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엔탈리즘으로 범벅인, 그래도 너무나 매혹적인 고전 명화
1. 영화 소개
- 제목: 왕과 나(The King and I)
- 감독: 월터 랭(Walter Lang)
- 출연: 율 브리너(Yul Brynner), 데버러 커(Deborah Kerr), 리타 모레노(Rita Moreno),
마틴 벤슨(Martin Benson), 렉스 톰슨(Rex Thompson), 카를로스 리바스(Carlos Rivas) 등
- 장르: 뮤지컬, 로맨스, 역사
- 제작 국가 및 연도: 미국 / 1956년作
- 제작 및 배급사: 20th Century Fox(제작 및 배급)
- 관람 등급: G(모든 연령 관람가)
2. 줄거리
1862년, 영국의 젊은 미망인 애나(Anna Leonowens: 데버러 커 扮)는 시암(Siam: 태국의 옛 이름) 왕 뭉꿋, 라마 4세(The King Mongkut of Siam, Rama IV: 율 브리너 扮)의 초청을 받고 어린 아들 루이(Louis Leonowens: 렉스 톰슨 扮)와 함께 왕국의 수도 방콕에 도착한다. 그러나 도착한 첫날부터 왕궁 밖에 거처를 마련해 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 왕에게 실망, 인도로 돌아가려 한다. 뭉꿋 왕의 강압적인 권유로 자신이 가르칠 왕실 자손들을 만나본 애나는 그들의 사랑스러움에 반해 마음을 바꿔 왕실 가정교사로서 왕궁에 남기로 한다. 정숙한 영국 여인 애나는 다소 거칠고 자기중심적인 왕과 사사건건 충돌하지만 그러면서도 시암 왕국을 근대화하기 위해 노심초사하며 다방면으로 노력하는 왕에게 묘한 호감을 느낀다.
그러던 어느 날, 시암의 왕 뭉꿋은 야만인이라는 모함이 영국 빅토리아 여왕(Queen Victoria of UK)의 귀에 들어가자, 라마 4세는 심각한 고민에 빠진다. 이에 애나는 영국 대사에게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 왕이 야만인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자고 제안한다. 애나의 주도하에 만찬 준비는 착착 진행된다. 연회 당일, 만찬의 하이라이트인 연극은 시암 왕에게 공녀로 바쳐진 아름다운 버마 여인 텁팀(Tuptim: 리타 모레노 扮)에 의해 성황리에 끝이 나고 영국 대사 일행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준다. 하지만 텁팀은 자신을 수행하고 온 사신, 룬타(Lun Tha: 카를로스 리바스 扮)와 사랑하는 사이다.
애나의 도움으로 연회 때 <<톰 아저씨의 오두막(Uncle Tom's Cabin)>>을 각색한 텁팀은 자신의 처지를 빗대어 뭉꿋 왕에게 의미 있는 메시지를 전하지만 왕은 도망친 노예를 쫓던 주인의 죽음을 찬미하는 대목에서 크게 분노한다. 텁팀이 연인과 함께 도망친 사실을 안 왕은 애나와 크게 언쟁을 벌이고, 결국 애나는 영국으로 돌아갈 결심을 한다. 서로에게 연정을 품고 있던 왕과 애나는 아쉬움을 안은 채 헤어진다. 귀국선에 오른 애나는 왕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급히 왕궁으로 되돌아간다. 하지만 결국 뭉꿋 왕은 애나가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둔다. 새롭게 라마 5세로 즉위한 태자 쭐라롱껀은 부왕의 유지를 받들어 시암 왕국을 근대화하겠다는 포부를 밝히며 영화는 끝을 맺는다.
3. 평가
1956년작 <<왕과 나(The King and I)>>는 할리우드의 황금기를 빛낸 고전 명작이다. 로저스와 해머스타인(Rodgers and Hammerstein) 콤비가 만든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스크린에 옮긴 이 영화는 전 세계적으로 흥행에 성공(제작비 455만 달러를 들여 2,30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당시로선 대단한 흥행 기록이었다.)했으며, 개봉 이듬해 3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9개 부문에 후보로 올라 그중 5개 부문(남우주연상, 미술상, 의상상, 음악상, 녹음상)을 수상했다. 흥행과 작품성,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며 대성공을 거둔 셈이다.
그런데 정작 이 영화의 무대가 된 태국에서는 뮤지컬의 원작이 된 마거릿 랜든(Margaret Landon)의 소설 <<Anna and the King of Siam>>과 애나 리어노언스의 자서전 <<The English Governess at the Siamese Court>>를 비롯한 모든 관련 서적은 영구 금서로 지정되었고, 뮤지컬과 영화까지 공연 및 상영이 금지돼 있다. 도대체 왜 그런 것일까? 그것은 이 영화가 태국의 역사와 문화를 심각하게 왜곡ㆍ비하하고 있기 때문이다. 태국 왕실과 국민들은 이 사실에 대단히 분노하고 있다. 사실 이 영화는 서구의 시선으로 동양을 바라보는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의 전형이다. 태국의 궁정과 뭉꿋 왕의 모습은 이국적이지만 기괴한 모습으로 과장돼 묘사되며, 영국 여성 애나는 문명과 합리성의 상징으로 그려져 동양에 ‘계몽과 질서’를 가져오는 자애로운 존재처럼 비친다. 영화는 곳곳에 서구 우월주의적 시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서양 옷을 입고 실내에서 신발을 신어야 문명인이고, 궁중 연회에서 젓가락을 사용하면 야만이고, 나이프와 포크를 써야 문명이라는 식의 서구 중심의 자문화중심주의(ethnocentrism)가 상영 시간 내내 반복해서 등장한다. 같은 동양인의 입장에서 이런 식의 서구 우월주의에 대해 나 역시 역겨움을 금치 못하겠다. 그런데 과연 서구인들만 태국을 우습게 보고 있을까? 우리 한국인들은 어떤가? 태국은 매년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인기 광관지이다. 한국인들은 태국을 사랑한다. 그러면서도 은근히 태국을 비롯한 동남아 지역에 대해 삐뚤어진 우월감을 지니고 있다. 현대뿐만 아니라 과거 역사적으로도 우리가 동남아보다 우월했다(이와 같은 한국인의 우월감을 대변하는 명칭이 바로 "5천 년 문화 민족"이다.)는 근거 없는 자부심이다. 과연 그랬을까? 영화의 배경이 되는 19세기 중엽(1862~1867: 애나 리어노언스가 왕실의 가정교사로서 시암 왕국에 머물렀던 기간)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철종(哲宗)에서 고종(高宗)으로 이어지는 조선 말기 세도정치 기간이었다. 왕을 대신해 안동 김 씨 일가가 국가의 모든 권력을 틀어쥐고 국정을 농단하고, 백성은 삼정의 문란 속에 도탄에 빠져 있었다. 국가의 위정자들은 국제 정세를 철저히 무시한 채 시대착오적인 쇄국정책을 펼쳤고, 조선은 우물 안 개구리처럼 자아도취(당시 조선의 선비들은 조선을 소중화(小中華)라 부르며 근거 없는 자부심을 가졌다.)에 빠져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향해 줄달음치고 있었다. 이 시기 조선의 모습을 우리는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고 미화하지만, 당시 조선의 실상은 <<군도: 민란의 시대>>(2014)나 <<자산어보>>(2021)에 실감 나게 묘사된 대로 망조(亡兆)가 들어도 아주 단단히 든 한심한 나라였다. 반면, 동시대의 태국은 자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국가 지도자로 손꼽히는 두 명의 왕, 뭉꿋 라마 4세와 그의 아들 쭐라롱껀 라마 5세가 조국 근대화를 위해 절치부심하고 있었다. 이 두 왕의 영도 아래 태국은 동남아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에 성공했고, 제국주의 서구 열강의 침략에 맞서 탁월한 국제정치 감각으로 유연한 대나무 외교(bamboo diplomacy)를 펼쳐 아시아 국가 중 유일하게 조국의 독립을 지켜낼 수 있었다. 반면 우리는 서구 열강도 아닌 우리 스스로 왜놈이라 비하하던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기고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적어도 이 시기만큼은 태국은 분명 우리나라보다 훨씬 선진국이었다. 이처럼 지나친 국수주의(國粹主義)는 나와 남의 역사와 문화를 올바로 바라볼 수 있는 균형 잡힌 시각을 가로막는다.
<<왕과 나>>는 오리엔탈리즘에 경도된 시대적 한계가 분명한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계 영화팬들로부터 열렬히 사랑받고 있다. 그 이유는 바로 남녀 주연 배우 율 브리너와 데보라 커가 만들어낸 강렬한 캐릭터의 힘과 뮤지컬로서의 높은 예술성 때문이다. 율 브리너는 태국 왕을 권위적이면서도 인간적인 존재로 그려냈고, 데보라 커는 지성과 감성을 겸비한 가정교사 애나 역을 훌륭히 연기해 관객의 공감을 이끌어낸다.
두 배우의 연기 호흡은 긴장과 유혹, 존중과 갈등이 교차하는 드라마를 완성하며, 단순한 문화 충돌을 넘어선 인간적 교류를 보여준다. 뮤지컬 영화 <<왕과 나>>는 브로드웨이 역사상 최고의 콤비로 손 뽑히는 리처드 로저스와 오스카 해머스타인 2세의 음악과 안무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걸작이다. 영화 속에 흐르는 <Getting to Know You>, <I Whistle a Happy Tune>, <Shall We Dance> 등의 노래과 춤은 너무나 인상적이다. 그중에서도 <Shall We Dance> 무도(舞蹈) 신(dance scene)은 세계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으로 손꼽힌다. 뭉꿋 왕과 애나가 궁정 복도를 가로지르며 춤을 추는 이 장면은, 세대와 문화를 초월해 전 세계 영화팬들을 사로잡았다. 이 장면은 훗날 <<쉘 위 댄스>>라는 일본 영화의 모티브가 되었다.(이 영화는 2004년 리처드 기어와 제니퍼 로페즈 주연의 할리우드 영화로 리메이크되었다.)
이 장면에서 두 남녀 주연 배우가 뿜어내는 카리스마는 정말 대단하다. <Shall we dance>라는 노래에 맞춰 두 사람이 손을 맞잡고 춤을 추는 순간, 관객은 스크린 속으로 빨려드는 듯한 몰입감을 느끼게 된다. 이 장면은 단순한 로맨스가 아니라, 권력과 감정, 거리와 친밀함 사이의 미묘한 줄다리기를 춤으로 구현해 낸 종합 예술의 결정체다. 음악은 경쾌하지만 감정은 진지하고, 춤은 우아하지만 그 안에는 갈등과 설렘이 교차한다. 이 장면 하나만으로도 <<왕과 나>>는 뮤지컬 영화의 정점이라 불릴 만하다.
<<왕과 나>>는 서구 중심의 자문화중심주의 그리고 오리엔탈리즘이라는 한계가 분명한 작품이지만, 그 안에서 피어난 인간미와 예술적 성취는 지금도 세계 영화팬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오리엔탈리즘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되, 그 너머의 예술적 감흥과 영상미를 함께 음미할 수 있다면 이 작품은 백 번을 보아도 아깝지 않은 영원한 명작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완 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