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 시대에 팔라티노 언덕과 카피톨리노 언덕 사이는 시원하게 뚫려 있었다. 그래서 테베레 강이 범람하면 이곳으로 물이 흘러들어가 두 언덕 사이에 있던 포로 로마노를 물바다로 만들었다. 로마인들은 물이 넘치던 이곳을 포룸 보아리움이라고 불렀다. 보아리움(boarium)은 보아리우스(boarius)의 복수인데 ‘소’, ‘가축’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래서 포룸 보아리움은 ‘소 시장’, ‘가축시장’이라는 뜻이다.
고대 로마인들이 포로 로마노에서 테베레 강으로 가려면 두 언덕 사이로 나와야 했다. 이 길이 가장 빠른 지름길이었다. 포룸 보아리움을 지나면 고대 로마 시대에 유일한 다리였던 폰스 수블리키우스로 손쉽게 갈 수 있었다. 로마 왕정 시대 제4대 왕이었던 안쿠스 마르키우스가 건립한 나무 다리였다. 지금 테레베 강에 팔라티노 다리가 있는데 아마 그 근처였을 것이다.
포룸 보아리움에서 남쪽으로 항하면 대전차경기장 키르쿠스 막시무스가 있는 마르키아 평원으로, 북쪽으로 방향을 돌리면 마르스 평원으로 갈 수 있었다. 한마디로 포룸 보아리움은 로마 외곽의 사통팔달 교차로였던 셈이다.
이처럼 교통의 요지이다 보니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거나 강을 건너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수시로 지나다녔다. 유동인구가 많은 덕분에 신전도 여러 곳 만들어졌다. 그래서 후세에까지 전해지는 재미있는 전설과 신화도 많이 탄생했다.
카피톨리노 언덕에서 내려와 베네치아 광장 반대편인 비아 델 테아트로 디 마르켈로 거리를 지난다. 잠시 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짓기 시작했고 그의 후계자인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완성한 마르켈루스 극장이 나타난다. 마치 작은 콜로세움 모형을 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콜로세움을 많이 닮았다는 이야기다.
마르켈루스 극장을 지나 비아 루이기 베트로셀리 거리를 걷다 보면 아담한 크기의 광장이 보인다. 바로 이곳이 옛날의 포룸 보아리움이다. 여러 건물 너머로는 키르쿠스 막시무스 터가 보인다. 과거의 화려했던 스타디움은 사라졌고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다.
광장 맞은편에는 이색적인 긴 탑을 가진 고색창연한 교회가 우뚝 서 있다. 6세기로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오랜 역사를 가진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 교회다.
관광객들이 교회 앞에 줄을 서 있다. 로마의 최고 인기 관광지인 성 베드로 대성당에 입장하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 만큼이나 줄이 길다. 대부분 외국인인 걸로 봐서는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려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가장 인기 있는 얼굴 모양의 원반 부조물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으려고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긴 줄을 서서 1시간 이상 대기하고서라도보려는 것은 교회 전랑 왼쪽 끝에 있는 코린트식 기둥머리에 달린 보카 델리 베리타다. 그 유명한 ‘진실의 입’이다.
‘진실의 입’은 설명하기 곤란할 정도로 매우 독특한 표정을 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온갖 인상을 다 찌푸린 표정이다. 달리 보면 놀란 표정처럼 보이기도 한다. 표정이 정말 애매모호했던지 어떤 역사학자는 ‘진실의 입’을 아주 이색적으로 재미있게 표현하기도 했다.
‘어둠 속에서 열두 시간 동안 계속해서 더러운 오염물질을 퍼내는 일을 맡은 불운한 노예의 슬픈 표정 같구나.’
포룸 보아리움은 고대 로마 마 초기역사에서 매우 중요했던 곳이었다. 로마를 세운 로물루스 형제가 테베레 강을 따라 떠내려가다 늑대에 구조돼 젖을 먹은 곳이 바로 여기였다. 로마에서 처음 펼쳐진 검투사경기의 무대이기도 했다. 이밖에도 헤라클레스 등 고대 로마의 많은 전설과 신화가 숨어 있는 곳이 바로 여기다. 이렇게 유서깊은 장소에 세워진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 교회와 ‘진실의 입’에도 고대와 중세의 신기하고 재미있는 전설과 신화가 수두룩하게 담겨 있다. 그 이야기를 들으러 교회 안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자.
포룸 보아리움
포룸 보아리움이 역사에 처음 등장하는 시기는 로마 건국 이전이다. 그리스 펠로폰네소스의 아르카디아에서 바다를 건너온 에반드로스가 팔라티노 언덕에 도시를 건설해 살 무렵이었다. 포룸 보아리움을 관심의 대상으로 떠올린 사람은 바로 천하장사 헤라클레스였다. 신화에 따르면 그는 소떼를 이끌고 이곳을 지나갔다.
덕분에 포룸 보아리움은 헤라클레스와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됐다. 포룸 보아리움에는 신전이 여러 개 있는데 특히 헤라클레스에게 바친 신전이 많았다. 아라 막시마, 헤라클레스 인빅투스 신전, 헤라클레스 폼페이아누스 신전 등 3개나 몰려 있었다.
아라 막시마는 헤라클레스가 포룸 보아리움을 지나간 것을 기념해서, 헤라클레스 인빅투스는 그가 그리스를 오가며 무역을 하던 상인을 도와줬다고 해서 건설한 신전들이다. 두 신전 건립 이유를 살펴보면 포룸 보아리움의 지역적 특성이 잘 나타난다. 헤라클레스가 지나갔다는 것은 포룸 보아리움이 먼 옛날부터 교통의 요지였다는 걸 설명한다. 무역상을 도와줬다는 것은 테베레 강을 통해 무역상이 많이 오갔다는 걸 입증한다.
헤라클레스 신전 이외에도 포룸 보아리움 일대에는 여러 신전이 있었다. 행운의 여신인 포르투나에게 바치는 포르투나 신전, 새벽 및 항구와 부두의 여신인 마테르 마투타에게 헌정한 마테르 마투타 신전, 항구의 신 포르투누스에게 바친 포르투누스 신전, 귀족계급의 덕성을 상징하는 신인 푸디키티아 파트리키아에게 헌정한 푸디키티아 파트리키아 신전 등도 있었다.
이 신전들을 지은 이유도 포룸 보아리움의 지역적 특성과 관련이 있었다. 무역상들은 테베레 강에서 배를 타고 티레니아 해로 나가 이오니아 해를 돌아 그리스로 가곤 했다. 당연히 행운의 여신의 도움이 필요했다. 게다가 배는 새벽에 부두에서 떠났을 것이니 마테르 마투타와 포르투누스의 도움도 받아야 했다.
아라 막시마
“오른쪽은 강이고 왼쪽은 언덕이군. 초원에는 먹음직스러운 풀이 많이 자라고 있고. 자! 여기서 쉬고 가자. 얘들아. 나는 한숨 잘 테니 너희들은 맛있게 풀을 뜯으렴.”
헤라클레스는 지쳐보이는 소들에게 다정하게 이야기를 건네고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그는 ‘태양의 신’ 헬리오스의 배를 빌려 타고 세상의 서쪽 끝에 있는 전설의 섬 에리테리아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게리오네우스(또는 게리온)와 머리 두 개를 가진 개 오르토스, 거인 목동 에우리티온을 모두 죽이고 소떼를 빼앗아 그리스로 돌아가고 있었다. 여러 자료를 참조하면 그가 이런 모험을 한 때는 BC 13세기 무렵이었다.
제우스의 아들인 헤라클레스는 메가라와 결혼해 자식 3명을 낳아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하지만 제우스의 부인인 헤라 여신의 저주 때문에 이성을 잃어 가족을 모두 죽이고 말았다. 그는 죄를 씻기 위해 티린스의 겁쟁이 임금 에우리스티우스에게 복종해야 했다. 왕을 위해 열두 가지 과업을 완성하는 게 속죄의 과제였다. 게리오네우스의 소떼를 에우리티우스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열 번째 과업이었다.
그리스로 돌아가던 헤라클레스는 이탈리아를 지나가기로 했다. 내륙으로 가면 산적을 많이 만날 수 있기 때문에 이탈리아 끝에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널 생각이었다. 그는 이탈리아 남부를 지나다 팔라티노 언덕 아래 초지에서 그만 잠이 들어버렸다. 오랜 여행 탓에 피로가 많이 쌓였기 때문이었다.
헤라클레스가 잠든 팔라티노 언덕 아래 초지에는 당시만 해도 이름이 없었다. 세월이 한참 흘러 나중에야 소 시장, 가축 시장이라는 뜻인 포룸 보아리움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곳에서 소 등 가축을 사고팔았기 때문에 이런 지명이 붙었을 수도 있다. 헤라클레스가 소떼를 몰고 지나갔기 때문에 이런 명칭이 생겼을 수도 있다. 로마인은 나중에 그리스를 정복한 뒤 애기나 섬에서 청동 소뿔 조각을 빼앗아와 포룸 보아리움 한가운데에 설치했다. 지금은 그 소뿔이 어디 갔는지 아무도 모른다.
헤라클레스가 포룸 보아리움을 지나갈 무렵 인근에 있던 팔라티노 언덕의 동굴에는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괴물 카쿠스가 살고 있었다. 그는 언덕에서 우연히 헤라클레스가 잠든 걸 보고는 몰래 소 두 마리를 훔쳐갔다. 뒤늦게 소 울음소리에 잠이 깬 헤라클레스는 소를 잃어버린 걸 깨닫고 주변을 샅샅이 뒤졌다. 그는 바위로 입구를 막고 동굴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카쿠스를 찾아내 몽둥이로 때려 죽여 버렸다.
“아버지! 이유야 어찌됐건 저는 또 살인을 했습니다. 속죄를 위해 이곳에 신전을 세우고 희생제물을 바치겠습니다. 저의 손을 깨끗이 씻어주십시오.”
헤라클레스는 테베레 강에서 살인을 씻는 정화의식을 거행한 뒤 유피트레 인벤토르(발견하는 유피테르) 신에게 바치는 제단을 세웠다. 그는 또 소들을 되찾게 해준 것에 감사하는 뜻으로 소 한 마리를 유피테르 신에게 바쳤다.
헤라클레스가 카쿠스를 없앴다는 소식은 금세 팔라티노 언덕 일대를 다스리던 지도자인 에반드로스에게 알려졌다. 그는 예언자인 어머니로부터 미래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헤라클레스를 찾아갔다. 그는 근처에 지천으로 자라던 올리브 가지를 꺾어 헤라클레스의 머리에 왕관처럼 씌웠다.
“우리 백성들의 걱정거리를 제거해준 영웅께 저녁 식사를 대접하고 싶군요. 제 초대를 받아주시겠습니까?”
환대를 무엇보다 소중하게 생각하는 헤라클레스는 기꺼이 에반드로스의 초대를 받아들였다. 헤라클레스는 식사를 하면서 이름과 족보, 이탈리앙 온 이유 등을 설명했다. 에반드로스는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선각자이신 어머니께서 당신이 먼 미래에 신이 될 것이라고 오래 전에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당신에게 제단을 바치는 첫 영광을 저에게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렇게 해 주시면 오히려 제가 영광입니다. 제단을 세우신다면 매년 소 한 마리를 바치는 제례를 거행해 주시기 바랍니다.”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에반드로스는 헤라클레스가 소를 풀어 풀을 뜯어먹게 한 포룸 보아리움에 제단을 만들었다. 그리고 멍에를 한번도 쓴 적이 없는 하얀 소를 한 마리 잡아 희생제물로 바쳤다. 헤라클레스는 에반드로스의 호의에 감사하면서 에리테리아에서 끌고 온 소 중에서 여러 마리를 잡고 전리품 중에서 일부를 떼어내 제단에 봉헝했다. 그리고 에반드로스는 물론 그의 백성들과 함께 축제를 즐겼다.
에반드로스가 헤라클레스를 위해 이때 만든 제단은 바로 아라 막시마였다. 로마인은 이후 아라 막시마에서 헤라클레스에게 제례를 올리는 것 외에 다른 행사는 거행하지 않았다. 상업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서로 절대 바꿀 수 없는 맹세를 하거나 계약을 할 뿐이었다. 이들은 맹세나 계약을 한 뒤에는 헤라클레스에게 귀중한 물건을 바치기도 했다.
로마 최초의 검투사 경기
아직 찬바람이 불어오는 BC 264년 3월이었다. 수많은 함선이 이탈리아 본토에서 시칠리아로 이어지는 메시나 해협을 건너고 있었다. 메시나로 향하는 로마군 병사 1만 7천 명을 태운 로마의 선단이었다. 이들 중에 유니우스 브루투스라는 사내도 포함돼 있었다. 귀족 출신이라는 것 이외에 그의 나이와 이름, 그리고 직책은 알려지지 않았다. 두 아들이 청년이라는 걸 감안하면 40대 초반이나 중반 정도의 나이였을 것이다. 게다가 귀족이었으니 군단장 정도의 자리를 맡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로마군은 시칠리아에 건너가자마자 시라쿠사의 참주 히에론이 이끄는 군대와 싸워 초전에 대승을 거뒀다. 이어 카르타고군이 공격해왔지만 오랜 전투 경험을 쌓아 살인무기나 다름없는 로마군에게는 적수가 되지 못했다. 로마군은 미미한 피해만 남기고 두 적을 가볍게 물리칠 수 있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는 희생자 중에 유니우스 부르투스가 포함돼 있었다. 그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유니우스 브루투스의 조상은 마지막 왕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를 몰아내고 로마에 공화정의 문을 연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였다. 그만큼 내력이 깊고, 로마에서 높은 평판을 받는 유력 가문이었다.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유니우스 브루투스의 사체는 곧바로 로마로 옮겨졌다.
“아버지를 위해 검투사 경기를 벌이도록 하자.”
유니우스 브루투스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마르쿠스와 데키무스 형제였다. 둘은 전쟁에서 숨진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장례식에서 검투사 경기를 거행하기로 했다. 로마인은 순장 문화를 도입하지는 않았지만, 고인을 저승까지 동행해줄 사람이 있으면 저승의 신을 만족시켜 고인이 사후세계에서 편안히 지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검투사가 죽을 때까지 싸우는 경기를 장례식에서 진행한 것이었다.
두 형제가 아버지 장례식을 거행한 곳은 바로 포룸 보아리움이었다. 사람들이 많이 오가기 때문에 가문의 위세를 떨치기에 적당한 곳이었다. 이날 검투사 경기에 출전한 검투사는 3개조, 모두 6명이었다. 1세기 무렵 로마 학자였던 발레리우스 막시무스는 『회상록』에서, 리비우스는 『로마사』에서 이렇게 썼다.
‘마르쿠스와 데키무스는 아버지를 위해 로마에서는 최초로 포룸 보아리움에서 검투사 경기를 열었다.’
헤라클레스 인빅투스 신전
“해적이다. 해적선 두 척이 접근하고 있다. 모두 싸울 준비를 해라.”
오랜만에 날씨가 쾌청한 BC 120년 초봄이었다. 향긋한 고급 올리브 오일을 가득 실은 배 여러 척이 그리스 아테네에서 이오니아 해를 건너 이탈리아 타렌툼으로 가고 있었다. 제법 규모가 큰 이 배들은 로마의 부유한 상인인 마르쿠스 옥타비우스 헤레니우스가 운영하는 상선이었다. 그는 이탈리아와 그리스 등을 오가며 올리브 오일과 도자기, 조각 등을 사고팔아 큰돈을 벌었다.
당시 이오니아 해 곳곳에서는 잔인하고 음흉하기로 악명높은 해적떼가 출몰하고 있었다. 많은 무역선이 해적에게 붙잡혀 소아시아의 킬리키아에 끌려가거나 물건을 빼앗기고 바다에 침몰하곤 했다. 로마의 영웅 폼페이우스가 이오니아 해에서 설치던 해적 무리를 소탕한 것은 이때로부터 50년 정도 이후의 일이었다. 해적이 얼마나 날래고 용감했던지 그리스는 물론 로마 정규군도 두려워할 정도였다.
“모두 무기를 꺼내라. 그리고 해적선을 향해 미리 준비한 강력한 불화살을 쏘도록 해라.”
헤레니우스는 무장 경비원들은 물론 배를 몰던 선원들과 노예들에게 해적과 싸울 준비를 하라고 했다. 언제 해적이 나타날지 모르기 때문에 배에 경호원은 물론 무기를 싣고 다니는 게 일상작이었다. 그는 전투에 대비하라고 지시를 내리면서 두 손을 하늘 높이 들어 신에게 기도를 드렸다.
‘오! 용감한 천하무적 헤라클레스 신이시여! 도와주소서. 해적을 물리치게 힘을 보태주신다면 신께서 로마에서 휴식하셨던 장소에 신전을 지어 바치겠나이다.’
신화에 따르면 헤라클레스는 이 무렵 올림피아 산으로 올라가 신의 반열에 올라가 있었다. 그가 헤레니우스의 목소리를 듣고 달려와 도와준 덕분인지 무장 경비원들이 쏜 화살은 해적선의 돛에 적중해 배를 불길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해적들이 불을 끄느라 웅성거리는 사이 헤레니우스의 배들은 해적선을 따돌리고 무사히 바다를 건너 타렌툼에 입항할 수 있었다.
헤레니우스는 로마에 돌아가 올리브 오일을 비싼 값에 팔 수 있었다. 그는 여기서 번 돈으로 포룸 보아리움의 키리쿠스 막시무스 동쪽에 있는 땅을 샀다. 에반드로스가 팔라티노 언덕의 지배자일 때 이곳을 지나가던 헤라클레스가 소떼를 풀어놓고 잠시 누워 잠들었다고 알려진 땅이었다.
헤레니우스는 그리스 아테네에서 수입한 고급 대리석으로 둥그런 모양의 신전을 만들었다. 후세 사람들은 이 신전을 헤라클레스 인빅투스(승리의 헤라클레스) 신전, 또는 헤라클레스 올리바리우스(올리브 무역을 지켜주는 헤라클레스) 신전이라고 불렀다.
“헤라클레스 신이여!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계속 해적떼로부터 올리브 무역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갔다 올 때마다 하얀 소를 잡아 제물로 바치도록 하겠습니다.”
헤라클레스 인빅투스 신전은 지금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 바로 곁에 있는 둥근 신전이다. 고대 로마 신전치고는 지금도 온전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다만 규모가 크지 않고 유명하지 않아 사람들은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모양이 둥근 탓에 한때는 베스타 신전이라고 오해를 받기도 했다.
헤라클레스 인빅투스 신전은 로마 건축사에서 결코 가볍지 않는 존재감을 자랑한다. 이 신전은 로마의 현존 건물 중에서 가장 오래된 대리석 건물이다. 또 모든 건물을 통틀어 로마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건물이다. 그리스 대리석으로 만든 건물 중에서는 로마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물이다.
헤라클레스 인빅투스 신전에는 흥미로운 이야기도 하나 전한다. 이 신전에는 파리와 개는 절대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헤라클레스는 인생을 통틀어 개 때문에 여러 번 곤욕을 치렀다. 그래서 그를 위로하는 뜻에서 누구도 개를 신전에 데리고 가지 못하게 했다. 당연히 개를 제물로 바치지도 않았다. 하지만 파리가 들어가는 것은 어떻게 막을 수 있었을까?
헤라클레스 인빅투스 신전은 12세기에는 교회로 바뀌어 1세기에 순교한 성 스테파노스에 헌정되기도 했다. 나중에는 성모 마리아에게 다시 헌정됐다. 그러다 20세기 들어서야 교회의 틀을 벗고 다시 원래의 이름을 되찾을 수 있었다. 판테온처럼 교회로 바뀐 덕분에 파괴되지 않고 옛 모습 그대로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푸디키티아 파트리키아 신전
BC 3세기 무렵 귀족 원로원 의원인 아울루스 베르기니우스에게 베르기니아라는 딸이 있었다. 그녀는 평민으로서는 처음 집정관을 지낸 루키우스 볼룸니우스 플라마와 결혼했다. 비록 귀족과 평민이 결혼할 수 있도록 통혼법이 제정돼 있었지만, 당시 귀족사회에서는 상당히 놀라운 일이었다.
베르기니아는 결혼한 뒤 다른 귀족 여인들처럼 포룸 보아리움의 푸디키티아 파트리키아(귀족의 정결) 신전에 갔다. 귀족 여성은 수시로 이 신전에 찾아가 정신적, 육체적 정결을 맹세하면서 신의 가호를 빌어야 했다. 그런데 다른 귀족 여성들이 신전에 들어가려는 베르기니아를 붙잡았다.
“당장 여기서 나가. 평민과 결혼한 주제에 어디 감히 귀족 여인들이 이용하는 신전에 들어오려고 하는 거야.”
베르기니아는 아주 개방적인 여인이었다. 다른 사람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데다 매우 자존심도 강했다. 그녀는 귀족 여인들의 반발을 이해할 생각도, 받아들일 생각도 없었다.
“내가 결혼했다고 해서 귀족 신분이 없어진 게 아니잖아요? 귀족과 평민이 결혼하는 게 불법도 아닌데 왜 나를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거죠?”
“네 피는 평민과 결혼하면서 더러워졌어. 이미 귀족의 품위를 잃어버린 거야. 그러니 여기 들어올 수 없어.”
“저는 처녀로서 남편과 결혼했어요. 로마를 위해 훌륭한 일을 많이 해 집정관을 두 번이나 지낸 남편을 부끄러워하지도 않아요. 저는 여전히 정결한 여인이고 귀족의 혈통을 가지고 있어요. 여러분이 계속해서 저를 막아선다면 굳이 들어가지는 않겠어요. 하지만 후회하지는 마세요.”
베르기니아는 퀴리날레 언덕 인근 비쿠스 롱구스에 매우 크고 화려한 집을 가지고 있었다. 친정에서 가지고 온 지참금이 넉넉했을 뿐만 아니라 남편도 재산이 많은 부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집에 돌아가자마자 노예들을 보내 평소 친하게 지내던 평민 여인들을 불렀다. 그리고 푸디키티아 파트리키아에 가서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를 털어놓고는 이렇게 선언했다.
“제 집 반쪽을 떼어내 신전으로 만들 겁니다. 평민 여인들만 이용하는 푸디키티아 플레베이아(평민의 정결) 신전을 건설할 생각이에요. 이 신전에 귀족 여인들은 들어오지 못하게 할 거예요. 두 신전 중 어디에 여인들이 더 많이 찾는지 속 좁은 귀족 여인들에게 보여줘야겠어요. 제가 받은 푸대접은 평민 모두가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예요. 여러분들은 새로 짓는 신전을 매일 꽉 채워서 저와 평민의 복수를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베르기니아가 지은 신전은 그녀의 기대대로 평민 여인들로 넘쳐났다. 두 신전은 4~5세기 무렵까지 동시에 로마에 존재하면서 어디에 여인들이 많이 들어가는지 늘 경쟁을 벌였다. 지금은 두 신전 모두 사라지고 없다. 언제 어떻게 없어졌는지 아무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 교회
“굶주림에 시달리는 교인들이여! 포룸 보아리움으로 오시오. 하나님을 대신해 우리가 여러분에게 음식을 나눠줄 것이오.”
6세기 대 그레고리오 1세(재임 590~604년)가 교황이던 때였다. 당시는 야만족 용병 오도아케르 때문에 로마가 멸망하고 겨우 100년 정도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동로마제국은 로마를 차지하기 위해 동고트족 등과 치열하게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연이은 전쟁 탓에 수로가 파괴돼 로마 시내에서는 식수를 구하기 힘들어졌다. 그래서 로마인은 아우렐리아누스 성벽 밖으로 나가 마르스 평원 일대에 흩어져 살아야 했다. 식수조차 얻기 어려울 정도였으니 식량을 구하기는 더 힘들었다. 많은 사람이 먹을 걸 찾지 못해 굶주릴 수밖에 없었다.
이때 포룸 보아리움에 스타티오 아노아에라는 빈민구제시설이 생겼다. 빈민들에게 식량을 나눠주거나 질병을 치료해주던 종교시설이었다. 사람들이 식수 때문에 시내 바깥에서 살았기 때문에 스타티오 아노아에도 로마 외곽이면서 테베레 강 인근인 포룸 보아리움에 자리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 포룸 보아리움은 교통의 요지여서 사람들이 오가기 편했기 때문에 스타티오 아노아에에 식량을 얻으러 가는 빈민은 한두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스 수도사들이여!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에서 새로운 종교 생활을 이어가도록 하시오.”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은 8세기 무렵 교회로 변신했다. 빈민구제시설이던 스타티오 아노아에를 교회로 바꾼 사람은 당시 교황 하드리아노 1세(재임 772~795년)였다. 그는 테베레 강 인근 리파 그라카라는 지역에 살던 그리스 수도사들에게 이곳을 예배 장소로 제공했다.
그리스 수도사들은 동로마제국에서 큰 논쟁을 불러 일으켰던 성상 파괴를 둘러싼 갈등 때문에 콘스탄티노플에서 쫓겨난 사람들이었다. 이런 그리스 수도사가 많다고 해서 교회는 한때 ‘산타 마리아 인 스콜라 그라카’라고 불리기도 했다. 로마에서 상업 활동을 하던 그리스 상인이나 그리스에서 추방당한 사람들이 이 교회를 주로 이용했다.
지금도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 곳곳에는 동로마제국 문화의 영향이 많이 남아 있다. 다른 교회와 달리 애프스(교회 안의 반원형 부분)가 세 개나 되고, 여성 전용 회랑인 마트로네움이 설치된 게 바로 그 흔적이다.
코스메딘이라는 교회 이름이 붙여진 유래를 두고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온다. 먼저 수도사 중에 동로마제국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있던 유명한 수도원인 코시미디온 출신이 많아서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주장이 있다.
교회에 아주 예쁜 장식을 많이 달았기 때문에 그리스어로 ‘아름다운 물건’이라는 뜻인 코스메딘을 이름으로 사용했다는 주장도 있다. 당시 이탈리아에는 똑같은 이름을 가진 교회가 두 곳 더 있었다. 역시 동로마제국에서 쫓겨난 수도사가 살았던 라벤나와 나폴리의 교회였다.
콘스탄티노플의 코시미디온 수도원은 480년 세워져 쌍둥이 성인인 코스마스와 다미아누스에서 헌정됐다. 3세기 말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대에 순교했다는 두 성인은 생전에 의사였다. 그래서 두 사람은 환자를 치료하는 수호성인으로 받들어졌다. 그 덕분에 수도원은 동로마제국에서 유명한 요양원이었다. 기독교로부터 ‘배교자’로 불리는 율리아누스 황제도 이곳에서 병을 치료했다고 전해진다.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 교회가 세워진 곳은 원래 아라 막시마가 있던 장소였다. 아라 막시마는 로마 멸망 직전인 4세기 무렵 없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그 내용을 정확하게 담은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가 왜 아라 막시마 자리에 교회를 건설했는지도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지금 교회 지하에 가면 아라 막시마로 추정되는 제단 흔적을 볼 수 있다. 교회 뒤쪽에서는 아라 막시마 신전에 제물을 바치는 일을 맡은 법무관이 세운 것으로 보이는 명판이 발견됐다. 재미있는 사실은 교회 측에서도 이렇게 주장한다는 점이다.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은 로마에서 가장 오래 전부터 신에게 예배를 올리던 장소입니다.”
헤라클레스는 이교도의 신이었지만 어쨌든 신이었다. 지하묘지의 제단이 아라 막시마라면 교회의 주장은 그냥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역사적, 객관적 사실이 되는 셈이다. 이렇게 따지면 아라 막시마는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성소가 되는 것이다.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 교회는 847년 로마를 강타한 대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교황 니콜라오 1세(재임 858~867년)는 취임하자마자 거의 폐허처럼 내버려져 있던 교회를 재건하라고 지시했다. 이때 성구 보관실과 교황 궁전, 성 니콜라오에게 바치는 예배당이 만들어졌다.
교회는 1084년 로베르 지스카르가 이끄는 노르만족의 로마 약탈 때 큰 피해를 입었다. 다시 교회 재건을 지시한 사람은 30여 년 후에 교황이 된 갈리스토 2세(재임 1119~24년)였다. 공사를 맡은 사람은 교황의 오른팔 노릇을 했던 추기경 알파노였다. 이때 중건한 교회는 다시는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이후 새로운 건물이 추가되고 일부 개축이 이뤄지기도 했지만, 현재 교회는 기본적으로 알파노가 만든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 교회는 1236년 수사신부 전문학교가 됐다. 로마에서 중요한 성소로 여겨졌던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 교회는 16세기 무렵부터 영향력을 잃게 됐다. 로마의 기독교도들은 위치가 나쁜 이 교회에 다니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로마 시내에서 너무 멀었기 때문이었다.
고대 로마 시대에는 시내인 포로 로마노에서 포룸 보아리움으로 금세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중세 시대 로마 시내는 마르스 평원 지역이었다. 지금 판테온, 나보나 광장 등이 있는 곳이다. 이 지역에서 포룸 보아리움까기 걸어가려면 상당히 꽤 멀었다. 지금이야 도로가 잘 돼 있어 멀다는 느낌을 주지 않지만 당시 도로 사정은 지금과 매우 달랐다.
수사신부 수업을 받던 성직자들도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에서 공부하기를 꺼려했다. 당시 로마 의사 4명이 수도신부를 대신해 교황에게 보낸 편지가 그 이유를 설명한다.
‘이곳의 공기는 여러 가지 이유로 매우 나쁩니다. 게다가 바람이 늘 많이 불어 수도신부들이 1시간 30분 이상 공부하는 것은 건강에 매우 해롭습니다. 수도신부들이 교회에서 긴 시간 동안 열리는 예배행사에 참여하지 않아도 되도록 허락해주실 수 없겠습니까?’
이 편지에 교황이 어떤 답을 보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이 교회가 서서히 인기를 잃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 교회는 지금은 로마의 멜카이트 공동체에서 관리한다. 멜카이트 공동체는 비잔틴 예배의식을 따르는 시리아 또는 이라크 가톨릭 신도들로 구성돼 있는 단체다. 비잔틴 예배의식은 과거 안티오크 교구에서 유래한 의식이다. 미사는 세 가지 언어로 진행된다. 그리스어와 아랍어 그리고 이탈리아어다.
보카 델라 베리타
“어서 여기 손을 넣으시오. 당신이 결백하다면 왜 손을 넣지 못한단 말이오?”
쌀쌀한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만드는 15세기 초의 어느 가을날이었다.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 교회 안은 무척이나 스산하면서 소란스러웠다. 얼굴에 노기가 가득한 중년의 사내가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흘리는 중년 여인에게 호통을 치고 있었다. 주변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 호기심 가득찬 시선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당신도 알다시피 보카 델라 베리타는 진실을 밝혀주는 마법을 갖고 있소. 여기서 손을 잘린 사람은 한둘이 아니지. 당신도 그걸 잘 알지 않소? 당신이 다른 남자와 외도를 하지 않았다면 어서 손을 넣으시오.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 나는 알고 싶을 뿐이오.”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중년의 남녀는 부부였다. 사업 때문에 출장을 자주 가는 남편은 아내가 바람을 피운다고 의심하고 있었다. 우연히 그의 집에서 나오는 낯선 남자를 목격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절제할 수 없는 분노에 휩싸인 그는 지방의 행정관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행정관은 우선 주변 사람들을 상대로 목격자 조사를 실시한 뒤 두 사람을 보카 델라 베리타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남편에게 아내의 손을 넣게 하라고 시켰다.
“저는 바람을 피우지 않았어요. 항상 당신만 사랑하고 언제나 집에서 당신을 기다렸어요.”
눈물을 흘리며 주저하던 아내는 절대 손을 넣지 않겠다고 했다. 하지만 남편은 물론 행정관의 다그침에 못이겨 결국에는 보카 델라 베리타에 손을 넣지 않을 수 없었다. 얼굴이 노래진 그녀는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혀 온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외도하지 않았다는 그녀의 말은 거짓말이기 때문이었다.
“으악!”
아내는 보카 델라 베리타에 손을 집어넣자마자 큰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황급히 손을 꺼냈다. 손에서는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 손목이 잘린 것은 아니지만 큰 상처가 나 있었다. 그녀는 크게 다쳤다는 공포 때문에, 거짓말이 들통 났다는 두려움 때문에 그대로 땅바닥에 주저앉아 대성통곡했다. 남편은 더 화난 목소리로 주변 사람들을 돌아보며 외쳤다.
“보카 델라 베리타는 외도해놓고도 거짓말하는 여인을 용서하지 않는다.”
보카 델라 베리타는 지름 175㎝ 두께 19㎝인 원반이다. 무게는 무려 1.3t에 이른다. 보카는 ‘입’, 델라는 ‘~의’, 베리타는 ‘진실’을 뜻한다. 따라서 보카 델라 베리타는 글자 그대로 ‘진실의 입’이다.
15세기 무렵 로마에서는 보카 델라 베리타가 단연 화제였다. 당시 로마인은 ‘진실의 입’이 마법의 힘을 발휘해 거짓말쟁이나 위증자의 손목을 잘라버린다고 믿었다. 실제 그런 일이 벌어진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목격자도 수백 명이나 됐다. 이런 믿음은 18세기까지도 이어졌다. ‘진실의 입’은 부부의 외도 문제를 넘어 진실을 다루는 대부분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역할을 맡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었을까?
‘진실의 입’이 어떻게 해서 거짓말쟁이의 손목을 잘랐는지 정확하게 알려지지는 않았다. 다만 현대 학자들은 이렇게 추정할 뿐이다.
로마 행정관이나 경찰, 재판관은 거짓말쟁이나 위증자의 혐의를 미리 철저하게 조사한다. 범인이 자백을 하지 않고 증거도 찾지 못하면 행정관 등은 그를 ‘진실의 입’으로 데리고 간다.
행정관 등은 미리 ‘진실의 입’ 뒤에 사람을 숨겨둔다. 지름이 175㎝에 이를 만큼 큰 원반인 만큼 적당히 위장하면 뒤에 숨어있어도 들킬 위험은 적었다. 숨은 사람은 칼이나 쇠뭉치, 몽둥이 등을 들고 있다가 거짓말쟁이가 손을 집어넣으면 바로 내리친다. 이렇게 되면 ‘진실의 입’이 범인을 단죄한 게 된다.
멀찌감치 뒤에서 현장을 구경하는 사람들은 진상을 알지 못한 채 거짓말쟁이가 손을 잘린 것만 보고 이렇게 생각한다.
“거짓말쟁이가 ‘진실의 입’의 마법에 또 당했군!”
이처럼 중세 시대에도 ‘진실의 입’을 활용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이후에는 서서히 관심이 식어버렸다. 거짓말쟁이의 손을 자른다는 이야기를 아무도 믿지 않게 된 것이다. 하지만 로마인은 20세기에도 ‘진실의 입’의 전설만큼은 잘 알고 있었다. 그 덕분에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오드리 헵번이 깜짝 놀라는 장면이 탄생할 수 있었다. 로마인들이 ‘진실의 입’을 잊어먹고 있었다면 그런 스토리는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진실의 입’은 원래 보카 델라 베리타 광장에 있었다고 한다. 12세기 무렵에 만들어진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 교회의 외부 장식품에 새겨진 그림에 ‘진실의 입’과 비슷한 모양의 원반이 등장한다. 1590년대 안토니오 템페스타가 그린 로마 지도를 보면 햇빛이 잘 드는 교회 정면 한쪽 벽에 ‘진실의 입’ 같은 큰 원반이 놓여 있는 게 보인다.
원반이 현재 위치로 옮겨진 것은 1631년으로 추정된다. 광장에서도 진실을 밝혀내는 역할을 했던 것인지, 아니면 나중에 그런 전설이 생긴 덕분에 인기를 얻어 교회 안으로 들어간 것인지는 불투명하다.
중요한 것은 고대 로마, 그리스 시대 조각이나 유물 수집에 열광적이었던 당시 귀족이나 교회 측은 ‘진실의 입’에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당시에는 이런 장식이 흔해서 희귀성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진실의 입’ 옆에는 작은 문이 하나 달려 있다. 과거 문지기의 숙소 또는 휴식공간이었던 방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진실의 입’에는 왼쪽 눈에서 시작해 코와 입 부분까지 금이 생겼다. 윗입술은 벌써 깨져 다른 대리석으로 땜질을 했다. ‘진실의 입’을 전랑으로 옮길 때 또는 벽에 걸 때 생긴 상처일 가능성이 크다.
보카 델라 베리타라는 이름은 1450년에 처음 등장했다.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 교회 전랑의 바깥벽에 보카 델라 베리타가 설치됐다’는 내용의 기록이 발견된 것이다. 실제 로마인에게 이런 이름이 알려진 것은 조금 더 이른 시기였을 것으로 보인다.
‘진실의 입이 도대체 어디에 쓰던 물건인지, 언제 누가 만들었는지 아무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다만 BC 1세기 무렵에 만든 것이라는 추정이 나올 뿐이다. ‘진실의 입’과 비슷한 물건은 프랑스 중부 오베르뉴에 있는 폴리냑 성에서 딱 한 번 발견된 바 있다.
전설에 따르면 ‘진실의 입’을 만든 사람은 6세기 실존 인물인 문법학자 베르길리우스 바로다. BC 1세기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시인 베리길리우스와는 다른 사람이다. 전설이니 100% 신뢰할 수는 없다.
‘바로는 어둠의 마법을 할 줄 알았다. 그래서 엄청난 작품을 여럿 만들 수 있었다. 바로는 일 때문에 마을을 떠나있을 때 아내로부터 배신을 당했다. 아내가 불륜을 저지른 것이었다. 소문을 듣고 서둘러 돌아온 그는 아내에게 해명을 요구했다. 당연히 아내는 모든 소문을 부인했다.
바로는 부정한 아내의 잘못을 밝혀낼 수 있는 도구를 만들기로 했다. 그가 마법의 힘을 빌려 만든 시설은 보카 델라 베리타였다. 그는 아내를 데리고 가서 거기에 손을 넣으라고 했다.
“이 입에는 마법의 힘이 담겨 있지. 여기에 손을 넣은 뒤 거짓말을 하면 입이 손을 잘라버리는 거야. 자! 이제 당신의 손을 넣고 외도를 했는지 안했는지 밝히도록 해.”
남편의 말을 믿지 않은 아내는 콧방귀를 뀌면서 당당하게 손을 넣었다.
“나는 외도를 한 적이 없어요.”
순간 ‘진실의 입’이 입을 다물어 버리더니 그녀의 손을 잘라버리고 말았다. 아내의 말은 거짓말이었던 것이다.’
바로가 만든 보카 델라 베리타가 지금의 ‘진실의 입’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불투명하다. 일부에서는 바로의 도구는 다른 것이었을 거라고 말한다. 전설이 살아남았다가 엉뚱하게도 원반 모양의 ‘진실의 입’에 달라붙었다는 이야기다. 어찌 됐든 세월이 흐르면서 ‘진실의 입’은 신뢰를 잃어버렸다. 전설은 그 이유를 이렇게 전한다.
‘중세 시대에 부유한 로마 귀족의 아내가 불륜을 저지르고 있었다. 보다 못한 이웃이 귀족에게 몰래 일러주었다. 아내는 혐의를 완강하게 부인했다. 화가 난 귀족은 아내를 시험하기로 했다. 그는 아내를 ‘진실의 입’으로 데리고 갔다.
두 사람이 싸우는 모습을 보던 이웃들이 증인으로 나서 그들을 따라 갔다. 귀족과 이웃들은 보카 델라 베리타 주변을 둘러쌌다. 그때 한 미친 사내가 나타나더니 귀족의 아내에 입을 맞추고는 깔깔 웃으며 달아나버렸다. 아내는 ‘진실의 입’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
“저는 남편과 방금 저에게 입을 맞춘 불쌍한 미친 사람 말고는 어느 누구하고도 입을 맞춘 적이 없습니다.”
귀족 아내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녀는 남편과 방금 나타난 미친 남자 말고는 입을 맞춘 적이 없었다. 다만 미친 남자가 불륜 상대였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던 것뿐이었다. 당연히 ‘진실의 입’은 그녀의 손을 자르지 않았다.
아내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입증할 수 있었다. 귀족은 아내가 거짓말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사람들 앞에서 체면을 지킨 것에 만족해야 했다. 난처해진 것은 ‘진실의 입’ 뿐이었다. 이 일 이후로 ‘진실의 입’은 신뢰를 잃어버렸다. 그래서 이후에는 어느 누구도 여기에 가서 손을 넣어보는 일은 없게 됐다.’
기독교가 ‘배교자’라고 부른 4세기 로마 황제 율리아누스도 ‘진실의 입’의 시험을 받았다는 전설이 있다. 12세기 독일의 책에 나오는 내용이다.
‘율리아누스는 황제가 되기 전에 깊이 사귀던 여자로부터 의심을 받았다. 그는 결백을 밝히겠다며 ’진실의 입‘에 손을 집어넣기로 했다. 그때 율리아누스는 이상한 목소리를 들었다. 메르쿠리우스라고 자칭하는 악마의 목소리였다.
“로마에 이교도 신들이 다시 살게 해주면 당신의 손을 자르지 않겠소.”
율리아누스는 겁이 났지만 손이 잘리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좋소. 내가 살아난다면 로마를 다시 이교도의 나라로 만들겠소.”
악마는 율리아누스의 손을 자르지 않고 그의 목숨을 살려주었다.'
악마와의 거래 덕분인지 율리아누스의 인생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사촌형이었던 콘스탄티우스 황제로부터 박해를 받던 그는 갈리아의 방위를 책임지는 부황제로 승진하더니, 콘스탄티우스 황제가 죽은 뒤에는 로마 황제로 즉위했다.’
율리아누스는 황제가 되고 난 직후부터 로마에서 이교도의 전통을 되살리기 시작했다. 콘스탄티누스와 콘스탄티우스 황제가 꾸준히 진행해 하던 기독교 우대 정책에 제동을 걸고 그리스와 로마의 전통적 종교를 되살리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기독교는 그에게 ‘배교자’라는 별명을 붙였다. 율리아누스가 악마와 거래했다는 전설은 그를 무척이나 싫어한 기독교로서는 당연히 만들 수 있는 이야기였다. 그가 로마에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은 기독교에게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진실의 입’의 진실
그렇다면 ‘진실의 입’은 과연 어디에 쓰던 물건이었을까?
과거에는 ‘하수구 뚜껑’이었을 거라는 추측이 대세를 이뤘다. 18세기 이탈리아 시인 지오반니 크레스킴베니가 가장 먼저 이런 주장을 내놓았다.
“포로 로마노에서 테베레 강으로 이어지는 하수도인 클로아카 막시마가 포룸 보아리움 옆을 지나고 있지요. 거기서 가져온 하수구 뚜껑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BC 1세기 말 로마 시인 섹스투스 프로페르티우스가 남긴 시도 ‘진실의 입’이 하수구 뚜껑이었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그는 이런 시를 남겼다.
‘비가 온 후에 트리톤의 입은 빗물을 금세 숨겨버린다.’
시를 읽고 ‘진실의 입’을 다시 살펴보면 정말 포세이돈의 아들인 트리톤을 닮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진실의 입’은 너무 무거우면서 깨지기 쉽다는 점에서 하수구 뚜껑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견해가 나오기 시작했다. ‘진실의 입’이 하수구 뚜껑이었다면 많은 사람이 밟고 다녔을 것이고, 엄청나게 닳아야하는 게 순리다. 그런데 ‘진실의 입’을 아무리 살펴봐도 닳은 흔적은 별로 없다.
게다가 ‘진실의 입’은 울퉁불퉁하다. 이런 원반을 하수구 뚜껑으로 썼다면 많은 사람이 걸려 넘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 하수구 뚜껑이라면 비가 왔을 때 물이 많이 흘러갈 수 있도록 구멍이 많아야 하지만 ‘진실의 입’에는 입 부분 말고는 물이 들어가는 구멍이 없다.
“진실의 입에 사용한 석재는 매우 비싼 돌이었습니다. 하수구 뚜껑이 아니라 더 신성한 기능에 사용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온 게 ‘진실의 입’은 신을 형상화한 장식품이었다는 주장이다. 메르쿠리우스, 파우누스, 포르투누스 등 여러 신의 이름이 거론됐다.
그리스신화에서는 헤르메스인 메르쿠리우스는 상업, 여행자, 의사소통, 국경, 행운의 신이었다. 도둑과 사기꾼의 신이었고, 죽은 사람의 영혼을 지하세계로 데려가는 신이었다. 고대 로마 시절 아라 막시마 인근에 폰테 카페나라는 샘이 있었다. 메르쿠리우스에게 바친 신성한 샘이었다. 로마인은 폰테 카페나 샘에 신기한 마법의 힘이 담겨 있다고 믿었다. 샘에 가서 이전에 했던 거짓말을 털어놓고 진실을 밝히면 신으로부터 용서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직업의 특성상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었던 도둑, 사기꾼, 상인이 이 샘을 자주 이용했다. 폰테 카페나가 얼마나 유명했던지 BC 1세기~AD 1세기 로마 시인 푸블리우스 오비디우스가 『연대기』에 재미있는 이야기를 남길 정도였다.
‘포르타 카페나(카페나 문) 근처에 샘이 있다. 이 샘에는 특별한 힘이 있다고 한다. 상인은 거기에서 물을 떠 집으로 가지고 간다. 월계수 잎에 물을 묻혀 가게에서 팔 물건은 물론 입과 머리카락에 뿌리면서 기도를 한다.
“과거에 제가 한 거짓말을 모두 씻어 주십시오. 설혹 메르쿠리우스 신을 거짓 증인으로 삼았더라도 유피테르가 제 목소리를 듣지 않기를 바랍니다. 유피테르의 이름을 도용했더라도, 똑같은 방법으로 다른 신들을 속였을지라도 바람이 그동안 제가 했던 거짓말을 날려 없애버리게 해 주십시오.
내일 다시 거짓말을 하더라도 손님들이 전혀 눈치 채지 못하게 해 주십시오. 많은 부를 주시고, 부를 즐길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손님을 속여 이득을 많이 얻게 해 주십시오.”
메르쿠리우스는 하늘에서 상인의 말을 듣고 빙긋이 웃으며 과거 오르티기아의 황소를 훔쳤던 일을 생각한다.’
파우누스는 고대 로마에서 숲과 평원의 신이었다. 그리스신화에서는 반인간 반염소인 판이다. ‘진실의 입’ 원반의 얼굴에는 뿔이 있고 수염에는 고환이 달려있다. 이것이야말로 파우누스가 상징하는 ‘수컷의 힘’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포르투누스 신은 부두의 신이면서 열쇠, 문, 가축의 신이기도 했다. 로마인은 포룸 보아리움이 있는 마르스 평원에 대규모 곡물창고를 만들어 곡식을 보관했고, 목초지인 이곳에 가축을 풀어 사육했다. 그래서 포룸 보아리움 근처에 포르투누스 신전이 만들어졌다. 이 신전은 지금도 남아 있다. 또 테베레 강은 로마인이 교역의 통로로 활용한 곳이었다. 부두의 신을 위한 신전을 세우는 것은 당연했다.
“신의 모습을 담아 분수를 장식하는 조각품으로 사용한 게 아닐까요?”
‘진실의 입’은 정원의 벽에 붙이기 위해 만든 신의 모습을 담은 분수 조각이었을 거라는 주장도 나왔다. ‘진실의 입’ 양쪽 끝에 구멍이 두 개 있다. 두 구멍은 원반을 분수의 벽에 붙일 수 있게 하려고 만든 것이라는 게 주장의 요지였다. ‘진실의 입’이 원래 직각으로 세워진 구조물의 표면에 세워졌을 거라는 점을 보여주는 여러 징후도 이 주장의 근거다.
“진실의 입은 우물에서 사용하던 뚜껑이었을 겁니다.”
엉뚱한 주장도 나왔다. ‘진실의 입’은 아주 신성한 용도로 사용되던 우물의 뚜껑이었다는 이야기다. 물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종교에서 신성한 물질이었다. 심지어 오늘날 기독교에서도 성수를 사용한다. 고대 로마 시대에는 여러 신전에 신성한 물을 제공하는 우물이 있었다. 수질을 보호하기 위해 우물에는 뚜껑이 필요했을 것이다.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 교회 근처에 있는 티베리나 섬에 성 바르톨로미오 교회가 있다. 그 자리에는 원래 그리스에서 건너온 의술의 신인 아에스쿨라피우스에게 헌정한 아에스쿨라피우스 신전이 있었다.
신전에는 우물이 있어 환자를 치료하는 데 사용됐다. 고대 로마가 멸망한 뒤 아무도 신전을 돌보지 않는 바람에 우물은 심각하게 오염됐다. 그래서 중세 시대에는 우물을 사용하지 않게 됐다. 지금도 성 바르톨로미오 교회에 가면 우물을 볼 수 있다. ‘진실의 입’은 그 우물의 뚜껑이었던 것일까?
“우물 뚜껑으로 사용하기에는 ‘진실의 입’이 너무 작지 않나요?”
이렇게 반박하는 사람도 있다. 이들은 ‘진실의 입’을 우물 뚜껑이 아니라 우물에서 떠온 물을 담아놓는 통의 뚜껑이라고 주장한다. ‘진실의 입’에 있는 구멍 근처에는 부식 흔적이 없다. 이것이야말로 ‘진실의 입’이 물통 뚜껑이었다는 증거라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이들은 더 나아가 이렇게 말한다.
“진실의 입은 바다의 신 오케아노스의 얼굴을 형상화한 물통 뚜껑이었을 겁니다. 측면에 있는 구멍 두 개는 균형을 맞추기 위해 뚫은 것이었고요. 눈과 콧구멍에 있는 여러 구멍은 물이 흘러나오는 구멍이었을 수 있지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진실의 입’은 티베리나 섬에 있었던 유피테르 유라리우스 신전에서 사용하던 물통 뚜껑이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나왔다. 유피테르 유라리우스 신전은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그곳에는 산 지오반니 칼리비타 교회가 생겼다.
고대 로마인은 유피테르 유라리우스 신전에서 신성한 맹세를 했다. 여기서 한 맹세를 어기면 법을 위반한 것처럼 엄청난 처벌을 받았다. ‘진실의 입’은 맹세를 하던 신전에서 사용한 것이었기 때문에 진실과 관련한 전설이 만들어진 거라는 게 이들의 추정이다.
전설과 신화는 시대를 반영하는 이야기다. ‘진실의 입’이 로마인 사이에 회자됐다는 것은 ‘진실’이 필요한 시대였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베르길리우스 바로가 진실을 가려내는 도구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창조한 것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밝힐 방법을 사람들이 갈구했다는 뜻이었다.
‘진실의 입’이 거짓과 진실을 제대로 가려냈다는 것은 그나마 그 시대에는 진실을 밝혀낼 수 있는 양심이 존재했고, 나중에 ‘진실의 입’이 무용지물이 됐다는 것은 이제 온 세상에 거짓이 가득 찼거나 사람들이 세상을 불신한다는 걸 상징한다.
‘진실의 입’ 앞에는 늘 관광객이 줄지어 서 있다. 그들은 ‘진실의 입’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기도 하고, 때로는 입으로 손을 넣어보기도 한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진실을 알아보려는 것일까, 아니면 진실은 결코 밝혀지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려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