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의 목욕탕
목욕 문화가 없는 외국의 사절이 로마를 방문해 황제에게 이렇게 물었다.
“황제께서는 왜 매일 한 번씩 목욕을 하십니까?”
황제는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매일 두 번씩 욕장에 갈 시간이 없어서 그렇지요.”
고대 로마인은 중세시대 기독교인들과는 달리 목욕을 매우 좋아했다. 목욕의 민족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였다. 노예 무역상이었던 로마인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세쿤두스의 묘비에는 재미있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로마인에게 목욕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표현이다.
‘목욕, 와인, 섹스는 몸을 망친다. 하지만 인생을 살 가치가 있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로마에 언제부터 따뜻한 물로 목욕을 하는 관습이 도입됐는지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그리스에서 목욕 문화가 넘어왔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이탈리아는 로마 건국 이전부터 그리스와 문화적, 종교적으로 깊은 유대 관계를 갖고 있었다. 특히 로마는 그리스 문화에 맹목적일 정도로 애정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목욕 문화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고대 그리스인은 목욕에 질병 치료 효과가 있다고 믿었다. 처음에는 온천이 나오는 샘물 등에 욕장을 만들어 몸이 아플 때마다 찾아갔다. 목욕과 관련해 가장 오래된 그리스의 고고학적 유적들은 BC 24~8세기 발견된다. 크레타섬의 크노소스, 파이스토스의 궁전에서 목욕시설로 보이는 방이 발굴됐다. 산토리니섬의 아크로티리에서는 석재 목욕통이 발굴됐다.
BC 6세기 무렵에는 도시 안에 욕장을 짓기 시작했다. 개인욕장뿐만 아니라 대중욕장도 건설됐다. 대중욕장은 체육관 인근에 만들어 운동을 마친 사람들이 몸을 씻을 수 있게 했다. 욕장은 지붕이 없는 야외시설이었으며, 때로는 단순히 샤워만 하거나 족욕만 할 수 있게 만든 곳도 있었다. 그리스인들은 온욕뿐만 아니라 냉욕도 즐겼다. 호메로스의 시를 보면 냉탕을 즐기고 온탕에 들어갔다고 한다. 목욕은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도 애용했다.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 등은 작품에 주인공들이 목욕을 했다는 기록을 많이 남겼다. 트로이 전쟁에서 그리스 원정대 총사령관이었던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은 전쟁을 마치고 귀국한 뒤 목욕을 하다 암살당했다. 오디세우스는 칼립소의 섬을 떠나기 전날 마지막 목욕을 즐겼다.
로마인은 건국 초기부터 청결을 매우 중시했다. 이때는 사정상 자주 목욕을 할 수는 없었다. 1세기 고대 로마 철학자 세네카에 따르면 건국 초기 로마인은 외출하고 돌아오면 팔다리를 깨끗이 씻었고 1주일에 한 번은 꼭 목욕을 했다.
로마에서 언제부터 목욕이 일반적이고 대중적인 문화현상으로 확산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로마를 한니발의 침략으로부터 구한 구국의 영웅인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은퇴한 뒤 마르스 평원에 있던 빌라에서 따뜻한 목욕을 즐겼다’는 기록이 나오는 걸 보면 BC 3세기 무렵 이미 로마에는 온욕이 널리 퍼져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스키피오의 온욕은 우리나라 온돌처럼 바닥을 가열해서 물을 데운 뒤 빌라에 붙어 있는 연통을 통해 수증기가 욕실로 들어가게 하는 이른바 히포카우스트 방식으로 이뤄졌다. 현대의 사우나와 비슷한 방식이다.
로마인은 얼마나 목욕을 좋아했으며, 그들의 목욕 문화는 어떠했을까? 그것을 알아보려면 그들의 목욕탕 안으로 들어가 보아야 한다.
‘로마에는 아주 적은 입장료만 내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욕장이 즐비하다네.’
BC 1세기 중엽 철학자 키케로가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 적은 내용이다. 그의 글이 입증하듯이 대중욕장 또는 개인욕장은 로마에 널리 퍼진 일반적 문화현상이 돼 있었다.
고대 기록을 살펴보면 BC 33년 로마에는 대중욕장과 개인목욕탕을 합쳐 모두 170곳의 욕장이 있었다. 4세기 무렵에는 하루 2천~3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테르메 11곳, 발네아 926곳이 존재했다고 한다.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게 제정 시대 초창기에 만들어진 아그리파 욕장과 네로 욕장, 카라칼라 욕장, 디오클레티아누스 욕장이었다.
로마에서 개인목욕탕은 발네아, 대중목욕탕(욕장)은 테르메라고 불렀다. 발네아는 목욕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발라네이온에서, 테르메는 역시 뜨겁다는 뜻인 그리스어 테르모스에서 온 말이다.
귀족이나 부자는 집에 발네아를 한두 개씩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집에서 목욕을 하는 대신 평민, 심지어는 노예까지 모이던 대중욕장인 테르메에 갔다. 로마에서의 목욕은 단순히 몸을 청결하게 씻는 행위가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 모여서 개인적 이야기는 물론 정치적, 사회적, 사업적 대화를 나누는 사교 행위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물론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로마의 각 가정에서 물을 사용하려면 아쿠아 비르고 등 로마 시내를 지나다니는 여러 수로에 관을 연결해야 했다. 그런데 이 수도관을 이용하는 비용이 만만치 않아 물을 식수나 음식조리용 말고는 함부로 쓸 수 없었다.
대중욕장이 많아져 누구나 손쉽게 목욕을 즐기게 되기 전까지는 일부 정치인은 인기를 얻을 목적으로 공짜 목욕 쿠폰을 제공하기도 했다. 1~2세기 로마 역사학자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아들인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아버지를 기념하기 위해 검투사 경기 대회를 열면서 관중에게 온욕권과 오일 세트를 선물했다. 또 아우구스투스 황제도 파우스투스와 비슷한 시기에 온욕권과 이발권을 로마 시민에게 나누어주었다.
대중욕장은 대개 해가 뜨면 문을 열었고 해가 지면 문을 닫았다. BC 1세기 로마의 건축가 겸 토목전문가 마르쿠스 비트루비우스에 따르면 개장 시간은 대개 정오에서 일몰 때까지였다. 3세기 초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황제 시대에는 밤늦게까지 문을 열었다는 기록도 있다. 평균적으로 문을 여는 시간은 8번째 시간이었다.
1세기 로마 학자 가이우스 플리니우스 세쿤두스는 『자연의 역사』에 ‘보통 여름에는 10번째, 겨울에는 9번째 시간에 욕장에 들어갔다’고 기록에 남겼다. 정오 이전에는 욕장에 들어갈 수 없는 게 원칙이었지만, 병약자나 아주 나이가 많은 노인은 예외였다.
여기서 로마인의 시간 계산법을 잠시 보자. 당연히 현대와는 매우 달랐다. 로마인은 낮을 12시간으로 나눴다. 여름과 겨울에 따라 시간은 달랐다. 어떤 때는 길어졌고 어떤 때는 짧아졌다. 여름 하지를 기준으로 하면 로마의 첫 번째 시간은 오늘날 오전 4시 27분이었다.
욕장이 문을 여는 8번째 시간은 오후 1시 15분 무렵이었다. 열두 번째 시간은 오후 6시 17분이었고, 하루가 끝나는 시간은 오후 7시 33분이었다. 겨울의 첫 번째 시간은 오전 7시 33분이었다. 플리니우스가 겨울에 욕장에 간 9번째 시간은 오후 1시 29분이었다. 열두 번째 시간은 오후 3시 42분, 하루가 끝나는 시간은 오후 4시 27분이었다. 아무래도 해가 지면 더 이상 일상생활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어두울 때의 시간을 재는 것은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로마인이 어떻게 목욕을 즐겼는지를 살펴보자.
로마인은 아침에 일어나면 오전에 사업을 챙겼다. 오후 2~3시 무렵이면 욕장으로 가서 피로를 풀었다. 해가 저물면 욕장 문을 닫는 게 법으로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서두르지 않으면 하루를 건너뛸 수도 있었다. 밤을 밝힐 등잔 기름이 비싼 시절에 넓은 욕장을 환하게 만들 만큼 등잔불을 밝힐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부분 욕장 입장료는 놀랄 만큼 싸거나 무료였다. 가난한 사람에게도 목욕을 즐길 기회를 줌으로써 불만을 해소할 수 있게 하려는 게 로마 정부의 생각이었다. 귀족이나 평민, 부자나 빈자 할 것 없이 로마 시민이라면 누구나 벌거벗고 욕장에 들어갈 수 있었으니 로마 제국이라는 대의, 또는 공동체 의식을 가장 잘 실감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욕장이었다.
욕장 물이 충분히 준비되고 입장할 시간이 되면 문지기가 종을 울렸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욕장 일대에서 ‘피르미 발네아토리스(FIRMI BALNEATORIS)’라는 글자가 새겨진 종이 발견됐다. 피르미는 ‘굳세다, 힘이 넘친다’는 의미의 라틴어이고, 발네아토리스는 ‘욕장 주인’을 뜻하는 라틴어다.
욕장에 들어가는 사람은 입구에 서 있는 문지기에게 돈을 주어야 했다. 일정 연령 이하의 어린이에게는 입장료를 면제했다. 외국인도 욕장에 갈 수 있었지만 지정된 일부 시설에만 가야 했다. 특이하게도 외국인의 입장료도 무료였다.
현대인은 아무리 잦아도 하루 한 차례 정도만 욕장을 이용하지만, 고대 로마인은 달랐다. 처음에는 그들도 하루 한 차례만 욕장에 갔지만, 제정 로마 전성기에는 하루 서너 번, 어떤 사람은 열 차례나 욕장에 가기도 했다.
여러 기록을 보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아들인 코모두스 황제는 하루에 7~8회 욕장에 갔고, 고르디아누스 3세 황제는 여름에는 일곱 차례, 겨울에는 두 차례 목욕을 즐겼다. 코모두스는 하루 세 끼 식사를 거의 욕장에서 먹다시피 했는데, 놀라운 사실은 이런 생활 방식이 황제에게만 국한된 게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 의미는 여러 가지로 해석해볼 수 있다. 먼저 제정 황금기에는 엄청난 부가 로마로 몰려왔기 때문에 어지간한 사람은 하루 종일 일할 필요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또 로마에 개인욕장은 물론 대중욕장이 그만큼 많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기록이기도 하다.
대중욕장 관리는 조영관이 담당했다. 그들은 욕장을 보수, 유지하는 일은 물론 욕실을 청소하고 욕실 온도를 제대로 조절하는 일까지 담당했다. 로마 외에 속주에서는 욕장 관리를 재무관에게 맡기는 경우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