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드리아누스는 왜 강을 건너갔나?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지쳐 있었다. 젊었을 때에는 로마제국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온 세상을 돌아다니는 게 즐겁고 재미있었다. 하지만 50대 중반을 넘어선 이제는 힘들기만 했다. 그는 더 이상 로마를 떠나지 않기로 했다. 이제 인생을 마감할 준비를 미리 서둘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새 마우솔레움을 짓기로 하겠소.”
하드리아누스는 134년 원로원 회의에서 새 마우솔레움을 짓겠다고 발표했다. 아우구스투스 마우솔레움은 빈자리 하나 내기 힘들 정도로 꽉 찼다는 게 이유였다.
“서둘러 마우솔레움을 새로 짓지 않으면 황제와 가족이 누울 자리를 찾지 못할 거요.”
아우구스투스는 모든 로마 황제가 가장 본받고 싶고 했고, 능가하고 싶어 했던 황제였다. 그것은 하드리아누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마우솔레움을 새로 만들면 후세로부터 아우구스투스 못지않은 대단한 황제였다는 평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드리아누스는 마우솔레움 건설 부지를 직접 고르기로 했다. 모든 로마인과 원로원은 아우구스투스 마우솔레움처럼 그도 마르스 평원을 선택할 것이라고 봤다. 하지만 그는 뜻밖의 장소를 골랐다.
“테베레 강 건너편 아게르 바티카누스(바티카누스 평원)에 새 마우솔레움을 짓기로 했소.”
하드리아누스가 고른 곳은 로마의 종교적 경계였던 포메리움 밖이었다. 고대 로마인이 대부분의 건축물을 일곱 언덕으로 구성된 로마 시내나 마르스 평원에 지었다는 사실을 고려해보면 매우 특이한 일이었다.
당시 아게르 바티카누스에는 건축물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한마디로 당시로서는 로마에서 꽤 멀리 떨어진 외곽에, 그것도 테베레 강 건너편에 마우솔레움을 지은 것이다. 그는 왜 이곳에 마우솔레움을 건설했을까?
아우구스투스가 제정로마를 창시한 초대 황제였다면 하드리아누스는 제정로마를 전성기로 이끈 황제였다. 아우구스투스는 아주 검소하고 실용적인 인물이었지만 하드리아누스는 아주 역동적이고 화려하고 창의적인 사람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황제 자리에 앉은 뒤 로마를 거의 떠나지 않았지만 하드리아누스는 20년 재위 기간 중 12년을 외국에서 보냈다. 평생 로마제국 속주 곳곳을 순행하고 다닌 것이다. 물론 여행만 한 것은 아니고, 속주나 식민지 곳곳을 둘러보며 문제점을 개선하거나 현지 병사, 주민을 격려하고 위로했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 브렌든 네이글 교수는 이렇게 기록했다.
‘하드리아누스는 12년 동안 제국 곳곳을 여행하면서 보냈다. 그는 여러 속주를 방문해서 행정을 살펴보고 군율을 점검했다. 그는 정부의 모든 면을 꼼꼼히 살핀 탁월한 행정가이면서 재판관이었다.’
하드리아누스가 힘든 여정을 이어가며 제국을 살핀 덕분에 로마는 그야말로 평화의 시대를 보낼 수 있었다. 제국 1천 년 역사상 가장 평화롭고 안정된 시기였다. 한마디로 ‘팍스 로마나’의 절정기였다. 많은 역사학자는 그를 ‘계몽군주’로 평가하기도 했다. 19세기 역사학자 에드워드 기번은 이렇게 적었다.
‘하드리아누스의 통치기는 인류 역사를 통틀어 인간이 가장 행복하고 가장 번영한 시기였다. 로마제국의 모든 지역은 미덕과 지혜의 안내에 따라 절대 권력으로 다스려졌다.’
그런데 황제가 로마를 장기간 떠나 있는 모습을 로마인과 원로원은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우구스투스가 죽은 뒤 2대 황제로 취임한 티베리우스가 로마를 떠나 카프리 섬에 틀어박혀 있었던 모습을 떠올렸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드리아누스가 죽었을 때 원로원은 기록 말살을 의결해 하드리아누스의 모든 기록을 없애려고 할 정도였다.
황제도 그들의 속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인생 말년에 아주 변덕스럽고 고약한 사람으로 변하고 많은 원로원 의원을 살해하거나 추방하려 한 것은 황제 재임 기간 중에 쌓인 스트레스와 앙심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살아있을 때에는 저들과 함께 동고동락할 수밖에 없었어. 하지만 죽은 뒤에는 저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나만의 세상에서 잠들고 싶군.’
하드리아누스가 마르스 평원 대신 테베레 강 건너편을 마우솔레움 건설 부지로 선정한 것은 죽은 뒤에라도 로마에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은 아닐까? 평생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제국의 평화와 번영을 유지하려고 애쓴 황제의 노력을 이해하기는커녕 뒤에서 욕만 하는 로마인, 원로원과 사후에라도 떨어지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다른 이유를 제시한 역사학자도 있었다.
‘하드리아누스 마우솔레움에서 선을 그으면 판테온을 거쳐 트라야누스 원주까지 직선으로 이어진다. 마우솔레움 꼭대기에 올라가면 판테온과 원주를 볼 수 있었다. 로마인에게 그가 건설한 판테온의 위대함을 과시하고 트라야누스의 후계자였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 하드리아누스 마우솔레움 자리는 전망이 매우 좋은 곳이었다. 주변에 높은 언덕도 없어 마우솔레움 꼭대기로 올라가면 로마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었다. 여기서는 판테온, 원주는 물론 포로 로마노의 유피테르 신전, 키르쿠스 막시무스도 다 보였다. 그는 살아서 통치했던 로마를 죽은 뒤에도 지켜보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다.
하드리아누스는 138년 7월 세상을 떠났다. 그때까지도 마우솔레움은 완공되지 못해 누구도 묻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죽음을 맞았던 바이에이아 인근의 푸에톨리에 임시로 매장됐다. 나중에는 마우솔레움 공사를 하고 있던 테베레 강 인근의 도미티아 정원으로 이장됐다. 그리고 1년 뒤인 139년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가 공사를 마무리하자 마우솔레움에 가장 먼저 안장됐다.
하드리아누스 마우솔레움에는 하드리아누스는 물론 그보다 1년 전에 세상을 떠난 사비나 황후, 그의 양아들이었던 아일리우스도 함께 묻혔다.
나중에는 안토니누스 피우스와 그의 아내 파우스티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와 시리아 출신 부인인 율리아 돔나, 그의 두 아들인 카라칼라와 게타도 묻혔다.
로마를 놀라게 한 입양
“니그리우스의 사위인 콤모두스를 양자로 입양하겠소.”
하드리아누스는 136년 로마인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한 폭탄선언을 했다. 병에 걸려 죽다 살아난 지 며칠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원로원에서 영향력이 큰 루키우스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 의원의 아들인 루키우스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를 양자로 입양하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35세였던 콤모두스는 니그리누스 장군의 사위였다. 장군은 하드리아누스에 앞서 황제였던 트라야누스의 친구이자 충신이었다. 그는 하드리아누스의 즉위에 반대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하드리아누스는 117년 황제 자리에 오른 직후 그에게 반역 혐의를 뒤집어씌워 암살해 버렸다. 그런데 19년이 지난 지금 니그리누스의 사위를 양자로 받아들이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콤모두스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경탄을 금치 못하게 만들 정도로 빼어난 미남이었다. 당시 로마에서 그보다 잘 생긴 사람은 남자, 여자를 다 포함해서 아무도 없다고 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다지 머리가 뛰어나지 않았고 건강도 좋지 않아 다들 그를 경멸하고 있었다.
“황제가 죽을 고비를 넘기더니 정신이 나갔군!”
모든 로마인은 하드리아누스의 결정에 충격을 받았다. 콤모두스의 아버지를 제외한 다른 원로원 의원들과 하드리아누스의 측근들은 입양을 막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황제의 양아들이 된다는 것은 나중에 황제가 된다는 뜻이었다. 그들은 콤모두스를 로마의 황제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콤모두스에게는 잘 생긴 것 말고는 장점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제국을 다스릴 능력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라가 망할 수도 있습니다. 입양을 철회해야 합니다.”
일부에서는 동성애 취향이 있던 황제가 콤모두스를 동성애 대상으로 좋아했기 때문에 입양했다고 수군거렸다. 물론 이 주장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하드리아누스의 결정에 특히 매형인 루키우스 율리우스 우르수스 세르비아누스의 반발이 거셌다. 하드리아누스는 원래 세르비아누스나 그의 손자 루키우스 페다니우스 푸스쿠스 살리나토르를 후계자로 지명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병을 앓고 일어나더니 마치 아무 옛날 일은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갑자기 말을 바꿔 버린 것이었다.
세르비아누스와 살리나토르는 황제의 변심을 참을 수 없었다. 눈앞에 다가와 있던 황제 자리가 한순간에 날아가 버리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쿠데타를 일으켜 황제를 암살하기로 음모를 꾸몄다. 하지만 음모에 가담한 원로원 의원 중 한 명이 마음을 바꿔 음모를 황제에게 일러바치는 바람에 두 사람은 목을 잘리고 말았다.
하드리아누스가 자신의 핏줄이라고 할 수 있는 누나의 손자 즉 조카손자인 살리나토르를 죽이면서까지 왜 콤모두스를 입양하기로 결정했는지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그가 이유를 설명한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일부 역사학자들은 이렇게 추정한다.
“하드리아누스는 즉위 직후 암살한 니그리누스에게 죄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딸 아비디아 플라우티아와 결혼한 콤모두스를 입양해 황제 자리를 넘겨줄 생각이었다. 만약 콤모두스가 황제 자리에 오른다면 그의 아들이자 니그리누스의 외손자인 루키우스 베루스를 황제로 만들 수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하드리아누스가 병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기고 있을 때 니그리누스의 유령을 만났을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병 때문에 정신이 이상해졌을 가능성도 부인할 수 없다.
하드리아누스는 평민들의 반감을 누그러뜨리려고 로마에 엄청난 돈을 뿌렸다. 매일 같이 키르쿠스 막시무스에서는 전차경주를, 콜로세움에서는 검투사 경기를 열었다. 행사에 참가한 사람들은 물론 변방을 지키는 병사들에게는 엄청난 돈을 선물로 나누어주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우리 입장에서는 눈앞의 돈이 최고지.”
하드리아누스는 시간을 끌지 않았다. 그는 콤모두스를 입양하자마자 이름을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카이사르로 바꾸게 했다. 카이사라는 황태자를 의미했다. 하드리아누스가 세상을 떠날 경우 그가 황제 자리에 오른다는 이야기였다.
하드리아누스는 아일리우스를 보는 로마인의 시선이 어떤지를 알고 있었다. 30대 중반이 될 때까지 로마에서 편안한 생활한 해 왔기 때문에 로마제국의 현실이 어떤지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하드리아누스는 아일리우스에게 세상 경험을 쌓을 기회를 주기로 했다. 그는 아일리우스를 법무관으로 임명한 뒤 판노니아 속주 총독으로 파견하기로 했다. 판노니아로 보내기 직전에는 공동 집정관으로 승격시켰다.
“판노니아 속주 부다페스트에 다녀오도록 해라. 황제가 되기 전에 군대 생활을 경험해봐야 해. 그래야 나중에 야만족이 쳐들어올 때 어떻게 대처할지 배울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아일리우스에게는 큰 문제가 있었다. 건강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하드리아누스는 그의 건강 문제를 양자 입양 이후에야 알았다. 하지만 입양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그렇게 한다면 원로원은 물론 모든 로마인의 비난이 더 거세질 수밖에 없었다. 신분을 알 수 없는 저자 6명이 썼다는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는 하드리아누스가 이렇게 속삭였다고 기록했다.
“무너져 가는 성벽에 기대고 있었군. 그러면서 군인과 백성들에게 수억 세스테르티우스를 낭비한 거야.”
당초 우려했던 대로 아일리우스는 부다페스트에 가자마자 건강이 나빠져 곧바로 로마로 돌아왔다. 골골 앓던 그는 아픈 몸을 이끌고 138년 1월 원로원 회의에 참석해 연설을 했다. 잔뜩 지친 몸으로 귀가한 그는 그날을 넘기지 못하고 눈을 감고 말았다.
하드리아누스는 어찌 됐든 양자로 받아들인 아일리우스를 마우솔레움에 묻기로 결정했다. 하드리아누스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던 아울리우스는 이렇게 해서 엉뚱하게도 황제 가족의 영묘인 마우솔레움에 안식처를 찾게 됐다.
산탄젤로 성
590년 무렵이었다. 고대 로마제국은 멸망했고, 아직 르네상스 시기가 오기까지는 먼 시간이 필요한 시대였다. 로마에 페스트가 번져 수많은 사람이 쓰러졌고,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 로마 시내 곳곳에는 병에 걸려 숨진 사람들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병에 걸릴까 겁나 시체를 치울 생각조차 못했다.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로마 시내를 내려다보던 교황 대 그레고리오 1세(재임 590~604년)는 하나님의 힘을 빌려 전염병을 몰아내기로 했다. 그는 성모자를 그린 성화 살루스 포풀리 로마니를 들고 아가타 수부라라고 불린 로마의 끝 부분에 있는 교회까지 행진하기로 했다.
살루스 포풀리 로마니는 「누가복음」을 쓴 성 누가의 작품이라고 로마인은 믿었다. 전설에 따르면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세상을 떠나자 성모 마리아는 개인 소지품 몇 가지를 챙겨 사도 요한의 집에 갔다. 그 중에는 성 요셉의 작업장에서 목수였던 예수가 직접 만든 탁자도 있었다.
성모 마리아는 성 누가에게 초상화를 하나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성 누가는 탁자에 앉아 그림을 그리는 동안 성모 마리아가 들려주는 예수의 인생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여기서 들은 이야기를 나중에 「누가복음」에 담았다.
성화는 한동안 예루살렘에 보관돼 있었다. 4세기 무렵 성 헬레나가 예루살렘에 성지 순례를 갔다가 성화를 발견했다. 그녀는 성화를 콘스탄티노플로 가지고 돌아갔다. 나중에 로마에 올 때 그림을 가져왔다.
아가타 수부라의 교회에는 이교도는 물론 일부 기독교도까지 몰래 신봉하는 우상이 있었다. 기독교도도 머리를 숙인 덕분에 우상은 파괴되지 않고 비밀리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교황은 교회에 도착하자마자 우상에게 걸어가더니 큰소리로 외쳤다.
“악마의 상징아! 로마에서 떠나도록 하라!”
그때 갑자기 천둥 같은 큰 소리가 우상에서 터져 나오더니 우상이 산산조각 나버렸다. 교황은 이 장면을 침착하게 지켜보고는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교황은 성당으로 돌아가는 길에 하드리아누스 마우솔레움 앞에 있는 폰스 아일리우스 다리를 건너게 됐다. 그는 다리 위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고대 로마제국의 전성기를 이끈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묻혀 있는 마우솔레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미 오래전부터 아무도 돌보지 않아 무척 황폐해진 상태였다.
그때 갑자기 피가 철철 흐르는 길고 가느다란 칼을 든 미카엘 대천사가 마우솔레움 꼭대기에 나타났다. 깜짝 놀란 교황은 그가 미카엘임을 알아보고는 고개를 숙였다. 미카엘은 망토로 칼에 묻은 피를 닦고 칼집에 넣은 뒤 사라져버렸다. 교황은 그 모습을 보고 이렇게 선언했다.
“하나님이 드디어 분노를 푸셨다. 더 이상 희생을 원하지 않으신다.”
신기하게도 교황의 말이 끝나자마자 거짓말같이 로마에서 페스트는 사라져버렸다. 성 베드로 대성당에 돌아간 대 그레고리오 1세는 사제들을 불러 모아 직접 목격한 기적을 설명했다.
“마우솔레움 꼭대기에 세워져 있던 하드리아누스의 사두마차 석상을 없애버리시오. 대신 미카엘 대천사 석상을 만들어 세우시오. 고대 로마의 건축물은 모두 이교도의 흔적이오. 다 부서버리시오. 그래야 로마에 하느님의 분노가 재발하지 않을 것이오.”
로마인은 대 그레고리오 1세가 로마의 비밀 우상 숭배를 막은 덕분에 페스트를 사라지게 했다고 믿었다. 그들은 대천사가 나타난 하드리아누스 마우솔레움을 ‘천사의 성’이라는 뜻인 산탄젤로 성으로 부르기로 했다.
하드리아누스 마우솔레움의 구조
하드리아누스 마우솔레움 부지는 한 변의 길이가 89m인 직사각형이다. 역대 교황이 수시로 개축했기 때문에 지금은 종전의 모습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고대 역사학자들이 남긴 기록에서 겨우 그 흔적을 일부 찾아볼 수 있다.
원래의 마우솔레움은 전체적으로 정사각형 기단 건물과 빵처럼 부풀어 오른 것 같은 원통 본체, 그리고 꼭대기의 구조물로 이뤄졌다고 한다. 원통 본체는 흙과 식물로 만든 언덕으로 덮었다고 전해진다. 다른 주장도 있다.
“마우솔레움 기단이 기본 구조였던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위에는 3단 원형 케이크 같은 건물이 이어져 있었습니다.”
16~18세기에 이름을 알 수 없는 사람이 그린 마우솔레움 그림이 이 주장을 뒷받침한다. 성 베드로 대성당 청동문에는 하드리아누스 마우솔레움이 새겨져 있다. 앞의 그림과는 조금 다르지만 마우솔레움은 케이크 모양을 하고 있다.
지금은 산탄젤로 성인 하드리아누스 마우솔레움에 가면 가운데에 지름 64m인 원통 모양 건물이 서 있다. 직사각형 네 모퉁이에는 탑이 세워져 있다. 탑은 고대 로마 시대에 만든 게 아니라 나중에 마우솔레움을 성으로 바꿀 때 추가한 것이다.
외부 기단은 파로스산 대리석으로 만들었다. 기단 위에 세워진 원통형 마우솔레움 본체 건물은 석회암으로 지었다. 1층 면적은 84㎡였고 높이는 10m 정도였다. 벽은 석회암이었지만 표면에는 대리석을 붙여놓았다. 벽 뒤에는 다시 두께 60㎝ 정도의 내벽이 있었다.
상층부에는 역시 대리석으로 만든 사람과 말 석상 여러 개가 설치됐다. 1~2세기 로마 역사학자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마우솔레움 꼭대기에는 사두마차를 모는 하드리아누스 청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원통 본체에도 여러 인물 석상과 말 석상이 세워졌다.
지금은 안을 볼 수 없는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처음에는 낮은 청동 철책 담장이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마우솔레움 입구에는 청동으로 만든 문이 달렸다. 문에는 석회암 기둥 네 개가 세워져 있었다. 기둥 위에는 금박을 입힌 청동으로 만든 공작새 조각이 달려 있었다. 그 중 일부는 뜯겨나가 지금은 바티칸박물관 솔방울정원에 있는 솔방울 조각을 장식하고 있다.
하드리아누스는 마우솔레움 바로 앞에 다리를 하나 놓았다. 이름은 폰스 아일리우스 즉 ‘아일리우스 다리’였다. 아일리우스는 하드리아누스의 가문 이름이었다. 지금은 산탄젤로 다리다.
폰스 아일리우스는 지금의 다리와는 모습이 많이 달랐다. 기록에 따르면 교각은 지름 18.38m의 대형 아치 3개와 지름 3~7.59m인 왼쪽의 소형 아치 3개, 지름 3.75~7.59m인 오른쪽의 소형 아치 두 개로 이뤄져 있었다. 각 아치는 8개의 판돌이 받치고 있었다. 대형 아치 3개는 중앙에 몰려 있었다. 이를 가운데에 두고 다리는 양쪽으로 15도 가량 기울어져 있었다. 다리의 폭은 11m 정도였다. 다리 재질은 회색 응회암을 섞은 석회암이었다.
다리는 15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건재했지만 1450년 갑자기 밀려든 수많은 순례자 때문에 큰 손상을 입고 말았다. 당시 교황이던 니콜라오 5세(재임 1447~55년)가 긴급히 수리해 다리를 살릴 수 있었다.
이후 1527년 교황 클레멘스 7세(재임 1523~34년)가 다리에 성 베드로와 성 바울 석상을 세웠다. 1669~71년 교황 클레멘스 9세는 베르니니에게 지시해 다리에 천사 석상 10개를 만들어 세우게 했다. 폰스 아일리우스는 지금은 폰테 산탄젤로(산탄젤로 다리)로 불린다.
3세기 무렵 군인황제 시대에 로마제국은 야만족의 거듭된 침략에 시달리고 있었다. 제국의 수도인 로마도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 처지가 됐다.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허물어버린 성벽을 로마에 다시 건설하기로 했다. 그것이 바로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이었다. 황제가 생각한 성벽에 하드리아누스 마우솔레움도 포함됐다.
아우렐리아누스는 마르스 평원 맞은편에 자리 잡고 있어 군사적으로 매우 위치가 좋았던 하드리아누스 마우솔레움을 성벽에 연결해 성채로 사용하기로 했다. 그때 마우솔레움을 성채로 바꾸는 과정에서 여러 조각품과 석상을 뜯어내거나 부숴 버렸다.
마우솔레움을 성채로 바꿨다고 로마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왕정 시대에 쌓은 세르비우스 성벽을 BC 1세기 중엽에 없애면서 “로마를 지키는 것은 성벽이 아니라 시민의 마음”이라고 했다. 이 말은 5세기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표현이었다. 이미 나라를 지킬 수 있는 용기와 의지를 잃어버린 로마에 수차례에 걸쳐 야만족이 쳐들어왔다.
서고트족을 이끌던 알라리크가 가장 먼저 410년 로마로 쳐들어갔다. BC 390년 갈리아의 ‘로마 약탈’ 이래 800년 만에 로마는 야만족의 발에 짓밟히고 말았다. 이 때 서고트족은 마우솔레움에 안치돼 있던 유해 항아리를 모두 부숴버렸다. 안에 들었던 유해는 모두 테베레 강에 버리고 말았다.
537년 토틸라가 이끄는 동고트족이 다시 로마로 쳐들어왔다. 마우솔레움에 틀어박혀 싸우던 로마인은 동고트족 병사들을 쓰러뜨리려고 성 안에 있던 모든 돌과 석재 제품을 성 아래로 집어던졌다. 이 때문에 그나마 남아 있던 조각들마저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하드리아누스 마우솔레움의 비극은 이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그래도 조금 남았던 여러 조각이나 장식은 중세에 교회 등을 꾸미기 위해 뜯겨 나갔다. 하드리아누스 유해를 모신 것으로 알려진 석관은 라테라노 대성당으로 옮겨져 12세기 교황 인노첸시오 3세(재임 1179~80년)의 관으로 사용됐다. 관 뚜껑은 성 베드로 대성당에 모신 동로마제국 황제 오토 2세의 관에 사용됐다고 한다. 나중에는 어딘지도 알 수 없는 교회 예배당 공사에 재료로 이용돼 아예 사라져버렸다.
산탄젤로 성 꼭대기에 세워진 미카엘 석상은 여러 차례 바뀌었다. 16세기 교황 레오 10세(재임 1513~21년)는 몬테풀로에게 산탄젤로 성에 성모 마리아를 모시는 예배당을 지었다. 예배당 꼭대기에는 미카엘 대천사를 상징하는 대리석 조각상을 만들어 세웠다. 17세기 벨기에 출신 조각가 베르샤펠트는 청동으로 미카엘 조각상을 새로 만들었다. 이 바람에 몬테풀로가 만든 조각상은 산탄젤로 성 내부정원 한쪽구석으로 밀려나 버렸다.
16세기 중엽 교황 바오로 3세(재임 1534~49년)는 산탄젤로 성에 고급 숙박시설을 건설했다. 그는 선임 교황이었던 클레멘스 7세(재임 1523년~34년)가 로마를 침탈한 신성로마제국 카를 5세 때문에 교황청에서 달아나 산탄젤로 성에 갇혀 고생한 일을 지켜본 바 있었다.
‘앞으로 똑같은 일이 생길 경우 성에서 편하게 지내려면 숙박시설이 필요할 거야.’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펼쳐 신도를 고난에서 구해내는 것보다는 자신의 안위를 먼저 생각했던 게 당시 로마 교황의 실상이었다.
산탄젤로 성은 감옥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무한 우주론과 지동설을 펼치다 교황청과 갈등을 빚은 조르다노 브루노가 갇힌 곳이 바로 여기였다. 범죄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은 16세기 조각가 겸 금 세공사였던 벤베누토 첼리니도 이곳에서 수감생활을 했다.
산탄젤로 성에 들어가면 먼저 엄청난 크기의 전실이 나온다. 과거에는 대리석으로 덮여 있던 곳이다. 큰 벽감이 보인다. 이곳에는 한때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대형 석상이 서 있었다. 거대한 경사로를 따라 위로 올라간다. 분명히 위로 올라가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아주 깊은 지하세계로 걸어 내려가는 기분이 든다. 마침내 산탄젤로 성의 핵심부다.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유해를 담은 항아리가 있던 방이다. 지금은 아무 것도 남아 있는 게 없다.
비가 촉촉하게 내리는 밤, 테베레강을 따라 천천히 걸어간다. 돌로 덮인 인도는 빗물과 가로등 불빛에 젖었고, 좁은 도로를 따라 줄지어 선 저택의 유리창에는 따스한 집안의 온기가 수증기로 서려 있다. 한참을 걷다 보니 처연한 풍경이 눈앞을 가로막는다. 한때는 웅장했을 것으로 보이는 원형 건물이 스산한 모습으로 테베레강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 아우구스투스 마우솔레움이다.
테베레강을 따라 조금 더 걷는다. 이번에는 화려한 다리가 앞을 가로막는다. 교각에 올라선 신성한 천사들이 낯선 나그네를 내려다본다. 희미한 가로등 불빛 사이로 툭툭 떨어지는 비를 하얀 등에 고스란히 맞고 있는 게 안쓰럽다. 다리 건너편에 벽돌과 석재로 쌓은 웅장한 건축물이 나타난다. 꼭대기에는 긴 칼을 닦고 있는 미카엘 대천사가 교각에 서 있는 천사들을 바라보고 있다. 그의 날개 역시 빗물에 젖어 있다. 이곳은 산탄젤로성이다.
산탄젤로성 앞의 아일리우스 다리 야경은 아름답다. 그래서 낮보다는 밤에, 특히 비가 내리는 밤에 이곳을 찾아가 보라고 권하고 싶다. 게다가 혹시 모르는 일이다. 다리에서 사라져버린 유해를 찾아 헤매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와의 유령을 만나거나 그의 고통스러운 목소리를 만날지도…. 어쩌면 그 뒤에 아우구스투스 황제와 그의 영원한 친구였던 아그리파가 서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들에게 이렇게 말해주면 된다.
“이제 더 이상 로마 제국은 없습니다. 이제 그만 플루토의 지하세계로 내려가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