취미로 시작한 무용, 악기 그리고 미술에 관심을 발전시켜 대학교에서 순수미술을 전공했다. 그리고 예술론을 전공한 후 현재 다문화, 이민, 미디어 그리고 젠더 스터디스, 글로벌 스터디스 등과 같은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하고 싶은 일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어릴 때부터 누구한테 지시받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했고, 하기 싫은 일은 죽어도 못했다. 반면에, 오타쿠 기질을 발휘하여 내가 꽂힌 분야에 대해서 만큼을 최선을 다해 임했다. 그렇게 운 좋게 얻은 유학의 길을 통해 영국 런던과 옥스퍼드에서 너무 길지도 그렇다고 너무 짧지도 않은 시간을 보낸 후 한국으로 돌아와 학업을 지속했다. 그러던 중 한국에서 근무하는 미국계 영국인 교수 남편을 만나 현재 서울에서 거주 중이다. 우리 부부는 문화, 언어 그리고 예술, 정치 등 사회의 다양한 이슈와 모습에 관심이 많고 객관적이면서도 주관적인 의견을 공유해 왔다. 그리고 이제 조금은 비판적인 자아성찰을 통해 한국에 살아가며 겪는 많은 차별 그리고 한국의 강점과 이점에 대해 글로 풀어나가고자 한다.


Let’s talk about education #3


그렇게 학부를 졸업하고 잠시 한국에 들어왔다. 원래의 계획은 1년 정도 쉬고 다시 유럽 소재의 대학원에 가는 거였다.

하지만 정확히 무엇을 공부해야 될지 고민이 되어 잠시 쉬면서 고민을 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안 하고 고민만 하기엔 내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지금 당장 용돈을 벌어야 할 상황은 아니었기에, 마지막으로 바짝! 정신을 차리고 작업을 해보기로 했다.

그렇게 7개월 동안 월화수목금토일 하루도 빼놓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 역시나 많이 그리고 고칠수록 그림은 좋아졌다.

그렇게 만들어진 포트폴리오를 가지고 공모전을 찾기 시작했다. 이것저것 찾으면서 한국에서 공부를 지속하는 것도 괜찮겠다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공모전과 대학원 입시를 동시에 진행했다. 주변 어른들의 조언을 들으니 한국에서 미술을 하려면 서울대나 홍대를 꼭 나와야 한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50-60대 우리 부모님 세대 분들이 해줄 수 있는 옛날 조언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그중 하나의 학교의 이론과 를 준비했다. 아무래도 이론과 출신이 아니라 공부가 필요할 것 같아 따로 3개월 정도 미학과 미술사를 공부해서 지원했고

합격했다.


다시 공모전으로 돌아가, 면접을 보러 가자 거기에는 국내 중하위권 대학 출신 작가님과 나를 동시에 면접을 진행하는 것이라는 것을 그 당일에 알았다.

별로 상관은 없었다. 하지만 면접 내용이 기가 막혔다. 어쨌든 나는 해외에서 졸업하고 돌아온 따끈따끈한 아마추어 작가였다.

그리고 같이 면접을 보던 남자분은 군대까지 다녀온 나보다 연장자였다. 내 포트폴리오를 펼쳐놓고 이야기를 하는데 그 남자분이

“아 그 학교, 제 주변에도 몇 명 갔어요 근데 거기 1년 아니에요? 영국 가면 다 이렇게 그리나 봐요 ㅋㅋ” 엄청 비아냥 거리는 톤으로  말했고 나는 “ 아, 석사가 1년이고 저는 학사라서 3년이에요”라고 대답한 후 내적 아니꼬움을 삼키며 그러려니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대학원 얘기가 나오더니 왜 그 학교를 가냐며 다 옛날 얘기다 요즘 누가 그 학교를 가냐는 꼰대스러운 잔소리를 늘어놨다. 나는 면접을 보러 온 것이지, 누군가에서 잔소리를 들으러 온 게 아니었기에 그냥 당황스럽고 웃겼다.


그때는 여린 마음에, 어… 왜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하지?(텍스트만 놓고 보면 별 이야기가 아닐 수 있지만 한편으론 처음 본 사람한테 굳이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라고 생각했지만, 한국에서의 6년의 시간이 지난 현재 정말 많은 사람들이 초면에도 무례하게 꼰대 짓을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학원에 큰 기대감을 품고 입학했다. 한국의 대학원은 2년 동안 수업을 듣고 졸업시험을 치른 후, 논문을 쓰는 구조였다. 영국의 석사가 1~2년인 것에 비교해서 3년 정도의 시간이 걸리는 게 결코 적은 시간은 아니었다. 첫 1년은 장학금 없이 부모님이 학비를 내주셨다. 영국에서는 수업을 선택해서 듣는 구조가 아니어서, 새로웠고 즐거웠다. 무엇보다 수준 높은 교수님, 강사님들의 강의를 통해 정말 많이 배울 수 있었다. 하지만, 교수님들의 능력과 학생들의 복지 및 합리적인 시스템은 연관성이 없었다. 아무리 교수님들이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어도 학교 시스템이 80년대에 머물러 있다면 교수들뿐만 아니라 학생들도 답답해 미칠 지경인 상황에 마주할 수밖에 없다.


한국 대학원에서 가장 실망했던 부분은, 논문 지도 시스템이 제대로 잡혀있지 않았다는 것이다.(사실 학교와 과 그리고 교수들 마다 다르기에, 이것을 모든 대학원에 적용할 수는 없다). 그리고 토론과 활동적인 지식 습득의 장이 아닌, 그저 고등학교 때와 비슷한 수동적인 교육 방식이었다.


대학원 2년째에 들어갈 때쯤, 친구에게 소개받은 교수님의 TA(teaching assistant) 조교 생활을 시작했다. 일단, 아직 한 번도 일해본적 없는 삶이었어서, 약간은 부끄럽기도 하고 재밌을 것 같기도 하고 이것저것 바쁘게 하면서 시야를 넓히고 싶었다. 그리고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기에, 경제적인 부분도 만족스러울 것 같았다.

교수님은 나와 다른 과 교수님이셨고 매우 젊은 남자 교수님이셨다. 영국에서 공부하신 경험이 있으셔서 잘 맞았고 재밌고 유쾌하셨다.


하지만, 공과사의 구분이 잘 가지 않았달까? 나는 어디까지나 티칭 어시스턴트였다. 하지만 내가 하는 일들은 교수님의 개인 일이었다. 1년 동안 학술지 논문 및 본인 박사 논문(예술대 교수님들 중에는 아직 박사가 없이, 석사 2개 혹은 석사 1 그리고 예술적 경력을 가지고 교수가 되는 경우가 많다) 관련 리서치를 하는 것이었다. 사실 그런 리서치 어시스턴트의 일은 따로 분리되어야 하는 것이 맞았다. 하이 튼, 나는 장학금으로 받은 돈을 차곡차곡 모아 런던 생활 시절 절친 친구들과 호주 여행을 계획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3달 전부터 꾸준히 알려드렸다. 근데, 그 사이에 내가 작성했던 논문이 학술지에 등재되지 못했고, 데드라인이 내가 출국하는 날이었다. 사실 교수님은 내가 쓴 글을 한번 읽으시고 맞춤법 및 글의 문장만 살짝 바꾸셨을 뿐 98% 나의 글이었다. 그 당시엔 화가 난다거나 불합리하단 생각이 들면서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공동 저자로 이름을 넣어주기로 하셨고, 한국에선 원래 다 이렇게 한다고 하니 나도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분명히 출국을 말씀드렸고 방학이 시작된 상황에서 나에게 일을 시키는 것에 대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느 정도 뼈대를 만들어 드렸으면 마무리는 저자인 교수가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사실 1년 동안 약간의 비윤리적인 일을 시킴에 있어 불만이 없진 않았다. 하지만, 왜 방학이 시작했는데 본인이 해야 할 일을 나에게 시키는지 참다 참다 폭발하여, 장문의 문자를 보냈다. 말은 길었지만 결국 내용은 ‘나는 고작 석사 나부랭이인데 나한테 학술지 논문을 완성하라고 하면 어떡하냐 그 정도는 교수님이 하셔야 한다, 그리고 나는 분명 여행 간다고 몇 달 전부터 알려드리지 않았나’였다. 그 교수님과 나의 관계는 거기서 끝난 듯하다.


그렇게 여행에서 돌아와 논문 작성을 시작했다. 쉽지 않은 길이었다. 고작 석사 논문이었지만 과의 특성상 논문으로 취직을 하는 과였기에, 논문을 잘 써야 했다.

나에게는 공동 지도교수님과 지도교수님 두 분이 계셨다. 결국 처음부터 끝까지 논문을 도와주신 건 공동 지도교수님이셨다. 사실상 지도교수님은 행정적인 일 외에 봐주신 게 없었다. 내 논문은 한국 사회에서 약간은 예민한 사회적-역사적-정치적 이슈를 예술작품으로 표현한 작가들과 그와 관련된 철학적 이론에 관한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교수님들의 위선적인 면을 보았다. 나의 공동 지도교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많은 지지를 보내주셨다. 하지만, 대부분의 교수님들은 이런 시끄러운 소재를 왜 논문으로 쓰는지 이해하지 못하셨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말씀하셨다.


하지만 나의 생각은 달랐다. 이런 시끄러운 소재를 연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매번 이미 누구나 다 다루고 알고 있는 사실만 나열하는 논문을 써야 하는 것인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논문에는 자신의 생각과 의견이 어느 정도 들어가고 그것을 이미 있는 이론과 근거들로 무장되기만 한다면 문제없다고 생각했다.

일단, 정치적인 이슈기 때문에 다루면 안 된다는 말은 논리에 맞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는 다른 학생들 앞에서 크리틱을 들으며 마음에 큰 상처를 받았던 것 같다. 사실, 크리틱이라 하면 영국 학교들이 정말 잔인할 만큼 냉철하고 솔직하다. 아무래도 학부가 순수미술인만큼 자신의 작품을 학생들 그리고 교수님들 앞에서 검사받고 크리틱을 받는 건 너무나 익숙한 일이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나의 작품을 설명하고 그것으로 글을 쓰고 발표하는 것을 배워왔다. 하지만, 대학원 논문 심사에서 받은 크리틱은 약간의 인신공격에 가까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왜 아무것도 해주지 않으면서 말만 많은 것인지 교수들의 태도가 이해가 가질 않았다.


현재는 남편인 그 당시 남자 친구도 한국의 탑 대학교에서 조교수직을 하고 있었다. 그도 학생들을 지도하고 논문 심사에 참가했지만, 한국처럼 의미 없는 논문 심사는 처음 보는 듯했다. 미국이나 영국에서는 심사라는 것은 이미 논문이 어느 정도 완성된 통과할 자격이 있는 학생들에게 조금의 크리틱과 조언을 통해 남은 시간을 통해 수렴된 조언을 바탕으로 논문을 완성시키게 하는, 즉 이미 통과될 학생들만 받는 것이 심사라고 했다. 근데 한국에서는 심사장에서 이전에 이루어져야 할 크리틱이 이루어지니 얼마나 비효율적이며, 왜 학생들이 심사를 받는데 돈을 지불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석사를 하던 당시 친한 동생은 이미 영국에서 박사를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영국에서 석사가 1년짜리라 가능했지만 나도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사실상 졸업 시험도 결국 달달 외워 보는 시험이었다. 심지어 시험 범위도 하루 반나절에 라스트 미닛으로 공지했다.

모든 게 정신없고 비합리적이었다.


어쨌든, 그래도 한국에서 예술로 유명한 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잘 졸업했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바로 취직을 하여 6개월의 시간을 갤러리에서 보냈다.



한국에서 대학원을 다니며 느낀 것은, 정말 꼰대력 만렙의 고인 물 시스템이라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이런 문화가 짙은 학교를 다닌 듯 하나..

이런 학교들의 특징이 과거의 명성에 젖어 더 이상 발전이 없다는 것이었다.

언제나 성공은 양날의 검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명성을 얻는 순간 더 이상의 발전은 없다. 그것을 유지하는 것에 총력을 기울이다, 결국엔 도태되어 버린다.


대학원을 졸업한 지 3년의 시간이 지났지만, 그냥 석사도 유럽에서 했다거나 미국에서 했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나의 포지션은 약간은 애매하다. 완전히 외국에서 학위를 따고 들어온 것도 아닌 한국과 영국 에서 반반씩 공부한 느낌이랄까?


그래도 공부에 열정을 가지고 있어, 서울 소재의 한 명문 사립학교의 박사과정을 준비했다.

준비하기에 앞서 과의 교수님을 만나보고 싶어 직접 연락을 드렸고, 그분은 흔쾌히 시간을 내주셨다.

그분과의 만남은 지적으로 아주 즐겁고 감사한 시간이었다.

그렇게 긍정적 피드백을 받고 남은 시간 동안 열심히 준비하여, 드디어 면접의 날이 다가왔다.

코로나를 핑계로 줌(zoom) 면접을 진행했다.

하지만 면접이 진행되자 면접관들은 “오셔도 해줄 게 없을 것 같네요”였다.


1. 나의 아카데믹 백그라운드가 미술인데, 아무래도 미술 관련 교수님이 과에 없다.

2. 그냥 다른 학교 영화과나 예술 관련 과를 가시는 게 어떨지

3. 혹시 학계에 남고 싶으신 거냐? 한국은 외국과 다르다.. 학사 석사 박사 과가 다 다른 게 학계에 남는 것을 어렵게 할 것이다.


이런 말만 오고 갔다.

나는 면접이 끝나고 엉엉 울었다.

사실 박사를 하고 내 연구를 하는 것은 나의 큰 꿈이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가고 싶은 과와 학교가 한정되어 있어 한 학교밖에 지원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서울에 살면서 지방으로 학교를 다니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결혼한 몸으로 혼자 유학을 떠날 수도 없었다.


일단 화가 나기 시작했는데 그 이유는 내가 지원한 과는 다학제(interdisciplinary) 학제로 구성된 과였다. 사실 한국에 이런과가 생긴 것이 처음이라 나도 매우 신기했다.

특히 이 과 안에서 문화이론을 전공하는 것에는 학사 석사에서 무엇을 공부했는지 크게 중요하지 않다. 특히, 내 석사 논문과 이 과의 연구소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가 매우 맞닿아있었고, 내가 미리 만나고 온 교수님도 그 점을 되게 좋아하시고 높게 사셨다. 하지만, 결국 현실적인 문제였다. 아무리 다학제 연구라고 해도 아직 한국에서는 이렇게 다양한 배경의 학생과 학자를 수용하는 분위기가 아니라는 것이 큰 이유였다.


첫 2주 동안 마음이 너무 힘들었다. 한국이 너무 싫었다. 내 꿈을 위해서라도 이민을 가고 싶었다. 해외 학교들의 프로그램을 찾아봤다. 그들은 그들이 학생에게 기대하는 바를 정확히 써놨다. 예를 들어 문학석사(MA)만 박사과정에 지원할 수 있다던지(나는 학부는 미술이고 석사는 문학석사이다). 내 배경이 미술은 맞지만 미술은 문화와 직결되며 나의 석사는 문학석사이다. 미대 소속이지만 인문대 과정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면접을 보는 것이지 어떠한 조언을 듣는 자리가 아니었기에 나는 너무 당황스러웠다. 꽤 열심히 면접을 준비했기 때문이다.


나에게 이런 경험이 처음이 아니었기에 별로 놀랍지 않으면서도 놀라웠다.

그냥 가슴이 답답했다. 몇 년 전에 서울 소재의 유명 여자대학교의 대학원 페어에 참석한 적이 있다. 그때도 내가 관심 있는 분야의 교수님들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싶어서 참석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모학과 교수님과의 대화를 통해 나는 다시 한번 큰 ‘문화 차이’와’ 세대차이’를 느꼈다.

우선 그 교수님은 나의 석사가 그냥 실기과 석사라고 받아들이신 듯했다. 그녀는 그렇게 예술하는 사람들을 무시하며 예술하던 사람이 공부과에 오면 힘들 것이라고 석사부터 다시 하라고 했다. 그리고 그 과의 석사생을 소개해주었고 그분에게 이 분야가 얼마나 어려운지 들어보라고 했다.


그 학생은 나에게 우리 과에 오면 프랑스 미학도 알아야 하고 정말 맨날 읽고 쓰고 그것밖에 안 해서 어렵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미, 내 전공에서 하고 있던 일이었다. 내 석사 전공 출신들은 주로 비평 혹은 큐레이터의 길로 들어선다. 이 두 직업은 어느 나라에서나 고학력 전문직이다.

나는 그냥 그녀가 하는 얘기를 쭉 경청했다. 그리고 그녀는 영어 실력을 강조하며, 모든 글들이 영어 원문이 많아서 영어도 잘해야 하는데 어떻게 영어는 좀 잘하시냐고 물어봤다.

나는 그들의 오만함에 정말 충격을 받았다. 그 자리에서 아… 저 지금 예술비평 공부하느라 프랑스 미학은 기본으로 공부하고 있고요, 학부는 영국이고 남자 친구가 미국 사람이라 영어 잘해요.라고 맞받아 쳐야 했을까? 나는 그냥 하하 웃고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꼰대력 만렙 한 사회의 분위기에 다시 한번 씁쓸해졌다.

그들도 알고 있다. 그래서 항상 ‘한국은…’ 이란 표현을 통해 자신들의 밥그릇 챙기기 때문에 혹은 답답한 사회의 구조의 문제를 어물쩍 넘겨 버린다.


이미 해외에서는 다양한 분과학문의 학자들 학생들이 연합하여 새로운 연구 프로젝트 및 사회 이론들을 연구한다.

21세기는 다양한 분야들의 통합하여 연구되고 그것이 사회와 세상에 적용되는 시대이다.


하지만 한국만 계속해서 나와 다른 이들을 배척하고 자기들끼리 모든 걸 이루려고 한다는 걸 몇 번이나 느꼈다.


아직도 마음이 쓸쓸하지만, 세대교체가 이루어지는 과정 중에 발생하는 과도기의 부작용이라고 생각하려고 한다.

이 과정을 겪으며 많이 좌절했지만, 가장 씁쓸한 것은 아무래도 나의 첫 글에서 말했든 서로를 존중하는 문화의 부재이다.

학생은 교수가 시키면 해야 하고, 교수는 자신이 장학금을 주는 것처럼 학생을 부려먹는다. 사실 장학금은 학교에서 나오는 게 아닌가?

무엇보다, 나의 시간 그리고 나의 가치 나의 아이디어는 존중받지 못한다. 일단 건강한 크리틱과 인신공격의 경계의 부재가 가장 큰 문제가 아닌 듯싶다.


이렇게 나의 경험과 생각을 통해 살펴본 교육 시리즈를 마친다.

분명 한국 교육의 장점도 있을 거라 생각한다. 한국인들은 끈기가 넘치고 똑똑하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증명되었고 무엇보다 현재 전 세계에 퍼져있는 똑똑하고 멋진 한인 교포 및 이민자들을 통해 한국의 위상이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똑똑한 한국인 재능 많은 한국인들이 다시 국내에 돌아와 한국의 발전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문화도 많이 바뀌어야 한다.

학교와 직장에서 받는 스트레스는 업무와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가 전부여야 한다.

더 이상 교수와 학생의 관계 그리고 직장 상사와 부하 직원의 관계가 상하 관계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 진정한 소통을 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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