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를 받아들일 용기, 그때는 없었다
이 글은 실제 있었던 일을 바탕으로 하지만, 특정인을 짐작할 수 없도록 일부 설정은 각색되었습니다.
돌아보면 시그널은 충분했다.
해프닝으로 넘겼던 사소한 서운함에서부터 팬덤 전체에 공론화되었던 큰 문제까지.
시간이 갈수록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이 점점 희미해졌다.
나는, 우리는 ‘좋은 게 좋은 거지’하며 웃어넘기는 팬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사람이 우리가 믿었던 만큼 괜찮은 사람이 아니라는 걸.
그런데도 우리는 꽤 오래 그 자리를 지켰다.
문제는 몰라서가 아니라, 알면서도 남아 있었다는 점이다.
왜 그랬을까.
사랑보다 무서운 건 습관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마음이 깊어지자, 덕질은 어느새 습관이 되어버렸다.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그의 SNS부터 확인했다. 새로운 스케줄이 뜨면 내 일정도 그에 맞춰 자연스럽게 수정되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자 그 사람은 이미 내 루틴 그 자체가 되어 있었다.
누군가를 일상처럼 좋아하게 되면,
떠난다는 선택지가 잘 떠오르지 않게 된다.
그래서 쉽게 떠날 수 없었다.
실망과 애정이 뒤엉킨 채 내 발목을 잡고 있었다.
관계가 만든 울타리
덕질이 즐거웠던 게 그 사람 하나 때문만은 아니었다. 마음이 맞는 팬들과 공연 전후에 함께 보내는 시간 역시 큰 몫을 했다.
그렇기에 나에게 탈덕은 단순히 한 사람을 떠나는 일이 아니었다. 팬들과 함께 쌓아온 단단한 울타리를 스스로 부수고 나오는 일에 가까웠다.
공통의 관심사가 사라지면 관계가 소원해지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기에, 그 세계를 잃는 것이 두려웠다.
그들은 가장 뜨거운 시간을 함께 지나온 사람들이었다.
그 관계를 놓는다는 건 내 과거의 일부를 스스로 지워버리는 것과 같았다.
자꾸만 뒤돌아보게 했던 미련들
실망이 반복되는데도 나는 더 필사적으로 기대했다.
너무 많은 걸 쏟아부었기 때문이었다.
책장 한 칸을 꽉 채운 앨범들, 한 손으로 다 쥘 수 없는 공연 티켓들.
수십 번의 계절과 수만 시간의 추억들까지.
손해를 감수하고 털고 나오기엔,
내 인생의 많은 부분이 이곳에 저당 잡혀 있었다.
바빠서 그랬겠지.
다음 앨범은 다를 거야.
다음 공연 때는 괜찮아지겠지.
미래에 기대를 걸며 패배를 인정하는 걸 유예했다.
거창한 보상을 바라는 건 아니었다.
공연장을 나설 때 ‘오늘 오길 잘했다’는 안도감,
그거 하나면 충분했다.
내가 떠나는 순간, 이 모든 것이 허상이 된다.
10년의 시간을 없었던 것처럼 지워버리기엔, 나는 이미 너무 멀리 와 있었다.
오답을 외면한 시간
그가 내 주변 지인이었다면 어땠을까?
아마 곁을 주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너그러운 사람이 아니다.
타인에게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엄격하게 잣대를 들이밀면서도, 이상하게도 그에게만큼은 그 기준이 적용되지 않았다.
갈등을 회피하며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던 그에게 환멸을 느꼈다.
하지만 정작 나 또한 같은 방식으로 스스로를 정당화하고 있었다.
그토록 비난하던 그의 모습과 내가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결국 문제는 그가 아니라 나였다.
내가 고른 사람이고 10년이라는 세월을 바쳤는데,
그가 틀린 사람이라면 내 선택도 실패했다는 뜻이 된다.
인정하는 순간 지난 모든 것들은 ‘실패한 추억’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견뎌낼 자신이 없었다.
나는 그를 지키기 위해 남은 것이 아니었다.
내 선택이 오답일지도 모른다는 비참한 현실로부터 필사적으로 도망쳤을 뿐이었다.
우리는 단순히 사람 하나만을 좋아했던 게 아니었다.
그와 함께 존재했던 모든 것들.
그 장소, 시간, 공기와 그 안에 켜켜이 쌓인 감정들까지 모두 사랑했다.
그래서 쉽게 끊어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사람을 부정하는 건,
나라는 존재를 부정하는 것만 같아서.
그래서 떠날 수 없었던 것이다.
오답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정직하게 읽어 내려가야 한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그저 틀린 답을 적은 게 부끄러워 서둘러 다음장으로 넘기려고 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 당시 그게 내가 쓸 수 있는 최선의 답지였음을. 다시 돌아간대도 나는 어쩌면 같은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
틀렸다고 멈춰버리면, 다음 페이지는 찾아오지 않는다.
비록 오답일지라도 멈추지 않고 써 내려갔기에,
그 틀린 한 페이지가 있었기에,
나는 비로소 다음 장을 넘겨 나를 위한 문장을 적을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