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잃은 기분이 들 때
요 몇 주간 계속 길을 잃은 기분이 들었다.
주말 동안 디지털 디톡스랍시고 핸드폰을 비행기모드로 두고 지내보기도 하고, 대체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 글을 써보기도 하고, 철학 책을 읽어보기도 하고, 친구들을 만나서 내 고민을 토로해보기도 하고, 내 머리속이 이 생각으로 가득차서 뇌가 터져버릴 것만 같은 몇 주를 보낸 결과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았다.
가장 큰 문제는 내가 내 삶을 주체적으로 이끌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현재 그저 수동적으로 외부 사건에 반응정도만 하면서 살고 있다. 회사에서 누군가 일을 주면 일을 하고, 인스타와 웹툰을 보며 누군가의 창작물이 주는 자극을 그저 받아들이고, 친구들이 만나자고 하면 만나고, 운동할 시간이 되면 운동을 하고, 배가 고프기 시작하면 밥을 먹는다.
더 큰 틀에서 보면, 지금 내가 왜 싱가폴에 살고 있는지 질문해봤을 때 '그냥 이미 살고 있으니까', 또는 '한국에서 일하고 싶지는 않아서' 정도의 답변 외에 할 말이 없다. 첫 번째 이유는 수동적임 그 자체고, 두 번째 이유는 한국에서 일하지 않을 이유지, 싱가폴에서 살 이유가 아니지 않는가.
내가 지금 하는 일을 왜 하고 있는가 물었을 때 드는 생각은 '그냥 이미 하고 있으니까', '하는 일에 비해 돈을 꽤 주니까' 정도이다. 현재의 상황을 변화시키기 귀찮아서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을 내가 선택한 주체적인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 다음 질문은 '그래서 그러면 어디에서 뭘하면서 살고 싶은데?'이다. 이 질문에 답하려면 내 선택과 결정을 뒷받침하는 나만의 원칙이나 신념이 있어야한다.
그러나 나는 인생의 이정표가 될 만한 신념이나 원칙이 없다.
'주위에서 누가 뭐라고 이야기하든 나에게 중요한 건 이것이고 그래서 이런 결정을 내리겠다' 라고 할만한 무언가가 없다.
대체 의미있는 인생은 무엇인지, 내가 꼭 지키고 싶은 원칙은 무엇인지, 어떤 목적의식을 가지고 삶을 살고 싶은지, 내가 무엇을 할 때 가장 행복한지, 답 없는 의문들만 머리에서 빙빙 돌았다.
어떤 책에서는 행복에 대해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인간은 행복에서 멀어진다고들 한다. 어떤 친구들은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몇이나 되냐며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즐기며 살라고 했다. 다른 사람들은 내가 너무 배불러서 이런 고민을 한다고 했다. '매슬로우의 욕구 단계 이론에 따라 1-4단계 욕구가 다 채워져서 5단계 자아실현의 욕구를 충족시키고 싶은건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행복한 삶을 살고 싶은 건지,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싶은 건지, 행복과 쾌락의 차이는 대체 무엇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어떤 책에서는 인간의 기억이란 믿을 수 없는 것이기에 그 기억으로 세운 신념이나 원칙도 사실 모순으로 가득차 진실되지 못한 것이라고 했다. 어차피 모순적이고 잘못된 원칙을 가지고 인생을 살거면 그냥 아무것도 없이 사는게 정답일까? 아니면 나중에 바뀌더라도 지금 내 선택의 베이스가 될 원칙이 있는게 맞나? 그 원칙마저 없다면 본능적인 욕구에만 충실하게 살아가는 짐승과 다를게 무엇인가? 이정표 없이 그저 하루하루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의미있는 인생이 맞나. 의미있는 인생을 추구하는게 맞는건가, 행복한 인생을 추구하는게 맞는건가. 이러한 질문들로 머리가 정말 터질 듯할 때 쯤 또 다른 생각이 들었다.
'인생이 새하얀 도화지라면 난 지금 거기에 무엇을 그릴지만을 생각하느라 시간을 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냥 현재 상황에 최선을 다하면서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도화지에 뭐라도 그리기 시작하는게 정답 아닐까. 이게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지우고 다시 그리면 되는 것이고, 사실 그 잘못 그린 그림조차도 내가 인생을 잘 설계하려고 노력한 흔적이기에 그 자체도 내가 아닐까.
이쯤 되자 '좋은 인생이란 의미 있는 인생도 아니고, 내가 행복한 인생도 아니고, 그저 나다운 인생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답다'라는 게 무엇인지는 내가 지금 아무리 머리를 싸매고 고민한다고 수학처럼 답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현재 수동적으로 반응하면서 사는 것도 나고, 이건 아닌 것 같다고 고민하는 것도 나고, 다른 선택지가 뭐가 있는지 찾아보면서 어떤게 나에게 맞는지 생각해보는 것도 나고, 용기가 나지 않아서 이 선택지를 택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도 나고, 용기 없는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하는 것도 나인 것이다.
물론 내가 원하는 나는 지금의 나와 다르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래와 같다.
1. 현재의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것
2. 내가 원하는 내 모습이 무엇인지, 그 모습이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모습이 맞는지 고민할 것
3.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모습이 있다면 그 목표에 다다를 수 있도록 노력할 것
4.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나라는 것을 받아들일 것
처음부터 너무 거창하게 생각했나 보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최선을 다해 하나씩 해나가야겠다. 나다운 인생을 찾아가는 그 과정조차도 나 자신이며 내 인생이다. 이정표를 찾아야만이 나다운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고 그 과정마저 내 인생 그 자체라는 것을 받아들이도록 하자.
누군가 내가 좋은 인생, 의미 있는 인생, 행복한 인생을 살고 있냐고 물어본다면 답은 언제나 '그렇다'일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매 순간 나다운 인생을 살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