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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Oct 21. 2020

키르쿠스 막시무스

빵과 서커스



 2020년 기준으로 세상에서 가장 큰 경기장은 어디일까?  정답은 미국 인디애나주 스피드웨이에 있는 카레이스 경주장인 인디애나폴리스 모터 스피드웨이다. 이곳의 관중석 규모는 무려 27만여 명에 이른다. 2005년 5월 이곳에서 열린 제100회 인디 500 경주에는 입석까지 포함해 자그마치 35만 명이 몰려 세계 스포츠 역사상 최다 관중 기록을 세웠다. 


 축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브라질 축구의 성지’ 마라카냥 스타디움이라는 경기장 이름을 들어봤을 것이다. 1950년 이곳에서 열린 국제축구연맹(FIFA) 월드컵 축구대회 결승전에는 무려 19만 9천845명에 이르는 관중이 운집했다.  


 미국 경제잡지 『포브스』는 2017년 기준으로 ‘전 세계 스포츠 스타 중 누적 수입 1위는 18억 5천만 달러를 기록한 마이클 조던(전직 미국프로농구(NBA) 선수)’이라고 보도했다. 타이거 우즈는 17억 달러로 2위에 머물렀다. 2010~19년 사이 10년 동안 가장 많은 돈을 번 선수는 프로권투 선수 플로이드 메이웨더(9억 1천만 달러)였다. 세계적 축구스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는 8억 달러, 리오넬 메시는 7억 5천만 달러였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무려 2천 년 전 고대 로마에 최고 40만 명이 몰린 경기장이 있었고, 타이거 우즈나 마이클 조던, 플로이드 메이웨더의 수입은 푼돈에 불과하다고 큰소리를 칠 만큼 엄청난 돈을 번 선수가 있었다면 믿을 수 있을까? 


 기록의 신빙성에 의문을 가지는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로마에는 실제 그런 경기장이 있었고, 그런 선수도 있었다. 경기장은 누구나 잘 아는 키르쿠스 막시무스였고, 선수는 이곳에서 열린 전차경주의 스타인 ‘기수’였다.


 전차경주라고 하면 1959년 윌리엄 와일러 감독이 제작하고 찰튼 헤스턴이 주연한 영화 '벤허'가 떠오른다. 이 영화는 키르쿠스에서 벌어진 전차경주 단 한 장면으로 영원히 지울 수 없는 깊은 인상을 남겼다. 다소 과장됐거나 부정확한 면이 있기는 하지만 '벤허'는 전차경주의 묘미를 아주 상세하고 현실감 있게 잘 묘사한 영화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전차경주는 검투사경기와 함께 로마인이 가장 즐겼던 이벤트였다. 콜로세움이 검투사경기를 주로 개최하던 곳이었다면 전차경주 전용 경기장은 키르쿠스 막시무스였다. 


 길이 600m를 넘었던 키르쿠스 막시무스의 관중 수용 규모는 기록에 따라 다르지만 무려 15만~40만 명이었다고 한다. 많은 역사학자는 40만 명이라는 기록을 과장됐다면서 실제 수용 규모를 10만~15만 명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영국 록밴드 제네시스가 전성기였던 1970년대 폐허로 변한 키르쿠스 막시무스 터에서 공연했을 때 무려 50만 명이 몰렸다는 사실을 감안해보면 40만 명이라는 수치가 지나친 과장은 아니었을 수도 있다. 


 이처럼 엄청난 관중이 몰릴 정도였으니 당시 전차경주 기수는 그야말로 슈퍼스타였다. 기록에 남은 수치대로라면 당시 최고 수준의 기수가 선수 생활 동안 번 돈은 현재 가치로 환산했을 때 무려 60억~150억 달러였다고 한다. 당대 최고 부자가 시샘할 정도였다. 


 이것이 사실인지를 제대로 확인해 보려면 역시 키르쿠스 막시무스와 전차경주의 역사를 알아봐야 한다. 그리고 당시 로마인의 생활 속으로 들어가 봐야 한다. 그 시작은 로마를 건국한 로물루스 시대이다. 




무르키아 계곡의 축제

 


 로마가 건국했을 때 근처에는 인구가 많은 도시가 여럿 있었다. 그 중 어느 곳도 로마에 우호적이지 않았다. 로물루스는 로마의 청년들을 다른 도시의 여인들과 결혼시키는 통혼으로 관계를 개선하려고 했지만 아무도 응하지 않았다. 이제 막 건국했기 때문에 힘이 세지도 않고 재산도 많지 않은 로마와 굳이 사이좋게 지낼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로물루스는 여인들을 집단 납치해 강제로 통혼하는 방법을 사용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계획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다면 매년 희생물을 바치고 축제를 열겠노라고 모략의 신에게 맹세했다. 그는 원로원에도 계획을 밝혔다. 


 “곡물의 신 콘수스(또는 말의 신인 넵투누스)를 기념하는 축제를 열겠습니다. 이 행사에서 납치 계획을 추진하겠습니다.”


 미혼 청년 문제로 머리가 아팠던 원로원은 로물루스의 뜻을 받아들이고 계획을 승인했다. 그는 소문을 잘 내는 사람 여럿을 인근 도시에 보내 이야기를 퍼뜨리게 했다. 


 “새로 생긴 도시 로마에서 여러 날 동안 축제를 개최합니다. 새 도시의 위용을 자랑하고 훌륭한 미래를 신께 부탁드리는 행사입니다. 어디서도 볼 수 없는 화려한 축제입니다.”


  팔라티노 언덕과 아벤티노 언덕 사이에 넓은 계곡이 있었다. 테베레 강 제방 아래에 있는 저지대의 풍요로운 농지였다. 이름은 무르키아 계곡이었다. 테베레 강에서 수시로 홍수가 일어나 피해를 입히기도 했지만, 거꾸로 강에서 흘러나온 토사가 쌓여 이 지역을 농사짓기에 좋은 땅으로 만들어주었다. 이곳에는 무르키아 신전이 있어 무르키아 계곡으로 불렸다. 무르키아는 신성한 봄, 계곡을 가르는 작은 개울, 아벤티노 언덕의 낮은 꼭대기를 다스리는 여신이었다. 로물루스가 축제를 열기로 한 곳은 여기였다. 


 축제를 개막하던 날 많은 이방인이 아내, 딸을 데리고 로마에 왔다. 로물루스는 무르키아 계곡에서 먼저 신에게 희생물을 바친 뒤 축제를 시작했다. 어떤 사람은 이때가 로마 건국 첫 해였다고 말한다. BC 2세기 로마 역사학자 그나우에스 겔리우스는 4년째였다고 반박한다. 


 로물루스는 경마, 전차경주는 물론 여러 종류의 경기를 진행했다.  이때의 전차경주는 영화 ‘벤허’에 나오는 것과는 많이 달랐다. 무르키아 계곡에 넓은 평원이 있기는 했지만 전차경주장은 없었다. 대충 만든 둥근 공간에서 전차가 달리는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로물루스가 개최한 전차경주는 기록상으로는 로마 최초였다. 전차경주는 로마뿐만 아니라 주변 어느 도시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행사였다.


 로물루스는 이방인들에게 매일 술과 음식을 제공했다. 다들 축제 분위기에 푹 빠져 있을 때 날 그는 청년들을 몰래 모아놓고 이렇게 지시했다.


 “축제 마지막 날 내가 신호를 보낼 걸세. 그러면 다들 이방인 여인을 한 명씩 납치해 집으로 데리고 가게. 절대 몸에 손을 대면 안 되네. 추가 지시가 있을 때까지 집에 데리고 있도록 하게나.”


 청년들은 여러 그룹으로 나눠 대기하다 신호가 떨어지자 일제히 여인을 납치했다. 갑작스럽게 발생한 사태에 놀란 다른 도시 사람들은 그대로 달아나버렸다. 로물루스는 다음날 청년들에게 여인들을 다 데리고 오라고 지시했다. 세어 보니 모두 683명이나 됐다. 그는 여인들을 설득했다.


 “욕을 보이려고 여러분을 납치한 게 아닙니다. 로마 청년들과 결혼을 시키려고 모셔온 것입니다. 이런 방식의 결혼은 고대 그리스의 관습입니다. 행운의 여신 포르투나가 여러분에게 선물한 남편을 소중히 여기십시오.”


 로물루스는 결혼하지 않은 청년 683명을 골라 여인들과 짝을 지어 주었다. 어떤 사람은 여인을 납치한 이유를 로마에 여자가 부족해서였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은 로물루스가 다른 도시와 전쟁을 벌이기 위해 일부러 명분을 만들려고 이런 일을 저질렀다고 주장한다. 



 로마인이 여인을 납치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대다수 도시는 분개했다. 로마는 이후 카에니나, 안템나이, 크루스투메리움 등과 여러 번의 전쟁을 피할 수 없었다. 그중에서도 사비니족과의 전쟁은 가장 힘든 것이었다.


 타티우스 왕이 이끄는 사비니족 군대가 복수를 하러 로마로 쳐들어갔다. 양측은 카피톨리노 언덕과 팔라티노 언덕 사이의 저지대인 포로 로마노에서 치열하게 싸웠다. 사비니족은 잃어버린 여자들을 되찾고 치욕을 씻겠다는 일념으로, 로마는 이미 아내가 된 여인과 로마를 지키겠다는 생각에 죽을 각오로 맞섰다. 


 그때 팔라티노 언덕에서 흙먼지가 짙게 일더니 많은 여인이 전투 현장으로 달려왔다. 수 년 전 축제 때 납치돼 로마인의 부인이 된 여인들이었다. 이들은 어린 아기를 손에 들거나 등에 업은 채 로마와 사비니족 병사 사이에 끼어들어 전투를 말리기 시작했다. 


 “제발 싸우지 마세요. 여보, 당신 앞에 있는 저 사람은 저의 아버지예요. 저 분을 살해하면 평생 당신을 저주할 거예요. 아버지, 저 이는 남편이에요. 남편을 죽이면 저는 과부가 된답니다. 이 아이들은 아버지의 손자들이에요. 남편이 죽으면 아이들은 고아가 되고 말 거예요.”


 “오빠, 저는 여기서 잘 살고 있어요. 아이들도 셋이나 낳았어요. 제발 제 남편을 죽이지 마세요. 제가 이제 와서 고향에 돌아간들 무엇을 하겠어요? 여보, 제발 칼을 거두세요. 저 사람은 당신의 처남이 아닌가요?”


 여인들이 하도 완강하면서도 간곡하게 만류하는 바람에 로마와 사비니족 병사들은 더 이상 전투를 할 수가 없었다. 자칫 칼을 잘못 휘두르다가는 상대 병사들이 아니라 아내, 딸, 여동생, 누나를 죽일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로물루스와 타티우스 왕은 병사들에게 다급하게 지시를 내렸다.


 “모두 진지로 철수하라.”


 그날 밤, 로마의 여인들은 로물루스와 타티우스 왕을 찾아가 간절히 호소했다.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현실을 인정하고 전쟁을 멈추도록 하십시오.”


 두 사람은 여인들의 호소에 마음이 흔들렸다. 특히 타티우스 왕의 마음이 더 흔들렸다. 두 사람은 결국 여인들의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다음날, 로물루스와 타티우스 왕은 포로 로마노에서 만나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더 이상 전쟁을 하지 않는 것은 물론 두 도시를 합친다는 내용이었다.


 대부분 비슷한 내용이지만 BC 1세기 그리스 역사학자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시오스는 약간 다르게 설명한다. 사비니 출신 여인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전쟁터에 나타나 싸움을 말렸다는 부분이 그렇다. 잘 살펴보면 그의 설명이 조금 더 현실성 있게 들린다. 


 ‘로마와 사비니족이 전쟁을 계속할지 평화 회담을 가질지 고민하고 있을 때 사비니 출신의 로마인 부인들이 남편 몰래 특정 장소에 모였다. 


 “우리가 평화 회담을 성사시키도록 하면 어떨까요?”


 이런 제안을 내놓은 여인은 헤르실리아였다. 여인들은 그녀의 말에 뜻을 같이 하면서 원로원을 찾아갔다. 


 “사비니와의 평화 회담을 성사시키겠습니다. 우리를 사비니 왕에게 보내주십시오.” 


 “아이들을 남편에게 맡겨놓고 간다면 허락하겠소. 아이를 여럿 낳은 여인은 그 중 한두 명만 데리고 가시오.” 


 여인들은 상중이라는 뜻을 담은 하얀 옷을 입고 각각 아이 한둘을 손에 들거나 등에 업은 채 사비니 진지로 갔다. 일부 역사학자는 그 수가 30명이라고 하고 다른 역사학자는 527명이라고 한다.


 “아이고! 아버지! 여기 계셨군요”


 “오빠! 오랜만이에요. 얼마나 보고 싶었다고요.”


 여인들은 사비니 진지에 도착하자마자 병사들의 발끝에 엎드려 눈물을 흘렸다. 여인들의 한탄에 사비니 병사들도 마음이 크게 흔들려 통곡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소식을 듣고 타티우스 왕이 달려왔고 원로원도 소집됐다. 헤르실리아는 이곳에 왜 왔는지를 설명하고는 로마와 평화 조약을 맺으라고 간청했다. 타티우스 왕이 평화 조약 내용에 확신을 갖지 못하자 헤르실리아는 강한 어조로 설득했다.


 “두 부족을 통합해 이곳에서 함께 살면 인근 지역에서 가장 강한 도시가 될 수 있습니다.”



 헤르실리아가 말을 마치자 함께 간 여인들은 왕의 발밑에 엎드려 평화를 회복시켜달라고 간청했다. 왕은 여인들의 제안이 가장 합리적인 해결책이라고 생각하고 로마와 평화 조약을 체결하기로 결정했다. 


 로물루스와 타티우스는 포로 로마노에서 만나 평화 조약을 맺었다. 두 사람이 공동 왕이 돼 나라를 함께 통치하기로 했다. 나라 이름은 로마로 정했다. 이로써 로마인과 사비니족 모두 똑같은 로마 시민이 됐다. 두 사람은  사크라 비아 한가운데에 제단을 세워 영원히 약속을 지키겠다고 맹세했다.’


 로마인은 무르키아 계곡에서 여인을 납치한 덕분에 발전의 계기를 마련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해마다 콘수알리아라는 축제를 열었다.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시오스는 『로마의 유적』에서 이 축제를 이렇게 설명했다.


 ‘로물루스에 의해 처음 시작된 이 축제는 오늘날(BC 1세기)까지 이어지고 있다. 축제에서 로마인은 해마다 희생물과 갓 수확한 곡식을 신에게 바친다. 그리고 말 한 마리 혹은 여러 마리에 멍에를 씌워 수레에 연결한 뒤 전차경주를 거행한다.’ 


 로마인은 콘수알리아 외에 무르키아 계곡에서 곡물의 여신인 케레스를 모시는 축제인 케레알리아도 거행했다. 케레알리아는 4월 중순~말에 열렸다. 경마 경기가 축제의 시작이었다. 밤에는 꼬리에 불을 붙인 여우 여러 마리를 경기장에 풀어놓았다. 여인들이 흰옷을 입고 횃불을 들고 행진하기도 했다. 축제를 보러 가는 사람도 흰옷을 입어야 했다. 흰옷을 입지 않은 사람은 축제장에 들어갈 수 없었다. 


 흰옷을 입고 횃불을 드는 것은 축제를 모시는 케레스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리스신화에서는 데메테르 여신이었다. 지하세계 저승의 신 하데스에게 납치당한 딸 페르세포네를 찾아 헤맨 비운의 여신이었다. 그녀는 제우스의 중재로 딸을 찾았지만 봄, 여름만 같이 지내고 가을, 겨울에는 지하세계로 돌려보내야 했다. 흰옷은 딸을 납치당한 슬픔을, 횃불은 딸을 찾아다니는 고통을 상징했다.


 무르키아 계곡에서 콘수알리아, 케레알리아 축제가 열렸던 것으로 보아 이곳은 건국 직후부터 축제나 대규모 집회를 펼치는 장소로 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로마인이 이곳을 행사장으로 고른 것은 워낙 넓은 계곡이어서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로마인은 무르키아 계곡에 신전을 많이 세웠다. 먼저 위에서 설명한 무르키아 신전이 있었다. 콘수스에게 바치는 지하 신전도 있었다. 콘수스는 곡물 저장 창고의 신이면서 지하세계의 신이었다. 두 신전은 같은 쪽에 나란히 자리를 잡고 있었다.


 아벤티노 언덕 쪽에는 케레스 신전과 플로라 신전이 있었다. 베누스 신전, 머큐리 신전, 디스 신전 등도 만들어졌다. 팔라티노 언덕 위에는 마그나 마테르 신전과 아폴로 신전이 자리를 잡았다. 아벤티노 언덕을 따라 남동쪽에는 달의 여신에게 바치는 루나 신전이 세워졌다. 


 무르키아 신전과 콘수스 신전 반대편에는 아라 막시마가 있었다. 아라 막시마는 로마 건국 이전에 이곳을 지나간 헤라클레스를 모신 신전이었다. 오늘날 ‘진실의 입’이 있는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 교회 자리가 바로 그곳이었다. 




경기장을 에워싼 로마인

 


 로물루스가 콘수알리아 축제를 처음 연 이후 무르키아 계곡에서는 수시로 경마 또는 전차경주가 열렸다. 하지만 이곳이 로마 시민에게 전차경주를 포함해 대규모 오락을 제공하는 장소로 본격 활용된 것은 제5대 왕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 때였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재산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로마를 위해 마음껏 베풀겠습니다. 저를 왕으로 뽑아주십시오.”


 제4대 왕 안쿠스 마르키우스가 세상을 떠나자 새 왕을 뽑기 위한 선거가 실시됐다. 에트루리아에서 전 재산을 들고 로마로 이주했던 타르퀴니우스가 세계 역사상 최초로 선거운동을 실시한 끝에 당선돼 왕으로 즉위했다.

 

 선왕이었던 툴루스 호스틸리우스와 안쿠스는 군사적으로 뛰어난 인물이었다. 라틴 도시들은 로마에 대들 수가 없었다. 사업가였던 타르퀴니우스가 즉위하자 이들의 마음은 금세 달라졌다. 군사적 경험이 부족한 그를 얕봤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안쿠스와 조약을 맺었지요. 타르퀴니우스는 조약과 아무런 관계가 없어요. 안쿠스가 죽었으니 조약의 효력도 끝난 것이오.”


 일부 도시는 로마 영토를 야금야금 침범하기 시작했다. 제법 큰 도시인 아피올라니가 특히 로마를 많이 괴롭혔다. 위기를 느낀 타르퀴니우스는 군대를 이끌고 나가 아피올라니를 혼내주기로 했다. 뜻밖에 군사적 자질을 과시한 그는 두 차례 전투 끝에 적군을 궤멸시켰다. 아피올라니 주민은 모두 노예로 팔아버렸다. 지금까지 로마가 승리한 어느 전투에서도 볼 수 없었던 엄청난 전리품까지 챙겼다.


 타르퀴니우스는 즉위하기 전부터 넉넉한 씀씀이로 로마인의 인기를 누려왔다. 그는 전쟁에서 번 돈을 모두 풀어 다시 한 번 관대함을 보여줌으로써 집권 초기여서 아직 취약한 권좌를 더욱 튼튼하게 굳히기로 했다. 


 “무르키아 계곡의 너른 땅에서 대형 축제를 열겠습니다. 비용은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껏 어떤 왕도 거행하지 못한 엄청난 행사가 될 것입니다.”


 타르퀴니우스는 로마 최초의 올림픽이라고 할 수 있는 ‘루디 로마니’ 즉 ‘로마 경기대회’를 열었다. 로마의 주신인 유피테르에게 바치는 이벤트였다. 고대 그리스에서 열렸던 여러 경기대회를 모방한 행사였다.  15일간 열린 루디 로마니에서 치러진 경기 종목은 권투와 전차경주 두 가지였다. 여기에 군사 퍼레이드도 펼쳐졌다.


 타르퀴니우스가 루디 로마니를 열 때만 해도 무르키아 계곡에는 제대로 된 경기장이 없었다. 그는 계곡을 따라 흐르는 개울에 다리 두 개를 놓아 말이나 전차가 건널 수 있게 만들었다. 당시 무르키아 계곡은 농경지로 활용됐기 때문에 경기가 벌어지는 곳 외의 땅에서는 여전히 농사를 짓고 있었다. 선수들은 곡식이 자라는 풍경을 보면서 개울에 만든 다리를 건너다니며 경쟁했다. 반환점 외에 다른 시설물은 없었다. 구경꾼들은 경기장을 따라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제방이나 인근 신전 등에 앉아 경기를 지켜봤다. 


 경기는 아라 막시마 인근에서 출발해 반대편 무르키아 신전까지 간 뒤 근처에 있던 콘수스 신전을 돌아 아라 막시마로 돌아오는 코스에서 진행됐다. 일부 사람들은 코스가 일직선이었다고 주장한다. 마치 100m 달리기를 하듯 마르키아 계곡 한쪽 끝에서 출발해 반대쪽 끝까지 달렸다는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무르키아 계곡에서는 연이어 각종 행사가 펼쳐졌다. 계곡의 이름은 키르쿠스로 바뀌었다. 테렌티우스 바로는 『라틴어 원론』에서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경기가 벌어진 장소는 '둥글다'는 뜻의 키르쿠스라고 불렸다. 관중이 경기장 주변을 둥글게 에워싸서 경기를 지켜보았기 때문이었다. 또는 경기가 원 모양 경기장에서 치러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키르쿠스에는 나중에 막시무스라는 수식어가 하나 더 붙게 됐다. 규모가 엄청나게 커서 인근에 있던 키르쿠스 플라미니우스(키르쿠스 경기장)를 능가했기 때문에 ‘가장 크다’라는 뜻인 막시무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로마인은 초창기에는 키르쿠스 막시무스에서 루디와 전차경주를 거행할 때 태양 신과 달 신을 모시는 숭배의식을 거행했다. 두 신은 키르쿠스 막시무스와 그곳에서 치러지는 여러 경기를 보호하는 신성한 수호신이었다. 그 이유를 살펴보면 참 재미있는 로마인의 논리를 엿볼 수 있다.


 태양 신은 해가 떠서 질 때까지 하늘을 한 바퀴 순회하는 신이었다. 그리스신화로 따지면 헬리오스 신이었다. 그는 하늘을 돌 때 사두마차를 몰고 다녔다. 달 신인 루나는 이두마차를 몰고 다녔다. 당연히 전차경주를 여는 키르쿠스 막시무스의 수호신으로 모실 자격이 충분했다.


 다른 이유도 있었다. 태양 신과 달 신은 예상 가능한 일을 상징하는 신이었다. 해와 달은 매일 정해진 순서에 따라 하늘을 돈다. 이 순서에 어긋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는 신이었다. 로마인은 키르쿠스 막시무스의 둥근 트랙을 두 신처럼 세상일의 순행을 상징하는 곳으로 생각했다. 하늘처럼 둥근 트랙을 따라 제대로 갔다가 제대로 돌아오면 세상은 평화롭고 변고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게 로마인의 믿음이었다.


  

 

40만 명 모은 전차경주장



 루디 로마니를 성공적으로 치른 타르퀴니우스는 시민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엄청난 일을 해냈다는 게 로마인의 칭찬이었다. 여기에 고무된 그는 새로운 계획을 세웠다. 


 “제대로 된 전차경주장을 하나 만들도록 하겠습니다.”


 타르퀴니우스는 무르키아 계곡에 로마 역사상 최초로 전차경주장을 건설했다. 물론 아주 초보적인 시설과 임시 관중석을 갖춘 경기장일 수밖에 없었다. 그 넓은 계곡에 엄청난 규모의 경기장을 만들기에는 아직 로마의 경제력이 부족했다. 


 타르퀴니우스는 귀족, 기사계급에게는 나무로 만든 관중석을 제공했다. 정확한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팔라티노 언덕 주변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비가 오면 비를 피하고 햇빛이 강하면 햇빛을 피할 수 있도록 관중석에는 차양막도 설치했다. 평민이 앉을 수 있는 관중석은 따로 설치했다. 귀족, 기사계급용 관중석과 반대쪽인 아벤티노 언덕 방향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관중석이라고 해 봐야 나무로 만든 임시 시설이 고작이었다. 이 시기는 포로 로마노에 하수도를 설치해 무르키아 계곡을 지나 테베레 강 쪽으로 물을 빼내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이 때문에 나무 관중석이 물에 젖어 썩는 바람에 무너지는 일이 잦았다. 그래서 수시로 관중석을 새로 지어야 했다. 


 돈이 많은 귀족과 기사계급은 곳곳에 스펙타쿨라, 포리, 포룰리라고 불린 임시 연단을 세웠다. 포리, 포룰리는 ‘갑판’이라는 뜻이었다. 연단이 갑판을 닮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그들은 연단에 올라가서 경기를 지켜보았다. 전차들이 달리는 모습을 훨씬 잘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키르쿠스 막시무스에 석재 관중석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BC 190년 무렵이었다. 석재 관중석에는 원로원 의원만 앉을 수 있었다. 이 관중석을 화려하게 확충한 사람은 BC 50년 율리우스 카이사르였다. 그는 관중석이 트랙을 따라 완전히 한 바퀴 돌게 만들었다. 트랙과 관중석 사이에는 하수관거를 설치했다. 관중석을 보호하는 동시에 트랙에 물이 고일 경우 쉽게 배출하기 위해서였다.

 

 공화정 말기에 로마의 주요 행사장 좌석은 계급에 따라 분리됐다. 키르쿠스 막시무스도 마찬가지였다. 관중석 중 3분의 1은 반원형으로 움푹 들어간 카베아였다. 카베아의 앞부분은 원로원 의원, 나머지 뒷부분은 기사계급이 사용했다. 카베아를 제외한 나머지 관중석 3분의 2는 평민이 이용했다. 제정 시대 초대 황제였던 아우구스투스는 이를 더 세분화했다.


 “노예와 자유 시민, 어린이와 어른, 부자와 빈자, 군인과 민간인, 기혼자와 총각, 남자와 여자를 분류해서 좌석을 지정하도록 하시오. 가장 편하고 전망이 좋은 좌석은 원로원 의원에게 배정하시오.”


 키르쿠스 막시무스의 좌석은 뒤로 갈수록 높아지는 모양이었다. 오늘날 운동 경기장과 비슷했다. 관중석은 3층으로 돼 있었다. 높이는 처음에는 27m 정도였지만 나중에는 80m까지 올라갔다. 역사학자에 따라 관중석 규모 추산은 다르다. 대개 15만 명이라고 생각하지만, 최대 25만~40만 명을 수용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본 사람도 있었다.


 오현제 중 두 번째 황제였던 트라야누스는 키르쿠스 막시무스를 보수하면서 관중석을 석재로 새로 건설했다. 그 이전까지는 황제가 앉는 공간을 일반 관중석과 분리시켜놓았다. 하지만 트라야누스는 관중석 구조를 바꿔 황제의 모습을 노출시키라고 했다. 비천한 가문 출신으로 제위에 오른 그로서는 시민과 가까이 함으로써 지지를 얻는 게 필요했다.


 “대전차경기장에 오는 모든 시민이 어디서든 황제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만드시오.”


 트라야누스 때에야 비로소 키르쿠스 막시무스는 오늘날 우리가 알 고 있는 대전차경기장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키르쿠스 막시무스는 로마제국에서 가장 큰 경기장이었다. 길이는 621m, 폭은 118m에 이르렀다. 나중에는 로마 제국의 모든 속주, 식민도시 등에 세워진 다른 모든 키르쿠스의 원형이 됐다. 이후 여러 황제가 일부 파손된 부분을 보수하거나 기념비를 새로 추가하기도 했지만, 키르쿠스 막시무스의 외형은 거의 바뀌지 않았다.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시오스는 『로마의 유적』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키르쿠스 막시무스는 로마에서 가장 아름답고 경탄할 만한 건축물이다. (키르쿠스 막시무스 관중석 바깥쪽에 있는)모든 상점에는 관중이 출입하는 통로가 있어 수만 명의 로마인은 전혀 불편 없이 경기장에 들어가거나 나갈 수 있었다.’


 완벽한 모양을 갖춘 키르쿠스 막시무스에서 가장 독특한 공간은 관중석 아래, 경기장 바깥에 있는 상점들이었다. 오늘날 축구장에 가면 경기장 바깥에 쇼핑센터가 들어선 것과 똑같은 장면이었다. 신원을 알 수 없는 역사학자는 이렇게 묘사했다.


 ‘키르쿠스 막시무스는 가게와 노점이 붐비고 먼지가 풀풀 날리는 야외 공간이었다. 창녀, 사기꾼, 점쟁이, 신분이 낮은 공연인 등이 몰려들어 화려한 분위기를 풍기는 저질스러운 공간이었다.’


 키르쿠스 막시무스는 워낙 큰 경기장이고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드나들었기 때문에 사고도 잦았다. 그때마다 물적 피해는 물론이거니와 인적 피해도 엄청나게 컸다. 키르쿠스 막시무스의 저층 관중석은 석재로 만들었지만, 고층 관중석은 나무였고 햇빛을 가리는 차양막은 천이어서 화재에 매우 취약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절이던 31년 큰 화재가 발생했다. 황제는 사비를 들여 서둘러 복구공사를 실시했다. 티베리우스 황제 시절이던 36년에도 큰 불이 났다. 


 “불이 어디서 시작된 것이오?”


 “아벤티노 언덕 쪽 관중석 아래에 있던 바구니 상점에서 발화했습니다.”


 “상인들이 많은 피해를 봤겠군.”


 “대부분 전소 피해를 입어 재산을 다 날렸습니다.”


 “화재로 피해를 입은 모든 상점 주인에게 재기할 수 있도록 보상금을 지급하시오.”


 네로 황제 시대이던 64년에는 키르쿠스 막시무스의 반원형 반환점 부근에서 다시 불이 나 관중석과 상점에 큰 피해를 입혔다. 불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로마 시내로 번져 도시의 대부분을 삼켜버렸다. 


 키르쿠스 막시무스는 인근의 테베레 강 때문에 홍수에도 매우 취약했다. 테베레 강의 물이 넘쳐 출발지점인 카르케레스로 들어오는 일이 잦았다. 전차경기를 좋아했던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키르쿠스 막시무스 개선 공사를 실시했다. 물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홍수방지용 제방을 쌓았다.


 전차경주가 열릴 때마다 워낙 많은 관중이 몰리는 바람에 붕괴사고도 수시로 일어났다.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 시대이던 140년에는 관중석 위층이 무너지는 사고가 발생해 1천112명이 숨졌다. 3세기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대에도 붕괴사고가 일어나 무려 1만 300명이 압사했다. 


키르쿠스 막시무스의 구조 


 키르쿠스 막시무스는 카르케레스, 트랙, 스피나, 메타, 오바, 관중석 등으로 구성돼 있었다. 가장 먼저 생긴 것은 출발 구역인 카르케레스였다. BC 1세기~서기 1세기 로마 역사학자 티투스 리비우스는 『로마사』에서 이렇게 전했다.


  ‘키르쿠스 막시무스에서 가장 먼저 생긴 시설은 BC 329년에 만들어진 카르케레스였다. 말이나 전차가 미리 준비했다가 출발하는 구역이었다. 처음에는 나무로 만든 마구간 같은 간단한 시설이었다. 한 세기 정도 지난 뒤에는 물감을 칠해 출발지점이라고 표시했다.’


 카르케레스에는 문이 달려 있었고 늘 밝은 색으로 칠했다. 카르케레스는 사두마차 24대를 동시에 출발시킬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 공화정 말기, 또는 제정 초기 무렵에는 12개로 줄어들었다. 바깥쪽에서 출발하는 말이나 전차가 안쪽에서 출발하는 말이나 전차보다 불리하다는 점을 감안해 출발 위치에 조금씩 차이를 두었다. 오늘날 육상 경기를 할 때 바깥쪽 레인에 선 선수는 앞으로 당긴 위치에 서게 한 것과 같았다. 


 전차가 달리는 공간인 트랙의 한쪽 길이는 568m였다. 한 바퀴는 1천100m 정도였다. 트랙 양쪽 끝에는 메타라고 하는 원뿔 3개씩을 세웠다. 전차가 회전하는 지점이었다. 


 카르케레스에 이어 BC 189년께에는 스피나가 만들어졌다. 스피나는 쇼트트랙 경기장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트랙 안쪽의 빈 공간이었다. 이곳은 전차경주 진행을 돕는 보조자나 경기 도중 부상당한 선수가 몸을 피하는 장소로 활용됐다. 스피나의 길이는 344m였다. 6세기 역사학자 카시오도루스는 이름의 유래를 이렇게 설명했다.


 ‘빈 공간의 모양이 마치 사람 등뼈처럼 생겼다고 해서 스피나라고 불렀다.’


 전차경주에 나선 선수가 착각하지 않도록 스피나에는 뾰족한 기둥이나 동상 등을 세워두었다. 나중에 스피나 양쪽 끝에 오벨리스크를 세운 것도 이 때문이었다. 1세기 말 무렵에는 스피나에 물웅덩이나 미니 운하를 만들었다. 때로는 예술품을 가져다 놓기도 했다. 관중을 재미있게 해주려고 우스꽝스러운 장식품을 설치하는 일도 있었다. 여러 신을 모시는 미니 신전과 신의 석상, 분수도 세웠다.


 스피나 가운데 부분에는 기둥 두 개가 서 있었다. BC 174년부터는 기둥에 돌로 만든 알 모양 공 7개를 달아 마차가 몇 바퀴를 돌았는지를 계산했다. 이 공을 ‘오바’라고 불렀다. 당시 전차경주에서는 참가자가 일곱 바퀴를 돌아야 했는데, 한 바퀴를 돌 때마다 알 모양 공을 하나씩 넘겨 바퀴 수를 관중에게 알렸다. 1~2세기 로마 역사학자 디오 카이우스는 『로마사』에서 오바의 유래를 이렇게 설명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대의 장군인)아그리파는 전차가 몇 바퀴를 돌았는지 관중이 헷갈려 하는 걸 보고 오바를 처음 설치했다.’


 알은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카스토르와 폴룩스 형제를 상징했다. 두 형제가 알에서 태어났다고 신화에서 전하기 때문이다. 카스토르와 폴룩스 형제는 말과 마부, 기사계급의 수호성인이었다. 말을 이용하는 전차경주에 딱 어울리는 수호신이었다.


 BC 33년에는 큰 청동 돌고래 모양이 바퀴 수 계산기로 추가됐다. 돌고래는 관중석에 앉은 모든 사람이 다 잘 볼 수 있도록 경기장 한가운데에 설치한 분리대인 에우리푸스 위에 설치됐다. 영화 ‘벤허’에도 돌고래 모양 계산기가 등장한다.


 제정 시대 들어 키르쿠스 막시무스에서 가장 눈에 띄는 구조물은 오벨리스크였다.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BC 31년 발생한 화재로 피해를 입은 키르쿠스 막시무스를 복구하면서 세운 것이었다. 로마 전역을 통틀어 오벨리스크가 세워진 것은 이곳이 처음이었다. 오벨리스크는 이집트 헬리오폴리스에서 가져왔다. 로마인은 독특한 모양의 오벨리스크를 보고 매우 신성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우구스투스가 로마의 적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을 그리스 악티움에서 누르고 거둔 승리를 축하하는 기념비로 제격이구만.”


 아우구스투스는 오벨리스크를 세운 뒤 관중석 위에는 신전을 만들었다. 그는 신전 아래 황제 전용 관중석에 앉아 경기를 지켜봤다. 때로는 가족이 자리를 함께했다. 그의 눈에는 황제의 권위처럼 당당하게 서 있는 오벨리스크가 흐뭇하게 보였을 것이다. 


 4세기 무렵에는 아우구스투스의 오벨리스크 반대쪽 끝부분에 오벨리스크가 하나 더 세워졌다. 375년 콘스탄티우스 2세가 건립한 것이었다. 이 오벨리스크가 키르쿠스 막시무스에 세워진 계기는 이렇다. 


 콘스탄티우스 황제는 357년 개선식을 치르기 위해 즉위 이후 처음 로마를 방문했다. 그는 영광스러운 과거를 상징하는 건물이 가득한 포로 로마노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카피톨리노 언덕의 유피테르 신전, 판테온과 인근의 네로 욕장, 디오클레티아누스 욕장을 구경하고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콘스탄티우스는 트라야누스 포룸을 방문한 길에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로마 황제는 공공시설을 기증하는 전통이 있습니다.”


 콘스탄티우스는 과거의 황제들에게 지고 싶지 않았다. 그는 이집트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던 오벨리스크를 가지고 와 키르쿠스 막시무스에 세우기로 했다.


 원래는 이집트의 파라오 투트모스 3세가 만들고, 투트모스 4세가 테베의 카르낙 사원에 세운 것이었다. 그의 아버지 콘스탄티누스가 오벨리스크를 콘스탄티노플로 이송하려 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가져가지 못한 것이었다.


 콘스탄티우스는 새로 가져온 오벨리스크를 아우구스투스가 이미 세워 놓았던 오벨리스크 반대쪽에 가져다놓았다. 제정 로마를 세운 초대 황제와 어깨를 견주게 됐으니 그로서는 감개무량한 일이었다.


 

 

로마인은 왜 전차경주를 좋아했을까



 키르쿠스 막시무스는 1년 내내 빌 틈이 없었다. 대여 신청이 넘쳐났기 때문이었다. 제정 시대인 1세기에는 한 해에 135일 동안 전차경주 등이 진행됐다. 여기에 기록에 남지 않은 행사까지 더 하면 실제로는 더 많았을 것으로 역사학자들은 보고 있다.


 행사를 여는 날이 아니어도 키르쿠스 막시무스를 사용해야 하는 이유가 많았다. 전차경주 기수는 경기를 앞두고 미리 경주장에서 연습을 했다. 야생동물 사냥 행사를 앞두고는 인근 가축시장에서 몰고 온 동물을 출발문 바로 앞의 우리 안에 가둬 두어야 했다.


로마인의 전차경주 사랑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대단했다. 전차경주가 열리는 날이면 로마 시내는 거의 비다시피 했다. 그래서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전차경주가 개최되는 날에는 근위대 병사를 시내 곳곳에 배치해 도둑이 기승을 부리는 것을 막았다. 


 말의 이름과 색깔, 능력 있는 기수의 이름이 목록으로 만들어져 팔려 나가기도 했다. 오늘날의 팬 북과 비슷했다. 도박도 성행해 경기 때마다 엄청난 판돈이 오갔다. 경쟁이 과열돼 경기가 끝난 뒤 각 회사별 지지자 사이에 패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고대 로마 시대의 훌리건이었던 셈이다.


 특정 팀이나 기수가 경주에서 이기려고 경주 전날 상대 기수나 말에게 약물을 먹였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점술사를 동원해 상대 기수에게 저주를 퍼붓기도 했다. 20세기 들어 키르쿠스 막시무스 주변을 발굴하던 도중 독특한 내용이 담긴 돌조각이 나왔다. 거기에는 이런 저주가 새겨져 있었다.


 ‘악마여, 너에게 부탁하노니 오늘 이 시간부터 하얀색 팀과 초록색 팀 말을 고문하고 죽이도록 하라. 두 팀 기수 칼리체, 펠릭스, 프리물루스, 로마누스를 박살내 죽이도록 하라. 그들의 몸에 호흡이 남지 않도록 하라.’


 로마인이 전차경주에 얼마나 흠뻑 빠졌는지는 1~2세기 로마 풍자시인 데키무스 유니우스 유베날리스가 한 말에서 잘 나타난다. 그는 역사에 길이 남을 유명한 말을 했다. 바로 ‘빵과 서커스’라는 표현이었다. 라틴어로는 ‘파템 에트 키르켄세스’였다. 이 표현은 그가 쓴 『풍자시집』에 나온다. 그 내용은 이렇다.


 ‘이미 오래 전, 투표 권리를 팔아먹지 않았을 때부터 로마 시민은 의무를 방기해 왔다. 옛날에는 군사지휘권과 고위관직, 군대 등 모든 것을 분배했던 로마 시민은 지금은 단 두 가지를 얻으려고 모든 권리를 자제한다. 바로 빵과 서커스다.’


 로마 정치인이 권력을 장악하고 유지하기 위해 로마 시민에게 무료 밀을 나눠주고, 키르쿠스에서 전차경주와 검투사경기 등 다양한 오락거리를 제공한 것을 그는 못마땅하게 생각한 것이었다. 


 로마인은 왜 전차경주를 그렇게 좋아했을까? 그 이유는 오늘날 자동차경주에서 유추해볼 수 있다. 자동차경주는 엄청난 스피드를 겨루는 경기다. 게다가 매우 위험하다. 안전에 꽤 신경을 쓰지만 사고를 막을 수는 없다. 그래서 자동차가 뒤집히거나 선수가 죽고 다치기도 한다. 


 전차경주도 마찬가지였다. 당시로서는 전차가 최고의 스피드를 자랑하는 차량이었다. 특히 관중석으로 둘러싸인 타원형 경기장 안에서 경기가 벌어졌기 때문에 먼지까지 더해 속도감은 더 굉장했을 것이다. 전문가들은 전차경주의 속도는 시속 70㎞를 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당연히 전차경주 도중 사고가 자주 일어나 죽고 다치는 기수가 적지 않았다. 


 경기에서 사고가 발생하지 않는 게 가장 좋지만, 특이하게도 이렇게 되면 그 경기는 관중으로부터 흥미를 끌지 못한다. 단순히 스피드 경쟁만으로는 관중을 열광시킬 수 없다. 사고가 날 듯 안 날 듯 아슬아슬하게 경기가 진행돼야 관중은 손에 땀을 쥐게 된다. 그러다 가끔 사고가 나서 사람이 죽고 다칠 경우 관중은 한편으로는 안타까워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즐거워한다. 그것이 사람의 심리다. 


 키르쿠스 막시무스에서 가장 인기 있었던 자리는 출발점 반대편의 회전 지점이었다. 각 전차가 원뿔 모양 메타를 돌아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가는 위치였다. 이 곳의 인기가 높았던 것은 회전을 하는 동안 전차끼리 부딪혀 넘어지거나 깨지는 사고가 많이 났기 때문이었다. 물론 기수가 죽거나 다치는 경우도 허다했다.


 전차끼리 충돌하고 기수가 날아다니거나 전차 바퀴에 깔리거나 말발굽에 짓밟히는 장면은 관중 입장에서는 장관이었을 것이다. 사고가 자주 일어나는 경기장의 이 회전 부분을 로마인은 ‘난파선’이라는 뜻인 나우프라기아라고 불렀다. 


 BC 1세기 최고의 시인 오비디우스는 전차경주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끼던 연인이 전차경주 팬이었기 때문에 키르쿠스 막시무스에 안 갈 수 없었다. 그는 『변신』에서 그곳에 간 경험을 이렇게 표현했다. 경기장 분위기를 잘 설명하고 있으면서도 은근히 위트를 포함한 질투심을 담고 있어 무척 재미있는 글이다.

 

 ‘기백 넘치는 말을 찬양하려고 여기(키르쿠스 막시무스) 앉아 있는 것은 아니다. 네 옆자리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려는 것이다. 네가 보여주는 열정이 낯선 것은 아니구나. 너는 경주에 푹 빠져 있구나. 그런 너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다. 각자를 즐겁게 하는 걸 보도록 하자. 각자의 눈을 만족시키는 걸 보도록 하자. 누구인지 모르지만 네가 좋아하는 기수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구나. 


 네가 모든 관심을 쏟고 있는 것은 그 기수의 구역이구나. 그게 나의 구역이었으면 얼마나 좋으랴! 신성한 출발점에서 기수들이 뛰어나올 때 속에서 끌어 오르는 질투심을 억지로 누른다. (대회 개막을 알리는)퍼레이드가 다가온다. 그들에게 행운이 함께하라고 기원하자. 이제 환호할 시간이다. 퍼레이드가 더 가까이 다가온다. 황금빛으로 반짝거리면서….


 키르쿠스는 정리됐고, 법무관은 마구간에서 말 네 마리를 단 전차들을 풀어놓는다. 정말 장관이로다. 네가 가장 좋아하는 기수를 본다. 네가 축복을 보내는 자가 누구이든 반드시 승자가 되기를! 


 이런! 반환점에서 너무 넓게 돌아버렸다. 도대체 뭐하는 놈이냐? 뒤에 따라오던 녀석이 바퀴 쪽에 바짝 붙더니 추월해버렸다. 가련한 놈, 도대체 뭐하는 것이냐? 미인의 희망을 산산조각 내버렸구나. 다시 고삐를 당겨라. 이렇게 간청한다. 손에 힘을 꽉 주고 왼쪽으로 말이다. 우리는 이런 멍청이에게 매달려 있었구나. 하지만 로마인은 다시 그를 부른다. 옷을 흔들면서 관중석 곳곳에서 신호를 보낸다. 보라! 그를 다시 부르고 있다. 옷을 흔든다고 네 아름다운 머리카락이 흐트러지는 것은 아니다. 


 이제 다시 출발문이 열린다. 측면은 넓게 열려 있다. 말은 전속력으로 달린다. 관중은 흥분한 상태다. 이번에는 어찌 됐든 반드시 승리하라. 넓은 공간을 꼭 지켜서 나의 소원을, 내 연인의 소원을 성공으로 이루도록 하라.


 연인의 소원은 성취됐다. 나의 소원은 아직 남았다. 기수는 (승자에게 주는)종려나무 관을 들고 있다. 나는 아직 종려나무 관을 받지 못했다. 너는 웃고 있다. 그리고 감정이 풍부한 아름다운 눈으로 나에게 무엇인가를 약속한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나머지는 다른 장소에서….’


 처음에는 전차경주에 참가하는 팀을 운영하는 회사가 알바타와 루사타 두 개뿐이었다. 그래서 전차경주에도 두 회사 팀만 참가했다. 나중에는 전차경주 운영사가 4개로 늘어났다. 매 경주에는 12개 전차가 참가했으니 회사마다 3개 팀을 내세운 셈이다.


 각 회사의 팀은 색으로 구분했다. 네 가지 색은 사계절을 의미했다. 초록색 팀은 봄, 붉은색 팀은 여름, 하늘색 팀은 가을, 하얀색 팀은 겨울이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여기에 아루라타, 푸르푸레아를 더해 팀 수를 여섯 개로 늘렸다. 그가 죽은 뒤에는 다시 네 개로 돌아갔다.


 전차경주는 하루에 25차례 거행했다. 각 경기는 ‘한 판’이라는 뜻의 우누스 미수스라고 불렀다. 매일 마지막 경기는 ‘평민의 한 판’이라는 뜻인 미누스 아에라리우스라고 불렀다. 마지막 경기 진행 비용은 전차경주를 보러 몰려든 평민으로부터 걷은 돈으로 충당했기 때문이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대에는 일시적으로 전차경주 시행 회수를 하루 100회로 늘리기도 했다. 이렇게 하면 절대적으로 시간이 모자랐기 때문에 경기 때 트랙 일곱 바퀴를 돌던 것을 다섯 바퀴로 줄여야 했다. 


 출발점인 카르케레스의 마구간은 추첨으로 출전자에게 배정했다. 입구에는 정지 지점을 표시하는 헤르메스 주상이 세워져 있었다. 여기에 달린 밧줄을 제거하면 대기신호가 내려진 것이었다. 이때 행사 진행자가 직접 손으로 문을 열었다.


 모라토레스로 불리는 심판관이 각 전차를 하얀 줄에 나란히 세우면 다른 심판관이 손수건을 떨어뜨려 출발신호를 내린다. 이때 전차 네 대가 동시에 뛰어나가며 경기가 시작된다.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에 따르면 때로는 나팔을 불어 출발신호를 알리기도 했다. 손수건 출발신호의 유래는 카시오도루스의 『서신집』에 나온다. 


 ‘네로 황제가 키르쿠스 막시무스에서 식사를 하고 있을 때 경기 출발신호를 알리라는 관중의 열광적 함성이 터져 나왔다. 네로는 입과 손을 닦는 손수건을 떨어뜨렸고, 이렇게 해서 경기는 시작됐다.’ 


 전차는 쿠루스라고 불렀다. 바퀴는 두 개였고 지붕과 좌석이 없는 무개차였다. 전차는 대개 가죽으로 만들어 매우 가벼웠다. 말이 끌 때 부담을 덜 느끼게 하려는 것이었다. 바퀴에 가죽 바구니 하나를 얹어 놓은 정도였을 것이다. 길이는 1m 정도에 불과했다. 전차에 말 두 마리를 단 이두마차는 비가, 세 마리를 단 삼두마차는 트리가, 네 마리를 단 사두마차는 쿼드리가라고 했다. 로마 시대에 사용했던 전차 실물은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도자기나 돌로 만든 모형 작품을 보고 그 모습을 추정할 뿐이다.


 사두마차일 경우 가장 힘이 센 두 마리에게 멍에를 씌워 마차에 직접 연결했다. 나머지 두 마리는 멍에를 씌우지 않고 줄로만 연결해 앞에 세웠다. 기수는 말 네 마리에 연결된 고삐를 두 손에 두 개씩 나눠 잡았다.


 전차를 모는 기수는 아우리가라고 불렀다. 노예 출신이 많았다. 경주에서 많이 이겨 돈을 많이 벌면 자유를 사 해방노예가 되기도 했다. 전차경주에서 죽는 기수가 많았기 때문에 은퇴해서 장수하는 기수는 경기에서 승률이 높지 않아도 유명인으로 인기를 누렸다.


 아우리가는 경기에서 전차를 몰 때 고삐를 온 몸에 둘둘 두른 뒤 손으로 잡았다. 그래야 몸을 뒤로 기울여 체중을 이용해 말을 쉽게 부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하면 사고가 났을 때 죽을 위험성이 높았다.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기수는 허리에 단검을 꽂고 다녔다. 전차가 뒤집힐 경우 몸에 두른 고삐를 잘라내기 위해서였다. 


 전차경주에서 규칙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영화 '벤허'에 나오는 것처럼 다른 기수를 채찍으로 때려 경주를 방해할 수도 있었다. 손이나 채찍으로 상대 기수를 마차에서 떨어뜨려도 무방했다. 이것은 관중이 원하는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전차 바퀴에 송곳을 달아 상대 전차 바퀴를 부수는 행위를 허용했는지는 불분명하다. 


 전차경주가 끝나면 스피나에서 시상식을 열어 승자에게 종려나무 관을 씌워주었다. 우승상금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았다. 경기당 1만 5천~6만 세스테르티우스였다. 당시 로마 병사  연봉의 20~70배 정도였다. 전차경주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는 기수는 매우 유명한 슈퍼스타가 됐고 엄청난 돈을 벌었다.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두 기수는 2세기 무렵 생애 통산 1천463승을 거둔 가이우스 아풀레이우스 디오클레스와 1세기 무렵 에스파냐 노예 출신 기수로 28세에 죽기 전까지 2천48승을 기록한 스코르푸스였다. 


 하드리아누스와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 시절에 활약했던 디오클레스는 매우 장수한 기수였다. 열여덟 살에 데뷔해 마흔두 살에 은퇴할 때까지 24년 동안 4천257경기에 출장해 30% 이상 승률을 기록했다. 디오클레스는 엄청난 돈을 벌었다. 은퇴할 때까지 총수입은 3천586만 세스테르티우스였다. 황금 2천600㎏의 가치를 가지는 금액이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교의 역사학 교수 피터 스트럭은 이렇게 평가했다.


 “디오클레스는 ‘역사상 가장 돈을 많이 번 운동선수’였습니다. 그의 수입을 현대 가치로 환산하면 60억~150억 달러에 이를 겁니다.”


 당시 로마에서 그보다 재산이 많은 부자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그의 승수와 수입을 오늘날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의 묘비에 상세한 내용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스코르푸스는 10대였을 때 전차경주 기수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스물한 살이던 90년 로마로 건너가 키르쿠스 막시무스에서 열린 경기에 출전하기 시작했다. 스코르푸스는 불과 10년 동안 5천~6천 회 전차경주에 출전해 2천48승을 거뒀다. 매년 500~600회에 이르는 엄청난 출전 회수였다. 그도 엄청난 돈을 벌었다. 죽을 때 남긴 재산은 요즘 화폐 가치로 따지면 150억 달러에 이르렀다.


 로마의 시인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마르티알리스는 스코르푸스가 경주 도중 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추모 시를 남겼다. 그의 엄청난 인기를 잘 보여주는 시다.


 ‘아! 얼마나 슬픈 불행인가! 스코르푸스, 

인생의 절정기에 꽃송이가 꺾이다니. 

플루토는 마차 장식이 얼마나 급했기에 

그렇게 성급히 스코르푸스를 불렀는가! 

전차경주는 당신의 놀라운 속도 덕분에 항상 짧아졌다.

하지만 왜 당신은 인생 마차를 그렇게 급히 몰고 갔단 말인가!’   




영광의 세월은 사라지고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4세기 이후 로마가 하락세로 접어들면서 키르쿠스 막시무스와 전차경주도 시들기 시작했다. 전차경주를 하루 개최하려면 엄청난 자금이 필요했지만 로마 멸망을 전후한 시기에는 그만한 돈을 낼 수 있는 사람이 드물었다.


 키르쿠스 막시무스에서 전차경주가 마지막으로 열린 것은 6세기 무렵 로마를 점령한 동고트 왕 토틸라 때였다. 이후 이곳은 로마제국을 지배한 기독교의 철저한 무관심 속에 수백 년 동안 폐허로 방치돼 있었다. 찾는 사람은 없었지만 10세기까지만 해도 이곳은 과거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포로 로마노, 콜로세움처럼 채석장 운명을 피할 수는 없었다. 


 중세시대에 교회를 지으려는 성직자, 저택을 건설하려는 귀족이 대리석 기둥 등을 뜯어가는 바람에 키르쿠스 막시무스는 망가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테베레 강이 수시로 범람할 때 토사가 밀려와 끊임없이 쌓이는 바람에 그나마 남아있던 잔해마저 땅 속 깊숙이 파묻히고 말았다. 홍수로 토사가 쌓인 덕분에 12세기 무렵 키르쿠스 막시무스는 농사짓기에 좋은 땅으로 변하게 됐다. 그래서 많은 농민이 이곳에서 밀 등 여러 곡물을 재배하게 됐다.


 오벨리스크는 1587년 교황 식스토 5세 시대에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코르소 거리 끝에 포폴로 광장이 있다. 쌍둥이 교회로 유명한 장소다. 이곳 한복판에 사자 분수가 있고, 분수 가운데에 오벨리스크가 있다. 바로 이것이 아우구스투스의 오벨리스크다. 콘스탄티우스 2세가 건립했던 오벨리스크는 라테라노 대성당으로 이전됐다. 지금은 라테라노 대성당 앞으로 옮겨졌다. 무게가 무려 455t이어서 현재 제대로 서 있는 오벨리스크 중에서는 전 세계에서 가장 무겁다고 한다. 


 19세기 중엽부터 키르쿠스 막시무스의 원래 모습을 확인해보기 위한 발굴 작업이 시작됐다. 가장 먼저 관중석 아랫부분과 경기장 밖 열주 회랑이 발굴됐다. 이후 여러 차례 발굴 작업에서 관중석과 반환점, 중앙 분리대 등이 드러났다.


 BC 1세기 로마 시인 푸블리우스 베르길리우스는 키르쿠스 막시무스에서 관람한 전차경주를 묘사한 시를 남겼다. 시를 읽는 사람의 마음마저 흥분하게 만들 정도로 생동감 넘치는 시다. 당시 전차경주를 지켜보던 관중의 심장 박동소리가 들리는 듯한 착각마저 느끼게 한다.


 지금 키르쿠스 막시무스에 가면 그의 시를 생각나게 하는 풍경은 없다. 해마다 봄에 피어나는 트랙 주변의 푸른 잡초 말고는 남아 있는 것조차 드물다. 로마에서 가장 많은 사람을 불러 모을 수 있는 대형 공간이어서 각종 대규모 행사가 수시로 열릴 뿐이다. 


 ‘쏟아져 나오는 전차를 본 적이 있는가

땅을 부수려는 듯, 머리를 먼저 내밀려고 다투는 듯 

희망은 깨어나고 두려움은 요동치고

심장은 흥분으로 달아오르네

채찍은 쥐어짜듯 꽉 붙들고

앞으로 몸을 숙여 고삐를 풀 때

뜨겁게 달아오른 차축은 마침내 회전하네

지금은 낮게 지금은 아주 높게 

진공을 통해 옮겨지듯 하늘로 날아오르고

늦어도 안 되고 쉴 틈도 없지

노란 먼지 구름 뽀얗게 일어나면

온 몸은 거품으로 젖고 숨결은 단 하나를 쫓아가네

너무나 강렬한 영광의 욕망, 간절한 승리를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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