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신전? 용비어천가?
피렌체 사람인 미켈란젤로는 누구나 다 아는 16세기 르네상스 시대의 대예술가다. 그는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의 조각 피에타, 바티칸의 천장벽화 천지창조, 피렌체 아카데미아 미술관의 조각 다비드상 등 역사에 길이 남을 대작을 연이어 만들었다.
한편으로는 ‘파괴자의 손’이기도 했다. 미켈란젤로는 교회나 귀족으로부터 건축물, 조각 작품 의뢰를 받는 일이 많았다. 그는 그럴 때마다 직접 또는 도급업자를 시켜 고대 로마의 유적에서 대리석 등 온갖 석재를 다 뜯어가 작업에 사용했다. 이 때문에 포로 로마노 등 많은 로마의 유적은 먼지로 변해버렸다.
미켈란젤로는 1546년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공사를 맡아달라는 교황 바오로 3세(재임 1534~49년)의 부탁을 받았다. 이전 건축가들은 대성당에 돔을 올리는 문제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그는 피렌체에 있는 두오모 즉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돔을 생각했다.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하던 것을 브루넬레스키가 달려들어 18년 만에 완공한 돔이었다.
미켈란젤로는 피렌체의 지인으로부터 100년 전 브루넬레스키가 로마의 판테온 돔에 몰래 올라가 벽돌이 서로 완벽하고 견고하게 맞물려 있는 것을 눈으로 확인한 뒤 두오모 돔에 적용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는 직접 판테온에 가보기로 했다. 브루넬레스키가 거기서 무엇을 봤는지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로 했다.
미켈란젤로는 사물을 볼 때는 항상 예술가의 눈으로 비판적인 견해를 견지하던 사람이었다. 어떤 일에 쉽게 감동받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그는 판테온에 들어가자마자 깜짝 놀라고 말았다. 가슴은 쿵쾅거리고 호흡은 가빠졌다. 쉽게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고개를 들고 한참동안이나 돔을 올려다보던 그는 상기된 얼굴로 옆에 서 있던 지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판테온은 사람이 아니라 천사가 만든 것입니다.”
미켈란젤로의 말처럼 판테온은 한마디로 건축의 신비다. 어떤 사람은 마르스 평원의 스핑크스라고 감탄하기도 한다. 18세기 프랑스 작가 스탕달은 로마에서 판테온을 보고는 이렇게 감탄했다.
“고대 로마 유적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이군. 여기에 들어와 있으니 마치 로마 전성기에 살고 있는 느낌이 들어.”
스탕달의 말처럼 판테온은 고대 로마를 넘어 이탈리아 역사를 통틀어 가장 훌륭한 건축물이라고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다. 콜로세움, 산탄젤로 성, 성 베드로 대성당 등 로마에는 훌륭한 건축물이 적지 않지만 건축학적 아름다움과 기술적 창의성에서는 판테온을 최고 자리에 올려놓아도 전혀 무리는 아니다.
판테온의 아름다운 균형과 조화, 거기에 바탕을 둔 완벽한 안정감을 알게 된 많은 현대 건축가는 “고대 건축의 기적”이라며 말을 잇지 못한다.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판테온이 어떤 곳인지 아는 게 그다지 많지 않다. 이처럼 위대한 인류의 건축물을 어떤 천재 건축가가 설계했는지, 용도는 무엇이었는지, 이곳에서는 무슨 일을 했던 것인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객관적 사실만 단편적으로 몇 개 존재한다. 판테온 자리는 로물루스의 전설이 서린 곳이고, 제정 초기 로마의 2인자였던 아그리파가 건설을 총괄했고, 유쾌한 황제 하드리아누스가 완전시 새로 지었다는 것이다. 판테온의 비밀을 밝히려면 여러 파편들을 모아 퍼즐처럼 하나씩 맞춰나가며 상상을 보탤 수밖에 없다. 신비의 건축물에 숨겨진 비밀을 찾으러 판테온으로 여행을 떠난다.
판테온의 역사는 로물루스로 거슬러 올라간다. ‘판테온과 로물루스가 무슨 관계가 있느냐’며 고개를 갸웃거릴 수도 있겠지만, 판테온이 건설된 자리는 로물루스가 죽어 승천했다는 신화가 있는 곳이다. 이런 장소에 판테온을 세운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그래서 로물루스 이야기를 먼저 꺼내지 않을 수 없다. BC 1세기~서기 1세기 로마 역사학자였던 티투스 리비우스가 쓴 『로마사』와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시오스가 쓴 『로마의 유적』 등 여러 역사책에 그 이야기가 나온다.
권력과 지위를 가진 사람이 대부분 그렇듯이 세월이 흐르면서 로물루스는 변해갔다.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면서 교만에 빠졌다. 붉은 옷이나 자주색 단을 단 기다란 웃옷을 걸친 채 호화로운 옥좌에 앉아 거만하게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어디를 행차하더라도 몸에 가죽 띠를 두르고, 몽둥이를 든 자들을 앞장세워 길을 내게 했다.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했고, 싫어하기 시작했다.
귀족으로 이뤄진 원로원이 더 심했다. 그들은 초창기와 많이 달라진 로물루스를 신뢰하지 않았다. 로물루스는 그의 모험에 동참한 병사에게는 친절했고, 땅과 전리품을 나눠주었다. 하지만 원로원을 대하는 태도는 달랐다.
로물루스가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한 지 38년이 지난 715년 7월 7일이었다. 그의 나이 58세 때였다. 그는 마르스 평원에서 군대를 열병하고 있었다. 당시 이곳은 ‘염소 늪’으로 불렸다.
로물루스가 시민들에게 열변을 토하고 있을 때 갑자기 하늘이 흐려지면서 엄청난 천둥번개가 몰아쳤고 세찬 소나기가 퍼부었다. 해는 빛을 잃고 캄캄해졌고, 짙은 구름이 하늘에서 내려와 로물루스를 감쌌다. 너무 구름이 짙어 옆에 앉은 사람도 볼 수 없었다.
겨우 비가 그치고 구름이 걷힌 뒤 사람들이 정신을 차려 보니 로물루스가 사라지고 없었다. 옥좌는 주인을 잃고 비어 있었다. 곁에 있었던 원로원 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불더니 로물루스를 하늘 높이 데려갔습니다. 그는 땅에서도 어진 임금이었듯이 지금은 자비로운 신이 돼 하늘 위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로마인들은 갑작스럽게 왕을 잃은 슬픔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일부는 ‘하늘이 데려갔다’는 원로원 의원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궂은 날씨를 틈타 의원들이 왕을 살해한 거야.”
당시 로마에 율리우스 프로클루스라는 남자가 있었다. 아주 현명하고 말을 잘 하는 것으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평소 중요한 문제에 훌륭한 조언을 잘 해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로물루스가 사라져 사람들이 불안에 떨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그는 며칠 뒤 민회에 나타나 이렇게 이야기했다.
“로물루스가 오늘 새벽에 하늘에서 내려와 내게 나타났습니다. 내가 ‘왜 우리를 혼란에 빠뜨리고 사라졌느냐’고 물었더니 ‘나는 오랫동안 인간 세상에 살았다. 이제 하늘로 돌아가는 것이 신의 도리다. 하늘의 뜻에 따라 로마는 세계의 수도가 될 것이다. 로마인에게 군인이 되는 법을 배우라고 하라. 그들에게 내 뜻을 전하라. 나는 신이 되어 로마를 지킬 것이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로마인들은 프로클루스의 말을 그대로 믿었다. 그들은 로물루스를 국부로 삼고 신으로 모시기로 결정했다. 로마인들은 그에게 마르스를 뜻하는 퀴리누스라는 별칭을 선사했다. 당시 로마인을 퀴리테스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로물루스가 나라를 잘 다스렸기 때문에 퀴리누스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주장도 있다.
로마에 있는 퀴리날레 언덕은 퀴리누스라는 이름에서 딴 것이라고 한다. 신화에 따르면 로마인들은 로물루스가 승천한 자리에 작은 신전을 하나 지었다. 해마다 그곳에서 제사를 지내 건국의 영웅에게 제물을 바쳤다.
과연 로물루스는 왜, 어떻게 죽었을까?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시오스는 『로마의 유적』에 이렇게 기술했다.
‘로물루스는 갑자기 죽었다. 전쟁을 충분히 수행할 수 있는 활기 넘치는 나이였다. 하늘이 흐려지더니 갑자기 그가 보이지 않았다고 하는 기록도 있지만 다른 주장도 많다.
분명한 것은 로물루스가 전쟁에서 죽었거나 다른 부족에게 암살당한 게 아니라 로마인에게 살해당했다는 사실이다. 그가 관습을 어기고 노예로 팔 수 있는 전쟁포로를 임의로 풀어줬다거나, 기존 로마 시민을 새 시민을 차별했다거나, 명령을 어기고 이웃 부족을 약탈한 로마인을 타르페이아 바위 아래로 던져버리는 등 가혹한 처벌을 일삼았다던 게 그 이유로 손꼽혔다.
하지만 결정적 이유는 그가 마치 전제군주처럼 모든 일을 독단적으로 처리했고 로마인에게 너무 가혹해졌다는 것이었다.
로물루스를 어떻게 죽였는지를 두고 여러 가지 견해가 나온다. 원로원이 공모해 회의장에서 그를 죽여 산산조각 낸 뒤 각 의원이 시체 조각을 하나씩 옷 밑에 숨겨 들고나가 로마 시민들이 모르게 버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는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한 치 앞도 잘 안 보이던 날 새로 로마 시민이 된 사람들이 그를 죽였다는 주장도 있다.’
판테온을 처음 건설한 사람은 고대 로마 제정의 첫 황제였던 아우구스투스의 친구이자 장군이면서 나중에는 사위가 됐던 마르쿠스 빕사니누스 아그리파였다. 그는 로물루스의 신화가 남은 땅에 판테온을 짓기로 했다. 왜 아그리파가 판테온을 건설한 것인지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그의 인생 이야기가 좀 필요하다.
아그리파는 BC 64~62년 사이 로마 외곽의 이탈리아 시골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역사학자들은 그의 고향을 다양하게 추정한다. 이탈리아 북부 피사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르피노, 이스트리아, 아시시움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아그리파의 아버지는 공직 경험을 한 적이 없는 평민인 루키우스 빕사니우스였다. 그가 무슨 일을 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나중에 로마로 이사했고 기사 계급으로 올라갔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빕사니우스 씨족의 조상이 어떤 내력을 갖고 있는지도 불분명하다. 빕사니우스라는 성을 가진 로마인은 매우 드물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그리파는 나중에 이 씨족 이름을 버리고 싶어 했다.
아그리파에게는 같은 이름을 가진 형이 있었다. 여동생도 있었는데 빕사니아 폴라였다. 형은 내전에서 동생과는 달리 율리우스 카이사르 반대편에 섰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가 파르살로스 대회전에서 패한 뒤 반 카이사르의 중심인물이 된 소 카토가 아프리카로 달아났을 때 그의 형도 따라갔다. 카이사르가 소 카토 세력을 아프리카에서 격파했을 때에는 포로로 붙잡혀 로마로 끌려왔다. 아그리파는 곧바로 옥타비아누스에게 달려갔다.
“카이사르께 우리 형 목숨을 살려달라고 부탁해 줘.”
“걱정하지 마. 삼촌은 사람을 함부로 죽이는 분이 아니야. 네 형은 꼭 살려주실 거야.”
아그리파는 옥타비아누스와 한 살 차이 이내로 비슷한 나이였다. 둘은 함께 교육을 받았고 청소년기를 함께 보내며 친한 친구가 됐다. 기사계급 아버지를 둬 부자였던 옥타비아누스와 같은 곳에서 교육을 받았다는 걸 보면 아그리파의 집안도 가난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카이사르가 아그리파의 소질을 파악해 옥타비아누스와 함께 교육받게 했는지, 아니면 아그리파와 함께 공부하다 친해진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에게 친구를 소개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어쨌든 카이사르는 옥타비아누스를 후계자로 삼으면서 그에게 부족한 군사적 능력을 메워줄 친구로 아그리파를 붙여주었다. 아그리파는 이후 평생 옥타비아누스에게 훌륭한 친구이자 단 하나뿐인 오른팔이면서 언제나 믿을 수 있는 장군으로 충성을 다하게 된다. 카이사르가 암살당했을 때 아그리파는 그리스 아폴로니아에 있던 옥타비아누스에게 이렇게 조언했다.
“로마로 당장 달려가야 해. 늦으면 말짱 도루묵이야.”
만약 그때 옥타비아누스가 로마로 서둘러 돌아가지 않았다면 그는 카이사르의 유언을 볼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 로마의 1인자로 올라설 수도 없었을 것이다. 아그리파는 이후 카이사르의 기대에 걸맞게 악티움 해전뿐만 아니라 여러 전쟁에서 연전연승함으로써 옥타비아누스가 황제 자리에 오를 수 있는 기반을 조성했다.
아그리파는 제국의 이익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할 줄 알고, 황제 아우구스투스에 가려져 평생 2인자 자리에 머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흔쾌히 받아들인 ‘고귀한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1세기 로마 역사학자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는 『로마사』에서 이렇게 평가했다.
‘아그리파는 분명한 개성을 가진 사내였다. 아무리 힘들어도, 하루 종일 잠을 자지 않아도, 어떤 위험에 빠져도 굴복하지 않는 성격을 가졌다. 그는 무슨 일을 하더라도 늦는 법을 알지 못했다. 복종심이 매우 강했지만 단 한 사람에게 만이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명령하기를 좋아했다.’
아그리파는 수치스러운 경우가 생겨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BC 33년 아우구스투스가 그를 조영관 자리에 앉혔을 때가 그랬다. 조영관은 로마인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일들을 살피거나, 축제 등 각종 행사를 준비하는 직책이었다. 아그리파는 4년 전 집정관 자리를 맡기도 했고, 시칠리아 전쟁에서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막강 해군을 눌러 아우구스투스에게 로마 정치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런 사람에게 집정관보다 서너 계단 밑의 자리인 조영관을 맡기는 것은 매우 이색적이었고, 어떻게 보면 모욕적이었다.
“자리가 얼마나 높은지는 문제가 아니야. 중요한 것은 아우구스투스가 내게 일을 맡겼다는 것이지.”
아그리파는 전쟁터에서 그랬던 것처럼 전혀 불평하지 않고 아무 말 없이 충실하게 임무를 수행했다. 그는 조영관으로 일하는 동안 수로인 아쿠아 율리아를 새로 건설했고, 다른 수로인 아쿠아 마르키아를 보수해 고질적인 로마의 물 부족 문제를 완벽하게 해소했다. 또 각종 도로와 하수구를 보수했고, 엄청난 규모의 검투사경기 등 다양한 행사도 성공적으로 개최했다.
아그리파의 조상은 원로원 계층이 아니었다. 아무리 노력하고 훌륭한 성과를 거둬도 아우구스투스의 자리를 차지할 수 없다는 사실은 자명했다. 아그리파는 어릴 때 이미 이런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할 수 있는 일 중에서 차선을 선택했다. 바로 황제의 오른팔인 2인자가 되는 것이었다.
‘로마에서 혈통과 전통의 힘은 막강해. 율리우스 카이사르도 이해했듯이 이것은 절대 무시할 수 없는 거야. 나는 절대 로마에서 1인자가 될 수 없어. 아우구스투스에 이어 영원한 2인자에 머물러야 해. 내가 가야할 길은 군대야. 아쉽지만 운명을 받아들이자.’
고향이 어디인지조차 모를 정도인 시골 평민 집안에서 태어난 아그리파는 아우구스투스가 황제 자리에 오른 뒤 로마의 2인자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당시 많은 로마 귀족이 그랬던 것처럼 공공사업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다. 로마 최초의 대형 공중목욕탕인 아그리파 욕장을 건설한 그는 새로운 건축물을 하나 더 만들기로 했다. 그것이 바로 판테온이었다. 1~2세기 로마 역사학자 카시우스 디오는 『로마사』에 이렇게 적었다.
‘아그리파는 사재를 털어 도시를 아름답게 꾸몄다. 넵투누스 바실리카를 지었고, 라오코니아 김나지움도 건설했다. 그리고 판테온도 만들었다.’
아그리파가 판테온을 건설하기 시작한 것은 BC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을 무찌른 직후인 BC 27~25년 사이였다. 완공한 것은 로마가 에스파냐를 완전 제패한 BC 19년이었다. 이것은 모두 추정일 뿐 실제 언제 착공해서 언제 완공했는지는 분명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판테온의 용도가 무엇이었는지를 두고도 견해가 엇갈린다.
“판테온이라는 이름과 건물 현관의 모양, 그리고 페디먼트 장식을 고려하면 범신전이지.”
“그곳에서 어떤 신을 모셨는지 알려진 게 없어. 다른 목적을 가진 건축물이었을 거야.”
아직까지 다수설은 아그리파가 건설한 판테온을 범신전으로 보는 시각이다. 당시 로마는 일신교가 아니라 다신교 국가였는데, 판테온은 세상의 모든 신을 모신 신전이었다는 것이다. 판테온이라는 이름을 분석해보면 ‘모든’이라는 뜻의 ‘판’과 ‘신전’을 뜻하는 ‘테온’이라는 그리스어로 구성돼 있다. 그러니 이런 해석이 충분히 가능하다.
2세기 그리스 지리학자인 파우사니우스에 따르면 모든 신을 모시는 범신전은 고대 그리스의 펠로폰네소스 지역 여러 곳에 존재했다. 스파르타 영역에 있던 국가였던 라코니아의 마리오스와 아르골리스, 메세니아, 아르카디아 등이었다. 올림피아, 데스포이나의 신성한 숲, 아카케이시온 등에는 모든 신에게 바치는 제단이 설치돼 있었다. 그리스에 범신전이 다수 존재했다면 그리스문화를 흠모했던 로마인이 이를 모방해 건설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판테온 안에는 일곱 개의 제단이 설치돼 있었다. 그래서 이 신전은 태양계에 있는 일곱 개의 별 즉 헬리오스, 셀레네, 베누스, 마르스, 유피테르, 사투르누스에 바쳐진 것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신전의 중앙 돔을 막지 않고 구멍인 오쿨루스를 두어 하늘이 보이게 한 것도 이 때문이라는 것이다. 19세기 독일 역사학자 테오도르 몸젠은 이렇게 추정했다.
‘판테온에는 일곱 개의 벽감이 만들어져 있었다. 그곳에는 일곱 행성의 신이 자리를 잡고 있었을 것이다.’
완전히 다른 두 번째 견해도 있다. 판테온은 한마디로 ‘건축의 용비어천가’였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주장이다.
“아그리파의 판테온은 일반적인 신전이 아닙니다. 카이사르를 낳은 율리우스 가문과 그의 양자이자 후계자인 아우구스투스 황제를 신격화하려는 뜻에서 만든 성소였습니다. 판테온이라는 이름은 별칭이었습니다.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정식 명칭이 따로 있었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을 로마에 번영과 평화를 가져다주고, 특히 새로운 지도자의 계보를 시작한 사람이라고 강조했다. 그의 가족만이 로마에 영원한 평화와 부를 지속시킬 수 있다고 로마인에게 각인시키려 애썼다.
아그리파는 아우구스투스의 생각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트로이에서 건너온 베누스의 후손이었으며 제정 시대 초대 황제를 배출한’ 율리우스 씨족의 영광을 높이기 위해 건축물을 하나 만들기로 했다. 이런 취지에 어울리는 장소를 고민하던 그는 로물루스가 하늘로 올라갔다는 염소 늪을 떠올렸다. 이곳에 신전을 지으면 로마 건국의 영웅 로물루스를 제정 로마의 창시자 율리우스는 물론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와 연결시킬 수 있다는 게 그의 계산이었다. 1세기 로마 학자 가이우스 플리니우스 세쿤두스는 『자연의 역사』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아그리파는 처음에는 판테온에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을 붙이고 내부에는 아우구스투스 동상을 설치하려고 했다.’
1~2세기 로마 역사학자 카시우스 디오도 『로마사』에서 비슷한 주장을 했다.
‘아그리파는 판테온에 아우구스투스의 동상을 세워놓기를 원했다. 황제에게 그의 이름을 딴 건축물을 가지는 영광을 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아그리파의 제안을 거절했다.
“자네의 뜻은 고맙네. 하지만 친한 친구이고 최측근인 장군이 헌정하는 건축물에 내 이름을 함부로 내걸었다가는 시민들에게서 오만하다는 비난을 받을 우려가 크다네. 이런 선전, 홍보 활동은 차라리 안 하는 게 나아.”
아우구스투스의 뜻을 이해한 아그리파는 판테온에 베누스와 마르스 신의 동상을 세운 뒤 그 사이에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동상을 설치했다. 주변에는 다른 신들의 작은 동상을 세웠다. 아그리파는 이어 로툰다(둥근 내부 홀) 앞의 전실에 조심스럽게 아우구스투스 동상을 가져다 놓았다. 맨 뒤에는 그의 동상을 세웠다.
당시 기록에는 ‘아우구스투스는 아그리파의 생각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말리거나 책망하는 대신 그를 더 격려했다’는 내용이 남아 있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인에게 들키지 않고 은근히 황제 신격화 홍보 활동에 성공한 아그리파가 아주 고마웠을 것이다. 드러내놓고 칭찬하거나 상을 줄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책망하거나 말릴 이유도 없었다.
아그리파는 판테온에 무대장치를 만든 뒤 주기적으로 황제가 등장하는 행사를 벌여 로마인에게 아우구스투스의 신적인 지위를 끊임없이 상기시키려고 애썼다. 무대 주변에는 베누스 여신 등 많은 신의 동상을 세워 황제가 신과 동격이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
판테온을 신전으로 보기 어렵게 하는 다른 기록도 있다. 하드리아누스가 새로 지은 판테온에서 재판을 진행했다는 것이었다. 또 4세기 로마 역사학자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가 쓴 『로마사』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판테온 홀의 벽감 여러 곳에 로마 황제들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로마 시대에는 아무리 황제라도 신전에 석상을 세우는 것은 신성모독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판테온은 신전일 수가 없다는 이야기다. 카시우스 디오는 판테온이라는 이름과 관련해서 이렇게 설명했다.
‘당시 판테온을 지었던 땅 인근에 각종 신의 동상이 많이 세워져 있었기 때문에 판테온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또 판테온의 돔이 천국을 닮았기 때문에 이름을 판테온이라고 했을 수도 있다.’
지금까지 나온 주장들과는 전혀 다른 엉뚱한 견해도 나온다. 원래 판테온은 애초에 아그리파 욕장의 출입구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판테온과 아그리파 욕장이 나란히 붙어 있었기 때문에 나오는 재미있는 주장이다. 실제 두 건물과 넵투누스 신전은 남북 방향으로 나란히 이어져 있었다고 전해진다.
“판테온을 짓고 보니 워낙 웅장하고 아름다운 건물이 돼버렸다. 욕장 출입구로 쓰기는 아까워 몇 가지 시설을 덧붙여 신전으로 봉헌했다. 대신 아그리파 욕장에는 출입구로 쓸 열주 회랑을 따로 만들었다.”
이 주장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 하지만 아그리파가 판테온을 완공했을 때에는 아그리파 욕장은 연결돼 있지 않았다는 게 정설이다. 하드리아누스가 욕장을 증축하면서 여러 홀을 새로 만들어 붙인 덕분에 결국 판테온까지 이어지게 됐다. 어쨌든 판테온 안에 들어가 보면 목욕탕 입구처럼 생겼다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아그리파가 만든 판테온이 정확하게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중에 하드리아누스가 재건축할 때 완전히 부수어버렸기 때문이다. 다만 정면은 그리스 식이었고 매우 작은 직사각형 건물이었다는 사실만 전해진다. 당시 포로 로마노 등 로마의 다른 지역에 있던 신전과는 모양이 완전히 달랐다. 그래서 신전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지금으로서는 판테온의 용도가 무엇이었는지, 모양이 어떠했는지를 알 방법이 없다. 다만 몇 가지 객관적 사실은 분명히 남아 있다.
BC 1세기 후반 아그리파가 처음 건설했고 나중에 두 차례 화재로 소실됐다. 처음에는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보수했고,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새로 짓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해서 재건축했는데 이를 복원이라고 불렀다. 하드리아누스가 복원한 신전은 아그리파의 신전과 전혀 다른 모양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가 다시 일부를 복원해서 정면에 그 사실을 조그맣게 새겨놓았다.
19세기 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현재 로마에 서 있는 판테온을 아그리파가 만든 원래 건물이라고 믿었다. 판테온 정면에 ‘루키우스의 아들 아그리파가 이 신전을 만들었다’는 글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었다.
1892년 발굴조사 결과 현재의 판테온은 하드리아누스 황제 때 건설한 새 건물인 것으로 밝혀졌다. 판테온 곳곳에서 발견된 벽돌을 살펴본 결과 새로운 사실이 드러난 것이었다. 고대 로마 벽돌에는 제작 연도가 찍혀 있는데, 판테온의 벽돌에 찍한 연도는 하드리아누스와 그의 선황이었던 트라야누스 시대의 것이었다.
하드리아누스는 선황이었던 트라야누스에게 헌정한 신전을 제외하고는 어떤 건축물에도 ‘하드리아누스’라는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판테온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이 19세기까지 현재 판테온은 아그리파의 작품이라는 오해를 불러온 이유였다.
오현제 중 한 명인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그리스 문화를 좋아했고 특히 건축에 관심이 많았다. 자유로운 사고를 가지고 있었던 그는 포로 로마노에 있는 베누스-로마 신전을 비롯해 많은 건축물을 직접 지었다. 아그리파의 판테온은 당시 매우 황폐해진 상태였다. 하드리아누스는 판테온을 완전히 부순 뒤 더 크고 더 새롭고 완전히 다른 새 신전을 건설하기로 했다. 그래서 아그리파의 판테온이 어떤 모양이었는지는 아무도 모르게 된 것이다.
하드리아누스의 명령을 받아 판테온을 설계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트라야누스가 가장 총애했고, 하드리아누스와는 사이가 나빴지만 당대 최고 건축가로 유명했던 다마스쿠스의 아폴로도루스가 설계했을 것이라는 게 가장 유력한 추측이다.
트라야누스 황제는 여러 가지 공공건축물을 자비로 지었다. 그가 건설한 공공건축물은 트라야누스 욕장, 트라야누스 기둥, 트라야누스 포럼, 도나우강의 트라야누스 다리, 알칸트라 다리 등이었다. 아폴로도루스는 트라야누스의 이름을 남긴 여러 건축물을 직접 설계, 시공한 사람이었다. 그는 시리아계 그리스인이었다. 로마의 속주였던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에 주둔한 로마군에서 건축가로 일하다 총독으로 온 트라야누스를 만나 건축가로서 꽃을 활짝 피웠다. 당시 로마뿐만 아니라 유럽에서 그만큼 건축 특히 복합건물 지식이 풍부한 건축가는 없었다.
19세기까지만 해도 아폴로도루스가 판테온을 지었을 가능성은 없다는 견해가 일반적이었다. 카시우스 디오가 『로마사』에 남긴 이 글 때문이었다.
‘아폴로도루스가 하드리아누스의 (건축학적) 재능을 헐뜯었기 때문에 황제는 그를 쫓아냈다가 사형시켜 버렸다.’
그러나 이후 다른 여러 기록에서 하드리아누스가 아폴로도루스를 계속 중용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둘의 불화설은 설득력을 잃어 버렸다.
판테온의 신비
판테온은 정면에서 보면 사각형 건물처럼 보인다. 고대 정통 그리스 신전을 그대로 빼닮았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영 딴판이다. 원통처럼 생긴 둥근 홀이 사각형 건물 안에 자리를 잡고 있다. 어떻게 보면 마치 고대 로마 곳곳에 있던 목욕탕처럼 보이기도 한다.
판테온의 핵심은 완벽한 원형을 이루는 지름 43.30m인 돔이다. 홀 바닥의 지름도 돔과 같은 43.30m다. ‘판테온의 눈’이라는 별명을 가진 돔 끝의 구멍 오쿨루스의 지름은 7.8m다. 판테온 바닥에서 오쿨루스까지의 높이도 돔의 지름과 같다. 그래서 판테온 돔을 가로로 잘라 뒤집으면 아래 부분에 100% 포개진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신원미상의 건축가가 균형미를 살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렇게 만든 것으로 보인다는 게 일반적 판단이다.
돔에는 격자 같은 무늬가 붙어 있다. 격자는 모두 28개로 나뉘어 있다. 고대에 28은 이른바 완벽한 숫자였다. 당시에 알려진 완벽한 숫자는 28 이외에 6, 496, 8128뿐이었다. 피타고라스와 그 추종자들은 이 숫자에 우주와 관련된 신비한 종교적 의미가 숨어있다고 봤다.
그렇다면 미지의 건축가는 왜 판테온에 그 어려운 돔을 만들었을까? 단순히 아름다움을 추구하기 위해서였을까? 19세기 독일 역사학자 테오도르 몸젠은 『로마사』에 이렇게 기록했다.
‘(초창기 이탈리아 건축물은)바닥에 빗물받이를 두고 천장 구멍을 설치해 집안 연기가 빠져나가고 채광이 되게 했다. 이런 그을린 지붕 아래 음식이 준비되고 식사가 이뤄졌다. 이곳에 가족의 신주가 모셔졌고 신방과 망자의 관이 설치됐다.’
이것은 다른 여러 신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로마인은 신에게 제물을 바칠 때 신전 안에서 동물을 잡아 구웠다. 이것이 그들의 제사 방식이었다. 판테온에서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제사가 진행됐다. 연기는 빛이 들어오는 유일한 구멍인 돔의 오쿨루스로 빠져 나갔다. 이곳에서는 비가 내리더라도 돔 중앙 부분만 피하면 비를 맞지 않는다. 빗물은 초창기 라틴 사람들이 집에서 그랬던 것처럼 볼록한 바닥에 떨어진 뒤 땅 밑으로 연결된 하수관을 통해 배출된다.
판테온 건축가는 돔이 무너져 내리는 일이 없도록 매우 신경을 썼다. 그 중 하나는 재료였다. 돔 아랫부분에는 무거운 재료를 썼지만 위로 갈수록 가벼운 재료를 사용했다. 돔의 두께도 달리 했다. 아랫부분의 두께는 6m이지만 가장 윗부분 두께는 2.3m에 불과하다. 돔에 구멍을 낸 것도 돔의 하중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였다. 돔은 콜로세움, 수로 등 당시 로마 건축물에 많이 썼던 콘크리트로 만들었는데, 아주 가볍고 밀도가 낮은 화산암과 화산암재를 섞어 여섯 겹으로 구성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로마 건국기념일인 매년 4월 21일 정오가 되면 거대한 돔의 둥근 구멍인 오쿨루스를 통해 태양빛이 사선으로 내려와 판테온 출입구를 비추게 된다는 점이다. 특이하게도 이날은 로물루스가 로마를 건국한 날이었다. 역대 황제는 이날 판테온 입구에 서서 로마 탄생을 축하하는 위대하게 의도된 신비를 즐겼다고 전해진다.
판테온의 돔은 원래 금으로 도금했다. 지금은 다 벗겨지고 금은 하나도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약탈당한 것이다. 7세기 황제 콘스탄스 2세가 로마에 온 길에 모두 뜯어가 버렸다. 무게가 20t이나 나가는 입구의 청동문도 원래 금으로 도금돼 있었지만 역시 약탈당해 청동만 남았다.
판테온 벽은 돔처럼 콘크리트로 만들었다. 두께는 무려 7.5m에 이른다. 콘크리트를 사용한 덕분에 벽을 파내 벽감이나 대형 애프스를 만들기에 편리했다. 애프스는 교회 등에 있는 반원형으로 들어간 부분이다. 하드리아누스는 판테온에서 수시로 재판을 열었는데 그때마다 애프스에 앉았다고 전해진다.
지금은 판테온에 들어가려면 아주 큰 이집트 대리석으로 만든 코린트식 기둥이 달린 포르티코 (기둥을 받쳐 만든 건물 입구) 회랑만 지나면 된다. 하드리아누스가 판테온을 새로 만들었을 때의 구조는 그렇지 않았다. 판테온에 입장하려면 긴 정원과 앞마당을 지나고, 적지 않는 계단을 걸어 올라가야 했다. 정원과 앞마당, 계단은 지금 판테온 앞 광장 아래에 묻혀 있다.
포르티코 기둥은 고대 이집트의 사막 지대에 있던 유명한 채석장인 몬스 클라우디아누스에서 가져온 것이다. 돌을 캐서 기둥으로 만들어 채석장에서 100㎞ 떨어진 나일 강까지 나무 썰매에 얹어 운반한 뒤 강에서 알렉산드리아까지는 배로 운반했다. 돌기둥 운반 시기는 나일강 수위가 가장 높아지는 봄이었다. 거기서 다시 초대형 배에 실어 로마로 옮겼다. 높이 11.5m인 기둥은 모두 16개인데 각각의 무게는 무려 50t에 이른다.
판테온의 정면 페디먼트는 비어 있다. 과거에는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기간테스의 전쟁을 묘사한 조각이 붙어 있었다고 전해진다. 1세기 로마 학자 가이우스 플리니우스 세쿤두스의 『자연의 역사』에는 ‘판테온에 있는 비너스 동상의 귀에는 귀걸이가 달려 있다.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에게서 뺏은 진주로 만든 것이다’라고 적혀 있다. 지금은 진주 귀걸이는 물론 동상도 사라지고 없다.
전실 벽은 아테네의 디오게네스가 만든 각종 장식품으로 꾸며져 있었다. 플리니우스는 『자연의 역사』에서 ‘키리타데스 기둥도 있었다’고 적었다. 키리타데스는 그리스 신전에서 여성 모습처럼 생긴 기둥이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의 에렉테이온 신전이 대표적이다.
판테온 앞의 광장은 피아자 델라 로톤다다. 로톤다는 ‘판테온’을 의미한다. 따라서 피아자 델라 로톤다는 판테온 광장인 셈이다. 광장에는 원래 람세스 2세의 오벨리스크가 서 있다. 원래 이집트 헬리오폴리스의 라 신전 앞에 있던 것이었다. 높이는 6m에 이르며 여러 상형문자로 덮여 있다. 이 오벨리스크는 15세기까지는 코르소 거리와 판테온 사이에 있는 산 마쿠토 광장에 세워져 있었다. 18세기 교황 클레멘스 11세가 현재 위치로 옮겨 놓았다.
광장 주변에 있는 골목에는 식당, 바, 카페 등이 많다. 유명한 아이스크림 가게인 지올리토도 인근에 있다. 돈이 없는 배낭여행객은 오벨리스크 앞에 있는 분수에 앉아 빵과 물로 배를 채운다. 여름에 판테온을 여행하는 사람은 분수 앞에서 쉬면서 시원하게 목을 축인다. 물이 나오는 수도가 있기 때문이다. 수도에서는 물이 콸콸 나온다. 여행객은 천천히 물을 마시며 “어, 시원하다”를 연발한다. 분수는 16세기 교황 그레고리 13세의 지시로 만들어졌다.
기독교가 로마를 지배한 뒤인 4세기 말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지시에 따라 이교도 제례 의식은 금지됐다. 대부분의 이교도 신전은 폐쇄됐다. 판테온도 그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이후 7세기 초까지 판테온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찾아가는 사람이 없어 기록도 전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역사학자들은 이 시기에 판테온 주변이 매우 황폐해졌을 거라고 추측한다. 판테온의 정원과 앞마당, 계단 그리고 주변 건물이 무너져 땅에 묻힌 것도 이 때였을 것이라고 본다.
“황제 폐하, 판테온을 교회에 넘겨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이교도의 신전을 부수지 않고 교회에 달라고요? 드리는 건 문제가 없지만, 어디에 쓰시려고요?”
“건물이 정말 아름다우니 교회로 바꿔 쓰겠습니다.”
7세기 초 비잔틴제국 황제 포카스가 로마를 방문했다. 교황 보니파시오 4세는 그에게 판테온을 교회에 넘기라고 했다. 교황이 왜 판테온을 원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마 새로 교회를 지을 돈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교황이 판테온의 웅장하고 성스러운 모습에 매혹 당했을 수도 있다.
판테온은 곧바로 교회로 바뀌었다. 처음에는 이름이 ‘산타 마리아의 로툰다’였다. 나중에는 ‘성모 마리아와 모든 순교자를 위한 교회’로 바뀌었다. 판테온 맨 안쪽에는 제단이 설치됐고 성모 마리아와 예수 조각상도 세워졌다. 교황은 사순절 기간이 되면 판테온에서 특별 미사를 개최하곤 했다. 고대 로마의 대다수 신전이 파괴돼 사라졌지만 판테온이 부서지지 않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보니파시오 4세가 판테온을 교회로 바꾸는 봉헌식을 거행할 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고 전설은 전한다. 기독교가 로마의 종교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재미있는 사례다. 바로 이런 이야기다.
‘판테온은 이름 그대로 범신전이었다. 기독교는 수많은 고대 로마의 이교도 신이 이곳에 숨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교도 신을 몰아내고 판테온을 온전히 교회로 바꾸기 위해 성대한 봉헌식을 거행됐다.
봉헌식이 마무리돼 갈 무렵 판테온 곳곳에 숨어 있던 많은 악마가 뛰쳐나왔다. 기독교의 입장에서는 악마였지만 고대 로마인이 보기에는 신이었다. 악마들은 판테온 밖으로 달아나려고 머리에 달린 뿔로 건물 곳곳을 들이받았다.
원래 판테온 돔 꼭대기에는 황금으로 만든 솔방울이 덮여 있었다. 악마들이 난리를 피우는 와중에 판테온 지붕에 있던 솔방울이 부서져 떨어지는 바람에 큰 구멍이 생겼다. 오늘날 판테온에 가면 볼 수 있는 오쿨루스는 이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판테온이 있는 로마의 행정구역은 피그나 9구이다. 피그나는 이탈리아어로 솔방울을 뜻한다. 피그나 9구의 상징은 솔방울이다.’
보니파시오 4세가 봉헌식을 거행할 때 수레 28대 분량의 순교자 유해를 판테온으로 옮겼다는 전설도 생겼다. 로마의 카타콤베에 묻혀 있던 초기 기독교 순교자의 유해였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당시까지도 숨진 사람을 시내에 묻는 것은 로마에서는 금기시되는 전통이었기 때문에 잘못된 이야기였을 가능성이 높다. 유해가 로마 시내에 안치됐다는 첫 역사적 기록은 640년 무렵에 나오지만, 이런 일이 일반화된 것은 8세기 이후부터였다. 물론 앞으로 판테온 지하 등에서 발굴 작업 등이 추가로 이뤄질 경우 이 전설이 사실로 밝혀질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우스갯소리 하나. 이교도의 범신전이었던 판테온은 건설한 지 2천 년이나 됐는데 전혀 무너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신기했던 중세시대 기독교는 고민 끝에 이런 결론을 내렸다.
“판테온은 하느님의 보호를 받고 있어 튼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