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천 년 전이던 BC 1세기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대에 로마의 팔라티노 언덕을 둘러보던 청년이 있었다.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시오스라는 역사학자였다. 그는 고대 그리스에 있던 할리카르나소스 출신이었다. 이 도시는 지금은 터키의 보드룸으로 국적과 이름이 바뀐 곳이다. BC 5세기의 유명한 역사학자 헤로도투스도 이곳 출신이었다.
디오니시오스라는 이름은 그리스에서 매우 흔했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은 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사람과 구별하기 위해 그를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시오스라고 불렀다.
그는 젊었을 때 로마로 건너가 22년 동안 수사학을 가르치면서 동시에 라틴어를 배웠다. 또 로마 곳곳을 돌아다니며 역사의 현장을 살펴보거나 각종 책을 수집하거나 많은 역사학자를 만났다. 그는 이렇게 해서 모은 자료로 『로마의 역사』라는 책을 썼다. 그가 주목받는 것은 다른 역사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흥미로운 장면을 이 책에 소개했기 때문이다.
‘로마를 건국하는 데 아무런 장벽도 남지 않게 됐다. 로물루스는 먼저 신에게 경배한 뒤 날을 정해 팔라티노 언덕에서 의례를 진행하기로 했다.
예정된 날이 밝았다. 로물루스는 우선 신에게 희생제물을 바쳤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형편에 맞춰 희생제물을 바치라고 했다. 이어 신의 조짐을 살폈는데 아주 좋다는 결과를 얻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천막 앞에 불을 피우게 한 뒤 불꽃을 뛰어넘으라고 했다. 몸을 청결하게 하는 데 필요한 절차라는 것이었다.
신에게 바치는 모든 의례를 다 마쳤다고 판단한 로물루스는 사람들을 지정한 장소로 데리고 가 나라를 세우기로 한 언덕의 크기를 설명했다. 이어 암소 한 마리와 수소 한 마리에게 멍에를 씌우고 쟁기를 달아 언덕 주변에 고랑을 팠다. 성벽을 세울 때 이용할 생각이었다. 그때부터 로마인에게는 새로운 도시를 세우려고 할 때 쟁기로 고랑을 파는 관습이 생겼다. 로물루스는 고랑을 다 판 뒤 암소와 수소를 잡아 신에게 바쳤다. 똑같은 절차로 진행한 의례에서 다른 여러 희생제물도 바친 뒤 그는 사람들에게 일하러 가자고 했다.
로마인은 이때부터 해마다 이날이 되면 파릴리아라고 부르는 성대한 축제를 연다. 이날은 봄의 시작과 함께 온다. 농부와 목동은 풍년과 가축의 증가에 감사를 드리며 신에게 희생물을 바친다.’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시오스가 책에 묘사한 내용은 BC 753년 4월 21일 로물루스가 진행한 로마 건국 의례였다. 글을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치 나라를 세우는 기념식이 열리는 거룩하고 성스러운 현장에 직접 참여한 것처럼 느끼게 하는 생생한 설명이었다.
이날 로마의 건국 의례가 벌어진 장소는 팔라티노 언덕이었다. 이곳은 이후 로마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가 됐다. 지금도 그렇지만 고대 로마시대에 팔라티노 언덕은 전망이 좋았다. 이곳에서는 로마의 어지간한 곳을 다 볼 수 있었다. 멀리 테베레 강도 한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왕정 시대에는 신이 살던 신전이 모여 있었다. 공화정 시대에는 원로원 의원 등 기득권 세력이 집을 짓고 모여 살았다. 제정 시대에는 여러 황제가 궁전을 지었다. 마지막으로 로마가 망한 뒤 중세에는 교회 관계자나 귀족이 대저택을 건설해 거주했다.
디오니시오스는 팔라티노 언덕을 수시로 둘러보면서 로물루스와 로마인은 과연 누구였으며, 왜 하필 팔라티노 언덕에 정착했는지 이유를 파악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로마인은 나라를 세운 뒤 여기서 무엇을 했는지도 살펴보았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디오니시오스의 발걸음을 한 번 따라가면서 그가 무엇을 보고 들었는지를 살펴봐야겠다.
그리스인 에반드로스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운명을 개척하러 바다를 건너갑시다.”
로마가 건국되기 400여 년 전이었다. BC 12세기 트로이 전쟁이 발생하기 60여 년 전이었다. 그리스 아르카디아의 도시 팔란티움에서 한 무리의 그리스인이 이탈리아로 건너갔다. 헤르메스 신과 님프 테미스의 아들이라는 에반드로스가 그들을 이끈 지도자였다.
에반드로스 일행이 바다를 건너 이탈리아로 이주한 것은 정치적 이유 때문이었다. 당시 팔란티움에서 정변이 발생했다. 에반드로스와 그의 지지 세력은 패배의 쓴맛을 보았다. 그들은 목숨을 건지기 위해 도시를 떠나야 했다. 그의 무리는 이오니아 해와 티레니아 해를 거쳐 라티움(라틴) 지방에 도착했다. 작은 배 두 척에 나눠 타고 바다를 건넜다고 하니 총 인원은 100~200여 명에 불과했을 것이다.
라티움은 매우 풍요로운 땅이었다. 알바에 화산이 있어 BC 10세기까지도 활동을 계속했다. 여기서 나온 화산재는 물론 테베레 강에서 흘러온 충적토가 오랫동안 쌓인 덕분에 땅은 매우 비옥했다. 목초지가 많아 가축을 풀어놓고 키우기도 좋았고, 곳곳에 울창한 삼림이 있어 목재를 구하기도 쉬웠다.
“우리에게 땅을 나눠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스에서 오신 동포라면 누구라도 환영합니다.”
라티움에는 오래전 아르카디아에서 건너간 그리스 부족이 살고 있었다. 지도자는 마르스 신의 후손이라는 파우누스였다. 아주 열정이 넘치면서도 사려 깊은 사나이였다. 가장 먼저 라티움에 이주해 자리를 잡았으면서도 뒤를 따라온 그리스 사람들을 모두 받아들여 원하는 곳에서 살게 했다. 다들 고향에서 살기 힘들어 바다를 건너간 사람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에반드로스는 곳곳을 둘러본 뒤 테베레 강 인근에 있는 땅을 골랐다. 오늘날 팔라티노 언덕이었다. 강이 있어 물을 구하기 좋았고, 적당한 높이의 언덕이어서 안전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그는 판단했다. 에반드로스는 언덕을 중심으로 작은 마을을 만들었다.
“이곳에 그리스 고향 도시의 이름을 붙여 팔란티움이라고 부르도록 합시다.”
팔라티노 언덕에 거주지를 마련한 에반드로스는 고향에서처럼 여러 신전을 지어 마을을 꾸미기로 했다. 그는 신전을 건설하기 좋은 공간을 언덕에서 발견했다. 이곳에 리카이온 또는 리카이움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후세의 로마인은 이곳을 루페르칼이라고 불렀다. 루페르칼은 숲으로 둘러싸인 동굴이었다. 근처 바위에서는 샘 여러 개가 솟아났다. 앞에 펼쳐진 낭떠러지에는 아주 큰 나무 여러 그루가 서 있어 그늘을 드리워주었다.
에반드로스는 어머니의 조언에 따라 먼저 판 신에게 바치는 신전을 건설했다. 그의 일행은 대부분 목동이었기 때문에 목동과 가축의 신인 판을 모시는 게 당연했다. 그는 새 신전에서 그리스 전통에 따라 희생제를 거행했다. 이 희생제는 나중에 루페르칼리아라고 불렸다. 그는 언덕 꼭대기에 승리의 여신에게 바치는 신전도 지었다. 여기서도 매년 희생제를 거행했다.
에반드로스 이야기에서 보듯이 고대 로마가 건국되기 전부터 팔라티노 언덕에는 이미 사람이 살고 있었다. 많은 역사학자의 기록과 신화, 그리고 20세기에 실시된 발굴조사 결과가 이를 입증한다. BC 1세기~서기 1세기 그리스 지리학자 스트라보는 『지리』에서 이렇게 전했다.
‘로물루스에 이어 누마 폼필리우스가 권좌를 계승했다. 가장 신뢰를 받는 로마 건국 이야기다. 하지만 좀 더 오래 됐고 우화 같은 다른 이야기가 있다. 로마는 에반드로스가 세운 그리스 아르카디아의 식민지였다는 것이다.’
에반드로스가 누구였는가를 놓고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온다.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시오스는 ‘그리스에서 건너간 이주민’이라고 보았다. ‘에반드로스는 이탈리아 남부에 상륙한 그리스인과 그곳에 만들어진 그리스 식민도시, 그리고 로마에 전파된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상징하는 가상적인 인물’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로물루스가 로마를 건국한 BC 753년 이전 팔라티노 언덕에 이미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사실은 발굴조사에서도 밝혀졌다. 1907년 이탈리아 고고학자 단테 바글리에리는 팔라티노 언덕을 조사하다 오두막 3채를 발굴했다. 오두막이 만들어진 연대는 로마 건국보다 이른 BC 9세기 이전으로 추정됐다.
로마인들은 에반드로스와 그의 어머니 테미스를 모시는 신전을 따로 만들어 해마다 제사를 지냈다. 에반드로스의 신전은 아벤티노 언덕에, 테미스의 신전은 카피톨리노 언덕 아래에 만들었다. 테미스는 나중에 카르멘타라는 이름의 신으로 바뀌었다. 신전을 만들어 모셨다는 것은 후대의 로마인들도 에반드로스의 실체를 인지했고 인정하고 있었다는 증거였다.
헤라클레스와 아라 막시마
에반드로스가 팔라티노 언덕에 정착해 자리를 잡고 살 무렵이었다. 그리스의 영웅이었던 헤라클레스가 이곳을 지나간 적이 있었다. 로마 신화는 그 사연을 이렇게 전한다.
헤라클레스는 메가라와 결혼해 자식 3명을 낳아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하지만 헤라 여신의 저주 때문에 이성을 잃어 가족을 모두 죽이고 말았다. 그는 죄를 씻기 위해 티린스의 겁쟁이 임금 에우리스티우스 왕에게 복종해야 했다. 왕을 위해 열두 가지 과업을 완성하는 게 임무였다.
게리오네우스(또는 게리온)가 세상의 서쪽 끝에 있는 전설의 섬 에리테리아에서 키우는 소떼를 가져다주는 게 열 번째 과업이었다. 헤라클레스는 태양의 신 헬리오스의 배를 빌려 타고 에리테리아로 가서 게리오네우스는 물론 머리 두 개를 가진 개 오르토스, 거인 목동 에우리티온을 모두 죽이고 소를 빼앗을 수 있었다.
에리테리아는 지중해 서쪽 끝, 대서양으로 이어지는 곳에 있는 섬으로 추정된다. 헤라클레스가 거쳐 간 곳에는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모나코, 피레네 산맥, 바르셀로나, 톨레도, 세비야, 라 코루냐 등에는 헤라클레스가 다녀갔다는 신화가 아직까지 전해 내려온다.
헤라클레스는 이탈리아를 거쳐 그리스로 돌아가려 했다. 바다를 건너면 내륙으로 가는 것보다 덜 위험하고 시간을 아낄 수 있었다. 먼 여행을 다녀오느라 지쳤던 그는 팔라티노 언덕 아래 테베레 강 주변 목초지에 소떼를 풀어놓고는 잠이 들었다.
그때 팔라티노 언덕의 동굴에 살던 거인 카쿠스가 헤라클레스의 소를 훔쳐갔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화가 난 헤라클레스는 언덕 주변을 샅샅이 뒤져 동굴에 숨어 있던 카쿠스를 찾아냈다. 그는 동굴 입구를 가로막고 있던 바위를 들어낸 뒤 카쿠스를 몽둥이로 때려 죽였다.
카쿠스는 지역 주민들을 잡아먹던 식인 괴물이었다. 헤라클레스가 카쿠스를 죽였다는 소식은 그 지역의 지도자이던 에반드로스에게도 알려졌다. 그의 어머니 테미스는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예언자였다. 그녀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헤라클레스는 죽어서 올림포스 산으로 올라가 신이 될 거야.”
에반드로스는 헤라클레스를 지역의 수호신으로 삼으면 앞으로 큰 도움이 될 거라는 어머니의 조언에 따라 그를 만나러 갔다.
“선지자이신 어머니께서는 당신이 미래에 신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위해 미리 제단을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영광을 저에게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헤라클레스는 뜻하지 않게 반가운 이야기를 듣고는 기분이 좋아졌다. 게다가 에반드로스가 고향 그리스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자 그에게 믿음이 생겼다.
“그렇게 해 주시면 오히려 제가 영광이지요. 제단을 세우신다면 매년 소 한 마리를 바치는 제례를 거행하십시오. 그리고 저를 영원히 잊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테베레 강과 팔라티노 언덕 사이에 포룸 보아리움이라는 곳이 있었다. ‘소 시장’ 또는 ‘가축 시장’ 이라는 뜻이다. 에반드로스는 이곳에 제단을 만들고 해마다 제례를 올리겠다고 약속했다. 이때 만든 제단은 아라 막시마였다. 지금은 흔적만 남았고, 그 자리에는 ‘진실의 입’으로 유명한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 성당이 서 있다.
헤라클레스가 팔라티노 언덕을 지나간 일을 이렇게 설명하는 사람도 있다.
'헤라클레스는 군대를 이끌고 에스파냐를 정벌하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는 이탈리아의 여러 압제자를 물리치고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었다. 헤라클레스는 팔라티노 언덕 근처에도 들렀다. 당시 카쿠스라는 독재자가 그 일대를 지배하고 있었다. 에반드로스도 그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헤라클레스는 에반드로스, 파우누스는 물론 다른 그리스 동포들의 도움을 받아 카쿠스를 몰아냈다.'
헤라클레스는 유피테르나 마르스 신만큼은 아니지만 로마에서 매우 용맹하고 정의로운 신으로 칭송받았다. 로마의 패권을 놓고 아우구스투스와 싸웠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물론 오현제 시대의 뒤를 이은 황제 코모두스는 헤라클레스를 수호신으로 삼기도 했다.
제정 시대 초대 황제였던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로마에는 헤라클레스를 모신 신전이 6~7개 정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은 포룸 보아리움에 있던 아라 막시마, 헤라클레스 인빅투스 신전과 헤라클레스 폼페이아누스 신전이었다.
로물루스는 누구였나?
동서고금을 통틀어 ‘로마’만큼 많은 역사학자가 달려들어 연구한 분야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아직까지 아무도 누가, 어떻게, 왜, 언제 팔라티노 언덕에 로마를 건국했는지 밝혀내지 못했다. 고대 로마 및 그리스 역사학자들은 여러 가지 견해를 제시한다.
‘로마는 트로이 전쟁으로부터 두 세대 이후에 건립됐다. 트로이가 멸망한 뒤 아이네아스와 함께 달아난 트로이 사람들이 세웠다. 그들은 건국자의 이름을 로물루스라고 불렀다.’
‘아이네아스가 죽은 뒤 통치권을 계승한 아스카니오스는 나라와 병력을 셋으로 나눠 둘을 형제인 로물루스와 레무스에게 주었다. 레무스는 증조부 카피스의 이름을 딴 도시 카푸아, 할아버지 안키세스의 이름을 딴 안키사, 아버지의 이름을 딴 아이네이아와 그의 이름을 붙인 로마를 각각 세웠다. 이후 로마는 한 동안 버려졌다. 먼 훗날 알바롱가가 로물루스와 레무스를 지도자로 삼아 파견한 다른 식민지단에 의해 다시 옛 이름을 되찾았다.’
이처럼 여러 가지 신화가 존재하지만, 가장 일반적으로 알려진 신화는 다른 내용을 담고 있다. 전쟁의 신 마르스의 아들이며, 트로이의 유민 아이네아스의 후손들이 세운 알바롱가의 자손인 로물루스 이야기다.
알바롱가의 왕자였던 누미토르는 아버지가 죽은 뒤 왕 자리를 물려받게 됐지만 폭력을 앞세운 동생 아물리우스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말았다.
아물리우스는 형의 아들을 몰래 살해하고, 형의 딸 레아 실비아(또는 일리아)는 신성한 불을 모시는 여사제인 베스탈로 만들었다. 베스탈은 결혼을 할 수 없는 게 규칙이어서 아이를 낳지 못했다. 그런데 실비아는 어느 날 마르스 신전이 있는 숲에 갔다가, 또는 숙소에서 잠을 자다 전쟁의 신 마르스 때문에 임신해 쌍둥이 로물루스와 레무스를 낳았다.
이 소식을 들은 아물리우스는 후환을 없애려고 쌍둥이를 바구니에 담아 팔라티노 언덕 인근에서 테베레 강에 던져버렸다. 바구니는 강을 따라 떠내려가다 강이 S자 모양으로 굽이치는 곳에 걸리고 말았다.
팔라티노 언덕의 동굴 루페르칼에 살던 늑대 루파가 이를 보고 내려와 쌍둥이를 건져 올려 젖을 먹였다. 마르스 평원에서 누미토르의 가축을 기르던 목동 파우스툴루스는 늑대의 젖을 먹는 두 아이를 보고는 신기하게 생각했다. 그는 쌍둥이를 데려와 부인 라우렌티나에게 맡겨 키웠다. BC 1세기~AD 1세기 로마 역사학자 티투스 리비우스는 『로마사』에 이렇게 기록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라우렌티나는 평범한 창녀였다. 당시 목동들은 그녀를 늑대라고 불렀다.’
1~2세기 그리스 출신 로마 역사학자 플루타르코스는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에 비슷한 기록을 남겼다.
‘라티움 사람들은 암 늑대를 루파라고 불렀다. 방탕한 여자도 루파라고 했다. 라우렌티나의 별명도 루파였다.’
쌍둥이는 성장한 뒤 주변 목동들을 모아 우두머리가 됐다. 둘은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뒤 알바롱가로 쳐들어가 아물리우스를 몰아내고 할아버지 누미토르를 권좌에 복귀시켰다.
왕 자리를 회복한 누미토르는 두 손자에게 다른 도시를 건설해 독립적으로 통치할 기회를 주기로 했다. 로물루스와 레무스는 할아버지가 나눠준 사람들을 데리고 알바롱가를 떠나 팔라티노 언덕과 사투르니아(카피톨리노) 언덕에 살던 사람들을 합류시켰다. 그런데 두 형제는 나라를 어디에 세울 건지를 두고 다투게 됐다.
“팔라티노 언덕에 나라를 세우도록 하자. 우리가 목숨을 건진 곳이 바로 이곳이고, 아버지 파우스툴루스가 우리를 길러준 곳도 이곳이 아니더냐?”
“여기보다는 아벤티노 언덕이 더 나아. 테베레 강에서 멀지 않고, 다른 일곱 언덕과도 가까워 땅을 활용하기 좋잖아.”
사실 둘의 다툼에서 단순히 나라를 세울 언덕을 어디로 고르느냐 하는 게 본질적인 문제는 아니었다. 도시의 이름을 어떻게 정하고, 둘 중 누구를 지도자로 삼을지가 걸려 있었다. 누가 왕이 되고 누가 신하가 되느냐 하는엄청난 영광이 달린 일이었다. 둘 다 양보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하루 날을 정해서 신에게 희생물을 바친 뒤 조점을 살펴보아라. 우호적인 새를 가장 먼저 많이 보는 아이가 도시를 다스리게 될 것이다.”
쌍둥이는 할아버지를 찾아가 조언을 구했다. 누미토르는 조점을 통해 결론을 내라고 말했다. 로물루스와 레무스는 할아버지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둘은 합의를 통해 조점을 볼 날을 정했다. 쌍둥이는 그날 아침일찍 언덕으로 올라갔다. 로물루스는 팔라티노 언덕, 레무스는 아벤티노 언덕이었다.
로물루스는 언덕에 가자마자 바로 동생에게 부하부터 보냈다. 마치 새를 먼저 발견한 것처럼 거짓말을 하라는 것이었다. 부하는 입장이 난처했다. 새를 봤다고 말하면 거짓말이고, 그런 말을 하지 않으면 주군이 어려움에 몰릴 수 있었다. 그가 말을 꺼내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사이 독수리 여섯 마리가 아벤티노 언덕 위로 날아올랐다. 레무스는 환하게 웃으면서 팔라티노 언덕으로 달려갔다.
“독수리를 여섯 마리 봤어. 형은 어떻게 됐지?”
로물루스는 당황했다.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이대로라면 질 판이었다. 그때 독수리 열두 마리가 갑자기 팔라티노 언덕 위로 날아올랐다. 그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네 궁금증을 풀어주려고 독수리가 하늘로 날아오르는구나!”
“내가 먼저 봤으니 내가 이긴 거야. 내가 왕이 돼야 해. 형은 자격이 없어.”
“너는 독수리를 여섯 마리 봤지만 나는 열두 마리를 발견했어. 당연히 내가 왕이 돼야 해.”
두 형제의 갈등은 사라지기는커녕 날이 갈수록 더욱 커졌다. 두 사람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편을 갈라 무기를 들고 피튀기는 싸움을 벌였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양측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다. 레무스도 목숨을 잃었다. 전쟁이 끝났을 때 살아남은 주민은 겨우 3천 명에 불과했다. 그런데 다른 신화나 일부 역사학자는 레무스의 죽음을 이렇게 설명한다.
‘레무스는 속았다고 생각했지만 형에게 고개를 숙였다. 로물루스는 새 도시 주변에 성벽을 쌓았다.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였다. 레무스가 너무 낮고 허술하다고 비웃으면서 성벽을 뛰어넘어 다녔다. 성벽 공사 책임자였던 켈레르는 화가 났다. 그는 몽둥이로 레무스의 머리를 때려 죽여 버렸다. 로물루스는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다며 그의 잘못을 덮어주었다.’
로물루스는 동생을 살해한 뒤 BC 753년 4월 21일 팔라티노 언덕에서 로마를 건국하는 의례를 성스럽게 거행했다. 로마인은 오래전부터 로마 건국 날짜를 4월 21일이라고 생각했다. 옛날부터 이어져 온 건국 기념행사인 파릴리아 축제 개막일이 그날이었기 때문이다.
건국 연도를 BC 753년이라고 맨 처음 추정한 사람은 BC 1~2세기 로마의 은행가이자 골동품 수집가였던 티투스 폼포니우스 아티쿠스였다. 같은 시대 학자 테렌티우스 바로가 그의 견해를 받아들였다. 나중에 로마 문법학자인 켄소리우스가 이 연대를 널리 퍼뜨린 덕분에 BC 753년은 로마 건국 연도로 굳어졌다.
하지만 이 연도는 실제 기록으로 입증된 게 아니다. 로마의 각종 역사 자료는 BC 390년 갈리아족의 로마 점령 때 대부분 불에 타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티쿠스 이전 역사학자들은 로마 건국 연도를 다르게 보았다. BC 3~4세기 그리스 역사학자 티마이우스는 로마 건국 연도를 BC 813년으로 추정했다. BC 3세기 연대기학자였던 루키우스 킨키우스는 BC 728년, 같은 시대 역사학자였던 퀸투스 파비우스 픽토르는 BC 747년, BC 2~3세기 정치인이었던 대 카토는 트로이전쟁이 끝나고 432년 후라고 했다. 이 해는 BC 751년 무렵이었다.
로물루스는 동생을 따돌리고 새 도시의 창건자가 됐다. 주민들은 새 도시에 그의 이름을 붙여 ‘로마’라고 부르기로 했다. 로마인은 배수로를 완성하고 성벽도 다 건설하고, 주택 공사도 마무리했다. 이제 남은 일은 어떤 정부 형태를 고를 것인가였다. 로물루스는 그들을 팔라티노 언덕에 모았다.
“여러분은 저를 식민지단의 지도자로 지명했고, 저의 이름을 도시에 부여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통치 형태를 정해야 합니다. 한 사람에 의해서, 아니면 여러 사람에 의해서 통치 받아야 하는지, 그것도 아니면 법을 만들어 모두에게 공공이익의 보호를 맡겨야 하는지 여러분의 뜻을 말씀해 주십시오. 어떤 정부 형태를 선택하더라도 저는 따를 준비가 돼있습니다.”
로마인은 서로 논의한 끝에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우리에게는 왕정 말고 새로운 정부 형태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왕족 출신이라는 혈통이나 여러 장점이라는 측면에서 당신만큼 좋은 조건을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로물루스는 감사하다고 말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신이 우호적인 조짐을 보여주기 전에는 그 영예를 받을 수 없습니다.”
로물루스는 점을 보기로 하고 날을 골랐다. 아침이 밝아오자 그는 가장 먼저 일어나 언덕으로 올라갔다. 하늘이 열린 개활지에 자리를 잡고 희생물을 여러 신에게 차례로 바쳤다.
“제가 이 도시의 왕이 되는 게 모든 신들의 뜻이라면 하늘에 그 뜻을 나타내는 상서로운 조짐을 보여주소서.”
로물루스가 기도를 마치자 푸른 하늘에서 갑자기 번개가 내리쳤다. 그는 물론 모든 로마인은 번개를 유피테르 신의 뜻이라고 생각했다. 로물루스는 서둘러 민회를 소집했다. 그리고 방금 나타난 조짐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저는 방금 여러 신의 뜻에 따라 왕으로 선택됐습니다. 앞으로 로마의 모든 왕은 이런 방식으로 뽑게 될 것입니다.”
로마인은 누구였을까?
“로마는 3개 부족 연합체였습니다.”
로마사를 전공한 많은 역사학자들의 주장이다. 로물루스가 이끄는 람네스족, 티투스 타티우스 왕의 영도를 받는 티티에스족(사비니족), 루코모 왕이 지도하는 루케레스족이 힘을 합쳐 만든 도시가 로마라는 것이다.
람네스족이 먼저 팔라티노 언덕에 로마를 세웠고, 나중에 티티에스족과 통합했으며, 마지막에는 루케레스족도 끌어들였다는 것이다. 19세기 독일 역사학자 테오도르 몸젠은 『로마사』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로마는)로마인이 독자적으로 세운 게 아니라 람네스족, 티티에스족, 루케레스족이 합쳐 만든 도시였다. 테베레 강변에 도시 형태 정주지가 생기기 훨씬 전부터 3개 부족은 처음에는 개별적으로, 나중에는 연대하여 팔라티노 언덕에 성채를 쌓았다. 성채 주변에 마을을 조성했고, 인근에서 농경지를 개간했다.’
몸젠보다 앞선 18세기 말~19세기 초 독일 역사학자 바르톨드 게오르그 니부르는 제목이 같은 책 『로마사』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로마족은 팔라티노 언덕에, 사비니족은 퀴리날레 언덕에 자리를 잡았다. 마지막 세 번째 루케레스족은 카일리우스(첼리오) 언덕에 살았다. 다른 두 부족보다 열세여서 평등한 권리를 인정받지 못했다.’
역사학자들의 견해를 종합해보면 세 부족 중에서 람네스족은 라틴족이었을 거라는 게 많은 역사학자의 추정이다. 신화처럼 과연 알바롱가의 후손이었는지는 불투명하다.
티티에스족은 사비니족이었다. 왕 티투스 타티우스의 이름 때문에 티티에스족이라고 불렸다. 신화에 따르면 람네스족과 티티에스족이 통합한 것은 로마 건국 초기 여인 납치 사건이 계기였다. 프랑스 파리 루브르박물관에 걸려 있는 프랑스 화가 다비드의 그림 ‘사비니 여인의 개입’으로 널리 알려진 사건이다. 이 사건은 ‘키르쿠스 막시무스’ 편에서 상세히 설명하기로 하겠다.
마지막 세 번째 부족인 루케레스족의 정체는 불확실하지만 ‘늑대 부족’이라고 불렸다. 거칠고 야만스럽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늑대라는 이름이 붙은 것으로 보아 강에 떠내려가던 로물루스 형제를 구해준 늑대 신화는 이들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원래 부족에서 쫓겨나 갈 곳이 없던 로물루스 일행을 도와준 부족일지도 모른다.
로마가 3개 부족으로 이뤄졌기 때문인지 로마의 역사와 언어에는 ‘3(tri)’이 큰 흔적으로 남아있다. 로마에서 법률적으로 ‘할당하다’를 뜻하는 단어는 ‘삼등분하다’는 뜻인 트리부에레였다. 로마의 호민관 명칭은 트리부누스였다. 로마 사제단의 수는 항상 3의 배수로 구성했다. 영어로 ‘부족’을 ‘트라이브(tribe)’라고 한다. 이 단어 역시 ‘3’이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트리부스(tribus)’에서 기원했다.
로마가 3개 부족으로 이뤄졌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기록은 고대 로마에도 많았다. BC 1세기~서기 1세기 로마 철학자, 정치인 키케로는 이런 기록을 남겼다.
‘기사계급은 왕을 위한 호위대로 만들어졌다. 그들은 로마 초창기 고귀한 가문에서 차출한 기사 300명으로 구성됐다. 100명씩 3개 부대로 나눴다.’
이처럼 로마를 세운 부족이 람네스족, 티테에스족, 루케레스족이었다는 설은 다수 역사학자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다. 그런데 3개 부족이 연합하기 이전 초기 로마 건국의 핵심세력인 람네스족이 누구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여러 역사학자의 기록을 통해 분석해보면 공통점이 나온다. 바로 떠나온 사람, 도망 다닌 사람, 추방당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평범하게 이주한 사람은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테오도르 몸젠은 『로마사』에서 약간 우회적으로 언급한다.
‘로마가 자리 잡은 지역은 라티움 지방의 옛 정주자들과 비교할 때 위생, 농업 생산 등에서 좋은 환경이 아니었다. 절박함 같은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고서는 그곳에 정착한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그리스 지리학자 스트라보도 비슷한 말을 했다.
‘로마가 팔라티노 언덕에 자리를 잡은 것은 선택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사정 때문이었다.’
리비우스는 『로마사』에서 직설적으로 퍼붓는다.
‘(초창기 로마인은)대부분 도망자나 피신자로 구성된 방랑자의 오합지졸이었다.’
로마와 주변 라티움 도시와의 거리는 멀지 않았다. 헤르니키, 라누비움, 알바, 아리키아, 안티움 등은 로마에서 가까우면 3~4㎞, 멀면 20~30㎞ 정도 거리에 있었다. 로마 주변의 모든 라티움 도시는 새로 생긴 로마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은 로마를 외톨이로 따돌렸다. 그 사례는 통혼권이었다.
라티움의 모든 도시는 청춘남녀를 서로 결혼시킬 수 있는 통혼권을 갖고 있었다. 20세기 초 미국 역사학자 테니 프랭크는 『로마사』에서 통혼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다.
‘(라티움 도시들은)통혼을 통해 친척이라는 느낌을 가졌고, 동족이라는 감정을 형성했다.’
하지만 건국 초기의 로마는 그런 통혼권을 인정받지 못했다. 그래서 로마의 청년중에는 결혼하지 못한 미혼이 많았다. 위에서 설명한 로마의 사비니 여인 납치 사건이 벌어진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신분이 밝혀지지 않은 루키우스 아나이우스 플로루스라는 1세기 로마 역사학자는 『로마사 개요』에 로마가 통혼을 거부당한 역사를 기록했다.
‘로마는 이웃 부족에 결혼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래서 (여인들을)납치하기로 했다’
신화에 따르면 람네스족은 라티움의 ‘어머니 도시’였던 알바롱가 왕의 손자가 이끄는 라틴족이었다. 라틴족 부모가 자녀를 다른 도시에 사는 라틴족 자녀와 결혼할 수 있게 허용했던 시대에 유독 로마만 그런 권리를 가지지 못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몸젠은 이런 불합리성을 지적하면서 이렇게 비웃었다.
‘로물루스의 영도 아래 일부 사람이 도망쳐 로마를 건설했다는 신화는 불리한 장소(팔라티노 언덕)에 로마가 생긴 이유를 설명하는 동시에 라티움의 거대 도시와 연결하려는 소박한 시도일 뿐이다.’
로물루스의 출신지를 알바롱가가 아니라 에트루리아로 본 역사학자도 있었다. 미국 역사학자 테니 프랑크가 그런 이야기를 한다. 로물루스가 이끈 에트루리아 이주 세력이 로마를 건국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다수설은 아니지만 한번쯤 귀를 기울여볼 만한 이야기다.
‘그리스계 이주민, 원주민, 또는 다른 지역 유민이 모여 살던 팔라티노 언덕에 에트루리아 세력이 쳐들어갔다. 그들은 언덕을 점령한 뒤 인근 라티움 도시를 하나씩 정복하기 시작했다. 로마의 평민과 귀족은 라티움족 출신이었고, 집권 세력만 에트루리아 출신이었다. 이들은 언덕에서 내려다보이는 테베레 강을 지배한 덕에 인근 교통을 통제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무역을 장악해 부를 늘릴 수 있었다.
에트루리아 지배세력은 새 도시에 옛 마을의 이름 대신 에트루리아식 이름을 붙였다. 그것이 바로 로마였다. 이 도시를 수 세기동안 다스린 여러 전설적 왕은 모두 에트루리아 출신이었다. 첫 번째 왕은 로물루스였고, 이후 누마, 안쿠스, 타르퀴니우스 등이 뒤를 이었다.
트로이에서 건너온 아이네아스 신화, 알바롱가에서 마르스의 아들로 태어난 로물루스 형제의 신화는 로마의 급속한 성장을 설명하기 위해 그리스가 만들어낸 이야기다. 후세 로마인은 에트루리아 정복설 대신 매우 그럴듯한 알바롱가 신화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로물루스는 팔라티노 언덕에 로마를 세울 때 쟁기로 고랑을 파 도시 주변에 원을 그렸다. 이것은 원래 에트루리아 풍습이었다. 그들은 새 도시를 세울 때 포메리움이라는 신성한 원을 도시 주변에 그렸다. 원 안에는 죽은 사람을 묻지 못하게 했다.
BC 509년 라티움족 출신 로마 평민, 귀족은 힘을 모아 마지막 왕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를 몰아냈다. 타르퀴니우스는 옛고향 에트루리아에 달려가 도움을 요청했고, 클리시움의 포르세나 왕이 그를 도왔다. 로마는 에트루리아와 계속 싸우다 BC 496년 레길루스 호수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승리해 에트루리아 지배에 종언을 고했다. BC 390년 갈리아족의 로마 점령 때 모든 기록이 불타 없어져버리는 바람에 그 상세한 내용은 지금 전하지 않는다.’
테니 프랑크의 주장대로 로물루스 일행이 에트루리아에서 쫓겨난 세력이라고 본다면 상당한 의구심이 해소된다. 그들을 추방자라고 비난한 고대 로마 역사학자들의 주장을 이해할 수 있게 되고, 왜 다른 라티움 부족이 그들과 통혼하지 않았는지도 받아들여진다. 왜 로마의 평민, 귀족이 왕정을 그렇게 싫어했고, 결국에는 왕정을 폐지했는지도 납득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정설은 아니고 단순히 프랑크의 주장일 뿐이다.
사각의 로마
팔라티노 언덕의 모양은 대체로 사각형이어서 후대에는 ‘사각의 로마’라고 불렸다. 언덕 둘레는 2㎞에 이른다. 최고 높이는 43m, 해발은 51m, 면적은 50만㎡ 정도다. 팔라티노 언덕은 상고머리 같은 모양이었다. 꼭대기는 두 개 있었다. 하나는 팔라티노 언덕, 하나는 케르말루스 고지라고 불렀다. 팔라티노 언덕과 케르말루스 고지 사이는 푹 꺼져 있었다. 고대 로마인의 설명은 재미있다.
“헤라클레스가 카쿠스를 죽일 때 그가 숨어 있던 동굴을 몽둥이로 하도 세게 내리치는 바람에 땅이 꺼졌다.”
라티움 일대는 비옥하기는 했지만 면적이 매우 좁았다. 동쪽에 아펜니노 산맥, 남쪽에 볼스키 산맥, 서쪽에 티레니아 해, 북쪽에 테베레 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30~40개였던 라티움 도시는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팔라티노 언덕 일대는 다른 라티움 도시와 비교할 때 더 좁았다. 경작지도 넓지 않았다. 수질이 깨끗하지 못한 테베레 강을 빼고는 수원도 부족했다. 게다가 테베레 강은 자주 범람해 언덕 아래 포로 로마노를 덮쳤다. 그래서 다른 부족이 이곳에 관심을 갖지 않았는지 모른다.
에반드로스 일행 또는 로물루스 무리는 왜 이런 팔라티노 언덕에 자리를 잡았던 것일까? 이유는 단순하게 추정해 볼 수 있다.
먼저 에반드로스의 경우 초기 정착민 수가 적었다. 좁은 언덕에 자리를 잡아도 먹고 사는 데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언덕 주변에는 너른 목초지가 펼쳐져 있었다. 목축을 하는 데에는 매우 유리했다.
팔라티노 언덕은 농사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불리하다. 그러나 방어라는 측면에서 평가한다면 굉장히 유리한 지역이다. 이곳은 로마 건국 당시에는 꽤 높은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로마 멸망 이후 붕괴된 각종 건축물이 쌓이고 또 쌓이는 바람에 주변 지역이 솟아올라 지금은 그다지 높아 보이지 않을 뿐이다. 공성무기가 없었던 시대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높은 언덕은 안전을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또 카피톨리노 언덕과의 사이에는 습지인 포로 로마노가 있어 외부인의 공격을 막는 데에 적지 않은 힘이 됐다. 케르말루스 고지와 그 앞의 벨리아 고지를 통해 맞은편에 있던 에스퀼리노 언덕의 바깥부분인 오피우스 언덕으로 쉽게 오갈 수 있게 연결돼 있었다. 필요할 경우 도망칠 수 있는 훌륭한 탈출로도 있었던 셈이다.
로물루스 일행이 리비우스 등의 기록대로 도망자, 추방자였다면 초기 정착민의 뒤를 이어 팔라티노 언덕에 정착한 이유는 이것으로 충분히 설명된다. 그들은 팔라티노 언덕 말고는 정착할 곳이 없었을지 모른다. 좋은 땅을 골라 갈 형편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은 무엇보다 원래 부족의 복수를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우선 공격을 피할 수 있는 안전한 지역이 필요했을 것이다.
고대 로마 시대에는 팔라티노 언덕에서 테베레 강을 훤히 내려다볼 수 있었다. 당시에는 강 쪽에 건물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전망이 지금보다 훨씬 좋았다. 강 건너편에는 로마보다 역사가 길고 경제적, 군사적으로 더 강력한 여러 에트루리아 도시가 있었다. 이들이 강을 건너 쳐들어와도 언덕에서 미리 확인하고 대비할 수 있었다. 테베레 강의 언덕 근처 지점에는 강을 건너기 쉬운 곳이 있었다. 팔라티노 언덕을 장악하면 이 도강 지점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건국 초기 로마인의 생활 기반은 팔라티노 언덕과 그 주변에 국한됐다. 초기에는 언덕 주변에 작은 마을이 하나둘 형성됐고, 허술하지만 나름대로 방벽이 만들어졌다. 방벽은 서로 이어져 언덕을 중심으로 연결돼 있었다. 케르말루스 고지와 벨리아 고지에도 나중에 마을이 생겼다. 방벽은 단순히 자연 지형을 이용한 것이었을 수도 있고, 인공적인 구조물을 갖춘 성채였을 수도 있다.
언덕 위에는 로물루스의 집이 있었다.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시오스는 『로마의 유적』에서 로물루스의 집을 설명하고 있다. 그는 실제 돌아본 현장을 기록으로 남겼으니 이 서술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로물루스는 키르쿠스 막시무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남서쪽에 집을 짓고 살았다. 집은 지금도 남아 있으며, 특별 관리인들의 보살핌을 받고 있다. 불이 나거나 번개에 맞아 손상되면 바로 수리를 한다.’
로물루스의 집은 짚과 이엉으로 지붕을 얹은 간단한 오두막이었다. 고대 로마 역사학자들의 저술에 따르면 이 집은 4세기까지 남아 있었다. 이후 언제인지 알 수 없는 시기에 파괴돼 지금은 잔해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 팔라티노 언덕에 가면 로물루스의 집으로 추정된다는 집터가 전시돼 있다. 이곳이 정말 그의 집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로마 건국 초기에는 로물루스 말고는 아무도 언덕에 집을 짓고 살지 않았다. 다만 신전 같은 공공 시설물만 존재했다. 여러 기록을 볼 때 가장 오래된 구조물은 두 개의 물 저장고였다. 바위를 깎고 위에는 벌집 모양 지붕을 씌워서 만든 지름 6m 정도의 시설이었다. 지금은 사라져 찾아볼 수 없다. 언덕 인근에서 살면 적의 침입을 받았을 때 오래 버티기 위해 물 저장고가 필요했을 것이다.
언덕에는 문데스(소우주)라는 신성한 건물도 세워졌다. 초기 정착민은 그곳에 충분한 생활필수품과 고향에서 가져온 흙을 보관했다. 문데스 주변의 광장은 오랫동안 평민과 원로원의 집회 장소로 사용됐다. 그 앞의 무대는 로마에서 가장 오래된 재판소였을 것으로 보인다.
로마인은 3개 부족을 10개씩, 총 30개의 쿠리아로 나누었다. 쿠리아는 요즘 식으로 설명하면 ‘동’ 같은 구역이었다. 부족을 쿠리아로 나누는 것은 다른 라틴족 도시도 마찬가지였다. 각 쿠리아는 팔라티노 언덕의 한 건물에 화로를 모두 모아놓았다.
당시에는 불이 매우 중요했다. 불이 꺼지면 각 가정마다 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하루 24시간, 1년 365일 내내 불씨를 보관하는 화로를 한곳에 모아 관리하다 새 불씨가 필요하면 해당 쿠리아의 화로에서 가져갔을 것이다.
팔라티노 언덕에는 에반드로스가 발견했다는 동굴 루페르칼도 있었다. 팔라티노 언덕에 올라가본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시오스는 실제로 본 풍경을 기록에 남겼다.
‘키르쿠스 막시무스 방향으로 가는 길 쪽에 동굴이 있었다.’
신화는 로물루스 형제를 구해준 늑대 루파가 여기서 살았다고 전한다. 후세 사람들은 동굴과 늑대 신화를 단순히 지어낸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2007년 이탈리아 고고학 팀이 팔라티노 언덕을 조사하던 도중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궁전 도무스 아우구스티 잔해 밑에서 동굴을 발견했다. 디오니시오스가 설명했던 바로 그 위치였다. 물론 이 동굴이 정말 루파가 살았던 곳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
공화정의 주택단지
1세기 로마 학자 가이우스 플리니우스 세쿤두스는 『자연사』에서 초창기 로마인의 집은 아주 검소했다고 설명했다.
‘로마 창건 이래 수 세기 동안 로마인의 집은 아주 단출했다. BC 3세기 에페소스의 피로스 왕과 전쟁할 무렵에는 짚이나 자갈, 나무, 벽돌 등으로 집을 지었다.’
하지만 삼니움, 타렌툼, 카르타고 전쟁에서 연이어 승리를 거두고 지중해 최고의 제국으로 성장한 뒤부터 로마인의 생활은 변하기 시작했다. 집도 마찬가지였다.
‘전쟁에서 얻은 부가 로마로 들어오면서부터 웅장한 저택이 지어지기 시작했다. 엄청난 규모의 집을 지을 뿐만 아니라 대리석 기둥, 동상은 물론 다양한 미술작품으로 집을 장식하는 게 유행이자 경쟁이 됐다.(플리니우스 세쿤두스 『자연사』)’
BC 1세기 무렵 로마에서 살았던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시오스는 과거와 달리 크게 변화한 로마인의 생활 방식을 안타까워하고 한탄했다.
‘공화정 초기 로마의 대부분 지도자는 직접 일을 하면서 검소한 삶을 살았다. 가난에 시달려도 짜증을 내지 않았다. 권력을 탐내기보다는 오히려 거부했다. 오늘날 지도자들에게서는 과거 선조들과 비슷한 점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아주 극소수만 예외일 뿐이다.’
여러 전쟁을 거치면서 상상도 못할 만큼 대단한 재산을 축적한 원로원 의원 등 지배층은 서민들과 분리된 곳에서 호화롭게 살기를 원했다. 그들이 고른 땅은 팔라티노 언덕이었다. 얼마나 인기가 높았던지 부동산 투기 현상까지 일어날 정도였다. 왕정 시대에 신전과 공공시설로 가득 차 있던 팔라티노 언덕은 공화정 시대 들어 지배층의 최고급 주택단지로 변해버렸다.
로마의 부자, 지배층이 팔라티노 언덕에 집착한 이유는 여러 가지를 들 수 있다. 먼저 팔라티노 언덕은 로마의 탄생지였고, 건국의 영웅인 로물루스가 살았던 집이 있는 곳이었다. 이렇게 역사적으로 중요한 상징성을 가진 장소에 집을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은 로마 지배층의 최상층부에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했다.
현실적인 측면을 놓고 보면 먼저 팔라티노 언덕은 전망이 매우 좋았다. 로마인의 생활 근거지였던 포로 로마노에 가기도 쉬웠다. 종교 중심지였던 카피톨리노 언덕에도 쉽게 갈 수 있었다. 빚을 내 이곳에 집을 산 BC 1세기 철학자 겸 정치인 키케로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자랑했다.
‘포로 로마노까지 한 걸음이면 갈 수 있다네.’
로마 귀족은 공화정 초기부터 팔라티노 언덕에 집을 지었을 것으로 보인다. 누가 가장 먼저 집을 지었는지 알려주는 기록은 없다. 첫 기록은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시오스의 『로마의 유적』에 나온다. 이곳에 세워진 ‘첫 집을 다룬 기록’이 아니라 이곳에 세워진 '집을 다룬 첫 기록’이었다.
첫 기록의 주인공은 집정관 마르쿠스 발레리우스였다. 그는 BC 503년 동료 집정관 푸블리우스 포스투미우스와 함께 사비니족과의 전쟁에 나서 이른바 레길루스 호수 전투에서 대승을 거뒀다. 원로원은 두 사람의 승전을 축하하면서 선물을 선사했다.
“두 집정관에게 개선식을 거행하도록 허락합니다. 발레리우스에게는 팔라티노 언덕에서 가장 위치가 좋은 곳에 집을 지을 수 있게 하겠습니다. 공사비는 나중에 국고에서 돌려주겠습니다.”
리비우스의 『로마사』 등에도 팔라티노 언덕의 집 이야기가 나온다. 그의 책에 나오는 기록의 주인공은 엉뚱하게도 로마인이 아니라 외지인인 푼디 출신의 비트루비우스 바쿠스였다.
푼디 사람들은 로마에 정복당한 이후 모두 로마 시민권을 얻었다. 바쿠스도 마찬가지였다. 동포와 함께 로마로 이사한 그는 팔라티노 언덕에 땅을 사서 집을 구했다. 샀을 수도 있고, 지었을 수도 있다. 푼디 사람들이 로마 시민권을 얻었던 것은 BC 338년 무렵이었으니 바쿠스가 팔라티노에 집을 구한 것은 그 이후였다.
팔라티노 언덕에 집을 구할 정도였던 걸 보면 바쿠스는 로마인조차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인물이었음에 틀림없다. 엄청난 부자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가 팔라티노 언덕에 간 것은 거기에서 살아야 로마의 주류 사회에 들어갈 수 있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증거이기도 하다. 호모 노부스(신참)가 집을 지을 정도였다면 이미 팔라티노 언덕에는 토박이 귀족의 저택이 적지 않았으리라는 사실도 짐작해볼 수 있다.
불과 8년 뒤인 BC 330년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과거 전쟁에서 패해 로마에 복종하겠다고 다짐했던 프리베르눔이 맹세를 저버리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뜻밖에 바쿠스가 그 도시 군대를 이끈 사령관이 됐다. 바쿠스는 로마에서 엄청난 명성과 부를 자랑하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왜 로마에 반란을 일으킨 프리베르눔의 사령관이 됐을까?
그 내용을 설명해주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추정하자면 로마에서 피치 못할 사정으로 밀려났거나 쫓겨날 위기에 몰리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반군의 우두머리가 됐을 가능성이 높다. 로마의 최상층부만 사는 팔라티노 언덕에 이사 갔던 사람이 반군을 이끌었다는 점에서 로마의 주류사회에 들어간 뒤 겪었을 그의 좌절감과 패배감, 굴욕감을 엿볼 수 있다. 그 수모가 뼈에 사무칠 정도가 아니었다면 굳이 반군의 사령관까지 맡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쿠스는 프리베르눔 군대를 이끌고 처음에는 승승장구했다. 세티아, 노르바, 코라 등 로마의 동맹 도시들을 점령하고 약탈을 일삼았다. 하지만 집정관 루키우스 파피리우스 크라수스가 이끌고 나온 로마군에 대패하고 말았다. 붙잡힌 바쿠스는 로마로 끌려가 감옥에 갇혔고, 전쟁이 완전히 마무리되자 모욕적으로 매질을 당한 뒤 처형당했다. 로마인은 팔라티노 언덕에 있던 그의 집을 철거했다. 부동산은 모두 압수해 맹세의 신인 세모 산구스에게 바쳤다. 로마인은 이렇게 외쳤다.
“맹세는 신성한 것이다.”
카르타고와의 제2차, 제3차 포에니전쟁에서 완벽하게 승리를 거둔 뒤인 BC 2세기 무렵 집정관, 법무관, 원로원 의원 등 여러 정치 지도자가 팔라티노 언덕에 집을 짓거나 샀다는 기록이 하나둘씩 나온다. 그 내역을 잘 살펴보면 당시 로마 상류층이 어떻게 부를 축적했는지를 알 수 있다. 수많은 전쟁에서 빼앗은 전리품, 전쟁 이후 로마 속주로 전락한 지역 주민을 착취해 챙긴 수입, 여러 나라의 왕에게서 몰래 받은 뇌물 등이 집을 지을 수 있었던 기반이었다.
평민 출신 귀족인 그나우에스 옥타비우스는 법무관 시절이던 BC 168년 로마 함대를 이끌고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에 나서 승리를 거뒀다. 그는 마케도니아에서 챙긴 엄청난 전리품으로 마르스 평원에 포르티코 옥타비아(옥타비아 열주 회랑)를 건설해 국가에 기증했다. 이 덕분에 집정관 선거에서 여유 있게 당선될 수 있었다. 그는 팔라티노 언덕에는 대저택을 지었다.
BC 115년 집정관을 지냈던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는 기존에 살던 집을 넓히려고 옥타비우스의 저택을 사들였다. 그는 오랫동안 원로원에서 최고의원 자리를 맡고 있어 매우 영향력이 큰 인물이었다. 그와 같은 시대 정치인이자 철학자였던 키케로는 ‘그의 고갯짓에 따라 전 세계가 다스려졌다’고 평가했다.
스카우루스가 집을 지을 때 사용한 돈은 정당하게 번 게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폰투스의 미트리다테스 왕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것은 물론 다른 속주 주민을 착취한 혐의로 고소당했다. 같은 시대 로마 역사학자 살루스티우스는 그를 ‘부도덕하고 탐욕스러운 사람’이라고 묘사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와 삼두정치를 펼쳤던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도 팔라티노 언덕에 집을 갖고 있었다. 그는 당시 로마 최고의 갑부였다. 1~2세기 그리스 출신 로마 역사학자 플루타르코스는 크라수스의 재산을 7천100탈렌트라고 추정했다. 1탈렌트가 금 34㎏이니 7천100탈렌트는 무려 금 24만㎏에 이른다. 단순가치로 환산하면 오늘날 200억 달러(24조~25조 원) 정도다.
독재관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수하였던 크라수스는 국가에 압수당한 반대파의 재산을 경매에서 헐값에 사들이거나, 로마에서 불이 났을 때 피해를 입은 집을 거저이다시피 매입하거나, 여러 전쟁에서 챙긴 전리품으로 부를 불렸다. 노예무역에 손을 대거나 여러 속주에서 탄광을 경영하는 것은 물론 부동산을 사고파는 방법을 통해서도 재산을 증식했다. 로마 제국은 나날이 융성하고 영토는 하루가 다르게 넓어지고 있는 상황이어서 그의 재산은 기하급수적으로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재산으로 로마의 1인자가 된 크라수스는 곳곳에 여러 채의 집을 지었다. 그 중 하나가 팔라티노 언덕에 있는 저택이었다. 그는 로마 역사상 처음 대리석 기둥으로 집을 장식해 로마인로부터 눈총을 받았다. 당시 법에 따르면 저택의 기둥 높이는 3.6m에 총 여섯 개를 넘지 못하게 돼 있었다. 하지만 법의 한도를 넘은 그의 집에 공식적으로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치는 이미 일반적으로 퍼진 사회 분위기였기 때문이었다.
로마인의 집은 점점 더 화려해졌다. BC 78년 집정관이었던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는 사상 처음 아프리카 누미디아에서 대리석을 수입해 집의 문턱을 장식했다. 이후 아프리카, 그리스 대리석 수입 바람이 부는 바람에 불과 30년 뒤에는 더 화려한 대리석으로 꾸민 집이 수백 채를 넘을 정도였다.
공화정 시대 최고 철학자였던 키케로도 팔라티노 언덕에 집을 구했다. 로마 남쪽 100㎞ 지점에 있는 시골마을 아르피눔 출신이라는 사실을 늘 가슴아파했던 그는 로마 상류사회의 꼭대기에 올라가고 싶어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팔라티노 언덕에 집을 구해 살아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키케로는 집정관을 지낸 이듬해인 BC 62년 350만 세스테르티우스를 주고 크라수스로부터 팔라티노 언덕의 집을 샀다. 그는 집을 구매하기 위해 동료 집정관이었던 가이우스 안토니우스 히브리다로부터 돈을 빌렸다. 키케로는 돈을 벌기 좋은 곳으로 소문난 마케도니아 속주 총독 자리를 히브리다에게 넘겨주는 대신 마케도니아에서 버는 돈을 나눠 갖기로 약속한 바 있었다. 기가 막히는 사실은 그가 돈을 빌리면서 담보로 잡힌 게 바로 이 약속이었다는 점이다.
많은 역사학자는 고대 로마의 멸망 이유로 여러 가지를 든다. 그 중에서도 공화정 초기까지만 해도 원로원에 넘쳐났던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상무 정신이 공화정 후기부터 사라졌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는다. 팔라티노 언덕의 고급주택은 최고 전성기에 이미 몰락을 시작한 로마의 어두운 뒷모습이었다. 원로원이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왕이 되려고 한다’고 몰아붙여 암살하면서까지 지키려고 애썼던 기득권의 상징이었다.
제정 시대 들어 팔라티노 언덕에 황제의 여러 궁전이 연이어 들어서는 바람에 공화정 시대 귀족 저택은 대부분 철거됐다. 이후에도 언덕의 주거환경은 크게 변해 초기 왕정 및 공화정 시대에 만들어졌던 신전, 주거지, 도로 등은 사라져 버렸다. 지금 어디가 어디였는지를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팔라티움과 팰리스
영어로 궁전을 팰리스라고 한다. 이 단어의 어원은 팔라티노 언덕과 율리우스 카이사르에서 나왔다. 유럽 여러 나라의 언어에서 사용하는 궁전이라는 단어의 어원도 마찬가지다. 카시우스 디오가 쓴 『로마사』에 그 내용이 나온다.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를 물리치고 내전을 승리로 장식하자 원로원은 그의 집 앞에 월계수 나무를 심고 정문 위에는 참나무 관을 걸어둘 수 있도록 의결했다. 카이사르가 팔라티노 언덕에서 산 적이 있었고, 그 집터가 과거 로물루스의 집이었다는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에 그의 집을 팔라티움이라고 불렀다. 이후 로마 황제가 어디서 살더라도 그 집을 팔라티움이라고 부르게 됐다.’
로마가 제국으로 성장하면서 팔라티움이라는 단어는 유럽과 동방 여러 나라로 퍼져 나갔다. 고대 유럽인에게 영웅 이상의 존재였던 카이사르의 이야기가 얽혀 있고 역대 황제가 살았던 곳과 연관돼 있어 유럽인은 이 단어를 무척 소중하게 생각했다. 팔라티움은 스페인에서는 팔라시오, 독일에서는 팔라스트, 프랑스에서는 팔레, 이탈리아에서는 팔라조, 영어로는 팰리스로 변해 왕이나 황제가 사는 궁전을 의미하게 됐다.
제정 시대에 접어들면서 팔라티노 언덕은 황제 전용 주거지역으로 바뀌었다. 로마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데다 로마인의 생활 근거지인 포로 로마노, 종교 중심지인 카피톨리노 언덕과 가까운 이곳을 황제가 귀족에게서 빼앗아 독차지하게 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팔라티노 언덕에 단 한 차례만 황궁이 지어졌던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모든 황제가 다 궁전을 건설했던 것도 아니었다. 이곳에 황궁을 건설한 황제는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네로, 그리고 도미티아누스 등 손가락을 꼽을 정도였다. 다른 황제들은 이전에 만들었던 궁전을 개·보수하거나 증축해서 사는 데 만족했다. 그런데 새 궁전을 지은 황제에게는 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도무스 아우구스티
팔라티노 언덕에 황궁 건설의 역사를 연 사람은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였다. 그의 아버지는 볼스키족 도시인 벨레트리이의 부자 기사계급 출신이었고, 어머니는 율리우스 카이사르 누나의 딸이었다. 두 사람은 팔라티노 언덕에 집을 가지고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이 집에서 태어났고 젖먹이 시절을 보냈다. 그러니 그에게 팔라티노 언덕은 어릴 적 고향 같은 곳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카이사르의 후계자가 된 뒤에는 포로 로마노에 있던 저택에서 살았다. 시인이었던 리키니우스 칼부스가 소유하고 있던 집이었다고 하니 아주 화려하거나 큰 집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의 1인자가 된 뒤 팔라티노 언덕으로 집을 옮겼다. 공화정 시대 호민관이었던 호르텐시우스의 집과 BC 102년 집정관이었던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의 집을 사들여 수리한 뒤 들어가 살았다. 이것이 팔라티노 언덕에 최초로 탄생한 황궁인 도무스 아우구스티(아우구스투스의 집)였다.
호르텐시우스는 BC 287년 평민과 귀족의 권리 균등을 보장한 ‘호르텐시우스 법’을 제정한 평민의 영웅이었다. 그의 집은 아폴로 신전 근처에 있었다. 클로디우스, 크라수스, 스카우루스, 카틸리나 등 공화정 말기에 유명했던 여러 원로원 의원의 집도 주변에 모여 있었다.
지금 팔라티노 언덕에 가면 남서쪽 끝 부분에 다 부서진 기둥 몇 개가 보인다. 이곳이 도무스 아우구스티가 서 있던 곳이다. 언덕 아래로는 키르쿠스 막시무스가, 멀리 오른쪽으로는 아라 막시마가 있었던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 성당이 보인다. ‘진실의 입’이 있는 성당이다.
아우구스투스가 남쪽 끝 부분을 새 궁전 부지로 고른 것은 단순히 전망이 좋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스스로를 로마에 번영과 평화를 가져다주고, 새로운 지도자 계보를 시작한 사람이라고 강조했다. 그의 가족만이 로마에 영원한 평화와 부를 지속시킬 수 있다고 로마인을 세뇌시키려 애썼다. 이를 위해 다양한 선전 또는 자기홍보 도구를 사용했다. 여기에는 건축물도 있었고 문학도 있었다. 팔라티노의 궁전도 그런 도구 중 하나였다.
아우구스투스가 도무스 아우구스티를 건설한 곳은 신화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장소다. 먼저 헤라클레스가 카쿠스를 몽둥이로 때려죽인 바로 그 곳이었다. 언덕 아래로 보이는 테베레 강은 굽어 있다. 늑대 루파가 바구니에 담긴 로물루스 형제를 건져 올려 젖을 물린 곳이었다.
궁전 인근에는 위대한 ‘어머니 여신’인 마그나 마테르의 신상을 모신 신전과 조점관이 새 점을 치던 장소인 아우구라토리움도 있었다. 마그나 마테르는 원래 그리스의 여신 키벨레였다. 제2차 포에니 전쟁 때 이탈리아에 쳐들어온 한니발에게 연패하던 로마가 쿠마이의 시빌 예언서와 그리스 델피의 아폴로 신전에서 받은 신탁에 따라 들여 온 신이었다. 우연의 일치였는지는 모르지만 그리스에서 여신의 신상을 가져 온 이후 로마는 한니발을 무찌르고 전쟁에서 승리를 거뒀다. 로마가 마그나 마테르를 매우 숭상했음은 당연한 일이다.
아우구스투스는 늘 가족의 내력을 고민했다. 그의 어머니는 카이사르의 조카딸이었으니 핏줄로 보아 부끄러울 게 없었다. 그가 카이사르의 후계자로 선정된 것은 어머니의 혈통 덕분이었다. 어머니 덕분에 카이사르를 수시로 만날 있었다. 어머니가 재혼한 뒤에는 외할머니인 카이사르의 누나 집에서 살게 됐다. 그러나 아버지는 달랐다. 시골마을에서 올라온 호모 노부스(신참)여서 로마에서 명함을 내밀 처지조차 되지 못했다. 그는 이 점을 늘 염두에 두고 있었다.
‘로마에서 가장 유서 깊은 신화가 서려 있고 로마인이 매우 숭앙하는 두 신전이 있는 곳에 살게 되면 신화, 신전의 권위를 앞세워 부족한 가문의 내력을 덮을 수 있겠지. 그렇게 되면 모두가 우러러보는 황제의 권위를 지킬 수 있을 거야.’
도무스 아우구스티는 처음에는 소박했던 아우구스투스의 성격에 걸맞게 사람의 눈길을 끌만큼 화려하거나 웅장하지 않았다. 몇몇 역사학자는 도무스 아우구스티를 ‘작은 사저’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20세기 초 이탈리아 고고학자 로돌포 란키아니는 이렇게 설명했다.
‘호르텐시우스의 집은 매우 단출했다. 검소하기로 유명했던 아우구스투스의 취향에 딱 맞았다.’
도무스 아우구스티에는 알바롱가에서 가져온 돌기둥으로 만든 짧은 회랑이 있었지만, 대리석이나 눈에 띄게 아름다운 돌을 바닥에 깐 방은 없었다. 가구도 소박해서 일개 시민의 집보다도 못했다. 아우구스투스는 황후 리비아나 누나가 만든 옷을 평생 입고 다녔다고 한다. 이런 기록도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팔라티노 언덕의 집으로 이사를 갈 때 만들었던 침대를 버리지 않고 40년 동안 사용했다.’
아우구스투스는 그리스 악티움 해전에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누르고 승리해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된 뒤에는 마음을 조금 바꾸었다. 호르텐시우스 집 주변에 있던 귀족 저택을 하나씩 사들여 도무스 아우구스티를 제법 깔끔하고 멋있는 궁전으로 확장했다. 그는 그러면서 “궁전은 개인 소유물이 아니라 공공시설”이라고 선언하는 쇼를 벌이기도 했다. 그의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왕정이 폐지되고 500년 만에 다시 왕의 지배를 받게 된 로마 시민들의 걱정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어.’
도무스 아우구스티는 서기 3년 화재로 붕괴된 적이 있었다. 이때 각계각층의 시민들이 황제에게 집을 새로 지으라면서 의연금을 보냈다. 당연히 로마의 지배를 받는 속주와 식민도시에서도 성금이 답지했다. 1~2세기 로마 역사학자 가이우스 수에토니우스는 『열두 명의 카이사르』에서 ‘황제는 한 사람에게 (은화)1데나리우스 이상은 받지 않았다’고 적었다.
이렇게 해서 모인 의연금 총액이 얼마였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1명이 1데나리우스만 보냈다고 해도 총액이 엄청났으리라는 점은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그런데 아무리 황제가 만류했다 하더라도 다른 나라 왕이나 속주의 지도자가 황제에게 1데나리우스씩만 보냈을까?
아우구스투스는 도무스 아우구스티 근처에 아폴로 신전을 세웠다. 악티움 해전에서 아폴로 신에게 승리를 기원하면서 신전을 지어 바치겠다고 약속한 게 이유였다고 한다. 다른 주장도 있다. 궁전을 지을 때 번개가 언덕에 내리치자 깜짝 놀란 황제가 아폴로 신전을 건설했다는 것이다. 수에토니스는 『열두 명의 카이사르』에서 ‘이 신전에는 회랑이 건설되고 라티움어와 그리스어 책을 갖춘 도서관도 만들어졌다’고 적었다.
아우구스투스는 도무스 아우구스티 안에 ‘도무스 리비아’(리비아의 집)라는 집을 별도로 지어 황후 리비아 드루실라에게 선물했다. 한집에서 같이 사는 부인에게 별도의 집을 지어준 것은 이상해 보이지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 사연은 이렇다.
아우구스투스는 황제가 되기 전 옥타비아누스 시절 앙숙이던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에게 군사적으로 밀리고 있었다. 그는 폼페이우스와 손을 잡기로 했다. 그래서 첫 부인인 풀크라와 이혼하고 폼페이우스 부인의 사촌여동생인 스크리보니아와 정략결혼을 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일이 생겼다. 아우구스투스가 여전히 폼페이우스와 동맹 관계를 유지하고 있을 때 사적인 자리에서 만난 여인을 짝사랑하게 된 것이었다. 반대파였던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의 부인인 리비아였다. 당시 리비아는 다섯 살 된 큰아들 티베리우스를 키우고 있었고, 둘째 아들 드루수스를 임신하고 있었다. 사랑에 눈이 먼 아우구스투스는 네로를 불렀다.
“내가 뜻하지 않게 당신 부인 리비아를 사랑하게 됐소. 부인과 이혼하시오.”
당시 로마에서 부부의 이혼과 재혼은 흔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임신 중인 부부를 협박해 이혼하라고 강요하는 일은 드물었다. 네로는 아우구스투스의 협박에 굴복해 결국 부인과 이혼했다. 아우구스투스는 부인 스크리보니아에게는 딸을 출산하던 날 이혼 서류를 보냈다.
강제로 빼앗다시피 이뤄진 결혼이었지만 뜻밖에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의 금술은 매우 좋았다. 부부는 51년 동안 해로했다. 리비아는 황제인 새 남편을 보필하는 데 온 정성을 기울였다. 아우구스투스는 전 남편을 버리고 새 남편에게 헌신하느라 마음고생이 심했을 부인을 위해 마음 편하게 쉴 수 있는 공간으로 이용하라고 아주 단출한 저택을 하나 지어 선물했다. 그것이 도무스 리비아였다.
도무스 티베리아나
아우구스투스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티베리우스는 팔라티노 언덕 북서쪽에 궁전을 지었다. 도무스 아우구스티 뒤쪽이면서 카피톨리노 언덕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는 방향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새 궁전은 그의 이름을 따서 도무스 티베리아나(티베리우스의 집)라고 불렀다. 이 궁전을 왜, 언제, 어떤 규모로 지었는지를 다룬 기록은 없다. 이 궁전 이야기는 네로 황제가 죽고 후임으로 즉위한 갈바 황제 시대에 처음 등장한다. 1~2세기 로마 역사학자 푸블리우스 타키투스의 『역사』 등에 갈바가 암살당하는 장면을 묘사할 때 도무스 티베리아나라는 이름이 비로소 나온다.
여기서 의문이 하나 생긴다. 티베리우스는 양아버지인 아우구스투스가 지은 집을 놔두고 왜 새로 궁전을 지었을까? 황제니까 당연하지 않느냐고?
황제가 된 티베리우스는 긴축재정을 아주 중요하게 여긴 사람이어서 새 건축물을 거의 짓지 않았다. 그런데 왜 궁전은 새로 건설한 것일까? 그의 슬픈 인생을 살펴보면 그 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도 있다.
티베리우스는 부모의 강제 이혼 이후 동생 드루수스와 함께 아버지 집에서 살았다. 아버지가 부인을 빼앗기고 6년 뒤 한 많은 세상을 떠났을 때 그는 포로 로마노의 로스트라에서 눈물을 삼키며 추도사를 읽었다. 아버지가 죽은 뒤에야 두 형제는 팔라티노 언덕으로 올라가 어머니 리비아와 함께 살았다. 아우구스투스가 살던 도무스 아우구스티에서였다.
아버지 네로가 세상을 떠났을 때 드루수스는 겨우 여섯 살이었지만 티베리우스는 열두 살이었다. 아버지의 모습을 평생 가슴에 담을 만한 나이였다. 네로는 어린 아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했을까? 기록이 없으니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아들의 가슴에 깊은 한을 새기기에 충분한 내용을 거듭 말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티베리우스도 그런 아버지를 이해하고 딱하게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자라 나중에 성년식을 치를 때 검투사 경기를 두 차례 개최한 사실은 이런 점에서 눈여겨볼 만하다. 한번은 아버지 네로를 위해 포로 로마노에서, 다른 한번은 할아버지를 기념하기 위해 원형경기장에서 거행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아버지를 잘 기억하지 못하는데다 붙임성이 좋았던 드루수스와는 매우 친하게 지냈다. 반면 아버지의 그림자에서 평생 벗어나지 못한 듯 늘 어두웠던 티베리우스와는 서먹했다. 죽기 직전에 할 수 없이 후계자로 지명하기는 했지만 그는 평생 티베리우스를 믿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아우구스투스는 사람들 앞에서도 거침없이 티베리우스의 잔혹한 성품을 비난했다. (중략) 그가 들어오면 입을 다물었다는 풍설이 있을 정도였다.(수에토니우스 『열두 명의 카이사르』)’
한 가지 더. 티베리우스에게는 평생 사랑한 여인이 있었다. 첫 부인이었던 빕사니아 아그리피나였다. 그녀에게서 동생과 똑같은 이름을 가진 드루수스라는 아들도 낳았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강제이혼이라는 비극을 지켜본 그는 죽을 때까지 사랑하는 여인을 지키고 싶었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는 네로에 이어 그의 아들 티베리우스에게도 이런 행복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는 티베리우스에게 빕사니아와 이혼하라고 했다. 그리고 남편 아그리파와 사별한 그의 외동딸 율리아와 재혼하라고 강요했다. 티베리우스는 완강히 거부했지만 결국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절대권력을 가진 황제의 명령을 거부했다가는 그뿐만 아니라 빕사니아와 그녀의 가족도 무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티베리우스는 이혼한 뒤 빕사니아를 우연히 로마 시내의 거리에서 한번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녀는 냉담한 표정으로 그냥 지나갔다. 그는 여전히 사랑하는 옛 부인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티베리우스는 어머니와 평생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기록한 역사가도 있다. 어머니가 살아 있을 때 로마를 떠나 카프리에 틀어박혀 인생의 마지막을 보낸 것은 그의 이런 복잡한 심경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에는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이런 여러 가지 이야기를 고려해볼 때 티베리우스는 친아버지를 외롭게 죽도록 만들었고, 그의 사랑마저 망친 아우구스투스가 거주했던 도무스 아우구스티에서 살고 싶지 않았던 게 아니었을까?
도무스 티베리아나는 나중에 티투스 황제 시절이던 80년 로마를 사흘 동안 휩쓴 대화재 때 큰 피해를 입었다. 2세기 무렵 오현제였던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가 양아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후계자로 지명한 뒤 ‘도무스 티베리아나에 들어와 살도록 화려하게 궁을 꾸며주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걸 보면 나중에 이 궁전을 재건한 것으로 보인다.
티베리우스가 처음 지은 도무스 티베리아나의 흔적은 지금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그의 후임 황제였던 칼리굴라가 증축한 흔적은 포로 로마노의 카스토르-폴룩스 신전 근처에 조금 남아 있다. 길이 26m, 폭 9m의 연못을 가진 열주회랑이 바로 그곳이다.
도무스 트란시토리아
현대인이 팔라티노 언덕의 궁전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머리에 떠올리는 황제는 네로다. 60년에 발생한 로마 대화재 때 이곳의 궁전에서 리라를 연주하면서 노래를 부르는 장면을 연상하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는 사실인 부분도 있지만 오해도 적지 않다.
티베리우스도 그랬지만 네로도 인간적으로 불행한 인물이었다. 그는 아들을 황제로 만들겠다는 어머니 소 아그리피나의 욕심 때문에 어릴 때부터 큰 압박을 받았다. 아그리피나는 아들을 황제로 만들려고 남편 클라우디우스 황제를 독살하기까지 했다. 네로는 그때 열여섯 살이었으니 어머니가 무슨 일을 벌였는지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네로는 황제 즉위 이후에도 어머니의 등쌀에 시달렸다. 견디다 못해 스승 세네카와 상의한 끝에 어머니를 황궁에서 내쫓았다. 그것도 모자라 나중에는 어머니를 암살했다. 이후에는 황제 암살 공모 혐의를 뒤집어씌워 스승도 자살하게 만들었다.
네로의 정신세계는 황폐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로서는 선황 클라우디우스가 암살당한 궁전에서 사는 것이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황제의 침실에 어머니가 암살한 클라우디우스의 유령이 밤마다 나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게다가 궁전 곳곳에는 어머니의 흔적이 진하게 남아 있었다. 어머니의 유령이 나왔을 수도 있다.
네로는 새 궁전을 짓기로 했다. 그것이 바로 도무스 티베리아나를 기반으로 해서 새로 만든 도무스 트란시토리아였다. 정확한 완공 연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60년으로 추정된다. 어머니를 궁에서 쫓아낸 게 55년이었고 살해한 게 59년이었으니, 그 다음해에 도무스 트란시토리아에 들어가 살게 된 셈이다.
타키투스의 『연대기』에 따르면 네로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친구이자 자문이었던 가이우스 킬니우스 마이케나스가 에스퀼리노 언덕에 만든 마이케나스 정원과 새로 만든 궁전을 연결시켰다. 마이케나스는 아우구스투스 황제 밑에서 일하면서 로마의 문화예술 진흥에 힘쓴 사람이었다. 당대 최고 시인 베르길리우스를 후원했고, 수많은 시인, 작가에게 지원의 손길을 보냈다. 기업이 문화예술 활동을 지원하는 공익사업을 ‘메세나’라고 부르는데, 그의 이름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마이케나스 궁전과 정원은 60년에 발생한 로마 대화재에 등장한다. 수에토니우스는 『열두 명의 카이사르』에서 이렇게 적었다.
‘네로는 (마이케나스 정원의)마이케나스 탑에서 로마가 불타는 것을 보면서 열광했다.’
이 글 한 줄 때문에 여러 영화와 소설에 네로가 미친 황제로 묘사되곤 했다. 하지만 현대 역사학자들은 네로가 화재로 피해를 입은 로마 시민을 위해 실시한 대책을 보면 수에토니우스의 글은 지나친 폄훼라고 지적한다.
대화재 때문에 도무스 트란시토리아도 피해를 입었다. 네로는 이번에는 도무스 아우레아(황금궁전)를 짓기 시작했다. 지금 콜로세움이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황금궁전이 완공되기도 전에 반란군에게 쫓겨 로마에서 달아난 그는 결국 자살하고 말았다.
팔라티노 언덕에는 도무스 트란시토리아의 흔적이 여전히 많이 남아 있다. 17세기 발굴조사에서 찾아낸 곳이다. 당시 발굴조사가 엉터리로 진행돼 훼손이 매우 심했다. 이곳은 한동안 외부인에게 공개되지 않다 2019년부터 개방돼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있다.
도무스 도미티아나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 그리고 네로에 이르기까지 여러 신축 궁전을 살펴봤다. 이제 팔라티노 언덕에 건설된 마지막 궁전 이야기를 할 때다.
지금 팔라티노 언덕에 올라가면 입구에서 시작해서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궁전 폐허가 있다. 멀리 테베레 강을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는가하면 스타디움도 보인다. 오현제 시대가 열리기 전 베스파시아누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였던 도미티아누스가 만든 제정 시대의 마지막 신축 궁전인 도무스 도미티아나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가 덧붙인 도무스 세베리아나다.
베스파시아누스의 둘째 아들이었던 도미티아누스는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네로처럼 어릴 때 그다지 유복하지 못했다. 아버지가 큰아들 티투스만 데리고 늘 전쟁터를 돌아다닌 탓에 그는 로마에서 어머니, 누나와 함께 살았다. 어머니, 누나가 세상을 떠났을 때에는 작은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 사비누스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당시 그의 나이는 십대 초반이었다.
도미티아누스는 매우 영민하고 지적으로 뛰어났다. 공부를 많이 한데다 웅변술도 빼어나 로마, 그리스의 유명한 시인들의 아름다운 시구를 어렵잖게 인용했다. 형처럼 군 경력을 쌓지는 못했지만, 활을 잘 쐈고 여러 가지 무기도 잘 다뤘다.
도미티아누스는 늘 형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다. 형은 아버지를 따라 군에 들어가 동방에서 유대 반란을 진압하면서 큰 성과를 올렸지만 그는 로마에서 공부만 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황제로 즉위한 뒤 형은 공동 통치자가 돼 경력을 쌓을 때 그는 형식적 직위에 만족해야 했다.
그런데 아버지에 이어 황제가 된 형이 뜻밖에 고생만 하다 2년 만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도미티아누스는 졸지에 황제가 됐다. 일부 역사학자는 그가 형을 암살했을지 모른다고 의심한다.
도미티아누스의 아버지와 형은 평생을 군에서만 보냈다. 로마 출신이 아닌 호모 노부스(신참)라는 열등감도 갖고 있었다. 감히 팔라티노 언덕에 새 궁전을 지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들이 할 수 있었던 것은 로마 시민의 호감을 사기 위해 콜로세움을 건설하는 게 고작이었다.
도미티아누스는 달랐다. 아버지와 형이 대를 이어 황제였던 경우는 로마 제정에서 그가 처음이었다. 호모 노부스였던 베스파시아누스 가문은 그가 즉위할 때쯤에는 로마 최고의 명문 집안이 돼 있었다. 아버지와 형은 군인으로 늘 고생만 하며 살았지만, 그는 황제의 아들이자 동생으로서 우아하고 화려하게 청소년기를 보낼 수 있었다.
‘나에게는 아버지와 형이 가진 열등감은 전혀 없어. 세상을 보는 눈이 두 사람과 다른 것은 당연한 일이야.’
도미티아누스가 네로의 도무스 트란시토리아를 넘어서는 엄청난 궁전을 만들 계획을 세운 것은 이런 점에서 보면 지나친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로마는 내전 후유증에서 벗어나 번영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로마인 중에서 그를 두고 오만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게 81~92년 11년 동안의 공사를 거쳐 완성한 도무스 도미티아나였다.
네로의 도무스 트란시토리아 위에 지었던 도무스 도미티아나는 지금은 편의상 세 구역으로 나뉜다. 도무스 플라비아, 도무스 아우구스타나, 그리고 스타디움이다. 스타디움은 길이 160m 정도여서 전차경기를 열기에는 조금 규모가 작다. 역사학자들은 이곳을 경마장 또는 승마장이었거나 궁전의 내부 정원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2세기 황제였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이 궁전 옆에 도무스 세베리아나를 덧붙였다.
몰락한 언덕
도무스 도미티아나와 도무스 세베리아나를 끝으로 팔라티노 언덕에 새로운 궁전을 건설했다는 기록은 나타나지 않는다. 도미티아누스 황제 이후 이어진 오현제 시대에 등장한 다섯 황제는 성격이나 시대 상황 때문에 궁전을 지을 생각은 물론 여력도 없었다.
네르바는 등극 이후 15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첫 에스파냐 속주 출신 황제였던 트라야누스는 호모 노부스였던 만큼 감히 궁전을 신축할 엄두를 낼 수 없었다. 그 뒤를 이은 하드리아누스는 재위 기간 대부분을 해외 순방으로 보낸 탓에, 안토니누스 피우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성격상 새 궁전에 관심이 없었다. 그 이후 황제들은 기울어가는 제국을 살리느라 바빴기 때문에 팔라티노 언덕에 눈길을 돌릴 여유를 가질 수 없었다.
3세기 중엽 고르디아누스 3세 이후 로마에 본격적인 군인 황제 시대가 도래했을 때부터 팔라티노 언덕의 역사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군인 황제들은 사방에서 쳐들어오는 외적을 맞아 싸우느라 팔라티노 궁전에 들어가 잠시 침대에 등을 댈 여유는커녕 로마로 돌아올 시간조차 없었다.
군인 황제 시대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사두정치 시대를 마감하고 천하를 통일한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콘스탄티노플로 천도한 이후 팔라티노 언덕은 본격적으로 몰락했다. 이곳의 궁전은 야만족의 침입을 피해 이탈리아 동부 해안 도시인 라벤나에 숨어 살았던 호노리우스, 발렌티니아누스 3세, 리비우스 세베루스 등 4~5세기 황제가 로마에 갔을 때 하룻밤을 보내는 곳으로 전락했다.
476년 로마를 멸망시킨 오도아케르는 물론 그를 쫓아내고 왕 자리에 오른 동고트족 지도자 테오도리크도 마찬가지였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가 궁전을 증축했다는 것 말고는 팔라티노 언덕을 다룬 기록이 거의 없어 로마 멸망을 전후한 시기에 그곳이 어떤 상태였는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하고 기독교 우대정책을 펴 교회가 기세등등했던 4세기 말부터 팔라티노 언덕 주변에는 교회들이 들어섰다. 늑대 동굴 루페르칼 근처인 서쪽에는 성 아나스타시아 교회가 만들어졌다. 산타 세바스티아노 교회, 산타 보나벤투라 교회 등도 연이어 만들어졌다.
팔라티노 언덕 중심부는 여러 차례 지진으로 무너져 9세기 중엽 교황 레오 4세 시대에는 접근하기조차 어려울 정도가 됐다. 궁전 등의 건물이 무너져 폐허가 된 것은 이 무렵으로 추정된다. 중세시대에 고대 로마를 다룬 책이 여러 권 발간됐지만 팔라티노 언덕을 언급한 내용은 거의 없다. 이 시대 팔라티노 언덕은 아무도 찾지 않는 유령의 땅에 불과했다.
팔라티노 언덕이 로마인의 시야에 다시 들어온 것은 15세기 교황이 아비뇽 유수에서 돌아온 이후였다. 로마가 다시 번성하면서 살기 좋은 땅을 찾게 된 교회 사제와 귀족은 팔라티노 언덕에 눈을 돌렸다. 16세기 무렵에는 정원을 갖춘 화려한 저택이 연이어 건설됐다. 일부 땅은 포도밭으로 이용됐다. 로마인은 이곳을 ‘대궁전’이라는 뜻인 ‘팔라초 마조레’라고 불렀다.
팔라티노 언덕을 가장 먼저 선택한 사람은 16세기 교황 바오로 3세(재임 1534~49년)의 손자였던 추기경 알레산드로 파르네스였다. 속세의 이름이 할아버지와 같았던 그는 겨우 열네 살에 부제 추기경이 됐고, 파르마 교구 행정관으로 임명받아 월급까지 받았다.
파르네스는 이후에도 할아버지의 후광을 등에 업고 출세 가도를 달렸다. 권력과 부를 거머쥔 사람이 평범한 시민과 떨어져 전망 좋은 곳에서 화려한 생활을 즐기려고 한 것은 고대 로마나 16세기나 다를 바 없었다.
파르네스는 1540~50년 팔라티노 언덕 북쪽 지역 절반을 사들여 유럽 최초의 식물원을 만들었다. 티베리우스 궁전 잔해를 수습해 여름 별장도 건설했다. 지금 팔라티노 언덕에 가면 그가 만든 식물원과 별장 흔적이 남아 있다.
망각의 깊은 땅 속에 묻혀 있던 팔라티노 언덕은 18세기부터 본격적으로 발굴되기 시작했다. 도무스 도미티아나는 1728년, 1860년 발굴조사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2006년에는 아우구스투스의 출생지로 보이는 집을 발굴했다는 조사 결과가 나와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아직도 발굴해야 할 곳은 많고 갈 길은 멀다.
팔라티노 언덕에 올라가면 여러 종류의 침엽수로 이뤄진 숲 터널이 나타난다. 그 사이로 잘 다듬은 돌을 촘촘하게 깔아놓은 길이 단정하게 나 있다. 길 끝에는 U자를 뒤집어놓은 것 같은 아치만 남은 건축물 잔해가 슬픈 얼굴을 하고 서 있다. 잔디밭에서는 편안하게 자리를 잡은 관광객들이 여행 안내인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특이한 모양의 소나무는 목을 길게 뽑아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그의 이야기를 뒤에서 듣고 있다. 과거에는 얼마나 웅장했을지 가늠할 길이 없는 궁전의 폐허는 발아래 전경을 내려다보며 깊고도 긴 회상에 잠겨 있다.
언덕을 올라가면 대전차경기장 키르쿠스 막시무스의 터였던 곳이 보인다. 그 너머로 나지막한 아벤티노 언덕이 나타난다. 지금은 여러 건물에 거의 가려져 있지만, 고대 로마 시대에는 그 너머로 테레베강도 시원하게 볼 수 있었다.
에반드로스, 헤라클레스와 로물루스 형제의 전설, 수많은 전쟁 영웅의 이야기, 역대 황제의 역사는 이제 팔라티노 언덕의 깊은 흙 속에 파묻혀 버렸다. 하지만 여전히 이 언덕과 포로 로마노 주변에는 고대 로마의 흔적이 바람에 실려 향기롭게 흐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