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목욕탕 안의 풍경
욕장마다 조금씩 다르기는 했지만 로마의 욕장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나오는 시설은 아포디테리움이었다. ‘옷을 벗는다’는 뜻인 그리스어 아포디오에서 나온 단어다.
말 그대로 아포디테리움은 탈의실이었다. 이곳에는 엄청나게 많은 개인 사물보관함이 설치돼 있었고, 바구니도 엄청나게 비치돼 있었다. 보관함에 옷을 넣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벽에 걸어놓는 옷걸이도 있었다. 아포디테리움에는 손님들이 앉아서 옷을 벗을 수 있게 긴 벤치가 놓여 있었다.
당연히 여기서 옷을 훔쳐가거나 옷에 들어있는 돈이나 귀중품을 빼가는 절도범이 설치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부자는 집에서 부리는 노예를 데리고 가 목욕을 하는 동안 옷을 지키게 했다. 고대 로마의 아포디테이룸을 머릿속에 그려보면 우리나라 욕장과 똑같은 구조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웃음을 참을 수 없다.
욕장에는 야외 운동공간인 팔라스타라가 있었다. 대부분 사람은 본격적인 목욕에 앞서 이곳에서 운동부터 했다. 대개 체조와 가벼운 몸 풀기, 오락 경기였다. 물론 건강을 위해서였다. 로마 사람들은 가장 이상적인 운동의 양을 땀을 약간 흘릴 정도라고 생각했다. 로마인은 아포디테리움에서 토가나 튜니카를 벗고 가벼운 운동복으로 갈아입었다. 돈이 많은 사람은 노예에게 환복을 돕게 했다.
재미있는 것은 로마인은 운동할 때 이상한 소리를 질렀다는 사실이다. 네로 황제의 스승이었던 세네카가 네로 욕장 인근에 살 때 친구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욕장에서 매일 들리는 괴상한 소리 때문에 도무지 시끄러워서 살 수가 없네. 어서 이사를 가든지 해야지.’
편지 내용을 보면 욕장 소음이 만만치 않았던 모양이다. 도대체 어떤 소리를 질렀는지는 알 수 없다. 역사 기록에 그런 내용까지는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운동을 마친 로마인은 나타티오라는 수영장으로 뛰어들었다. 로마인은 수영을 할 때도 이상한 소음을 낸다고 세네카는 불평했다.
운동에 이어 수영까지 끝낸 뒤에는 이제 드디어 본격적인 목욕에 나선다. 목욕은 단순히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거나, 샤워기로 몸을 간단히 씻는 정도로 끝내는 게 아니었다. 그랬다면 로마의 목욕 문화가 상세한 기록에 담겨 현대까지 전해질 이유가 없다.
로마의 욕탕은 냉탕인 프리기다리움, 온탕인 테피다리움, 열탕인 칼다리움, 건식 사우나인 라코니쿰, 습식 사우나인 수다토리움 등으로 이뤄져 있었다. 큰 창으로 들어오는 햇볕을 쬐며 일광욕을 하는 헬리오카미누스도 있었다. 스트리길이라는 쇠로 만든 도구를 이용해 몸의 때를 밀기도 했다.
물론 사람마다 취향에 따라 욕탕을 이용하는 순서가 달랐다. 냉탕부터 가고 온탕에 가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목욕부터 즐기고 맨 나중에 수영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목욕 전후에 오일을 바르는 사람도 많았다. 수에토니우스가 쓴 『열두 명의 카이사르』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신경쇠약 등에 시달린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목욕에 앞서 항상 오일을 발랐다.
일반적으로 로마인이 가장 먼저 간 곳은 욕장 입구에 있는 냉탕인 프리기다리움이었다. 운동을 하면서 배어나온 땀을 식히는 게 목적이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욕장의 프리기다리움은 매우 웅장했다. 대리석 기둥 여덟 개가 이곳을 둘러싸고 있었다. 천장 높이는 무려 30m에 이르렀다.
프리기다리움에서 나온 로마인을 기다리는 다음 방은 온탕인 테피다리움이었다. 뜨거운 탕에 들어가기에 앞서 몸을 준비시키는 공간이었다. 찬물에 익숙해진 몸을 갑자기 열탕에 담그면 심장마비나 고혈압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로마인도 알고 있었다.
다음 단계는 열탕이 있는 칼다리움이었다. 이곳에는 반원형 벽감인 엑세드라가 여러 곳 설치돼 있었다. 목욕을 하다가 지인을 만나면 이곳으로 가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고, 오랫동안 목욕을 즐기는 사람은 책을 읽기도 했다.
칼다리움에서 나온 뒤에는 다시 프리기다리움에 가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욕장에 가면 뜨거운 한증실에서 나온 뒤 찬물이 담긴 냉탕에 풍덩 뛰어들듯이 로마인도 프리기다리움에 몸을 던졌다. 그 사이사이에 사우나를 즐기기도 했다.
욕장에서 운동으로 땀을 빼고 목욕을 즐긴 뒤에는 식사를 하는 게 일상적이었다. 식사를 한 다음에는 소화를 시키기 위해 다시 운동을 하거나 욕조에 몸을 담그기도 했다. 욕장에서 음악 공연이나 광대 쇼가 펼쳐지기도 했다. 이러니 오후 시간을 욕장에서 계속 보내도 지겹다는 생각을 할 틈이 없었다.
때로는 가지고 온 음식이나 욕장에서 파는 음식을 사서 욕실 안에서 먹기도 했다. 욕장에는 많은 가게가 설치돼 있어 음식은 물론 목욕 등에 필요한 각종 물건을 팔았다. 어떤 대형 욕장에는 욕실에서 흘러나온 물로 물레방아를 돌려 밀을 간 뒤 빵을 즉석에서 만들어 판매하기도 했다.
1세기 중반 네로 황제 시대에 궁전에서 황제를 보필하는 일을 맡았던 작가 가이우스 페트로니우스가 남긴 글을 보면 로마인이 어떻게 욕장을 이용했는지를 다시 한번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서둘러 옷을 벗었다. 먼저 테피다리움에 가서 땀을 흘린 뒤 프리기다리움에서 열을 식혔다. 거기서 우리는 다시 트리말키오를 발견했다. 그의 피부는 향기로운 오일을 발라 반짝이고 있었다. 그는 노예의 도움을 받아 때를 밀고 있었다. 단순한 아마사 직물이 아니라 아주 부드럽고 순수한 양털로 짠 옷감을 이용해서였다. 그는 우아한 보라색 옷을 입더니 화장실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제정 시대에는 일부 황제도 황궁의 목욕탕 대신 대중욕장에서 일반 시민과 함께 어울려 목욕을 즐기게 됐다. 신분을 알 수 없는 저자가 쓴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3세기 황제)갈리에누스는 여름이면 매일 6~7차례 욕장에 갔다. 겨울에는 두세 번에 그쳤다.’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는 오현제 중 한 명인 하드리아누스 황제와 관련해서 이런 내용을 담고 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종종 대중욕장에서 심지어 가장 천한 사람들과 목욕을 즐겼다. 그가 욕장에 갔을 때 벌어졌던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황제는 우연히 군에서 함께 복무했던 전직 군인을 만났다. 그 늙은 전직 군인은 벽에 등과 몸을 비비고 있었다. 황제는 이렇게 물었다.
“왜 대리석에 몸을 비비고 있는 것이오?”
노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몸의 때를 벗기고 싶지만 제게는 노예가 없답니다.”
황제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당신에게 노예 몇 명과 그들을 부릴 수 있는 경비를 드리지요.”
며칠 뒤 황제는 다시 대중욕장에 갔다. 그랬더니 수많은 노인이 벽에 등을 밀고 있었다.’
로마의 욕장은 남성만 가는 게 아니었다. 여성도 목욕을 즐겼다. 테르메에는 벽을 사이에 두고 남탕과 여탕이 붙어 있기도 했다. 같은 화로에서 데운 물을 서로 나눠 쓰게 돼 있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시절에 옥타비아누스의 어머니 아티아가 대중욕장에 갔다는 기록이 수에토니우스의 『열두 명의 카이사르』에 나온다. 그 내용은 이렇다.
‘아티아는 한밤중에 아폴로신전에 성스러운 예배를 드리러 갔다. 그녀는 쓰레기를 신전에 내려놓고 잠시 잠이 들었다. 함께 간 다른 부인들도 잠이 들고 말았다.
그때 갑자기 큰 뱀 한 마리가 그녀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아티아가 잠에서 깨었을 때 마치 남편이 그녀를 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들더니 몸에 마치 뱀 같은 흔적이 생겼다. 아무리 씻어도 흔적은 지워지지 않았다. 아티아는 할 수 없이 욕장에 가야 했다.’
시대가 시대였던 만큼 여성 욕장이 아무래도 남성 욕장보다는 작거나 불편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여성은 남성보다 입장료를 더 비싸게 냈다. 게다가 여성이 들어가는 욕장 개장시간은 남성 욕장보다 짧았다.
그래서 이런 전설 같은 이야기가 나오게 됐다. 욕장을 둘러싸고 쌓인 여성의 불만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다. 2세기 로마 문법학자 아울루스 겔리우스의 『아티카의 밤』에 나오는 내용이다.
‘캄파니아의 작은 도시인 테아눔에서 집정관의 부인이 욕장에 갔다. 작은 도시의 작은 욕장이었기 때문에 여성 전용 탕은 매우 좁았다. 화가 난 부인은 그 도시의 재무관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남탕을 모두 비우도록 해요. 그곳에 가서 목욕하고 싶군요.”
과연 어떻게 됐을까? 재무관은 부인의 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그것이 권력이었다.’
로마인에게는 욕장에서 꼭 지켜야 할 규칙, 관습도 많았다. 키케로는 『의무론』에서 이렇게 적었다.
‘아들이 사춘기에 접어들어 성을 이해할 나이가 되면 아버지와 함께 욕장에 가는 일은 삼가야 했다. 장인과 사위가 함께 욕장에 가는 일도 드물었다.’
로마가 점점 대국으로 성장하면서 목욕 문화는 달라졌다. 아그리파 욕장을 시작으로 해서 테르메라고 부른 대욕장이 생긴 이후로는 더 그랬다. 사람들은 떼를 지어 몰려가 함께 목욕을 즐기기도 했고, 심지어는 남녀가 같은 욕실에서 난잡하게 목욕하기도 했다.
남성과 여성이 같은 욕실에 들어갈 수 있도록 욕장 측이 허용한 것인지, 아니면 일부 욕장에는 남녀 공용 욕실만 있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남녀 혼욕 관습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금지시킬 때까지 이어졌다.
로마 욕장은 그다지 청결하지 않았던 것 같다. 물을 자주 갈지 않은데다 오일이나 때는 물론 심지어 대변 배설물까지 섞여 들어간 물을 다시 데워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질병 감염 우려가 높았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욕장이 너무 지저분하다고 자주 불평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니 얼마나 청결하지 않았는지를 알 수 있다. 의학서적 『데 메디시나』로 유명한 1세기 학자 아울루스 코르넬리우스 켈수스가 이렇게 지적할 정도였다.
‘목욕을 하면 치료 효과가 있다. 하지만 몸에 새로 생긴 상처가 있으면 가지 마라. 감염될 우려가 크다.’
로마에 불운한 일이 생기면 모든 신전의 문을 닫았던 것처럼 욕장도 문을 닫았다. 나라가 위기에 빠졌는데 한가하게 목욕이나 즐기고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칼리굴라는 ‘종교적 행사가 열리는 기간 중에 목욕이라는 사치스러운 일에 빠지는 것은 중대한 범죄’라고 말하기도 했다.
로마의 목욕 문화는 정복 전쟁을 수행하러 유럽과 오리엔트 곳곳으로 파견된 군대에 의해 외국에도 퍼져 나갔다. 군인들은 고향에서 하던 대로 목욕을 즐기기 위해 주둔지에 욕장을 세웠다. 전쟁이 벌어졌을 때에는 하루 종일 피 튀기는 싸움에 시달리고, 휴전 중에는 도로나 건물을 짓느라 전쟁 때보다 더 힘든 노역에 시달린 로마 병사에게 저녁에 즐길 수 있는 목욕은 하루의 피와 고통을 모두 씻어내는 일종의 종교적 제의 같은 것이었을 수도 있다.
로마인 덕분에 온천도시로 발전한 곳도 여러 곳 있다. 영국의 배스와 벅스톤, 프랑스의 엑스와 비시, 독일의 아헨과 비스바덴, 오스트리아의 바덴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