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키아의 수도 크산토스에 쳐들어간 마우솔로스는 놀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크산토스 한가운데에 높이가 10m 정도 되는 큰 건물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아래쪽에 4~5m 정도의 기단이 있는데다 올라가는 계단도 없는 걸로 볼 때 신전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주택이라고 할 수도 없는 건물이었다.
“20년 전에 세상을 떠난 아르비나스 선왕의 무덤이라고 합니다. 10년 전에 완성해 그의 유해를 모시고 있답니다.”
마우솔로스는 아르비나스의 무덤을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정말 웅장하고 훌륭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전쟁을 하느라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지만 이렇게 멋진 무덤은 본 적이 없었다.
‘이렇게 장엄하고 아름다운 무덤을 할리카르나소스에도 만들어야겠어. 카리아를 역사상 최고의 강국으로 만든 나라면 이정도 무덤은 가지는 게 합당하지.’
마우솔로스는 BC 4세기 고대 그리스 지역에 있던 카리아의 왕이었다. 카리아는 리디아의 남쪽, 프리기아의 남서쪽, 리키아의 북쪽에 있던 나라였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터키의 아나톨리아 지방이며 로도스 섬을 마주보고 있는 곳이다.
카리아는 원래 페르시아의 속국이었다. 페르시아에서 태수가 파견돼 이 지역을 다스렸다. 마우솔로스의 아버지 헤카톰누스는 원래 페르시아 태수였다. 그는 세력을 키워 자치 왕국을 만들었다. 형식적으로는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지만 사실상 독립국이었다.
왕 자리를 물려받은 마우솔로스는 아버지처럼 아주 진취적이고 전투적인 사내였다. 그는 로도스 섬을 정복하는 등 활발한 영토 확장 전쟁을 벌였다. 그는 리키아의 수도인 크산토스에 쳐들어가기도 했다. 엄청난 규모의 무덤을 보고 놀란 것은 이때의 일이었다.
마우솔로스가 본 것은 BC 390~370년 크산토스 등 리키아를 다스린 아르비나스 왕의 무덤이었다. 이름은 네레이드 탑이었다. 이 무덤에는 바다의 요정인 네레이드의 실물 크기 석상이 달려 있었다. 그래서 네레이드 추모탑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네레이드 추모탑은 조각 부조로 장식한 기단 위에 세운 그리스 신전 모양 건축물이었다. 외양은 신전을 닮았지만 실제로는 조로아스터 교의 기준에 따라 만든 무덤이었다. 두꺼운 석재를 사용했고, 땅에 만든 대좌 위에 건설했고, 유리창을 하나도 만들지 않는 게 조로아스터 방식이었다.
시신이나 유해를 땅에 묻지 않고 건물을 지어 안치하는 방식은 크산토스 이전에 다른 지역에도 있었다.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 인도의 타지마할이 고대에 가장 유명한 안치 방식의 건축물이었다.
“크산토스에 아주 장엄한 무덤이 있더군. 20년 전 세상을 떠난 선왕을 모신 곳이라는군. 나는 리키아의 크산토스뿐만 아니라 주변 지역을 모두 정복한 지배자요. 나에게도 그처럼 훌륭한 무덤이 있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오. 지금부터 큰 무덤을 만들기로 하겠소.”
마우솔로스는 귀국한 뒤 수도인 할리카르나소스에 엄청난 규모의 무덤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스는 물론 주변 여러 나라에서 뛰어난 건축가를 불러 일을 맡겼다 그런데 그는 BC 353년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무덤이 제대로 모양을 갖추기도 전이었다.
마우솔로스에게는 부인이 있었다. 그녀의 여동생이자 왕비인 아르테미시아였다. 남편을 정말 사랑했던 그녀는 슬픔에 사로잡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장례식에서 마우솔로스를 화장한 그녀는 남편의 재와 뼛가루를 향신료와 섞어 물에 타 마셔버렸다. 주변에 서 있던 사람들은 깜짝 놀라거나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남편과 영원히 한 몸을 이룬 거야. 이제 우리는 다시는 헤어지지 않을 거야.’
아르테미시아는 남편이 죽기 전에 착공한 무덤을 서둘러 완공하기로 했다. 그녀는 에페소스에 있는 아르테미스 신전을 건축한 당대 최고 건축가인 스코파스, 필레우스, 사티루스를 초빙해 무덤을 만들게 했다. 그리스 최고 조각가로 유명했던 레오카레스, 브리아시스, 티모테우스와 손재주가 빼어났던 예술가 수백 명을 데려와 무덤을 꾸미게 했다.
아르테미시아는 무덤에 화장한 남편의 유해를 담은 항아리를 안치했다. 그리고 죽은 동물 사체를 무덤으로 이어지는 계단에 가져다 놓은 뒤 각종 돌과 잡동사니로 계단을 막아버렸다. 이렇게 하면 도벌꾼들이 남편의 무덤을 파헤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녀는 남편의 무덤을 완성하고 3년 뒤 남편 곁으로 올라갔다.
마우솔로스의 무덤은 엄청난 건축물이었다. BC 2세기 말 그리스 역사학자였던 디오도로스 시쿨루스는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 곳곳을 여행했다. 그는 여러 나라에서 본 엄청난 건축물 중에서 일곱 개를 골라 ‘세계의 7대 불가사의’라는 걸 처음 선정했다. 이집트 기자의 피라미드, 바빌론의 공중 정원,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 올림피아의 제우스 석상, 로도스 섬의 거대 석상, 알렉산드리아의 등대였다. 여기에 마우솔로스의 무덤도 포함됐다.
BC 2세기 무렵 폼페이우스가 아시아를 정벌한 뒤 할리카르나소스는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됐다. 그리스나 마케도니아로 들어가는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에 로마 군인들이나 상인들이 늘 이곳을 지나다니게 됐다. 그들은 마우솔루스의 무덤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때부터 로마인은 큰 무덤을 마우솔레아라고 부르게 됐다. 이것이 나중에 마우솔레움으로 변했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은 마우솔레아의 무덤을 할리카르나소스의 마우솔레움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일본의 영향을 받은 탓인지 마우솔레움을 영묘라고 번역한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을 보면 영묘를 ‘선조의 영혼을 모신 사당’이라고 설명해놓았다. 그렇다면 마우솔레움을 영묘라고 번역하기는 곤란할 것 같다. 망자를 화장한 유해를 항아리에 담아 보관한 곳이니 차라리 황실 봉안당이라고 하는 게 낫지 않을까?
로마에서는 아우구스투스와 하드리아누스만 마우솔레움을 만든 게 아니었다. 두 황제의 마우솔레움 외에 로마에 있는 다른 마우솔레움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4세기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를 모신 헬레나 마우솔레움이다.
이 무덤은 326~330년 사이 로마 동남쪽 비아 카실리나에 만들어졌다. 원래는 콘스탄티누스가 그의 무덤으로 사용하려고 만들었지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대신 모셨다고 전해진다. 물론 지금도 남아 있는 유적이다.
로마의 귀족이나 부자도 마우솔레움을 만들었다. 로마 지하철 역 중에 피라미데라는 곳이 있다. 이곳에 가면 ‘케스티우스의 피라미드’라는 건축물을 볼 수 있다. BC 1세기 행정관이었던 가이우스 케스티우스의 무덤이다. 이곳도 일종의 마우솔레움이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로마 시내에서 곳곳으로 뻗어나가는 도로 주변의 공동묘지에도 작은 마우솔레움이 세워졌다. 지금도 로마 남쪽으로 이어지는 아피아 가도 일부 지역에서는 개인용 마우솔레움 유적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