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eo Oct 22. 2020

마우솔레움(1)

로마인의 장례식


 ‘아우구스투스의 장례식은 포로 로마노에서 시작했다. 그의 시신은 상아와 황금으로 만들었고 보라색과 황금색으로 제작한 덮개를 씌운 긴 장의 침상 위에 안치됐다. 개선장군 복장을 한 아우구스투스의 밀랍인형이 보였다. 차기 집정관이 팔라티노 언덕의 황궁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원로원에서 가져온 황금 조각상과 개선식 전차 조각상도 보였다.


 뒤에는 아우구스투스 조상들의 초상이 있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초상은 보이지 않았다. 카이사르는 이미 신격화돼 다른 조상들보다 한 단계 높은 존재였다. 로물루스와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등 과거 자랑스러웠던 로마 영웅들의 초상도 보였다. 장의침상을 로스트라에 놓은 뒤 티베리우스가 추도사를 낭독했다.


 “원로원은 아우구스투스를 나라의 지도자이자 로마의 국부로 추앙했습니다. 원로원은 많은 존경의 표시와 수많은 집정관직 헌정으로 그의 영광을 드높였습니다. 마침내는 그를 신격화된 통치자로 만들고 불멸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우리는 아우구스투스를 잃었다고 슬퍼해서는 안 됩니다. 대신 그의 영혼을 신의 영혼으로 영원히 찬미해야 합니다.”


 원로원의 여러 의원이 아우구스투스의 장의 침상을 어깨에 멨다. 미리 원로원에서 결의한 대로 장의 침상은 개선문 한가운데를 지나갔다. 장례 행렬에는 원로원 모든 의원과 기사계급, 그들의 부인, 근위대, 모든 로마 시민이 참가했다.


 아우구스투스의 시신은 마르스 평원에 마련된 화장용 장작더미 위에 놓였다. 모든 제관이 장작더미를 둥글게 에워쌌다. 그 뒤로 원로원과 기사계급이 자리를 잡았다. 수비대 병사들이 장작더미를 세 바퀴 돈 뒤 과거 전쟁에서 받았던 모든 개선 기념품을 장작더미 위에 던졌다.


 원로원 규정에 따라 여러 백인대장이 장작더미에 불을 붙였다. 불길이 정점에 이르자 묶여 있던 독수리 한 마리가 방사됐다. 아우구스투스의 영혼이 독수리의 등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기를 기원하는 뜻에서였다. 화장이 끝나자 모든 참석자는 집으로 돌아갔다. 황후 리비아는 닷새 동안 자리를 지킨 뒤 유해를 모아 마우솔레움에 안치했다(카시우스 디오 『로마사』).’



 고대 로마에는 황제 집안의 공동묘지가 두 개 있었다. 아우구스투스 마우솔레움과 하드리아누스 마우솔레움이다. 하드리아누스 마우솔레움의 이름은 산탄젤로 성으로 바뀌었다.


 두 마우솔레움은 테베레 강을 사이에 두고 거의 45도 각도로 비스듬하게 마주보고 있다. 아우구스투스 마우솔레움은 옛 영화를 완전히 잊은 채 거의 폐허처럼 변해버렸다. 산탄젤로 성은 옛 모습과는 많이 달라졌지만 여전히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마우솔레움은 건축물 형태의 대형 무덤이다. 왕은 물론 정치적으로 중요한 사람의 시신이나 유해를 안치하기 위해 만든 아주 큰 구조물을 의미한다. 로마에서 시작한 건축물은 아니지만 로마의 두 무덤이 워낙 유명해 대부분 사람은 마우솔레움이라고 하면 로마를 먼저 떠올린다.


 로마의 마우솔레움을 들여다보면 당대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고대 로마인의 장례, 무덤 문화와 사후세계관을 엿볼 수도 있다. 하드리아누스가 세상을 떠날 무렵 남긴 ‘작은 영혼’이라는 시와 함께 로마의 무덤으로 들어가 본다.


 ‘작은 영혼이여 가여운 나그네여

갈 곳 없는 떠돌이여

이제는 어디에 머물려 하는가

모든 게 암울하고 모든 게 외롭구나

언제나 즐거움 가득했던

인생길 끝자락에 서니’




로마의 장례식과 사후세계



 고대 로마인이 죽음과 사후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은 매우 독특했다. 영혼이 불멸이라고 생각했고 사후세계를 믿었다는 점은 당시 다른 사회와 비슷했다. 하지만 로마인은 법의 민족답게 사람이 죽었을 때에도 절차와 규정을 매우 꼼꼼하게 따졌다는 게 특징적이다. 그들은 심지어 사후세계에도 법을 적용했다. 잘못을 저질러 지옥에 가더라도 징역형처럼 일정 기간만 처벌을 받는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로마인이 생각한 사후세계는 이런 것이었다.


 ‘사람이 죽으면 유피테르 신이 보내는 메르쿠리우스 신을 만나게 된다. 그는 신의 안내로 스틱스 강에 간다. 저승을 아홉 바퀴 도는 강이다. 거기서 나룻배를 모는 뱃사공 카론에게 뱃삯을 지불하고 강을 건넌다.


 이후 저승 심판관 미노스, 아이나이우스, 라디만타스를 만나 삶을 심판받는다. 망자가 생전에 전사였거나 영웅이었다면 엘리시움 평원으로,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아스포델 평원으로 간다. 생전에 사회에 해악을 끼친 범죄를 저질렀다면 타르타로스로 간다. 땅에서 망치를 떨어뜨리면 열흘 뒤에야 바닥에 닿을 만큼 깊은 곳이다.


 로마인은 기독교처럼 영원한 지옥 같은 것은 믿지 않았다. 지옥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기독교의 지옥과는 조금 달랐다. 범죄자는 타르타로스에서 푸리스 신에게 형벌을 받는다. 그가 사회에 끼친 해악에 걸맞은 기간 동안이다. 쉽게 말해서 징역형이다. 무기징역형은 아니다. 누구라도 영원히 지옥에서 고통을 받는 일은 없다.


 로마인은 법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민족이다. 사람이 잘못을 저지르면 거기에 걸맞은 벌을 받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지옥에서도 똑같을 거라고 그들은 믿는다. 지옥에서 일정기간 벌을 받으면 풀려나 아스포델 평원에 간다.’


 로마인은 반드시 망자에게 적당한 장례를 치러주고 무덤도 만들어 주어야 저승에 들어갈 수 있다고 믿었다. 장례와 무덤을 얻지 못한 망자는 저승 입장을 거부당해 연옥을 떠돌아다니며 영원히 고통스럽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로마인은 누구라도 반드시 무덤은 갖게 해 주었다. 로마인이 전쟁터에서 숨진 병사의 시신을 꼭 수습해 공동으로라도 묻어준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가끔 엄청난 증오의 대상이었던 인물이 죽으면 시신을 테베레 강에 던져버리곤 했다. 무덤을 만들어주지 않음으로써 안식을 얻지 못하게 해 저승과 이승 사이에서 영원히 떠도는 고통을 주려는 뜻이었다.


 2세기 오현제 중 마지막 황제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아들 콤모두스가 황제 자리에 올랐다가 폭정과 악정 때문에 암살당했을 때, 로마인과 원로원은 시신을 강으로 끌고 가 던져버렸다. 나중에 황제 자리에 오른 페르티낙스가 은전을 베푼 덕분에 콤모두는 겨우 하드리아누스 마우솔레움 귀퉁이에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장례식은 삶에서 죽음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거쳐야 하는 통과 의례이자, 신에게 저승으로 내려간다고 알려주는 신고식이었다. 로마의 장례식을 한꺼번에 상세하게 기술한 책은 없지만, 여러 기록을 모아 정리해보면 장례식은 장례 행렬, 화장이나 매장, 축사, 축제, 기념의 다섯 과정으로 구성됐다.


 특정인이 죽음을 앞두고 있으면 그의 가족은 여러 친척에게 연락을 보내 모이게 했다. 로마인은 인간의 호흡이 영혼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면 가장 가까운 가족, 친척이 망자에게 입을 맞추거나 입에 숨결을 불어넣어주는 방법으로 몸에서 떠나는 영혼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이어 망자의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내고, 눈을 감겨주고 입을 닫아주었다.


 가족, 친척은 곧바로 망자의 이름을 부르면서 곡을 시작했다. 망자의 시신은 천을 깐 바닥에 내려놓고 물로 씻긴 뒤 기름을 발랐다. 갓난아기가 태어났을 때 하던 것과 똑같은 절차였다. 로마인의 생각은 이러했다.


 “태어나는 것과 죽는 것 모두 새로운 시작이지요. 태어나는 것은 삶의 시작이고, 죽는 것은 사후세계의 시작이랍니다.”


 망자가 지하의 저승세계로 갈 때 뱃사공 카론에게 뱃삯을 지불하라는 뜻에서 작은 동전 하나를 입에 얹었다. 망자는 내부정원에 가져다놓은 침상에 눕혔다. 다리는 문 쪽을 향하게 했다.


 망자에게는 살아있을 때 애용했던 옷을 입혔다. 평민이나 큰 공직을 거치지 않은 사람에게는 하얀 토가를, 행정관을 거친 사람에게는 공식 의복을 착용했다. 그가 생전에 전쟁에서 용맹을 발휘해 풀잎관을 받았다면 침상을 풀잎이나 꽃으로 장식하기도 했다. 망자가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다면 문 앞에 편백나무 가지를 걸어놓기도 했다.


 장례식은 공공 장례식과 개인 장례식으로 나뉘어 거행됐다. 공공 장례식은 푸누스 푸블리쿰 또는 인딕티붐, 개인 장례식은 푸누스 타키툼 또는 플레베이움, 트란슬라티티움이라고 불렀다. 망자는 죽기 전에 미리 유언장에 장례비용을 남기는 게 일상적이었다. 만약 유언장에 아무런 내용이 없다면 장례를 치를 책임은 유산을 물려받게 되는 사람에게 돌아갔다.


 장례식은 망자가 눈을 감은 지 8일째 되는 날 치러졌다. 로마 초창기에는 모든 장례식은 밤에 거행됐다. 시간이 흐르면서 상황은 조금씩 바뀌었다. 유력자나 부자의 장례 행렬은 낮에 집에서 빠져나갔다. 화려한 장례식을 자랑하기 위해서였다. 비용을 댈 돈이 없는 가난한 사람은 밤에 매장됐다. 참석자가 별로 없는 장례 행렬이 부끄러웠기 때문이었다.


 망자의 시신은 긴 침상에 앉힌 채 운구했다. 식사를 할 때나 휴식할 때 몸을 누이거나 기댈 수 있는 소파 같은 침상이었다. 부자일 경우 의자를 상아로 만들거나 황금색으로 칠하기도 했다. 가난한 사람의 경우 단순히 관에 넣어 옮겼다.


 침상은 망자의 가장 가까운 친척 여럿이 어깨에 메고 날랐다. 때로는 해방노예가 운구하기도 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장례식에서는 여러 행정관이, 아우구스투스의 장례식에서는 원로원 의원들이 침상을 날랐다.


 장례 행렬 맨 앞에는 여러 가지 악기를 다루는 음악가가 섰다. 이들은 아주 슬픈 곡조의 음악을 연주하며 행렬을 이끌었다. 이어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는 여성 서너 명이 뒤를 따랐다. 망자를 칭찬하는 노래를 부르거나 통곡하는 역할을 하도록 돈을 주고 고용한 사람이었다. 연극배우나 어릿광대도 따라갔다. 이들은 망자가 살아있을 때의 모습처럼 꾸몄고, 장례 행렬이 이어지는 동안 계속 망자의 말투나 행동을 흉내 냈다.


 망자가 자유를 허용한 해방노예는 자유를 상징하는 필레아티라는 모자를 쓰고 그 뒤를 이었다. 사람에 따라 장례 행렬에 참가한 해방노예 수는 엄청날 정도였다. 어떤 경우에는 장례 행렬 규모를 키우려고 망자가 눈을 감기 전에 일부러 일부 노예를 풀어주기도 했다.


 망자의 시신 앞에는 밀랍 가면(이마고)을 쓴 사람이 걸어갔다. 망자의 선조를 상징하는 가면이었다. 망자의 시신 뒤에는 가족, 친척이 울면서 따라갔다. 아들은 머리에 베일을 썼고, 딸은 아무것도 쓰지 않고 머리를 흐트러트린 채 걸어갔다. 평소 생활과는 반대였다. 유족은 아주 낮은 목소리로 울거나 탄식했으며, 여자는 가슴을 치거나 뺨을 긁기도 했다.


 망자가 아주 높은 신분을 가진 사람이었다면 장례 행렬은 포로 로마노를 지나갔다. 연단인 로스트라 앞에 잠시 멈춰 유족이나 지인 중 한 명이 추도사를 읽었다. 이런 관습은 왕정을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건설한 유니우스 브루투스의 장례식 때 도입됐다. 당시 그의 동료 집정관이었던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가 추도사를 낭독했다.


 유명한 여성 장례식에서도 추도사를 낭독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부인이었던 고모가 세상을 떠나자 직접 추도사를 읽었다.


 고대 로마 초창기에는 망자의 시신을 매장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공화정 말기에는 화장이 대세를 이뤘다. BC 2세기 북부에서 쳐들어온 갈리아 군대를 물리쳐 평민의 영웅이 된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매장됐다. 반면 같은 시대에 살았던 마리우스의 앙숙인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화장됐다. 화장 문화는 4세기 기독교 시대부터 점점 사라졌다.


 벼락에 맞아 죽은 사람은 화장할 수 없었다. 대신 죽은 그 자리에 묻어야 했다. 이를 매우 신성하다는 뜻인 비덴탈이라고 불렀다. 치아가 생기지 않은 어린이도 화장할 수 없었다. 매장할 경우에는 석관에 넣어 묻었다. 이런 관을 사크로파구스라고 했다. 나중에는 모든 종류의 관이나 무덤을 다 이렇게 부르게 됐다.


 포로 로마노에서 나온 장례 행렬은 시 외곽의 무덤이나 화장 장소로 향했다. 망자의 시신을 태우는 장소는 부스툼이었다. 로마에서는 법에 따라 죽은 사람의 시신이나 유해를 시내에 묻지 못하게 돼 있었다. 시신이나 화장한 유해를 담은 항아리는 로마 바깥에 묻는 게 법이었다.


 위생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종교적으로 시신은 오염돼 신성하지 못하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대에 발견된 명문에 따르면 로마 시내에 몰래 유해를 묻으면 벌금으로 금화 40아우레우스를 내야 했다. 유해를 묻은 땅은 국가에 압수당했다.


 시내에 묻는 예외적인 경우도 있었다. 공화정의 영웅으로 칭송받은 푸블리콜라 발레리우스 등이었다. 그들의 후손도 시내에 묻힐 권리를 인정받았지만 권리를 행사한 후손은 한 명도 없었다. 베스타 신전에서 성스러운 불을 모시는 여사제인 베스탈 처녀와 황제도 시내에 묻힐 수 있었다. 베스탈 처녀와 황제는 법의 제약을 받지 않는 신성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화장을 할 경우에는 장작더미를 쌓아 시신을 태웠다. 장작더미는 제단 형식으로 만들었는데, 정사각형이어야 했다. 장작더미 주변을 정리하거나 청소하는 것은 금기사항이었다. 가끔 장작더미 위에 편백나무 잎 등을 얹기도 했다.


 미리 준비한 장작더미 위에 시신과 함께 시신을 운구해 온 침상을 놓았다. 화장 준비가 끝나면 가장 가까운 가족, 친척이 얼굴을 뒤로 돌린 채 장작더미에 불을 붙였다. 불길이 치솟기 시작하면 다양한 종류의 향수를 불 속으로 던졌다. 원래는 불법이었지만 대부분 장례식에서 관행처럼 이뤄졌다. 평소 망자가 사용하던 오일 잔, 각종 장식품, 옷, 접시 등을 함께 던져 태우기도 했다.


 때로는 동물을 죽여 망자의 시신과 같이 태우기도 했다. 로마 초창기에는 노예나 전쟁포로를 죽여 태우는 일도 있었다. 망자의 영혼을 상징하는 신인 마네스가 피를 좋아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는 망자를 화장하는 순간 주변에서 검투사 경기를 진행하기도 했다.


 장작더미를 태울 때에는 포도주를 붓기도 했다. 망자의 재와 뼈는 가장 가까운 가족, 친척이 수습했다. 이때 재와 뼈에 향수를 뿌려 항아리에 담았다. 영국 런던 대영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유해 항아리 대부분은 대리석, 설화 석고, 구운흙으로 만든 것이다. 모양은 대개 정사각형이나 원형이었다. 항아리에는 명문이 새겨졌다. 명문은 ‘신성한 손으로’라는 뜻인 ‘Dis Manibus Sacrum’을 나타내는 ‘D.M.S. 또는 ’D.M.‘이라는 약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 뒤에 망자의 이름과 생존 연도가 담겼다.


 황제 또는 유명한 장군, 군인의 장례식에서는 함께 전쟁을 치른 병사들이 장작더미 주변을 세 바퀴 돌기도 했다. 티베리우스 황제의 동생인 드루수스가 게르마니아 지역에서 낙마사고로 숨지자 그를 따랐던 병사들은 이후 해마다 추도식을 열고 무덤을 세 바퀴 돌았다고 전해진다.


 화장을 마친 유해는 화장한 장소에 바로 묻기도 했고, 다른 장소에 만든 무덤에 옮겨 묻기도 했다. 묘지는 공동묘지와 개인 묘지로 나뉘었다. 공동묘지는 두 종류였다. 하나는 유명한 사람을 묻는 공동묘지였다. 이곳에서 치러지는 장례비 및 매장비는 국가 비용으로 부담했다. 다른 하나는 가난한 사람의 공동묘지였다. 묘지를 구할 돈이 없는 사람을 묻는 곳이었다.


 유명 인사를 위한 공동묘지는 마르스 평원에 있었다. 원로원으로부터 승인을 받아야 이곳에 묻힐 수 있었다. 마르스 평원에 묻힌 유명인사의 묘지는 화려한 장식으로 꾸미는 게 일상적이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이곳에 마우솔레움을 만든 것은 이 때문이었다. 황제라고 해서 마음 내키는 대로 아무 곳이나 골라 마우솔레움을 건설한 게 아니라 법에 따른 것이었다. 다만 황제였기 때문에 규모가 컸을 뿐이었다.


 가난한 사람의 공동묘지는 처음에는 에스퀼리노 평원에 마련돼 있었다. 인근 지역 주민들이 위생적으로 해롭다고 반발하는 바람에 나중에는 로마 외곽 먼 곳으로 옮겨졌다. 공동묘지 부지는 아우구스투스의 친구이자 고문이었던 마이케나스에게 넘어갔다. 그는 그곳에 대저택을 지었고 정원도 만들었다.


 나중에 네로 황제가 팔라티노 언덕에 새로 지은 황궁을 이 정원과 연결시켰다고 한다. 마이케나스 궁전과 정원은 60년에 발생한 로마 대화재에 등장한다. 수에토니우스는 『열두 명의 카이사르』에서 ‘네로는 (마이케나스 정원의)마이케나스 탑에서 로마가 불타는 것을 보면서 열광했다’고 적었다. 이 글 한 줄 때문에 여러 영화와 소설에 네로가 미친 황제로 묘사되곤 했다.


 개인 묘지는 로마에서 외곽으로 이어지는 여러 도로 주변에 만들어졌다. 아피아 가도가 대표적인 길이었다. 로마를 둘러싼 세르비우스 성벽의 출입문 바로 앞에서부터 무덤이 얼마나 많았던지 10㎞에 이르는 무덤의 길이 조성될 정도였다.


 개인 무덤은 대개 무덤의 주인이 살아 있을 때 만들었다. 무덤은 세풀처라고 불렀다. 큰 무덤은 마우솔레움이라고 했다. 부자의 무덤은 대리석으로 건설했다. 묘지 주변은 철제 난간이나 벽돌 벽으로 둘러쌌다. 때로는 나무를 주변에 심기도 했다. 묘지의 크기와 모양은 망자의 재산과 취향에 따라 달랐다. 그래도 땅에 쌓은 좌대에 건축물을 올리는 게 일반적이었다.


 큰 묘지에는 유해 항아리를 넣을 수 있는 벽감이 여러 개 만들어져 있는 게 보통이었다. 나중에 남편, 부인, 아들도 들어오라는 뜻이었다. 이런 벽감을 ‘비둘기 집’이라는 콜룸바리움이라고 불렀다. 모양이 마치 비둘기 집처럼 생겼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로마 시 외곽 도로 곳곳에 콜룸바리움 유적이 남아 있다.


 남의 무덤을 손상시키는 것은 종교적으로 신을 모독하는 일이었을 뿐만 아니라 심각한 범죄 행위였다. 이런 일을 저지른 사람은 처벌을 받았다. 남의 무덤에서 몰래 유해를 옮기는 것은 더 심각한 범죄였다. 이 경우에는 범죄자를 사형시키거나 로마에서 영구 추방시키기도 했다.


 로마인은 망자의 시신은 오염됐다고 믿었다. 시신을 로마 시내에 묻지 못하게 한 것은 물론 장례식을 치른 사람에게는 장례식장과 집에서 두 차례에 걸쳐 세례식을 거행하게 했다.  먼저 망자의 재와 뼈를 항아리에 넣으면 장례식에 참석한 사제가 성스러운 물을 올리브나무나 월계수 가지에 묻혀 참석자 모두에게 뿌렸다. 혹시 모를 부정을 막기 위한 액막이 세례였던 것이다.  장례식을 마친 가족, 친척은 집에서 다시 수피티오라는 세례식을 거쳐야 했다. 이때에는 한 사람을 정해 모두에게 물을 끼얹게 했다. 차례대로 불 위를 지나가기도 했다. 이어 물에 적신 빗자루로 집안 구석구석을 청소했다.


 장례식을 마쳤다고 모든 게 끝난 것은 아니었다. 이후 9일 동안 추도기간을 거쳐야 했다. 이 기간이 지나면 노벤디알레라는 희생제를 치렀다. 이 행사를 마치면 드디어 모든 장례 절차가 끝나게 된다.


 유력 인사의 장례식이 끝난 뒤에는 유족이 자선사업을 펼치기도 했다. 대개 밀가루를 로마 시민에게 나눠주곤 했다. 이를 비스케라티오라고 불렀다. 때로는 사람들을 불러 모아 잔치를 베풀기도 했다. 검투사 경기를 치르는 관습이 생긴 것도 이 때문이었다.


 매년 아버지 제삿날에 축제나 대형 행사를 열기도 했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아들인 파우스투스는 해마다 제삿날에 아버지를 기리는 검투사경기를 개최했다. 이런 행사에 참가하는 사람은 모두 흰옷을 입는 게 예의였다.

 로마인에게는 부모나 친척의 무덤을 방문하는 축제일이 있었다. 이를 파렌탈리아라고 했다. 2월 13일에 시작해 9일간 이어지는 행사였다. 로마인은 가족을 국가의 기본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 민족이었다.


 축제 개막식은 성대하게 치렀다. 베스탈 처녀가 타르페이아 바위에서 로마를 건국한 조상에게 바치는 의례를 거행했다. 하지만 축제의 나머지 일정은 대부분 집안에서 가족끼리 조촐하게 치르는 게 대부분이었다. 이날 가족은 무덤을 찾아가 다양한 제물을 바치거나 선물을 놓고 오기도 했다. 이날 바친 제물은 고기, 우유, 포도주, 꽃다발 등이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