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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Oct 21. 2020

콜로세움

신과 조상에게 바친 광란의 칼춤



 BC 1세기 정치인이었던 키케로는 로마 최고의 문필가이자 철학자였다. 그는 책을 많이 썼을 뿐만 아니라 지인에게 편지도 많이 보냈다. 발이 넓은 인물이어서 교류 관계도 많아 평생 주고받은 편지는 한두 통이 아니었다. 그의 편지에는 단순한 안부 인사나 개인적 사연만이 아니라 시대 상황을 보여주는 역사적 내용도 담겨 있어 오늘날 역사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된다. 


 키케로는 어느 날 편안하게 지내는 사이인 한 지인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런데 그 편지에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아주 재미있고 이색적이면서 뜻밖의 사연이 담겨 있었다. 이런 내용이었다.  


 ‘오늘 거리에서 검투사경기 광고문을 봤어. 행사 날짜, 장소, 이유, 참가 검투사 수 등이 적혀 있더군. 경기장에 가는 사람에게는 음식, 음료수, 과자는 물론 경품도 제공한다는거야. 요새는 검투사 이름과 격투 스타일은 물론 검투 기록을 담은 책자를 발간하기도 한다더라고.’


 키케로가 보낸 편지는 로마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검투사경기(무누스 또는 무네라)를 홍보하기 위해 행사 주최자 무네라토르가 포로 로마노에 붙여놓은 대자보 문구를 설명하는 내용이었다. 대자보뿐만 아니라 오늘날 경마장, 경정장, 경륜장에서 베팅을 도와주기 위해 발행하는 말, 기수 안내서나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의 『스카우팅 리포트』 같은 느낌을 주는 검투사 소개서적까지 펴냈다니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현대사회에 사는 우리는 매일 홍보물, 광고물에 파묻혀 살다시피 하지만, 키케로의 편지는 지금으로부터 무려 2천100년 전에 쓴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로마에 그런 홍보물이 있었다는 게 신기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로마에서 검투사경기가 얼마나 폭발적 인기를 누렸는지 짐작케 하는 편지다.


 로마 시대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구호는 ‘빵과 서커스’다. 1세기 로마 시인 데키무스 유베르날리스가 처음 사용한 표현이다. 라틴어로는 파넴 에트 키르켄세스다. 빵은 호구지책을 의미한다.


 공화정 시대 집정관과 제정 시대 황제에게는 북쪽 야만족의 침략을 막는 안보도 중요했지만, 시민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식량 밀가루를 공급하는 일도 반드시 챙겨야 할 책무였다. 하지만 빵과 안보만으로는 부족했다. 사람이 밥만 먹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로마 정치인은 시민에게 여러 가지 오락을 제공했다. 그들이 제공한 오락은 루디(전차경기), 무누스, 베나티오(동물사냥), 연극 등이었다. 


 전차경기는 키르쿠스 막시무스, 연극은 로마 최초의 상설 석재 공연장인 폼페이우스 극장이 전용 시설이었다. 검투사경기를 전문적으로 거행한 곳은 콜로세움이었다. 이곳에서는 동물 사냥과 모의 해전이 펼쳐지기도 했다. 키르쿠스 막시무스와 폼페이우스 극장은 허물어지고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다. 로마의 서커스를 상징하는 세 건물 중에서 그나마 원래 모습을 지키고 있는 것은 콜로세움뿐이다. 


 콜로세움은 로마 제국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건축물이다. 규모면에서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맞먹는 고대 로마 건축의 최고 걸작이다. 지은 지 2천 년이 다 돼 가는 지금도 튼튼하게 남아 있어 누구나 로마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머리에 떠올리는 랜드마크가 됐다. 해마다 이곳을 찾는 관광객만 400만~500만 명이라니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콜로세움은 세계를 지배하게 된 뒤 정신적으로 점점 황폐해진 로마의 도덕적 퇴화를 상징하는 건축물이기도 하다.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검투사와 동물의 비명을 들으며 환호했던 로마인의 함성은 불과 100년 뒤에는 무너지는 로마 제국의 현실 앞에서 절망하는 비탄으로 바뀌었다. 콜로세움 안에서 그들의 함성과 비명을 들어보도록 하자.




아우구스투스의 유업



 ‘사람 팔자는 시간문제구나. 아무도 한 치 앞을 알 수 없구나.’


 티투스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는 팔라티노 언덕의 황궁에서 포로 로마노를 내려다보았다. 불과 1년 전 일이 떠올랐다. 그는 그때만 해도 시리아 속주 총독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황제가 돼 황궁에서 살고 있었다. 


 베스파시아누스의 운명이 바뀐 건 네로 황제의 자살 때문이었다. 그가 죽은 뒤 차례로 황제 자리에 올랐던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 아울루스 비텔리우스는 내전에서 살해당하거나 자살했다.


 그 덕분에 황제를 전혀 꿈꾸지 않았던 베스파시아누스는 그야말로 덩굴째 호박을 건져 올릴 수 있었다. 동방과 아프리카, 도나우 지역에 파견돼 있던 모든 로마 군단이 지지했고, 원로원이 황제로 추대한 결과였다. 


베스파시아누스는 로마 북부 팔라크리네에서 세금 징수원의 아들로 태어나 평생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이었다. 그는 사람이라는 게 어떤 존재인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앞에서는 아첨을 일삼지만 언제 배신해 등에 칼을 꽂을지 알 수 없는 게 사람이지.’ 


 베스파시아누스는 로마의 전통 귀족 가문 출신이 아니었다. 지방 하급 집안 출신의 호모 노부스(신참)였기 때문에 귀족으로 가득 찬 원로원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기 쉽지 않았다.


 ‘내가 발을 조금만 헛디디면 금세 누군가 등을 떠밀어 절벽으로 떨어뜨리려 하겠지.’


 베스파시아누스는 황제로 등극한 뒤 원로원에 여러 가지를 양보했다. 붙임성이 좋은 성격이었던 그는 늘 스스로를 낮추고 겸손한 태도를 지키는 것을 잊지 않았다. 1~2세기 로마 역사학자 수에토니우스는 『열두 명의 카이사르』에서 그를 이렇게 평가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황제가 된 이후 생애를 마칠 때까지 늘 겸손하고 온화한 태도를 보였다. 친구의 솔직한 충고, 변호인의 빈정대는 말, 철학자의 반항적인 말도 너그럽게 받아넘겼다.’


 신참 가문이 황제 자리를 대대로 유지하려면 평범한 로마 시민의 지지를 얻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베스파시아누스는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취임하자마자 여러 가지 공공사업을 벌였다. 내전 중에 소실된 카피톨리노 언덕의 유피테르 신전을 복원했고. 도로를 정비하고 공공건물도 연이어 건설했다. 물론 공사비는 속주 총독 시절 전쟁에서 챙긴 전리품을 팔아 만든 사비로 충당했다. 하지만 이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베스파시아누스는 검투사경기나 축제 등에 직접 참여해 평민과 함께 즐기는 것을 좋아했다. 팔라티노 언덕 아래에 있는 키르쿠스 막시무스나 로마 외곽 바티카누스(바티칸)의 네로 전차경기장에서 열리는 전차경주나 검투사경기를 보러 가기도 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그러는 사이 시민들이 매우 불편하게 여기는 게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들은 석재로 튼튼하게 만들어 검투사경기를 집중해서 볼 수 있는 대형 원형극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이 점을 간파했다. 


 베스파시아누스의 머리에 떠오른 기억이 하나 더 있었다. 아우구스투스의 유업이었다. 제정 시대 초대 황제였던 아우구스투스는 즉위 이후 많은 토목, 건축 공사를 시행했다. 동물사냥을 무척 좋아해서 동물 3천500마리를 한꺼번에 죽이는 행사를 열기도 했다. 당연히 그의 머리에는 로마 한복판에 도시 규모에 걸맞은 원형극장을 건설하려는 생각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그 꿈을 실천하지 못하고 눈을 감고 말았다. 그걸 생각해낸 베스파시아누스는 원로원에서 이렇게 공표했다.


 “나는 아우구스투스의 유업을 이어받겠다고 약속했소. 그래서 로마 역사상 최초로 도시 한복판에 석재 원형극장을 건설하겠소. 지금까지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었던 엄청난 규모로 지을 것이오. 이것은 아우구스투스의 뜻이오.”

 

 목적은 간단했고, 명분은 확실했다. 시민들을 즐겁게 함으로써 황제 지지도를 높여 정권을 공고히 하겠다는 것이 목적이었다. ‘원형극장 건설은 아우구스투스의 오래된 유업을 실천하는 일’이라는 명분은 로마인이 듣기에 아름답고 감동적이었다. 베스파시아누스의 이런 생각은 기록에 남아 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새로운 사업에 착수했다. 평화의 신전, 클라우디우스 신전 건설은 물론 아우구스투스가 소중히 여겼다고 우리가 알고 있는 계획, 바로 로마 한복판에 원형극장을 짓는 일이었다.(수에토니우스 『열두 명의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는 원형극장을 짓기 위한 땅을 찾다 팔라티노 언덕과 포로 로마노 근처에 있는 도무스 아우레아(황금 궁전)를 떠올렸다. 원래 이곳은 서민들이 살던 주거지였지만 서기 64년 로마를 휩쓴 대화재 때 잿더미로 변했다. 네로는 궁전을 짓기 위해 이곳의 땅을 헐값으로 사들였다. 이 때문에 ‘네로 황제가 땅을 싸게 매입하려고 일부러 불을 질렀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네로는 황금궁전을 짓기 시작했지만 에스파냐에서 총독 갈바를 중심으로 일어난 반란에 쫓겨 자살하는 바람에 공사를 마무리할 수 없었다. 베스파시아누스가 원형극장 건설 부지로 황금궁전을 선택한 데에는 정치적 이유가 숨어 있었다. 


 “네로가 궁전을 짓는다며 반강제적으로 빼앗은 땅을 다시 로마인에게 돌려주도록 하겠소. 네로는 재산을 갈취하며 로마인을 괴롭힌 폭군이지만, 나는 그런 네로를 응징하고 로마인의 한을 풀어주도록 하겠소.” 


 베스파시아누스는 황금궁전과 인근 땅을 모두 사들여 70~72년 사이 공사를 시작했다. 원형극장을 세운 곳은 정확하게 황금궁전에 있던 인공 호수 위였다. 그가 황제로 즉위한 것은 69년이었으니 불과 1~3년 만에 공사에 들어간 셈이다.


 이처럼 엄청난 규모의 건축물 설계를 그렇게 짧은 기간에 완성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이미 아우구스투스 시대나 그 이후에 설계도는 완성돼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원형극장 건설비는 황제 즉위 직전에 치른 유대 전쟁에서 챙긴 전리품으로 충당했다. 콜로세움 인근에서 발견된 명문에 그런 내용이 나온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전리품을 바탕으로 새 원형극장을 짓도록 명령했다.’ 


 로마인들은 너나할 것 없이 새 경기장 건설을 환영했다. 원형극장이 서둘러 완공되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시내 한복판에서 수시로 편안하게 검투사경기를 보게 됐어.”


 아쉽게도 베스파시아누스는 원형극장의 완공을 보지 못했다. 그는 건물이 3층까지 올라갔을 무렵인 79년 세상을 뜨고 말았다. 공사를 완성한 이는 베스파시아누스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큰아들 티투스였다. 그는 아버지가 숨진 이듬해 원형극장을 완공했다. 공사에 8~10년 정도가 걸렸으니 당시 건축 기술과 건물 크기를 고려하면 상당히 빨리 지은 셈이었다. 베스파시아누스의 둘째아들이자 티투스의 동생인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검투사, 동물 등이 이동하는 지하 공간인 히포지움을 추가했다. 원형극장 준공을 본 로마인들은 감격스러워했다.


 “이제 더 이상 로마에는 대형 건물을 세울 필요가 없겠군.” 


  

 

콜로서스 네로니스



 콜로세움이 개장했을 때 이름은 암피테아트룸 플라비움이었다. 플라비우스 원형극장이라는 뜻이다. 테아트룸은 ‘극장’이고 암피는 ‘둘’ 또는 ‘양쪽’이라는 의미다. 플라비움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가문의 성인 플라비우스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일부에서는 암피테아트룸 카이사레움이라고 불렀다. 카이사레움은 카이사르를 뜻했다. 당시에는 황제를 카이사르라고 부르기도 했다. 


 오늘날 흔히 부르는 콜로세움이라는 이름은 11세기 무렵에 만들어졌다. 원형극장 앞에 있었던 네로 황제의 동상 콜로서스 네로니스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네로 동상은 구리로 만든 것이었다. 높이가 무려 30m에 이를 정도로 거대했다.


 콜로서스 네로니스는 ‘고대 7대 불가사의’로 불린 그리스 로도스 섬의 거대 석상인 로도스 콜로서스에서 가져온 이름이었다. 결국 콜로세움이라는 이름은 로도스 섬의 거대 석상에서 나온 셈이다. 콜로서스가 ‘거대하다’는 뜻이니 콜로세움은 ‘거대한 건축물’이라는 의미가 된다.


 콜로서스 네로니스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자. 네로 황제가 죽은 뒤 콜로서스 네로니스는 온갖 수모를 다 겪어야 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동상에서 네로 두상을 떼어내고 태양 모양 왕관을 달았다. 동상 이름도 콜로서스 솔리스(거대한 태양신)로 바꾸었다. 


 오현제 중 한 명인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로마-베누스 신전 건설 부지를 확보하기 위해 동상을 콜로세움 북서쪽으로 옮겨버렸다. 자신을 헤라클레스의 현신이라고 주장했던 코모두스 황제는 태양 왕관을 뜯어내고 그의 두상을 갖다 붙였다.


 312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막센티우스를 꺾고 로마를 통일한 이후 원로원은 콜로세움 앞에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을 만들어 헌정하고, 네로 동상 꼭대기에는 콘스탄티누스의 두상을 달았다. 이 두상은 16세기 무렵 허물어진 네로 동상 기단 인근에서 발견됐다. 지금은 카피톨리노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네로 동상은 이런 수모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중세 시대까지 살아남았다. 특이하게도 ‘동상에 마법의 힘이 있다’는 속설이 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상은 희한하게 로마의 영원함을 상징하는 건축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기독교도까지 이런 이야기를 믿었다고 하니 특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7~8세기 영국의 수도사 겸 역사학자였던 베대는 이런 시를 남겼다.


 ‘콜로서스가 서 있는 한 로마도 서 있을 것이다.

콜로서스가 무너질 때 로마도 무너질 것이다.

로마가 무너지면 세계도 무너진다.’


 베데가 말한 콜로서스는 네로 동상이었다.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베대의 글은 누군가에 의해 ‘콜로세움이 서 있는 한…’으로 바뀌어 널리 퍼졌다. 


 네로 동상이 언제 사라졌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기록으로 추정해볼 때 연이은 지진 때문에 15세기께 무너졌을 것으로 보인다. 일부에서는 중세시대 사람들이 청동 조각품 등을 만드는 데 활용하려고 동상을 넘어뜨렸다고 말하기도 한다.  


 콜로세움 주변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기로 하자. 콜로세움 앞에는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메타 수단스(땀 흘리는 메타)라는 분수가 있었다. 콜로세움이 완공된 직후인 1세기 말에 만든 분수였다. 원래 메타는 대전차경기장인 키르쿠스 막시무스 트랙의 양쪽 끝부분에 있던 원뿔을 의미했다. 전차가 방향을 바꿔 유턴하듯이 회전하는 곳을 일러주는 시설이었다. 


 콜로세움의 메타 수단스는 키르쿠스 막시무스에 있던 메타와 모양이 비슷해서 메타라는 이름을 얻었다. 로마 장군은 개선식을 치를 때 팔라티노 언덕 옆을 지나 콜로세움 앞에서 회전한 뒤 포로 로마노로 들어갔다. 그때 회전하던 지점이 바로 메타 수단스였다.


 벽돌, 콘크리트, 대리석으로 만든 메타 수단스의 높이는 처음에는 17m 정도여서 상당히 컸다. 나중에 조금씩 깎이기는 했지만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9m 정도 높이를 유지하고 있었다. 당시 존재했던 메타 수단스를 찍은 사진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


 1936년 독재자 무솔리니는 독일의 독재자 히틀러의 로마 방문을 앞두고 도로 개설 공사를 하면서 원형 교차로를 내려고 메타 수단스를 없애 버렸다. 2천 년을 이어온 고대의 유물이 독재자의 말 한 마디에 사라져 버린 것이다. 나중에 도로 확장 공사를 하는 와중에 원형 교차로도 없어졌다. 지금 메타 수단스 자리는 그냥 보도블록으로 덮여 있을 뿐이다.


 

  

세기의 대역사



 콜로세움은 콘크리트, 대리석, 각종 석재를 사용해 건설했다. 긴 쪽이 188m, 짧은 쪽이 156m, 높이는 57m였다. 경기가 벌어지는 무대인 아레나는 긴 쪽이 87m, 짧은 쪽이 55m였다. 관중석 높이는 56m에 이르렀다. 


 콜로세움을 기독교도가 순교한 성소로 생각한 옛날 기독교 신도 사이에서는 콜로세움을 설계한 건축가가 기독교도였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일부에서는 티투스가 예루살렘에서 노예로 끌고 온 유대인 2만~6만여 명을 공사에 동원했다는 주장도 나온다. 물론 그랬을 가능성은 충분하지만 그런 일이 실제 있었다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콜로세움은 총 4층이었다. 단순한 느낌을 주지 않으려고 층마다 변화를 주었다. 1~3층은 각종 조각상이 세워진 아치형 구조로 만들었다. 1층에는 도리아식 기둥, 2층에는 이오니아식 기둥, 3층에는 코린트식 기둥을 세웠다. 마지막으로 4층에는 코린트식 벽기둥과 직사각형 창문을 설치했다. 


 아치형 출입구는 무려 80개여서 행사가 끝난 뒤 아주 빠른 시간에 모든 관람객이 빠져나갈 수 있었다. 출입구 중 두 개는 검투사 전용이었다. 하나는 죽음의 신의 이름을 딴 포르타 리비티나였다. 경기 도중 목숨을 잃은 검투사가 실려 나가는 문이었기 때문이었다. 살아남은 검투사는 포르타 사니비바리아로 걸어 나갔다. 


 콜로세움 관중석은 모두 5만 석이었다. 좌석이 4만 5천 석, 입석이 5천 석이었다. 관중석이 8만 석에 이르렀다는 주장도 있다. 황제와 원로원 의원이 관람하는 공간은 대리석으로 만들었고, 안전을 위해 주위에 높은 차단벽을 세웠다.


 다른 관중석은 부자용, 중산층용, 노예와 외국인용 등으로 나뉘어 있었다. 꼭대기 층에는 입석이 만들어져 있었다. 주로 가난한 사람이나 여성이 사용하는 관람석이었다. 천장에는 관람객을 햇빛에서 보호하기 위해 천으로 만든 가리개를 달았다. 


 경기장인 타원형 아레나 바닥에는 15㎝ 두께로 모래를 깔았다. 아레나 주변에는 관중을 보호하기 위해 높은 담벼락을 세웠다. 극적 효과를 내기 위해 때로는 빨갛게 염색한 모래를 뿌리기도 했다. 부드러운 모래를 라틴어로 하레나라고 불렀다. 여기에서 아레나라는 이름이 나왔다. 오늘날 경기장을 뜻하는 아레나의 어원이다.


 경기에 출장하는 검투사의 출신 지역에 따라 이국적 분위기를 내려고 아레나 주변을 나무나 바위로 장식하기도 했다. 지하에는 동물을 실어 나르기 위한 승강기 설비를 설치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공사에 사용된 석재 표면에 숫자가 적혀 있다는 점이었다. 그 석재가 어느 지방에서 생산됐는지를 알려주는 숫자다. 로마인이 돌 하나를 쌓더라도 얼마나 관리를 철저히 했는지 보여주는 훌륭한 사례다.

 

 『로마제국 쇠망사』를 쓴 18세기 영국 역사학자 에드워드 기번은 직접 가본 콜로세움의 풍경을 이렇게 묘사한 바 있다. 상상력을 덧붙인 그의 글을 보면 콜로세움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는 것 같아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다.


 ‘콜로세움은 80여 개의 아치가 받치고 있는 높은 원형 건축물이다. 건물 외벽은 대리석으로 덮었으며 각종 조각상으로 장식했다. 넓은 내부는 오목한 모양에 경사가 져 있으며  60~80열로 이뤄진 대리석 좌석으로 덮여 있다. 좌석에는 쿠션이 깔려 있다. 관중석은 한꺼번에 손쉽게 8만 명을 수용할 능력을 갖고 있다. 


 80여 개의 출구는 엄청난 관중을 손쉽게 내보낸다. 입구, 통로, 계단을 아주 정밀한 기술로 설계한 덕에 원로원 의원이든 기사계급이든 평민이든 아무런 불편이나 혼란 없이 정해진 좌석을 찾아갈 수 있다. 


 관중의 편의, 즐거움에 꼭 필요한 것이라면 하나도 빠진 게 없다. 관중은 종종 머리 위로 끌어당길 수도 있는 넓은 덮개 덕분에 햇빛과 비로부터 보호를 받는다. 곳곳에서 분수가 솟구쳐 항상 신선한 공기를 공급하며, 아주 풍부한 아로마 향기가 주변을 향긋하게 만들어준다. 


 콜로세움 한가운데 있는 아레나에는 아주 고운 모래가 뿌려져 있다. 아레나는 계속해서 다른 형태로 모양을 바꾼다. 어떤 순간에는 땅에서 솟아나는 것처럼 보이다가 잠시 후에는 헤스페리데스(그리스신화에 나오는 황금빛 석양의 여신)의 정원처럼 변하고, 나중에는 트라키아의 바위와 동굴처럼 변신한다. 


 땅속에 파묻힌 수도관은 엄청난 양의 물을 운반한다. 방금 전에는 평지 같던 아레나가 갑자기 넓은 호수로 변하더니 곧이어 무장 함선으로 가득 차고, 마지막에는 바다 속 깊은 곳에서 뛰어나온 괴물들로 덮인다. 


 로마 황제는 자신의 부와 자유정신을 마음껏 자랑한다. 우리는 다양한 책에서 원형극장의 모든 가구가 은이나 금, 또는 각종 보석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읽곤 한다.


 카리누스(3세기 말 황제)가 개최한 경기를 묘사하는 한 시인은 ‘짐승이 올라오지 못하게 설치한 담장은 황금 철사로 만들었고, 열주 기둥은 금으로 도금했으며, 여러 계급의 관중을 분리해놓은 시설은 아름다운 돌로 만든 모자이크로 장식했다’고 묘사한다.’ 

 


  

두 개의 극장 또는 원형 극장



 원형극장은 오늘날 스포츠 경기를 진행하는 운동장 또는 체육관과 비슷한 구조를 갖고 있었다. 지금은 어느 나라 어느 도시에 가더라도 흔히 볼 수 있는 건축물 구조이지만 로마 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렇다면 로마에 원형극장은 어떻게 해서 생기게 됐을까?


 극장은 원래 그리스에서 고안한 건축물이었다. 그리스의 극장은 기본적으로 반원형이다. 반원형 무대를 중심으로 반원형 관중석이 둘러싸고 있는 구조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에 있는 디오니소스 극장과 아티쿠스 극장이 대표적이다. 


 로마인은 건국 초기부터 그리스식 극장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언덕 언저리에 극장을 짓곤 했다. 하지만 석재극장은 건설하지 않았다. 연극 공연을 열 때마다 임시 목재극장을 지어 사용했다가 행사가 끝나면 해체했다. 다른 라틴 도시에는 석재 극장이 드물지 않았는데 왜 유독 로마에만 없었는지 그 이유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로마에 그리스 방식의 석재 상설 극장을 처음 도입한 사람은 폼페이우스였다. 그는 오리엔트 원정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돌아온 뒤인 BC 55년 마르스 평원에 4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폼페이우스 극장을 지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유업을 이어받아 BC 11년 마르스 평원에 마르켈루스 극장을 지었다. 둘 다 반원형 극장이었다. 물론 그리스 극장과는 조금 모양이 달랐다. 


 마르켈루스 극장은 먼저 지은 폼페이우스 극장과 많이 닮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설계를 할 때 폼페이우스 극장을 참고했을 가능성이 높다. 마르켈루스 극장 정면 외관은 콜로세움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흡사해 보인다. 폼페이우스 극장은 지금 사라졌지만 현대에 제작한 모형을 보면 역시 콜로세움과 비슷하게 느껴진다.


 로마인은 원래 키르쿠스 막시무스에서 전차경주를 보는 걸 좋아했다. 이곳에서는 전차경주 외에 검투사경기나 동물사냥도 열리곤 했다. 그런데 키르쿠스 막시무스는 가운데 부분에 빈 공간인 스피나, 둘레에 트랙이 있어 검투사경기를 치르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관중석과의 거리가 너무 멀었다. 


 “검투사가 마치 개미처럼 보이잖아.”


 그렇다고 반원형인 그리스 식 극장에서 검투사경기를 치르는 것은 더 어울리지 않았다. 극장 무대에서 칼이나 창을 들고 싸우는 검투사를 생각하면 마치 코미디 같다는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로마인 사이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검투사경기를 치를 새로운 경기시설을 지어야 해.”


 로마인은 매우 실용적인 민족이었다. 필요성이 생기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데 익숙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게 반원형 극장 두 개를 붙여 둥그렇게 만든 원형극장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콜로세움 같은 웅장한 원형극장을 만들 수는 없었다. 처음에는 목재를 사용해 작은 원형극장부터 만들다 경험과 기술이 쌓이면서 석재로 대형 원형극장을 건설할 수 있게 됐다. 


 로마에서 원형극장을 처음 만든 사람은 율리우스 카이사르 지지파였던 BC 49년 법무관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였다. 1세기 로마 시대 학자 가이우스 플리니우스 세쿤두스가 쓴 『자연의 역사』에 그가 만든 원형극장 이야기가 나온다.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위해 검투사경기를 열 생각인데 마땅한 장소를 구할 수 없군.”


 “그럼 직접 원형극장을 건설하는 게 어떤가?”


 “내가 직접?”


 “그럼. 나무를 사용해서 적당한 규모로 만들면 큰돈이 들지 않을 거야.”


 쿠리오가 건설한 원형극장은 매우 독특했다. 엄밀히 말하면 암피테아트룸(원형극장)이 아니라 두알리스 테아트룸(극장 두 개)이었다. 그는 반원형 극장 두 개를 나란히 건설했다. 평소에는 두 극장에서 따로 연극을 공연하다 검투사경기를 개최할 때면 극장의 방향을 돌려 서로 마주보게 해서 동그랗게 만들었다. 극장 바닥에 이동 장치를 달아놓았기 때문에 방향 전환이 어렵지는 않았다. 물론 두 극장이 완벽하게 맞붙지는 않았고, 양쪽에 틈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 원형극장은 BC 46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만들었다. 그 내용은 1~2세기 로마 역사학자 카시우스 디오의 『로마사』에 나온다.


 ‘카이사르는 나무로 사냥용 극장을 만들었다. 이것을 원형극장이라고 불렀다. 무대는 없고 주변에 좌석이 둥글게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와 결혼했다 죽은)딸을 기념해 검투사경기와 동물사냥을 개최했다.’


 목재 원형극장은 여러 가지 면에서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수만 명에 이르는 관중의 체중을 오랫동안 버티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붕괴 사고가 자주 일어났고, 화재에도 취약했다. 실제 그런 비극적인 사고가 여러 건 일어났다.


 티베리우스 황제 시대에 아틸리우스라는 해방 노예가 피데나이에 목재 원형극장을 지었다. 공사를 부실하게 마무리하는 바람에 검투사경기 도중 관중석 붕괴 사고가 일어나 2만~5만 명이 깔려죽었다.


 네로 황제 사후 오토와 비텔리우스가 내전을 벌이고 있을 때에는 플라켄티아의 목재 원형극장에서 불이 나 큰 인명 피해를 냈다. 쿠리오와 카이사르의 원형극장도 화재로 없어지고 말았다.


 “안전하게 검투사경기를 치르려면 석재 원형극장이 필요해. 나무 극장은 너무 위험해.”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전직 집정관 스타틸리우스 타우루스는 BC 29년 마르스 평원에 사상 첫 석재 원형극장을 사비로 건설했다. 건물 외형은 석재로, 관중석과 계단은 목재로 만든 극장이었다. 


 타우루스는 극장 문을 열자마자 여러 차례 검투사경기를 거행해 박수갈채를 받았다. 원로원은 그의 공로를 치하하는 뜻에서 죽을 때까지 매년 법무관 한 명을 지명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관중석 규모가 그다지 크지 않았던 이 극장도 네로 황제 시대인 64년에 발생한 로마 대화재 때 무너지고 말았다. 


 티베리우스의 뒤를 이은 칼리굴라 황제는 전차경기는 물론 검투사경기도 매우 좋아했다. 그는 그때까지 남아 있던 스타틸리우스의 원형극장을 그다지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더 훌륭한 원형극장을 짓겠다면서 공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암살당한 뒤 후임 황제로 즉위한 클라우디우스가 예산 절감을 이유로 방치하는 바람에 사업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네로 황제는 마르스 평원에 제법 큰 원형극장을 건설했다. 규모나 외관 등 알려진 것은 하나도 없다. 게다가 64년 로마 대화재 때 스타틸리우스가 지은 원형극장과 함께 불타버리는 바람에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다.


 네로가 죽은 뒤 즉위한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는 원형극장보다는 목숨을 어떻게 부지할지 먼저 챙겨야 할 형편이었다. 베스파시아누스가 여러 황제를 제치고 아우구스투스의 가슴에 담겨 있던 로마 시내 원형극장 건설 사업을 추진하는 영광을 얻게 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지금 로마에 가면 볼 수 있는 콜로세움은 베스파시아누스, 티투스, 도미티아누스가 만든 원래의 원형극장이 아니다. 이후에 새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이야기다.


 콜로세움은 수시로 화재에 시달렸다. 그 이유는 종전에 만들었던 목재 원형극장과 똑같았다. 전체적인 구조는 석재였지만 지하공간과 아레나, 관중석 지붕 등은 모두 나무였기 때문에 화재에 취약했던 것이다. 나무에 불이 붙으면 대리석 등 석재의 화학적 성질마저 변화시켜 붕괴시킬 정도로 뜨거웠다.


 처음에는 화재가 발생할 때마다 땜질보수로 충분히 만회할 수 있었다. 하지만 217년 최상층부 관중석을 때린 번개로 불이 났을 때에는 상황이 달랐다. 불이 얼마나 거셌던지 로마에 있는 7개 소방 회사 직원은 물론 카스트라 미세나티움 해군기지에 있던 선원까지 모두 불을 끄러 달려와야 할 정도였다. 그래도 불길을 잡지 못해 콜로세움은 겨우 뼈대만 남을 정도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황제 폐하! 콜로세움에서는 도저히 검투사경기를 치를 수가 없습니다. 아예 없애 버리든지, 아니면 새로 지어야 할 형편입니다.”


 “그럼 그동안 검투사경기는 어디에서 연단 말이오?”


 “당분간 마르스 평원에 있던 스타디움 도미티아나(도미티아누스 경기장, 현재 나보나 광장)에서 거행하는 게 어떨까요?


 “그게 좋겠소. 사람들에게 그렇게 알리도록 하시오.”


 원형극장을 완전히 새로 짓는 데에는 30년 이상이 걸렸다. 재건축을 시작한 황제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였다. 철학자 황제로 널리 알려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아니었다. 그의 아들인 코모두스가 죽고 발생한 내전에서 최종 승리를 거두고 집권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처조카인 엘라가발루스였다. 시리아의 제사장 출신이었던 그가 황제로 취임한 뒤 얻은 공식이름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였다. 


 새 원형극장 봉헌식은 222년 엘라가발루스의 사촌동생인 알렉산데르 황제 시대에 열렸다. 공사가 끝난 상태는 아니었지만, 원형극장에서 검투사경기를 열어 달라는 요구가 빗발쳐 할 수 없이 서둘러 임시 개장한 것이었다. 


 공사가 완전히 끝난 것은 240년 고르디아누스 3세 때였다. 당시 발행한 동전에 완공 사실이 담겨 있다. 그는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뒤 성대한 개선식을 열었다. 또 승리를 축하하는 검투사경기와 동물사냥을 새로 개장한 원형극장에서 개최했다. 당시 행사에는 코끼리 32마리, 엘크 사슴 10마리, 호랑이 10마리, 사자 60마리, 표범 30마리, 하이에나와 곰, 기린 10마리, 물개 6마리, 코뿔소 1마리 등이 동원됐고, 검투사는 2천 명이 출전했다.




무누스와 글라디아토르



 다시 콜로세움을 개장한 티투스 황제 시대로 돌아가 보자. 티투스 황제는 궁지에 몰려 있었다. 그가 황제가 된 79년에는 베수비오 화산의 대폭발로 로마 남부에 있던 대도시 폼페이가 매몰돼 버렸다. 이듬해에는 엄청난 대화재가 로마에서 일어나 판테온, 유피테르 신전 등 많은 건물이 큰 피해를 입었다. 


 그때 콜로세움이 완공됐다는 소식이 티투스 황제에게 전해졌다. 그는 연이은 참사로 의기소침해진 로마인을 위무하기 위해 새로 문을 연 콜로세움에서 성대한 무누스를 열기로 했다.


 “콜로세움 개장 기념행사로 초대형 무누스를 개최합시다.”


 “무누스요?”

 “그렇소. 무누스를 100일 동안 개최하는 거요. 코끼리, 물소, 사자 등 각종 동물은 물론 검투사도 수천 명을 투입하도록 합시다. 앞으로 석 달 열흘 동안 로마를 온통 축제의 난장판으로 만드는 거지. 그렇게 해서 시민들이 베수비오 화산 폭발과 대화재의 충격에서 벗어나게 하는 거요.”


 며칠 후 로마인은 시내 어디를 가든지 이런 내용을 담은 공고문을 볼 수 있었다.


 ‘티투스 황제께서 사상 최대 규모 무누스를 거행하신다. △일시/모월 모일 모시 △대회 기간/100일 △장소/콜로세움 △목적/베스파시아누스 선황과 티투스 황제께서 건설하신 콜로세움 원형경기장 개장을 축하하고 각종 재난에 시달린 백성들을 격려한다 △규모/검투사 수천 명, 코끼리·물소·사자·표범 등 야생동물 1만여 마리 △입장료/공짜 △경품/음식, 음료수, 과자 무료 제공 및 금화 배포.’


 100일 동안 콜로세움 개장 기념 무누스가 열린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로마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연이은 대형사건으로 의기소침해 있던 로마인은 오랜만의 반가운 소식에 흥분했다. 



 무누스 또는 무네라의 원래 뜻은 의무였다. 처음에는 고위층이나 부자가 시민을 위로하기 위해 펼치는 각종 공공사업이나 공연 등을 일컫는 말이었다. 무누스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검투사경기였기 때문에 나중에는 검투사경기를 가리키는 말로 의미가 좁혀졌다. 검투사는 글라디아토르라고 불렀다. 고대 로마 보병이 주로 썼던 짧은 검을 뜻하는 글라디우스에서 나온 이름이었다. 


 콜로세움 개장 기념행사에 관중이 몇 명이나 들어갔는지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는 않다. 역사학자들은 관중석 규모로 볼 때 한 번에 최대 5만~8만 명을 수용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속주 총독을 지내기도 했던 1~2세기 로마 역사학자 카시우스 디오 등이 남긴 기록을 통해 콜로세움 개장 기념 무누스의 규모를 살펴보면 100일 동안 진행된 행사에서 희생된 동물은 무려 9천 마리를 넘었다.


 그 때 죽은 검투사가 몇 명이었는지 기록도 남아 있지 않지만 역사학자들은 적어도 수백 명은 되리라고 추정한다. ‘콜로세움에서 열린 각종 축제에서 숨진 검투사가 2천 명이 넘는다’는 다른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콜로세움 개장 기념 무누스에서는 그보다 더 많은 검투사가 목숨을 잃었을 것으로 분석해볼 수 있다.


 콜로세움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검투사경기가 언제, 어디에서 처음 시작됐는지 아무도 모른다. 아직 정설은 없고, 여러 가지 가설만 난무한다. BC 1세기 다마스쿠스 출신인 그리스 역사학자 니콜라우스는 이렇게 주장했다.


 ‘이탈리아 북부 토스카나의 에트루리아가 검투사의 발생지다.’


 에트루리아에서는 사람을 죽여 무덤에 함께 넣는 순장처럼 장례식 때 포로나 노예를 죽이는 풍습이 있었다. 이것이 검투사경기의 기원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반면  BC 1세기~서기 1세기 로마 역사학자 티투스 리비우스는 『로마사』에 이런 기록을 남겼다.


 ‘이탈리아 남부 캄파니아 지역 사람이 삼니움족과의 전투에서 이긴 뒤 축하 행사로 검투사경기를 시작했다.’


 가장 먼저 생겨난 것으로 알려진 검투사 학교가 캄파니아 지역에 있었다는 게 이를 입증하는 증거라고 한다. 캄파니아 지역 도시인 파에스툼의 무덤에서 발견된 벽화를 보면 투구를 쓰고 창과 방패를 든 검투사 2명이 등장한다.

 이렇게 여러 주장이 있지만, 어쨌거나 검투사경기가 로마에서 처음 생긴 게 아니고 수입품이라는 데에는 의견이 일치한다. 


 로마에서 벌어진 첫 검투사경기는 BC 264년이었다고 기록돼 있다. 1세기 무렵 로마 학자였던 발레리우스 막시무스가 쓴 『회상록』에 그런 내용이 나온다.


 ‘마르쿠스 브루투스와 데키무스 브루투스 형제가 카르타고와의 포에니 전쟁에서 숨진 아버지를 기념하기 위해 검투사 3개조로 하여금 가축시장인 포룸 보아리움에서 경기를 벌이게 했다.’


 BC 3세기 무렵에 치러진 검투사경기와 관련해 다른 기록들도 남아 있다.


 ‘BC 216년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의 여러 아들이 별세한 아버지를 기리며 포로 로마노에서 사흘 동안 검투사 22명을 동원했다.’


 ‘BC 218년 포에니 전쟁을 로마의 승리로 이끈 영웅인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전쟁에서 숨진 아버지, 삼촌과 다른 희생자를 기리면서 검투사경기를 열었다.’ 


 검투사경기는 처음에는 공공 장례식에서만 진행됐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면서 정치적, 사회적으로 중요하거나 재산이 많은 사람의 개인 장례식에서도 거행하게 됐다. 나중에는 여자 장례식에서도 검투사경기를 열었다. 자식을 두지 못하고 죽은 사람은 미리 유언장에 ‘검투사경기를 치러 달라’고 적은 뒤 행사를 거행할 수 있도록 재산을 남기기도 했다.


 로마인은 왜 장례식에서 사람이 죽어 나가는 끔찍한 검투사경기를 진행한 것일까? 그것은 로마인의 사후세계관 때문이었다. 그들은 순장 문화를 도입하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믿었다.


 “고인을 저승까지 동행해줄 사람이 있으면 신을 기쁘게 해 고인이 사후세계에서 편안히 지낼 수 있다.”


 그래서 무네라토르(검투사경기 주최자)와 검투사는 행사에 앞서 이렇게 맹세를 했다.


 “검투사경기를 신과 죽은 사람의 영혼에 공물로 바칩니다.”


 “신에게 저의 목숨을 바칩니다.”


 나중에 기독교는 이런 기록을 거론하면서 검투사경기를 인신공양이라고 매우 비난했다. 하지만 당시 로마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검투사경기를 하다 보면 사람이 죽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


검투사경기를 화려하게 치르면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가문의 위세를 보일 수 있었다는 점도 이유 중 하나였다.  


정치적 성공을 꿈꾼 일부 원로원 의원은 부친 장례식을 집정관 선거 시기에 맞춰 여러 달씩 늦추기도 했다. 장례식 때 검투사경기를 화려하고 성공적으로 진행하면 능력이 있다는 평가를 받아 선거에서 표를 얻는 데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검투사경기 같은 대형 이벤트를 잘 치르는 것도 정치인이 가지고 있어야 할 능력이지.”


 세월이 흘러 나중에는 검투사경기는 장례식에서뿐만 아니라 로마의 신을 모시는 제사나 축제에서도 진행됐다. 신에게 동물을 희생물로 바치듯 인간의 피를 제물로 바친다는 의미를 담은 것이었다. 로마인은 이렇게 생각했다.


 “피를 바쳐야 로마의 평안을 유지하고, 뜻하지 않은 불행이 로마를 덮치는 것을 피할 수 있지요. 만약 불행한 일이 닥치더라도 서둘러 마무리 지을 수 있답니다.”  


 로마 정부가 여러 가지 이유로 공식적으로 검투사경기를 진행하기도 했다. BC 105년 집정관이 카푸아에서 수입해온 검투사를 동원해 행사를 연 게 정부 차원의 첫 검투사경기였다. 


 정치적 야심을 품고 있는 사람은 인기를 높이기 위해 사비를 들여 검투사경기를 열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그는 BC 65년 엄청난 규모의 검투사경기를 기획했다. 검투사 320개 조가 출전하는 대회였다. 그는 더 많은 검투사를 동원하려 했지만 원로원의 반대에 부딪혔다. 


 “그렇게 엄청난 행사를 치르면 카이사르의 인기가 폭발할 거요. 행사를 허가해서는 안 됩니다.” 


 검투사경기의 인기가 높아지고 이 행사를 열어야 정치인의 지지도가 올라가는 현상이 반복되는 바람에 돈을 너무 많이 써 파산하는 사람까지 생겨났다. 이 때문에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행사 규모나 개최 비용에 제한을 두는 조항을 사치금지법에 넣기도 했다. 


 그러나 시민에게 검투사경기를 보여줘야 황제의 인기도 지속되기 때문에 아우구스투스 이후 즉위한 황제들은 검투사경기를 계속 열 수밖에 없었다. 다키아 전쟁을 승리로 이끈 트라야누스 황제가 단적인 사례였다. 그는 황제로 즉위한 직후 벌어진 다키아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것을 기념하기 위해 검투사경기를 무려 123일 동안이나 열었다. 이때 동원된 검투사는 다키아 포로를 포함해 자그마치 1만 명에 이르렀다. 


 콜로세움에서 검투사경기가 열리면 황제도 관람했다. 시민에게 얼굴을 보임으로써 인기를 높이기 위해서였다. 물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처럼 검투사경기를 좋아하지 않는 황제도 있었다. 거꾸로 클라우디우스, 티투스처럼 검투사경기를 무척 사랑했던 황제도 있었다. 그들은 황제라는 자리에 필요한 체면은 생각하지 않고 경기 도중 검투사나 관중에게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제대로 찌르란 말이야! 밥 먹고 훈련도 제대로 안 했느냐?”


 검투사경기에는 황제 외에 최고제사장인 폰티펙스 막시무스와 성스러운 불을 지키는 여사제인 베스탈도 참석했다. 위에서도 설명했듯이 검투사경기는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로마 최고의 신인 유피테르는 물론 여러 신에게 피를 바친다는 종교적 의미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검투사는 주로 전쟁포로, 노예, 죄수로 이뤄졌다. 돈을 벌기 위해 직업으로 선택한 자유민이나 사형선고를 받은 범죄자도 적지 않았다. 성적이 좋으면 1년 이후에 풀려나는 사람도 있었지만 성적에 관계없이 목숨을 잃은 범죄자도 있었다. 검투사는 루디라는 학교에 갇혀 라니스타에라는 조교로부터 싸우는 기술을 배웠다. 


 때로는 여성과 어린이, 장애인도 검투사로 동원됐다. 이들을 경기장에 올린 사람 중 하나는 네로 황제였다. 그는 왕관을 수여받기 위해 로마를 방문한 아르메니아 왕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겠다며 이런 이벤트를 기획했다.


 여성 검투사는 다른 행사에도 동원됐다. 주로 평민 부자가 개인적으로 주최하는 소규모 행사였다. 여성 검투사가 난장이와 경기를 벌였다는 기록도 있다. 일부 역사학자는 ‘이들이 참여한 경기는 메인이벤트에 앞서 관중을 웃기려고 열었다’고 주장한다. 


 황제가 직접 검투사경기에 직접 참여해 칼을 휘두르는 경우도 있었다. 칼리굴라, 티투스, 하드리아누스, 코모두스 등이었다. 물론 황제는 죽는 것은 물론 다칠 일도 전혀 없을 정도로 미리 대비를 해놓고 경기에 참가했다. 


 


 313년 밀라노 칙령을 선포해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잔인한 검투사경기를 더 이상 거행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로마인은 여기에 강하게 반발했다. 일상생활에서 가장 큰 활력을 주는 오락거리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래서 황제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검투사경기는 중단되지 않았다.


 검투사경기는 이후에도 쭉 이어지다 콘스탄티누스의 금지 명령 이후 거의 100년이 지난 407년에야 비로소 중단됐다. 이런 결정을 내린 사람은 호노리우스 황제였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텔레마쿠스라는 소아시아 출신 수도사의 순교에 감동을 받아 검투사경기 금지를 결정했다. 


 19세기 스위스 출신 역사학자 필립 샤프가 5세기 그리스 신학자였던 테오도레트의 글 일부를 번역해 실은 『니케아 공의회와 이후 시대의 사제들』에 텔레마쿠스 전설이 나온다. 이 전설 말고는 왜 호노리우스가 검투사경기를 금지시켰는지를 알려주는 사료는 남아 있지 않다.


 역사학자들은 텔라마쿠스가 검투사경기 금지의 단초를 제공한 사실은 받아들일 수 있지만, 그가 순교한 곳이 과연 콜로세움이었는지에는 의문을 제기한다. 다음은 텔레마쿠스 전설의 내용이다.


 ‘텔레마쿠스는 수도원에서 묵상에 전념하던 중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로마에 갔다. 그는 신의 뜻에 따라 들어간 콜로세움에서 검투사끼리 끔찍한 살육전을 벌이는 것을 목격했다. 기독교도인 관중은 살인 장면을 보고 환호하고 있었다. 깜짝 놀란 텔레마쿠스는 아레나로 뛰어 내려갔다. 그는 검투사경기를 그만 두라고 호소했다.

 

 “기독교도가 재미를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것입니다.” 


 검투사경기에 푹 빠져있던 관중은 갑자기 나타난 텔레마쿠스가 즐거움을 방해하고 있다며 분노했다. 수만 명의 관중이 동시에 돌을 던졌다. 텔레마쿠스는 돌에 맞아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다. 경기를 지켜보던 호노리우스 황제는 깜짝 놀랐다. 그는 이렇게 선언했다. 


 “앞으로는 로마에서 검투사경기를 열지 못한다.”’ 

 

  


지진교회그리고 세월



 콜로세움은 외벽 부분이 상당히 훼손된 처참한 모습을 하고 있다. 안으로 들어가 봐도 사정은 비슷하다. 관중석은 물론 과거 검투사경기 등이 열렸던 아레나도 부서져 있다. 검투사와 동물의 이동 통로로 사용됐던 지하 공간 히포지움도 파괴되기는 마찬가지다. 역사학자들은 이렇게 설명한다.


 ‘현재 콜로세움은 원래 모습에서 3분의 2 가량이 사라졌고, 3분의 1 정도만 남아 있다.’ 


 비극적이고 슬픈 비교이기는 하지만, 콜로세움은 인근에 있는 포로 로마노에 비하면 운이 좋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 포로 로마노를 보자. 대부분 건축물은 사라졌고, 겨우 기둥만 몇 개 남아있다. 거기에 비하면 콜로세움은 멀쩡한 편이다. 보기 흉하게 훼손되기는 했지만 완전히 붕괴되지는 않았다. 그런대로 과거의 위용을 보여주고 있다.


 콜로세움과 포로 로마노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정답은 기독교다. 포로 로마노에는 기독교도가 이교도로 여겼던 여러 로마 신을 모신 신전이 즐비했다. 반면 콜로세움은 신전이 아니었다. 단순히 로마인에게 오락을 제공하던 경기장이었다. 오늘날로 치면 초대형 이종격투기 경기장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콜로세움은 매우 운이 좋았다. 중세 및 르네상스 시대에 포로 로마노처럼 교회나 귀족이 짓는 건축물의 채석장으로 전락했지만, 결정적인 시기에 기독교 순교의 성소로 선언돼 기독교의 보호를 받게 된 것이다. 오늘날에는 이것이 기독교의 오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콜로세움은 오해 때문에  목숨을 건진 셈이다. 


로마 멸망~중세의 콜로세움


 로마 멸망 직전부터 중세까지 콜로세움은 온갖 희한한 일을 다 겪었다. 야생동물의 보금자리, 공동묘지가 되기도 했으며 중세시대 로마의 권력을 다투던 귀족의 성이나 궁전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교회, 궁전을 짓는 데 사용되는 자재를 조달하는 채석장으로 전락하기도 했다. 


 로마 멸망의 전조였던 410년 제1차 로마 약탈 때의 일이었다. 알라리크가 이끄는 서고트족이 로마를 포위했다. 포위는 408~410년 두 해 동안 이어졌다. 많은 로마인이 병에 걸리거나 굶주려 목숨을 잃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죽은 사람의 시신을 시내에 묻지 못하게 하는 법이 철저하게 지켜지고 있었다. 하지만 서고트족에 포위당한 상황이어서 시신을 성벽 밖으로 가지고 나가 묻을 방법이 없었다. 로마인은 콜로세움으로 눈을 돌렸다.

 

 “시신을 각 가정이나 길거리에 버려둘 수는 없습니다. 적당한 장소를 찾아야 합니다.”


 “당분간 콜로세움 안에 시신을 묻거나 그 인근에 버리도록 합시다.”


 콜로세움 아레나는 완전히 공동묘지로 바뀌었다. 지금은 무덤이 모두 철거돼 하나도 남아있지 않지만, 중세까지만 해도 곳곳에 묘지가 있었다. 


 뜻밖에 로마가 멸망한 이후에도 콜로세움은 로마인의 사랑을 받았다. 484년 또는 508년 로마 시장 데키우스 마리우스 베난티우스 바실리우스는 자비를 들여 지진으로 부서진 콜로세움 보수 공사를 진행했다. 오랜만에 펼쳐진 복구공사는 당연히 로마인 사이에 엄청난 화제를 모았을 것이다. 


 “로마가 멸망했는데 어떻게 로마 시장이 존재할 수 있죠?”


 이렇게 의문을 가질 수 있다. 로마의 멸망은 로마에서 황제 제도가 사라진 것을 의미했다. 이후에는 야만족 출신인 오도아케르와 테오도리크가 왕이 돼 이탈리아를 다스렸기 때문에 사람이 사는 데에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지배자가 바뀐 것만 빼면 나머지는 모든 게 이전보다 잘 돌아갔다. 검투사경기는 사라졌지만, 콜로세움에서 동물사냥 경기는 여전히 이어졌다. 기록이 이를 입증한다. 


 ‘519년 에우타리쿠스 킬리카, 523년 아니키우스 막시무스가 콜로세움에서 마지막으로 동물사냥 경기를 거행했다.’ 


 두 사람 모두 집정관 취임을 축하하기 위해 행사를 열었다. 그 이전에도 이런 행사가 수시로 벌어졌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는 기록이다.


 오도아케르, 테오도리크가 죽은 뒤, 토틸라의 동고트족과 동로마제국이 이탈리아 지배권을 놓고 다툰 이른바 고트전쟁(535~553년) 이후에는 사정이 달라졌다. 동고트족이 545년 로마에 쳐들어갔을 때 로마인 대부분은 달아나고 남아있던 사람은 고작 500여 명이었다. 


 “쇠로 만든 것은 무엇이든지 뜯어내도록 하라.”


 동고트족은 콜로세움에서 석회암 벽돌을 서로 연결하던 금속 고리를 모두 뜯어갔다. 금속을 녹여 무기로 쓰기 위해서였다. 금속 고리가 수십~수백 개에 불과했다면 굳이 뜯어낼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고리의 수와 양이 엄청난 규모였기 때문에 많은 병사를 동원해 수거 작업에 동원했던 것이다. 오늘날 콜로세움에 가보면 곳곳에 못을 박았다 뽑은 것 같은 구멍을 쉽게 볼 수 있다. 동고트족이 뽑아간 금속 고리 흔적이다.


 동고트족이 빠져나간 뒤 로마인 일부가 돌아왔지만 전성기에는 100만 명 이상이었던 로마 인구는 9만 명 정도로 줄었다. 그나마 대다수 주민은 수로가 파괴돼 식수를 구할 수 없는 로마 시내에 살지 않고 물을 얻을 수 있는 테베레 강 근처 마르스 평원에 모여 살았다.


 콜로세움은 테베레 강에서 제법 멀었기 때문에 사람의 발걸음이 뚝 끊어졌다. 그래서 콜로세움에는 온갖 잡초와 나무만 우거져 늑대나 여우같은 야생동물이 들어와 살게 됐다. 한때 수천 마리의 동물을 사냥하는 경기가 열리던 곳이 야생동물의 집으로 바뀐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얘야! 콜로세움 밖에 나가서 뛰어놀렴. 먼지가 너무 많이 생기잖니!”


 세월이 흐르면서 콜로세움에 들어가 사는 사람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했다. 9~10세기 무렵에는 콜로세움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복도 공간은 물론 1~2층에까지 가게와 집이 들어섰다. 콜로세움에 있던 가게, 집을 사고 판 공증문서가 발견되기도 했다. 지금도 콜로세움 2층에 가면 당시 집이 있었던 흔적을 볼 수 있다. 


 11세기 무렵에는 콜로세움에 들어선 집을 셀 수 없을 정도였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그곳에 들어가 살았던 사람은 가난한 예술가, 금속 세공인, 구두 수선공, 벽돌공, 마차 제작인, 석회 제조공 등이었다.


 “이 금을 이탈리아 화폐로 바꾸어 주시오.”


 특이하게도 이 시기에는 콜로세움 안팎에 환전상도 적지 않았다. 콜로세움 인근에 있던 라테라노 대성당에 순례자가 몰렸기 때문이었다. 교황이 거주하는 라테라노 대성당을 평생에 한 번이라도 찾아가는 것은 당시 기독교도라면 반드시 지켜야 하는 선행 중 하나였다.


 12세기 초 로마에서 권력을 장악한 프랑기파니 가문은 콜로세움을 점거한 뒤 주변을 보강해 성으로 사용했다. 콜로세움 안에 궁전을 짓기도 했다. 다른 가문은 기껏해야 로마 곳곳에 탑을 세워놓고 그곳에 틀어박혀 살면서 안전을 지키는 게 고작이었던 시대에 웅장한 콜로세움을 차지했다는 것은 군사적, 정치적으로 매우 유리했다.


 로마에서는 안전을 확보할 수 없었던 일부 평민도 프랑기파니 가문의 허가를 받아 콜로세움에 들어가 살았다. 프랑기파니 가문 입장에서는 병력이 늘어나는 셈이니 말릴 이유가 없었다.


 “성하, 우리가 교황청을 지켜드리지요. 우리 가문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세력은 이탈리아에는 없습니다.”


 콜로세움을 확보하고 있으면 당시 콜로세움에서 가까운 라테라노 대성당에 거주하던 교황에게 큰 압박을 줄 수도 있었다. 프랑기파니 가문은 이를 바탕으로 교황 호노리오 2세(재임 1124~30년)의 선출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대 그레고리오가 시작한 파괴의 관행


 콜로세움은 수시로 발생한 지진 때문에 타격을 입었다. 로마가 멸망할 무렵부터 시작해 지진이 발생한 상황을 살펴보면 429년, 443년, 477년, 508년, 847년, 1231년, 1349년, 1703년 등 무려 20여 차례에 이르렀다. 508년에는 아레나가 붕괴했고, 1349년에는 남쪽 외벽이 쓰러졌다. 1703년에는 동쪽 부분이 피해를 입었다.


 그래도 콜로세움이 완전히 무너지지 않은 것은 처음에 건설할 때 지진에 대비해 6m 깊이로 땅을 파고 콘크리트를 쏟아 부어 기초를 튼튼하게 다진 덕분이었다. 


 지진이 입힌 피해는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했다. 이런 정도로는 콜로세움이 오늘날처럼 망가진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결정적인 파괴자는 교회였다. 당시 교회는 문화재 보호라는 개념을 갖고 있지 않았다. 게다가 새 건물을 지을 때 먼 산의 채석장에서 대리석 같은 석재를 가져온다는 건 어지간히 힘든 일이 아니었다. 교회가 눈길을 돌린 곳은 포로 로마노와 콜로세움 등의 고대 로마 건축물이었다. 그들은 오랜 세월을 두고 콜로세움을 야금야금 파먹어 들어갔다. 


 교회가 콜로세움의 석재를 가져다 쓴 것은 로마 멸망 직후부터였다. 처음에는 콜로세움에서 억지로 뜯어간 것은 아니었다. 지진 때문에 떨어진 석재를 가져가는 정도였다. 당시에는 지진으로 콜로세움에 피해가 생기면 보수공사를 실시할 힘이 조금은 남아 있었다. 위에서 설명한 데키우스의 복구공사가 좋은 사례다. 


 이때의 공사는 제정시대처럼 콜로세움을 완벽하게 원래 모습으로 되돌리는 게 아니었다. 경기를 치를 수 있을 정도로 무너진 부분을 치워놓는 수준이었다. 콜로세움 안팎에는 지진으로 부서지거나 무너진 석재가 널려 있었다. 


 “콜로세움 석재 부스러기를 좀 가져간다고 문제가 되지는 않겠지요?” 


 “그래도 주민들 눈치가 보이니 밤에 조심해서 가져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교회가 본격적으로 콜로세움의 석재를 뜯어가기 시작한 것은 590~604년 교황이었던 대 그레고리오 1세 때부터였다. 그는 새로운 교회를 건설하기 위해 고대 로마의 신전, 바실리카와 콜로세움을 재활용하는 관행을 맨 처음 도입한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는 인물이다.


 근대에 실시된 콜로세움 발굴조사에서 ‘GERONTI V S’라고 새겨진 기둥이 발견됐다. ‘존경하는 게론티우스’라는 뜻이었다. 대 그레고리오 1세로부터 콜로세움을 채석장으로 사용하도록 허가받은 사람의 이름으로 추정된다.


 현대 교회는 콜로세움을 기독교도가 처형당하거나 야수에게 잡아먹히는 방법으로 순교한 성소라고 믿고 있다. 지금 콜로세움에 들어가 보면 곳곳에 십자가가 세워져 있거나 기둥에 새겨져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런데 왜 대 그레고리오 1세는 이렇게 중요한 콜로세움을 지키지 않고 마치 ‘고대 로마인이 야수에게 기독교도를 내팽개치듯’ 도급업자의 먹이로 던져줬던 것일까?


 대 그레고리오 1세의 아버지는 로마 시장을 지낸 사람이었고, 고조부는 483~92년 교황이었던 펠릭스 3세였다. 그의 가문은 대대로 로마에서 유명한 원로원 집안이었다. 그는 로마에서 태어나 평생 로마에서 산 토박이였다. 집은 콜로세움을 내려다보는 첼리오 언덕에 있었다. 어릴 때부터 매일 잠에서 깨자마자 콜로세움을 봤거나 그 인근에서 놀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는 콜로세움이 어떤 곳인지, 어떤 역사를 갖고 있는지 잘 알았을 것이다. 


 519년 에우타리쿠스, 523년 아니키우스가 마지막으로 동물사냥 행사를 콜로세움에서 거행할 때 이탈리아 왕은 동고트족 지도자 테오도리크였다. 그는 이 행사를 ‘옛날의 혐오스럽고 비참한 경기’라고 하거나 ‘죽은 사람을 축복하기 위해 지은 건물에 그렇게 많은 돈을 쏟아 부은 티투스’라고 비난했다. 콜로세움을 지은 이유가 무엇이고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평생 공부를 한 적이 없는 테오도리크는 글을 읽을 줄 몰랐다. 그렇다면 로마에 갔다가 콜로세움 역사를 잘 아는 누군가에게서 이야기를 듣고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게 됐을 것이다. 로마인이 야만족이라고 불렀던 테오도리크도 알고 있던 콜로세움의 역사를 로마 명문 가문의 후손인 대 그레고리오 1세가 몰랐다고 생각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3세기 말 가이우스 데키우스 황제가 로마의 신에게 경배를 보이기를 거부한 여러 기독교도를 처형한 일이 있었다. 희생자 중에는 당시 로마 주교였던 파비아누스와 나중에 시성된 이레네우스, 아분디우스, 폴리크로니우스 등이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이들이 사망한 장소는 감옥이었다. 그런데도 이들이 콜로세움에서 순교했고 시신은 콜로세움과 메타 수단스 사이에 버려졌다는 전설이 생겨났다. 15세기에는 이들을 기리는 작은 교회도 만들어졌다. 


 파비아누스가 콜로세움에서 순교한 전설이 대 그레고리에 시대에도 퍼져 있었다면 교황은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대 그레고리오 1세는 콜로세움을 훼손시키는 사업에 도장을 찍어주었다. 왜 그랬을까?


 대 그레고리오 1세는 콜로세움에서 기독교 순교가 벌어졌다는 역사나 전설을 몰랐거나, 그런 역사나 전설이 없었다고 생각한 게 아니었을까? 파비아누스의 콜로세움 순교 전설이, 콜로세움을 순교의 성소라고 여기는 인식이 당시 교회에는 아예 없었던 게 아닐까?


 대 그레고리오 1세 이후 여러 교황은 많은 도급업자에게 콜로세움 석재 채취 허가를 내주었다. 물론 공짜는 아니었다. 충분한 보상이 교황에게 넘어갔다. 도급업자로서는 건축 공사에 쓸 석재를 가장 싼 가격에 공급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콜로세움이었다. 


교황의 귀국과 르네상스


 콜로세움이 교회 때문에 심각하게 파괴되기 시작한 것은 14세기부터였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9~12세기 콜로세움에는 범죄자는 물론 여러 부류의 로마인이 들어가 살았다. 프랑기파니 가문이 성으로 사용하면서 궁전을 짓기도 했다. 교황이 프랑스 아비뇽에 갇혀 있을 때에는 로마 자치당국이 콜로세움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사정이 조금 나았지만, 교황이 14세기 후반 아비뇽에서 돌아와 로마를 교황의 지위에 걸맞은 도시로 만들기로 작정한 이후부터 상황은 달라졌다. 인터넷 기독교사이트 뉴 애드번트는 이렇게 지적했다.


 ‘14세기 이후 400년 동안 콜로세움의 서쪽 부분을 구성하고 있던 엄청난 석재는 로마의 채석장 역할을 했다. 다른 건물은 물론 콜로세움 근처에 세워진 교회 네 곳은 이곳에서 뜯어간 석재로 공사를 했다.’ 


 오르비에토의 주교였던 길 알바레스 카리요 데 알보르노스가 1362년 아비뇽에서 돌아와 로마에 머물고 있던 교황 우르바노 5세(재임 1362~70년)에게 보낸 편지가 남아 있다. 당시 시대 상황을 잘 보여주는 내용이다.


 ‘요즘 콜로세움 석재를 사려는 사람이 없어 큰일입니다. 프랑기파니 가문만 궁전을 지으려고 콜로세움 대리석을 주문했습니다.’


 교황 우르바노 6세(재임 1378~89년)는 1386년 ‘산크타 산크토룸의 구원 대형제회’라는 종교 단체에게 콜로세움에 들어가 프랑기파니 가문의 궁전을 차지하라고 했다. 이 단체는 라테라노 대성당 인근의 학교, 병원을 후원하던 기독교 열성 신도 및 지역 유지 모임이었다. 대형제회가 차지한 면적은 콜로세움 전체의 3분의 1 정도였다. 대형제회 외에 교황청의 재정 담당 부서인 카메라 아포스텔리카와 로마 의회가 각각 3분의 1을 차지했다. 


 대형제회가 콜로세움에서 수익사업으로 진행한 일은 석재 판매업이었다. 이 단체는 교황으로부터 콜로세움에서 뜯어낸 석재를 독점적으로 판매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았다. 200여 년 뒤인 1606년에는 판매권을 갱신하기도 했다. 다른 도급업자도 콜로세움에 손을 댔다. 19세기 프랑스 역사학자 외젠 뮌츠가 로마에서 발견한 1452년의 공식 문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코모 출신의 지오반니 포글리아라는 도급업자는 라테라노 대성당 공사장에 납품하려고 마차 2천522대 분량의 석재를 콜로세움에서 뜯어갔다.’


 물론 포글리아 혼자 뜯어간 게 이 정도였고, 다른 업자가 훔쳐간 석재의 규모가 얼마인지는 알 수 없다. 이런 기록도 있다.


 ‘16세기 중반 교황 바오로 3세(재임 1534~49년)는 조카였던 추기경 파르네세에게 특정한 날을 정해 열두 시간 동안 원하는 만큼 콜로세움의 석재를 뜯어가도 된다는 허가권을 내주었다. 그는 또 조카의 측근 4천 명에게도 똑같은 특권을 나눠주었다.’ 


 피렌체에서 시작한 르네상스가 로마에 퍼지면서 콜로세움의 상황은 더 나빠졌다. 르네상스 시기의 교회는 물론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 거장들은 고대 그리스, 로마 문화를 숭배하면서도 당시의 대표적 건축물이었던 콜로세움은 물론 포로 로마노의 신전, 바실리카를 부수는 일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교회가 콜로세움에서 뜯어간 석재로 건설해 지금까지 남아 있는 르네상스 건축물은 책 한 권을 채우고도 남을 정도다. 그 중 주요한 곳을 간단하게 살펴보면 이렇다. 


 1455~67년 교황 바오로 2세가 오늘날 베네치아 광장에 건축해 베니스에 매각한 베네치아 궁전, 4세기에 처음 건설했지만 1455~71년 추기경 바르보가 새로 짓다시피 한 베네치아 궁전 옆의 산 마르코 성당, 1585~90년 라테라노 대성당 옆에 만든 예배당인 라 스칼라 산크타, 1439년에 지은 라테라노 대성당의 설교단, 15세기 초 건설됐고 미켈란젤로가 16세기 중반에 재정비한 캄피돌리오 광장의 콘세르바토리 궁전, 나보나 광장에서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 거리를 건너면 보이는 칸첼레리아 궁전(1485~1513년), 여기서 테베레강쪽으로 조금만 가면 나오는 파르네세 궁전. 




기독교의 오해



 르네상스 시대에 콜로세움을 채석장으로 사용하게 계속 놔뒀다면 오늘날 우리는 로마에서 콜로세움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기적 같고, 어떻게 보면 다소 엉뚱한 일이 벌어졌다. 15세기 들어 여러 인문주의 학자가 로마는 물론 그리스, 비잔틴제국 등에서 발견한 책을 연구한 덕에 새로운 주장이 퍼지기 시작했다. 


 “콜로세움은 로마 시대에 기독교도가 순교한 성소였다.”


 7~8세기에 퍼진 이야기라면서 콜로세움에서의 순교를 다룬 전설도 나돌기 시작했다. 이 덕분에 콜로세움을 경배하는 분위기가 생겨났고, 콜로세움에서 각종 행사가 열리기도 했다. ‘구세주의 성체와 산크타 산크토룸의 형제단’이라는 종교단체는 1490~1539년 콜로세움에서 ‘예수의 수난’을 주제로 해마다 연극을 공연했다. 간단하게 델 콘팔로네라고 불린 이 단체가 연극을 진행한 것은 콜로세움을 기독교도가 대량 순교한 성소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연극이 공연될 때마다 수천 명이 콜로세움에 몰려 눈물로 연극을 지켜봤다. 이 행사는 1539년 폐지되고 말았다. 연극이 유대인을 향한 증오심을 과도하게 부추긴데다 연극이 열릴 때마다 콜로세움에서 각종 범죄가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1566~72년의 교황 성 비오 5세가 순교자의 유해를 갖고 싶어 하는 기독교도에게 이렇게 권하기도 했다.


 “콜로세움 아레나의 모래를 가져가시오. 이 모래는 순교자의 피로 얼룩진 것이오.”


 교황으로서는 처음 콜로세움을 기독교 순교의 성소로 인정한 발언이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교회에서는 견해가 엇갈렸다. 콜로세움을 순교 성소로 봐야하는지를 두고 합의된 의견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비오 5세 이후의 일부 교황은 이 문제에 눈을 감고 모른척하는 게 경제적으로 더 이익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콜로세움에서 석재를 채취하도록 계속 허가를 내주었다. 심지어 1585~90년 교황 식스토 5세는 콜로세움을 모직공장으로 바꿀 계획을 세웠다. 


 “로마의 영혼을 더럽히는 존재인 매춘부를 직원으로 취직시켜 먹고 살 수 있는 일자리를 만들어주면 로마를 정화할 수 있습니다.”


 식스토 5세는 건축가 도메티코 폰타나에게 아레나에 공장을 짓고 관중석 2~3층에는 기숙사를 건설하는 설계안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교황이 일찌감치 세상을 뜨는 바람에 계획은 없었던 일이 됐다. 


 1671년에는 추기경 알티에리가 콜로세움을 순교 성소로 숭배하는 주장을 일축하면서 콜로세움을 투우장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를 내주었다. 그로서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인터넷 기독교 사이트 ‘뉴 애드번트’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알티에리가 살던 때로부터 300여 년 전이던 1332년 콜로세움 아레나에서 투우 경기가 열렸다. 당시 귀족 청년 18명이 소와 싸우다 목숨을 잃었다.’


 역사학자들은 근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이 기록을 높이 신뢰하지 않지만, 이게 사실이라면 알티에리의 시대에도 콜로세움에서 투우 경기가 비공식적으로 진행되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로마 시민 들의 반대로 투우장은 실제 만들어지지 않았다.


 알티에리의 계획에 앞장서 반대한 사람은 같은 시대 로마 지도층 인사였던 카를로 토마시였다. 그는 투우장 허가 소식을 듣고는 곧바로 ‘콜로세움의 신성성을 해치는 개발 행위를 막아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소책자를 만들어 로마에 뿌렸다. 그의 글은 당시 로마인에게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토마시의 글에 큰 감동을 받은 교황 클레멘스 10세(재임 1670~76년)는 기독교의 ‘성년(聖年)’이던 1675년 콜로세움을 성소로 선포한 뒤 그곳에 살고 있던 빈민, 부랑인을 모두 내쫓고 문을 잠가버렸다. 성년은 1300년 보니파시오 8세(재임 1294~1303년)가 도입한 제도였다. 50년마다 돌아오는 성스러운 해를 의미했다.


 클레멘스 10세는 또 콜로세움에서 목숨을 잃은 순교자를 기리기 위한 교회를 아레나에 건설하기로 했다. 그는 당대 최고 건축가 지안 로렌조 베르니니에게 계획안을 만들어보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자금이 턱없이 부족해 착공은커녕 계획안조차 완성하지 못했다. 교황은 콜로세움에 십자가를 하나 만들어 세우는 데 만족해야 했다.


 콜로세움의 정체성을 둘러싼 논쟁은 18세기 들어서야 최종적으로 정리됐다. 1740~58년 교황 베네딕토 14세의 선언이 논란에 쐐기를 박는 계기였다. 그는 1749년 이렇게 선언했다.


 “고대 로마 시대에 많은 기독교도가 콜로세움에서 순교했습니다. 이곳을 성지로 만들어야 합니다. 콜로세움에서의 채석을 금지합니다.”


 교황은 콜로세움을 보호하기 위해 문을 늘 닫아놓게 했다. 문 닫는 일을 잊어버린 직원에게는 육체적 벌을 줄 수 있게 했다. 그는 또 콜로세움 안에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담은 그림인 ‘십자가의 길’을 세우게 했다. 이 그림은 1874년 2월에 철거돼 지금은 볼 수 없다.


 여기에 자극받은 프랑스 수도사 베네딕토 요셉 라브르는 콜로세움에서 순교한 초기 기독교도의 고통을 체험한다면서 콜로세움에 들어가 신도들의 공양에만 의지한 채 금욕의 삶을 살기도 했다.


 베네딕토 14세가 콜로세움을 순교 성소로 선언한 이후 여러 교황은 콜로세움 안에서 농사를 짓고 있던 농부들을 계속 쫓아냈다. 그들이 경작 면적을 늘리기 위해 콜로세움을 계속 부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러 교황은 콜로세움을 보호하기 위해 교회 돈으로 보강 공사를 실시했다. 1807년과 1827년에는 콜로세움 정면을 보수하는 공사가 진행됐다. 1831년, 1846년과 1930년대에는 콜로세움 내부 개선 공사가 실시됐다. 아레나 발굴 공사도 같이 이뤄졌다. 


 베네딕토 14세 시대부터 콜로세움에서는 해마다 흥미로운 기독교 행사가 펼쳐졌다. 그가 콜로세움을 ‘예수의 수난’에 헌정한 게 계기가 됐다. 매년 부활절을 앞두고 예수의 죽음을 기리는 성 금요일이 되면 교황과 기독교 신도 수천 명이 콜로세움 앞에 모여 촛불 행사를 진행하는 것이다. 지금도 해마다 이 행사는 열리고 있다. 어떻게 보면 콜로세움의 구사일생을 상징하는 행진일 수도 있다.


 그런데 콜로세움은 과연 기독교 순교의 역사가 담긴 장소였을까? 많은 근·현대 역사학자, 고고학자는 콜로세움에서 기독교 순교가 일어났다는 주장을 전혀 근거 없는 오해라고 반박한다. 대표적인 인물이 20세기 벨기에의 예수교 신부였던 델레하예다. 그는 오랜 연구 끝에 ‘콜로세움이 기독교 순교의 현장이었다는 주장에는 아무런 역사적 근거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의 주장은 이렇다.


 “이미 중세 시대부터 다른 순교 현장들은 엄청난 숭앙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콜로세움만 완전히 방치돼 있었던 것은 순교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12세기에 쓰여진 『미라빌리아 로마에』라는 책은 순교의 현장을 여럿 언급하면서 로마의 키르쿠스 플라미니아(플라미니우스 경기장)를 예로 들었습니다. 하지만 콜로세움은 전혀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오푸스 사에멘티시움



 콜로세움은 1703년 이후 지진 피해를 입지 않았다. 이제는 석재를 뜯어가는 사람도 없다. 그런데 21세기 들어 새로운 현상이 콜로세움을 위협하고 있다. 바로 세월과 환경오염이다.


 콜로세움은 지은 지 2천 년을 넘는 건물이어서 세월에 따른 자연적인 손상이 심하다. 여기에 로마 시내를 오가는 자동차에서 뿜어져 나오는 매연으로 석재가 많이 훼손됐다. 로마에 가본 사람이면 누구나 알겠지만 콜로세움 앞 포로 임페리알리 거리에는 매일 엄청난 수의 자동차가 지나다닌다. 


 세월과 환경오염 때문에 콜로세움이 위험하다고 하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보수가 필요하고 보호 대책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콜로세움은 2천 년 된 건축물치고는 아직 튼튼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고대 로마의 콘크리트가 비결이다. 콜로세움을 만든 재료 가운데 상당부분은 콘크리트다.


 현대 콘크리트의 생명은 기껏해야 100년 정도다. 우리나라 아파트는 30년만 되면 노후해서 재개발한다고 난리다. 우리가 갖고 있는 상식대로라면 콜로세움은 벌써 무너졌어야 한다. 그런데 고대 로마 콘크리트의 수명은 현대의 콘크리트와 달리 엄청나게 길다. 여기에 콜로세움이 장수한 비밀이 숨어 있다.


 라틴어로 오푸스 사에멘티시움이라고 하는 로마 콘크리트는 BC 3세기 무렵 발명됐다. 이 건축 재료는 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다리, 도로, 저택, 경기장, 신전 등 여러 건축물에 골고루 쓰였다.


 당시 콘크리트 제조업자는 포졸라나라고 불린 화산재를 석회, 바위 조각, 사기 타일 조각, 물로 만든 회반죽에 섞어 사용했다. 회반죽과 화산재는 1대3의 비율로 혼합했다. 포졸라나에는 이산화규소, 알루미나 등이 포함돼 있어 회반죽의 응집력을 강화시키는 화학 반응을 일으킨다고 한다.


 로마 콘크리트는 시간이 흐를수록 여러 종류로 발전했다. 회반죽에 테라코타를 섞은 콘크리트도 있었다. 이렇게 하면 방수 기능이 강해졌기 때문에 물탱크처럼 물에 접촉하는 빈도가 잦은 건축물에 사용됐다. 1세기 무렵에는 해저에서 사용할 수 있는 콘크리트도 개발했다. 석고와 화산재를 1대1의 비율로 섞었다고 한다. 바닷물이 석회를 만날 경우 뜨거운 화학 반응을 일으켜 콘크리트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로마 콘크리트와 현대 콘크리트 중에서 어느 게 더 나을까? 여러 해 전 미국과 이탈리아 과학자들이 공동연구를 실시한 결과에 따르면 고대 로마 때 지중해 항구에 사용한 로마 콘크리트가 현대 콘크리트보다 더 강한 성격을 나타냈다. 고대 로마 항구는 2,000년 동안이나 바닷물의 침식 작용에 시달리면서도 여전히 남아 있는 반면 현대 콘크리트는 50년도 안 돼 부식했다는 것이다. 미국 유타대 마리 잭슨 교수 등 과학자들이 2017년 『미국 광물학회지』에 실은 연구결과는 이렇다.


 ‘현대의 시멘트는 바닷물을 만나면 쉽게 부식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 석회, 화산재, 바닷물, 알루미늄 토버모라이트라는 광물질을 섞는 로마식 제조법은 콘크리트를 강화시켜서 팽창할 때 생기는 균열을 방지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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