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로 로마노

천년제국의 인간시장

by leo



콘스탄티우스 2세 황제는 개선식을 거행하기 위해 357년 로마를 방문하기로 했다. 아버지 콘스탄티누스 선황이 콘스탄티노플로 천도할 무렵 판노니아에서 태어났던 그는 로마에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었다. 여러 사람에게서 로마 이야기를 자주 들었지만 콘스탄티노플에 비할 바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콘스탄티우스는 화려하고 값비싼 보석과 희귀한 돌로 치장한 황금 마차를 타고 로마로 들어갔다. 키와 덩치가 작은 편이었던 그는 고개를 빳빳이 들고는 절대 옆으로 돌리지 않았다. 연도에 늘어서 환호하는 수많은 로마인에게 손도 흔들지 않았다.


콘스탄티우스는 과거 많은 장군, 황제가 개선식을 거행할 때처럼 마르스 평원과 키르쿠스 막시무스, 팔라티노 언덕을 거쳐 행진했다. 번쩍이는 문양으로 장식한 방패를 들고 은으로 만든 장식용 창을 거머쥔 게르만 병사들이 황제의 뒤를 따라 걸었다.


콜로세움 앞의 분수인 메타 수단스에서 방향을 바꿔 포로 로마노로 들어가는 순간 그는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누군가 큰 망치로 뒤통수를 세게 내리친 것 같은 충격도 느꼈다. 말로만 듣던 것보다 훨씬 웅장하고 아름답고 널찍한 포로 로마노의 위용이 그를 압도했던 것이다.


콘스탄티우스는 연단인 로스트라에 올라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성스럽고 거대한 많은 건축물이 바늘 하나 꽂을 틈 없이 포로 로마노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는 황제의 연설을 듣기 위해 많은 로마인이 모였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듯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며 속으로 이렇게 되뇌었다.


‘로마에 비하면 콘스탄티노플은 시골에 불과하구나.’



포로 로마노는 천년제국 로마의 번영과 영광, 몰락과 패퇴를 상징하는 장소다. 로마라는 작은 도시가 팔라티노 언덕에서 태어나 제국으로 성장하고, 결국은 야만족 용병에게 멸망당하기까지 1천229년 역사를 지켜본 곳이다.


포로 로마노는 왕정 시대부터 공화정, 제정 시대에 이르기까지 신전과 각종 공공건물이 연이어 세워진 로마 건축의 전시장이었다. 많은 로마인이 매일 오고가며 하루를 보내는 활기 넘치는 인간시장이었다.


개선식의 마지막 경로였을 뿐만 아니라 각종 제사가 벌어지는 성소였다. 선거와 연설이 펼쳐지는 정치무대였고, 범죄 재판이 열리는 법원이었고, 각종 상업 행위가 진행되는 시장이었다. 로마인의 일상생활이 이뤄지는 중심지였고, 세계 각국에서 모든 종류의 사람이 모여드는 인종과 민족의 도가니였다.


콘스탄티우스가 방문했을 무렵은 수도가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지는 바람에 로마의 영향력이 거의 없어졌을 때였다. 그랬던 시대에도 황제가 입을 다물지 못했을 정도였으니 로마제국의 전성기에는 포로 로마노의 위용이 어떠했을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런데 지금 포로 로마노는 완전히 폐허로 변해버렸다. 과거의 영광스러운 모습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대부분 건축물은 다 부서졌고, 일부 신전의 기둥만 몇 개 남아 있다. 로마 여행을 처음 가는 사람은 이런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게 된다. 그들의 입에서는 안타까운 탄식이 튀어나온다.


“이게 포로 로마노야?”


어떤 시인은 “폐허에서 오히려 오랜 세월을 반추해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포로 로마노에서 로마의 옛 모습을 추측해보기란 보통 관광객의 처지에서는 불가능하다. 거기에 갈 때마다 인생과 역사의 허무함을 느끼는 것은 필자의 감정만은 아닐 것이다. 포로 로마노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고대인의 공동묘지


포로 로마노는 카피톨리노 언덕과 팔라티노 언덕 사이에 자리 잡은 저지대다. 지금도 그렇지만 먼 옛날에도 넓지 않고 전망은 좋지 않은 곳이었다. BC 1세기~서기 1세기 로마 시인 푸블리우스 오비디우스는 『파스티』에서 포로 로마노의 과거 모습을 이렇게 설명했다.


‘포로 로마노가 있는 곳은 과거 물웅덩이와 습지였다. 테베레 강을 넘은 물은 제방 너머로 흘러 넘쳤다. 키르쿠스 막시무스로 가는 발걸음이 이어지는 벨라브룸에는 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와 갈대만 무성했다.’


포로 로마노가 습지로 변한 것은 테베레 강이 수시로 범람했기 때문이었다. 팔라티노 언덕과 카피톨리노 언덕 사이에서 테베레 강으로 연결되는 계곡처럼 생긴 지역을 벨라브룸이라고 불렀다.


홍수가 나서 테베레 강이 범람하면 벨라브룸을 통해 엄청난 물이 포로 로마노로 흘러들었다. 매년 홍수가 수시로 일어나다 보니 포로 로마노에서는 물이 빠질 날이 없었다. 그래서 이곳은 습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늘 물이 고여 있는 습지였으니 사람이 살기에도 불편했을 것이다. 그래서 고대 로마인보다 앞서 살았던 사람들은 팔라티노 언덕과 그 주변에 거주하면서 저지대 습지였던 포로 로마노를 공동묘지로 사용했다.


1902년 등 여러 차례에 걸쳐 이탈리아 고고학 발굴조사 팀이 포로 로마노 일대를 파헤쳤더니 각종 무덤, 유해가 나왔다. 안토니누스-파우스티나 신전 근처에서는 화장 또는 매장한 흔적이 발견됐다. 포로 로마노를 가로지르는 중심 거리인 사크라 비아 일대에서도 무덤이 대거 발굴됐다. 최고 6~7m 깊이에서 해골 등이 나오기도 했다. 유골이 담긴 항아리는 로마인의 고향으로 알려진 알바롱가 언덕의 공동묘지에서 나온 것과 매우 흡사했다. 포로 로마노의 공동묘지는 BC 12~11세기, 또는 9세기 무렵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됐다.

포로 로마노에서 무덤이 발굴된 것은 1902년만이 아니었다. 2006년 1월에는 3천 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이 발견되기도 했다.


로물루스가 팔라티노 언덕에 나라를 세웠을 때 포로 로마노에 공동묘지가 있었다면 로물루스도 세상을 떠났을 때 이곳에 묻혔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포로 로마노에서 공동묘지가 사라진 것은 로물루스 이후의 일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코로나19가 이탈리아를 덮치기 직전인 2020년 2월 한 발굴조사 팀이 전 세계를 발칵 뒤집히게 만든 결과를 발표했다. 로물루스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신전과 석관을 발견했다는 것이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놀라운 발표에 전 세계 언론의 관심이 몰렸고,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눈길도 포로 로마노로 집중됐다.


“고대 로마의 원로원 의사당인 쿠리아 율리아 계단 아래에 신전이 있었습니다. 그 안을 들여다보니 약 140㎝ 정도 크기의 석관이 놓여 있는 방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제단으로 추정되는 원형 모양 돌 장식이 나타났습니다. 2천600년 전 로마 건국의 시조인 로물루스의 무덤일지도 모릅니다.””


신전과 석관은 로마 건국으로부터 200년 정도 후인 BC 6세기 무렵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는 게 발굴조사 팀의 분석이었다. 하지만 발굴조사를 담당한 ‘콜로세움 고고학 공원’의 알폰시나 루소 국장은 흥분한 표정이었다.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다.


“석관과 제단은 응회암으로 만들어졌습니다. 포로 로마노를 내려다보는 카피톨리노 언덕에 흔한 암석입니다. 신전과 제단이 발견된 곳은 고대로부터 로물루스가 묻혔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곳입니다. 유해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로물루스의 무덤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팔라티노 언덕에 자리를 잡고 살기 시작한 초기 로마인에게도 이전 사람들처럼 포로 로마노는 거주지가 아니었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늘 홍수가 나는 곳에서 사람이 어떻게 살아?”


로마인에게 포로 로마노는 거주지보다는 팔라티노 언덕을 방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곳이었다. 다른 도시의 군대는 로마로 쳐들어가도 습지에 발이 묶여 팔라티노 언덕으로 바로 진군하기 어려웠다. 로마인은 적이 허둥대는 모습을 보면 습지로 내려가 싸움을 벌였다.


로마인에게 많은 여인을 빼앗긴 사비니족이 타티우스 왕을 앞세워 쳐들어 왔을 때 전투를 한 장소도 이곳이었다. 로마와 사비니족은 이른바 ‘사비니 여인의 개입’으로 화해한 뒤 여기에서 평화협정을 맺었다. 사비니족은 로마로 이주해 퀴리날레 언덕에서 살게 됐다.


로마와 사비니족은 카피톨리노 언덕을 성채 겸 유피테르 신을 모시는 성소로 삼기로 했다. 이렇게 하다 보니 오가는 행인이 많아졌다. 그 덕분에 포로 로마노는 각지에서 모인 사람이 물물교환을 하는 시장으로 변하게 됐다.


“방금 잡아온 양고기입니다. 정말 신선하답니다.”


“그리스에서 가져온 도자기입니다. 그림이 정말 아름답지요.”


나중에는 고기를 파는 정육점이나 생필품을 파는 잡화점 같은 노점이 줄을 설 정도로 많이 생겼다. BC 1세기 로마 역사학자 테렌티우스 바로는 『라틴어 원론』에 이런 기록을 남겼다.


‘처음에는 한낮에 햇빛을 가릴 수 있는 쪽에 노점이 들어서더니 나중에는 반대쪽에도 노점이 생겼다.’


축제나 장례식 때에는 각종 행사도 열렸다. 포로 로마노에서 행사가 진행될 때면 귀족은 나무 연단에 앉거나 노점 지붕에 올라가 구경했다. 반면 평민은 시장 바닥에 서서 보는 데 만족해야 했다.


시간이 지나자 포로 로마노의 풍경은 더 달라졌다. 성공을 꿈꾸는 정치인은 포로 로마노에 사람을 모아 연설을 했다. 다양한 종류의 범죄자를 단죄하는 재판도 열렸다. 시장 이외의 기능이 더 강해진 것이었다.


로물루스는 습지를 흙으로 메워 공공장소로 활용하면서 포로 로마노라는 이름을 붙였다. 정확한 라틴어 이름은 포룸 로마눔이었다. 포룸의 뜻을 두고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온다. 먼저 ‘바깥 장소’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포로 로마노는 ‘로마의 바깥’이라는 말이 된다. 처음에는 천대받던 외곽이 나중에는 로마의 중심이 됐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반면 포룸은 ‘시장’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19세기 말~20세기 초 독일의 건축사학자였던 크리스티안 휠젠이 그 중 한 명이다. 그는 『포로 로마노-역사와 기념비』라는 책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로마에는 포룸 보아리움(가축 시장), 포룸 홀리토리움(채소 시장), 포룸 쿠페디니스(식료품 시장) 등 여러 포룸이 있었다.’




습지에서 물을 빼내다



로마인은 팔라티노 언덕에 모여 살면서 카피톨리노 언덕을 방어용 성채 및 종교적 성소로 활용했다. 그런데 인구가 늘어나면서 신전 등 새로운 공공건물을 더 지을 땅이 필요했다. 그들은 두 언덕 사이에 위치한 포로 로마노에 주목했다. 이곳은 습지이기는 하지만 일곱 언덕 모두와 연결된다는 점에서 위치가 매우 좋았다.


‘일곱 언덕을 유기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포로 로마노를 그냥 시장 터로만 내버려둘는 수 없어.’


포로 로마노 개발에 가장 먼저 눈을 돌린 사람은 에트루리아 출신이었던 제5대 왕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였다. 그는 습지를 마른 땅으로 만들기 위해 토목과 건축 기술이 뛰어났던 에트루리아에서 여러 기술자를 데려와 매립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옛날부터 있었던 공동묘지는 에스퀼리노 언덕 밖으로 밀어냈다. 이어 습지를 매립하면서 고여 있던 물을 테베레강으로 빼내기 위해 배수관 설치 공사를 진행했다. 배수관 깊이는 4m, 폭은 3m 정도였다. 배수관 위는 돌로 덮었다. 그래야 사람들이 걸어 다닐 수 있고, 건물을 지을 부지로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전쟁이 일어나면 문을 열고 전쟁이 끝나면 문을 닫는 야누스 신전이 서 있던 아르길레툼 거리에서 배수관은 시작됐다. 나중에 서민 거주지가 되는 비미날레 언덕의 수부라와 포로 로마노 사이에 있던 지역이었다.


배수관은 비미날레 언덕의 하수는 물론 에스퀼리노 언덕과 퀴리날레 언덕의 하수를 모아 포로 로마노를 거쳐 테베레 강으로 배출했다. 로마인은 이 배수 시설을 클로아카 막시마라고 불렀다. 대 배수관이라는 뜻이었다.


사람이 들어가기도 힘든 습지였던 포로 로마노는 배수시설 공사를 마친 후 로마인의 삶의 중심으로 들어가게 됐다.




건축물에 로마를 담다



포로 로마노를 돌이 깔린 평지로 만든 로마인은 건축물을 하나둘씩 세우기 시작했다. 단순히 시장으로만 사용할 것 같았으면 배수관을 깔고 돌로 그 위를 덮을 이유가 없었다. 시대에 따라 로마인이 만든 건축물의 유형과 성격은 달랐다. 각 건축물을 보면 로마가 발전하고 변화한 역사를 알 수 있다. 지금 포로 로마노에 흔적이라도 남아 있는 건축물의 이름을 나열해보면 이렇다.


타블라리움, 사투르누스 신전, 베스파시아누스 신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 티투스 개선문, 쿠리아 율리아, 로스트라, 바실리카 아이밀리아, 바실리카 율리아, 카이사르 신전, 레기아, 카스토르-폴룩스 신전, 베스타 신전, 로물루스 신전, 로마-베누스 신전, 안토니누스-파우스티나 신전.


로마 전성기에는 이보다 훨씬 많은 건축물이 존재했다. 제정 시대에는 바늘 하나 꽂을 틈조차 없을 정도로 건축물이 빽빽했다. 로마가 멸망하고 세월이 흐르면서 대부분 건물은 부서지거나 무너지고 그나마 일부가 흔적이나마 남은 게 오늘날의 포로 로마노다.


사투르누스 신전


로마인은 포로 로마노를 개발한 뒤 처음에는 신전을 여럿 지었다. 포로 로마노에 신전이 세워진 순서, 연도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은 로마의 공식 연표이자 종교 서적인 『제사장 연대기』에 기록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로마에서 해마다 벌어진 사건과 집정관 등 역대 행정관의 명단을 기록하고 있다.


『제사장 연대기』에 따르면 포로 로마노에 가장 먼저 건설된 건물은 BC 497년 카피톨리노 언덕 기슭에 만들어진 사투르누스 신전이었다. 로마인이 새로 마련한 땅에 왜 사투르누스 신전을 가장 먼저 지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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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은 사투르누스를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크로노스라고 믿었다. 그는 자식에게 쫓겨난다는 예언을 듣고는 태어나는 자식을 모두 잡아먹어버렸다. 하지만 아무리 신들의 세계를 다스리는 최고의 신이라도 운명은 피할 수 없었다. 그는 결국 형제들과 힘을 합친 막내아들 제우스 때문에 그리스에서 쫓겨났다.


로마로 달아난 크로노스는 사투르누스로 변신한 뒤 야누스 신의 딸과 결혼했다. 그는 농업기술을 이탈리아에 보급해 농업의 신으로 추앙받았다. 당시 농업은 재산을 일구는 산업이었기 때문에 사투르누스는 부의 신으로도 존경받았다. 이탈리아는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에 로마인은 그가 다스렸던 시대를 ‘황금시대’라고 불렀다. 그래서인지 사투르누스 신전은 공화정 때부터 고대 로마의 금, 은 등 국고를 보관하는 금고 역할을 했다.


사투르누스는 로마 건국 이전 한 부족의 족장이었는데 죽어서 신이 됐다는 주장도 있다. 테렌티우스 바로가 『라틴어 원론』에 이런 기록을 남겼다.


‘원래 사투르누스는 카피톨리노 언덕에 있던 사투르니아 마을의 원주민을 다스리던 족장이었다. 그래서 카피톨리노 언덕은 로마 이전에는 몬스 사투르니우스(사투르누스의 산)로 불렸다.


사투르누스 신전 봉헌식은 12월 17일에 열렸다. 로마인은 사투르누스의 황금시대를 기리기 위해 신전 봉헌식 날짜를 전후한 매년 12월 17~23일에 사투르날리아 축제를 열었다. 날짜를 잘 살펴보면 흥미로운 점이 있다. 크리스마스와 비슷하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이 축제는 오늘날 크리스마스에 많은 영향을 미친 흥미로운 축제다. 1907년 미국에서 발간된 『가톨릭 백과사전』은 이렇게 적었다.


‘사투르날리아 같은 이교도의 겨울 축제가 크리스마스 날짜 선택에 큰 영향을 미쳤다.


처음에는 축제기간이 하루였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1주일로 늘었다. 다른 로마 축제는 대개 신전이라는 한정된 장소에서 열린 반면 사투르날리아는 포로 로마노 등 로마의 모든 장소에서 대대적으로 펼쳐졌다. 축제 기간 동안에는 상업 활동을 하지 않았고 학교와 법정도 문을 닫았다.


로마인은 평소에는 색깔 있는 토가를 하층민이 입는 옷이라고 천대하며 착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투르날리아 축제 중에는 전통 토가를 벗고 화려한 토가를 애용했다. 로마인은 평소에는 모자를 잘 쓰지 않았지만 축제 때에는 필레우스라는 창 없는 모자를 즐겨 쓰고 다녔다. 일상에서는 모자를 아예 쓸 수 없었던 노예도 이때만큼은 필레우스를 쓰고 다녔다. 이렇게 되면 누가 노예이고 주인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노예와 주인의 신분이 일시적으로 바뀌는 시간도 있었다. 이때에는 노예가 먼저 밥을 먹고, 주인은 노예에게 밥을 대접했다. 때로는 노예와 주인이 같은 상에서 함께 밥을 먹었다.’


1세기 로마 시인인 퀸투스 호라티우스 플라쿠스는 이를 ‘12월의 자유’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노예에게 이색적인 자유를 주는 내용은 세월이 흐르면서 없어졌다.


사투르날리아 중에는 가면을 썼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기록도 있다. 핼러윈 데이 때 어린이가 가면을 쓰고 각 가정마다 돌아다니며 사탕이나 과자를 얻는 트릭 or 트릿과 비슷한 놀이도 있었다. 평소에는 금지됐던 도박이나 주사위 놀이도 이때만큼은 허용됐다. 특히 노예들이 두 놀이를 즐겼다. 내기에 주로 걸었던 것은 동전이나 견과류 등이었다. 평소 과식이나 폭음을 삼갔던 로마인은 이때만큼은 이를 너그럽게 허용했다.


선물을 주고받으면서 서로를 축복하기도 했다. 선물을 주고받는 날은 12월 23일이었다. 선물의 값어치가 사회적 신분을 나타냈기 때문에 때로는 값비싼 항아리, 밀랍인형 등을 교환하기도 했다. 자료에 나오는 내용을 바탕으로 당시 주고받은 선물 목록을 살펴보면 주사위, 뼈로 만든 공기놀이 돌, 빗, 이쑤시개, 모자, 사냥용 칼, 도끼, 불을 밝히는 등, 둥근 공, 향수, 소시지, 컵, 숟가락, 앵무새, 옷가지, 마스크, 책이 있었다.


때로는 노예나 외국 동물을 선물로 주기도 했다. 정말 친한 친구끼리는 짓궂은 장난삼아 저질 선물을 보내는 경우도 있었다. 선물과 함께 시를 적어 보내기도 했다. 오늘날 성탄절 선물카드와 비슷한 것이었다. 사투르날리아가 크리스마스에 미친 가장 큰 풍습은 선물이었다. 중세 시대에는 선물 주고받기가 이교도의 관습이라는 이유로 교회로부터 금지당했다.


카스토르‧폴룩스 신전


“10년 쫓겨난 타르퀴니우스가 쳐들어온다. 라틴 동맹의 연합군을 이끌고 몰려온다.”


제7대 왕이었다가 로마인의 반란으로 쫓겨난 타크퀴니우스 수페르부스가 BC 499년 왕 자리를 되찾으려고 라틴 여러 도시의 군대로 이뤄진 연합군의 지원을 받아 로마로 쳐들어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미 곳곳에서 수집한 정보를 통해 전쟁 준비를 해 왔던 로마는 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를 독재관으로, 티투스 베르기니우스를 사마관(기병대장)으로 임명해 전쟁에 나서라고 했다.


전쟁에 나서는 로마군을 보는 로마인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라틴 연합군의 병력이 로마군의 세 배 이상이라는 정보 때문이었다. 게다가 라틴 연합군의 사령관은 전략의 대가로 알려진 타르퀴니우스의 사위 옥타비우스 마밀리우스였다. 로마가 패한다면 타르퀴니우스가 엄청난 보복을 할 것이 뻔했기 때문에 원로원 의원들은 물론 로마인들은 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할 지경이었다.


포스투미우스와 라틴 연합군은 로마 동남쪽 레길루스 호수 근처에서 만났다. 서로 마주보며 하룻밤을 보낸 두 군대는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전투에 돌입했다. 발레리우스가 일찌감치 전사한데다 병력에서 타르퀴니우스 군대에 열세를 보여 로마 병사들은 일방적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포스투미우스는 두 손을 높이 들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신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승리를 내려주시면 카스토르-폴룩스 신전을 지어 디오스쿠리 형제에게 봉헌하겠습니다.”


이때 아주 잘 생기고 덩치도 웅장한 두 기병 병사가 갑자기 포스투미우스 앞에 나타났다. 그들은 로마군 기병대 앞으로 나가더니 창을 높이 치켜들고 라틴 연합군 보병을 향해 달려갔다. 그 둘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시 전투 현장에서 그들을 목격했다는 한 로마 시인은 두 젊은이가 싸우는 모습을 이렇게 표현했다.


‘빠르구나, 정말 빠르구나

위대한 쌍둥이 형제여

칼은 무희처럼 춤을 추고

말은 바람처럼 날렵하구나.’


두 병사의 용감한 공격을 보고 사기가 오른 로마군은 그 뒤를 따라 적군 속으로 뛰어들어 전력을 다해 싸웠다. 로마군의 칼은 불과 1시간 전에 비해 훨씬 날카로워져 있었다. 기가 꺾인 라틴 연합군 병사들은 무기를 버리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결국 전쟁은 로마군의 대승으로 막을 내렸다. 라틴 연합군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보병 4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고국으로 겨우 돌아간 사람은 1만 명에도 미치지 못했다. 죽어 널브러진 말도 3천 마리를 넘었다.


전투가 로마군의 승리로 끝났을 무렵 이번에는 포로 로마노에 두 기병 병사가 나타났다. 방금 유혈이 낭자한 전투를 마치고 돌아온 게 분명한 모습이었다. 두 병사는 땀을 많이 흘리고 있었다. 그들은 포로 로마노의 베스타 신전 근처에 있는 유투르나 분수에 가서 말에게 물을 먹이고 몸을 씻겨 주었다. 많은 로마인이 그들에게 가서 물어보았다.


“방금 전쟁터에서 돌아오신 것이오?”


“예, 그렇습니다.”


“전쟁의 결과는 어떻게 됐지요?‘


“로마군이 대승을 거뒀습니다.”


두 병사에게서 반가운 소식을 들은 로마인들은 두 손을 번쩍 치켜들고 환호했다. 그들은 서로 얼싸안고 즐거워하기도 했다. 어떤 사람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두 병사는 흐뭇한 표정으로 사람들을 쳐다보더니 어느 사이엔가 사라져버렸다. 이후 두 병사를 다시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음날 독재관 포스투미우스가 보낸 전령이 전쟁 소식을 담은 편지를 원로원에 들고 갔다.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우리가 이겼습니다.’


로마인들은 포로 로마노에 나타나 승리의 소식을 전해준 두 청년이 누구인지 궁금해졌다. 한참이나 갑론을박하던 로마인 중에서 누군가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


“두 병사는 카스토르와 폴룩스 신이십니다. 위기에 빠진 로마를 구하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오신 것입니다.”


포스투미우스는 신전을 지어 바치겠다는 맹세를 지키지 못하고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들이 아버지의 약속을 이어받아 신전을 완성했다. 로마인이 카스토르-폴룩스 신전을 완공한 것은 사투르누스 신전을 봉헌한 지 13년 뒤였다.

이후 로마인은 나라를 멸망의 위기에서 구해준 두 청년을 기념하면서 매년 7월 15일에 디오스쿠리 축제를 열었다. 축제 중에는 디오스쿠리로 분장한 기병 1천800명이 마르스 평원에 있는 마르스 신전에서 출발해 시내 곳곳과 포로 로마노를 거친 뒤 카스토르-폴룩스 신전까지 퍼레이드를 벌이기도 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카스토르와 폴룩스는 아버지가 다른 쌍둥이 형제였다. 둘의 어머니는 레다였다. 카스토르의 아버지는 스파르타의 왕 틴다레우스, 폴룩스의 아버지는 신들의 왕 제우스였다. 레다가 카스토르를 임신했을 때 제우스가 백조로 변장해서 그녀를 범해 폴룩스도 임신하게 만든 것이었다.


카스토르는 인간의 아들이고 폴룩스는 신의 아들이었다. 카스토르는 죽을 운명이었던 반면 폴룩스는 불사의 신이었다. 둘은 그리스어로 '제우스의 아들'이라는 뜻인 디오스쿠리로 불렸다. 쌍둥이라는 뜻인 제미니로 불리기도 했다.


카스토르는 사이가 나빴던 린케우스 형제와 싸우다 방망이에 맞아 죽고 말았다. 쌍둥이 형제를 잃고 슬퍼하던 폴룩스는 아버지 제우스에게 간청했다.


“제가 갖고 있는 불사의 능력 절반을 카스토르에게 나눠 주십시오.”


제우스는 아들의 호소를 받아들였다. 이후 두 형제는 반신반인이 됐다. 그래서 1년 가운데 절반은 죽은 사람이 가는 하데스의 지하세계에서, 나머지 절반은 신이 사는 올림푸스 산에서 살게 됐다.


그리스 신이었던 카스토르, 폴룩스 형제는 BC 5세기 무렵부터 로마에서도 숭앙받게 됐다. 이탈리아 남부지역에 식민도시를 하나둘 건설하기 시작한 그리스 사람에 의해 신화가 서서히 퍼진 덕분이었다. 두 형제는 백마를 타고 다니는 신으로 묘사됐다. 기병대가 승리에 기여한 레길루스 호수 전투를 기념하면서 신전을 바치기에 가장 적합한 신이었다.


그런데 카스토르, 폴룩스 형제의 신화는 두말할 것도 없고, 로마가 승리를 거뒀다는 레길루스 호수 전투조차 정말 있었던 사건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역사적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단순히 지어낸 전설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카스토르-폴룩스 신전은 포로 로마노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어 원로원 회의장소로 자주 사용됐다. 정치인이 많은 사람을 모아놓고 연설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특이한 것은 로마인이 이 신전 안에 무게, 길이 등을 재는 각종 도량형 측정 장비를 가져다 놓고 분쟁이 발생할 경우 사용했다는 점이다. 왜 여기에서 그랬는지 이유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포로 로마노에는 기둥만 남아 있는 건물이 대부분이다. 카스토르-폴룩스 신전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기둥 3개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BC 16년 대화재로 소실된 뒤 티베리우스 황제가 재건한 건물의 일부분이다.


신전은 거의 사라졌지만 뜻밖에 두 형제의 석상은 아직 건재하다. 카피톨리노 언덕의 캄피돌리오 광장 계단 앞에 말을 붙들고 서 있는 두 나체 청년의 석상이 바로 그들이다. 물론 두 석상은 고대 로마에 만든 것은 아니다.


베스타 신전


“가족을 사랑하고 가정을 소중히 여기는 사내라면 내 딸을 시집 보내더라도 안심할 수 있어.”


로마의 제2대 왕 누마 폼필리우스는 로물루스가 로마를 세우던 날 기율이 엄격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에서는 전혀 사치를 할 수 없었고 부모형제간의 우애를 매우 중시했다. 로마에 정착한 사비니족의 왕인 티투스 타티우스가 이를 높이 보고 그에게 딸 타티아를 시집보냈다.


부부는 타티우스의 기대대로 금술 좋게 살았다. 누마는 아내를 극진히 사랑하면서 가정의 소중함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런데 결혼 13년 만에 건강이 나빠진 타티아가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슬픔에 잠긴 누마는 로마를 떠나 시골로 내려가 살았다.


누마는 나중에 왕이 된 뒤 아내 타티아를 생각하면서 가정의 신에게 바치는 신전을 지었다. 그것이 신성한 불로 상징되는 가정의 신을 모시는 베스타 신전이었다.


로마에서 최고의 신은 유피테르였지만, 로마인이 생활에서 가장 가깝게, 가장 중요하게 여긴 신은 화로와 가정의 여신인 베스타였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가정의 여신 헤스티아가 로마에서 베스타로 바뀌었다고 하는 게 대체적인 견해다. 이탈리아에서는 로마의 고향 도시인 알바롱가에서 가장 먼저 베스타를 모신 것으로 알려졌다.


베스타 신전은 불과 생명의 원천인 태양이 떠오르는 동쪽을 향하고 있었다. 이는 우주의 중심에 만물의 근본인 불이 자리 잡고 있음을 상징한다. 신전은 둥글게 생겼다. 로마인은 우주가 둥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로마인은 ‘베스타의 성스러운 불이 도시의 행운과 밀접한 연관관계가 있으며, 불이 꺼지면 저주가 온다’고 믿었다. 그래서 불이 꺼질 경우 서둘러 태양 광선을 모아 신성한 불을 새롭게 만들었다. 대개 직각이등변 삼각형의 거울로 모이는 빛을 한 점에 모아 불을 피웠다. 로마인은 이렇게 만든 불이 영원한 힘을 지녔다고 믿었다.


베스타 신전의 흔적은 포로 로마노와 팔라티노 언덕이 만나는 쪽에 남아 있다. 기둥이 여러 개 서 있고 그 위로 지붕 같은 흔적이 보인다. 그 뒤로는 베스탈이 살던 집터가 있다. 하지만 신성한 불을 담은 화로는 남아 있지 않다.


베스타 신전에서 화로에 담긴 신성한 불을 지키는 여성 사제를 베스탈이라고 불렀다. 베스탈 제도를 처음 만든 왕도 누마였다. 베스탈은 처음에는 4명이었지만, 나중에는 8명이 됐다가 마지막에는 18명으로 늘어났다. 18명 가운데 6명만 정식 베스탈이었고, 나머지는 보조 베스탈이었다. 모든 베스탈은 팔라티노 언덕에 있는 아트리움 베스타라는 집에서 함께 살았다.


베스탈에 결원이 생겼을 경우 왕정 시대에는 대제사장이기도 했던 왕이 새로 선발했다. 공화정 시대에는 집정관과 대제사장이 분리됐다. 베스타 선발권은 대제사장이 가졌다. 제정 시대에는 황제가 폰티펙스 막시무스를 겸했으니 결국 황제가 선발한 셈이다.


베스탈에 결원이 생기면 대제사장 폰티펙스 막시무스는 렉스 파피아를 임명해 선발 작업을 맡겼다. 렉스 파피아는 곳곳에서 추천받은 후보 중에서 20명을 고른 다음 최종 합격자를 골랐다. 선발 방법은 추첨이었다. 언니가 현직 베스탈이거나 아버지가 고위 사제인 소녀가 후보로 올라오면 우선적으로 선발될 기회를 주었다.


베스탈의 자격은 엄격했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문제가 없는 6~10세 여자아이여야 했다. 남자 경험이 전혀 없어야 함은 물론이었다. 육체적 순결을 강조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베스탈의 순결은 로마라는 국가의 건강성을 뜻한다고 생각했고, 정결한 몸을 가진 여인이라야 영원한 불을 지킬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부모의 자격도 중요했다. 2세기 로마 문법학자 아울루스 겔리우스의 『아티카의 밤』에 따르면 베스탈의 부모는 모두 이탈리아에 살고 있는 로마 자유시민이어야 하고, 불명예스러운 직업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어야 했다.


1세기 로마 작가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의 『비망록』에 따르면 베스탈의 임기는 30년이었다. 소녀는 처음 베스탈로 임명될 때 30년 동안 남자를 멀리 한다는 선서를 했다. 첫 10년 동안은 일을 배우고, 다음 10년 동안은 임무를 수행하고, 나머지 10년 동안은 다른 소녀에게 일을 가르쳤다.


30년 임기를 마치면 베스타 신전을 떠나 사회로 돌아가 개인 생활을 할 수 있었고, 결혼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30년 동안 신전에 갇혀 여자끼리만 살다가 뒤늦게 사회생활에 적응해 결혼하기란 쉽지 않았다. 대부분 베스탈은 은퇴 뒤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았다.


이렇게 인생을 희생하는 어려운 일이다 보니 베스탈에게는 여러 가지 특권이 주어졌다. 먼저 국가로부터 급여를 받았고, 불을 지키는 일 외에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다. 또 유서를 작성할 자격을 부여받았고, 후견인이나 보호자 없이 자신의 일을 자유롭게 처리할 수 있었다. 가부장인 아버지의 권한이 자식을 죽이거나 로마 밖에서라면 노예로 팔아도 될 만큼 절대적이었던 로마에서 딸이 유서를 쓸 수 있다는 것은 가부장권에 구애받지 않는 엄청난 특권이었다.


외출할 때에는 시종들이 앞에서 호위해 주었다. 길을 가는 베스탈의 가마를 미는 사람은 사형에 처해질 수도 있었다. 로마에서는 시내에 사람을 묻을 수 없었지만 베스탈은 예외였다. 역사학자들은 베스탈이 죽으면 묻는 공동묘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베스탈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에는 폰티펙스 막시무스가 벌을 주었다. 그는 베스탈 신전과 숙소 주변에 많은 스파이를 심어놓는 것은 물론 신전의 시녀들에게 베스탈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 매일 보고하게 했다. 그래서 어떤 베스탈이 무슨 일을 했는지,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를 금세 알 수 있었다.


베스탈이 실수로 성화를 꺼뜨리는 등 가벼운 죄를

저지르면 옷을 벗기고 장막을 늘어뜨린 어두운 방에서 매질을 했다. 남자를 만난 게 들통 날 경우 더 큰 벌을 받았다. 로마 바깥에 있는 지하 방에 영원히 가둬 굶어죽게 만드는 형벌이었다. 이런 사례는 10번 정도로 그다지 많지 않았다.


바로 사형을 시키지 않은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로마에서는 도시 안에 사람을 묻을 수 없었고, 결혼하지 않은 소녀를 사형시킬 수 없는 법이 있었다. 베스탈을 죽이거나 생매장하면 법을 어기는 게 된다. 폰티펙스 막시무스도 법을 어길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약간의 음식을 갖춘 지하 방에 가둬두면 생매장이나 사형이 아니라는 게 로마인의 논리였다. 세르비우스 성벽의 포르타 콜리나(콜리나 문) 근처에 베스탈을 가두는 지하 방이 있었다. 이곳을 아게르라고 불렀다.


세월이 흐르면서 베스탈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리로까지 발전했다. BC 1세기 독재관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젊은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죽이려하자 카이사르를 아끼던 베스탈이 중재에 나서 목숨을 구하기도 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베스탈을 주요 행사 등에 참여시키기도 했다. 베스탈은 임의로 노예를 해방시킬 수도 있었다. 베스탈이 노예를 만지면서 해방이라고 외치면 그대로 자유인이 됐다.


베스탈을 위한 축제도 열렸다. 매년 6월 7~15일에 펼쳐진 베스탈리아였다. 첫날에는 음식을 담은 접시를 들고 오는 각 집안의 어머니에게 베스타 신전이 개방됐다. 간단한 축제 기념식이 진행되기도 했다. 축제 기간 중에 베스탈은 몰라 살사라고 하는 소금 섞인 밀가루 반죽을 만들기도 했다. 베스탈이 어떤 형태로든 음식 비슷한 것을 만드는 경우는 이때가 유일했다.



베스탈이 없어진 것은 기독교 때문이었다. 로마가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긴 이후인 383년 그라티아누스 황제가 발단이었다. 그는 이렇게 발표했다.


“베스타 신전 유지에 드는 비용을 국고에서 지원하지 않겠다.”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11년 뒤인 394년 베스타 신전의 성화를 끄고 베스탈 제도를 없애버렸다. 그때 신전을 끝까지 지킨 마지막 베스탈이 있었다고 한다. 누구였는지는 모른다. 다만 그녀가 남긴 마지막 전설만 남아 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이교도의 마지막 저항을 물리치고 로마에 쳐들어갔다. 그는 모든 이교도 신전을 폐쇄했다. 베스타 신전도 같은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테오도시우스의 사촌여동생 세레나는 베스타 신전의 성스러운 불을 끄는 일을 맡았다. 그녀는 신전에 있던 베스타 여신상의 목에 걸린 아름다운 목걸이를 보고 반해버렸다. 그녀는 몰래 손을 뻗어 목걸이를 떼어냈다.


그때 어디선가 한 여인이 나타났다. 로마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던 마지막 베스탈이었다. 그녀는 세레나를 꾸짖으면서 저주를 퍼부었다.


“당신은 베스타 여신의 저주를 받아 비참한 최후를 마치게 될 거요.”


세레나는 속으로는 놀랐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베스타 신전을 서둘러 빠져나갔다.


몇 년 뒤 알라리크가 이끄는 서고트족이 로마를 포위했다. 로마인은 성 안에 있는 누군가가 알라리크와 밀통하고 있다고 의심했다. 모두의 눈이 쏠린 사람은 세레나였다. 그녀는 결국 목숨을 잃고 말았다. 세레나가 베스타 신전에서 목걸이를 훔친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베스탈의 저주 때문이었다고 생각했다.


로마는 476년 게르만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해 멸망했다. 로마인들은 이렇게 울부짖었다.


“베스타의 불이 꺼졌기 때문에 마지막 베스탈의 저주를 받아 로마가 멸망한 것이야”’


쿠리아 율리아


원래 쿠리아는 로마인을 살던 무리에 따라 나눈 '동'을 뜻했다. 로마뿐만 아니라 당시 인근에 있던 라틴족은 모두 쿠리아 제도를 갖고 있었다. 19세기 독일 역사학자 테오도르 몸젠은 『로마사』에서 ‘로마는 람네스족, 티티에스족, 루케레스족을 각각 10개 구로 나누었다. 3개 부족이니 결국 30개 구였다’라고 설명했다.


로마가 국가적으로 신봉하는 신과 별개로 각 쿠리아는 자체적으로 신봉하는 신과 제사의식, 제사장소를 갖고 있었다. 쿠리아가 제사를 진행하는 장소도 쿠리아라고 불렀다. 제사가 열릴 때에는 사람이 많이 모였다. 그때는 제사만 지내는 게 아니라 이런저런 현안을 의논하기도 했다. 그래서 나중에는 사람이 모여 토론을 하는 장소도 쿠리아라고 부르게 됐다.


세월이 흘러 동이라는 뜻의 쿠리아는 사라졌다. 원로원이 모여 회의를 하는 장소라면 어디든지 쿠리아라고 불렀다. 원로원은 현대 국회처럼 특정 건물에서만 회의를 연 게 아니었다. 상황에 따라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회의를 열었다. 모든 원로원 회의 장소가 다 쿠리아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몇몇 건물에서 원로원 회의가 자주 열렸다. 내부 시설이나 규모를 고려하면 아무 데서나 회의를 열 수 없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포로 로마노에 쿠리아라는 이름이 붙은 건물을 처음 만든 사람은 제3대 왕이었던 툴루스 호스틸리우스였다. 그는 로마와 사비니족이 전쟁을 끝내고 평화협정을 체결한 장소인 포로 로마노의 코미티움에 쿠리아 호스틸리아를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BC 1세기 무렵 공화제 옹호론자였던 독재관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권력을 장악한 뒤 의원 수를 늘려 원로원의 위상을 높이기로 했다. 그는 의원 수를 300명에서 600명으로 증가시켰다.


인원이 늘어난 것에 맞춰 회의장인 쿠리아도 확장해야 했다. 하지만 폭동으로 쿠리아 호스틸리아가 불에 타는 바람에 건물을 새로 짓다시피 했다. 이렇게 해서 재건축한 건물에 쿠리아 코르넬리아라는 이름을 붙였다. 술라의 성인 코르넬리우스에서 이름을 딴 것이었다.


BC 44년 권력을 장악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쿠리아 코르넬리아를 신전으로 바꿔버렸다. 이름은 펠레시타스 신전이었다. 그가 왜 그랬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그가 술라를 매우 싫어했고 사이가 나빴던 것만은 역사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


카이사르는 없애버린 쿠리아 코르넬리아 대신 쿠리아 율리아를 새로 만들기로 했다. 그동안 원로원 회의는 다른 곳에서 열었다. 로마 외곽인 마르스 평원에 있는 폼페이우스 대극장이 원로원 회의장으로 많이 이용됐다. 이곳은 카이사르와의 내전에서 패해 목숨을 잃은 폼페이우스가 만든 곳이었다.


카이사르는 파르티아 원정을 떠나기 앞서 폼페이우스 대극장에서 열린 원로원 회의에 참석하러 갔다가 브루투스 일파에게 암살당했다. 그가 암살당하는 바람에 쿠리아 율리아 공사는 중단됐다. 나중에 후계자인 아우구스투스가 내전을 끝낸 뒤 공사를 재개해 BC 29년에야 겨우 완공할 수 있었다. 율리아라는 이름은 카이사르의 성인 율리우스에서 따온 것이었다. 역사학자들은 쿠리아 율리아의 건설이 갖는 의미를 이렇게 평가한다.


"아우구스투스가 쿠리아 율리아를 완공했다는 것은 로마 공화정 시대의 종말과 제정 시대의 개막을 상징하는 일이었다."


쿠리아 율리아는 포로 로마노에서 카피톨리노 언덕으로 올라가는 계단 바로 앞에 아직도 서 있다. 삼각형 지붕을 가진 직사각형 건물이다. 쿠리아 율리아에는 원래 청동 문이 달려 있었지만 1660년 교황 알렉산데르 7세가 성 베드로 대성당에 설치한다면서 뜯어버렸다. 지금 있는 쿠리아 율리아의 문은 그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다.


쿠리아 율리아에는 회랑이 있었고, 그곳에는 미네르바 석상이 서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또 날개 달린 빅토리아(니케) 석상을 쿠리아 율리아 정면 위에 세웠다. 두 여신상은 로마가 멸망할 때까지 원로원의 지혜와 제국의 막강한 힘을 나타내는 상징물로 숭배를 받았다.


쿠리아 율리아는 세월이 흐르면서 화재, 지진 등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부서졌다가 재건되기를 반복했다. 지금의 건물은 284~305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새로 지은 것이다. 7세기 무렵 쿠리아 율리아는 교회로 바뀌었다. 그 덕분에 르네상스 시대 파괴의 파도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었다. 1930년대에는 교회의 역할을 포기하고 다시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바실리카 율리아


바실리카는 로마의 전성기를 보여주는 새로운 건축양식이었다. 지중해 최고의 제국으로 성장해 외국에서 많은 수입을 올리게 된 로마의 정치적, 경제적 자신감을 반영하는 건축물이었다.


지금은 바실리카가 교회, 성당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지만, 고대 로마 시대에는 다목적 건물이었다. 조금 더 현대적으로 말하면 주상복합건물이었다. 실용성을 따지는 고대 로마인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건물 양식이었다. 신전으로 쓰였을 뿐만 아니라 법정도 있었고, 상가는 물론 각종 오락시설, 드물기는 했지만 개인 주택도 들어가 있었다. 포로 로마노에 일을 보러 간 로마인은 날씨가 더우면 바실리카 회랑에 들어가 더위를 피했고, 날씨가 추우면 기둥 뒤에 숨어 바람을 피했다.


바실리카의 구조는 기본적으로 긴 직사각형이었다. 길이는 대개 100m 안팎이었다. 폭은 길이의 2분의 1~3분의 1 정도였다. 바실리카는 원래 열주 회랑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지붕은 씌웠지만 벽을 만들지는 않았다. 그래서 공기가 잘 통했다. 나중에는 바실리카에도 벽을 세우게 됐다. 열주 회랑은 벽 안쪽으로 들어갔고, 정면 입구에 있는 기둥만 밖에서 보일 정도였다.


포로 로마노에 세워진 최초의 바실리카는 제2차 포에니 전쟁이 끝난 이후인 BC 184년 호민관 사무실로도 사용된 바실리카 포르키아였다. 쿠리아 호스틸리아 근처 도로를 불법 점유한 여러 시설물을 부수고 세운 건물이었다. 바실리카 포르키아를 세운 사람은 대 카토로 널리 알려진 정치인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였다. 그는 카르타고의 한니발을 눌러 로마를 구해낸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를 무척 싫어해 탄핵까지 서슴치 않았던 인물이었다.


바실리카 포르키아는 BC 52년 호민관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의 장례식 도중 발생한 화재 때문에 완전히 타버렸다. 이후에 어떤 기록에도 이름이 나오지 않는 걸로 보아 재건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바실리카 포르키아의 뒤를 이어 더 정교하고 아름다운 바실리카가 들어섰다. BC 179년 건설된 바실리카 아이밀리아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곳에는 물시계도 설치돼 있었다. 건설 당시에는 공사를 담당한 재무관 풀비우스 노빌리오르의 이름을 따서 바실리카 풀비아라고 불렀다. BC 55년 조영관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가 갈리아에서 챙긴 전리품으로 지원금을 보낸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도움 덕분에 보수 공사를 실시한 뒤에는 바실리카 아이밀리아로 이름이 바뀌었다.


바실리카 아이밀리아의 규모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내부의 메인 홀 길이가 90m, 폭이 27m였다는 기록만 남아 있다. 하얀 대리석 기둥 사이의 천장에 채광을 위한 명층이 달려 있어 바깥에서 빛이 들어오게 했다. 이 바실리카가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당대 유명한 학자였던 타렌티우스 바로, 플리니우스 세쿤두스, 플루타르코스가 저서에 감탄을 늘어놓았을 정도였다. 지금은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아 그 아름다움이 어떠했는지 알 방법이 없다.


서기 12년에는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카이사르를 기념하면서 만든 바실리카 율리아가 바실리카 아이밀리아 맞은편에 완공됐다. 2층이었던 바실리카 율리아는 길이 101m, 폭 49m에 이른 큰 건물이었다. 가운데에는 대리석 기둥을 세운 복도에 둘러싸인 넓은 정원이 있었다. 정원 길이는 82m, 폭은 16m에 이를 정도였다.


바실리카 율리아는 기둥만이 아니라 외벽도 모두 대리석으로 만들었다. 심지어 바닥에도 대리석을 깔았다. 워낙 크고 아름다운 대리석이 많았기 때문에 중세시대에 교회 관계자, 귀족, 예술가 등이 교회, 궁전이나 각종 조각에 사용하려고 모두 떼어가 지금은 남은 거라곤 부스러기밖에 없다.


바실리카는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 공인 이후 기독교도의 예배 장소로 사용됐다. 많은 사람이 모이기 쉬운 장소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교인들은 예배를 드리러 갈 때 이렇게 말했다.


“바실리카에 갑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여러 황제는 바실리카를 아예 교회로 바꾸게 했다. 나중에 교회를 새로 지을 때는 넓은 바실리카의 장점을 고려해 건물을 바실리카처럼 만들게 했다. 그래서 아예 교회를 바실리카라고 부르게 됐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 이름이 굳어져 이제는 바실리카는 교회나 성당을 일컫는 명칭으로 정착돼 버렸다.


카이사르 신전


로마인은 원래부터 세상을 떠난 조상을 매우 숭배하던 민족이었지만, 조상을 신으로 승격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로마에서 죽은 사람이 신으로 승격된 경우는 단 두 차례뿐이었다. 아이네아스와 로물루스였다. 트로이에서 탈출해 이탈리아에 정착한 로마의 원조 조상인 아이네아스는 죽은 뒤 하늘로 올라가 유피테르 인디게스로 숭앙받았다. 로마를 건국한 로물루스는 죽은 뒤 퀴리누스 신이 됐다.


제정 시대로 접어들자 왕정, 공화정 시대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건물이 포로 로마노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죽은 뒤 신으로 승격된 인간에게 봉헌하는 신전이었다. 초대 황제였던 아우구스투스가 그 흐름을 바꿔 놓은 인물이었다.


카이사르가 죽은 뒤 후계자로 지명된 아우구스투스는 관례에 따라 죽은 카이사르에게 바치는 경기대회를 열었다. 7일 동안 열린 대회가 끝나던 날 밤 커다란 유성이 로마 밤하늘을 가로질렀다. 아우구스투스는 이렇게 주장했다.


“유성은 카이사르의 영혼이 불멸의 신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증표입니다.”


로마인은 아우구스투스의 말을 그대로 믿었다. 죽어서 신이 된 카이사르가 유성으로 변해 하늘로 올라갔다고 생각해서 그 유성을 시두스 이울리움(율리우스의 별)이라고 불렀다. 아우구스투스와 절친했던 시인 오비디우스는 당시 유성과 관련한 이야기를 이렇게 전했다.


“유피테르 신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카이사르의 영혼을 시신에서 꺼내오도록 하라. 그리고 영혼을 별로 바꾸어라. 신으로 격상된 그의 영혼은 항상 밤하늘에서 빛나며 카피톨리노 언덕과 포로 로마노를 내려다보도록 하리라.’ 카피톨리노 언덕 한가운데 서 있으면서도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던 베누스 여신이 카이사르의 시신에 다가가 영혼을 끄집어냈습니다. 그리고 영혼이 공기 중에 사라지지 못하게 하면서 하늘로 들고 올라가 빛나는 별이 되도록 했습니다.”


유성이 나타난 이후 로마인 사이에서 카이사르를 신으로 모셔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로마 원로원은 처음에는 반대했다.


“로마 건국 이래 로물루스를 제외하고는 사람을 신으로 모신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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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 암살 초기에 애매모호한 태도를 보였던 원로원이 그를 신으로 모시는 데에도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자 여론은 극도로 악화됐다. 위협을 느낀 원로원은 결국 카이사르의 신격화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원로원은 카이사르 암살 2년 후인 BC 42년 이렇게 결정했다.


“모든 원로원 의원과 로마 시민의 만장일치 결의에 따라 카이사르를 신으로 모시기로 했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카이사르를 신으로 모시는 시성식을 성대하게 치렀다. 이어 카이사르 신을 모시기 위한 신전을 포로 로마노에 짓기 시작했다. 그는 BC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정적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물리치고 로마의 통일을 달성한 뒤 비로소 카이사르 신전 봉헌식을 거행했다. 봉헌식은 여러 날에 걸쳐 진행됐다. 트로이 전쟁 재연 행사가 펼쳐졌고, 검투사경기도 열렸다. 곳곳에서 잔치도 이어졌다. 로마인이 하마와 물소를 처음 구경한 것은 이때였다. 그는 시민들에게 이렇게 선언했다.


“카이사르 신전의 문은 항상 열어놓겠소. 누구나 언제라도 포로 로마노 한가운데에서 카이사르 신의 모습을 볼 수 있게 하려는 뜻이라오.”


아우구스투스는 여러 전쟁에서 챙겨온 전리품을 이 신전에 봉헌했다. 4년에 한 번씩 카이사르를 기념하는 축제도 열었다. 카이사르 신전 앞에는 돌로 만든 연단이 있었다. 역대 황제는 이곳에서 열린 가족이나 저명한 귀족 장례식에서 추도사를 읽었다.


카이사르에게는 무덤이 없다. 카피톨리노 언덕 아래 포로 로마노에 장작을 쌓아놓고 시신을 화장하던 도중 비가 내려 유해가 하수구로 쓸려가 버렸기 때문이다. 그나마 아우구스투스가 신전을 지어준 덕에 그는 영혼의 안식처를 찾을 수 있었다.


카이사르 신전은 15세기까지만 해도 온전한 모습을 갖추고 있었지만 지금은 흔적만 겨우 남아 있다. 그래도 신전 앞에는 누가 가져다놓은 것인지 늘 화사한 꽃다발이 놓여 있다. 2천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로마인은 카이사르를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우구스투스가 포로 로마노에 카이사르 신전을 세운 이후 여러 황제는 카이사르처럼 죽은 사람을 신격화하고 신전을 건설하는 것을 관행처럼 정착시켰다.


티투스 황제는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를 신격화한 뒤 포로 로마노에 신전을 짓기 시작했다. 티투스가 즉위 2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뒤를 이어 황제가 된 동생 도미티아누스가 신전을 완성했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형도 신격화해 신전에 함께 모셨다. 이 신전이 베스파시아누스-티투스 신전이다.


신전을 황제에게만 바치기 위해 지은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황제의 아내나 연인, 가족도 신격화해서 신전에 모셨다. 안토니누스-파우스티나 신전이 그 중 대표적인 건물이다. 안토니우스 피우스 황제는 평생 해로했던 부인 파우스티나가 숨지자 그녀를 위해 포로 로마노 한쪽에 신전을 짓기 시작했다. 하지만 피우스는 신전이 완성되기도 전에 부인 곁으로 달려가버렸다. 뒤를 이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두 사람을 신전에 동시에 모시기로 했다.


안토니누스-파우스티나 신전은 7세기 무렵에는 교회로 바뀌었다. 이름은 ‘미란다의 산 로렌조 교회’였다. 미란다라는 명칭은 교회 후원자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었다. 성 로렌조는 군인 황제 시대였던 발레리아누스 황제 때 순교한 사제 7명 중 한 명이었다. 이 신전은 교회로 바뀌었기 때문에 그나마 르네상스 시대의 대학살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포로 로마노에는 로물루스 신전도 건설됐다. 로마 창시자 로물루스를 모신 신전은 아니었다.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에 맞서 싸웠던 막센티우스 황제가 먼저 세상을 떠난 아들 발레리우스 로물루스를 신격화한 뒤 지어준 신전이었다. 이 신전도 527년 교회가 됐다. 지금 이름은 산티 코스마 디마아노다.




로마인의 하루



포로 로마노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카피톨리노 언덕에까지 이르는 길이 있다. 비록 폐허가 됐지만 포로 로마노를 한눈에 조망하기에 좋은 길이다. ‘신성한 길’이라는 뜻인 사크라 비아가 바로 그곳이다. 여러 영화나 문학 작품에서 화려하고 웅장한 개선식이 펼쳐지는 장소로 묘사되는 곳이다.


사크라 비아는 로마 초기 왕정 시대에는 누마 폼필리우스, 안쿠스 마르키우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 등 여러 왕의 집이 있던 길이었다. 공화정 초반에는 유력한 귀족 가문들이 사크라 비아 주변에 모여 살았다.


사크라 비아는 팔라티노 언덕 앞에 있던 벨리아 고지에서 시작했다. 그래서 이 고지를 숨마 사크라 비아(사크라 비아의 정상)라고 부르기도 했다. 사크라라는 이름이 어떻게 해서 생겼는지를 두고 견해가 엇갈린다. BC 1세기 로마 역사학자 테렌티우스 바로는 이렇게 주장했다.


‘사크라 비아는 원래 종교 행렬이 지나다니던 곳이었다. 그래서 사크라라는 이름을 얻었다.’


바로보다 조금 늦은 BC 1세기 말 학자 겸 시인인 오비디우스는 다른 주장을 내놓았다.


‘사크라 비아 주변에는 베스타 신전, 라레스 신전, 베스탈과 대제사장인 폰티펙스 막시무스의 거주지 등 신성한 건물이 많았다. 그래서 사크라라는 이름이 붙었다.’


사크라 비아는 포로 로마노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길이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길을 따라 많은 가게가 들어섰다. 특히 보석 같은 귀중품이나 과일, 꽃을 파는 상점이 많았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시인 섹스투스 포르페르티우스는 이렇게 전했다.


‘제정 로마 시대 초기에 사크라 비아 양쪽에는 빈틈이 없을 정도였다.’


황제들은 이름 그대로 로마에서 가장 신성한 길이 장사치들 때문에 더럽혀지는 것을 탐탁히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제정 중기 이후에는 길 주변에 있던 상점을 몰아내기도 했다.


포로 로마노에 건축물이 만들어진 역사만 나열하다 보면 이곳은 아주 엄격하고 엄숙하고 딱딱한 곳이라고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사실은 전혀 딴판이었다. 로마인이 간단히 포룸이라고 부른 포로 로마노는 공화정 초기부터 로마인의 일상생활이 이뤄지던 중심지였다. 다양한 인간군상이 모여 모든 희로애락을 나누던 공간이었다. 오늘날 서울의 종로, 명동이나 부산의 서면, 남포동 같은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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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 로마노는 개선식의 마지막 행선지이기도 했다. 각종 제사, 선거, 공공연설, 범죄 재판, 검투사 대결 및 각종 상업 행위 등이 벌어지는 활기 넘치는 장소였다. 매일 정치인, 경제인, 일반 시민은 물론 범죄자와 사기꾼, 매춘부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류의 사람이 모여들어 로마의 일상을 이뤘다. 원로원 회의도 종종 열렸고, 종교나 교육 행사도 개최됐고, 대중 집회도 펼쳐졌다.


포로 로마노는 사통팔달이었다. 광장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사크라 비아에는 여러 곳으로 갈라지는 작은 도로들이 연결돼 있었다. 오늘날에는 콜로세움 쪽과 카피톨리노 언덕 쪽, 그리고 팔라티노 언덕 쪽을 제외하면 모두 막혀있지만, 고대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여러 도로는 포로 로마노 중앙에서부터 방사형으로 퍼져 있었다. 수부라로 연결되는 아르길레툼이 있었고, 노점상이 더 이어지는 다른 길도 존재했다. 이밖에 퀴리날레, 비미날레 언덕과 연결되는 비쿠스 롱구스, 포르타 카르멘탈리스로 이어지는 비쿠스 유가리우스, 키르쿠스 막시무스로 통하는 비쿠스 투스쿠스 등도 있었다. 이러다 보니 로마인은 어디에 살든 포로 로마노에 접근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로마인은 아침을 먹은 뒤 남녀노소에 따라 다르게 하루일과를 시작했다. 집안의 가장인 성인 남성은 토가를 걸치고 포로 로마노로 갔다. 그는 지인을 만나 정치적 대화를 나누고 물건을 사고팔았으며 은행 업무도 보았다.


어린이나 청소년을 가르치는 사설 학교도 이곳에 있었다. 연설 또는 수사학 교사는 어린 학생을 포로 로마노에 데리고 나간 뒤 특정한 주제를 주고는 행인을 붙잡고 연설로 설득해보라며 현장 교육을 시키기도 했다.


포로 로마노에서 일을 하거나 놀이를 즐기거나 연설을 하다 목이 마르면 광장 한가운데 있는 카스토르-폴룩스 신전 근처에 세워진 유투르나 분수에서 목을 축일 수 있었다. 유투르나는 고대 로마에서 분수의 여신으로 숭앙받던 신이었다.



오전 시간을 보낸 뒤 배가 고프면 당연히 포로 로마노 곳곳에 서 있는 노점에서 음식을 사 먹을 수 있었다. 아니면 바실리카에 들어선 제법 그럴싸한 식당에 들어갈 수도 있었다. 오후에는 욕장에 가서 땀을 흘리며 하루를 정리할 수도 있었다.


BC 1~2세기 로마 극작가 티투스 마키우스 플라우투스가 희곡 『쿠르쿨리오』에서 묘사한 포로 로마노의 풍경을 보면 당시 모습을 더욱 적나라하게 이해할 수 있다.


‘위증한 사람을 찾고 있다면 코미티움에 가라. 거짓말쟁이나 허풍선이는 클로아키나 신전에서 만날 수 있다. 바실리카에서는 아내의 재산을 축내는 남편이 득실거린다. 화려한 경력을 가진 매춘부나 잔인한 살인범도 그곳 주변을 어슬렁거린다.


미식가가 생선가게에서 맛있는 저녁거리를 찾고 있는 사이 아랫길에서는 사람 좋아 보이는 사내가 웃으면서 느긋하게 걸어간다. 중간 길은 큰소리를 뻥뻥 치며 껄껄대는 자들로 가득하고, 라쿠스 인근 지역에는 아무 근거도 없이 선량한 사람을 헐뜯는 수다쟁이의 목소리가 시끄럽다.


오래된 가게에는 높은 이자로 돈을 빌려주는 사채업자가 앉아 있고, 카스토르 신전 뒤에는 신용을 잃은 사내들이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모여 있다. 비쿠스 투스쿠스 거리에는 돈에 인생을 팔려는 자들이 모여 있다.’





아이밀리아누스의 눈물



군인 황제, 사두 황제 시대를 거친 뒤 천하를 평정한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즉위하면서 포로 로마노의 운명에 서서히 짙은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그가 기독교를 공인하고 수도를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옮긴 이후 포로 로마노는 작은 도시로 전락한 로마의 시민들에게 화려했던 과거의 추억을 되새기게 해주는 장소에 불과했다.


포로 로마노가 완벽하게 몰락의 길로 접어든 것은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394년 ‘모든 이교도 신전을 폐쇄하라’고 명령을 내린 게 계기가 됐다. 인구가 급격히 줄어 기운을 잃고 있던 로마에서 포로 로마노는 기독교도의 사냥터에 불과했다.


410년에는 알라리크가 이끄는 서고트족이 로마로 쳐들어와 불을 지르는 바람에 바실리카 아이밀리아 등 많은 건물이 피해를 입었다. 442년에는 끔찍한 지진이 발생했고, 455년에는 아프리카의 반달족이 포로 로마노를 휩쓸고 지나갔다.


포로 로마노는 이런 어려움을 겪고도 14세기까지는 옛 모습을 상당 부분 유지하고 있었다. 로마에 쳐들어온 고트족이나 반달족 등은 불을 지르기는 했지만 포로 로마노를 완전히 파괴하지는 못했던 것이었다. 이들은 보물 등 값비싼 보물을 약탈해가기 바빴다. 기껏해야 칼이나 창, 방패만 들고 로마로 쳐들어온 야만족에게 일부 목조 건물에 불을 지르는 것 말고 대리석 등 단단한 돌로 지은 건물을 부술 방법이나 여유는 없었다.


포로 로마노가 망가진 결정적 이유는 바로 교황의 아비뇽 유수 해제였다. 프랑스 왕정의 권위에 눌려 여러 교황은 프랑스 아비뇽에 70년 간 갇혀 있었다. 그런데 1367년 교황 우르바노 5세가 갑자기 아비뇽에서 돌아왔다. 기독교로서는 다행일지 몰라도 포로 로마노로서는 비극의 시작이었다. 황폐해진 로마를 본 교황은 마음이 착잡했다.


‘이런 폐허의 도시에서 살고 싶지 않아. 많은 궁전, 교회를 지어 교황이 사는 도시라는 명성에 걸맞게 로마를 바꿔야 해.’


교황은 고대 로마의 건축물로 눈을 돌렸다. 건축물을 아끼고 보호하겠다는 게 아니라 궁전과 교회를 짓는 데 필요한 자재를 공급할 수 있는 채석장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교황의 지시에 따라 건물을 짓게 된 많은 건축가, 조각가는 필요한 자재를 산의 채석장에서 따로 구하지 않고 포로 로마노에 있는 건물들에서 뜯어내 조달했다. 그게 훨씬 편하고 돈이 덜 들었기 때문이었다. 교황의 뒤를 따라 대저택 건립에 몰두했던 다른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결정적 파괴는 르네상스 시기이던 1540~49년 사이에 벌어졌다. 당시 성 베드로 대성당 신축 공사를 진행하고 있던 도급업자는 건축자재를 확보하기 위해 포로 로마노로 달려갔다. 불과 10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포로 로마노에 있던 고대 로마의 신전, 개선문, 바실리카는 모두 파괴되고, 해체되고, 불에 타고, 산산조각 나버렸다. 여러 건물에 붙어 있던 명문이나 장식용 조각, 아름다운 부조도 똑같은 신세를 면치 못했다.


안토니누스-파우스티나 신전의 제단, 계단, 페디먼트는 1540년에 뜯겨나가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옮겨졌다. 파비우스 막시무스의 개선문, 아우구스투스 개선문도 1541~45년에 같은 운명을 맞이했다. 1546년에는 아우구스투스가 양아버지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바친 신전이 붕괴돼 버렸다. 1년 뒤에는 카스토르-폴룩스 신전이, 다시 2년 뒤에는 베스타 신전과 아우구스투스 신전이 완전히 해체돼 버렸다.


포로 로마노는 성 베드로 대성당을 위해서만 희생당한 게 아니었다. 미켈란젤로는 카스토르-폴룩스 신전의 기둥을 잘라내 라테라노 대성당에서 카피톨리노 언덕으로 옮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청동기마상의 받침대로 사용했다. 라파엘로는 같은 신전의 기둥을 깎아내 포폴로 광장의 산타마리아 델 포폴로 성당에 있는 치기 예배당의 요나 석상을 제작했다.


결국 오랜 역사를 자랑하던 포로 로마노는 짧은 시간에 폐허가 돼버렸다. 오늘날 로마가 자랑하는 수많은 르네상스 시대 건축물, 조각 작품은 결국 포로 로마노의 살을 뜯어먹고 태어난 셈이다.


폐허의 미학에 사로잡힌 여러 화가가 채석하는 건축가들을 따라가 몰락하는 포로 로마노의 모습을 그림에 담기도 했다. 이 그림들은 현대 역사학자, 고고학자 등이 완벽하게 몰락하기 이전 원래 포로 로마노의 모습을 상상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웅장하고 아름다웠던 건축물이 모두 사라진 포로 로마노는 마침내 완전히 로마인의 외면을 사게 됐다. 나중에는 목동이 소떼나 양떼를 몰고 와 방목하는 초지 신세로 떨어졌다. 목동은 이곳을 ‘소의 들판’이라는 뜻인 캄포 바키노로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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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로마를 지나가던 나그네가 무너진 신전 바닥에 건초 등을 깔고 잠을 청하는 게 포로 로마노에 사람의 그림자가 비치는 드문 경우였다. 심지어 로마인조차 캄포 바키노가 과거에 어떤 곳이었는지 모를 정도가 됐다.


포로 로마노는 19세기 들어서야 겨우 문화재라는 관점에서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1803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을 시작으로 사투르누스 신전, 베스파시아누스 신전, 포카스 원기둥, 카스토르‧폴룩스 신전, 콩코르디아 신전, 사크라 비아, 타불라리움, 티투스 개선문 등이 발굴됐다. 더 초기의 유적을 더 깊이 발굴하고 연구하려는 노력은 이뤄지지 못했고, 다만 표면에서 발굴했거나 땅에 나뒹굴던 잔해를 정리해놓는 수준에 머물렀다.


포로 로마노의 폐허를 둘러보다 지쳐 먼 옛날에는 신전의 기둥이었을지도 모르는 돌덩이 위에 앉아 잠시 쉬고 있으려니 역사 기록에 나오는 이야기가 떠오른다. BC 2세기 그리스 역사학자 폴리비우스가 『카르타고의 몰락』에 남긴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의 눈물이다. 그는 BC 146년 로마에 맞선 카르타고를 잿더미로 만든 장군이었다. 카르타고의 멸망은 로마제국 전성기의 서막이었다. 폴리비우스는 스키피오가 아프리카 최고의 도시를 붕괴시키는 현장에 함께 있었다.


‘스키피오는 무너지는 카르타고를 보면서 눈물을 흘렸고, 적을 위해서 울음을 터뜨렸다. 그는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다. 모든 도시, 모든 사람은 한때 그리스 최고의 도시였던 트로이는 물론 아시리아, 페르시아, 마케도니아가 겪었던 운명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언젠가는 트로이도, 프리아모스 왕과 그를 따르는 전사들도 함께 멸망하리라.”


그에게 왜 그런 말을 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숨김없이 주저하지 않고 이렇게 대답했다.


“언젠가는 나의 조국 로마도 같은 운명을 피할 수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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