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의 목을 축이다
로마에는 분수가 정말 많다. 크고 작은 분수를 다 합치면 무려 2천 개를 넘는다. 수많은 나라에 있는 수많은 도시 중에서 로마만큼 많은 분수를 가진 곳은 없다.
유명한 분수만 해도 나보나 광장의 4대강 분수, 무어인의 분수와 스페인 광장의 난파선의 분수 등 손꼽기 힘들 정도다. 성 베드로 대성당과 판테온 앞 광장에도 어김없이 분수가 있다. 이처럼 헤아릴 수도 없는 로마의 분수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단연 트레비 분수다. 로마인은 물론 외국인도 이곳을 ‘분수의 어머니’라고 부를 정도다.
분수는 로마의 물 역사를 상징하는 시설물이다. 로마인은 건국 초창기에는 테베레 강과 우물, 샘에서 퍼온 물을 이용했다. 인구가 적었기 때문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정복 전쟁이 이어지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주민이 크게 늘어나 물 부족 현상이 극심해졌다.
로마는 엄청난 자금과 인력을 쏟아 부어 물 공급 및 관리에 매우 신경을 썼다. 공화정~제정 시대 500년 사이에 무려 11개에 이르는 대형 수로를 건설했다. 여기에 수많은 소규모 수도관을 연결해 시내 곳곳에 풍부하게 물을 나눠주었다. 로마인은 그 덕분에 분수, 목욕탕, 저수지, 농수로, 모의해전장 등에 마음 놓고 물을 공급할 수 있었다. 현대 학자들조차 고대 로마의 1인당 하루 물 공급량은 현대 도시를 훨씬 능가한다고 분석할 정도다.
로마인은 수로를 만들면 꼭 크든 작든 분수를 건설했다. 고대는 물론 중세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트레비 분수는 이런 로마의 수로 건설 역사는 물론 중세 시대 교황의 분수 건설 역사를 한꺼번에 담고 있는 곳이다.
멀리서 물소리가 조금씩 들린다. 마음은 급해지고 발걸음은 빨라진다. 영화가 절정을 향해갈 때 퍼져 나오는 음악처럼 가슴의 두근거림은 점점 강해진다.
골목을 막 돌아서는 순간 눈앞에 믿을 수 없는 웅장한 신비가 펼쳐진다. 시원하게 뿜어져 나오는 물은 허공에 점점이 무지개를 뿌린다. 그 무지개를 타고 바다의 제왕 오케아노스가 날아오른다. 발걸음을 옮기려던 사람들은 카리스마 넘치는 포효에 뒤를 돌아보며 잠시 움찔한다.
돌이 어떻게 물과 이런 절묘한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물을 뿜어내는 시설에 불과한 분수가 이렇게 아름다워도 되는 것일까? 많은 관광객은 정신을 잃은 채 그저 분수만 바라보며 자리를 떠날 줄 모른다. 트레비 분수의 아름다움에 매혹당한 채 로마의 물속으로 들어가 본다.
물은 동서고금을 통틀어 꼭 필요한 재화였다. 기본적으로 생활필수품이었다. 마셔야 살 수 있었고, 빨래를 할 때도 음식을 할 때도 없어서는 안 되는 물질이었다. 이런 점은 고대 로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에 더해 로마인은 목욕을 매우 좋아하는 민족이었다. 목욕을 하려면 물이 많이 필요했다. 로마인은 물을 소중하게 여겼다. 소중한 걸 넘어 신성하게 여길 정도였다.
“우물과 샘은 신이 내려준 선물입니다. 아픈 사람을 치료해주는 약입니다.”
건국 초창기에 물을 확보할 수 있는 장소는 테베레 강 말고는 우물과 샘뿐이었다. 테베레 강의 물은 질이 나빴던 반면 우물과 샘의 물은 깨끗하고 맑고 맛있었다. 우물, 샘을 성스럽게 생각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오늘날 기독교에서 성수를 사용하듯이 로마인은 우물, 샘에서 길어온 성스러운 물을 이용해 여러 가지 세례 의식을 거행했다.
먼저 루스트라티오라는 세례 의식이 있었다. 월계수나 올리브나무 가지로 사람에게 물을 뿌려 부정을 씻어내는 종교 의식이었다. 때로는 정교하게 만든 성수채로 물을 뿌렸다. 대개 부정한 일을 저지른 사람이 정화 의식의 대상이었다. 로마에 엄청난 재앙이 생겼을 때에는 공동체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 생각해 로마 전체 또는 로마인 전체를 대상으로 정화 의식을 치르기도 했다. 장례식에 다녀오면 역시 월계수나 올리브나무 가지로 물을 뿌려 정화했고, 집안을 물로 깨끗이 청소했다.
로마인은 숭배의 대상으로 생각한 샘을 보호하기 위해 화려한 대리석 건물을 세우곤 했다. 샘에 지붕을 씌우고 난간도 설치했다. 어떤 샘에는 대리석 부조로 장식한 낮은 벽을 두르기도 했다. 샘에는 바위를 깎아 물 저장소를 만들었다. 샘이 바위에서 솟아나는 게 아닐 경우 벽돌로 쌓아 저장소를 만들었다. 이것이 오늘날 로마식 분수의 시초였다.
로마인은 우물, 샘과 관련한 여러 가지 전설, 신화를 만들기도 했다. 샘과 관련해서 가장 먼저 나오는 이야기의 주인공은 물의 님프인 에게리아다. 신성하면서 치료 효과를 가진 물을 다스리는 님프였다.
로마의 2대 왕 누마 폼필리우스는 즉위한 뒤 틈나는 대로 카엘리우스(첼리오) 언덕의 작은 숲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에게리아를 만나 신탁을 듣는다는 것이었다. 그녀에게서 법은 물론 각종 종교 의례를 배운다는 게 누마의 이야기였다. 누마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에게리아는 눈물을 흘리며 사라졌다. 그녀가 흘린 눈물은 고여 샘을 이루었다. 로마인은 이곳을 에게리아 샘이라고 불렀다.
마르스 평원에는 아라 프로세르피나라는 제단과 샘이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이 제단과 샘은 그야말로 우연히 발견됐다. 한 사비니 여인이 역병에 걸려 신음하는 아이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녀는 울부짖으며 신에게 기도했다.
“신이시여! 제 아이를 살려주십시오.”
“가여운 여인이여! 아이에게 마르스 평원의 따뜻한 물을 먹이도록 해라.”
여인은 마르스 평원 이곳저곳으로 샘을 찾아다녔다. 그러다 우연히 땅 밑에 묻혀 있던 아라 프로세르피나를 발견했다. 그 옆에 샘이 있었다. 거기서 떠간 따뜻한 물을 먹이자 아이는 언제 병에 걸렸느냐는 듯이 감쪽같이 나았다.
로마 공화정 시대에 발레리우스 막시무스라는 사내가 있었다. 그의 아들이 당시 로마에 유행하던 역병에 걸려 죽을 처지에 몰렸다. 그는 가정의 신에게 제물을 바치고 여러 날 동안 밤잠도 잊은 채 빌었다. 그의 정성에 감복한 신은 이렇게 대답했다.
“타렌툼의 따뜻한 물을 마시게 하거라.”
타렌툼은 이탈리아 남부에 있는 그리스계 도시였다. 발레리우스는 테베레 강에서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타렌툼으로 가려고 했다. 배가 출항한 직후 한 선원이 말했다.
“이제 잠시 후 타렌툼을 지나갑니다.”
당시 지역 사람들은 테베레 강 인근 마르스 평원의 한 지점을 타렌툼이라고 불렀다. 발레리우스는 그제야 신이 말한 타렌툼이 이곳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는 선원에게 물었다.
“여기에 샘이 있는가?”
“예, 일 년 내내 따뜻한 물이 나오는 샘이 있습니다. 냄새가 고약해 마시지는 못하고 다들 목욕할 때만 사용합니다.”
발레리우스는 아들을 배에서 내리게 해 샘으로 데려갔다. 정말 샘에서는 따뜻한 물이 나오고 있었다. 그는 아들에게 물을 먹였다. 아들은 기적같이 목숨을 건졌다.
“아들이 살아난 것은 집안의 신과 프로세르피나 여신 덕분이다.”
발레리우스는 신들에게 희생물을 바치고 경기대회를 열었다. 바로 루디 사에쿨라레스였다.
사비니 여인과 발레리우스의 아이를 살린 프로세르피나는 그리스신화에서는 데메테르의 딸인 페르세포네였다. 그녀는 지하세계 저승의 신인 하데스(로마에서는 플루토)에게 납치돼 1년의 반은 그곳에서 살아야 했다. 대개 지하세계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유황이 넘쳐나는 곳으로 묘사된다. 마르스 평원에서는 나중에 유황온천이 발견됐다. 로마인이 이곳에 아라 프로세르피나를 만들어 바친 것은 아마 이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비니 여인과 발레리우스가 아이에게 마시게 한 따뜻한 물은 유황 온천수였을지도 모른다.
로마인이 숭배한 샘은 이것 말고도 더 있었다. 유투르나 샘, 폰테 카페나 샘, 카메나 샘 등 이 대표적이었다. 유피테르는 유투르나를 물의 요정으로 변신시킨 뒤 라비니움에 신성한 샘을 만들어 주었다. 포로 로마노의 베스타 신전 근처에도 샘 하나를 더 만들어 주었다. 로마인은 포로 로마노의 샘을 라쿠스 유투르나라고 불렀다. 라쿠스는 ‘호수, 저수지, 샘’이라는 뜻이다. 로마인은 샘을 분수로 만들었다. 포로 로마노에서 일을 하거나 놀이를 즐기거나 연설을 하다 목이 마르면 광장 한가운데에 있는 이 분수에서 목을 축였다.
분수 곁에는 카스토르-폴룩스 신전이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카스토르, 폴룩스 형제는 레길루스 호수 전투에서 로마군을 도와 승리로 이끈 뒤 백마를 타고 로마로 달려와 유투르나 분수에서 목을 축였다. 그들은 주변에 모여든 로마인에게 “로마가 승리했다”고 알려주었다. 유투르나 샘은 하얀 대리석으로 우물처럼 만들어져 지금도 포로 로마노를 지키고 있다.
포로 로마노에는 라쿠스 쿠르티우스라는 샘도 있었다. 신화는 BC 445년 어느 맑은 날 일어난 일을 이렇게 전한다. 이날 포로 로마노는 복잡했다. 중심 도로인 사크라 비아는 사람으로 붐볐다. 사람들은 저마다 일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하늘이 갑자기 흐려졌다. 짙은 먹구름이 온 세상을 덮었다. 갑작스러운 날씨 변화였다. 포로 로마노를 채운 사람들은 하늘을 보았다. 번쩍! 엄청난 번개가 포로 로마노에 떨어졌다.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빛이 얼마나 강했던지 사람들은 감히 쳐다볼 수 없었다. 한참 뒤에야 겨우 눈을 뜰 수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저게 무엇이지?”
사람들은 웅성거렸다. 포로 로마노 한가운데에 커다란 구멍이 보였다. 번개가 떨어진 자리였다. 원래는 공터였다. 사람들의 마음에 불안감이 퍼졌다. 구멍은 매우 컸다. 지름이 30m는 될 것 같았다. 게다가 구멍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심연 같은 어둠만 담겨 있었다.
“오! 유피테르 신이시여!”
로마에서는 비극이 이어졌다. 먼저 전염병이 번져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갈리아족이 로마로 쳐들어온다는 소식도 들어왔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로마인은 신탁을 받으러 그리스 델포이에 사람을 보냈다. 그곳에 다녀온 사절이 가져온 답은 이러했다.
“유피테르 신께서 오만불손한 로마인에게 진노하셨답니다. 로마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제물로 바치라는 신탁이 나왔습니다. ”
델포이 사절의 소식은 금세 로마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사람들의 두려움은 더욱 커졌다. 가장 소중한 게 무엇인지를 두고 해석이 분분했다.
로마의 기사계급 청년 중에 마르쿠스 쿠르티우스가 있었다. 이제 겨우 이십대 초반이었다. 키는 컸고 덩치는 산처럼 우람했다. 그는 여러 차례 전쟁에 나서 맹위를 떨쳤다. 그의 손에 쓰러진 적은 수백 명을 넘었다. 용사에게 주는 풀잎관도 여러 차례 받았다.
쿠르티우스의 아버지는 곡물상이었다. 그는 시칠리아나 쿠마이에서 밀을 수입했다. 로마에는 늘 식량이 모자랐다. 그래서 아버지 쿠르티우스는 많은 돈을 벌었다. 그는 선량한 사람이었고 베풀 줄 아는 아량도 넓었다. 로마에는 기근이 자주 발생했다. 농토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잦은 전쟁도 이유였다. 귀족이나 부자에게는 어려움이 없었다. 그들은 곡식을 창고에 쌓아놓고 살았다. 평민이나 비시민은 달랐다. 그들은 매일 식량을 사 먹어야 했다. 기근이 발생하면 살 곡식조차 없었다.
아버지 쿠르티우스는 이들에게 놀랄 만큼 싼 값에 곡식을 풀었다. 공짜로 줄 수는 없었다. 당장 왕이 되려 한다는 누명을 쓸 수 있었다. 아버지 쿠르티우스는 아들 쿠르티우스에게 늘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사람이란다. 로마의 자유인이지. 유피테르 신께서도 사람을 늘 아끼셔. 너도 사람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그들을 위해 살고, 그들을 위해 죽도록 해라.’
쿠르티우스는 깨달았다. 구멍에 무엇을 바쳐야 하는지. 그는 아버지 방에 갔다. 그리고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버지. 유피테르 신의 저주를 풀 방법을 찾았습니다.”
“그래! 그게 무엇이니?”
“저의 목숨입니다. 로마에서 가장 용맹한 자유인의 목숨.”
아버지는 아무 말도 없었다. 쿠르티우스는 다음날 아침 전쟁에 나설 때처럼 갑옷을 입었다. 가장 아끼던 말을 끌고 걸어서 카피톨리노 언덕에 갔다.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는 포로 로마노를 내려다보았다. 구멍이 보였다.
“로마를 위해 나를 바치리다. 유피테르 신이여! 로마를 살리소서.”
쿠르티우스는 말에 올라 주저하지 않고 언덕을 달려 내려갔다. 갑자기 달려오는 말에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그들은 다칠까 옆으로 비켰다. 쿠르티우스는 구멍으로 뛰어들었다. 그제야 구멍은 사라졌고 작은 샘만 하나 남았다. 로마인은 이 샘을 라쿠스 쿠르티우스라고 부르기로 했다. 지금도 포로 로마노에는 이 샘의 흔적이 남아 있다.
로마인은 건국 후 400여 년 동안은 테베레 강과 우물, 샘에서 퍼온 물을 이용하는 데 만족했다. 테베레 강의 수량이 충분치 않았고 수질도 그다지 깨끗하지 않았지만 건국 초기에는 인구가 많지 않아서 물이 모자라지 않았다. 왕정 시대는 물론 공화정 시대에도 상당기간 동안 로마인은 강에서 물을 끌어와 식수 등으로 사용하는 데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소규모 개울이나 우물, 샘은 물론 빗물을 받아두는 저수조도 적극 활용했다.
BC 4세기 무렵부터 로마의 물 사정은 더 나빠졌다. 이민 오는 사람이 크게 늘고 로마에 정착하는 외국 상인이나 노예도 많아지면서 인구가 급증한 탓에 물 수요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과거에 하던 대로 강물을 끌어 쓰거나 개울, 우물, 샘에서 물을 길어오는 것만으로는 수요를 도저히 맞출 수 없었다. 물 부족은 공화정과 제정 시대에 목욕탕이 늘어나면서 더 심해졌다.
로마 곳곳에서는 물 부족 때문에 난리가 날 정도였다. 다들 하루에도 여러 차례 테베레 강에 물을 뜨러 가야 했다. 강 근처에 집을 짓는 사람도 늘어났다. 이런 사람이 워낙 많다 보니 법을 만들 정도였다. 일종의 상수원 보호법이었다.
‘테베레 강의 수질을 보호하기 위해 강둑에서 일정한 거리 안에는 집을 지을 수 없다.’
집정관은 누구나 법을 제대로 알 수 있도록 건축 금지 구역 주변에 돌을 세워 표시했다. 지금도 테베레 강 주변 곳곳에서는 당시 세워진 돌이 발굴되곤 한다.
“물 부족 문제를 해결하려면 로마 외곽에서 샘을 찾아 물을 끌어와야 합니다.”
로마는 물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공화정 시대부터 도시 외곽에서 수원을 발굴하고 수로를 건설해 물을 시내로 공급하려고 애썼다. 로마인은 새로 만든 수로에는 건설 과정에 자금을 댔거나 공사를 관리한 책임자의 이름을 붙였다.
오늘날 역사학자들이 로마의 수로 건설 과정을 알 수 있는 많은 정보를 갖게 된 것은 네르바와 트라야누스 황제 시절 수로 관리 책임자였던 율리우스 프론티누스가 쓴 『로마의 수로』라는 책 덕분이다. 네르바 황제로부터 물 담당관으로 임명된 프론티누스가 로마의 물 공급, 관리 시설 등을 정리한 책이었다. 물과 관련한 책을 펴냈을 정도였으니 로마인이 물에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 책은 그야말로 로마의 수로를 A부터 Z까지 설명하고 있다.
로마인이 처음 만든 수로는 아쿠아 아피아였다. 이 수로를 건설한 사람은 BC 312년 재무감사관을 지낸 아피우스 클라디우스 크라수스였다. 로마의 관문이었던 포르타 카페나에서 남부도시 카푸아까지 사상 첫 로마의 고속도로인 아피아 가도를 만든 사람이었다. 아쿠아 아피아의 수원은 프라이네스테(지금의 팔레스트리나) 인근이었다. 포르타 카페나까지 이어진 수로의 길이는 16.57㎞였다.
아쿠아 아피아로도 로마는 물 부족을 해소하지 못했다. 40년 뒤인 BC 275년 집정관 마니우스 쿠리우스 덴타투스는 고대 그리스 에페소스의 왕 피로스와의 전쟁에서 획득한 전리품을 이용해 아니오 강에서 로마까지 물을 운반하는 63.6㎞의 수로 아쿠아 마니우스를 건설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아쿠아 아피아와 아쿠아 마니우스는 점점 노후해졌다. 원로원은 BC 147년 법무관 마르키우스에게 두 수로를 수리하고 새 수원을 찾으라고 지시했다. 원로원은 총공사비로 무려 1억 8천만 세스테르티우스를 책정했다. 마르키우스가 임기 중에 공사를 마무리하기 어렵게 됐다는 보고를 듣고는 임기를 1년 늘려주기도 했다. 마르키우스는 새 수원을 찾아낸 뒤 수로 공사를 시작했다. 이때 로마의 신탁서인 시빌 예언서를 본 제관이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마르키우스의 새 수로가 로마에 들어오면 불행한 일이 생깁니다.”
원로원에서 갑론을박이 벌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다른 수로를 찾아야 합니다.”
“지금 물이 모자라 다들 죽을 판인데 언제 새 수로를 찾는단 말이오?”
마르키우스는 제관의 견해를 무시하고 공사를 강행해 카피톨리노 언덕까지 수로를 연결했다. 이름은 아쿠아 마르키우스로 정했다. 수로의 총길이는 무려 91㎞에 이르렀고, 수도교인 지상 구간만 80㎞였다. 마르키우스는 공사를 마친 뒤 제관에게 이렇게 말했다.
“수로가 새로 생겼지만 제관의 우려처럼 로마에 불행은 일어나지 않는군요. 오히려 물이 넘쳐나 홍수가 날 지경입니다. 혹시 이걸 불행이라고 말씀하신 건가요?”
1세기 로마 시대 학자 가이우스 플리니우스 세쿤두스는 『자연의 역사』에서 아쿠아 마르키아를 이렇게 설명했다.
‘아쿠아 마르키아의 물은 차고 위생적이고 맛이 좋기로 유명하다. 아쿠아 마르키아의 수도교 아치는 지금도 튼튼하게 서 있다.’
BC 34년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대에 다시 물 부족 사태가 심각해졌다. 로마 제국 전성기를 맞아 각종 건물이 늘어나고 로마로 몰려오는 사람이 늘어난 게 결정적 원인이었다. 그는 아그리파에게 새로운 수로를 개척하라고 지시했다.
아그리파가 만든 새 수로는 아쿠아 율리아였다. 그는 새로 건설한 수로를 기존에 있던 아쿠아 테풀라와 연결해 로마로 물을 운송했다. 이 수로는 2층으로 돼 있었다. 1층을 아쿠아 테풀라, 2층을 아쿠아 율리아라고 불렀다.
아그리파는 15년 뒤 새 수로를 하나 더 건설했다. 이번에도 아우구스투스의 지시 때문이었다. 오늘날 트레비 분수에 물을 공급하는 아쿠아 비르고였다. 총 길이 20㎞의 지하 수로인 아쿠아 비르고는 매일 로마에 10만㎡의 물을 공급했다.
아쿠아 비르고의 수원은 비아 콜라티나에서 18㎞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습지였다. 물이 아주 깨끗해 목욕탕용수는 물론 식수로도 호평을 받았다. 여기에는 재미있는 전설이 하나 전해 내려온다.
‘전쟁에 다녀왔던 로마 병사들이 길을 잃고 헤매는 바람에 몹시 목이 말랐다(아그리파가 샘을 찾으라고 보낸 병사라는 전설도 있다). 그들은 물을 찾아 돌아다니던 중 젊은 양치기 소녀를 만났다.
“우리에게 물이 있는 곳을 가르쳐줄 수 있겠니?”
“물론이지요.”
양치기 소녀는 주저하지 않고 물이 풍부한 샘으로 병사들을 안내했다. 원래 양치기들이 사용하던 곳이었다.
“샘을 찾았다. 로마 근처에 엄청난 샘이 있다.”
로마에 돌아온 병사들은 정부에 샘 이야기를 전했다. 가뜩이나 물이 부족한 로마 시내에 식수를 공급하는 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손뼉을 쳤다.
“당장 수로를 건설해 샘에서 물을 끌어와 시내에 공급하도록 하시오.”
로마인은 샘을 가르쳐준 이가 소녀였다는 점에 착안해 그 수로를 ‘소녀의 물’이라는 뜻인 아쿠아 비르고라는 이름을 붙였다.’
아쿠아 비르고에는 다른 전설도 전한다. 수로와 분수가 건설된 이후의 전설이다. 한 청년이 게르마니아에서 벌어진 전쟁에 참가하게 됐다. 그는 군장을 갖추고 마르스 평원에 가서 병역 복무 신고를 한 뒤 미리 배정받은 부대에 들어갔다.
청년은 북쪽으로 이어지는 플라미니아 가도를 따라 부대와 함께 행진을 시작했다. 이 길을 따라가면 분수를 지나게 돼 있었다. 아쿠아 비르고의 종점에 있는 분수였다. 로마군이 전쟁터로 출장할 때면 플라미니아 가도 주변에 병사들의 가족, 친척이나 연인이 나와 무사히 돌아오라며 축복 인사를 건네는 게 일상적이었다.
청년이 분수 근처를 지날 때 결혼을 약속한 여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분수에서 떠온 물을 담은 잔을 청년에게 건네주었다. 청년이 물을 다 마시고 잔을 돌려주자 그녀는 잔을 바닥에 던져 깨버렸다.
“당신이 전쟁터에서 무사히 돌아올 수 있도록 늘 신에게 기도드릴게요. 귀가할 때까지 영원히 마음을 바꾸지 않고 기다릴게요.”
“반드시 무사히 살아 돌아오겠소.”
두 연인의 이야기는 로마에 널리 퍼졌다. 이후 로마군이 플라미니아 가도를 행군해 분수를 지나갈 때면 병사들에게 너나할 것 없이 물잔을 건네주는 풍습이 생겼다. 그리고 이런 말도 생겼다.
“아쿠아 비르고 종점에 있는 분수의 물을 마시면 꼭 살아서 로마로 돌아올 수 있다. 영원히 사랑을 지킬 수 있다.”
로마인은 이 분수를 ‘사랑의 물’이라는 뜻인 아쿠아 델 아모르라고 불렀다. 이곳은 오늘날 트레비 분수다.
로마 제정 말기까지 로마에 만들어진 수로는 모두 14개나 됐다. 일부에서는 19~20개였다고 말하기도 한다. 플리니우스 세쿤두스는 『자연의 역사』에서 로마 수로를 이렇게 묘사했다.
‘목욕탕, 저수지, 가정용, 해자, 정원, 교외 빌라에 물을 대는 수로의 수와 그 수로가 지나가는 산과 계곡, 건설한 아치의 거리를 조심스럽게 계산한다면 세상에 이렇게 놀라운 일은 따로 없을 것이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로마에는 수로를 만드는 규칙이 있었다. BC 1세기 토목전문가이자 건축가였던 마르쿠스 비트루비우스 폴리오가 쓴 『건축』에 그 상세한 내용이 담겨 있어 현대 역사가에게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수원을 발견하는 방법, 장소의 성격에 따른 물의 다양한 성질 등은 물론 수로를 건설하는 방법 등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수원이 땅 위로 노출돼 있으면 수질을 조사하기가 쉽다. 그렇지 않다면 지하의 물을 파내서 조사해야 한다.
먼저 조사원은 해가 뜨기 전에 조사 지역에서 턱을 땅 쪽으로 고정시킨 채 엎드려야 한다. 이렇게 하면 눈이 땅과 수평을 이뤄 수원에서 물이 솟아나는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다.
땅이 황토라면 수맥이 매우 약해서 흘러나오는 물의 양이 적다. 물의 풍미도 최상의 상태가 아니다. 땅이 낮다면 진흙 상태여서 수질이 나쁠 가능성이 있다. 흙이 검으면 물이 똑똑 떨어지는 정도이고 물방울 양도 적다.
땅이 자갈이면 수맥이 작지만 수질은 매우 좋다. 단단하고 붉은 모래라면 상황에 따라 수량이 다르지만 물맛은 좋다. 적암이라면 수량도 많고 수질도 좋다. 산기슭이고 회색바위가 있다면 수량이 풍부하면서 건강에 좋은 차가운 물이 나온다.’
로마인은 수로를 만들 때 굳이 지하에 관을 묻는 방식에 집착하지 않았다. 때로는 지상으로 웅장한 아치형 수도교를 건설했다. 다 이유가 있었다. 그들은 토목, 건설 기술과 자재 동원 능력을 과시하고 싶어 했다.
“비용에는 전혀 신경 쓰지 마시오. 모두가 감탄할 웅장한 시설을 만드시오.”
수도교 같은 엄청난 건축물은 로마 제국이 가진 힘의 상징이자 자존심이었다. 야만족은 로마가 건설한 수도교를 보고 기가 죽을 수밖에 없었다. 수로 건설비는 대부분 국비로 충당했지만, 일부 수로는 개인이 건설하기도 했다. 수로를 유지, 보수하기 위해 역대 황제는 비용 지출을 아끼지 않았다.
아치형 수도교에서 물이 흘러가는 부분을 스페쿠스, 또는 카날리스라고 불렀다. 스페쿠스는 벽돌이나 돌로 길게 만든 여물통 모양을 하고 있었다. 스페쿠스 안에는 시멘트를 발랐고, 갓돌로 위를 덮었다. 물이 흘러넘치지 않게 하려는 이유도 있었지만, 햇빛이 많이 비쳐 수질을 떨어뜨리거나 비나 다른 오염물질이 들어가 물을 더럽히는 걸 막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수로 곳곳에는 공기구멍을 만들어 지붕이 수압 때문에 터지지 않게 배려했다. 물은 항상 스페쿠스를 통해 흘렀다. 때로는 스페쿠스를 따라 파이프를 설치하기도 했다. 수도교가 지나는 언덕이 바위로 돼 있다면 표면을 파내 스페쿠스를 만들었다. 표면이 흙이나 모래였다면 돌을 사용해 따로 건설했다. 수로의 기울기는 61m당 15㎝ 정도였다. 물론 상황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었다.
수로가 끝나는 지점 인근 지역에는 저수조인 카스텔룸을 만들어 침전물을 걸러냈다. 물이 도시 안으로 들어가면 역시 카스텔룸이라고 부른 거대한 저수조에 보관했다. 카스텔룸은 단순히 크게만 지은 물 창고가 아니었다. 하드리아누스 시대에 만든 아테네의 카스텔룸은 화려한 장식과 이오니아식 기둥을 덧붙인 멋진 건물이었다. 에보라의 카스텔룸은 둥근 신전 모양이었다. 지금 남아 있지는 않지만 로마의 저수조도 마찬가지로 매우 화려했을 것이다.
카스텔룸 안에는 기둥으로 받친 돔 모양 지붕을 한 커다란 물 저장실이 있었다. 수로에서 이곳으로 들어온 물은 파이프를 통해 세 개의 작은 저장실로 분산됐다. 두 개의 저장실에 보관한 물은 공공목욕탕과 각 가정에, 나머지 저장실에 보관한 물은 여러 분수로 공급했다. 만약 어느 한쪽 저장실 물이 모자랄 경우 다른 쪽 저장실 물을 돌려씀으로써 힘들고 비싸게 운송해 온 물이 낭비되지 않도록 했다.
로마인은 수로를 통해 많은 물을 로마로 수송해 시내 곳곳에 만든 분수로 배분했다. 아쿠아마다 물 공급 구역은 달랐다. 아쿠아 아피아는 7개 구, 아쿠아 마르키아는 10개 구, 아쿠아 테풀라는 4개 구, 아쿠아 비르고는 3개 구에 각각 물을 공급했다.
분수는 여러 가지 모양으로 만들었다. 아주 크면서 평범한 화병 모양이 가장 일반적이었다. 대개 돌을 깎아 만든 지름 10m 정도 분수였다. 삼각대 모양 분수도 있었다. 중앙에 분출구가 나 있고, 다리 부분으로 물이 운반됐다. 청동 조각상을 만들어 분수로 사용하기도 했다. 주로 소년의 모습을 많이 담았지만 신화에 나오는 트리톤이나 바다의 요정인 네레이드 모습도 담았다.
로마인은 수로를 통해 얼마나 많은 물을 로마에 공급했을까? 역사학자마다 다르지만 대체적으로 하루 330억~420억 갤런(1억 300만~1억 6천만 리터)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대에 로마 인구는 100만 명 정도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물 공급량을 인구로 나누면 1인당 하루 330~420갤런(1천300~1천600리터)에 해당한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시대에는 인구가 150만 명이었다. 1인당 하루 물 공급량은 220~280갤런(830~1천60리터) 정도였다.
1875년 존 머리가 발간한 『그리스‧로마 고고학 사전』에 따르면 당시까지만 해도 이탈리아 캄파니아 지방 곳곳에는 담쟁이가 우거진 낡은 수도교 아치가 줄지어 서 있었다. 그 중 세 곳은 그때까지도 상수도로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수로는 로마에만 건설된 것은 아니었다. 그 놀라운 건축 기술은 오늘날 남아 있는 수도교 형식으로 로마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유감없이 발휘됐다. 수도교가 세워진 도시는 그리스의 아테네와 코린트, 이탈리아 카타니아와 살로나 및 시라쿠스, 비티나의 수도 니코메디아, 옛 그리스였지만 지금은 터키인 에페소스와 스미르나,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프랑스의 메츠와 클레르몽, 님스, 리용, 포르투갈의 에보라, 스페인의 메리다와 세고비아 등이었다.
“수로를 파괴해라. 물이 없으면 항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로마의 쇠퇴와 함께 수로도 비극적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수로는 5세기 무렵 알라리크가 이끈 서고트족의 로마 포위 때 큰 피해를 입었다. 알라리크는 성문을 닫아걸고 버틴 로마를 굴복시키기 위해 물 공급을 끊기로 했다. 그는 테베레 강의 흐름을 막는 한편 수로도 파괴해버렸다. 알라리크가 물러간 뒤 부분적으로 복원된 수로는 다시 토틸라가 이끈 동고트족의 공격 때 더 큰 피해를 입었다. 이후 비잔틴제국의 장군 벨리사리우스가 로마로 쳐들어왔을 때에도 똑같은 일이 반복됐다.
이 탓에 6세기 무렵에는 대부분의 수로가 기능을 상실했다. 아무도 수로를 유지, 보수하는 데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후 1천 년 동안 로마는 만성적인 물 부족에 시달렸다. 사람들은 초창기 로마인처럼 테베레 강이나 도시 인근 샘, 우물에서 물을 길어 와야 했다.
사정은 16세기 무렵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부분적으로나마 기능을 발휘하던 수로는 아쿠아 비르고 하나밖에 없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도 물 부족에 시달리기는 마찬가지였다. 8세기 무렵 수리한 아쿠아 트라야나로부터 아주 적은 양의 물을 공급받는 게 고작이었다. 대성당은 주변에 흩어져 있던 작은 샘에서 물을 매일 길어 와야 했다. 물 문제는 역대 교황의 고민거리가 됐다.
아쿠아 베르지네
“고대 로마 시대에 물을 공급하던 수로가 있습니다. 지금은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했습니다. 수로를 복원한다면 물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15세기 중반 교황 니콜라오 5세(재임 1447~55년)는 식수난 해결을 위해 매일 고민하고 있었다. 어느 날 한 주민이 고대 로마의 수로 이야기를 꺼냈다. 교황은 무릎을 탁 쳤다. 그는 아쿠아 비르고의 종점에 있는 분수를 정비하기로 했다.
중세시대 로마인에게 촉촉한 젖줄 노릇을 하던 아쿠아 비르고는 퀴리날레 언덕 아래 삼거리까지만 이어져 있었다. 이곳을 라틴어로 트리비움 또는 트레이오라고 불렀다. 아쿠아 비르고를 통해 로마로 들어온 물은 자그마한 분수에 연결됐다. 특별한 장식 없이 평범하게 생긴 둥근 수조 3개에 물이 고이는 분수였다. 니콜라오 5세는 트리비움을 둘러보았다. 물이 제법 콸콸 흐르고 있었다. 마음이 흡족해진 그는 교황청 직원들에게 이렇게 지시했다.
“아쿠아 비르고를 보수하도록 하시오. 새로운 시설 몇 개를 더 붙이시오. 분수의 둥근 수조 3개를 떼어내고 긴 장방형 수조 2개를 설치하도록 하시오.”
교황은 공사를 마친 뒤 수로에 아쿠아 베르지네라는 새 이름을 붙였다. 베르지네는 ‘소녀’를 뜻하는 이탈리아어다. 결국 라틴어인 아쿠아 비르고를 단순히 이탈리아어로 바꾼 데 불과했다. 공사를 마친 그는 분수에 이런 명문을 설치했다.
‘교황 니콜라오 5세는 1453년 아쿠아 비르고를 오랜 부식에서 구했다.’
이때 아쿠아 비르고에 물을 공급하던 샘은 고대 로마 시대에 수로로 연결했던 그 샘이 아니었다. 그래서 고대에 비해 물맛이 나빴고 수질도 좋지 않았다. 16세기 교황 바오로 3세(재임 1534~49년)는 이 점을 고려해 새로운 계획을 세웠다.
“아쿠아 베르지네를 로마 병사들이 양치기 소녀의 도움으로 발견한 원래의 샘과 다시 연결합시다. 물맛도 좋고 수질도 괜찮으니 위생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오.”
하지만 일은 교황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교황청과 로마 시청의 관료주의, 나중에는 서로 헐뜯기 바빴던 건축가들 때문이었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로마 시민의 이익보다는 돈 생각만 들어 있었다.
“시민들은 스스로 알아서 물을 구하면 됩니다. 천한 것들을 위해 교황청 돈을 쓸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어떻게 저에게 설계를 맡기지 않으십니까? 건축가라고 떠드는 다른 자들은 모두 사이비입니다.”
결국 바오로 3세가 생각했던 아쿠아 비르고 재건 계획은 그가 죽은 뒤에도 무려 30년 동안이나 책상 서랍 속에 처박혀 있어야 했다.
바오로 3세의 뒤를 이은 비오 4세(재임 1559~65년)와 비오 5세(재임 1566~72년) 때에야 아쿠아 비르고 복원 작업은 이뤄질 수 있었다. 두 교황의 의지와 노력 덕분에 수로는 옛 샘과 다시 연결돼 원래 수질을 되찾게 됐다. 로마 전역에는 아쿠아 비르고와 연결되는 지하 수도관이 만들어져 시내 곳곳의 분수에 물을 공급할 수 있게 됐다. 이렇게 해서 로마 시내에 깔리게 된 새 수도관은 시내 주요 거리에 이름을 남기기도 했다.
베네치아 광장에서 포폴로 광장에 이르기까지 로마 시내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코르소 거리 중간쯤에 골목길이 하나 있다. 스페인 광장으로 연결되는 비아 데이 콘도티(콘도티 거리)다. 이 거리의 이름은 ‘수도관 거리’라는 뜻이다. 지금은 각종 명품 가게가 즐비한 거리다.
분수 건설 바람
‘로마에 분수를 만들자!’
아쿠아 비르고와 수도관을 나름대로 정비한 교황청은 비오 5세(재임 1566~72년) 시절이던 1570년 11월 4일 ‘샘 위원회’라는 재미있는 이름을 가진 특별위원회를 구성했다. 위원을 추기경만으로 구성한 이 위원회의 목적은 분수 건설이었다.
위원회는 아쿠아 비르고로 물을 공급할 수 있는 로마의 주요 지점에 새로운 공공 분수를 만들기로 했다. 주로 로마의 북서쪽이었다. 고대 로마에는 마르스 평원으로 불리던 곳이었다. 당시에는 로마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모여 살던 곳이었다. 위원회는 분수 건설 장소로 포폴로 광장, 콜로나 광장 등 열 곳을 골랐다.
이 덕분에 로마에는 분수 건설 바람이 불었다. 궁전 소유자나 시 행정관, 그리고 재산을 제법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분수를 짓고 싶어 했다. 예술과 과학을 접목한 분수 건설 기술도 상당히 발달하게 됐다. 그 결과 아름다우면서 실용적인 분수가 나올 수 있었다.
특정 건축가 한 명이 아니라 조각가, 공예가 등 다양한 예술가가 협업을 통해 분수를 만드는 게 일상적이었다. 건축가는 분수 건설 의뢰를 받으면 기본 설계안을 만든 뒤 모양과 비용을 건축주와 상의한 뒤 최종 결정을 내렸다.
궁전, 저택, 교회를 만들 때처럼 분수 건설에 필요한 석재는 먼 산에 있는 채석장에서 가져올 필요가 없었다. 포로 로마노, 콜로세움이나 시내에 산재한 고대 로마 공중목욕탕에서 뜯어오는 게 간편하고 쉬웠다.
물론 위원회에서 계획했던 분수가 모두 예정대로 건설된 것은 아니었다. 수도관에서 흘러간 물의 압력이 낮아 분수를 짓기로 했던 장소까지 물이 운반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분수를 세울 예정이었던 장소가 너무 좁아 실패한 경우도 있었다.
위원회에서 계획했던 분수 중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진 것은 포폴로 광장의 분수였다. 키르쿠스 막시무스에 있던 아우구스투스의 오벨리스크가 옮겨진 것은 바로 이때였다. 이 분수는 1572년에 완공됐다. 2년 뒤에는 나보나 광장에 일부 분수가 건설됐다.
분수 건설에서 가장 명성을 날린 사람은 제노바 출신의 지아코모 델라 포르타였다. 그는 16세기 후반 성 베드로 대성당 건설 공사를 총괄 감독해 돔을 완성했다. 로마 곳곳에 수많은 교회, 저택, 궁전을 짓기도 했다.
포르타가 얼마나 많은 분수를 건설했던지 ‘공식 분수 건축가’라는 이름을 얻을 정도였다. 그는 모두 14개나 되는 분수를 만들었다. 포폴로 광장, 콜로나 광장, 나보나 광장, 로톤다 광장, 산 마르코 광장, 캄페 델 피오리, 마테이 광장, 마도나 데이 몬티 광장, 기우디아 광장, 몬타나라 광장, 캄피텔리 광장에 있는 분수가 그의 손을 거쳤다. 미켈란젤로가 새로 조성한 캄피돌리움 광장의 분수 두 개도 그가 제작한 것이었다.
“트리비움에도 웅장한 분수를 하나 만들어야겠네.”
아쿠아 비르고의 종점인 트리비움에 새 분수를 만들려는 계획은 포폴로 광장 분수 완공으로부터 70년이 지나서야 겨우 논의되기 시작했다. 실제 공사에 들어간 것은 160년 이후나 됐을 때였다.
트리비움 분수에 관심을 보인 교황은 우르바노 8세(재임 1623~44년)였다. 그는 1640년 평소 아끼던 건축가 지안로렌조 베르니니에게 일을 맡겼다. 베르니니는 먼저 폴리 궁전 앞의 좁은 광장을 크게 넓혀 분수 조성 공간부터 확보했다. 이어 분수의 방향을 다른 쪽으로 돌리고 단순하던 분수의 수조도 없애버렸다. 대신 아주 큰 수조 두 개를 새로 설치했다. 하지만 교황이 갑자기 죽는 바람에 후원자가 없어져 분수 조성 사업은 중단돼 버렸다.
이후 여러 교황은 트리비움 분수에 아무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우르바노의 뒤를 이은 교황 인노첸시오 10세(재임 1644~55년)는 나보나 광장에 있는 가문의 저택인 팜필 궁전을 꾸미기 위해 베르니니에게 4대강 분수를 건설하게 했다. 인노첸시오 13세(재임 1721~24년)는 트리비움 분수 계획 자체를 싫어했다. 그의 가문이 분수 인근에 있던 폴리 궁전과 대형 저택 여러 채를 사들였기 때문이었다.
‘분수를 새로 만들려면 폴리 궁전을 상당히 부술 수밖에 없다잖아. 이렇게 하면서까지 분수를 만들 필요는 없지.’
계속 미뤄지던 트리비움 분수 건설 계획을 최종적으로 정리한 사람은 1730년 취임한 교황 클레멘스 12세(재임 1730~40년)였다. 이번에도 착공은 쉽지 않았다. 공사를 어느 건축가에게 맡기느냐를 두고 교황과 로마인의 생각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클레멘스 12세는 피렌체 메디치 가문 출신이었다. 그는 교황청에 들어간 이듬해 평소 잘 알고 지내던 고향 출신 건축가 겸 조각가 알레산드로 갈릴레이를 로마로 불러 라테라노 대성당에 가문의 예배당인 카펠라 코르시니를 만들게 했다.
교황은 갈릴레이를 중용해 더 많은 일을 맡기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교황이라도 정당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마음대로 건축가를 고용하기는 어려웠다. 그는 공모전이라는 형식을 빌려 갈릴레이에게 기회를 주기로 했다. 교황은 1732년 두 차례 공모전을 개최했다. 하나는 라테라노 대성당 정면 개축공사였고, 다른 하나는 트레비 분수 건설공사였다. 갈릴레이는 첫 공사 공모전에서 1등을 차지했다. 로마 건축계에서는 로마 출신인 니콜라 살비의 설계안이 더 훌륭하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교황이 고향 사람이라는 이유로 실력도 없는 갈릴레이를 너무 중용한다는구먼.”
“그래도 어쩌겠나! 아무리 형식적이더라도 심사위원단이 1등으로 뽑았으니…. 비난의 목소리를 쏟아내는 것 외에 더 할 수 있는 것은 없지 않나?”
트레비 분수를 건설하기 위한 두 번째 공모전에서도 갈릴레이가 1등을 차지했다. 살비는 또 2등이었다. 라테라노 대성당 공모전 때보다 더 심한 반발이 일어났다. 이번에는 교황이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살비는 공모전에서 당선되기 전까지만 해도 실제로 건축을 해본 경험이 한 번도 없었다. 스페인 광장에서 불꽃놀이를 진행하기 위해 무대장치를 만들어본 게 고작이었다. 살비는 원래 수학, 철학을 공부하다 나중에 건축가로 변신한 사람이었다. 그가 건축가로 활동을 시작할 무렵 로마에서는 건축 바람이 시들었다. 살비가 얻을 수 있는 일거리는 많지 않았다. 그가 남긴 작품이 많지 않은 이유는 여기에 있다.
“3년 안에 공사를 마무리 짓도록 하겠소.”
클레멘스 12세는 열정에 차 있었다. 트레비 분수 공사는 1732년 시작됐다. 그런데 생각보다 공사비가 크게 늘어나는 바람에 건축가 살비와 다른 관계자 사이에 논쟁이 잦아졌다. 공사는 더 늦어지게 됐다. 결국 공사는 30년 뒤에야 겨우 마무리될 수 있었다. 3년 내에 분수를 완성하겠다던 교황은 그 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살비는 착공 19년 뒤인 1751년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일 때 병으로 눈을 감았다. 일은 주세페 파니니가 대신 맡았다. 분수는 1762년 5월 22일 완공됐다. 로마인들은 새 분수를 이렇게 평가했다.
“정말 아름다운 분수로군! 로마의 기적이야. 사람이 만든 게 아니라 신이 만든 거라고 해도 믿을 수밖에 없겠군.”
살비가 생각한 트레비 분수의 주제는 ‘바다 길들이기’였다. 폴리 궁전 정면 벽 아래쪽에 붙은 긴 바위에 서 있는 개선문 아래로 바다의 신 오케아노스가 등장한다. 그는 히포캄스(말) 두 마리가 이끄는 조개 모양 전차를 타고 있다. 오케아노스는 바다의 신이어서 물을 상징한다. 손에는 모든 물을 다스린다는 뜻을 담은 홀을 잡고 있다.
오케아노스가 탄 히포캄스 두 마리는 두 트리톤이 다스리고 있다. 왼쪽 히포캄스는 트리톤의 지시를 듣지 않고 광폭하게 날뛴다. 반대쪽 히포캄스는 거꾸로 아주 온순하다. 이런 뜻이다.
“바다는 때로는 폭풍이 휘몰아치며 난폭한 곳입니다. 하지만 때로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평온한 곳입니다.”
오케아노스의 양쪽에는 석상이 두 개 있다. 왼쪽 석상은 풍요를, 오른쪽 석상은 건강을 나타낸다. 풍요로우면서 건강하게 살기를 바라는 것은 동서고금에 걸쳐 인간의 한결같은 소망이다.
오케아노스 뒤편에는 양각 부조가 두 개 붙어 있다. 하나는 트레비 분수가 연결된 아쿠아 비르고를 만든 아그리파의 모습을, 다른 하나는 로마 병사들에게 트레비 분수의 수원이 된 샘을 가르쳐준 양치기 소녀의 모습을 담고 있다. 오늘날 트레비 분수가 있도록 해준 두 사람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붙인 것이다.
양각 부조 뒤에는 코르시니, 루도비시, 케이롤로, 핀첼로티가 각각 만든 조각 네 개가 세워져 있다. 사계절과 물의 이점을 상징하는 조각이다. 왼쪽에서 시작해 오른쪽으로 풍성한 과일, 비옥한 들판, 가을의 선물, 편리한 초지와 정원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분수 꼭대기에는 완공 당시 교황 클레멘스 13세를 상징하는 문양이 새겨져 있다.
트레비 분수의 오른쪽 벽에는 아소 디 코페라는 화분처럼 생긴 조각이 세워져 있다. 여기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한다.
‘살비는 분수 건설 공사를 관리하면서 하루 종일 공사장에서 살다시피 했다. 식사도 공사장에서 했고, 때로는 잠도 여기서 잤다. 당연히 이발은 공사장 주변의 이발소에서 해결했다.
이발소에 갈 때마다 주인 이발사가 트레비 분수의 설계와 조각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쓸 데 없는 말을 했다. 한두 번은 참았지만 나중에는 도저히 견딜 수 없게 된 그는 이발소에 더 이상 가지 않았다.
살비는 이발소 주인이 가게 안에서 분수 공사장을 볼 수 없게 하려고 조각을 하나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아소 디 코페였다. 물론 이 전설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트레비 분수라는 이름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두고 두 가지 가설이 전해진다. 분수는 세 개의 수조로 이뤄져 있었다. 그래서 ‘3’을 뜻하는 트레비라는 이름을 얻게 됐다는 주장이 그 중 하나다. 또 분수가 있던 장소는 삼거리라는 의미의 트레비움이었다. 여기에서 트레비라는 이름이 나왔다는 주장도 있다.
폴리 궁전과 지나이다
트레비 분수의 뒤에 있는 건물은 폴리 궁전이다. 이곳은 16세기 이후의 유명한 동판을 많이 소유한 장소로 널리 알려져 있다. 원래 정면 모습은 지금과 달랐지만 트레비 분수를 지을 때 분수를 더 돋보이게 하려고 일부를 부쉈다.
폴리 궁전은 19세기 러시아 문화계의 중요인물로 활동했고 나중에 이탈리아로 망명했던 지나이다 폴콘스카야가 살았던 곳이다. 빼어난 미인이었던 그녀는 소설가, 시인, 가수, 작곡가 등으로 활약하면서 러시아 유명 예술인들과 깊은 교분을 나눈 당대의 여걸이었다.
이탈리아 토리노 주재 러시아 대사의 딸로 태어난 지나이다는 러시아의 황제 알렉산데르 1세와 친한 사이였다. 모스크바 귀족들 사이에는 그녀가 알렉산데르와 사랑하는 사이라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지나이다는 1820년대 모스크바에서 문학, 음악 살롱을 열었다. 고대 그리스 여성 시인이었던 코리아의 이름을 따 가게 명칭을 ‘북쪽의 코리나’라고 지었다. 그 가게는 당시 러시아 예술계의 사교무대였다. 대문호 알렉산데르 푸시킨은 살롱의 단골 손님이었다. 그는 지나이다를 “음악과 아름다움의 여왕”이라고 칭송하는 시를 남기기도 했다.
지나이다는 1829년 러시아를 떠나 이탈리아 로마로 망명하게 됐다. 알렉산데르 1세가 죽은 뒤 발생한 11월 혁명 때문이었다. 당시 혁명에 그녀의 형부가 연루돼 다른 동지들과 함께 시베리아에 유형을 가게 됐다. 그의 가족도 함께 시베리아로 가기로 했다. 지나이다는 험한 곳으로 떠나는 언니 가족을 위해 모스크바에서 송별 파티를 열었다.
이를 지켜본 러시아 정부는 그녀에게 괘씸죄를 적용해 그녀가 반러시아 스파이라거나, 반러시아정교회 인사라는 등 헛소문을 퍼뜨렸다. 신분의 불안을 느낀 그녀는 할 수 없이 러시아를 떠나야 했다.
지나이다의 명성은 이미 이탈리아에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그녀가 살던 폴리 궁전에는 스탕달 등 유명 예술인이 들끓었다.
지나이다는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소문에 따르면 그녀는 어느 추운 날 저녁에 외출하러 나갔다가 거리에서 추위에 떨고 있는 한 거지 여인에게 코트를 벗어주는 바람에 감기에 걸렸고, 그것이 폐렴으로 이어졌다.
트레비 분수에 앉아 왼쪽을 보면 성 빈센트&아나스타시우스 교회가 있다. 대부분 관광객은 이 교회에 신경을 쓰지 않지만, 지나이다가 세상을 떠난 뒤 딸과 함께 묻힌 곳이다.
동전 던지기
트레비 분수 주변에는 늘 관광객이 붐빈다. 지명이 삼거리였던 만큼 여러 곳으로 길이 트여 있어 오고가기가 편하다. 게다가 무더운 로마의 여름 날씨에 한참 돌아다니다 지치면 분수 앞에 앉아 시원한 물소리를 들으며 편안하게 쉴 수도 있다.
트레비 분수의 물에는 석회 성분이 없다. 고대 로마 시대에 아주 맛있고 건강에 좋은 물로 여겨진 것은 이 때문이었다. 로마인은 분수에서 물을 바로 마실 수 있었다. 물론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마시지 않는 게 건강에 좋다.
한 관광객이 분수 앞으로 걸어가더니 뒤로 돌아서 동전을 던진다. 분수대에 앉아 있는 다른 사람들은 그런 행동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다시 살펴보니 이곳저곳에서 여러 사람이 서로 동전을 던지고 있다. 이른바 트레비 분수의 동전 던지기다.
이 관습의 유래를 놓고 여러 가지 견해가 나온다. 먼저 1954년 아카데미영화제 주제곡상을 받은 ‘분수와 동전 3개’라는 영화에서 유래한다는 주장이 있다. 영화에는 이런 대사가 있다.
‘동전 한 개를 던지면 로마로 돌아오고, 두 개를 던지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며, 세 개를 던지면 그 사람과 결혼한다.’
이때부터 동전 던지기가 시작됐다고 상당수 여행 가이드는 주장한다.
다른 견해도 존재한다. 트레비 분수에 동전을 던지는 풍습은 19세기에 한 독일인 때문에 생겼다는 것이다. 당시 로마는 유럽 중산층이 가장 가고 싶어 하는 여행지였다. 독일의 고고학자 볼프강 헬비그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그는 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고대 유적 상인이기도 했다.
헬비그는 1862년 독일고고학연구소의 지원을 받아 로마에 갔다가 도시의 매력에 흠뻑 빠져 아예 눌러 살기로 했다. 게다가 그곳에서 만난 러시아 공주 나디야 샤코브스코이와 결혼한 덕분에 더 이상 일을 안 해도 될 정도로 부자가 됐다.
헬비그는 부인 덕분에 상류층과 어울리게 됐고, 그들을 위해 큰 행사를 주최하기도 했다. 어느 날 그는 트레비 분수 앞에서 축제를 진행하던 도중 분수에 동전을 던졌다.
“고대 로마인은 분수와 다리의 신에게 희생물을 바쳤지요.”
헬비그의 모습을 본 여러 사람이 여행 서적이나 편지에 그 내용을 담아 유럽 곳곳에 퍼뜨렸다. 이후 트레비 분수에서 동전을 던지는 관습이 생겨나게 됐다.
실제 고대 로마 시대에 갈리아나 게르마니아에서 온 여행자가 로마 인근에 도착했을 때에는 개울을 다스리는 신에게 희생물을 바치는 게 일반적이었다. 헬비그와 같은 시대에 독일에서 온 여행자 중에는 조상의 관습을 따라 하는 사람이 더러 있었다.
유래가 어떻든 동전 던지기는 재미있는 관습이다. 그렇다면 로마 골목 골동품 가게에서 고대 로마의 동전인 세스테르티우스를 하나 사서 트레비 분수에 던지면 어떨까? 너무 비싸서 금화인 아우레우스를 던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게 하면 옛날로 돌아가 화려했던 고대 로마의 모습을 볼 수 있을까? 상상은 늘 여행을 즐겁게 만들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