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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Oct 21. 2020

성 베드로 대성당

성인의 무덤 위에 지은 성소




  르네상스는 기독교와 손을 잡고 인류사에서 영원히 빛나는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바티칸 한가운데 자리 잡은 성 베드로 대성당이 바로 그것이다. 미켈란젤로, 베르니니, 브라만테, 마데르노 같은 거장들이 설계하고 건축하고 조각한 최고의 건축물이다. 


  해마다 전 세계에서 수백만 명이 순례를 위해 또는 관광을 위해 성 베드로 대성당을 찾는다. 대성당이 품고 있는 르네상스의 향기를 맡아보려는 사람도 많지만, 대다수 관람객은 세상에서 가장 신성한 기독교의 성지를 둘러보는 감격을 누리려고 이곳을 찾는다. 성 베드로 대성당에는 기독교를 세계적 종교로 만든 성 베드로가 묻혀 있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성 베드로의 무덤 위에 성 베드로 대성당이 만들어졌다. 


 그런데 대부분 관람객은 별 신경을 쓰지 않고 스쳐 지나가 버리지만, 성 베드로 대성당에 갈 때마다 눈여겨 보는 특이한 건축물이 있다. 성 베드로 성당 앞에 우뚝 서 있는 높이 25m의 오벨리스크다.


 사실 오벨리스크와 성 베드로 대성당은 개념적으로는 어울리지 않는다.  오벨리스크는 고대 이집트의 종교적 상징물이었다. 이집트의 신전 입구에는 대개 오벨리스크 한 쌍, 즉 두 개를 세워놓는 게 일상적이었다. 그런데 왜 기독교는 성 베드로 대성당 앞 광장 한가운데에 이교도의 상징인 오벨리스크를 가져다 놓은 것일까? 

 



 기독교의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오벨리스크는 성 베드로의 순교 장면을 지켜본 유일한 목격자입니다.”


  오벨리스크는 성 베드로가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피를 흘리며 죽어가던 광경을 지켜보았다. 피가 거꾸로 쏟아지는 고통에 시달리던 성 베드로의 눈에 마지막으로 들어온 것은 오벨리스크였는지도 모른다. 오벨리스크의 뾰족한 끝이 가리키던 곳이 천국이라고 믿었을지도 모른다. 당시 인근에서 가장 위치가 높았던 오벨리스크는 성 베드로가 인근에 몰래 묻히는 모습도 목격했을 것이다.


 오벨리스크는 성 베드로 순교의 유일한 목격자라는 이유 때문에 이교도의 상징이면서도 살아남았다. 처음에는 옛 성 베드로 대성당 바깥에 서 있었다. 그러다 새 성 베드로 대성당 공사가 한창 진행되던 1568년 자리를 100m 쯤 옮겨 성 베드로 광장 한복판에 세워졌다. 

 

 중세 시대까지만 해도 오벨리스크는 많은 기독교인의 숭배를 받았다. 15세기 스페인 코르도바 출신의 여행가 페로 타푸르가 1436~39년 7년 동안 오대양 육대주를 두루 여행하고 쓴 『여행과 모험』이라는 책에 이런 내용이 나와 있다.


 ‘성 베드로 성당 인근에는 석재로 만든 높은 탑이 하나 서 있다. 마치 구리로 만든 세 다리로 버티고 선 삼각형 다이아몬드 모양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 탑을 아주 성스럽게 여긴다. 그래서 탑을 지날 때에는 마치 땅바닥에 붙어 기어가듯이 조심스럽게 걸어간다. ’


 오벨리스크는 과연 무엇을 보았을까? 그가 목격했다는 성 베드로의 최후는 어떠한 것이었을까? 그리고 성 베드로 대성당을 지을 때 무슨 일이 있었을까? 성 베드로 순교 이후 2천 년 동안 벌어진 일들을 알아보려면 그에게 물어보는 수밖에 없다. 




칼리굴라-네로 전차경주장



성 베드로 순교와 오벨리스크 건립 역사는 뜻밖에도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에 이어 제정 로마의 3대 황제였던 칼리굴라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칼리굴라는 고대 로마 초대황제였던 아우구스투스의 외증손자였다. 아버지는 게르마니아 전쟁에서 맹활약해 로마인의 사랑을 받았던 게르마니쿠스였다. 어머니는 아우구스투스의 외손녀인 아그리피나였다. 황제의 피를 물려받은 칼리굴라는 어릴 때부터 아우구스투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그런데 승승장구하면서 차기 황제감이라는 소리를 듣던 게르마니쿠스는 병에 걸려 30대 초반에 일찌감치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모든 로마인이 훌륭한 장군이었고 성격이 쾌활하고 좋았던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 어느 누구보다 큰 충격을 받은 아그리피나는 티베리우스를 의심했다.


“황제가 자리를 빼앗길까봐 남편을 시기해 독살한 거야.”

티베리우스는 아그리피나 때문에 정치적으로 큰 부담을 느꼈다. 결국 그는 참다못해 벤토테네 섬에 아그리피나를 유배시켜 버렸다. 아그리피나는 끝내 로마로 돌아가지 못하고 병들어 죽고 말았다. 그녀의 큰아들 네로 카이사르는 반역 혐의를 뒤집어쓰고 죽었다. 둘째 아들 드루수스 카이사르도 마찬가지였다. 


 “칼리굴라도 곧 티베리우스 손에 목숨을 잃을 거야.”


 부모형제를 모두 잃은 칼리굴라는 로마에서 고립무원의 처지가 됐다. 다들 칼리굴라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뜻밖의 일이 발생했다. 


 티베리우스가 칼리굴라를 카프리 섬의 별장에 데리고 간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곳에서 몰래 죽여 묻어버리려는 것인가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황제라도 게르마니쿠스의 가족을 몰살하는 모습을 로마인에게 보여주는 게 부담스웠을 거라고 분석했다. 이 때문에 칼리굴라는 늘 죽음의 공포를 품에 안고 살아야 했다. 섬에는 그를 딱하게 여기는 사람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티베리우스는 칼리굴라를 죽이지 않았다. 카프리 섬에서 6년 동안이나 데리고 살았다. 그보다 더 놀라운 일이 이어졌다. 서기 37년 티베리우스가 카프리 섬에서 눈을 감았는데 뜻밖의 유언을 남긴 것이다.


“칼리굴라를 후계자로 지명하겠소.”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일부 사람들은 티베리우스가 암살당했다고 생각했다. 역사가 타키투스는 『 연대기 』에서, 수에토니우스는  『 열두 명의 카이사르 』에서 ‘티베리우스는 암살당했다’고 기록했다. 타키투스는 암살 용의자자로 그의 경호대장인 마르코를, 수에토니우스는 칼리굴라를 지목했다. 


 세상 경험이 부족했던 칼리굴라에게는 제국을 통치할 능력이 없었다. 다만 로마인이 무엇을 싫어하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로마인이 좋아하는 오락을 마음껏 제공해 인기 있는 황제가 되기로 했다.  칼리굴라는 원로원에서 황제로 인정받은 뒤 3월 28일부터 10월 말까지 7개월 동안 거의 매일 검투사 시합, 전차경주, 체육대회를 열었다. 


 칼리굴라는 특히 전차경주를 매우 좋아했다. 키르쿠스 막시무스에서 펼쳐지는 전차경주의 엄청난 속도전은 티베리우스의 눈치를 보느라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하고 살았던 그에게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짜릿한 쾌감을 주었다. 칼리굴라에게는 좋아하는 전차경주 팀이 있었다. 경기가 끝나면 마구간에서 열리는 그 팀의 파티에도 참석해 기수들과 술잔을 나눌 정도였다.


 칼리굴라는 전차를 직접 몰아보고 싶었지만 경주에 출전할 기량은 갖고 있지 못했다. 고민하던 그는 혼자서 마음껏 전차를 몰 수 있는 개인용 경기장을 짓기로 했다. 


 ‘혼자 달리면 1등도 없고 꼴찌도 없잖아. 내 실력만큼만 달리면 되니 힘들 게 없겠지.’


 전차경주장 건설 장소는 테베레 강 건너편 서쪽에 있었던 바티카누스였다. 땅 주인은 티베리우스 때문에 목숨을 잃은 그의 어머니 아그리피나였다. 이곳에 그녀의 별장이 있었다. 칼리굴라가 지은 전차경주장의 길이는 161m였다. 일부에서는 무려 500m에 이르렀다고 전한다. 


 칼리굴라가 전차경주장을 건설한 장소는 당시에는 로마 시내에서 멀리 벗어난 외곽이었다. 왕정이나 공화정 초기 외적이 로마로 쳐들어오는 걸 감시하던 야니쿨룸 언덕 인근이었다. 로마로 몰려온 적군이 강을 건너 공격하기 앞서 진지를 설치하던 장소이기도 했다.


 칼리굴라가 로마 시내가 아니라 외곽에 경주장을 지은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먼저 로마 시내에는 전차경주장을 새로 지을 땅이 없었다. 또 인기를 유지하느라 시민들의 눈치를 많이 봤던 그로서는 시내에 사설 경주장을 만들 배짱이 모자랐을 것이다. 


 바티카누스에는 원래 에트루리아 사람들이 살았다. 바티카누스라는 이름은 라틴어 바테스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보는 사람, 예언자’를 뜻하는 바테스는 에트루리아인들이 모셨던 바티카누스(또는 바기타누스) 신을 모시던 사제를 일컫는 말이었다. 


 바티카누스는 출산의 신이었다. 좀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갓 태어난 아이가 처음 말을 하는 순간, 즉 울음을 터뜨리는 순간을 만들어내는 신이었다. 라틴어로 ‘운다’는 단어가 바티카누스와 비슷한 ‘바기투스’였다. 과거에는 의료 기술이 떨어져 갓 태어난 아이들이 울음도 터뜨리지 못하고 죽는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 그래서 갓난아기가 울음을 터뜨릴 수 있게 해주는 신까지도 만들었다. 그곳에는 바티카누스의 신전까지 만들어져 있었다. 


‘나도 외증조부인 아우구스투스처럼 전차경주장을 멋지게 꾸며야지.’


 칼리굴라는 전차경주장에 오벨리스크를 하나 세우기로 했다. 아우구스투스가 이집트에서 오벨리스크를 가져와 키르쿠스 막시무스 즉 대전차경기장의 스피나 한쪽에 세운 것을 모방하기로 한 것이다.


 칼리굴라가 가져오기로 결심한 오벨리스크는 기원전 30~28년 아우구스투스의 명령에 따라 이집트 총독 코르넬리우스 갈루스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율리우 포룸에 옮겨둔 것이었다. 


 문제는 오벨리스크가 너무 크다는 것이었다. 배에 실어 바다를 건너 오기가 쉽지 않았다. 여러 조각으로 잘라서 여러 배에 나눠 싣고 오는 게 최상책이었다. 하지만 칼리굴라의 생각은 달랐다.


“세상에서 가장 큰 배를 만들어라. 위대한 제국 로마는 그런 일을 할 수 있다.”


 칼리굴라는 오벨리스크를 절단하지 않고 통째로 운반할 수 있는 초대형 선박을 만들기로 했다. 로마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큰 선박이었다. 무게만 해도 800t에 이르렀다. 중앙 돛대는 엄청 굵어서 선원 네 명이 팔을 벌려야 겨우 잡을 수 있을 정도였다. 배 길이는 오늘날 항공모함과 비슷한 105m, 너비는 20m였다. 배는 6층이었다. 선원은 700~800명 정도였다. 




십자가에 못 박힌 베드로



 “모든 로마 시민이 전차경주장을 다 이용할 수 있도록 하겠소. 그것이 황제의 깊고 넓은 은혜요.”


 칼리굴라와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뒤를 이은 제5대 네로 황제는 칼리굴라가 지은 전차경기장을 고쳐 시민들에게 오락장으로 개방했다. 사람들은 이 경기장을 칼리굴라-네로 경기장이라고 불렀다. 또는 가이우스-네로 경기장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칼리굴라의 이름이 가이우스였기 때문이었다. 


 “시민들을 즐겁게 하는 것이 지도자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요. 한 명도 빠지지 말고 참석하시오.”


 네로는 전차경주장에서 이색 체육대회를 열었다. 바로 육상대회였다. 대회 참가자는 지도 계층인 원로원 의원들과 기사계급이었다. 평민은 관중석에서 경기를 구경했다. 나이가 들어 운동을 하지 않아 살이 찐 의원들이 달리기를 하는 모습은 아름다워 보이지는 않았지만, 평민이 깔깔 웃으면서 재미있게 보기에는 충분했다. 


 네로 황제는 큰 궁지에 몰렸다. 46년에 발생한 로마 대화재 때문에 민심이 흉흉해졌기 때문이었다. 그가 음악을 작곡하는 데 필요한 영감을 얻기 위해, 또는 ‘도무스 아우레아(황금 궁전)’라는 저택을 지을 부지를 구하기 위해 일부러 불을 질렀다는 소문이 로마 시민들 사이에 퍼진 게 이유였다.


 “유피테르 신을 믿지 않는 자들의 소행이다. 그들을 모두 색출해 엄단하라.”


 네로는 탈출구를 기독교에서 찾았다. 그는 기독교인들이 로마의 멸망을 꿈꾸면서 일부러 불을 질렀다고 몰아세운 뒤 수백 명을 붙잡아 처형했다. 많은 사람은 기독교도 처형 장소를 콜로세움이라고 오해하지만, 실제로는 ‘네로 전차경기장’으로 불렸던 곳이 바로 순교의 현장이었다.


 당시 로마 대화재 때문에 대전차경기장(치르쿠스 막시무스) 등 큰 시설이 대부분 소실되는 바람에 처형에 이용할 만한 장소를 찾기 어려웠다. 그래서 네로는 로마 외곽 먼 곳에 있는 칼리굴라-네로 전차경기장을 기독교도 탄압 장소로 고를 수밖에 없었다.


1~2세기 로마 원로원 의원이었고 역사학자였던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타키투스는 『연대기』에 이렇게 기록했다.


 ‘사람들의 도움도, 황제의 자비도, 신을 달래려는 모든 노력도 불이 누군가의 지시로 일어났다는 소문을 잠재우지 못했다. 네로는 소문을 없애기 위해 가장 끔찍한 처벌을 내릴 희생양을 선택하기로 했다. 당시 로마인에게서 혐오를 받고 있던 기독교인이었다.


 처음에 일부가 붙잡혀 죄를 자백했다. 그어 더 많은 사람이 붙잡혔다. 그들의 혐의는 방화가 아니었다. 다른 로마인을 향한 반감이 그들의 죄목이었다. 그들은 짐승 가죽을 뒤집어쓰고 끌려 나가 개들에게 물어 뜯겨 산산조각 났다. 십자가에 못 박히기도 했고, 해가 져 어두워지면 밤을 밝히려고 산 채 화형 당했다. 


 기독교인이 본보기 처벌을 받았다는 연민이 로마인 사이에 퍼지기 시작했다. 기독교인은 로마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 개인의 광기를 위해 처형당했다는 것이었다.’


 성 베드로가 십자가에 못 박혔던 시기도 바로 이 때였다. 그의 죽음을 다룬 최초의 기록은 96년 로마 주교였던 클레멘스가 그리스 코린트의 한 교회에 보낸 편지였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베드로는 부당한 시기질투 때문에 한두 가지가 아니라 수많은 고역을 겪어야 했다. 결국 나중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그에게 주어진 영광의 장소를 향해 떠났다.’


  2~3세기 아프리카 카르타고 출신의 기독교 작가인 퀸투스 셉티미우스 플로렌스 테르툴리아누스는 『전갈 우화』란 책에 이렇게 기록했다.


 ‘성 베드로의 순교는 네로가 기독교도들을 처형할 때 일어났다. 기독교도 처형은 네로 대전차경기장 근처에 있는 황제의 정원에서 벌어졌다.’


 성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한 것으로 알려졌다. 4세기 초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그리스의 기독교 역사가 에우세비우스 팜필이 남긴 기록 때문이었다.


 ‘성 베드로가 로마에 왔다.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렸다.’ 


 팜필은 그보다 이전 시대에 살았던 신학자 오리겐으로부터 이런 정보를 알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후부터 성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한 것으로 알려지게 됐다. 물론 다른 기록으로는 전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베드로 유해의 방랑



 성 베드로가 순교한 뒤 시신을 수습하는 데에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어떤 이유에서든 누구든 죽으면 무덤을 갖게 하는 게 고대 로마의 풍습이었다. 그래서 순교한 기독교인의 유족들은 순교자가 세상을 버린 현장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시신을 묻을 수 있었다. 순교자들이 묻힌 곳은 대부분 기독교인이 소유한 땅이었으며, 도시 밖으로 이어지는 유명한 도로 주변이었다. 


 성 베드로는 바티칸 인근이던 비아 코르넬리아에, 성 바오로는 비아 오스티아나에 묻혔다. 당시 비아 코르넬리아에는 공동묘지가 있었다. 기독교인는 물론 이교도도 묻히던 곳이었다. 성 베드로의 무덤은 지하 납골소에 만들어졌다. 계단을 통해 걸어 내려가야 하는 곳이었다. 시신은 석관에 넣어 납골소 가운데에 모셨다. 라틴어로 성서를 번역한 성 제롬은 392년에 저술한 저서 『현인열전』에서 이렇게 적었다.


 ‘성 베드로는 로마 영광의 길 근처 바티칸에 묻혔다. 그곳에서 모든 사람으로부터 추앙받고 있다.’


 초대 교황 성 베드로에서 시작해 역대 교황의 일대기를 담은 『교황들의 책』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교황 아나클레토가 성 베드로 순교 직후 지하 무덤 위에 기념물을 지었다. 서너 명이 무릎을 꿇고 앉아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작은 예배당이었다.’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의 무덤에는 순례자들이 모여들었다. 기독교 박해가 이어지는 시기에도 마찬가지였다. 순례자들은 성인의 무덤에서 예배를 드리다 로마 병사들에게 붙잡혀가기도 했다. ‘배교자’라는 별명을 얻었던 율리아누스 황제는 363년에 발표한 저서 『갈릴리 사람들에 대한 세 가지 책』에 이렇게 기록했다.


 ‘성 베드로의 무덤은 예배의 장소가 됐다. 물론 비밀리였지만.’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의 유해는 200년가량 지하 납골소에 안전하게 모셔져 있었다. 망자가 묻힌 곳은 절대 훼손하지 않는 게 고대 로마 풍습이었던 덕분이다. 


 하지만 258년 군인황제 시대에 상황은 돌변했다. 군인 출신으로 야만족을 물리치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발레리아누스 황제는 무덤을 보호하는 풍습의 특권에서 기독교인을 제외한다는 조치를 발표했다.


 “황제를 무시하고 로마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기독교인은 로마에 묻힐 자격이 없다. 불손한 기독교인의 무덤까지 보호할 이유는 없다.”

 

 이교도가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의 유해를 훼손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한 기독교인은 비밀리에 두 성인의 유해를 빼내 성 세바스티아노의 카타콤베 깊숙한 곳에 숨겼다. 두 성인의 유해를 옮겼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대부분 기독교인은 두 성인의 유해가 원래 무덤에 그대로 있다고 믿었다.


 세월이 흘러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세상을 떠나고 기독교 탄압이 시들해졌을 때에야 성 베드로의 유해는 바티칸으로, 성 바오로의 유해는 비아 오스티아나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옛 성 베드로 대성당



 “폐하,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의 성전을 짓도록 하겠습니다.”


 313년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기독교로부터 성 베드로를 기리기 위해 대성당을 짓게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렇게 하도록 하시오. 짐도 성전 공사비를 보태도록 하겠소. 성전은 어디에 지을 생각이시오?”


 “성 베드로의 성전은 바티카누스의 칼리굴라-네로 전차경주장 일대에 짓도록 하겠습니다. 성 베드로께서 순교하신 바로 그 장소에 성전을 지어야 한다는 게 기독교 전체의 뜻입니다.”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의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이렇게 해서 성 베드로 성전은 바티칸의 칼리굴라-네로 전차경주장은 물론 주변의 언덕 지역을 허문 뒤 건설하기로 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사재를 털어 성전 건설비에 보탰다. 또 성전 공사현장에 직접 나가 땀을 흘리며 일하기도 했다. 그는 무거운 벽돌을 지고 하루종일 바티카누스 언덕을 오르내렸다. 


“폐하, 이제 그만 쉬셔도 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무리하시다간 건강에 탈이 나겠습니다.”


 “헛헛, 이 사람아! 이래봬도 평생을 전쟁터에서 몸을 단련한 군인인데, 벽돌 몇 장 나른다고 탈이 난다면 사람들이 웃지 않겠나?”


 콘스탄티누스가 공사 기간 내내 벽돌을 나른 것은 아니었다. 그가 땀을 흘린 시간은 불과 하루이틀이었다. 그래도 황제가 공사장에서 땀을 흘렸다는 사실은 로마에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로마 왕정과 공화정 시대, 그리고 제정 초기에는 왕, 집정관, 황제나 원로원 의원 등 저명인사들은 중요한 공사장에서 일손을 보태는 것을 노블레스 오블리주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제정 말기 들어 로마가 흔들릴 무렵에는 이런 공공의식은 바람 속의 먼지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 공사를 시작하고 몇 달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공사를 맡은 건축기사 등이 콘스탄티누스 황제를 찾아갔다. 그들은 아주 난처한 표정으로 황제에게 하소연했다.


 “폐하, 저희들은 지상에 살고 있는 탓에 천상에서 내려다보고 계시는 하나님과 성 베드로 성하의 뜻을 따라갈 수 없는 일이 가끔 생기는 법입니다. 지금 그런 어려운 일이 발생했습니다. 절대 저희들이 게으르거나 실력이 모자라서 그런 것은 아니니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처음에 베드로가 순교한 자리에는 ‘바위’라는 뜻인 베드로의 이름에서 착안해 붉은 바위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곳이 베드로의 무덤이라는 걸 표시한 것이었다. 3대 교황이었던 성 아나클레토(재임 79~92년)는 바위가 놓여 있던 곳의 납골소 둥근 천장 바로 위에 3~4명이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작은 예배당을 지었다. 예배당은 이후 로마 기독교인의 마음속에 아주 소중한 성소로 자리 잡았다.  


 건축기사 등이 호소한 어려움은 바로 이 예배당이었다. 새로 대성당을 만들려면 예배당을 뜯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예배당은 ‘성 베드로의 무덤 위에 만들어진 최초의 성소’라는 상징적 의미가 컸기 때문에 기독교는 예배당 철거에 반대했다. 


 건축기사 등은 예배당에 전혀 손을 댈 수 없었다. 이런 상태라면 공사를 포기하거나, 아니면 대성당의 구조를 희한하게 바꿀 수밖에 없었다. 건축기사 등이 호소한 하늘의 뜻이라는 말은 바로 이런 상황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 지도자들을 불렀다.


 “성 베드로 대성당을 짓는 건축기사 등이 어려움에 직면했다고 호소하는군요. 예배당을 없애지 않는 한 대성당 공사가 매우 어려울 거라고 하네요.”


 “어떤 일이 있어도 예배당을 뜯어내서는 안 됩니다. 오랜 박해 속에서도 지켜온 예배당입니다. 공사의 어려움을 이유로 없앤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차라리 대성당을 안 짓는 게 낫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할 수 없이 예배당을 그대로 둔 채 대성당을 지으라고 지시했다. 그 결과 대성당은 건축기사들의 우려대로 아주 희한하면서 독특한 모양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여러 차례 대성당을 증축, 개축할 때도 이 모양은 유지됐다. 


 예배당을 그대로 둔 채 대성당을 짓는 바람에 생각하지도 못한 부작용이 생겼다. 성 베드로의 시신이 안치돼 있는 원래의 지하 납골소로 가는 게 매우 어려워진 것이었다. 게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지하 납골소로 가는 길을 아는 사람은 모두 세상을 떠나 버렸다. 결국 아무도 그곳에 갈 수 없게 됐다. 1900년 교황 레오 13세(재임 1878~1903년)가 추기경들의 뜻을 모아 납골소를 찾아 문을 열어보려고 시도했지만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교황들의 책』에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성 베드로의 원래 무덤에 덧붙인 관의 장식이 묘사돼 있다.


 ‘석관은 구리로 덮여 있다. 각 면의 길이는 152㎝다. 석관 위에는 무게 68㎏인 황금 십자가가 놓여 있다. 십자가에는 ‘콘스탄티누스 아우구스투스와 헬레나 아우구스타, 황제의 영광으로 빛나는 집’이라는 뜻의 라틴어가 적혀 있다.’


 성 베드로 대성당 공사는 318~322년 사이에 시작됐다. 완공까지는 40여 년이 걸린 것으로 알려졌다. 총 길이가 110m 정도였던 대성당은 한 번에 3천~4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다.


 이후 두 세기가 지나는 동안 성 베드로 대성당은 기독교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성지로 성장했다. 9세기 무렵부터는 교황 대관식이 이곳에서 거행됐다. 역대 교황들은 나중에 새 대성당이 지어진 뒤에도 대관식을 계속 진행했다. 1963년 바오로 6세(재임 1963~78년)가 폐지한 이후에야 교황 대관식은 비로소 없어졌다. 


 성 베드로 대성당이 완공된 뒤 대성 당 안에 교황들의 무덤이 연이어 만들어졌다. 초대교황 베드로의 곁에 묻히고 싶다는 교황들의 뜨거운 열망 때문이었다. 가장 먼저 대성당에 무덤을 만든 교황은 레오 1세(재임 440~461년)였다. 이후 수 세기 동안 교황들은 안마당, 예배당은 물론 중랑까지 뜯어내 무덤을 마련했다. 이 무덤들은 새 성 베드로 대성당을 만들 때 대부분 부서져 없어지고 말았다. 


 성 베드로 대성당은 846년 사라센족의 로마 침입 때 큰 피해를 입었다. 당시 성 베드로 대성당을 포함해 일부 성당은 야만족의 침입이 거셌던 3세기 말 군인황제였던 아우렐리아누스가 로마 주변에 세운 아우렐리아누스 성벽 바깥에 있었다. 그래서 외적이 쳐들어올 경우 약탈을 피할 수있는 방법이 없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에는 값비싼 예배용품과 순교자, 성인 등의 유해를 담은 성 유물함 등이 넘쳐났다. 이런 사실을 미리 알고 있던 사라센족은 성 베드로 대성당을 즐거운 마음으로 약탈했다. 당시 교황이었던 레오 4세(재임 847~855년)는 파괴된 성 베드로 대성당을 복구하는 동시에 여러 성당을 보호의 테두리 안에 넣을 수 있도록 이른바 ‘레오의 성벽’을 건설했다. 




사라진 베드로의 무덤



 성 베드로 대성당은 14세기 무렵 황폐해졌다. 교황이 아비뇽 유수 때문에 로마를 떠나 프랑스에 감금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을 대대적으로 수리하거나 새로 지어야 했지만 이 일을 추진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스페인 여행가 페로 타푸르가 로마와 바티칸을 방문한 것은 이 무렵이었다. 그는 『여행과 모험』에 직접 본 로마와 바티칸 풍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성 베드로 대 성당은 엄청나게 크다. 지붕은 화려하게 장식돼 있다. 하지만 관리 상태는 매우 부실하다. 더럽기도 하다. 많은 곳이 부식됐다. 로마는 크기에 비해 인구가 무척 적다. 거의 내버려진 도시처럼 사람들이 살지 않는다. 큰 건물 잔해는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고, 공기는 정말 나빠 사람의 건강에 큰 해를 줄 정도다.’ 


 황폐해졌든 부서졌든 성 베드로 대성당은 그 자체만으로 성소였다. 여기에 손을 댄다는 것은 신성성을 파괴하는 행동이라고 기독교인은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에는 늘 고정관념에 어긋나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었다. 1447~55년 교황이었던 니콜라오 5세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그는 성 베드로 대성당을 대대적으로 수리하기로 했다. 그래서 이런 지시를 내렸다.


 “수리 작업에 사용할 자재를 구해야겠소. 콜로세움을 해체하시오.”


 이에 따라 콜로세움에서 수레 2천522대 분량의 석재가 뜯겨져 대성당 공사장 앞으로 옮겨졌다. 지금 콜로세움 내부가 엉망이 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니콜라오 5세의 지시였다. 하지만 여러 가지 정치적 이유 때문에 그가 죽을 때까지 대성당 수리 작업은 하나도 이뤄지지 않았다. 


 50여 년 뒤 교황 율리오 2세(재임 1503~13년)는 니콜라오 5세보다 더 획기적인 제안을 내놓았다. 그는 취임 2년 만인 1505년 옛 성 베드로 대성당을 허물고 새 건물을 지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많은 성직자와 신도들이 반대했지만 그의 뜻을 막을 수는 없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을 이대로 둬서는 안 됩니다. 초대 교황인 성 베드로 대성하의 유해를 모신 성당이 이렇게 엉망이라는 건 신성모독입니다. 대성당을 완전히 허물고 새로 짓도록 하겠습니다.”


 율리오 2세는 새 대성당을 짓기 위한 설계 공모전을 열었다. 여러 가지 설계안이 참가했다. 그 중 상당수는 현재 이탈리아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에 보관돼 있다. 이 중에서 이탈리아 출신 르네상스 건축가 도나토 브라만테의 작품이 당선작으로 선정됐다. 공사는 1506년 시작됐다. 


 이후 여러 교황이 대를 이어 조금씩 성 베드로 대성당 공사를 진행했다. 공사를 이어나간 교황은 율리오 2세에 이어 레오 10세, 하드리아노 6세, 클레멘스 7세, 바오로 3세, 율리오 3세, 마르첼로 2세, 바오로 4세, 비오 4세와 5세, 그레고리오 13세, 식스토 5세, 우르바노 7세, 그레고리오 14세, 인노첸시오 9세, 클레멘스 8세, 레오 11세, 바오로 5세, 그레고리오 15세, 우르바노 8세, 인노첸시오 10세 등이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 공사비가 모자라 면죄부를 발행하는 바람에 반발을 사 종교개혁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래도 공사는 계속 진행됐다. 마침내 성 베드로 대성당은 착공 120년 만인 1626년 완공됐다. 봉헌식은 그해 11월 18일 거행됐다. 


 그런데 새 성 베드로 대성당이 완공된 이후에는 성 베드로의 무덤을 찾는 일이 더 어려워졌다. 역대 교황은 무덤을 확인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쏟아 부었지만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940~49년 당시 교황이었던 비오 11세도 무덤을 찾는 프로젝트에 뛰어들었다. 그는 과거의 다른 교황들처럼 성 베드로가 묻힌 곳에서 최대한 가까운 곳에 영면하고 싶어 했다. 


 비오 11세는 성 베드로 무덤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고고학자들을 후원해 성 베드로 대성당 지하를 발굴하게 했다. 그 결과 5~12m 깊이에 있던 제정 로마 시대의 공동묘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두 차례 발굴  조사에서  많은 뼈가 발견됐다. 하지만 발굴조사단은 성 베드로의 무덤이 어느 것인지, 뼈 가운데 어느 것이 성 베드로의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교황은 결국 1950년 12월 이렇게 발표했다.


 “어느 게 베드로의 뼈인지 확신을 가질 수 없습니다.”


 교황은 안전을 이유로 뼈를 비밀 장소에 보관했다. 아무나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곳이었다. 그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뼈가 발견됐다는 사실마저 잊어버렸다. 


 1968년 마르게리타 과르두치라는 여성 인류학자가 뼈를 우연히 발견하고 연구를 다시 진행했다. 그 결과 비오 11세 때 발견한 뼈는 남성의 것이라는 게 확인됐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1세기 무렵에 살았던 61세 전후의 남성이라는 것이었다. 과르두치는 교황 바오로 6세에게 이런 사실을 보고했다. 교황은 바로 조사 내용을 만천하에 공표했다.


 “성 베드로의 유해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성 베드로의 유해로 추정되는 뼈는 다시 비밀 공간에 갇혀 버렸다. 일부 성직자 외에는 아무도 그걸 볼 수 없었다. 그러다  2013년 11월 24일 교황 프란체스코가 성 베드로 광장에서 열린 미사에서 사상 처음 성 베드로의 것으로 추정되는 뼈 6개를 대중에게 공개했다. 바티칸에는 스카비라는 지하 공동묘지가 있다. 이곳에 성 베드로의 무덤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그런데 그 사이 이런 일이 벌어져 세상을 놀라게 했다. 1953년 예루살렘에서 뜻밖의 유해가 나왔다. 프란체스코 수도사들이 예루살렘 인근 감람산의 동굴에서 1세기 것으로 보이는 납골 항아리 수백 개를 발견한 것이었다. 고고학자들은 이렇게 주장했다.


“예루살렘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물질적 증거입니다.” 


 항아리에는 성경에 자주 나오는 이름들이 포함돼 있었다. 그 중 한 항아리에는 ‘Shimon Bar Yonah’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요나의 아들 시몬’이라는 뜻이었다. 성 베드로의 원래 이름이었다. 


 고고학자들이 이같은 발굴 결과를 발표하자 가톨릭, 개신교 등 모든 교회 학자들이 반박하고 나섰다. 


“항아리에 세파, 또는 베드로라는 글자가 없으므로 베드로의 유해가 아닙니다.”


 그런데 만약 이 항아리 유해의 주인이 정말  베드로라면? 성 베드로 대성당을 포함해 기독교 역사는 완전히 새로 써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성 베드로 대성당


 

 성 베드로 대성당에는 출입문이 다섯 개 있다. 문마다 이름이 다 다르다. 입구를 마주보고 섰을 때 맨 왼쪽은 ‘죽음의 문’이다. 대성당에서 장례식이 열리면 장례행렬이 이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 다음은 ‘선악의 문’이다. 1970~77년 교황 바오로 6세의 80회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만든 문이다. 문의 오른쪽 부조는 선을, 왼쪽 부조는 악을 상징한다.


 세 번째이면서 가운데 문은 ‘필라레테 문’이다. 다섯 개의 문 가운데 가장 오래됐다. 문을 만든 안토니오 아베룰리노의 별명이 필라레테여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네 번째는 1965년에 만든 ‘성례의 문’이다. 성당으로 들어갈 때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문이다. 문의 오른쪽 부조를 보면 천사가 세례, 견진성사, 보속(고해 신부가 정해주는 속죄 행위)을 거행하고 있다. 왼쪽 부조에서는 성체성사, 결혼, 신품성사, 병자성사를 거행하고 있다.


 맨 오른쪽은 ‘성스러운 문’ 즉 성문(聖門)이다. 또는 ‘대사면의 문’이라고 부른다. 이 문은 25년마다 돌아오는  ‘성스러운 해’ 즉 성년(聖年)에만 열린다. 성년을 영어로 ‘Holy Year’ 또는 ‘Jubilee’라고 한다. 성문과 성년을 설명하려면 로마의 4대 메이저 대성당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한다. 라틴어로는 바실리카 마이오르, 영어로는 메이저 바실리카다.


 바실리카 마이오르는 4곳이다. 성 베드로 대성당, 라테라노 대성당, 성 밖의 성 바오로 대성당,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이다. 성당 네 곳 모두 교황청의 주권 구역인 바티칸 소속이다. 네 개 중에서 성 베드로 대성당만 바티칸 영토 안에 자리 잡고 있다. 나머지 셋은 이탈리아 영토에 있다. 하지만 라테라노 조약에 따라 모두 외국대사관처럼 치외법권 적용을 받는다. 


 “성년에 완벽하게 죄를 고해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로마를 방문해서 성 베드로 대성당과 성 바오로 대성당을 순례해야 죄를 사면 받을 수 있습니다.”


 바실리카 마이오르 제도는 1300년 교황 보니파시오 8세(재임 1294~1303년)에 의해 도입됐다. 그는 ‘최고 신앙 보고’라는 칙령을 발표해 50년마다 돌아오는 성스러운 해를 뜻하는 성년 제도를 만들었다. 원래는 ‘노예와 죄수가 자유를 얻고, 모든 빚은 탕감되고, 하나님의 자비가 온 세상에 퍼진다’는 유대교의 전통이었다. 보니파시오 8세가 천명한 성년은 유대교 전통과 조금 달랐다.

 

 다음 성년이었던 1350년 교황 클레멘스 6세(재임 1342~52년)는 죄를 사면 받을 수 있는 바실리카 마이오르에 라테라노 대성당을 포함시켰다. 그는 신도들에게 이렇게 촉구했다.


 “매일 세 개의 대성당을 찾아가 예배를 드리세요.”


 다음 성년이었던 1390년에는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도 바실리카 마이오르에 이름을 올렸다. 이후 역대 교황들은 “성년에 4대 성당을 방문하는 것은 죄를 사면 받을 수 있는 중대한 조건”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슬람이 무슬림들에게 메카를 평생에 한 번은 순례하도록 요구하는 것과 비슷한 내용이었다.  


 바실리카 마이오르에 포함된 네 성당의 공통적인 특징은 성스러운 문인 성문을 각각 갖고 있다는 점이다. 성문은 평소에는 모르타르나 시멘트를 발라 안쪽으로 잠가 놓는다. 교황이 지정하는 성년에만 순례자들에게 개방한다. 순례자들은 이 문을 통과하면 죄를 사면 받을 수 있다. 


 그런데 현직 교황 프란체스코는 2015년 전 세계 모든 교구에 매우 흥미로운 지시를 내렸다. 그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각 교구는 성문을 하나씩 지정해 성년에 굳이 로마로 오지 않더라도 절대적인 사면을 받을 수 있게 하세요.’ 


 이에 따라 스페인 갈리시아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 필리핀 마닐라의 산토 토마스 교황 대학교 예배당, 캐나다 퀘벡의 노트르담 대성당 등이 교황청으로부터 성문 지정 허가를 받았다. 다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대 성당들이었다.

  

  성년 첫날인 1월 1일 교황은 은 망치로 성문을 똑똑 두들긴다. 그러면 문이 열려 순례자들이 들어갈 수 있다. 성경에 ‘나는 문이니 누구든 나를 통해 들어오면 안전하리라’라는 구절이 있다. 그래서 이 문을 통해 들어가는 것은 예수의 자비를 통해 안전을 얻는다는 뜻이다. 


 성문은 성년 마지막 날 교황이 직접 닫는다. 성문은 지난 1975년과 2000년에 열렸다. 다음에 문이 열리는 해는 2025년이다.


피에타


 성 베드로 대성당에 가면 꼭 보아야 하는 작품이 있다. 입구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다. 죽은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새긴 작품이다.


 뜻밖에 성모 마리아는 아들을 잃고 슬픔에 잠긴 어머니의 비통한 표정을 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낮잠을 자는 아들이 깨기를 차분하게 기다리는 모습이다. 그녀의 얼굴에는 평화와 사랑이 넘쳐난다. 


 성모 마리아는 젊은 아들을 둔 50대 노파가 아니라 20대 여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온다. 미켈란젤로는 동료 조각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고 한다. 


 “성모의 순수성과 순결성을 상징하기 위해서랍니다.”


 미켈란젤로가 평소 존경했던 단테의 『신곡』에서 영감을 얻어 성모 마리아를 젊게 표현했다는 설도 있다. 신곡에 보면 “성모여, 당신 아들의 딸이시여”라는 표현이 나온다. 미켈란젤로는 이 구절에 큰 감동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이런 설명도 있다. 성모의 젊음, 차분한 표정, 그리고 침착한 자세는 관람객들에게 성모 마리아가 다 큰 예수가 아니라 어린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거꾸로 숨을 거둔 성인 예수는 관람객으로 하여금 미래의 모습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는 설명이다. 이런 현대적 분석도 있다. 


 “예수는 실제보다 약간 작은 크기로 묘사돼 있습니다. 엄마의 품에서 숨진 예수의 나약한 인간적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


 피에타는 원래 로마에 가 있던 프랑스 추기경 장 드 빌레레스가 미켈란젤로에게 부탁해 제작했다. 처음에는 추기경의 장례 예배당에 놓여 있었지만, 18세기에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옮겨져 현재 위치에 놓이게 됐다. 미켈란젤로는 피에타를 주제로 여러 작품을 만들었는데 대성당의 피에타가 가장 먼저 제작한 것이다. 원래 피에타는 프랑스에서 주로 다룬 주제였으며, 이탈리아 조각가들은 크게 선호하지 않았다. 


 피에타는 방탄 유리벽으로 보호를 받고 있어 제대로 보기가 쉽지 않다. 관광객은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일정 거리 떨어져서 피에타를 감상할 수 있다. 유리벽으로 둘러싸인 성 베드로 대성당의 조각은 피에타가 유일하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1972년 헝가리 출신의  라즐로 토스가 피에타를 부수는 반달리즘을 저지른 이후부터였다. 


 로마를 여행 중이던 그는 “나는 예수 그리스도다. 죽음으로부터 부활했다”라고 소리를 지르면서 지질 탐사에 사용하는 망치를 15번이나 휘둘렀다. 이 때문에 성모 마리아의 팔 부분이 떨어져 나갔고, 코 부분이 손상됐다. 


 마침 옆에서 구경하던 미국 조각가 밥 캐실리 등 다른 관람객들이 그를 피에타에서 떼어내 제압한 덕분에 피에타를 산산조각의 위기에서 구했다. 토스는 분개한 다른 관람객에게 맞아 죽을 뻔 했지만 경찰이 달려들어 겨우 꺼냈다는 이야기도 있다. 


 아내와 두 아이까지 있었던 토스는 정신질환이라는 병원 진단에 따라 형사 처벌을 받지 않고 2년간 이탈리아 정신병원에 갇혀 있다 호주로 강제 추방됐다. 이후 그의 행적은 정확히 알려진 게 없다. 


 일부에서는 토스가 교황을 만나 “파티마의 계시를 밝히라”고 말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자 피에타를 파괴했다고 주장한다. 파티마의 계시란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성모 마리아가 포르투갈 파티마에 나타나 내린 3가지 예언을 말한다. 


 3가지 예언 중 제1의 예언(지옥의 생생한 모습, 1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제2의 예언(2차 세계대전 발발, 소련의 대두와 몰락)은 1942년에 교회에 의해 공표됐다. 그러나 나머지 세 번째 예언은 비밀에 부쳐져 교황청 말고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온갖 의혹과 추측의 대상이 됐다. 일부에서는 세계 멸망을 담은 게 아니냐고 추측한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는 전 세계에 복제품이 많다. 교황청으로부터 허가를 받아 만든 복제품도 한 두 개가 아니다. 복제품 설치장소를 손꼽아보면 도미니카공화국 산티아고의 산티아고 아포스톨 대성당, 폴란드 포즈난 성모 마리아 대성당, 페루 람파의 라 피에다드 예배당, 호주 시드니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 등 모두 20여 곳에 이른다. 이중 포즈난에 있는 복제품은  1972년 원본이 훼손됐을 때 복원 작업에 참고용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발다키노


 사실 성 베드로 성당에서 관람객의 눈에 가장 잘 띄는 작품은 피에타가 아니라 발다키노다. 성당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가면 앞을 가로막는 웅장한 청동 작품이다. 높이가 30m, 무게가 37t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청동 구조물이다. 일부 전문가는 이렇게 말한다.


 “엄청나게 큰 대성당과 그 안을 걷고 있는 조그마한 인간. 그 중간 크기인 발다키노는 인간과 신의 중재 역할을 상징한다.”


 발다키노는 일종의 천개, 순 우리말로 닫집이다. 미사를 올리는 제단이나 교황의 옥좌, 또는 교황이 나들이를 갈 때 타고 다니는 마차 의자 부분이 비나 눈을 맞지 않고 먼지에 시달리지 않도록 위를 가려주는 지붕이다. 시보리움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중세 시대 로마 성당에서는 시보리움을 설치하는 게 일반적인 유행이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발다키노를 만든 사람은 로렌조 베르니니다. 그는 라이벌이자 친구였던 프란세스코 보로미니, 아버지인 피에트로 베르니니, 형 루이기 베르니니 등 다른 건축가들의 도움을 조금씩 받아 발다키노를 제작했다. 


 베르니니에게 발다키노 제작을 의뢰한 사람은 교황 우르바노 8세였다. 베르니니가 빌라 보르게세를 지을 때 당시 추기경이었던 우르바노 8세는 베르니니를 아주 좋아하게 됐고 평생 후견인 역할을 했다. 교황이 베르니니를 좋아했던 것은 그의 예술성이 뛰어났던 이유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예술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측면도 배제할 수 없다.



  우르바노 8세는 비교적 젊은 나이인 55세에 교황이 됐다. 그는 로마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교황청에서 정치적 기반이 약했다. 그는 교황으로서의 기반을 다지고 가문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 예술의 힘을 빌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베르니니는 우르바노 8세를 위해 발다키노를 다양하게 꾸몄다. 곳곳에 그를 위한 흔적을 남겼다. 기둥이 서 있는 받침대에는 그의 문양을 새겼다. 교황의 조카와 새로 태어난 아들 얼굴도 새겨 넣었다. 


 발다키노를 떠받치고 있는 ‘솔로몬의 기둥’은 우르바노 8세의 상징인 올리브 잎이 휘감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올리브 잎이 아니라 포도나무 잎이다. 당시에는 교회에 세우는 각종 조각물에 성체성사를 상징하는 포도나무 잎을 새기는 게 일반적이었다. 베르니니는 포도나무 잎을 교묘하게 조작해서 올리브 잎처럼 보이도록 만들었다. 


 기둥에는 당시 유행이던 나비 대신 ‘바르베리니 벌’이라는 것을 새겼다. 당시 벌은 ‘성하’의 고귀함, 훌륭함을 상징하던 곤충이었다. 성하는 교황 같은 고위 종교 지도자를 높여 부르는 말이다. 베르니니는 솔로몬의 기둥 맨 꼭대기에는 ‘바르베리니의 태양’을 장식했다. 


 당초 발다키노를 만든 이유는 성 베드로 대성당 안에 있는 성 베드로 무덤의 위치를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이런 목적을 가진 발다키노에 우르바노 8세와 그의 집안인 바르베리니 가문의 여러 가지 흔적을 남긴 것은 ‘바르베리니-우르바노-발다키노-성 베드로’로 이어지는 연결 고리를 만들어 바르베리니 가문의 위대성을 고양시키려는 이유에서였다.


 비록 우르바노 8세와 그 가문의 영광을 빛낼 필요성에서 출발한 작품이었다 하더라도 발다키노의 예술성은 부인할 수 없다. 당시 로마 성당의 시보리움은 흰색 대리석으로 만드는 게 일반적이었지만 베르니니는 파격적인 디자인을 채택했다. 전체 구조는 교황이 행진할 때 이용하는 마차나 가마의 가리개에서 영감을 얻었다. 


 발다키노의 네 기둥은 꼬여 있다. 흔히 솔로몬의 기둥이라고 부르는 양식이다. 이 스타일을 로마에 처음 소개한 사람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였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예수살렘의 솔로몬 사원에서 기둥 몇 개를 가져와 옛 성 베드로 성당에 기증했다. 하지만 이 기둥은 실제로는 그리스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베르니니가 솔로몬 기둥 양식을 택한 것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직전에 묶여 있었던 기둥이 바로 이런 양식이었기 때문이었다.


 발다키노의 기둥은 100% 청동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기둥 속을 청동으로 채우지 않고 비워두었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는 무거운 뚜껑을 지탱할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오자 빈 기둥 속을 콘크리트로 가득 채운 것이었다. 


베드로의 의자


 베르니니는 발다키노를 제작한 뒤에는 ‘베드로의 의자’를 만들었다. 역대 교황이 사용하던 의자였다. 중세에는 성 베드로가 사용한 의자라는 전설이 전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875년 신성로마제국 샤를 2세 황제가 교황에게 선물로 보낸 것이라고 한다.


 베드로의 의자는 교부 4명이 의자를 들어 올리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의자 뒤쪽에서는 유리창을 통해 강렬한 햇빛이 들어오고 천사들이 노닐고 있다. 의자가 있는 반원형 부분에는 「마태복음」문구가 새겨져 있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라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성 베드로 대성당에는 또 성 베드로 청동상이 있다. 아르놀포 디 캄비오가 만든 것이다. 성 베드로는 고대 로마 복장을 한 채 왼손에 열쇠를 들고 있다. 「마태복음」문구를 생각하게 하는 열쇠다.


 수많은 순례자가 청동상 발에 입맞춤하고 손으로 만진데다 동상을 만지면 행운이 찾아온다는 소문이 퍼져 관광객까지 그 행렬에 가세하는 바람에 오른쪽 발가락은 거의 다 닳아서 원형이 사라졌다. 왼쪽 발가락도 많이 닳은 상태다. 성 베드로의 축일인 6월 29일에는 이 청동상에 금실로 수놓은 제의를 입히고 미사를 집전한다. 




교황의 탈출로 



 성 베드로 광장 오른쪽 열주 회랑 뒤편에는 성문이 있다. 성문을 지나기 이전은 바티칸시국 땅이고, 성문을 지나면 이탈리아 땅이다. 성문에는 긴 성벽이 연결돼 있다. 성벽 아래에는 차 두어 대가 지나갈 수 있는 좁은 도로가 있다. 고대 로마 시대에는 성벽 주변을 ‘외곽 지역’이라는 뜻인 보르고라고 불렀다. 


 겉모습은 평범하고 특별한 감흥을 주지 못하는 성벽이지만, 실제로는 건립한 지 1천 년을 넘는 긴 역사를 가진 숨겨진 보물이다. 이 성벽은 성 베드로 대성당과 산탄젤로 성을 연결하는 800m 길이의 비밀 통행로다. 더 정확히 설명하면 교황청에 위기상황이 발생했을 때 교황이 피난하는 통로다. 이름은 파세토 디 보르고. 이탈리아 사람들은 단순히 파세토라고 부르기도 한다. 파세토는 우리말로 번역하면 ‘작은 통로’라는 뜻이다.


 파세토의 역사는 9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에스파냐를 점령하고 피레네 산맥을 넘어 유럽 본토로 진격해오던 이슬람군을 격파한 프랑스의 샤를마뉴 대제는 800년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신성로마제국 황제 대관식을 치렀다. 왕관은 교황 레오 3세(재임 795~816년)가 씌워주었다.


 “성 베드로 성하의 무덤을 보호할 수 있도록 새 성벽을 건설하시오.”


 샤를마뉴 대제는 대관식을 마친 뒤 성 베드로 대성당을 지킬 수 있는 새 성벽을 건설하라고 지시했다. 레오 3세는 그의 지시에 따라 성 베드로 대성당과 산탄젤로 성을 연결하는 새로운 성벽 건설 사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로마인들은 16년 뒤 교황이 세상을 떠나자 성벽을 부수어 버렸다. 


 “성 베드로 대성당과 산탄젤로 성이 연결될 경우 산탄젤로 성이 새로운 권력의 중심지로 떠오르게 될 거야. 그렇게 되면 로마의 자치권은 크게 손상될 수밖에 없어.”


 외적 침입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성벽이 사라진 탓에 성 베드로 대성당은 830년과 846년 두 차례에 걸쳐 사라센 해적의 침략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다. 반면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으로 둘러싸인 로마 시내는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신성로마제국 로타르 1세는 교황 레오 4세(재임 847~855년)에게 다시 성벽을 지으라고 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을 보호할 수 있는 성벽을 다시 건설하시오.”


 공사를 서두른 덕분에 성벽은 850년께 완공됐다. 성벽의 길이는 3㎞에 이르렀고, 모두 44개의 감시탑이 세워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성벽에 파세토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파세토를 처음 건설한 사람은 1277~1280년 교황으로 재임했던 니콜라오 3세였다. 그는 1277년 성벽 사이에 파세토를 추가했다. 교황의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바티칸과 산탄젤로 성을 연결하는 통로를 만들면 외국 군대가 쳐들어올 경우 대피 통로로 삼을 수 있겠지.’


 그로부터 200여 년 뒤인 1492년 교황 알렉산데르 6세(재임 1492~1503년)는 파세토를 수리했다. 그는 직접 고친 파세토 덕분에 2년 뒤 목숨을 건지는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교황이 파세토를 통해 산탄젤로성으로 달아나는 사건은 역사상 두 차례 일어났다. 두 번 모두 기독교인 유럽의 군대가 성 베드로 대성당에 쳐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이유는 욕심이었다. 교황의 지나친 권력 욕심과, 교황을 누르고 세속 권력을 키우려는 유럽 지배자들의 욕심이 맞부딪힌 게 원인이었다. 


 첫 선례를 남긴 교황은 위에서 말한 알렉산데르 6세였다. 1493년 교황 자리에 오른 그는 교회와 평신도, 평범한 성직자보다는 가족, 측근을 먼저 생각했다. 그들에게 온갖 특혜를 제공해 많은성직자와 로마인에게서 빈축을 샀다. 교황은 피사에서 공부를 하고 있던 열일곱 살 아들 케사레 보르기아를 발렌시아 대주교로 서임했다. 다른 아들 지오바니 보르기아에게는 가문의 고향인 스페인 간디아의 공작 작위를 하사했다. 또 추기경 자리 열두 개를 새로 만들어 숨겨둔 연인의 오빠인 알레산드로 파르네세에게 그 중 하나를 선물하기도 했다.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려면 교회를 개혁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교황을 몰아내야 합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 연이어 발생하자 나폴리 왕국의 국왕 페르디난드 1세를 중심으로 하는 반대세력이 알렉산데르 6세와 마찰을 빚게 됐다. 페르디난드 1세는 교황에게 불만이 쌓여 있던 피렌체, 밀라노, 베니스를 끌어들여 반 교황 연합을 형성했다. 궁지에 몰린 교황은 프랑스의 샤를 3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지원군을 보내주면 나폴리 왕국을 프랑스 영토로 만들 수 있게 도와드리겠소이다. ”


 샤를 8세는 프랑스 귀족에게 교황이 보낸 편지를 보여주면서 병력을 모아달라고 부탁했다.


“교황이 나폴리 왕국을 주기로 했소.”


 귀족의 동의를 손쉽게 구한 샤를 8세는 교황에게 군대를 보내겠다고 답장을 보냈다. 쾌재를 부른 교황은 프랑스 군대가 로마를 지나갈 수 있게 비밀 허가를 내주었다. 그러면서 사정을 모르는 이탈리아의 다른 도시에게는 거짓말을 했다.


 “프랑스 군대는 나의 요청을 받아들여 오스만투르크로 십자군 원정을 떠나기 위해 이탈리아 남부로 가는 것이오.”


 샤를 8세가 모은 프랑스 군의 총 병력은 2만 5천 명 규모였다. 엄청난 위세를 자랑하는 프랑스 군대가 이탈리아 인근까지 왔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교황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병력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측근들도 교황에게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조언했다.


“샤를 8세는 나폴리 왕국 정복에 만족하지 않고 로마를 포함해 모든 이탈리아를 차지할 우려가 큽니다.”


 다급해진 교황은 이번에는 거꾸로 나폴리 왕국에게 연합군을 꾸려 프랑스에 맞서라고 지시했다. 교황에게는 이런 명령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앞뒤를 재볼 여유가 전혀 없었다. 그는 단지 눈앞에 닥친 위기밖에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교항이 반기를 들었다는소식은 곧바로 샤를 8세에게 전해졌다. 교황의 배신에 화가 난 그는 피렌체를 점령하자마자 바로 로마로 진격했다. 다급해진 교황은 여러 도시에 사절을 보내 군대를 파견해달라고 요청했다. 얼마나 급했던지 이슬람교의 중심국가인 오스만투르크에도 도와달라고 호소할 정도였다.


 샤를 8세의 프랑스 군대는 12월 로마에 입성했다. 교황 선거에 출마했다가 알렉산데르에 밀려 낙선한 델리 로베레 등 프랑스를 지지하는 추기경들도 그들을 따라왔다. 그들의 얼굴에는 엉터리 교황에 대한 불만이 가득했다. 교황은 불안해졌다.


  ‘교황 자리에서 쫓겨날지도 몰라. 거기에 그치지 않고 샤를 8세가 나를 죽일 수도 있어.’


 프랑스군이 로마에 입성하자마자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몰려온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시내 곳곳에서는 시뻘건 불길과 검은 연기가 치솟고 있었다. 극심한 공포에 사로잡힌 교황은 황급히 파세토를 통해 몰래 성 베드로 대성당을 빠져나가 산탄젤로 성에 숨었다.  


 샤를 8세는 교황을 궁지로 몰아넣은 뒤 나폴리로 진격했다. 막강한 전력을 자랑하던 프랑스군은 나폴리 외곽의 몽 생 조반니 요새를 대포로 공격해 순식간에 허물어버리고 말았다. 나폴리는 항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샤를 8세는 아주 손쉽게 나폴리에 입성해 나폴리 왕 자리에 올랐다.


 역설적이게도 폐위 위기에 몰린 교황을 살린 것은 샤를 8세의 욕심이었다. 그가 로마를 점령하고 피렌체와 나폴리마저 정복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유럽 여러나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됐다.


 “샤를 8세가 이탈리아를 완전히 독식하게 될지도 몰라. ”


 샤를 8세를 막는 일은 유럽 여러 나라의 공통 관심사가 됐다. 당시 이탈리아 최대 도시였던 베니스와 신성로마제국은 물론 같은 걱정을 하게 된 스페인이 함께 손을 잡고 연합군을 구성했다. 이들이 손을 잡으면서 대외적으로 내세운 명분은 오스만투르크에 맞선다는 것이었다. 


 위기감을 느낀 샤를 3세는 로마는 물론 나폴리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병사들을 이끌고 프랑스로 돌아가야 했다. 덕분에 교황은 가까스로 자리를 부지함은 물론 구사일생으로 목숨까지 건질 수 있었다. 


 알렉산데르 6세는 엉뚱한 일로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는 일마다 사사건건 반대하는 여러 추기경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그의 아들 케사레는 추기경들을 제거해 아버지를 도와주겠다며 독을 준비했다. 그런데 독을 넣은 물잔이 잘못 배달돼 엉뚱하게 알렉산데르 6세가 마시고 말았다. 그야말로 인과응보였던 셈이었다.


 일부 학자들은 그가 전염병으로 목숨을 잃었다고 주장한다. 당시 로마 시내 공기가 매우 나빠 교황은 물론 로마 시민들의 건강이 좋지 않았다. 이 때문에 전염병이 발생해 교황을 포함해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것이다. 교황은 로마인들의 반대 때문에 성 베드로 대성당에 묻힐 수 없었다. 그의 유해는 고국 스페인으로 돌아가야 했다. 거기서도 떠돌아다닌 그는 몬세라트의 한 작은 교회에 겨우 안식처를 찾을 수 있었다.


 파세토로 달아난 두 번째 교황은 1527년 클레멘스 7세(재임 1523~34년)였다. 당시 유럽에서는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와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 황제가 가장 큰 세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유럽 최고의 권력자가 되고 싶었던 교황은 두 사람 사이에서 이간질을 하기로 했다. 


 ‘막강한 군사력을 갖고 있던 두 사람이 서로 힘을 합치지 못하게 해야 나의 영향력을 키울 수 있어.’


 교황은 둘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끊임없이 거짓말을 했다. 그의 이간질은 큰 효과를 발휘했다. 프랑수아 1세와 카를 5세는 교황의 말만 믿고 계속 전쟁을 벌였다. 이 때문에 유럽의 여러 지역이 황폐해졌고,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교황의 권력 욕심이 엄청난 부작용을 낳은 셈이다.


 카를 5세는 뒤늦게야 교황의 교활한 책략을 깨달았다. 그는 1525년 파비아 전투에서 프랑수아 1세의 군대를 괴멸시킨 뒤 스페인 주둔군을 곧바로 이탈리아로 보냈다. 독일에 있던 군대도 파견했다. 로마로 쳐들어간 황제 군대의 규모는 무려 3만 5천여 명에 이르렀다. 


 “교황에게 따끔한 교훈을 가르쳐주고 오시오.”


 스페인에서 파견된 황제 군대는 부르봉 장군이 지휘하고 있었다. 병사들은 오랫동안 급여를 제대로 받지 못해 불만을 갖고 있었다. 부르봉 장군이 그들로부터 큰 존경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반란이 일어나는 것을 겨우 막을 수 있었다. 사정은 독일에서 파견돼 온 증원군도 다르지 않았다. 카를 5세 황제와 부르봉 장군은 그들에게 이렇게 약속했다.


 “로마 교황청을 약탈해서 전리품을 챙겨 넉넉하게 급여를 주겠다.”


 교황의 입장에서는 설상가상격으로 독일에서 온 병사들은 클레멘스 7세를 극도로 싫어했다. 교황이 카를 5세와 프랑수아 1세 사이에서 이간질을 일삼아 전 유럽을 전쟁으로 몰아넣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병사들은 로마에 쳐들어가면 교황에게 호된 맛을 보여주겠다고 다짐했다.


 “교황 때문에 전 유럽이 긴 전쟁을 벌이고 있는 거야. 그 사람 때문에 우리는 전쟁에 끌려나와 목숨을 잃을 처지가 됐어. 고향에 남은 부모와 처자식은 굶주리게 된 거고.”


 카를 5세의 군대가 분노에 사로잡혀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은 교황은 깜짝 놀랐다. 그는 서둘러 황제의 병사들에게 사절을 보내 이렇게 제안했다.


 “로마 진군을 중단하고 돌아가면 금화 10만 듀캇을 주겠노라.”


 하지만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병사들은 콧방귀를 뀔 뿐이었다. 그들은 교황의 제안을 무시하고 로마로 쳐들어가기로 결정했다. 일부 병사는 교황이 보낸 사절의 멱살을 잡고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


 “교황이 주는 돈은 없어도 돼. 교황청을 약탈하면 그 이상을 벌 수 있거든.”


 카를 5세의 군대는 1527년 5월 5일 아우렐리아누스 성벽 밖에 도착했다. 다음날 아침 로마 일대에는 안개가 짙게 끼었다. 불과 2~3m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마치 한 치 앞도 알 수 없게 된 로마의 안타까운 현실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병사들은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게 노래를 부르며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행군했다. 


 교황은 처음에는 달아날 생각이 없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죽을 각오를 하고 있었다. 대성당 한가운데에 의자를 놓고 앉아 쳐들어오는 황제의 병사들에게 호통을 칠 생각이었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살인의 칼을 휘두르느냐? 하나님의 성전을 모독한 죄로 너희를 모두 파문한다. 죽은 뒤에는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그때 황제의 병사들이 성 베드로 대성당 인근 성 스프리토 병원에 몰려가 환자까지 죽인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로마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은 물론 성 베드로 대성당 계단에서 황제 군대와 맞서 싸우는 스위스 근위대의 대포 소리도 연이어 들려왔다.


“지금 이곳은 현실의 세상입니다. 미친 병사들이 휘두르는 칼 앞에서는 아무리 종교라도 사람의 목숨을 구해줄 수 없습니다. 어서 피하셔야 합니다.”


 교황은 유일하게 곁에 남아 있던 한 추기경의 권고를 받아들여 결국 파세토를 통해 산탄젤로 성으로 도망쳤다. 당시 기록은 달아나는 교황의 모습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클레멘스 7세 교황은 불타오르는 로마의 잔혹한 풍경을 보고, 또 연이어 터져나오는 비명을 들으면서 끊임없이 눈물을 쏟았다.’


 교황이 달아날 동안 스위스 근위대는 성 베드로 대성당 계단 앞에서 카를 5세의 병사들을 맞아 끝까지 싸웠다. 그들 중 단 한 명도 목숨을 건지려고 달아나지 않았다. 근위병 1천527명 중에서 살아남은 병사는 42명에 불과했다. 교황청은 이들의 충성과 용기를 기념하는 뜻에서 이후 새 스위스 근위대 선발 시험을 매년 5월 6일에 실시하고 있다.


 카를 5세의 병사들 중에는 개신교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가톨릭이었다. 이런 병사들이 분노와 욕심에 눈이 멀어 성 베드로 대성당뿐만 아니라 로마를 약탈하고 불태운 것이다. 이들은 추기경이나 사제들을 가리지 않고 죽였다.  귀족이든 아니든 여자들은 모두 성폭행했다. 한 역사학자는 이렇게 기록했다.


 ‘410년 알라리크가 이끄는 서고트족, 450년 겐세리크가 이끄는 반달족은 물론 여러 차례 다른 야만족도 로마를 침략했다. 하지만 카를 5세의 군대는 어느 야만족보다도 끔찍하게 로마를 약탈했다.’


 로마 주민들이 살해당하고, 여자들이 군인들의 노리개가 되고, 교회와 궁전이 약탈당해도 교황은 산탄젤로 성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는 스스로의 안전만 챙길 수 있었을 뿐 신도들을 구할 수 있는 어떤 조치도 취할 수 없었다. 그는 마치 성 안에 갇힌 죄수 같은 신세였다.


 로마가 공격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베네치아, 피렌체에서 군대를 보냈다. 우르비노 공작이 긴급히 새로 모집한 스위스 근위대도 로마를 구하러 달려왔다. 하지만 그들만으로는 카를 5세의 대군에 맞설 수 없었다. 게다가 우르비노 공작은 교황을 좋아하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그는 사실 교황이 아니라 로마를 구하러 달려온 것이었다. 그런데 교황이 산탄젤로 성에 틀어박혀 목숨만 챙기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터져나오는 분노를 숨길 수 없었다. 우르비노 공작은 군대를 돌려 그냥 돌아가고 말았다.


 ‘모든 게 하나님의 뜻이라면 교황의 목숨과 로마의 운명도 하나님이 결정하시겠지.’


 카를 5세의 군대가 쳐들어가기 전에 5만여 명이었던 로마 인구는 불과 수개 월 사이에 1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대다수는 목숨을 구하려고 로마에서 먼 곳으로 달아났지만 살해당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고 지옥이 따로 없었다.


 교황은 일곱 달 동안이나 산탄젤로 성에 닫혀 있었다. 그는 나중에는 행상으로 변장해 시종 두어 명만 거느리고 산탄젤로 성을 빠져 나가 오르비에토로 달아났다. 로마를 점령한 황제군은 아홉 달 동안 머무르며 행패를 부렸다. 하지만 시체가 썩어 부패한 탓에 시내에 전염병이 도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로마를 떠나야 했다. 


 클레멘스 7세는 1534년 56세를 일기로 생애를 마감했다. 로마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진심으로 기뻐했다. 많은 사람이 교황청으로 몰려가 정말 교황이 죽었는지를 확인했다. 사람들은 밤이 되면 교황의 묘를 습격했다. 한번은 교황의 묘가 완전히 파헤쳐졌고, 그의 시신에 칼이 꽂히기도 했다.


 교황의 조카였지만 로마인들로부터 존경을 받던 추기경 이폴리토 데 메디치가 자제를 호소하지 않았다면 그의 시신은 갈고리에 꿰인 채 로마 시내로 끌려 다닐 형편이었다. 고대 로마 시대처럼 테베레 강에 버려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결국 매일 밤 무장한 군인들이 그의 묘를 지켜야 했다.  


 클레멘스 7세가 파세토를 통해 달아나는 일이 벌어진 이후 파세토의 문은 굳게 닫혀 버렸다. 아무도 파세토를 재건하는 일에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세월이 흐르면서 상태는 매우 나빠지게 됐다. 파세토가 다시 깔끔해진 것은 지난 2000년 교황이 새 천년 시작을 축하하면서 보수, 수리를 지시한 덕분이었다. 


 파세토는 평소에는 문을 닫고 대중 접근을 막는다. 다만 여름철 일정기간에만 소수의 그룹 투어 신청자에게 부분적으로 탐사를 허용한다. 파세토 열쇠는 스위스 근위대가 보관한다. 만일의 경우가 다시 발생해 교황이 또 대피해야 할 경우 스위스 근위대가 문을 열어줘야 하기 때문이다. 


 바티칸의 포르타 산타나에서 시작한 파세토는 골목길을 따라 이어진다. 골목길은 라르고 델 콜로나토 즉 콜로나토 광장과 코리도리 거리, 보르고 안젤로 거리로 이어진다. 파세토는 보르고 안젤로 거리 끝에 있는 피아자 피아 즉 피아 광장을 건너 작은 숲을 지난 뒤 산탄젤로로 들어간다. 종점은 산탄젤로 정면이 아니라 왼쪽 뒷부분이다. 


 파세토는 성벽 사이에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둘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기에는 다소 좁다. 지붕을 덮어씌운 탓에 밖에서는 파세토 안을 보기 힘들다. 하지만 안에서는 곳곳에 만들어진 틈을 통해 테베레 강은 물론 도로로 달리는 차와 인도로 걷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성 베드로 대성당 이야기를 시작할 때 꺼냈던 오벨리스크 이야기로 글을 마무리하도록 하자. 


 오벨리스크 꼭대기에는 금으로 도금한 공이 하나 달려 있었다. 중세시대 이래 그 공에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유해가 들어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칼리굴라가 전차경기장에 오벨리스크를 세운 것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무덤으로 쓰기 위해서였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오벨리스크는 중세 시대에는 ‘카이사르의 바늘’이라는 별명을 갖기도 했다.


 오벨리스크를 광장 한가운데로 옮기는 작업을 진행했던 도메니코 폰타나라는 사내가 공을 열어보았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공은 지금은 캄피돌리오 광장의 콘세르바토리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공이 달려 있던 꼭대기에는 대신 십자가가 설치됐다. 그러자 이런 소문이 나돌았다.


 “공 안에 예수의 유해가 들어 있다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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