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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나팍 Apr 06. 2024

1등 하고 싶은 유치원생 딸에게 해주고 싶은 말

얼마 전 유치원 원장님이 학부모 설명회에서 하신 말씀이다.


- AI 시대에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 과연 우리 아이들의 어떤 능력을 키워야 할까요? 암기식 공부를 잘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요? AI 가 우리보다 더 똑똑합니다. 앞으로 우리 아이들에게 필요한 소양은 스포츠와 문화예술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아이들을 1등으로 만들지 않겠습니다. 모두가 나란히 한 줄로 서서, 다 같이 똑같은 1등을 하게 만들고 싶습니다.



요지는 성적순의 등수가 중요한 게 아니라, 스포츠나 문화생활을 통한 감수성, 그리고 창의력 등의 AI가 흉내 낼 수 없는 인간만의 능력을 키우는 게 중요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훌륭한 학습지로 앞서 가는 것보다, 놀이와 바깥활동을 통해 기본기가 단단한 아이들로 교육하겠다는 것이었다. 내가 전적으로 동의하는 내용이다.

 


어릴 때부터 등수로 나열되는 우리는 서열화에 매우 익숙하다. 성적 목표는 항상 '반에서 00등 안에 들기'와 같이 남들을 제치고 앞서가는 목표를 세웠다. 동시대에 유럽의 어느 다른 나라 아이들은 등수라는 개념이 전혀 없이 자란다는 것을 성인이 되고도 한참 후, 최근에서야 알았다. 우리에게 등수는 너무도 당연한 교육문화였다.



대학생 때, 여러 대외활동과 취미, 놀기에 바빴던 나는 4학년이 되고서야 큰 결심을 하고 결의에 찬 말투로 아버지에게  적이 있다.

 

- 아빠! 저 결심했어요! 저 이번에 토익공부 하려고요! 저 토익 900점 맞을 거예요!


나는 비장했다.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스스로 공부를 다짐했으니 혼자 대견하다고 느끼며 말을 꺼냈다. 놀기 좋아하는 딸이 드디어 공부 선언을 했으니 아빠에게 이런 응원을 받을 거라 기대했다.

 

- 그래, 잘 생각했다. 열심히 해봐라!


그런데 아빠의 대답은 전혀 예상밖의 내용이었다.


- 그런 건 아무 소용없어! 결과로 증명해야 해. 토익 점수받고 나서 '증서'로 얘기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아무 의미 없어!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아. 고득점 받고 나서 그때 얘기해라.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날 만큼 반전이 있는 답변이었다. 아빠는 대기업에서 성과와 결과 위주로만 평가받는 생활을 20년 이상 했기 때문에, 이런 생각이 당연했고 세상의 큰 이치나 다름없었다. 다짐이나 각오 따위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결국 제 아무리 잘하겠다고 의지를 불태워도, '900점'이라는 성적표가 없으면 세상은 기억해 주지 않는다는 가혹한 현실을 아빠는 혹독하게 깨지고 부딪히면서 몸소 배운 것이다.


나는 '증서'가 생길 때까지 이를 악물고 독하게 공부에 올인했다. 그리고 4개월 만에 토익 900점을 달성한 뒤 아빠에게 당당하게 자랑할 수 있었다. 세상은 1등을 인정해 주고, 결과로 평가된다는 것을, 사회는 정말 쓴 맛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느끼는 순간이었다.

 


사회는 언제나 1등을 찬양한다. 남보다 월등해야 하고, 남보다 잘 살아야 하고, 남보다 공부를 잘해야 하고, 내 집은 남들보다 좋아야 하며, 내 아이는 남보다 한글을 빨리 떼야한다. 우리는 남보다 앞서가야 행복하다고 느낀다. 어릴 때 성적을 시작으로 인생의 모든 영역이 비교와 서열의 기준에 맞춰있다. 이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행복은 나와는 머나먼 일이 돼버릴 수도 있다. 이런 사회 속에서 1등이 아닌 모두가 한 줄에 서길 바란다는 유치원 원장님의 생각이 이례적이면서 매우 소중하게 다가왔다.



나 또한 '1등 문화'에서 최대한 멀어지고자 '아이를 타인과 비교하지 않기'를 육아원칙으로 삼고, 늘 의식을 깨워두기 위해 노력했다. 등수를 언급하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5세가 되자 아이에겐 자연스럽게 남보다 잘하고 싶은 승부욕이 생겼다. 물론 살아가면서 반드시 필요한 요소다. 그런데 승부로만 가득 찬 세상에서 너무 어릴 때부터 승부에 집중하는 건 지양하길 바랐다.

 

- 엄마,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했는데 00 친구가 너무 빨리 달려. 나는 맨날 뒤에 있어. 내가 1등 하고 싶은데. 내가 제일 빨리 달리고 싶은데 속상해. 나도 1등으로 달리고 싶다고. 엉엉!

- 엄마! 나 오늘 1등 했어!!! 오늘 줄 서기 했는데 내가 1등으로 섰어!!!



1등을 못해서 속상하고, 줄 서기 1등 한 날엔 기뻐하는 딸을 보며 1등이 중요한 게 아니라고 외치고 싶지만 딸이 공감할리가 전혀 없다. 그러다 오늘 벚꽃이 흐드러진 하늘을 보며 문득 깨달음이 왔다.



주말에 벚꽃이 피기 시작했다. 같은 장소에서도 어떤 나무의 꽃은 앞서가서 피고, 어느 나무의 꽃들은 느릿느릿 아직 피어나기 전이였다. 너른 공간에 예쁘게 활짝 핀 벚꽃과 꽃이 없이 앙상한 벚꽃나무들이 뒤섞여 있었다. 당연히 따뜻한 봄날을 맞이하자마다 기다렸다는 듯 화사하게 피어난 벚꽃 나무 바라보았다. 가장 먼저 꽃을 피운 벚꽃나무들은 사람들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겠지. 뒤쳐진 나무들은 시무룩할지도.



그리고 2일 뒤, 전국에 비가 내렸다. 1년 내내 나무로 있다가 단 며칠 꽃을 피우는데, 고작 2일 만에 꽃잎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며칠간의 비 소식에 힘겹게 피어낸 앞서가던 꽃들은 이틀의 짧은 영광을 맛보고 땅으로 다 떨어져 버렸다. 그리고 다시, 금요일. 느림보처럼 뒤쳐진 것 같아 보였던 나무들이 하나씩 꽃을 피우더니 화사한 벚꽃이 만개해 자태를 뽐냈다. 비가 지나간 뒤라, 그들은 더 예쁘게 더 멋지게 더 오랫동안 빛을 뿜어낼 것이다. 앞서가던 나무는 벌써 잊혔다.



여기서 1등은 누굴까? 가장 빨리 꽃을 피운 나무일까? 아님 가장 늦게 꽃을 피운 나무일까?



많은 생각이 스쳐갔다. 남보다 잘 살기 위해 우리는 부단히 노력한다. 남보다 앞서기 위해 오늘도 달리기 선상에서 뛰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 빨리 달려서 1등을 하는 게 꼭 1등으로 행복한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비바람이 불어 예상밖의 일들이 발생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로 인해 잃는 것이 있거나, 미처 내가 알아차리지 못했던 찰나의 행복들이 있을 수도 있다. 지키지 못한 건강이 될 수도 있다. 내적 성장, 평온과 기쁨, 배려와 관용처럼 중요하지만 비교대상에서 고려되지 않는 요소들은? 더 많이 가진 사람보다, 뒤에 있어도 더 중요한 요소들을 챙긴 사람의 인생이 훨씬 충만하고 행 건 아닐까.


성찰을 통해 순위와 상관없이 언제 어느 때라도 행복할 수 있음을 알아차린다면 비교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 지금 당장 행복할 수도 있다. 마음먹기에 따라 과정에서 즐기고 기뻐할 수도 있고,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행복할 수도 있다. 주위의 시선과 상관없이 자기 만족감을 느낄 줄 아는 것도 중요하다. 나를 다독이며 나아가는 것이 더 롱런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인생에는 중요한 요소가 많다. 그러니 순위 경쟁에서 다투며 앞만 보지 말고, 삶을 풍요롭게 하고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을 바라보면 좋겠다.




딸아,

눈에 보이는 것들에서 1등이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서 1등을 하길 바란다. 내면의 아름다움과 강인함,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 내적 성찰, 여유와 너그러움, 자연을 사랑하고 더불어 살기, 감사와 평온, 기쁨이 네 마음속에 1등으로 충만하는 네가 되길 바란다. 제나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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