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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Oct 21. 2020

카피톨리노 언덕

신이 주는 만큼만 믿는다



 종교는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모든 사회에서 중요한 요소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특히 과거에는 종교가 인간의 모든 것을 통제했다. 당시 인간에게 종교는 사계절을 의미했고, 일출과 일몰을 뜻하기도 했다.


 신은 풍년이 들게 해주었고, 지도자를 뽑아주었고, 자연재해로부터 보호했고, 전쟁이 났을 때에는 승리하게 도왔다. 모든 사회는 신의 이야기를 담은 신화를 창조했고 신을 숭배하기 위해 신전을 만들었다. 그곳에서 봉물을 바쳐 신의 축복을 빌었다.


 로마도 다르지 않았다. 다신교 국가여서 신이 무려 30만이나 됐던 로마에서 종교는 일상적 삶은 물론 국가의 전부이다시피 했다. 신에게 물어보지 않고 국가의 사업을 결정하는 일은 없었다. 자연재해 등 끔찍한 일이 일어나거나 전쟁에서 패하면 신이 로마에 불만을 가졌다고 해석했다. 전쟁에서 이기거나 풍년이 들면 신이 도왔다고 믿었다.


 로마의 종교를 상징하는 장소는 카피톨리노 언덕이었다. 지금은 콜로세움과 포로 로마노를 살펴본 관광객이 스쳐 지나가는 경유지에 불과하지만, 고대 로마 시대에는 유피테르 콜라티누스라고도 불렸던 유피테르 옵티무스 막시무스 신전이 세워져 있던 로마의 종교 중심지였다. 로마인뿐만 아니라 로마의 지배를 받는 모든 속주 지도자, 동맹국 왕이 로마에 가면 꼭 참배하던 이었다.


 지금 카피톨리노 언덕은 포로 로마노에 등을 돌리고 앉아 있다. 하지만 과거에는 포로 로마노를 향해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우뚝 서 있었다. 로마인의 종교적 삶을 이해하기 위해 카피톨리노 언덕에 유피테르 신을 만나러 간다. 아직도 그곳에 그가 있다면….




도망자여, 로마로 오라



 카피톨리노 언덕은 로마의 일곱 언덕 중에서 가장 작고 좁았다. 가장 긴 쪽 길이가 겨우 460m에 불과했다. 반면 고도는 39m로 가장 높았다.  주변은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남동쪽에만 올라가는 길이 있었다. 위에서 보면 대충 오각형처럼 생겼다. 이 언덕은 높기만 하고 공간은 좁았기 때문에 큰 마을을 이뤄 살기에는 부적합한 곳이었다. 로물루스가 이곳에 눈길을 주지 않고 팔라티노 언덕에 로마를 건국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물론 이곳에 사람이 살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로물루스가 팔라티노 언덕에 로마를 세웠을 때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BC 1세기 로마 역사학자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의 『라틴어 원론』이라는 책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카피톨리노 언덕에 사투르니아 마을이 있었다. 족장은 사투르누스였다. 카피톨리노 언덕은 고대에는 몬스 사투르니우스(사투르누스의 산)로 불렸다.’


 팔라티노 언덕 편에서 설명한 대로 신화에 따르면 헤라클레스가 이곳을 지나간 적이 있었다. 그때 헤라클레스를 따라 다녔던 병사들이 이곳에 정착해 살았다. 신화는 그때 이야기를 이렇게 전한다.


 팔라티노 언덕에서 카쿠스를 해치운 헤라클레스가 그리스로 떠나려 할 때 그와 함께 에스파냐에 다녀온 그리스 병사 및 도중에 잡아온 포로 중에 팔라티노 언덕 근처에 정착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았다.


 병사들은 대개 펠로폰네소스 출신이었다. 이들은 고향에 가봐야 호구지책이 막막하다고 생각했다. 대신 팔라티노 언덕 근처에는 강이 흐르고 적당한 면적의 농지와 초지도 있어 먹고 살기에 어려움이 없을 거라고 판단했다.


 “영웅이여, 우리는 이곳에 그냥 머물고 싶소. 허락해주시오.”


 “당신들이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도록 하시오. 이미 나를 충분히 도와줬으니 그대들에게는 스스로의 운명을 정할 자격이 있소.”


 헤라클레스는 그들의 뜻을 받아들였다. 병사들이 자리 잡은 곳은 팔라티노 언덕 앞에 있는 카피톨리노 언덕이었다. 그들이 만든 마을이 사투르니아였던 것인지, 아니면 이미 있던 사투르니아에 들어가 살았던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사투르니아가 없어지고 한참 뒤에 입주했던 것인지는 불투명하다.



 팔라티노 언덕에 나라를 세운 로물루스가 카피톨리노 언덕에 눈을 돌린 것은 현실적 필요성 때문이었다. 그는 나라를 세운 뒤 고민에 빠졌다. 인구는 겨우 3천 명이었다. 이 정도로는 어느 나라와도 전쟁을 벌일 수 없었다. 힘을 키우려면 인구를 늘려야 했지만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이제 겨우 첫 걸음을 내디딘 작은 도시국가에 들어와 살려는 사람은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로물루스는 고민 끝에 극단적인 대책을 생각해냈다. 도망자, 부랑아, 산적, 가난한 사람 등 신분을 불문하고 어느 도시, 어느 나라의 누구라도 로마에 오면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플루타르코스는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이렇게 기록했다.  


 ‘(로물루스는)모든 탈주자를 맞아들여 보호해주었다. 채무자는 물론 살인자까지도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도망자 등이 곧바로 로마에 정착하면 이전 부족에서 잡으러 올 게 뻔한 일이었다. 그래서 우선 잠시 숨을 곳을 마련해 줄 필요가 있었다. 로물루스가 그들에게 배정한 땅은 바로 카피톨리노 언덕이었다.


 “이곳에 마련한 은신처에 잠시 숨어 지내게. 그 동안 식량은 공급해줄 걸세. 모자라는 게 있으면 아쉽더라도 자체적으로 조달해 살도록 하게.”


 이렇게 은닉시켰던 사람을 원래 고향 사람이 잊어버릴 무렵이 되면 새로운 신분을 줘 로마에 정착하게 했다. 이런 소문이 퍼져 나가자 인근 부족의 잡다한 사람들이 로마로 몰려들었다. 이렇게 해서 로물루스는 로마의 힘을 강화시킬 수 있는 인구를 대거 유입할 수 있었다.



 도망자의 은신처로 삼았던 카피톨리노 언덕을 유피테르 신에게 바치는 성소로 바꾼 사람도 로물루스였다. 팔라티노 언덕 편에서 설명한 대로 그는 다른 라틴족 도시의 통혼 거부로 결혼할 여성을 못 구해 애를 태우던 로마 청년들의 고민을 해결해 주기 위해 다른 부족 여인들을 납치했다.


 로마인에게 빼앗긴 여인들을 되찾기 위해 카에니나 사람들이 쳐들어왔다. 로물루스는 병사들을 이끌고 나가 적을 단숨에 와해시켜 버렸다. 적의 마을까지 공격해 일대일 대결에서 카이니아의 왕을 단칼에 베어버렸다. 많은 사람을 노예로 붙잡고 전리품도 많이 챙겼다.


 로물루스는 카에니나의 왕에게서 빼앗은 갑옷을 들고 카피톨리노 언덕으로 올라갔다. 당시 언덕에는 목동이 신성하게 여기는 참나무가 있었다. 그는 참나무 옆에 갑옷을 얹은 작대기를 꽂아 유피테르 신에게 바친 뒤 이렇게 약속했다.


 “앞으로 영원히 카피톨리노 언덕을 유피테르 신에게 바치겠습니다.”


 로물루스가 왜 로마를 건국한 팔라티노 언덕이 아니라 사람이 살지 않거나 드물었던 카피톨리노 언덕에 가서 이렇게 맹세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찌 됐든 그는 카피톨리노 언덕에 조그마한 유피테르 페레트리우스 신전을 지었다. 그가 신전을 지은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4대 왕인 안쿠스 마르키우스가 이 신전을 증축했지만 여전히 규모는 크지 않았다. 신전의 길이는 겨우 5~6m에 불과했다. 당시 로마의 능력으로는 큰 신전을 지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 신전은 BC 1세기 제정 시대 초대 황제였던 아우구스투스 시대에도 남아 있었다. 황제가 별 관심을 쏟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는 걸 봐서는 규모, 외관이 형편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유피테르 옵티무스 막시무스 신전



  에트루리아에서 이사를 왔다가 선거를 통해 로마의 제 5대  왕 자리에 오른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는 전쟁을 하러 나갈 때마다 이렇게 맹세했다.


 “전쟁에서 이길 수 있게 도와주시면 아름다운 유피테르 신전을 건설해 바치겠습니다.”


 유피테르 신이 도와준 덕분인지 타르퀴니우스는 모든 전쟁에서 승리했다.  로마는 라티움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다. 그는 신에게 감사를 드리는 뜻에서 대형 신전을 짓기로 했다. 그는 원래 왕이 된 직후부터 인근 어느 도시에서도 만들 수 없는 웅장한 규모의 유피테르 신전을 지을 계획을 갖고 있었다.


‘새로 지을 신전은 신들의 왕인 유피테르는 물론 라티움을 다스리는 맹주가 된 로마의 왕에게 어울리는 규모여야 해. 새 신전은 로마의 힘을 다른 도시에 보여줄 수 있는 시설이 돼야 하니까.’


 타르퀴니우스는 신전 건설 작업에 앞서 조점관을 불러 조점을 살펴보라고 지시했다.


“로물루스는 카피톨리노 언덕을 유피테르 신에게 바쳤지. 하지만 정말 유피테르 신이 이곳을 원하는지는 확실하지 않아. 어느 장소가 신성한 유피테르 신전을 건설하기에 가장 적당한지를 알아보시오.”


 조점관은 팔라티노 언덕에 있던 신성한 구역인 템플룸에서 조점을 보았다. 포로 로마노를 내려다보는 팔라티노 언덕과 당시에는 사투르니아, 지금은 카피톨리노라고 불리는 언덕 중에서 어디를 골라야 하는지 유피테르 신에게 물어보았다.


“사투르니아에 신전을 지으라는 게 유피테르 신의 뜻입니다.”


 조점관이 결과를 가지고 오자 타르퀴니우스는 한 번 더 조점을 살피라고 지시했다.


 “사투르니아의 어느 방향에 신전을 지어야 하는지도 여쭈어 보시오. ”


  당시 사투르니아에는 여러 신과 정령을 모신 많은 제단이 서로 밀집해 세워져 있었다. 신전을 지으려면 제단 모두를 다른 곳으로 옮겨야 했다. 그래서 유피테르 신전을 어디에 지을지 신중하게 결정해야 했다.


 “포로 로마노를 정면으로 내려다볼 수 있게 하라는 게 신의 뜻입니다. ”


 유피테르 신의 뜻을 완벽하게 이해한 타르퀴니우스는 유피테르 신전 건설  준비 작업을 시작했다. 그는 신전을 짓기로 한 카피톨리노 언덕 주변에 먼저 옹벽을 쌓았다. 옹벽과 언덕 사이에 벌어진 공간에는 흙을 메워 평평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신전을 건설하기에 충분한 장소를 마련할 수 있었다.


 하지만 타르퀴니우스는 유피테르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신전 착공을 준비하던 도중 선왕 안쿠스 마르키우스의 두 아들이 보낸 자객에게 암살당하고 만 것이었다.


그의 뜻을 이어받아 신전 건설을 본격화한 사람은 그의 아들(또는 손자)이었던 로마의 마지막 왕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였다. 아들 타르퀴니우스는 신전 건설 부지를 확보하기 위해 우선 언덕을 정비하려고 했다.


 “카피톨리노 언덕에 남아 있는 다른 종교 시설을 모두 철거하시오. 언덕을 오직 유피테르에게만 바치기로 한 로물루스의 맹세를 철저히 지키겠소이다.”


타르퀴니우스는 카피톨리노 언덕에 유피테르 신만을 모시기로 하고 다른 신을 모신 신전은 모두 철거했다. 이 과정에서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다. 언덕 한쪽 귀퉁이에 자리잡고 있던 유벤타스, 테르미누스 신이 반기를 들었다.


 “로마인이여, 우리는 다른 곳에 가지 않겠다. 영원히 이 언덕에 살 것이다.”


 유벤타스는 젊음을, 테르미누스는 국경을 상징하는 신이었다. 로마인은 이들의 거부를 좋은 조짐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새 신전 구석에 작은 기도소 두 곳을 설치해 이들에게 봉헌했다.


 “유벤타스가 로마의 성소인 카피톨리노 언덕에 남기로 했다는 것은 ‘영원한 로마의 젊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테르미누스는 ‘로마의 국경이 영원히 지켜진다’는 걸 상징한다.”


 유피테르 신전을 짓기 위해 땅을 파며 기초 공사를 할 때 다시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다. BC 1세기 로마 역사학자 테렌티우스 바로가 쓴 『라틴어 원론』에 그 내용이 기록돼 있다.


 ‘굴착 작업을 하던 인부들이 이목구비가 온전한 상태인 죽은 남자의 머리를 발견했다.  깨진 머리에서 따뜻하고 신선한 피가 흐르고 있었고 아직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는 이게 무슨 뜻인지 알아보려고 로마뿐만 아니라 에트루리아에서도 영험하다고 소문난 주술사 여러 명을 데려와 해석을 맡겼다.


 “카피톨리노 언덕이 세계 수도의 장엄한 요새가 들어서야 할 곳이라는 점을 유피테르께서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로마가 앞으로 세상의 머리가 될 곳임을 보여주는 증표입니다.”


 타르퀴니우스는 여기에 의도적으로 다른 내용을 덧붙여 로마인에게 퍼뜨렸다. 죽은 사람은 에트루리아의 전설적 영웅인 아울루스 비벤나라는 것이었다. 그는 언덕에서 파낸 머리를 ‘아울루스의 머리’라는 뜻인 카푸트 올리라고 불렀다. 세월이 지나면서 카푸트 올리는 카피톨리노로 바뀌게 됐다.’


 타르퀴니우스는 유피테르 신전을 화려하게 짓기 위해 에트루리아에서 목수와 기사를 데려왔다. 전쟁에서 챙겨온 전리품을 팔아 만든 수입은 물론 엄청난 국고를 투입했다. 공사를 서두르기 위해 가난한 평민들을 공사 현장에 대거 투입했다. 


하지만 타르퀴니우스는 결과적으로 헛심만 쓴 꼴이 되고 말았다. 그는 온 정성을 다해 건설한 유피테르 신전 봉헌식을 직접 거행할 수 없었다. 폭정을 펼쳐 로마인으로부터 미움을 사는 바람에 왕 자리에서뿐만 아니라 아예 로마에서 쫓겨났기 때문이었다.


 유피테르 신전을 최종 완성한 사람은 로마에서 왕정을 몰아낸 뒤 공화정을 세우는 데 기여한 BC 509~503년의 집정관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였다. 봉헌식은 공식적으로 BC 509년 9월 13일에 열렸다. 신전의 이름은 유피테르 옵티무스 막시무스 신전이었다. 


로마인은 이날을 ‘로마 공화정이 출범한 공식적인 첫날’로 기록했다. 이날 봉헌식을 치른 로마는 하얀 소를 제물로 바치고 루디라는 화려한 종합경기대회를 거행했다.


 



  유피테르 옵티무스 막시무스 신전은 건립 직후부터 공화정, 제정을 통틀어 로마의 정신적, 종교적 중심지였다. 로마에서 가장 큰 신전이라는 차원을 넘어 로마의 주권과 영속성을 나타내는 상징이었다. 원로원은 평소에는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집회를 열었지만, 중요한 안건이 있을 때에는 늘 이곳에 모였다. 이 신전은 로마 장군과 황제가 치르는 개선식의 최종 목적지이기도 했다.


 왕정 시대에 왕, 공화정 시대에 집정관은 유피테르 옵티무스 막시무스 신전에서 즉위, 취임 선서를 했다. 제정 시대에 황제는 원로원으로부터 즉위 승인을 받은 뒤 신전을 찾아가 맹세를 했다.


 유피테르 옵티무스 막시무스 신전은 성소이자 치외법권 지역이었다. 무슨 죄를 지었더라도 신전에 들어간 사람을 해칠 수는 없었다. 마르스 평원에 있는 폼페이우스 대극장의 회랑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암살한 마르쿠스 브루투스 일당은 신전 안으로 도망갔다. 이곳에서는 아무리 범죄자라도 함부로 죽이거나 해코지할 수 없다는 불문율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유피테르 옵티무스 막시무스 신전은 유피테르와 그의 부인인 유노, 딸인 미네르바를 함께 모셨다. 당시 로마인은 이곳을 ‘카피톨리노의 삼신전’이라고 불렀다. 신전의 가운데 성상 안치소는 유피테르에게 봉헌됐다. 그곳에는 테라코타로 만든 유피테르 조각상이 세워졌다. 왼쪽 성상 안치소는 유노에게, 반대쪽은 미네르바에게 바쳐졌다.


 실제 사람 크기인 유피테르 조각상은 오른손에 번개를 들고 있었다. 야자나무 가지로 장식한 짧은 옷 튜니카와 황금실로 수놓은 겉옷인 자주색 토가를 입고 있었다. 로마인은 축제 때 유피테르 조각상의 얼굴을 붉게 칠하기도 했다. 일부 로마 장군은 개선식을 거행할 때 유피테르처럼 얼굴을 붉게 칠하고 야자나무 가지를 장식한 속옷과 황금실로 수놓은 자주색 토가를 입기도 했다.


 신전 정면 윗부분의 삼각형 부분인 페디먼트에는 유피테르가 말 네 마리를 매단 이륜 전차를 모는 모습을 담았다. 신전 계단 앞에는 커다란 제단이 놓여 있었다. 로마인은 매년 새해 초나 개선식 때, 또는 다른 특별한 경우에 이곳에서 희생물 봉헌식을 치렀다.


 이 신전은 로마 장군이 전쟁에서 약탈해 봉헌한 전리품과 로마를 찾은 외국인이 바친 선물 중에서 가장 귀한 물건만 골라 보관하는 저장소 역할을 했다. 로물루스가 카에니나와의 전쟁에서 빼앗은 전리품을 보관한 데에서 유래한 관습이었다.


 기록에 남아 있는 봉헌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BC 459년 라티움 도시들이 복종의 표시로 바친 황금 왕관이었다. 외국과의 조약, 법률 등을 담은 동판은 물론 세금으로 걷은 국고도 이곳에 보관돼 있었다. 세월이 흐를수록 봉헌물이 너무 많아져 신전 내부가 꽉 차는 바람에 BC 179년에는 신전을 정리하기도 했다.


 공화정 시대에는 카피톨리노 언덕에 유명한 로마인의 조각상을 세우는 게 유행했다. 언덕에 서 있던 조각상은 왕정 시대의 왕 네 명과 ‘공화정의 아버지’ 유니우스 브루투스,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나라를 구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등이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조각상이 너무 많아지자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조각상 대부분을 마르스 평원으로 옮겨버렸다.


 신전 지하에는 고대 로마의 신탁서인 시빌 예언서가 보관돼 있었다. 이 책은 그리스어로 적혀 있었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가 쿠마이의 무녀로부터 사들인 것이라고 한다. 그가 책을 구입하는 과정과 관련해 내려오는 전설이 있다.


아폴로 신을 모시는 쿠마이 지역의 한 무녀가 타르퀴니우스를 찾아갔다. 그녀는 책을 보여주면서 엄청난 금액을 요구했다.


“시빌 신탁을 담은 책 아홉 권을 사시오.”


“네가 요구한 금액으로는 사지 않을 것이다.”


무녀는 밖으로 나가더니 책 세 권을 불태워버렸다. 잠시 후 그녀는 나머지 여섯 권을 들고 다시 타르퀴니우스를 찾아갔다.


“이 여섯 권을 아까 아홉 권과 같은 가격에 사시오.”


“당신은 바보로군. 세권이나 적은 책을 똑같은 가격에 사라는 게 말이 돼?”


무녀는 다시 밖으로 나가 세 권을 더 불태웠다. 그리고 나머지 세 권을 들고 다시 타르퀴니우스에게 갔다.


“마지막 세 권이오. 아홉 권과 같은 가격에 사시오.”


타르퀴니우스는 그제야 무녀의 목적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그는 조점관을 불러 물어보았다.


“도대체 저 여인은 누구요? 이게 무슨 일이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


“조점을 보니 왕께서는 신이 보낸 축복을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 책을 다 사지 않으면 엄청난 재앙이 닥칠 것입니다.”


깜짝 놀란 타르퀴니우스는 여인을 불러 원하는 대로 돈을 주고 책 세 권을 샀다. 여인은 마지막 한마디를 남기고 쿠마이로 돌아갔다.


“ 이제 로마는 세계의 지배자가 될 것이오.”



 시빌 예언서는 유피테르 신전 지하창고에 보관됐고, 전담 사제의 관리를 받게 됐다. 예언서를 보호하는 사제는 나중에는 15명으로 늘었다. 이들은 모든 국가적 의무를 면제받은 채 오직 예언서를 돌보는 일만 하게 됐다.


BC 83년 불이 나서 유피테르 신전이 소실됐을 때 시빌 예언서도 함께 없어지고 말았다. 로마인은 그리스 곳곳을 뒤져 시빌 예언서를 다시 구했다.


 로마인이 이 책을 활용한 사례는 한두 건이 아니다. BC 399년과 348년, 295년에 역병이 돌자 로마인은 이 책에서 해답을 찾았다. 결론은 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의식을 거행하라는 것이었다. BC 345년에는 대낮에 하늘이 컴컴해지면서 돌이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렸다. 이때도 로마인은 시빌 예언서를 보고 축제를 열어 문제를 해결했다.


 BC 216년 포에니 전쟁 때는 칸나에 전투에서 로마군 6만 명이 카르타고의 한니발 장군에게 몰살당했다. 전례 없던 참패에 충격을 받은 로마인은 시빌 예언서의 신탁대로 그리스인과 갈리아인 4명을 산 채로 땅에 묻어버렸다. 이밖에도 로마인들은 온갖 기이한 일이 일어나거나 나라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수십 차례에 걸쳐 이 책에서 신탁을 구했다.




로마의 신



 로마인은 실용적인 민족이었다. 종교도 마찬가지였다. 원래부터 있었던 신은 역사의 발전 상황에 따라, 외국에서 새로 들여온 신은 필요할 때마다 실용적으로 바꿔나갔다. 때로는 없던 신을 만들기도 했다.


 로마인의 실용성은 그리스 신이나 다른 지역의 신을 도입하는 과정에서 놀라운 창의성을 발휘했다. 그들은 이 과정에서 외국 신을 맹목적으로 베끼기만 한 게 아니었다. 신의 이름을 바꾸면서 성격도 크게 변형시켜 이른바 ‘로마의 신’으로 토착화시켰다.


 그리스의 신은 인간과 비슷했다. 사랑, 미움, 질투, 행복, 용서, 복수, 분노 등 인간이 가진 모든 감정을 신도 갖고 있었다. 그리스의 신은 인간을 도와주기도 했지만 괴롭히기도 했다. 위대한 존재이기도 했지만, 자주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다.


 로마의 신은 달랐다. 그들에게서는 인간적 특성이 배제됐다. 마치 엄격한 법률이나 도덕 같은 존재였다. 열심히 살아가는 인간을 도와주는 존재였고, 인간을 이유 없이 괴롭히거나 실수하는 일은 없었다. 그리스의 신이 인문학적 존재였다면 로마의 신은 기계적, 공학적, 법률적 존재였다고 볼 수 있었다.


 로마인이 신을 대한 태도를 분석해 보면 종교라기보다는 계약 같은 성격을 갖고 있었다. 한마디로 ‘신이 주는 만큼 믿는다’는 것이었다. 이기게 해 주는 만큼, 도와주는 만큼, 돈을 벌게 해 주는 만큼, 병을 치료해주는 만큼, 풍년이 들게 해 주는 만큼….


 그들에게 신은 ‘주는 것은 없지만 전지전능하기 때문에 아무 이유 없이 머리를 숙여야 하는’ 그런 존재가 아니었다. 신의 생각도 로마인들과 다르지 않았다. 로마인이 희생물을 바치는 만큼, 평소 생활에서 노력하는 만큼만 도와주었다. 로마인도 이렇게 생각했다.


 ‘노력하지 않는 사람을 신이 도와주는 일은 없다.’


 로마에는 온갖 종류의 신이 다 있었다. 건국 초창기에는 유피테르와 마르스, 그리고 죽어서 신이 된 로물루스 즉 퀴리누스를 가장 중요한 삼신으로 받들었다. 나중에 유피테르가 가장 중요한 신 자리에 오른 이후에는 유피테르의부인인 유노와 딸인 미네르바가 로마인들이 가장 신봉하는 ‘카피톨리노 삼신’ 자리에 올랐다.


 여기에 ‘평민의 삼신’도 있었다. 농업과 곡물 생산의 여신 케레스, 포도와 포도 재배 및 자유의 신 리베르, 케레스와 리베르의 딸이며 포도의 여신인 리베라였다.


 BC 1세기 로마 역사학자 타렌티우스 바로가 ‘디이 콘센테스’라고 부른 열두 신도 있었다. 유피테르, 마르스, 넵투누스, 아폴로, 불카누스, 유노, 베스타, 미네르바, 케레스, 디아나, 베누스, 메르쿠리우스였다.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열두 신과 똑같은 구성이었다.


 이들 외에도 많은 신이 로마를 지켰다. 그야말로 기상천외한 신이 넘쳐났다. 출산과 예언의 여신 카르멘타, 열쇠와 문 및 항구의 신 포르투누스, 꽃과 봄의 여신 플로라, 테베레 강의 신 볼투르누스, 팔라티노 언덕의 수호신 팔라투아, 하수구의 신 클로아키나, 우물과 온천의 신 폰투스, 장례식을 제대로 치르지 못했거나 좋은 무덤을 얻지 못해 구천을 떠도는 영혼의 신 레무레스, 모유를 먹이는 어머니를 보호하는 여신 루미나, 태어난 아기가 울음을 터뜨리게 해주는 신 바티카누스, 소 기생충의 신 베르니무스도 있었다.


 로마인은 지리적, 추상적 개념에도 신을 접목시켰다. 신뢰와 선의를 상징하는 신 피데스, 국경을 나타내는 신 테르미누스, 풍요와 번영을 의미하는 신 아분탄티아, 공정을 뜻하는 신 에퀴타스, 성장을 의인화한 여신 데아 디아, 원칙을 표현한 신 디스키플리나, 명예와 소문을 상징하는 여신 파마, 명예를 신격화한 호노스였다.


 도시인 로마를 아예 신으로 만들기도 했다. 이른바 로마 신이었다. 콜로세움에서 포로 로마노를 바라보면 아주 크면서 안쪽으로 동그랗게 움푹 들어간 신전이 있다. 이곳은 로마 신과 베누스 여신을 동시에 모시는 로마-베누스 신전이다.

  

유피테르

 

 유피테르는 로마 초창기 에트루리아에서 도입된 것으로 보인다. 에트루리아인들은 유피테르를 ‘왕을 보호하는 신’이라고 생각했다. 유피테르라는 이름은 라틴어인 요비스(Iovis)와 파테르(pater)을 합친 것이라는 게 일반적 견해다. 요비스의 의미는 불투명하지만 파테르는 ‘아버지’라는 뜻이었다. 이런 주장도 있다.


 ‘유피테르는 인도유럽어 계열 접두사다. 번개, 하늘을 뜻하는 디우(dyeu)와 파테르가 합쳐진 단어다.’


 로마 신화에서 유피테르는 사투르누스와 옵스의 아들이라고 한다. 어떤 이야기에는 행운의 여신 포르투나의 쌍둥이 오빠로 등장한다. 포르투나가 유피테르의 딸이라고 주장하는 신화도 있다. 이렇게 다른 내용이 등장하는 것은 그리스에서 건너온 신화가 지역에 따라 엉뚱하게 전파됐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유피테르는 특이하게도 처음에는 농업, 포도주와 관련된 신이었다. BC 1세기 철학자 소 카토는 『농업론』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봄에 파종하기 전에, 가을에 추수하기 전에 경건한 공물을 유피테르에게 바쳤다. 유피테르는 나와 가족과 집에 자비롭고 자애로운 신이었다.’


 로마인이 유피테르에게 본격적인 주신 대접을 시작한 때는 제2대 왕 누마 폼필리우스 시절이었다. 리비우스의 『로마사』와 플루타르코스의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역사와 신화가 섞인 이야기가 담겨 있다.


 로물루스가 죽은 뒤 로마는 왕을 정하지 못했다. 핵심적인 두 세력인 라틴족과 사비니족이 서로 자기 세력 출신 인물을 왕으로 모셔야 한다며 다퉜기 때문이었다. 두 세력은 새 왕을 구할 때까지 당분간 원로원 의원 100명이 돌아가면서 닷새씩 통치하도록 결정했다. 이런 상황은 1년이나 이어졌다. 당연히 불만이 터져 나왔다.


 “종전에는 왕을 1명만 모셨는데 지금은 100명이나 모시게 됐다.”


 돌아가면서 왕 자리를 맡았던 원로원 의원들이 얼마나 권세를 많이 부렸는지 알 수 있는 말이었다. 원로원은 걱정이 커졌다.


 “서둘러 왕을 구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폭동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로마인은 수소문 끝에 로마 인근에서 가장 현명하다고 소문이 난 누마 폼필리우스를 왕으로 모시기로 했다. 그는 쿠레스라는 다른 사비니족 마을에 살고 있었다. 인간의 법률을 잘 알고 누구에게나 공정한데다 신에게는 경건한 사람이라는 게 당시 로마는 물론 다른 도시에도 퍼진 평가였다.


 “로마는 당신을 새로운 왕으로 모시기로 했습니다.”


 “허허! 잘못 오신 것 같군요. 저는 왕 같은 것에는 흥미가 없습니다.”


 쿠레스로 찾아온 로마 조점관에게서 왕으로 추대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누마는 처음에는 제안을 거절했다. 아버지는 그를 설득했다.


 “하늘의 뜻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


 “그럼 유피테르의 뜻을 살펴보고 나서 추대를 받을지 거절할지를 결정하겠습니다.”


 누마는 조점관을 따라 카피톨리노 언덕으로 올라가 남쪽을 바라보며 바위에 앉았다. 조점관은 머리에는 두건을 두르고 오른손에는 손잡이 부분이 휘어진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그는 누마의 머리에 손을 얹고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 유피테르이시여! 제가 머리에 손을 얹고 있는 누마 폼필리우스가 로마를 통치하는 게 신의 뜻이라면 명확한 표징을 내려주소서!”


 조점관의 말이 끝나자마자 하늘에서 독수리 무리가 나타나 오른쪽으로 날아갔다. 누마는 조점관을 보며 빙긋이 웃었다.


 “유피테르 신께서 독수리 무리를 보내셨군요. 신의 허가가 떨어졌습니다. 왕이 되라는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하겠습니다.”


 누마가 즉위한 지 8년째 되던 무렵 로마에 전염병이 돌았다. 누마는 어려움을 해소할 방법을 찾다 유피테르를 아벤티노 언덕에서 만났다. 그는 이 자리에서 유피테르로부터 벼락을 피하는 방법을 배웠다. 누마가 유피테르를 만났다는 건 그를 주신으로 모시기로 했다는 것이고, 벼락을 피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은 유피테르의 보호를 받을 수 있게 됐다는 것을 상징하는 표현이었다.


 누마는 전쟁에 푹 빠져 있던 로마에 종교와 평화의 전통을 도입했다. 그는 로마가 더 번영하기 위해서는 전쟁의 신 마르스보다 더 격이 높은 새로운 신이 필요하다고 봤다. 가장 합당한 신은 천둥번개라는 무기를 이용해 다른 신을 복종시키는 유피테르였다. 유피테르는 ‘신들의 왕’이었다. 로마인은 이때부터 유피테르가 로마에 패권을 주었다고 믿었고, 다른 도시 사람들에게 그렇게 자랑하고 다녔다.


 “로마가 세계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수많은 신, 그 중에서도 유피테르를 잘 섬겼기 때문이라오.”


 유피테르는 로마인에게 기본적으로 국가, 또는 국가의 권력을 상징하는 신이었다. 그가 갖고 있는 번개는 모든 힘을 누를 수 있는 절대적 능력을, 그를 상징하는 새 독수리는 세상의 모든 일을 알 수 있는 예언을 의미했다. 로마인에게 유피테르는 로마였고 로마는 유피테르였다.


 로마인은 처음에는 농업의 신이었던 유피테르를 ‘신성한 조짐 또는 비를 가져다주는 신’이라는 뜻인 유피테르 엘레키우스라고 불렀다. 나중에는 ‘전쟁에서 패배를 불식시키고 승리를 가져다주는 신’으로 숭배했다. 그래서 최고의 장군인 유피테르 임페라토르, 불패의 장군인 유피테르 인빅투스, 승리자인 유피테르 트리움파토르로 부르게 됐다. 마지막에는 지고지선을 상징하는 유피테르 옵티무스 막시무스라는 이름도 붙였다.


 유피테르는 종국적으로는 무려 50여 개에 이르는 별명을 로마인들에게서 얻었다. 시간과 장소에 따라 유피테르를 변화무쌍하게 활용한 로마인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다. 유피테르가 어떻게 활용됐는지를 한 번 살펴보자. 로마인들이 유피테르를 부른 여러 가지 별명으로 스토리를 엮어보면 간단히 답이 나온다. 먼저 전쟁 때 이용된 그의 이름을 순서대로 설명해보자.


 ‘하늘에서 최고의 신인 유피테르 카엘레스티스(천상의 신)가 로마를 내려다보며 지켜준다. 유피테르 엘레키우스는 온갖 징조를 내려주면서 로마를 보호한다. 전쟁이 일어나면 유피테르 스타토르가 병사들에게 달아나지 말고 용기 있게 싸우라고 격려한다. 유피테르 임페라토르는 병사들을 이끌고, 유피테르 인빅투스 또는 빅토르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준다. 유피테르 트라이움파토르는 개선장군이 되어 로마로 행진하고, 유피테르 페레트리우스는 병사들에게 전리품을 챙겨주고 로마까지 안전하게 수송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평소 생활에서 유피테르가 로마인을 어떻게 돌보는지 살펴보자.


 ‘유피테르 카엘레스티스는 로마인의 신성한 맹세가 지켜지는지를 살펴본다. 유피테르 오피툴루스는 필요한 사람에게 구원을 준다. 유피테르 알무스는 모든 것을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유피테르 루미누스는 모유를 먹여 로마인의 삶을 이어가게 한다. 유피테르 풀구라토르 또는 풀겐스는 번개로 로마인을 지켜주거나 경계한다. 유피테르 루케티우스는 로마를 환히 밝히는 빛을 보내 사람을 깨우쳐 준다. 유피테르 플루비우스는 비를 보내주고, 유피테르 테르미누스는 국경을 지켜준다.’


 로마인은 각 방면에서 불철주야 로마를 지키려 애쓰는 유피테르에게 여러 신전을 선물했다. BC 22년에는 아우구스투스가 카피톨리노 언덕 한쪽에 유피테르 토나스 신전을 건립해 바쳤다. 칸타브리아 전쟁에 나섰을 때 번개에 맞아 죽을 뻔한 경험을 한 이후 유피테르 신에게 신전을 만들어 바치겠다고 약속한 걸 지킨 것이었다.


 키르쿠스 막시무스 인근에는 나무를 지키는 유피테르 아르보라토그 신전, 카피톨리노 언덕에는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목숨을 구해준 은인을 위해 세운 유피테르 콘세르바토르 신전, 마르스 평원에는 유피테르 풀구르 신전, 콜로세움 인근에는 유피테르 빅토르 신전이 세워졌다.


 카피톨리노 언덕에 타르퀴니우스가 건설한 유피테르 옵티무스 막시무스 카피톨리누스 신전은 많은 유피테르 신전 중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고 가장 규모가 크고 신성시되는 신전일 뿐이었다. BC 1세기 철학자 키케로는 『신의 본성』에서 유피테르의 역할을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는 유피테르를 옵티무스 막시무스라고 부른다. 우리를 올바르고 온화하고 현명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에게 안전과 부상으로부터의 자유, 부와 풍부한 자원을 주기 때문이다.’

 

마르스

 

 유피테르 못지 않게 로마인에게 중요한 신은 마르스였다. 로마는 그야말로 전쟁국가였기 때문이다.  로마는 주변 도시와 교류하거나 전쟁을 벌이던 도중 에트루리아에서 마리스라고 불린 신을 마르스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였다. 로마에 처음 들어올 때 마르스는 농업의 신이어서 봄의 파종과 가을의 수확을 관장했다.


 마르스는 또 들판과 가축의 신이어서 농사를 짓는 들판에 질병이 퍼지거나 홍수가 나는 것을 막아주기도 했다. 로마인이 일곱 언덕과 테베레 강 사이의 넓은 목초지에 마르스 평원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미국 역사학자 테니 프랑크는 이렇게 설명했다.


 ‘(로마에는)사투르누스라고 불린 곡물 수확의 정령이 있었고, 숲에는 마르스라고 불린 가축을 도와주는 정령이 존재했다.’


 세월이 흐르자 로마인은 마르스의 성격을 바꿔버렸다. 그리스신화의 아레스처럼 전쟁의 신으로 변신시켜버린 것이었다. 그러면서 아레스와는 전혀 다른 성격을 부여했다. 아레스는 그리스인 사이에 불화를 조장해 전쟁을 일으키게 하고, 야비하고 비겁한 행동을 일삼는 바람직하지 못한 모습으로 묘사된다. 반면 마르스는 로마인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주고 전쟁에서 힘을 내라고 이끌어주는 영웅 같은 신이었다.


 로마인이 농업의 신이던 마르스를 전쟁의 신으로 바꾼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로마가 조금씩 성장하면서 인구와 영토를 늘려 생존 기반을 넓혀나갈 때 이용했던 방법은 전쟁이었다. 그 과정에서 정신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신은 전쟁의 신뿐이었다.  


 로마인이 마르스를 얼마나 숭배했는지는 건국신화에서 그를 로물루스의 아버지로 만들고, 자신들은 마르스의 후손이라고 자처한 데에서 잘 나타난다. 신화에 따르면 로물루스 형제는 알바롱가에서 쫓겨난 뒤 늑대의 젖을 먹고 딱따구리의 보호를 받았다. 둘 다 ‘마르스의 심부름꾼’으로 불리는 동물이었다. 로물루스가 죽었을 때 로마인이 그에게 붙여준 존칭은 마르스를 의미하는 퀴리누스였다.  로마인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마르스가 로마에 대제국 건설을 예언했다고 주장한다.


 ‘마르스는 숲에서 또는 잠을 자던 실비아를 덮쳐 쌍둥이를 임신하게 했다. 그녀는 꿈을 꾸었다. 머리핀이 땅에 떨어졌는데 나무 두 그루가 자라났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무는 엄청나게 커져 그늘로 전 세계를 가릴 정도였다. 마르스의 아들 로물루스가 자라 로마를 세우고 후손이 대제국을 건설할 것이라는 예언이었다.’


 로마인은 1년에 서너 차례 마르스를 모시는 축제를 열었다. 모두 전쟁과 관련된 축제였다. 2월 27일에는 무기와 나팔을 정화하는 투빌루스트리움이라는 행사를 열어 다가오는 봄에 벌어질 전쟁을 준비했다. 3월 1일에는 진군과 승리를 기원하는 페리아 마르티(마르스의 축제)를 거행했다. 10월 19일에는 전쟁에서 돌아온 군인의 무기를 정화하고 보관하는 아르밀루스트리움을 진행했다. 5년에 한번씩 6월 1일에는 수오베타우릴리아 축제를 펼쳐 마르스에게 돼지, 양, 소를 제물로 바쳤다. 로마에서 이 세 동물을 모두 제물로 받는 신은 유피테르, 아폴로와 마르스뿐이었다.


 마르스는 청동갑옷을 입은 채 피가 철철 흐르는 창을 들고 다니는 장군의 모습으로 묘사됐다. 그는 불을 내뿜는 말 네 마리가 이끄는 이륜전차를 타고 다녔다. 네 말의 이름은 시뻘건 불을 상징하는 아이톤, 뜨거운 화염을 의미하는 필로기오스, 혼란을 나타내는 코나보스, 공포를 뜻하는 포보스였다.


 마르스 평원에는 마르스 신을 모시는 아라 마르티스 제단이 설치됐다. 포로 로마노의 제사장 거처인 레기아에는 하스테 마르테(마르스의 창)가 보관됐다. 이 창이 떨리거나 움직이면 전쟁이 일어날 조짐이라고 로마인은 봤다. 로마인은 적과 싸우러 나가기 전에 양, 소를 잡아 마르스에게 제물로 바쳤다. 병사들은 마르스에게 기도를 했다. 그들의 믿음은 이런 것이었다.


 “기도를 드리면 마르스의 마음을 움직여 전투에서 보호를 받고 승리를 얻을 수 있지요. 전쟁에서 누가 이길지를 결정하는 신도 마르스랍니다. 마르스는 부인 또는 딸인 전쟁의 여신 벨로나와 함께 가끔 전쟁터에 나타나 로마 병사를 격려하기도 했습니다.”


 마르스를 나타내는 상징물은 방패 안킬라(복수는 안킬리아)였다. 신화에 따르면 안킬라는 제2대 왕 누마 폼필리우스 시절 하늘에서 떨어졌다. 그때 이런 목소리가 들렸다.


 “방패가 보존되는 한 로마는 세계의 주인 자리를 지킬 것이다.”


 누마는 안킬라를 보호하기 위해 유명한 대장장이 마무리우스 베투리우스로 하여금 가짜 방패 11개를 더 만들게 해 로마 곳곳에 분산 보관했다. 어느 게 진짜인지 알 수 없게 만들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로마의 종교



 로마인에게 종교는 일상생활의 대부분이었다. 로마인 가정에는 크든 작든 신전이 있었다. 각 가족은 신에게 기도를 드리고 공물을 바쳤다. 각 가정과 별개로 마을, 지역에도 공동으로 숭배하는 신과 그 신을 모시는 신전이 있었다. 교차로, 공동묘지, 우물, 연못, 숲 같은 특별한 곳에는 그 나름대로 신을 모시는 신전이 있었다.


 국가에서 숭배하는 신과 그 신을 모시는 신전도 있었다. 다신교 국가이다 보니 종교 축제도 많았다. 해마다 40여 개의 축제가 열렸다. 어떤 축제는 하루 만에 끝났지만 중요한 축제는 여러 날 동안 진행됐다.


 초기 로마의 종교는 자연 신령을 믿는 애니미즘과 비슷했다. 로마인들은 모든 사물과 현상에는 정령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또 조상의 영혼이 후손을 지켜보면서 보호해 준다고 믿었다. 그래서 부모친척이 죽으면 반드시 적당한 장례식을 치러 주었고 무덤도 만들어 주었다.


 로마인은 라티움과 이탈리아 남부, 그리고 지중해를 오가면서 영토를 넓힐 때마다 외국인이 믿는 신과 종교를 배척하지 않고 편안하게 받아들였다. 로마인들은 피정복민의 종교적 전통을 받아들이는 데에 그치지 않고 지역의 신에게 신전을 지어 봉헌해 로마 종교의 틀 안에 포함시킴으로써 다양한 민족의 융합을 꾀했다.


 “남의 전통과 종교를 인정하고 보존해야 사회를 안정시킬 수 있습니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로마의 국가 신이었다. 로마인들은 로마의 종교 체계를 따르지 않거나 해치는 행위에는 단호하게 대처했다. 유피테르를 신봉할 필요는 없었지만, 그를 모시는 제의를 거부한다면 반역죄와 똑같이 다루기도 했다.


 로마인의 종교적 가치관은 매우 독특했다. 그들은 신에게 바치는 믿음보다는 신을 모시는 의례 절차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정해진 의례를 얼마나 정확하게 진행했는지가 그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렇게 해야 신이 분노하지 않고 로마를 도와준다고 믿었다. 그리스에서는 신화가 종교에서 큰 의미를 가졌던 것처럼 로마에서는 의례가 종교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


 “최고의 존경을 담아 종교 의례를 제대로 정확하게 치르면 사회에 번영을 불러온답니다.”


 로마인은 공공 종교 의례에 참가하는 것은 공동체와 그 가치를 신뢰하고 헌신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종교 의례를 방기하는 것은 무신론이며, 정결하지 못한 공양물과 부정확한 의례는 비티아(불경한 실수)라고 질타했다. 과도한 헌신과 신을 지나치게 두려워하는 행동, 신의 예언을 부적절하게 사용하는 것은 미신이라고 힐난했다. 그들은 이렇게 믿었다.


 “종교적, 도덕적 일탈은 이라 데오룸(신의 분노)을 불러일으켜 국가의 번영을 해칩니다. 두려운 일입니다.”


 로마에 종교 교리를 담은 책은 없었지만 의례 절차, 기도 방법, 규칙을 담은 서적은 있었다. 바로 『제사장 연대기』였다. 원칙적으로는 원로원이 자문을 구할 때 책 일부를 볼 수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사제만 접근할 수 있는 신성하게 금지된 책이었다.


로마의 사제


 로마인이 종교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긴 의례 절차와 사제 제도를 만든 사람은 유피테르를 가장 중요한 신의 반열에 올린 제 2대 왕 누마 폼필리우스였다. 그는 로마의 사제를 출신 계급과 담당 의식에 따라 여덟 종류로 나눴다. 쿠리오네스, 플라멘, 켈레레스, 아우구르, 베스탈, 살리이, 페티알레스, 폰티피케스였다.


 쿠리오네스는 쿠리아에서 거행하는 의례를 담당하는 사제였다. 로마는 람네스, 티티에스, 루케레스 3개 부족으로 이뤄졌는데, 각 부족을 10개씩 총 30개 쿠리아로 나눴다. 쿠리아는 현대적 개념으로 풀이하자면 일종의 ‘동’이었다. 각 동마다 사제가 한 명씩 있었던 셈이다.


 플라멘은 유피테르, 마르스, 퀴리누스 신을 모시는 세 종류의 신관이었다. 유피테르를 모시는 신관은 플라멘 디알리스, 마르스를 모시는 신관은 플라멘 마르티알리스, 퀴리누스를 모시는 신관은 플라멘 퀴리날리스였다. 세 플라멘 중에서 유피테르를 모시는 디알리스가 가장 권위 있는 사제였다.


 모두 15명이었던 디알리스는 여러 가지 특권을 누렸다. 디알리스로 서임되면 곧바로 아버지의 가부장권에서 해방됐다. 로마에서 가부장권은 자녀를 죽일 수 있고 로마 밖으로 데리고 나가 노예로 팔 수도 있는 엄청난 힘이었다. 이를 감안하면 가부장권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대단한 특혜였다. 디알리스는 왕권을 상징하는 쿠룰레 의자를 사용하고 호위병인 릭토르를 거느릴 수 있었는가 하면 원로원 회의에 참석할 수도 있었다.


 특권이 많았던 만큼 금기사항도 많았다. 디알리스는 금속을 만지거나 말을 타거나 시체를 보는 일을 금지 당했다. 로마를 벗어나 밤을 보낼 수도, 집정관 선거에 나설 수도 없었다. 훌륭한 정치인과 장군이 되기를 원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디알리스로 선임됐을 때 격렬한 거부 반응을 보인 것은 이 때문이었다.


 켈레레스는 300명으로 이뤄진 기병이었다. 평소에는 왕의 호위병 역할을 하다 전쟁 때에는 앞장서 싸웠으며 특정한 의례를 진행하기도 했다.


 베스탈은 불을 모시는 베스타신전을 지키는 신녀였다. 베스탈은 나중에 포로 로마노 부분에서 다시 상세히 설명할 예정이다.


 살리이는 젊은 귀족 중에서 뽑은 사제였다. 이들은 팔라티노 언덕에서 열리는 의례를 담당했다.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전쟁의 신을 칭송하는 일을 했다.


 페티알레스는 외국과의 분쟁이 일어날 경우 전쟁을 선언할지 말지, 종전과 평화를 선언할지 말지에 대해 신의 뜻을 구하는 사제였다. 외국에 사절로 찾아가 선전포고를 하는 게 그들의 일이기도 했다.


 폰티피케스는 모든 신을 다 모시는 포괄적인 사제였다.  폰티피케스는 다리를 뜻하는 ‘폰스’라는 단어에서 나온 명칭이다. 원래는 ‘다리를 만드는 자’라는 뜻이었다. 단어의 유래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대 로마 시대에는 다리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다리는 다른 신성한 시설처럼 제관이 직접 관리했다. 다리 위에서 열리는 제사는 모든 제의 중에서 가장 신성했다.


 폰티피케스는 모든 종교 문제에 최종적 판단 권한을 갖고 있었다. 사적이든 공적이든, 행정관의 문제이든 단순히 신을 모시는 문제이든 최종 판단은 그들이 했다.


 행정관이나 개인이 희생제를 치를 때 실수를 저지르지 않도록 어떤 희생물을 어떤 절차로 바쳐야하는지도 그들이 결정했다. 다른 종류의 사제가 치르는 의례 등에 문제가 생길 경우 결론을 내려주는 것도 그들이었다. 모든 종교적 불법 행위에 처벌을 내릴 권한도 갖고 있었다. 폰티피케스는 종신직이었으며, 종교적 문제에 관해서라면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다. 민회는 물론 원로원에 책임을 지지도 않았다.


 폰티피케스 중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사람은 폰티펙스 막시무스였다. 그는 신의 뜻을 해석하고 제사 의식을 진행하는 임무를 맡았다. 처음에는 왕이 최고 제사장이었지만, 공화정으로 바뀐 뒤에는 집정관 외에 최고 제사장을 따로 뽑았다. 제정 시대에는 황제가 최고 제사장 역할을 겸임했다.


 오늘날 로마 가톨릭교회 수장인 교황을 폰티프라고 부르는데, 고대 로마의 폰티펙스에서 나온 명칭이다. 결국 교황이라는 이름은 ‘다리를 만드는 자’에서 온 셈이다. 하느님과 인간을 중개하는 역할을 하는 사제라고 생각하면 적절한 단어가 아닐 수 없다.


 아우구르는 조점관이었다. 카피톨리노 언덕에서 유피테르 신의 뜻을 읽어내는 일을 하는 사제였다. 유피테르 신은 독수리와 대화를 하는데, 전할 말이 있으면 독수리를 날려 보낸다고 로마인은 믿었다. 로물루스가 동생을 따돌리고 왕이 됐을 때 발견한 새는 독수리였다. 이후 독수리는 로마를 상징하는 새가 됐다.


 독수리뿐만 아니라 유피테르의 무기인 천둥번개와 모이를 먹는 닭도 조점관이 살피는 신의 조짐이었다. BC 1세기~서기 1세기 로마 역사학자 리비우스는 『로마사』에서 조점의 역할을 이렇게 묘사했다.


 ‘로마는 조점을 받아들인 후 건국됐다. 전쟁과 평화는 물론 가정과 외국에 관련된 모든 일은 조점을 챙긴 이후에야 진행됐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로마인은 전쟁에 몰두해 있던 왕정과 공화정 중기까지만 해도 조점을 매우 신뢰했다. 점성술은 별로 신봉하지 않았다. 꿈도 믿지 않았다. 예언자라는 사람은 사기꾼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믿는 것은 신이 보내는 조짐을 해석하는 조점관의 설명이었다. 조점관도 이해하지 못하는 중대한 현상은 시빌 예언서를 보거나 그리스 델피의 아폴로 신전에서 신탁을 구했다.


 조점을 보는 관습은 로물루스가 로마를 건국하기 이전부터 팔라티노 언덕 일대는 물론 라티움의 다른 도시에도 있었다. 하지만 유피테르가 독수리를 보내 하늘의 뜻을 알려준다고 생각하는 것은 로마에서만 존재하는 특이한 현상이었다. 게다가 조점관 제도를 법률로 규정하고 철저한 절차에 따라 완벽하게 시행한 것도 로마가 처음이었다.


 로마 조점관은 조점을 살필 때에는 카피톨리노 언덕에 올라가 ‘신성한 구역’인 템플룸을 선언했다. 템플룸은 나중에 ‘신전’을 뜻하는 ‘템플’로 바뀌었다. 조점관은 템플룸에 천막을 치고 제물을 바친 뒤 독수리가 날아오르는 모습을 보고 유피테르의 뜻을 판단했다.


 집정관 등 행정관은 조점관을 통해 정부의 법적, 공식적 행위를 신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뜻을 물었다. 로마가 새로운 영토를 정복했을 때에는 조점관이 신의 뜻을 읽은 뒤 새로 확장한 국경을 표시했다. 로마인은 영토 확장을 새로운 우주 질서의 반영이자 신이 정해준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봉헌물이 충분치 않거나 의례 절차가 잘못됐거나 정부의 계획이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라면 유피테르는 조점관을 통해 거부 의사를 표시했다. 유피테르가 거부하면 행정관은 승낙 의사가 나올 때까지 거듭 봉헌물을 올려야 했다. 그래도 바라던 답이 나오지 않으면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신의 뜻이 무엇인지 판명하는 것은 전적으로 조점관의 권한이었다. 그래서 공화정 초기와 중기에는 조점관의 정치적 권한이 매우 컸다. 당연히 논란도 많았고, 조점을 조작하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독수리를 잡아놓았다가 조점을 살필 무렵 몰래 풀어놓기도 했고, 닭이 모이를 먹는 모습을 보고 판단할 때는 닭을 며칠 굶기기도 했다.


 공화정 시대 초창기에는 귀족만 조점관을 맡을 수 있었다. 평민이 신의 뜻을 해석하겠다고 함부로 나서는 것은 신성모독이라고 귀족은 주장했다. 조점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각종 이권의 수혜자가 달라지는 시대에는 당연한 일이었다. 평민의 반발이 이어지자 BC 300년에는 조점관을 8명으로 늘리면서 그 중 네 자리를 평민에게 배정했다.


 제정 시대에는 황제가 조점관을 선출할 권리를 장악했다. 이때에는 황제가 제국의 모든 일을 해석하고 결정했기 때문에 조점관은 사실상 유명무실한 자리였다. 이미 제정 이전인 BC 1세기 무렵부터 조점은 로마인의 신뢰를 거의 받지 못하고 있었다. 대다수 원로원 의원과 귀족은 물론 대다수 로마인은 조점을 신뢰하지 않았다. 조점관을 지내기도 했던 키케로는 조점을 불신하고 조롱하는 세태를 한탄하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유피테르냐 그리스도냐?



 유피테르 신전은 번개, 화재, 전쟁 등 여러 이유 때문에 세 번이나 파괴됐다. 신전이 피해를 입을 때마다 로마인은 그 이전보다 더 많은 돈을 들여 새 신전을 화려하게 지었다.


 BC 1세기 로마 역사학자 가이우스 살루스티우스 크리스푸스가 쓴 『카틸리나와의 전쟁』에 따르면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가 건설한 유피테르 신전은 가이우스 마리우스 지지 세력과 코르넬리우스 술라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던 BC 83년 화재로 완전히 파괴됐다. 유피테르 조각상도 불타버렸다.


 신전 재건축은 내전을 승리로 마무리한 술라가 시작했다. 그는 신전을 새로 짓기 위해 그리스 아테네의 제우스 신전에 세워져 있던 코린트 대리석 기둥을 로마로 가져오기도 했다. 실제 공사의 대부분은 전직 집정관이었고 술라의 부하였던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가 맡아 진행했다. 공사는 술라가 죽은 뒤인 BC 69년에 끝났으며, 봉헌식은 카툴루스가 거행했다.


 카툴루스의 새 유피테르 신전은 옛 신전 자리에 세워졌다. 신전 설계는 옛 신전 그대로였다. 다만 새 신전은 이전 신전보다 상당히 높아졌고, 건설비가 더 투입돼 이전 신전보다 더 화려했다. 로마인은 황금과 아이보리로 새 유피테르 조각상을 만들었다.


 위치가 높다 보니 카피톨리노 언덕에는 벼락이 자주 내리쳤다. 특히 유피테르 신전에 벼락이 집중됐다. 그때마다 로마인은 즉시 신전을 수리했다.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벼락에 맞아 손상된 신전을 고쳤다는 기록도 있다. 천둥번개의 신을 모신 신전이 벼락에 맞아 피해를 입었다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69년에 발생한 로마인의 방화로 유피테르 신전은 두 번째 전소되고 말았다. 그 사연은 이렇다. 네로가 죽은 뒤 에스파냐 속주 총독이었던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가 차례로 황제 자리에 올랐다. 나중에는 게르마니아 군단을 등에 업은 아울루스 비텔리우스가 그들을 물리치고 황제 자리를 빼앗았다.


 여기에 불만을 품은 시리아 속주 총독 티투스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가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격했다. 당시 베스파시아누스의 형 사비누스는 로마 장관 즉 시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비텔리우스의 병사들은 사비누스의 집으로 쳐들어갔다.


 “사비누스를 인질로 붙잡자. 그러면 베스파시아누스도 로마로 쳐들어올 수 없을 거야.”


 사비누스는 베스파시아누스의 둘째아들인 도미티아누스를 데리고 카피톨리노 언덕의 유피테르 신전으로 피신했다. 그는 도미티아누스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다.


 “신성불가침의 성소인 이곳에 숨어 있으면 아무도 해칠 수 없을 거란다.”


 비텔리우스의 병사들은 카피톨리노 언덕을 에워쌌다. 분노와 공포에 눈이 먼 병사들은 다음날 새벽 손에 들고 있던 횃불을 신전에 집어던졌다. 신전은 주로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지만 목재도 상당부분 포함돼 있었다. 유피테르 신전은 모든 로마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불에 타 무너져 버렸다. 로마인은 허망했고 분노했고 불안에 빠졌다.


 “로마의 수호신에게 바친 신전이 외국인도 아닌 로마인에 의해 불타버리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가 있는 것이지?”


 베스파시아누스의 충신인 마르쿠스 무키아누스는 황제보다 먼저 로마에 들어가 비텔리우스 병사들을 제압한 뒤 유피테르 신전을 새로 짓는 공사를 서둘러 진행했다.


 ‘민심을 수습하려면 신전 재건이 무엇보다 중요해.’


 이집트에서 건너와 황제로 등극한 베스파시아누스는 직접 석재를 짊어지고 카피톨리노 언덕을 오르며 일손을 보탰다. 앞장서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황제를 보고 다른 귀족, 평민도 복구공사에 동참했다. 이렇게 서둘렀지만 유피테르 신전이 완공된 것은 베스파시아누스의 둘째 아들인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였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밀라노 칙령을 발표한 뒤 기독교가 세상을 지배하자 유피테르 신전은 마침내 몰락의 길을 걷게 됐다.


 “로마의 신은 로마를 재앙에서 구해내지 못했습니다. 유피테르는 간통범입니다.”


 『신의 도시』를 쓴 3~4세기 기독교 신학자인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렇게 목소리를 높인 것은 유피테르 몰락의 선언이었다.


 유피테르의 몰락을 실천한 사람은 4세기 중‧후반 공동 황제였던 그라티아누스와 테오도시우스였다. 신전에 앞서 먼저 사라진 것은 제도였다. 그라티아누스는 폰티펙스 막시무스 겸임을 거부했다.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때부터 이어져오던 관례를 폐지한 것이었다.


 “기독교 황제가 이교도의 제관 역할을 맡을 수는 없다.”


 그라티아누스는 베스타 신전을 모시는 베스탈 신녀 제도를 폐지하기로 방침을 세웠다. 우선 신전 유지에 드는 비용을 국고에서 지원하지 않기로 했다. 이교도 신을 모시는 다른 신전 유지 비용을 충당하던 포도밭 등은 몰수해버렸다. 공화정 시대부터 원로원 회의장에 세워져 있던 승리의 여신상은 원로원의 반대에도 철거했다. 테오도시우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로마의 모든 전통 신앙을 박멸하기로 결심했다.


 “앞으로 로마에서 공적이든 사적이든 모든 이교도 제의 거행을 금지한다. 이 조치를 어기는 사람은 목을 자르겠다. 신전에 들어가거나 주변을 지나갈 수도 없다. 모든 이교도 신전은 교회로 바꾸어라. 신전이 너무 많아 교회로 바꾸는 게 어려우면 신전을 파괴해도 좋다.”


 테오도시우스는 종국적으로는 고대로부터 로마인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유피테르를 내쫓기로 결심했다. 18세기 역사학자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 제국 쇠망사』에서 테오도시우스가 로마를 방문해 유피테르를 로마에서 쫓아낸 이야기를 기록했다.


 로마에 간 테오도시우스는 원로원 회의를 소집한 뒤 의원들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물었다.


 “로마의 종교를 유피테르로 할 것이오? 그리스도로 할 것이오?”


 테오도시우스는 로마에 혼자 간 게 아니었다. 수많은 병사가 원로원 안팎은 물론 로마 안팎에 진주하고 있는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유피테르를 고집할 원로원 의원은 하나도 없었다. 결국 원로원은 유피테르를 로마의 주신 자리에서 끌어내린다는 결의를 채택할 수밖에 없었다. 유피테르는 로물루스가 로마를 건국하고 누마가 종교를 정비한 이래 지켜온 주신 자리를 잃고 말았다.


 테오도시우스는 폰티펙스라는 용어를 로마 주교의 명칭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가 380년 기독교를 로마 제국 공식 종교로 선포하면서 로마와 다마스쿠스 주교를 폰티펙스로, 알렉산드리아 주교를 이페스코푸스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나중에 로마 주교가 교황으로 불리게 된 이후 폰티펙스는 자연스럽게 교황을 일컫는 호칭이 돼 버렸다.


 유피테르가 로마의 주신 자리에서 쫓겨났기 때문에 유피테르 신전의 중요성도, 보호할 필요성도 사라져버렸다. 당연히 이 신전에서는 수시로 약탈이 자행됐다. 5세기 초 라벤나에 틀어박혀 살던 호노리우스 황제의 측근이었던 스틸리코 장군은 유피테르 신전의 황금 문을 뜯어갔다. 스페인을 거쳐 아프리카로 건너간 반달족도 바다를 건너와 로마에 침입해 신전에 큰 피해를 입혔다.


 15세기 중엽까지는 그래도 형편이 괜찮았다. 르네상스 시대 인문주의자였던 포기오 브라키올리니가 로마를 방문했을 때 카피톨리노 언덕에는 ‘상당히 파괴됐지만 여전히 신전 모양을 그런대로 갖춘 유피테르 신전’이 남아있었다.


 신전을 완전히 없애버린 사람은 귀족인 지오바니 피에트로 카파렐리였다. 그는 16세기 캄피돌리오 광장에 카파렐리 궁전을 건설하는 데 사용하려고 신전에서 각종 석재를 떼어냈다. 이 때문에 유피테르 신전은 결국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이후 카피톨리노 언덕은 로마인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목동이 소나 양을 몰고 매일 들르는 곳이 됐다. 중세시대 사람들은 이곳을 ‘양의 산’이라는 뜻인 ‘몬테 카프’라고 불렀다.




포로 로마노에 등을 돌리다



 로마인의 삶에서 사라졌던 카피톨리노 언덕이 다시 각광받게 된 것은 엉뚱한 이유에서였다. 1538년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 황제가 대관식을 치르기 위해 로마에 오기로 돼 있었다. 그를 초빙한 사람은 교황 바오로 3세(재임 1534~49년)였다.


 교황은 카피톨리노 언덕을 정비하기로 했다. 황제가 그곳에 올라가 아름다운 로마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게 하려는 게 목적이었다.


 “로마의 모습을 황제에게 보여주고 싶소. 카피톨리노 언덕을 다시 단장하시오.”


 당대 최고 건축가였던 미켈란젤로가 카피톨리노 언덕 재생 사업을 맡았다. 그가 생각한 재단장의 핵심은 방향 전환이었다. 고대 로마 시대에 유피테르 신전 등 카피톨리노 언덕의 모든 건축물은 포로 로마노 쪽을 향하고 있었다. 미켈란젤로는 방향을 180도 틀어 모든 건물을 로마 시내와 성 베드로 대성당을 향하도록 만들기로 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뜻이 담겨 있었다. 먼저 교회의 최고 지도자인 교황에게 존경을 표시하고, 무너진 고대 로마 대신 새롭게 발전하는 로마의 미래를 상징한다는 것이었다.


 오늘날 캄피돌리오 광장에는 건물이 세 개 서 있다. 가운데 건물은 콘세르바토리 궁전이다. 고대 로마의 유피테르 신전이 서 있던 곳이다. 이 궁전 지하에 가면 지그도 유피테르 신전의 흔적이 남아 있다. 유피테르 신전을 뜯어내고 지었던 카파렐리 궁전도 부서져 콘세르바토리 궁전에 포함됐다.


 캄피돌리오 광장 한복판에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기마상이 서 있다. 원래 구리로 만든 높이 3.5m 동상이었다. 대기 오염 때문에 훼손 우려가 커지자 원본은 카피톨리노 박물관 안으로 옮겼다. 광장에 있는 기마상은 1981년에 만든 복제품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기마상은 175년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처음에는 포로 로마노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원주가 있는 비아 코르소(코르소 거리)의 콜로니아 광장에 서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8세기 무렵에는 라테라노 대성당 앞으로 옮겨져 있었지만, 미켈란젤로가 캄피돌리오 광장을 만들 때 다시 이전했다.


 과거 로마에서는 구리로 황제 기마상을 많이 만들었지만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은 거의 없다.  제정 시대 후기에 각종 기마상을 녹여 동전을 만드는 데 활용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살아남은 기마상은 중세 시대에 이교도의 상징이라는 이유로 교회에 의해 대부분 파괴됐다. 지금 완벽한 모양으로 남아 있는 것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기마상뿐이다.


 교회가 이 기마상을 콘스탄티누스로 오해해 부수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정말 유명하다. 이 기마상이 라테라노 대성당 앞에 세워진 것도 콘스탄티누스로 오해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라테라노 대성당은 콘스탄티누스가 로마에 세운 최초의 성당이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오른손을 높이 쳐들고 있다. 이를 라틴어로 ‘아들로쿠티오’라고 한다. 로마 황제나 장군은 전쟁에 나가기 전이나 전쟁에서 이긴 뒤에 군사들에게 연설할 때 항상 손을 이렇게 들었다. 병사들도 황제나 장군에게 인사할 때 오른손을 들고 “임페라토르”라고 외쳤다.


 20세기 초 이탈리아 파시즘을 이끈 무솔리니는 고대 로마 제국의 영광을 재연하겠다며 각종 사업을 진행했다. 그러면서 로마의 경례도 도입했다. 독일의 나치가 이를 벤치마킹해 ‘하일 히틀러’로 유명한 독일식 경례를 만들어냈다.



  유피테르는 1천229년에 이르는 로마 역사를 통틀어 로마인의 정치, 사회, 정신, 문화 등 모든 분야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한 신이었다. 로마를 보호했고, 로마 사회에 질서를 부여했고, 로마가 제국으로 성장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일등공신이었다.


  지금 유피테르의 이름은 태양계의 행성에만 겨우 남아 있다. 영어로는 쥬피터, 우리나라 이름으로는 목성이다. 한때 세계를 지배했던 로마를 좌지우지한 주신이 현대에 들어 태양계의 중심도 아니고, 변방에 자리 잡은 행성 중 하나로 전락한 셈이다. 설상가상으로 신화의 세계에서는 그리스신화의 제우스에 밀려 인기를 잃어버렸다.


  유피테르의 몰락을 생각하면서 캄피돌리오 광장을 둘러본다. 로마 역사를 담고 있는 유적지 가운데 가장 깔끔하게 잘 단장돼 있는 곳이다.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만큼 전체적으로 매우 아름답고 균형감을 갖춘 광장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고대 로마의 향기를 맡거나 유피테르의 목소리를 듣기는 쉽지 않다. 콘세르바토리 궁전 지하로 내려가면 볼 수 있는 고대 신전의 잔해와 계단 주변에 흩어진 고대 성벽 흔적이 고작이다. 대다수 관광객은 박물관에 들어가지 않거나, 성벽 흔적에 별 신경을 쓰지 않는다. 아주 날씨 맑은 봄날이나 선선한 가을날 결혼사진을 찍는 신혼부부의 밝은 표정이 언덕과 광장을 가득 채울 뿐이다. 유피테르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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