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 쌓은 제국의 영광
‘제국의 통치에 의문을 가지는 자는 응징하라. 우리의 신을 모욕하다니 얼마나 무모한가! 그들에게 자치의 권리를 줬는데도 오만한 멍청이는 호의에 어떻게 보답했나? 우리의 신은 그런 불명예를 참지 않는다. 그들의 신전이 우리의 신을 공경하지 않는다면 불태워버려라. 모든 이들에게 본보기가 되게 하라(BC 1세기 시인 베르길리우스).’
여러 부족에서 쫓겨나거나 달아나는 등 갖가지 이유로 팔라티노 언덕에 모인 로마인은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한 가지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무기를 드는 일이었다. 당시에는 생산할 수 없다면 약탈하는 게 최선책이었다.
로마가 동포인 다른 라틴 도시로부터 호전적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것은 이 때문이었다. 국가 창립 이래로 로마인에게 전쟁은 필수불가결한 일이었다. 제2대 왕 누마 폼필리우스가 만든 야누스의 문이 닫힐 틈이 없을 정도로 로마인에게 전쟁은 생활의 일부나 마찬가지였다.
고대 로마 시대에 전투는 대개 양쪽 병사끼리 1대1로 싸우는 형식이었다. 처음에는 창, 칼로 싸우다 나중에는 주먹으로 치고받거나 돌을 들기도 했다. 병사가 전투에서 이겨 살아남으려면 육체적 능력과 심리적 결단성이 필요했다. 로마로서는 전투에서 이길 수 있는 병사를 키우기 위해 엄청난 돈과 시간을 들여야 했다.
한번 전쟁에 나서면 적을 누르고 돌아올 때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로마 초창기에는 봄에 전쟁에 나가 가을에 돌아왔지만, 공화정 말기와 제정 시대에는 수년씩 전쟁터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흔했다. 그래서 오랜만에 귀향한 장군과 병사들이 동포에게 전쟁에서 어떻게 싸웠는지, 어떻게 이겼는지를 보여주는 것은 매우 중요했다. 개선식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전쟁에서 이겨 빼앗은 전리품을 수레에 싣고 행진하면서 로마인에게 보여주는 게 개선식의 요지였다. 전쟁을 해서 이기면 얻을 게 많기 때문에 전쟁은 필요하다는 점을 과시하는 것이었다.
로마는 탄생할 때부터 군국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제국주의였기 때문에 개선식을 동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로마인은 개선식을 보면서 조국에 긍지를 느꼈고 충성을 다짐했다.개선식을 연 뒤에는 승리 역사를 담은 개선문을 세우는 게 순서였다.
로마 건국 이후 전쟁을 최초로 벌인 사람은 로물루스였다. 이후 로마 역사는 전쟁으로 점철됐다. 로물루스가 손을 댄 첫 전쟁은 콘수알리아 축제에서 저지른 여인 납치 사건이 원인이었다.
“납치해 간 딸들을 돌려주시오. 그리고 우리가 입은 정신적, 물질적 피해에 배상을 하시오.”
여인을 빼앗긴 여러 도시 중에서 카에니나가 가장 먼저 로마에 사절을 보냈다. 이들은 배상과 사과를 요구했다. 로마는 이를 거부했다. 카에니나는 로마로 쳐들어가 국경에 인접한 시골마을을 초토화했다.
로물루스는 군대를 이끌고 나가 반격했다. 카에니나 병사들은 전리품을 챙기느라 경계를 소홀히 하고 있었다. 로마군은 기습공격을 감행해 적을 대거 학살하고 진지도 빼앗았다.
공포에 사로잡힌 카에니나 병사들은 전리품을 버려둔 채 고향으로 달아났다. 로물루스는 그들의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카에니나 주민들은 전쟁 패배 소식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카에니나 왕 아크론이 건장한 호위병들을 대동하고 로물루스 앞에 나타났다.
“로마의 왕이여, 그대가 그렇게 용감하다면 나와 일대일 대결을 합시다. 이기는 쪽이 도시를 점령하는 조건이오.”
“내가 바라는 바요. 병사들의 희생을 더 늘려서 무엇 하겠소.”
로물루스는 갑옷을 차려 입고 대결장으로 나갔다. 그는 속으로 유피테르 신에게 이렇게 맹세했다.
‘여기서 이기면 유피테르 신께 적에게서 빼앗은 갑옷과 무기를 바치겠습니다.’
신의 도움 덕분이었는지 로물루스는 승리를 거두고 아크론 왕의 목을 베었다. 로마는 이렇게 해서 카에니나를 점령했다. 그는 이어 인근 도시인 안템나이로 쳐들어갔다. 이곳도 비슷한 방법으로 정복했다.
로물루스는 두 전쟁에서 살해한 병사들에게서 빼앗은 전리품을 챙겨 로마로 돌아갔다. 두 도시의 아이들은 인질로 데려갔다. 그와 병사들은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로마로 행진했다. 이것이 로마에서 벌어진 최초의 개선식이었다.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시오스는 『로마의 유적』에서 로물루스가 맨 처음 거행한 개선식 풍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로물루스는 카에니나와 안템나이를 점령한 뒤 군대를 이끌고 귀향길에 올랐다. 전투에서 살해한 적으로부터 빼앗은 전리품과 함께였다. 그 중에서 가장 고귀한 것은 신에게 공헌물로 바쳤다. 여기에 덧붙여 희생제물도 따로 바쳤다.
로물루스는 군대 행렬의 맨 뒤에 따라갔다. 그는 자주색 옷을 입고 있었고, 머리에는 월계수 관을 쓰고 있었다. 왕의 권위를 보여주고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는 말 네 마리가 이끄는 전차를 몰았다.
병사들은 부대별로 나눠 걸어가거나 말을 타고 행진했다. 조국의 노래로 신을 칭송하거나, 멋진 시로 장군을 찬미하기도 했다. 이들은 행진 도중에 부인과 아이의 손을 잡고 길가에 서 있는 동포들을 만났다. 이들은 승리를 축하하고 무사 귀환을 환영한다며 크게 소리쳤다.
로물루스의 군대가 시내에 들어섰을 때 와인을 가득 채운 술잔과 온갖 음식을 담은 그릇이 가장 고귀한 여러 귀족 가문의 집 앞에 놓여 있었다.
행진과 희생물 봉헌을 마친 로물루스는 카피톨리노 언덕에 유피테르 신에게 바치는 작은 신전을 지었다. 그는 이 신전에 유피테르 페레트리우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고대 유적의 흔적은 아직 남아 있다. 로물루스는 이 신전에 카에니나 왕에게서 빼앗은 전리품과 무기를 바쳤다.
승리의 행진은 이러한 것이었다. 전리품을 나르는 것으로 시작했고 희생제례를 치르는 것으로 끝났다. 이 행사를 로마인은 개선식이라고 불렀다. 로물루스가 처음으로 시작한 행사였다. 오늘날에는 개선식은 엄청난 비용이 드는 화려한 축제다. 용기를 보여주는 행사라기보다는 부를 자랑하기 위해 설계된 엄청난 장관이다. 개선식은 모든 면에서 고대의 단순함과는 거리가 멀다.’
로마 역사학자들은 고대 그리스에서 술의 신 디오니소스에게 바쳤던 축제 트리암부스가 개선식의 기원이었다고 추정한다. 디오니소스의 영광을 외치면서 술을 마시며 행진하던 행사였다. 이것이 에트루리아로 건너가 종교 행사가 됐다. 에트루리아에서는 유피테르 신에게 감사하기 위해 치르던 작은 행사였다.
디오니소스의 행진은 다시 로마로 전해지면서 로마인의 정신과 기상을 고양하는 화려한 행사로 바뀌었다. 로물루스의 개선식은 에트루리아의 행사를 모방했다는 이야기다.
개선장군이 걸어서 로마로 돌아왔던 로물루스 때와는 달리 제5대 왕 타르퀴니우스 때부터는 마차를 이용한 성대한 개선식이 열렸다. 2대 집정관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전차를 끄는 말 네 마리를 모두 백마로 골랐다.
로마로 쳐들어왔던 카르타고의 한니발 장군을 꺾고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개선식 때부터는 개선장군을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이나 신화에 나오는 헤라클레스에 비유하는 게 유행했다. 헤라클레스를 개선장군과 연결시킨 것은 ‘사람들의 절대 이익을 위해 헌신했다’는 게 공통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개선식은 하루 만에 끝내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공로가 엄청나게 클 때에는 여러 날에 걸쳐 진행하기도 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BC 48년 그리스 파르살로스에서 폼페이우스 마그누스를 누르고, 2년 뒤에는 아프리카에서 소 카토 등 잔당을 제거한 뒤 개선식을 치렀다. 나흘 동안 이어진 개선식이었다.
첫째 날은 갈리아, 둘째 날은 이집트, 셋째 날은 폰투스, 넷째 날은 누미디아 전쟁의 승리를 축하했다. 그는 내전에서도 이겼지만, 내전 승리는 개선식 조건에 해당하지 않기 때문에 다섯 번째 개선식은 거행하지 않았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는 세 차례나 개선식을 거행했다. 동방 원정을 마치고 돌아온 BC 61년에는 카이사르보다 하루 적은 사흘 동안 개선식을 열었다. 그는 45세 생일에 진행한 개선식에서 왕 등 고위 포로 300명을 개선식에 동행시켰다. 플래카드에는 적선 846척을 침몰시켰고, 적군 1천218만 명을 죽이거나 정복했다고 자랑하는 내용을 적었다. 병사들에게는 각각 은화 1천500데나리우스를 나눠주었다. 1~2세기 그리스 출신 로마 역사학자 플루타르코스는 세 차례 열린 폼페이우스의 개선식을 이렇게 설명했다.
‘폼페이우스는 세 대륙에서 거둔 승리를 앞세워 세 차례 개선식을 열었다. 첫 번째는 아프리카의 리비아, 두 번째는 유럽, 마지막은 아시아였다.’
로마 역사에서 개선식은 제국주의 팽창의 시기였고 공격적으로 전쟁을 수행했던 공화정 시대에 주로 펼쳐졌다. 제국이 어지간히 커져 더 이상 영토 확장이 어려웠고 방어적 전쟁에만 치중했던 제정 시대에는 드물었다. 공화정 시대에는 개선식이 300여 차례 펼쳐졌지만 황제가 다스렸던 제정 시대에는 30여 차례밖에 열리지 않았다.
공화정 시대에는 집정관이 전쟁 총사령관이었다. 총사령관은 전쟁에서 승리한 뒤 원로원의 허락만 받으면 개선식을 열 수 있었다. 반면 제정 시대에는 황제가 총사령관이었다. 장군이 전쟁에서 이기더라도 개선식 자격을 가진 사람은 황제였다. 제정 로마 초‧중기에는 티베리우스, 트라야누스 외에는 전쟁을 제대로 경험한 황제가 없었다. 국경이 비교적 안정돼 황제가 전쟁을 경험할 기회도 적었다. 그래서 개선식이 열릴 만한 일도 별로 없었다.
오현제 시대를 지나 군인황제 시대가 되면서 로마는 곳곳에서 전쟁을 치러야 했다. 군인황제들은 로마 제국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야만족을 무찔렀다. 공화정 시대라면 개선식을 치를 수 있는 전적을 많이 쌓았지만, 군인황제들은 끊임없는 야만족의 침입에 맞서 싸우느라 개선식을 거행하러 로마로 돌아갈 시간조차 없었다.
개선식의 조건
개선식은 전쟁에서 이긴 장군이나 황제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거행했다. 공화정 시대에 개선식은 최고의 영예였기 때문에 장군이 개선식을 거행하려면 까다로운 조건을 맞춰야 했다. 19세기 스코틀랜드 글래스고대학교 교수였던 윌리엄 램지가 그 조건을 연구해 발표했다.
‘독재관, 집정관, 법무관 등 군 통수권(임페리움)을 가진 현직 행정관만 개선식을 거행할 수 있었다. 개선식을 치를 때에도 현직 행정관 자격을 갖고 있어야 했다. 장군은 외적과 싸워 승리해야 개선식을 거행할 수 있었다. 내전 승리는 개선식 조건이 아니었다.
전투에서 적 병사 5천000명 이상을 죽여야 했고, 로마군의 피해는 아주 적어야 했다. 전투가 끝난 뒤에는 병사들로부터 임페라토르라는 칭호를 얻어야 했다. 특정 전투에서 5천 명 이상을 죽이지 않더라도 장기적으로 이어져 온 전쟁을 최종 승리로 이끌어도 개선식을 허용 받을 수 있었다. 전쟁의 결과 로마 영토가 확장되어야 했다. 기존에 잃었던 영토를 다시 찾은 경우에는 개선식을 열어주지 않았다.
로마로 돌아오면 군대를 해산해야 했다. 이는 전쟁이 끝났고, 군대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밝히는 행위였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군대는 로마 시민병에 국한됐다.’
램지가 주장한 개선식 조건에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의 메리 비어드 교수는 2007년 발간한 『로마의 개선식』이라는 책에서 대다수 역사학자가 사실로 믿는 ‘개선식의 조건’에 의문을 제기했다.
“대부분 조건은 후세에 정치적 이유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믿는 이론에 따르면 개선식 허용 여부는 전적으로 원로원의 결정에 달려 있었다. 장군은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면 월계관으로 장식한 상자에 승전 기록과 전리품 목록을 담아 원로원에 보낸다. 원로원은 로마 성벽 밖에 나가 회의를 열어 기록을 면밀히 살펴본 뒤 만족할 만한 내용이라고 판단하면 개선식을 선포한다.
“이번 전쟁의 승리를 축하하면서 개선식을 허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런 선포 행위를 수플리카티오라고 했다. 개선식이 선언되면 로마의 모든 신전은 문을 열고 모든 신의 조각상을 의자에 앉혀 신전 밖에 내놓는다. 전쟁에서 이기게 해 준 은혜에 감사하는 뜻에서 신에게 갖가지 공물을 바친다.
공화정 초기에는 민회에서 시민 투표로 개선식 거행 여부가 결정되는 일도 있었다. BC 5세기 발레리우스와 호라티우스에게 주어진 개선식의 경우가 그러했다. 사상 첫 평민 독재관이었던 마르키우스 루틸루스도 원로원의 반대에 부딪히자 시민 투표로 개선식을 치를 수 있었다.
로마인은 아주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민족이었다. ‘현직 행정관만 개선식을 치를 수 있다’는 규정을 갖고 있으면서도 늘 얽매이지는 않았다. 공화정 시대에 집정관 퀸투스 푸블리우스 필로의 임기가 전쟁 도중에 끝나고 말았다. 원로원은 그의 임기를 늘려줘 전쟁을 계속 수행하게 했다. 나중에 전직 집정관 자격으로 개선식을 치르게 해 주었다.
개선식 순서
초창기 개선식은 매우 간단했다. 먼저 적군의 장수와 포로가 개선장군에 앞서 끌려 나갔다. 이어 전리품을 잔뜩 챙긴 병사들이 행진했고, 성문 곳곳에서 이들을 환영하는 만찬이 열렸다. 시민들은 아무렇게나 병사들의 뒤를 따라갔다. 아주 신나는 노래를 불렀고, 때로는 장난삼아 서로를 야유하고 깔깔 웃기도 했다.
로마가 대제국으로 성장하면서 개선식의 순서와 규모도 달라졌다. 먼저 총사령관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돌아올 때는 군단을 해산했다. 북쪽에서 귀국할 때는 루비콘 강, 남쪽에서 돌아올 때에는 브린디시가 해산 장소였다. 총사령관은 병사들에게 수도 로마에서 열리는 개선식에서 다시 만나자고 약속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지시한다.
총사령관은 소수의 수행원만 거느리고 로마로 간다. 개선식이 열릴 때까지 수도 성벽 안에는 들어가지 못한다. 로마 시내에 발을 딛는 순간 개선식 조건은 소멸되는 게 로마의 법이었다.
개선식이 열리는 날, 행사에 참가하는 모든 병사는 마르스 평원에 모인다. 이곳에서 행렬의 선두부터 후미까지 대열을 짠다. 개선장군이 나타나면 병사들은 부동자세로 오른팔만 앞으로 들어 올려 경례한다. 개선장군은 병사들에게 일장 연설을 한다. 병사들의 용기와 헌신을 찬양하고, 그들에게 돌아갈 보상 규모를 밝힌다. 카이사르는 어느 누구보다 통 큰 선물을 주었다.
“병사들에게 1인당 2만 4천 세스테르티우스를 지급하겠다. 곡물 90리터와 오일 90파운드도 나눠주겠다. 제대한 뒤 정착할 땅도 주겠다. 로마 시민에게는 1인당 300세스테르티우스를 선물로 주겠다. 연간 임차료 2천 세스테르티우스 이하의 집에서 사는 사람에게는 1년 임차료를 면제해 주겠다.”
개선장군의 연설이 끝나면 비로소 개선식 행렬이 시작된다. 마르스 평원을 출발한 행렬은 포르타 트리엄팔리스(개선의 문)를 통해 로마 시내로 들어간다. 이 문이 어디에 있었는지, 어떻게 생겼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4가지 견해가 전해진다.
먼저 포르타 트리엄팔리스는 세르비우스 성벽에 붙어 있던 문이었다는 주장이다. 대전차경기장으로 통하는 문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일부에서는 ‘어느 문이든지 개선장군이 시내로 들어갈 때 사용한 문을 포르타 트리엄팔리스라고 불렀다’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마르스의 평원에 별개로 만든 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원래 개선식 행렬은 포르타 카르멘탈리스(카르멘탈리스 문)를 지나갔지만 이후 개선식에만 사용하기 위해 포르타 트리엄팔리스를 새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현재는 마지막 주장이 통설로 받아들여진다.
포르타 트리엄팔리스 밖에서는 원로원 의원들과 정부 고관들이 나와 개선장군을 기다린다. 그들이 맨 앞에 서서 개선 행렬을 선도한다. 음악을 연주하는 악대와 전리품을 가득 실은 마차 행렬이 그들의 뒤를 따른다. 전쟁 상황을 그린 플래카드와 수많은 들것 행렬이 이어진다.
들것에는 정복한 나라와 도시, 민족의 이름을 적은 나무판이 실려 있다. 어떤 경우에는 상아나 나무로 만든 도시 모형도 실려 있었다. 플래카드에는 정복 지역의 강과 산은 물론 특이한 지형을 담은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다시 분위기를 높이기 위해 다른 악대가 뒤를 따르고 제사에서 제물로 쓸 흰 소가 끌려간다. 그 뒤에는 소를 도살할 여러 제사장이 따라간다. 이들 뒤에는 프라이팬처럼 생겼고 손잡이가 달린 접시를 든 다른 제사장이 따라간다.
점령지에서 끌고 온 코끼리 등 이색동물 행렬이 이어지고, 적군의 주요 무기나 적장의 휘장이 등장한다. 전쟁에서 사로잡은 적장이나 포로를 태운 마차도 등장한다. 카이사르의 개선식에는 갈리아의 베르킨게토릭스, 이집트의 아르시노에 공주, 폰토스의 파르나케스 왕의 아들, 누미디아의 유바 왕의 아들 등이 포로로 등장했다.
개선식에 끌려 나온 포로는 포로 로마노에 있는 감옥인 툴리아눔에 갇힌다. 로마에 맞섰다 마리우스에 패해 붙잡혔던 누미디아 왕 유구르타는 여기서 굶어죽었다. 갈리아 여러 부족의 힘을 모아 로마에 맞서 싸웠던 아르베르니 부족의 베르킨게토릭스 족장은 감옥에 갇힌 뒤 처형당했다. 하지만 대부분 포로는 죽임을 당하지 않았다. 로마 속주 시리아에서 팔미라 왕국을 세웠던 제노비아 여왕은 사면을 받았다.
이제 개선장군이 나설 차례다. 릭토르 12명이 집정관을 상징하는 파스케스를 들고 가면 말 네 마리가 이끄는 둥근 마차를 탄 개선장군이 등장한다. BC 2세기까지는 개선장군이 전차를 직접 몰았다. BC 1세기부터는 하인이 전차를 몰고, 개선장군은 그 위에 올라가 군중들의 환호에 손을 흔들었다.
“이오 트라이엄프(승리 만세)! 이오 임페라토르(개선장군 만세)! 용감한 로마의 아들이여!”
개선장군은 화려한 수를 놓은 황금색 토가와 꽃무늬가 새겨진 튜니카를 입는다. 시대나 사람에 따라 옷의 모향과 색은 조금씩 다르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개선장군을 신이나 왕처럼 보이게 할 정도로 아름다운 옷이었다. 개선장군은 이마에 월계수관을 쓴다. 오른손에는 월계수 나뭇가지를, 왼손에는 홀을 든다. 공화정 초기까지만 해도 유피테르 신을 흉내 내 얼굴을 주홍색으로 칠하기도 했다.
때로는 개선장군 뒤에 황금관을 쓴 노예가 뒤따르기도 한다. 노예는 개선장군에게 끊임없이 이렇게 속삭인다.
“레스피케 포스트 테 호미넴 메멘토 테.”
이 말은 이런 뜻이다.
“항상 뒤를 보라. 너는 불멸이 아니다. 도덕을 잊지 말라.”
개선장군이 승리에 도취돼 도덕성을 망각하고 자만에 빠지거나, 황제가 되려는 엉뚱한 생각을 하는 것을 막자는 의도였다.
똑같은 이유로 성기 모양의 작은 종인 파스키눔과 채찍이 마차에 달려 있기도 했다. 파스키눔은 원래 ‘성기의 신’ 파스키누스를 상징한다. 이것에는 개선장군에게서 악운을 물리쳐주는 힘이 담겨있다고 로마인은 믿었다.
개선장군 뒤로는 참모들이 말을 타고 따라가고, 군단 병사들이 행진한다. 군단장, 대대장, 백인대장에 이어 군단, 대대, 중대별로 행진한다. 이들의 행진은 위풍당당하다기보다는 장난스러운 분위기가 강했다. 그들은 이날을 위해 미리 정해둔 구호를 합창한다. 카이사르의 개선식에서 나온 구호는 이랬다.
“우리는 고향에 대머리 호색한을 데려왔다네.
로마인이여, 마누라를 제대로 단속하라.
당신이 그에게 빌려준 황금 보따리는
갈리아 매춘부에게 쓰느라 모두 사라졌다네.”
우쭐해지기 쉬운 개선장군의 위엄에 찬물을 끼얹는 구호를 외치는 것은 로마 개선식의 전통이었다. 신이 개선장군을 질투하지 않게 만든다는 게 이유였다.
의기양양한 병사들은 신나는 음악을 연주하는 악대 뒤를 따라가면서 전리품과 포로를 자랑했다. 자신들이 얼마나 용감했고 전쟁을 얼마나 성공적으로 수행했는지를 떠들어댔다. 로마 시민은 환호했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가 나가신다!”
개선장군은 로마 시내에 들어가면 원로원에 군 지휘권인 임페리움을 공식적으로 반납한다. 개선 행렬은 키르쿠스 막시무스를 거쳐 비아 트리엄팔리스(개선의 길)로 이어진다. 이후 팔라티노 언덕을 지나 콜로세움 쪽으로 행진한다. 콜로세움 앞의 메타 수단스까지 가서 회전한 뒤 포로 로마노로 방향을 바꾼다. 메타 수단스는 콜로세움 앞에 있던 분수였다.
메타 수단스를 지난 개선 행렬은 포로 로마노로 들어간다. 포로 로마노 중심가인 비아 사크라(신성한 길)를 거쳐 카피톨리노 언덕 쪽으로 간다. 여기서부터는 모두 엄숙해진다. 신에게 감사를 바치는 의식을 거행하기 때문이다.
개선장군은 마차에서 내려 카피톨리노 언덕에 올라간다. 그곳에 있는 유피테르 신전에는 개선장군만 들어간다. 그는 큰 흰색 황소 두 마리를 바로 잡아 제물로 바친다. 그리고 이렇게 간청한다.
“위대한 유피테르 신이여, 적의 우두머리를 당신께 바칩니다. 당신을 모욕하려 했던 자들은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그들의 머리를 자르소서! 당신의 병사들은 피의 바다에 뛰어들어 정당하고 명예롭게 제국을 구했습니다. 유피테르 신만이 그들의 몸에 묻은 피를 씻어내고 정화해주실 수 있습니다. 저와 병사들에게 그런 은혜를 베푸소서!”
개선장군은 월계수 관을 유피테르 신에게 바친다. 공식 행사는 이것으로 끝이다. 신전 문은 닫히고 제단에서 향이 피어오른다.
개선 행렬이 지나가는 동안 거리에는 가장 좋은 옷을 골라 입은 시민들이 나와 개선장군에게 꽃 세례를 퍼부으며 열렬한 환영 인사를 건넨다. 때로는 주변에서 가장 높은 신전이나 건물 계단, 꼭대기에 올라가 개선식을 구경하기도 했다. 로마 시내의 모든 신전은 문을 열어 신도 개선식을 구경할 수 있게 했다. 신전 곳곳은 꽃으로 장식했다. 신전에 있는 모든 제단에는 향을 피워 신에게 감사 인사를 올렸다.
개선장군은 개선식을 마치면 시민들을 초청해 잔치를 베푼다. 나흘간 치러진 카이사르의 개선식 때에는 나흘간 잔치를 베풀었다. 잔칫상은 무려 2만 2천 개에 이르렀고, 손님은 6만여 명을 넘었다. 카이사르는 로마 곳곳에서 검투사 경기를 거행하고 연극을 공연했다. 대전차경기장 키르쿠스 막시무스에서는 매일 전차 경기를 진행했다.
테베레 강에서는 모의해전을 펼치기도 했다. 기록에는 ‘아시아와 비티니아에서 끌려온 공주들이 로마 시민들 앞에서 춤을 추었다’고 적혀 있다. 데키무스 라베리우스라는 기사계급의 시민은 직접 만든 소극을 공연했다. 카이사르는 그에게 상금 50만 세스테르티우스와 금반지를 선물했다.
개선식과 축하잔치 등 모든 행사를 마친 개선장군이 밤늦게 집에 돌아갈 때에는 시민들이 횃불을 들고 나팔을 불면서 배웅해주었다. 개선장군의 영예는 개선식으로 끝나지 않는다. 대개 국가가 비용을 지불해 개선장군의 업적에 걸맞은 집을 마련해주는 게 관례였다.
개선장군이 죽으면 시신을 화장한 뒤 유해를 로마 시내에 보관할 수 있었다. 로마에서는 종교적 이유 때문에 시신을 시내에 묻을 수 없는 게 법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특혜였다. 개선장군의 유족이 사는 집의 정문 앞에는 월계관을 쓴 개선장군 동상을 실은 개선마차를 설치할 수 있었다.
정식 개선식 외에 소규모 개선식도 있었다. 트리엄푸스 나발리스는 해군을 위한 개선식이었다. 고대 로마에서는 모두 네 차례 해군 개선식이 열렸다. BC 260년 카르타고 해군을 상대로 로마군 사상 첫 해전을 승리로 이끈 두일리우스가 첫 해군 개선장군이었다. BC 241년 역시 카르타고 해군을 몰살시킨 가이우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 BC 189년 크레타를 상대로 해전에서 이긴 퀸투스 파비우스 라베오, 10여년 뒤 마케도니아의 왕 페르세우를 바다에서 제압한 옥타비우스가 뒤를 이었다.
집정관은 아니지만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둔 군 지휘관에게도 미니 개선식을 허용했다. 로마 시내에 들어가지는 못하고 마르스 평원에서 행진을 하는 게 고작이었다. 이를 트리움푸스 카스트렌시스라고 불렀다.
로마에서 개선식을 마지막으로 치른 이는 호노리우스 황제였다. 충복이었던 스틸리코 장군이 알라리크가 이끄는 서고트족과의 전쟁에서 연거푸 승리하자 그는 로마에서 개선식을 열었다. 사두마차에 오른 것은 총사령관 자격을 가진 호노리우스였다. 실제 전쟁을 치른 장군 스틸리코는 말을 타고 뒤를 따라가는 데 그쳤다.
호노리우스는 과거 공화정 시대 개선장군과 제정 시대 황제가 그랬던 것처럼 개선식을 치른 뒤 검투사 경기와 각종 오락을 로마 시민들에게 제공했다. 수천 명의 고트족 포로가 검투사 경기에서 목숨을 잃었다고 전해진다. 스틸리코는 일생의 숙적 알라리크를 이탈리아에서 몰아내는 일에 전념한 로마의 마지막 명장이었지만 나중에 호노리우스에게 암살당하고 말았다.
로마는 공화정 중기부터 삼니움, 타렌툼, 시칠리아, 카르타고 전쟁 등을 치르면서 서서히 제국으로 성장해갔다. 장군, 황제는 개선식을 거행한 뒤에는 건축물을 지어 전쟁 승리의 역사를 영구히 남기려 했다. 이렇게 해서 태어난 건물이 개선문이었다.
이런 형태의 승전 기념물을 만든 것은 로마인이 처음이었다. 당시 다른 나라나 부족의 경우 전쟁에서 이기면 장군의 동상이나 기념 원주를 세우곤 했다. 그리스 일부 지역에서는 똑같은 모양의 동상이나 기둥을 나란히 두 개 세우기도 했다.
로마에서 개선문의 시초는 포르타 트리암팔리스였다. 마르스 평원을 출발한 개선 행렬이 로마 시내로 들어갔던 문이었다. 개선식이 열릴 때면 이 문에는 각종 전리품과 승리를 상징할 만한 기념물이 내걸렸다. 이 때문에 나중에 다른 개선문에을 만들 때에도 화려한 부조를 설치하는 게 관행이 됐다.
세월이 흐르면서 로마는 물론 다른 속주와 식민시에도 개선문이 하나둘씩 건설됐다. 개선문은 대개 큰길에 세워졌다. 오가는 행인이 개선문을 보면서 과거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장군의 이름을 기억하라는 뜻에서였다.
대형 개선문도 있었지만 소형 개선문도 적지 않았다. 모양은 다양했다. 아치 한 개로 이뤄진 개선문이 있었는가 하면, 전차가 지날 수 있는 대형 아치를 길에 세우고 양쪽 옆에는 보행자가 걸어가는 소형 아치 두 개를 덧붙여 웅장하게 보이도록 만든 개선문도 있었다. 때로는 똑같은 크기와 모양의 개선문 두 개를 나란히 세우기도 했다.
개선문의 기본 양식은 거의 비슷했다. 양쪽에 굵은 교각 두 개가 세워져 있고, 그 위에 엔타블러처가 얹혔다. 양쪽 정면에는 원주가 붙여졌고, 여러 가지 부조가 장식으로 달렸다. 정면 윗부분에는 개선문을 건설한 이유 등을 글로 새겼다.
초창기의 개선문
로마에서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는 개선문을 개인적으로 처음 세운 사람은 BC 2세기 초 정치가, 군인이었던 루키우스 스테르티니우스였다. 그는 히스파냐 울테리오르 총독을 지내는 동안 반란을 진압한 뒤 은 2만 3천㎏을 챙겨 귀국했다. 전쟁 공로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원로원이 개선식을 허용해주지 않을 거야. 그렇다고 나의 업적을 그냥 망각 속에 파묻어버리고 싶지는 않아. 다른 방법으로 나의 성과를 후세에 알리자.’
스테르티니우스는 포르타 트리암팔리스와 비슷한 모양으로 히스파냐에서의 업적을 새긴 개선문을 만들기로 했다. BC 196년 그가 건립한 개선문은 하나가 아니라 무려 세 개였다. 포룸 보아리움의 포르투나 신전과 마테르 마투타 신전 앞, 그리고 키르쿠스 막시무스 인근에 하나씩이었다. 세 개의 개선문 꼭대기에는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와 전차를 모는 그의 모습을 담은 조각을 올렸다.
포룸 보아리움은 많은 사람이 오가는 곳이었다. 키르쿠스 막시무스는 전차경주가 열릴 때에는 발 디딜 틈도 없었다. 이런 곳에 개선문을 무려 세 개나 세웠으니 스테르티니우스라는 이름은 당시 로마인에게는 깊이 각인됐을 것이다.
포에니 전쟁에서 한니발을 누르고 로마에 최종적인 승리를 안겨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스테르티니우스의 개선문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는 이미 개선식을 거행한 적이 있는 로마의 영웅이었다.
‘저 사람처럼 로마에 나의 업적을 새긴 개선문을 짓도록 하자. 개선식은 한 번 거행하면 끝나버린다. 영원히 사람들의 기억에 남으려면 건축물을 건설해야 해.’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스테르티니우스의 개선문 건립으로부터 6년 뒤인 BC 190년 카피톨리노 언덕으로 이어지는 도로인 클리부스 카피톨리누스에 개선문을 세웠다. 카피톨리노 언덕으로 가는 사람은 꼭 지나가는 위치였다. 아무나 이런 자리에 건축물을 세울 수는 없었다. 로마의 영웅인 스키피오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스키피오는 그때 시리아 원정을 앞두고 있었다. 형 루키우스 스키피오가 총사령관이었고, 그는 단순히 자문관 역할을 했다. 개선문은 원정을 떠나기 며칠 전에 완공됐다. 그는 개선문에 도금한 조각상 일곱 개와 말 조각상 두 개를 붙였다. 또 개선문 앞에는 대리석으로 만든 물 저장고 두 개를 설치했다.
“승리입니다. 로마군이 갈리아 연합군에게 대승을 거뒀습니다. 적군은 12만 명이 살해됐고, 아군 피해는 20명도 채 안 된다고 합니다.”
BC 121년 가을 로마에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집정관 파비우스 막시무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키살피나의 이제어 강 근처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알로브로게스 부족과 아르베르니 부족 등으로 구성된 갈리아 군대를 대파했다는 것이었다. BC 390년 갈리아의 로마 점령을 기억하면서 떨고 있던 로마인들은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파비우스 막시무스에게 개선식을 승인하겠습니다. 로마의 안전을 지킨 장군의 노고를 치하합니다.”
파비우스 막시무스의 개선식은 그때까지 치러졌던 어떤 개선식보다 화려했다. 하이라이트는 포로로 붙잡혀 개선식에 등장한 아르베르니 부족의 족장 비투이투스였다. 그는 전쟁에서 착용했던 은제 갑옷을 입고 손에 수갑을 찬 채 개선식에 끌려 나왔다.
“원로원이 허락해 주신다면 저도 개선문을 하나 건립하고 싶군요. 다른 곳이 아니라 포로 로마노에 만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세운 개선문을 늘 부러워하고 있었다. 언제라도 기회가 생기면 자신의 개선문을 하나 건립하는 게 꿈이었다. 다행히 갈리아와의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와 성대한 개선식까지 거행했으니 개선문을 세워도 원로원과 로마인의 눈치를 볼 필요는 없었다.
원로원의 승낙을 얻은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포로 로마노의 사크라 비아에 개선문을 세웠다. 레기아와 베스탈 신녀 저택 사이였다. 개선문 위에는 승리의 전차를 모는 그의 모습을 새긴 석상을 세웠다. 포로 로마노에 개선문이 건립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스테르티니우스와 스키피오, 막시무스가 세운 개선문은 모두 부서져 지금은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
파비우스 막시무스의 개선문 이후 포로 로마노는 물론 로마 곳곳에서 개선문 건립이 이어졌다. 여러 기록을 종합해 보면 로마에 건설된 개선문은 20~30개였다. 아우구스투스 개선문, 클라우디우스 개선문, 티투스 개선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개선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 디오클레티아누스 개선문,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등이었다.
이 가운데 지금 살아남은 것은 티투스 개선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드루수스 개선문, 갈리에누스 개선문 등 다섯 개뿐이다.
66년 유대인이 로마에 반기를 들었다. 네로 황제가 자살한 이후 로마가 내전에 휩싸여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로마는 응징하기로 결정했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아들 티투스 플라비우스가 군단을 이끌고 나섰다. 이때는 베스파시아누스가 즉위하기 직전이었다. 유대인을 서둘러 진압하지 못한다면 그에게는 큰 타격이 될 수밖에 없었다.
티투스는 전쟁에 나선 지 4년만인 70년 예루살렘을 점령해 반란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는 예루살렘에 있던 솔로몬의 성전을 불태워버렸고, 많은 전리품을 챙겨 로마로 돌아갔다. 로마군이 학살한 유대인은 자그마치 60만~100만 명이었다. 예루살렘은 벽 하나만 남기고 폐허가 됐다. 이 때 살아남은 벽이 바로 그 유명한 ‘통곡의 벽’이다.
티투스 황제는 79년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의 뒤를 이어 황제 자리에 올랐다. 그는 유대전쟁 승리를 기념하는 개선문을 포로 로마노에 짓기 시작했다. 그런데 끔찍한 대사건이 연거푸 일어났다. 베수비오 화산의 대폭발로 폼페이가 매몰돼 버렸다. 로마에서는 엄청난 대화재가 발생해 판테온, 유피테르 신전 등 많은 건물이 큰 피해를 입었다. 그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 때문인지 81년 9월 13일 갑작스러운 열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티투스의 동생 도미티아누스가 뒤를 이어 즉위했다. 그는 영민했고 정치적 판단력이 좋았다. 죽은 형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지만 정치적으로 이용할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형이 짓던 개선문을 서둘러 완공해 형에게 헌정했다. 또 형이 착공한 베스파시아누스 신전도 일찌감치 완공했다.
“베스파시아누스 선황과 티투스 선황을 신으로 모시도록 할 것이오. 이 신전은 하늘의 신이 된 두 분께 바치겠소. 그리고 개선문은 티투스 선황의 유대전쟁 승리에 헌정하겠소. 두 건물은 우리 가문의 영광을 나타내는 상징이 될 것이오.”
교황과 게토
1555년 바오로 4세(재임 1555~59년)는 정말 ‘뜻하지 않게’ 교황 자리에 앉았다. 전임자였던 마르첼로 2세(재임 1555년)가 교황이 된 지 한 달 만에 급서하는 바람에 그에게 기회가 돌아온 것이었다.
다들 놀라워하면서 바오로 4세가 교황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걱정했다. 그는 아주 완고한데다 남과 대화할 줄 모르는 성격의 소유자였기 때문이었다. 이런 분위기를 알고 있던 바오로 4세는 취임한 이후 늘 마음이 불편했다. 열렬한 민족주의자였던 그는 티투스 개선문에서 충성 서약식을 열겠다고 선포했다.
“7월 첫날 모든 로마 시민은 티투스 개선문 밑을 한 번씩 지나가야 한다. 그곳에서 하나님과 나에게 충성을 서약해야 한다. 만약 불참하는 자에게는 파문은 물론 여러 가지 무거운 형벌이 내려질 것이다.”
교황청 관계자들은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하지만 교황청의 최고 책임자이며 하나님의 대리인인 교황의 말을 아무도 거역할 수 없었다. 수많은 신도와 로마 시민은 티투스 개선문을 지나가야 했다. 그런데 유대인은 개선문 행진을 거부했다.
“조상을 학살한 사람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만든 건축물 아래를 지나갈 수 없습니다.”
화가 난 교황은 유대인을 집단거주시설에 가두기로 했다. 교황의 지시에 따라 산탄젤로 성 인근 테베레 강변에 유대인이 집단 거주할 시설이 건설됐다. 그곳에는 ‘쓰레기’, ‘찌꺼기’라는 뜻의 이탈리아어인 게토라는 이름이 붙었다.
30여 년 전 베니스에 처음 게토가 생긴 데 이어 이탈리아에서 두 번째로 완성된 로마의 게토에는 유대인 3천여 명이 이주했다. 유대인은 이후 300여 년 동안 게토에서 짐승만도 못한 삶을 살았다. 게토가 세워진 곳은 해마다 홍수로 많은 재산, 인명 피해가 나던 곳이었다. 로마에서 가장 지저분해서 위생에 문제가 많아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었다.
고대에 유대인 학살의 역사를 담아 만든 티투스 개선문은 이렇게 해서 엉뚱하게도 중세에는 유대인 탄압의 상징이 되고 말았다. 티투스 개선문에 대한 유대인의 증오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이스라엘과 메노라
“티투스 개선문에 해답이 있습니다.”
1948년 엉뚱한 일이 벌어졌다. 유대인에게 원수 같은 건축물이던 티투스 개선문이 유대인 신생국가 건립에 도움을 주는 뜻밖의 사태가 생긴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1948년 5월 12일 독립을 선언했다. 새 나라를 건설한 유대인은 나라의 상징인 국장을 만들기 위해 디자인 공모전을 실시했다. 전 세계에서 많은 유대인 디자인 전문가가 공모전에 참가했다.
당선작은 그래픽 디자인 전문가였던 가브리엘 샤미르, 막심 샤미르 형제의 작품이었다. 이들은 유대를 상징하는 황금촛대 메노라를 평화의 상징인 올리브 가지로 둘러싼 디자인을 제출했다. 메노라는 성경에 나오는 성물이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구체적 모양을 일러주면서 만들라고 한 촛대였다.
이스라엘 정부는 메노라가 들어간 국장을 기초로 해서 이스라엘 정부 각 부처의 휘장도 만들기로 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메노라는 고대에 모두 없어졌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메노라의 정확한 모양을 알지 못했다.
“로마 티투스 개선문에 메노라 부조가 새겨져 있습니다.”
세계 곳곳을 조사하던 이스라엘 정부는 엉뚱하게도 티투스 개선문에 붙은 부조에 메노라가 새겨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당한 유대인이 노예로 전락해 로마로 끌려가면서 메노라를 운반하는 장면이었다.
이스라엘은 로마에 전문가들을 보내 티투스 개선문의 메노라를 조사했다. 그곳에는 정말 가지가 일곱 개인 메노라 부조가 붙어 있었다. 그들은 메노라 사진을 수십 장 찍고 그림까지 그려갔다. 이스라엘은 이를 바탕으로 1949년 2월 10일 마침내 국장을 만들 수 있었다.
티투스가 예루살렘의 대성전에서 가져간 메노라는 처음에는 베스파시아누스 포럼에 있던 ‘평화의 사원’에 보관돼 있었다고 전해진다.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모른다. 메노라의 행방을 놓고 세 가지 가설이 맞선다.
먼저 5세기 알라리크가 이끄는 서고트족이 로마에 쳐들어왔을 때 훔쳐갔다는 주장이다. 서고트족에 이어 로마를 침공한 겐세리크의 반달족이 카르타고로 옮겨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마지막으로 비잔틴제국의 명장이었던 벨리사리우스 장군이 콘스탄티노플로 가져갔다는 가설도 있다. 6세기 비잔틴제국 역사학자 프로코피우스가 이런 기록을 남겼기 때문이다.
‘벨리사리우스가 개선식을 할 때 메노라를 함께 들고 왔다. 나중에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는 메노라의 행방은 이후 묘연해졌다. 메노라는 황금으로 만들었다. 누군가 금을 탐내 중간에서 가로챘을 가능성도 있다.
한편 벤 구리온 총리가 1948년 이스라엘 건국을 선언했을 때 유명한 유대인 랍비가 이탈리아에 살던 유대인을 티투스 개선문에 모이게 했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개선문 밑을 지나가라고 했다. 그의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과거 고대 로마 시대 개선식이 열릴 때 개선장군이 개선문을 지나갔던 방향과 반대쪽으로 행진합시다. 과거 유대인 역사의 치욕을 씻어내고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의 귀환을 상징하는 행사입니다.”
“내전을 종식시키고 파르티아까지 정복하고도 6년이 지났지만 내가 얻은 게 무엇이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는 팔라티노 황궁에서 포로 로마노를 내려다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도 쉬지 않고 10년 동안 전쟁터를 누볐지만 황제 자리 말고는 아무것도 남은 게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폐하, 포로 로마노에 개선문을 하나 세우시지요?”
“개선문을?”
“역대 로마의 영웅들은 모두 개선문을 세웠습니다. 폐하의 업적은 그들 못지않으니 개선문을 세우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티투스 선황은 콜로세움 쪽에 개선문을 세웠습니다. 폐하는 반대쪽인 카피톨리노 언덕 아래에 세우시면 될 겁니다. 그러면 두 개선문이 포로 로마노의 입구와 출구 역할을 하지 않겠습니까?”
세베루스는 개선문을 세우라는 측근의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지난 10년간의 일이 마치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193년 초봄 세베루스는 고지 판노니아 속주의 총독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당시 주변 정세는 조용했다. 로마 내부적으로 변고만 없으면 평화가 이어질 수 있는 분위기였다.
“총독님, 큰일 났습니다. 페르티낙스 황제께서 근위대 병사들에게 살해당하셨다고 합니다.”
로마에서 지인이 급히 소식을 보내왔다. 황제가 죽었다는 것이었다. 페르티낙스는 유명한 장군 출신이었다. 192년 연말 폭정을 일삼던 코모두스 황제가 암살당했을 때 그는 군의 전폭적 지지를 받아 황제 자리에 올랐다.
페르티낙스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처럼 검소하게 살아 로마인의 지지를 받았다. 전쟁터에서 많은 업적을 남긴 장군이어서 세베루스는 물론 모든 후배 군들과 병사들로부터 진심으로 존경을 받았다. 황제가 된 그는 이를 바탕으로 개혁을 추진하려 했다.
근위대는 생각이 달랐다. 그들은 개혁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페르티낙스가 황제 자리에 오를 때 도움을 준 근위대는 큰 보상을 받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황제의 조치는 그들의 기대를 전혀 만족시키지 못했다.
화가 난 근위대 300여 명은 193년 3월 28일 팔라티노 언덕의 궁전으로 몰려가 페르티낙스를 살해하고 말았다. 그들은 황제의 목을 잘라 긴 장대에 꽂고 근위대 숙소로 돌아갔다. 그들은 황제 자리를 원로원 의원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에게 넘겼다. 일부 역사학자는 이렇게 주장한다.
‘근위대는 황제 자리를 놓고 경매를 실시했다. 율리아누스가 치열한 입찰 끝에 술피키아누스보다 높은 금액을 불러 황제가 됐다.’
신분을 알 수 없는 역사학자가 쓴『황제의 역사』는 다르게 설명한다.
‘술피키아누스는 근위대에 지지를 호소하고 있었다. 이때 율리아누스가 근위대에 이렇게 말했다. “황제 암살에 복수할 뜻이 없는 사람을 골라야 한다.” 근위대는 그제야 술피키아누스가 죽은 황제의 장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국 율리아누스가 황제 자리를 따냈다.’
세베루스가 다스리던 고지 판노니아에 주둔한 부대는 14군단 게미나였다. 그들은 훌륭한 장군이었던 페르티낙스를 권좌에 올리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던 부대였다. 그들은 황제 암살 소식을 듣고 분개했다. 그래서 다시 일어나기로 뜻을 모으고 이렇게 외쳤다.
“세베루스 황제 만세.”
빈도보나에 있던 10군단도 14군단의 뒤를 따라 세베루스를 황제로 모시기로 했다. 세베루스는 병사들의 뜻을 받아들였다. 그는 14군단과 10군단에서 병력을 절반씩 빼내 1개 군단을 만들어 로마로 진격했다.
“시간이 승패를 가른다. 서둘러야 한다.”
로마에서는 누구도 세베루스가 루비콘 강을 건너는 줄 모르고 있었다. 율리아누스는 물론 근위대도 마찬가지였다. 세베루스는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로마에 입성할 수 있었다. 그는 먼저 안락한 궁전 생활에 젖어 있던 율리아누스를 붙잡아 목을 잘랐다. 페르티낙스 암살에 가담한 근위대 병사들은 모두 십자가에 매달았다. 나머지 근위대는 해산시켜 버렸다.
세베루스는 원로원 승인을 받아 새 황제로 등극했다. 그리고 충성스러운 병사들로 새 근위대를 구성했다. 페르티낙스에게는 국장을 베풀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모든 일이 끝난 게 아니었다.
“아프리카 시골뜨기가 황제라면 나도 황제다.”
로마 서쪽에서는 브리타니아 총독인 클로디우스 알비누스, 동쪽에서는 시리아 총독인 페세니우스 니제르가 황제를 자칭하고 나섰다. 비상사태에 직면한 세베루스는 재빨리 움직였다. 그는 먼저 알비누스에게 화해를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나는 황제 자리에는 욕심이 없네. 다만 존경하는 페르티낙스 장군의 암살을 복수한 것뿐이야. 로마가 안정을 되찾으면 물러날 생각이지. 당신을 카이사르로 지명하겠어. 그러니 우리는 서로 싸워서는 안 되네.’
카이사르는 이른바 황태자였다. 황제가 죽으면 다음 제위를 차지하게 되는 사람이었다. 알비누스는 세베루스의 뜻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위기를 넘긴 세베루스는 시리아로 쳐들어가 니게르의 군대를 격파했다. 또 그를 지원했던 파르티아 왕국에도 쳐들어가 혼쭐을 내주고 돌아왔다.
세베루스는 알비누스에게 황제 자리를 넘길 생각이 없었다. 그는 이번에는 알비누스를 공격해 루그두눔에서 손쉽게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정세를 가만히 지켜보던 원로원은 세베루스의 승리가 확정되자 서둘러 움직였다.
“원로원은 개선식을 거행하시도록 권고하기로 했습니다.”
“내전 승리는 개선식의 조건이 아니오. 나는 아직 개선식을 거행할 자격이 없소.”
전장에서 돌아온 세베루스는 원로원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다. 그는 내전 승리가 아니라 외적을 격파한 뒤 떳떳하게 개선식을 열고 싶었다. 세베루스는 곧바로 파르티아로 쳐들어가 수도 크테시폰까지 진격했다. 이번에는 명실상부하게 개선식 조건을 갖춘 승리였다.
하지만 유피테르 신은 세베루스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그는 파르티아에서 돌아오자마자 통풍에 걸리고 말았다. 통풍에서 나았을 때에는 많은 시간이 지난 후였다. 뒤늦게 개선식을 연다고 해 봐야 사람들에게 핀잔만 받을 게 뻔했다. 그는 개선식을 포기하기로 했다.
‘나의 운명에 개선식의 영광은 없는 모양이구나.’
세베루스는 황궁에 가만히 앉아서 술을 마시며 한탄만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카르타고 등 고향인 아프리카에 영구적인 평화를 심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202년에 전 병력을 총동원해 아프리카로 건너갔다. 그곳에서는 사막을 누비고 다니는 베르베르족의 일파인 가라만테스 부족이 로마군을 괴롭히면서 평화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가라만테스 부족은 병력이나 전술 등 모든 면에서 로마군에 상대가 되지 않았다. 세베루스는 불과 1년만에 가라만테스 부족을 몰아냈을 뿐만 아니라 렙티스 마그나에서 남쪽으로 600㎞ 되는 지점에 있는 여러 도시까지 정복할 수 있었다. 늘 사막 부족의 공격에 고심하던 카르타고 등 아프리카 해안 도시들은 고민을 덜게 됐다.
세베루스의 측근이 개선문을 건설하라고 제안한 것은 아프리카 원정을 마치고 돌아왔을 무렵이었다. 이미 여러 해 전에 원로원은 황제에게 개선문을 지어 바치겠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개선문 건설 작업은 더디게 진행되고 있었다. 세베루스는 직접 개선문을 챙기기로 했다.
“기왕 개선문을 건설하는 김에 고향 렙티스 마그나에도 하나 더 세우도록 하겠소. 현지 총독에게 서둘러 개선문을 지으라고 지시하시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은 203년 연말에 완공됐다. 개선문에는 세베루스 황제는 물론 전쟁에 동행했던 두 아들 카라칼라와 게타의 이름도 새겨졌다. 이 개선문은 티투스 개선문보다 훨씬 컸다. 티투스 개선문에는 아치가 하나였지만, 세베루스 개선문에는 세 개였다. 아치 위에는 날개 달린 승리의 여신 니케가 새겨졌다. 꼭대기에는 사두마차에 탄 세베루스 황제와 두 아들의 조각상이 세워졌다.
세베루스가 죽은 뒤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두 아들은 공동 황제가 됐다. 하지만 212년 카라칼라는 사이좋게 지내면서 나라를 잘 다스리라는 아버지의 뜻을 저버리고 동생을 살해한 뒤 황제 자리를 독차지해 버렸다. 그는 또 개선문에 새겨진 동생의 흔적을 모두 지웠다. 개선문뿐만 아니라 로마에 있는 모든 건물이나 서류에 남아있던 기록도 다 삭제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은 늦게 건설해서 그런 것은 아니지만 포로 로마노에서 가장 보존이 잘 돼 있는 건축물이다. 개선문 꼭대기에 있었던 동상은 모두 부서져 사라지고 부조들의 색깔도 다 없어졌지만 전체적으로 세베루스 시대에 지은 원형을 그대로 갖고 있다.
3세기 혼란스러웠던 군인 황제 시대에 종지부를 찍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로마제국을 혼자서 다스리기는 힘들다고 판단했다. 그는 고민 끝에 로마를 동방과 서방으로 나눠 다스리기로 했다. 그는 동방의 황제 자리를 맡았고, 같은 고향 출신인 막시미아누스 장군에게는 서방의 황제 자리를 맡겼다. 황제 임기는 각각 20년으로 정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이어 부황제 제도를 만들어 콘스탄티우스와 갈레리우스를 임명했다. 이렇게 해서 로마를 4명이 분할 통치하는 사두정치(테트라르키아) 체제가 탄생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는 20년 뒤 임기를 마치고 물러났다. 약속대로 콘스탄티우스와 갈레리우스가 각각 서방과 동방의 황제로 승격했다. 세베루스와 막시미누스 다이아는 서방과 동방의 부제가 됐다.
그런데 아무도 예상하지 않았던 일이 발생했다. 콘스탄티우스가 브리타니아 원정에 나섰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그의 아들인 콘스탄티누스가 병사들의 추대를 받아 우여곡절 끝에 서방의 부제가 됐다. 세베루스는 서방 황제로 승격했다.
“콘스탄티우스의 아들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부제가 됐으면 전직 황제의 아들인 나도 최소한 부제 자리를 맡는 게 순리 아닌가?”
은퇴한 전직 황제 막시미아누스의 아들 막센티우스는 콘스탄티누스의 부제 등극에 불만을 품었다. 그는 원로원을 등에 업고 황제 자리에 올랐다. 토벌군을 이끌고 온 세베루스 황제는 살해해버렸다.
천하통일의 꿈을 꾸고 있던 콘스탄티누스는 312년 로마로 쳐들어갔다. 대권을 독차지하려면 먼저 막센티우스를 제거해 서방을 통일해야 했다. 그는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다. 막센티우스와 정면승부를 벌인다면 이길 수 있다고 자신했다.
하지만 콘스탄티누스는 로마로 행진하면서 깊은 고민에 빠졌다. 막센티우스가 성문을 걸어 잠그고 지구전을 펼칠 것이라는 정보가 들어 왔기 때문이었다. 콘스탄티누스의 병력은 4만 명 안팎이었다. 막센티우스가 동원할 수 있는 군사는 16만 명이었다. 무려 4배였다. 만약 막센티우스가 로마를 지키면서 병사를 곳곳에 풀어 장기전을 전개한다면 콘스탄티누스로서는 도무지 이길 수 없는 전쟁이었다.
‘우리는 보급로가 없어. 막센티우스는 성격이 좋아서 로마는 물론 이탈리아 사람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지. 아무도 우리에게 식량을 공급하려 하지 않을 거야. 그렇다고 강제로 빼앗으면 민심은 더 우리에게서 멀어질 테지. 고민이구나.’
312년 10월 27일이었다. 행군하면서도 깊은 고민에 빠져 있던 콘스탄티누스의 머리 위로 하늘에서 갑자기 환한 빛이 내리비쳤다. 그는 물론 모든 병사들은 눈이 부셔 빛을 제대로 쳐다볼 수도 없었다. 구름 사이로 내리비치는 빛은 십자가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 아래에는 그리스어로 이런 글자가 적혀 있었다.
‘이 표식으로 승리하리라.’
콘스탄티누스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빛, 그리고 십자가. 그는 무릎을 탁 쳤다. 그리고 백인대장들을 모두 불러 이런 지시를 내렸다.
“방금 하늘이 계시를 내리셨다. 우리는 전투에서 이길 것이다. 모든 병사들의 방패에 십자가 표식을 새기게 하라.”
콘스탄티누스의 지시에 따라 백인대장들은 병사들의 방패에 십자가를 새기게 했다. 다음날 콘스탄티누스의 막사에 로마의 정보원이 보낸 밀서가 당도했다.
‘막센티우스가 성문을 열고 나가기로 했습니다. 로마에서 농성전을 벌이려고 했지만 갑자기 마음을 바꿔 밀비우스 다리 앞 평원에서 대회전을 벌이기로 결정했습니다.’
성문을 굳게 잠그고 장기전을 벌이겠다던 막센티우스는 왜 갑자기 마음을 바꿨던 것일까? 로마 역사가 에우세비우스는 이렇게 기록했다.
‘막센티우스는 농성전을 해야 하는지 나가서 싸워야 하는지 시빌 예언서에 물었다. 예언서는 이렇게 대답했다. 10월 28일 로마의 적이 소멸하리라.’
막센티우스는 16만 대군을 이끌고 플라미니아 가도를 따라 행진해 밀비우스 다리를 건넜다. 사람 대여섯 명이 나란히 걸으면 꽉 차는 좁은 다리였다. 지금도 로마에는 밀비우스 다리가 남아 있다. 포폴로 광장에서 비아 플라미니아를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면 테베레 강 위에 서 있는 다리가 보인다.
십자가 문양을 그린 대장기를 내건 콘스탄티누스는 진용을 미리 짜고 기다리고 있었다. 막센티우스 군대는 제법 진영을 갖추기는 했지만 허점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콘스탄티누스는 기병을 먼저 출전시켰다. 기병대는 상대 진영을 휘젓고 다녔다. 그는 이어 중무장 보병을 둘로 나눠 상대 양쪽 날개로 돌아가 공격하게 했다. 기병에 이어 보병이 세 방향에서 공격해오자 막센티우스 병사들은 도저히 견딜 수 없게 됐다.
막센티우스 진영은 결국 무너져 버렸다. 병사들은 무기와 방패를 버리고 달아났다. 백인대장들도 병사들을 따라 도망쳤다. 당황한 막센티우스도 말에 올라 탈출을 시도했다. 병사들은 로마로 돌아가기 위해 밀비우스 다리로 몰려들었다. 그런데 다리 건너편에는 콘스탄티누스가 미리 몰래 숨겨뒀던 병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뒤편에서는 기병과 보병이 추격해 오고 있었다. 다리는 너무 좁아 건너가기가 쉽지 않았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막센티우스의 병사들은 밀고 당기다 다리 아래 절벽으로 떨어졌다. 추락하지 않은 병사들은 상대의 칼과 창에 찔려 목숨을 잃었다. 일부 병사들은 다리 아래로 내려가 헤엄쳐 강을 건너려다 급류에 휘말려 떠내려갔다. 밀비우스 다리와 그 아래 절벽은 순식간에 막센티우스 병사들의 시체로 가득 차 버렸다. 막센티우스는 겁을 먹은 말이 놀라 날뛰는 바람에 다리 아래로 추락해 저승의 객이 되고 말았다.
밀비우스 다리 전투는 결과적으로 로마가 기독교 국가로 바뀌는 전환점이 되고 말았다. 콘스탄티누스는 전투가 벌어진 이듬해에 기독교를 공인했다. 그가 하늘에 비친 십자가 덕분에 승리했다는 전설은 이런 점을 감안해 후대에 교회에서 만들어낸 것으로 추정된다.
콘스탄티누스는 이튿날 로마로 입성했다. 원로원과 로마 시민들은 거리로 몰려 나가 새 황제가 될 장군을 환영했다. 그 전날까지만 해도 막센티우스를 지지했던 사람들이었지만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원로원은 콘스탄티누스에게 개선식을 허용하기로 했다. 로마가 내전에서 동포의 가슴에 칼을 꽂은 승자에게 개선식을 허용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원로원은 개선문도 바치기로 했다. 개선문은 개선식 경로인 비아 트리암팔리스와 콜로세움, 그리고 베누스-로마 신전 사이에 만들었다.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의 높이는 20m, 폭은 25m, 두께는 7m 정도다. 아치 중앙 부분의 높이는 12m다. 개선문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 있다. 원로원이 그에게 얼마나 머리를 조아리고 아부했는지 잘 드러나는 글이다.
‘경건하고 행운이 넘치는 황제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신의 영감과 위대한 정신으로 그리고 정당한 수단으로
독재자와 그의 당파에게 정의로운 전투에서 공화국의 복수를 했다
로마 원로원과 시민은 군사적 승리를 기념하며 개선문을 지어 바친다.’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에는 많은 부조가 붙어 있다. 이중 상당수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등 오현제 시대 여러 황제가 지었던 개선문이나 다른 건축물에서 떼어내 콘스탄티누스의 업적에 맞춰 적당히 재배열해 붙인 것이다. 다른 기념물에서 뜯어온 부조 등을 콘스탄티누스가 개선하는 모습, 로마 시민에게 돈을 나눠주는 모습, 황제 앞에 끌려나온 적장의 모습 등으로 바꿔 놓았다. 미술사학자들은 이렇게 혹평했다.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의 조각과 다른 건축물에서 뜯어내 붙인 장식물은 로마 말기 예술 정신의 부족과 경제적 쇠락을 상징한다.”
원로원이 개선문을 이렇게 만든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무엇보다 개선문 건축 기간이 너무 짧아 각종 장식물을 제대로 만들 시간이 부족했다. 당시 로마의 경제적 사정이 개선문을 서둘러 지을 수 있을 정도로 좋지 않았다는 것도 다른 이유다. 마지막 세 번째 이유는 매우 정치적이었다.
“콘스탄티누스의 업적은 로마의 전성기를 구가한 오현제 모두의 업적을 모아놓은 것보다 위대하다. 그들의 개선문에 붙은 부조를 떼어내 새 개선문에 종합적으로 붙이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서둘러 만든 건축물이지만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의 외관만큼은 상당히 웅장하다. 그래서 이후 다른 여러 나라의 개선문과 건축물에 큰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 앞에 있는 카루젤 개선문이 대표적이다. 영국 런던 하이드 파크의 스피커스 코너 인근에 있는 마블 아치도 마찬가지다. 독일 뮌헨의 지게스토르(승리의 문)도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을 모델로 삼아 만들었다. 미국 워싱턴의 유니언 스테이션 건물도 기본적으로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의 모습을 많이 담고 있다. 뉴욕의 자연사 박물관도 비슷하다. 영국 케들스톤에 있는 케들스톤 홀도 개선문을 모델로 해서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