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양이의 죽음에 대하여 38] Ⅱ. 책임에 대하여 ③
가족(사람이든 동물이든)이 죽고 이상행동을 보이는 반려동물의 이야기는 차고 넘친다. 반려와 야생의 경계에 있는 동물도 마찬가지다.
미미가 옆에 있던 시절 내가 아끼며 밥을 챙겨주던 길고양이 남매가 있다. 살던 건물 주차장에 나타난 아이들이었다. 어린 남매 둘이 고단할 길 생활을 의지하는 모습이 기특하고 보기 좋았다. 털코트대로 삼색이, 노랭이라는 흔한 이름으로 불렀는데 둘은 늘 함께였다. 노랭이는 수컷이라 몸집이 더 크고 물정이 없는 편이었고, 삼색이는 약간의 새침함과 경계가 있었지만 밥 챙겨주는 사람은 귀신 같이 알아보고 애교를 부리는 영리한 아이였다. 주차장을 지나갈 때면 귀엽게 냥냥 대며 따라오곤 했다. 사료에 캔을 비벼 주는 날에는 횡재했다는 얼굴로 눈키스와 골골송을 보내주는 예쁜 아이였다.
어느덧 아이들 발정기가 오면서 고민 끝에 TNR(중성화 후 방사)을 해주기로 마음먹고 포획을 시도했다. 어수룩한 노랭이는 금세 잡혀 수술에 성공했는데 삼색이는 계속 실패했다. 미미가 아프던 때라 삼색이 포획은 그만 포기하고 다음으로 미루고 말았다. 삼색이는 곧 아기를 가졌고 몇 달 새 두 번이나 출산을 했다. 어린 엄마가 아기들을 챙기는 모습이 사랑스러우면서도 속상했는데 그때도 노랭이와 삼색이는 애틋했다.
첫 아가들은 며칠 못가 잘못 됐다. 안전한 자리를 찾던 삼색이가 주차장 천장 배관 쪽에 몸을 풀었는데 눈도 못 뜬 아가 둘이 바닥으로 떨어져 잘못되고 말았다는 걸 관리인께 들었다. 몇 달 뒤 두 번째 출산은 세 마리를 낳았는데 이 녀석들은 눈도 뜨고 하는 걸 지켜봤다. 오가는 사람을 피해 주차장에서 여러번 아이들을 옮겨서 나와 숨바꼭질이 계속됐는데, 어느 날엔가 차량 아래서 노랭이가 삼색이의 젖을 먹으려고 하는 것을 보고 어이가 없어 웃기도 했다. 삼색이는 철없는 오라비의 행동에 별 무반응이었다. 하지만 두 번째 아이들도 전부 살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노랭이가 보이지 않았다. 간혹 떨어진 날도 있었기에 그러려니 했는데 이튿날도 그 다음날도 노랭이가 없었다. 어디서 사고를 당했는지 노랭이는 돌아오지 않았고 삼색이만 주차장에 덩그러니 남았다. 그 즈음 노랭이가 꿈에 나왔다. 주차장 밖 화단에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선명한 꿈이었는데 깨고 나니 노랭이가 나에게 작별 인사를 한 것이란 느낌을 받았다. 어느 정도 예감했지만 노랭이가 떠났다는 확신과 함께 삼색이가 많이 걱정됐다.
삼색이는 알았을까. 둘도 없는 단짝이 세상을 떠났음을. 삼색이는 두 번의 출산에서 자기가 낳은 아이들이 잘못된 것을 지켜봤다. 삼색이는 새끼들을 덮쳤던 결말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알았을까. 그리고 마찬가지의 일이 노랭이에게도 닥쳤음을. 누구도 답할 수 없는 질문이지만 삼색이가 오래 슬퍼했다는 것만은 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삼색이의 웃는 얼굴을 본 적이 없다. 꼬질할 때도 있었지만 해맑은 느낌을 주던 삼색이였다. 앳되었던 삼색이의 얼굴은 너무도 어두웠고 낭창하던 목소리는 쉰 듯 갈라졌다. 맛있는 것을 줘도 전처럼 기쁘게 먹지 않았다. 아래로 떨어진 고개, 겁먹은 듯 위로 꾸물히 올려 뜬 눈, 둔해진 움직임, 구슬프게 갈라져 나오던 목소리. 이 작고 보드라운 동물이 깊이 절망하고 있다는 것이 선명하게 전해져 아프고 괴로웠다.
얼마후 나는 오래 살던 그 동네를 떠났고 삼색이와 연은 끊어졌다. 지금도 두 아이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미미를 잃던 시기의 일이라 미미가 떠나고 삼색이를 데려올지 한동안 고민했다. 당시의 나는 그러지 못했고 절망에 빠진 삼색이를 홀로 그 주차장에 둔 채 도망치고 말았다.
우리는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인간에게 죽음이란 어떤 의미인가. 나는 죽음을 아는가. 나는 나의, 또한 소중한 존재의 죽음을 어떻게 인식하고 받아들이는가. 스스로 질문을 거듭하다 보면 동물들에게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고유한 방식이 있을 것이란 생각에 다다르게 된다. 그 고유의 방식이라는 것이 인간은 결코 알 수 없는 종류일 수도 있다.
삼색이가 노랭이의 죽음을 알았는지는 모르겠다. 삼색이의 슬픔이 노랭이의 죽음에 대한 이해를 증명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다만 노랭이의 부재는 삼색이에게 큰 고통이고 그것이 인간에게도 전해지는 슬픔이었음은 분명하다.
동물이 죽음을 이해하는지 답할 수 없는 질문을 계속하는 것은 어쩐지 의도가 있다는 생각도 든다. 우리가 동물의 인지능력에 대해 자꾸 묻는 것은 동물에게 어떤 지위를 부여하기 위함은 아닐까. 사람과 구별짓고, 인간이 어디까지 도덕과 윤리를 베풀지 가늠하려는 의도에서 말이다. 죽음을 알면 동물을 더 조심스럽게 대하고, 모르면 함부로 대해도 되는 것일까.
결국 문제는 동물과 생명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이다. 생명체로서 가장 큰 사건을 동물들이 까맣게 모르고 겪을 것 같지는 않다. 특히 우리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삶을 공유한 반려동물이라면 더 그렇다. 기쁨과 만족을 알고, 사랑 받기를 좋아하고 요구하며, 놀이와 장난에 몰두하고, 슬픔과 우울을 공유하고, 위로와 배려를 실천하고, 서운함과 짜증을 견디고, 공포를 느끼고, 기다림과 실망을 아는 복잡한 털뭉치들 말이다.(*주)
인간의 죽음 이해가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지듯 동물들 역시 그러할 것이라 생각한다. 인간과 다른 지점이 있다면 대부분의 인간은 다가올 죽음을 걱정하거나 부정하는 반면 동물은 그렇지 않다는 점일 것이다. 죽음을 피하고 살기 위해 애쓰는 것은 모든 생명체의 본능이다.
동물은 인간 보다 대개 뛰어난 감각을 갖고 있다. 인간 곁에 가장 가까운 반려동물인 개는 후각과 청각, 고양이는 청각과 시각이 인간을 훨씬 앞지른다. 개와 고양이 외에도 동물마다 시각, 청각, 촉각, 미각, 후각 등 오감 영역에서 인간 보다 뛰어난 감각을 가진 동물이 많다. 넓디넓은 미지의 세계라 할 만 하다. 결코 알 수 없는 세계를 알고 있을, 복잡한 가능성을 품고 있는 동물 친구를 사랑하는 것은 내게 몹시 가슴 벅찬 일이다.
*주 :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나의 문어 선생님 : My Octopus Teacher, 2020>을 강력 추천한다. 나는 야생 동물, 그것도 외계인을 닮은 두족류 친구들이 얼마나 놀라운 생명체인지 처음 알고 큰 감동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