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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Oct 23. 2020

마우솔레움(3)

아우구스투스의 프로퍼갠더




 “저는 로마를 떠나지 않을 겁니다. 제가 로마이고 로마가 바로 저이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투스는 BC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여왕의 연합군을 누르고 로마의 1인자 자리에 올랐다. 그가 가장 먼저 추진한 사업은 다름 아니라 무덤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만든 게 마르스 평원의 마우솔레움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황제로 즉위하기 한 해 전인 BC 28년 무덤을 완성했다. 겨우 서른다섯 살 때였고 세상을 떠나기 42년 전이었다. 아무리 로마인에게 죽기 전부터 무덤을 만드는 관습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아우구스투스는 왜 그렇게 젊은 나이에 서둘러 무덤부터 만든 것일까?


 과거 역사학자들은 마우솔레움의 역사와 그곳에 묻힌 황제 가족 이야기에 집중했다. 21세기 들어 그런 경향은 바뀌었다. 아우구스투스가 왜 마우솔레움을 만들었는지 동기를 알고 싶어 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우구스투스는 옥타비아누스일 때 내전으로 혼란스러운 로마의 권력을 장악하고 로마 역사에 평화로운 시대의 서막을 열었다. 그는 황제로 즉위하기 이전이나 이후에도 늘 스스로를 ‘프리무스 인테르 파레스’ 즉 원로원 의원 중에서 1인자일 뿐이라고 겸손을 떨었다.


 “저는 로마의 다른 지도자나 원로원 의원보다 큰 특혜나 실권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아우구스투스가 이처럼 겸손을 앞세우며 황제 티를 내지 않은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로마인은 BC 509년 왕정을 폐지할 때 다시는 왕을 모시지 않겠다고 맹세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인이 이런 맹세를 한 것은 유니우스 브루투스와 타르퀴니우스 콜라티누스가 왕인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를 쫓아내고 첫 집정관이 됐을 때였다. 두 사람은 로마를 정화하는 의례를 치른 뒤 신성한 맹세 의례도 거행했다. 두 사람이 희생제물을 바치고 먼저 맹세하자 모든 로마 시민이 그들을 따라 맹세했다.


 “우리는 추방한 타르퀴니우스는 물론 그의 아들이나 후손도 절대 왕으로 복귀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앞으로 영원히 어느 누구도 왕으로 받들지 않을 것이며, 어느 누구도 왕이 되도록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맹세는 우리는 물론 우리의 아이, 후손에게까지 영원히 이어져 지켜질 것입니다.”


 아우구스투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왜 암살당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지나치게 욕심을 내거나 서두르다가는 황제 자리에 오르기는커녕 쫓겨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그래서 겸손을 가장해 고개를 깊숙이 숙인 것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그러면서 그를 로마에 번영과 평화를 가져다주고, 특히 새로운 지도자의 계보를 시작한 사람이라고 끊임없이 강조했다. 여기에 덧붙여 그의 가족만이 로마에 영원한 평화와 부를 지속시킬 수 있다고 로마인에게 납득시키려 애썼다.


 아우구스투스는 이런 생각을 로마인에게 각인시키고, 그가 획득한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다양한 선전 또는 홍보 도구를 사용했다. 여기에는 건축물도 있었고 문학도 있었다. 건축물로는 평화를 이룬 황제에게 바친 제단인 아라 파키스(평화의 제단), 황제의 업적을 기록한 대형 명문인 레스 게스타(업적록), 해시계인 호롤로기움 아우구스티 등이 있었다. 아우구스투스의 생일인 9월 23일이 되면 호롤로기움은 정확하게 아라 파키스 중앙을 가리키게 돼 있었다. 이런 뜻이었다.


 “아우구스투스의 통치는 필수불가결하고 이미 오래전부터 예정돼 있었던 것입니다.”


 아우구스투스를 널리 알리는 데 앞장선 문필가로는 베르길리우스가 있었다. 그는 『아이네이드』에서 아우구스투스를 운명으로 정해진 로마의 구세주라고 묘사했다.


 아우구스투스가 30대 중반에 서둘러 마우솔레움을 건설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마우솔레움은 그가 활용한 선전 도구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었다. 단순한 무덤이 아니었던 셈이다.


 정적이었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BC 30년 세상을 떠났을 때 아우구스투스는 그의 유언장 내용을 공개하면서 이렇게 공격했다.


 “안토니우스는 죽은 뒤 이집트에, 그것도 클레오파트라 곁에 묻히기를 원했습니다. 안토니우스는 로마의 반역자였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안토니우스와 다르다는 점을, 그는 영원히 로마를 지킬 것이라는 사실을 로마인에게 강조하려고 마우솔레움 공사를 시작한 것이었다. 그가 로마인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이것이었다.


 “저는 살아서도 물론이거니와 죽어서도 로마를 배반하거나 떠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와 가족이 묻힐 마우솔레움을 지금부터 미리 만듭니다.”


 마르스 평원을 마우솔레움 건설지로 고른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먼저 당시 로마에서는 저명한 인사가 세상을 떠나면 원로원이 회의에서 결의안을 통과시켜 마르스 평원에 무덤을 만들 수 있게 허락해주는 게 관례였다. 그는 이곳에 무덤을 만듦으로써 로마의 전통을 따르는 지도자라는 점을 보여주려고 했다.


 다른 하나는 이곳이 로마 초기부터 군사 훈련을 실시하고 외국으로 군대를 파견하기 위해 병사를 집결시키는 장소였다는 점이다. 마르스 평원에 무덤을 만들면 로마인과 원로원은 늘 마르스 평원의 의미를 생각하게 될 것이고 그가 확보한 엄청난 군사적 힘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게 현실이었다.


 로마 지도자가 가질 수 있는 권력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로마의 신성한 경계선 포메리움을 벗어나서 행사할 수 있는 군사권인 임페리움 밀리티아이었다. 다른 하나는 로마 안에서 행사할 수 있는 행정권인 임페리움 도미였다. 마우솔레움이 완성될 무렵 아우구스투스가 100% 확실하게 행사할 수 있었던 권리는 임페리움 밀리티아이뿐이었다. 임페리움 도미는 5년 뒤에야 완벽하게 장악할 수 있었다.


 아우구스투스 마우솔레움은 지름 87m, 높이 42m에 이르는 원형 묘지였다. 지붕은 돔 모양이었다. 그 아래에 유해 안치 공간이 설치돼 있었다. 입구는 남쪽으로 난 조그만 방이었다. 창문을 통해 빛이 들어오게 돼 있었다. 입구에는 기둥 두 개가 있었다. 여기에 아우구스투스의 업적을 새긴 청동판이 붙어 있었다. 그래서 이 청동판을 ‘레스 게스타에 디비 아우구스티’ 즉 ‘신성한 아우구스투스의 업적록’이라고 불렀다.


 안으로 들어가면 이중 반지 모양의 밀폐된 방을 지나게 된다. 이어 두 개의 문이 있는 벽으로 연결된다. 이곳에서 복도를 빙 돌아가면 마우솔레움의 중심지, 즉 안치실이 있는 곳에 들어갈 수 있다. 마우솔레움 꼭대기에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청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아래에는 아우구스투스와 그의 가족, 친척, 가까운 친구의 유해가 놓여 있었다. 황제와 가족이 숨지면 바깥에서 화장한 뒤 재를 황금 항아리에 담아 이곳에 보관했다.


 마우솔레움 외벽은 둥근 강철 담장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담 안의 공간에는 검은 포플러 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마우솔레움 입구 앞에는 오벨리스크 두 개가 서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 북서쪽에 있는 에스퀼리노 광장으로, 다른 하나는 퀴리날레 분수로 옮겨졌다. 마우솔레움 주변에는 나무를 빼곡하게 심어 공원을 조성했다.


 우연의 일치인지 아우구스투스 마우솔레움이 만들어지는 도중에, 또는 다 만들어진 이후에 아우구스투스가 황제 후계자로 생각했던 이들이 세상을 떠나기 시작했다.


 마우솔레움에 가장 먼저 묻힌 사람은 BC 23년에 숨을 거둔 아우구스투스의 조카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였다. 아우구스투스는 당시 19세이던 누나의 아들 마르켈루스가 적당한 나이로 성장하면 후계자로 삼아 대권을 넘겨줄 생각이었다. 마르켈루스의 죽음은 디오 카시우스가 쓴 『로마사』에 상세한 이야기가 나온다.


 ‘아우구스투스가 칼푸르니우스 피소와 함께 11번째 집정관이 됐을 때 큰 병에 걸려 드러누웠다. 모두 회생하기 힘들다고 생각했다. 아우구스투스는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에게 (황제의 권위를 상징하는)반지를 건네주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안토니우스 무사가 냉욕과 차가운 약물이라는 처방을 내려 기적적으로 황제를 살렸다. 아우구스투스가 회복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마르켈루스가 병석에 누웠다. 무사가 비슷한 처방을 시도했지만 결국 눈을 감고 말았다.’


 BC 12년에는 아우구스투스의 영원한 친구이자 동지이며 장군이었던 아그리파가 세상을 떠났다. 아우구스투스는 병에 걸려 죽을 위기에 몰렸을 때 제위를 상징하는 반지를 넘겨줄 정도로 아그리파를 신뢰했다. 그런데 무인 출신이어서 건강할 것으로 기대했던 아그리파가 오히려 먼저 세상을 떠나버린 것이다. 그가 죽은 이야기도 디오 카시우스의 『로마사』에 나온다.


 ‘아우구스투스는 5년 기한으로 호민관 권한을 수여함으로써 아그리파의 권력을 강화시켜준 뒤 반란이 일어난 판노니아로 보냈다. 그런데 반란을 진압하고 돌아오던 아그리파가 갑자기 병으로 쓰러졌다. 깜짝 놀란 아우구스투스는 로마를 떠나 아그리파를 문병하러 갔다. 그곳에서 만난 친구는 벌써 눈을 감은 뒤였다. 그는 아그리파에게 성대한 장례식을 치러주고 마우솔레움에 묻어주었다.’


 마르켈루스와 아그리파 다음에는 아우구스투와 재혼한 아내 리비아의 아들이었던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가 급사했다. 그는 게르만족을 제압했다고 해서 게르마니쿠스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군사적 능력이 뛰어났다. 그러나 겨울에 숙영지로 돌아가다 말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크게 다쳐 목숨을 잃고 말았다.


 아우구스투스는 늘 표정이 어두웠던 리비아의 큰아들 티베리우스에게는 큰 애정을 보이지 않았지만, 성격이 좋았던 둘째 아들 드루수스는 매우 아꼈다. 누나의 딸인 안토니아를 드루수스와 결혼시킬 정도였다. 속으로는 드루수스를 차기 제위 계승자로 생각했을 수도 있다고 일부 역사학자는 주장한다. 나중에 드루수스의 손자 칼리굴라와 둘째 아들 클라우디우스, 증손자 네로가 차례로 왕위에 오르게 된다.


 아우구스투스의 비극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의 딸 율리아가 아그리파와 결혼해 낳은 두 아들, 즉 그에게는 손자이자 양아들이었던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가 할아버지보다 10년 일찍 사망해 나란히 마우솔레움에 안식처를 정한 것이었다.  


 후계자로 생각했던 조카, 친구, 손자 등이 연이어 일찍 죽는 비극을 맛본 아우구스투스는 마지못해 티베리우스에게 권좌를 물려준 뒤 서기 11년 로마 남쪽 놀라에서 75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그는 이런 유언을 남겼다.


 “흙으로 만든 로마를 물려받아 대리석으로 만든 로마를 남긴다.”


 일부에서는 티베리우스가 황제를 독살했다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부 학자는 ‘아우구스투스가 병들었을 때 티베리우스는 계속 곁에 있었으며, 황제가 내리는 명령을 받아 집행했다’면서 독살설이나 반란설을 반박한다. 디오 카시우스는 『로마사』에서 리비아를 암살범으로 지목했다. 그는 이렇게 기록했다.


 ‘아들을 황제로 앉히고 싶어 했던 아우구스투스의 부인 리비아가 독살에 가담했다는 의혹도 나왔다. 리비아는 아우구스투스의 사망 소식을 원로원은 물론 로마 시민에게 미리 알리지 않았다. 아들 티베리우스가 달마티아에 있었기 때문에 반란이 일어날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에 따르면 아우구스투스는 죽기 직전에 이런 유언을 남겼다.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는 모든 속주에서 흙을 담은 항아리 한 개씩을 가져오게 하시오. 그리고 흙을 마우솔레움 위에 뿌리시오. 그래야 내가 생전에 이룩한 제국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지를 지켜보면서 영면에 들 수 있을 거요.”


 아우구스투스 마우솔레움에는 아우구스투스와 부인 리비아는 물론 조카인 마르켈루스, 친구이자 장군 아그리파, 의붓아들 드루수스, 누나 옥타비아, 손자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 드루수스의 큰아들 게르마니쿠스, 아우구스투스 이후 황제 자리에 올랐던 티베리우스와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네르바 등 20명의 유해가 안치됐다.


 410년 이른바 알라리크의 ‘로마 약탈’ 때 반란군이 마우솔레움에 쳐들어가 황금 항아리를 훔쳐가면서 유해를 버리는 바람에 황제 일족은 졸지에 한꺼번에 안식처를 잃고 말았다. 반란군은 건물에는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


 기독교가 로마를 지배하던 10세기 무렵 돌보는 이가 없어진 탓에 아우구스투스 마우솔레움의 상당부분은 흙에 파묻히고 말았다. 주변에 나무가 웃자라 마우솔레움을 거의 덮다시피 했다. 당시 로마인은 이곳을 몬스 아우구스투스(아우구스투스 언덕)라고 불렀다. 마우솔레움 꼭대기에는 미카엘 대천사에게 헌정하는 작은 예배당이 세워지기도 했다.


 12세기 무렵에는 콜로나 가문이 마우솔레움을 점유하고 있었다. 이 가문은 마우솔레움을 성으로 고쳐 사용했다. 1167년 로마 꼬뮤네가 투스쿨룸 공작과의 전투에서 패한 뒤 콜로나 가문이 몰락하는 바람에 성으로 사용되던 마우솔레움은 큰 피해를 입었다.


 르네상스 시대에 마우솔레움의 소유권은 여러 귀족 가문의 손을 거쳤다. 이들은 마우솔레움을 주로 정원으로 사용했다. 19세기 초에는 소규모 경기장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투우장으로 활용한 가문도 있었다.


 20세기 초 마우솔레움 내부는 아우구스테오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콘서트홀로 활용됐다. 이때 독재자 무솔리니는 고대 로마제국의 영광을 되살리기 위한 각종 재건 사업을 벌이면서 마우솔레움도 옛날 모습대로 복원하라고 지시했다. 그는 스스로를 아우구스투스와 연결시키려고 애썼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마우솔레움 복원은 당연한 일이었다.


 21세기 들어 이탈리아 정부는 무솔리니 이래 전혀 손을 보지 않아 황폐해졌던 아우구스투스 마우솔레움을 리모델링해 아우구스투스 사망 2천 주년인 2014년 재개장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예산 부족 때문에 리모델링 사업은 계속 늦어졌다. 그러다 2017년 통신회사인 텔레콤 이탈리아가 600만 유로를 기부한 덕에 대대적 보수 작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원래 2020년 봄에 공사를 마치고 재개장식을 열 계획이었지만 코로나19 때문에 행사는 연기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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