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그리파 욕장과 네로 욕장
로마의 베네치아 광장 앞을 지나는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 거리를 따라 산탄젤로 성 쪽으로 걷다보면 폼페이우스 대극장과 고대 신전 유적인 라르고 디 토레 아르젠티나가 나온다. 이곳을 등지고 서면 길 건너편에 비아 디 토레 아르젠티나 골목과 비아 데이 체스타리 골목이 보인다. 이 안쪽으로 200m 정도 걸어가면 판테온이 나온다.
판테온에 도착하기 전의 두 골목 사이에 세 블록에 걸쳐 건물이 들어서 있다. 이 세 블록이 아그리파 욕장이 있던 곳이다. 지금은 일부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이다. 아그리파 욕장은 로마인이 가장 먼저 만든 대형 대중욕장이었다. 제정 시대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친구이자 장군이었던 아그리파가 만든 시설이었다.
1~2세기 로마 역사학자 카시우스 디오에 따르면 아그리파는 BC 25년 판테온을 완공할 때와 비슷한 시기에 욕장을 지었다. 그가 죽고 난 뒤인 BC 12년 욕장은 완전 개방돼 로마 시민이라면 누구나 무료로 사용할 수 있게 됐다.
아그리파의 조상은 대대로 원로원 계층이 아니었다. 그는 로마에서 호모 노부스(신참)이었다. 아무리 노력하고 훌륭한 성과를 거둬도 아우구스투스의 자리를 차지할 수 없다는 사실은 자명했다. 아그리파는 어릴 때 이미 이런 사실을 알게 됐다. 그는 로마에서 군대와 전통의 힘이 얼마나 막강한지를 깨달았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도 이해했듯이 이것은 절대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군대가 자신의 길이라는 사실을, 절대 로마에서 1인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때부터 이해하고 있었다.
아그리파는 할 수 있는 일 중에서 최선을 선택했다. 바로 황제의 오른팔이 된다는 것이었다. 아그리파는 전혀 불평하지 않고 전쟁터에서도, 로마에 돌아와서도 아우구스투스를 위해 묵묵히 충실하게 임무를 수행했다. 그는 수로인 아쿠아 율리아를 새로 건설했고, 아쿠아 마르키아를 보수해 고질적인 로마의 물 부족 문제를 완벽하게 해소했다. 또 각종 도로와 하수구를 보수했고, 엄청난 규모의 검투사경기 등 다양한 행사도 성공적으로 개최했다.
판테온과 아그리파 욕장은 서로 붙어 있었기 때문에 재미있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원래 판테온은 애초에 아그리파 욕장의 출입구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판테온과 아그리파 욕장이 나란히 붙어 있었기 때문에 나오는 재미있는 주장이다. 실제 두 건물과 넵투누스 신전은 남북 방향으로 나란히 이어져 있었다고 전해진다.
판테온을 짓고 보니 워낙 웅장하고 아름다운 건물이 돼버렸고, 욕장 출입구로 쓰기는 아까워 몇 가지 시설을 덧붙여 신전으로 봉헌했고, 대신 아그리파 욕장에는 출입구로 쓸 열주 회랑을 따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주장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방법이 없지만 아그리파 욕장은 아그리파가 처음 만든 판테온에는 연결돼 있지 않았다는 게 정설이다. 하드리아누스가 욕장을 증축하면서 여러 홀을 새로 만들어 붙인 덕분에 결국 판테온까지 이어지게 됐다. 어쨌든 사실 판테온 안에 들어가 보면 목욕탕이나 입구처럼 생겼다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아그리파 욕장은 처음에는 판테온에 연결돼 있지 않았다. 하드리아누스가 욕장을 증축하면서 여러 홀을 새로 만들어 붙인 덕분에 결국 판테온까지 이어지게 됐다. 하드리아누스가 만든 직사각형 홀은 길이 45m, 폭 9m에 이를 정도로 웅장했다.
벽 두께만 1.75m였다. 홀에는 터키산 파보나제토 대리석과 붉은색 화강암으로 만든 기둥을 세웠다. 1~4번 기둥 사이에는 3개의 벽감이 있었는데, 두 개는 직사각형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반원형이었다.
아그리파 욕장은 개장 초창기에는 물이 부족해 건식 사우나인 라코니쿰으로 운영됐다. 욕조는 없었고 온도만 높여 몸을 데워 살을 빼는 사우나 비슷한 곳이었다. 아그리파가 BC 19년 수로인 비르고 아쿠아를 완공한 덕분에 물을 공급할 수 있게 되자 아그리파 욕장은 정식 테르메 시설을 갖출 수 있었다. 아그리파는 욕장을 여러 가지 미술품으로 장식했다. 조각상을 갖다 놓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리스의 그림 등도 걸어놓았다.
아그리파 욕장의 정확한 구조는 20세기 초 발견된 마블 플랜이라는 지도 덕분에 알려졌다. 마블 플랜은 2세기 초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시대에 학자 마테오 카다리오가 만든 대리석 지도였다. 라틴어로는 포르마 우르비스 로마라고 한다.
마블 플랜은 가로 18m, 세로 13m의 초대형 대리석에 새긴 지도였다. 원래 아우구스투스 영묘 인근에 있는 평화의 제단 벽에 붙여져 있었다. 마블 플랜은 로마를 240분의 1로 축소한 지도였다. 당시 로마에 있던 신전, 공공건물, 욕장, 인술라, 빌라 등을 모두 기록하고 있었다.
마블 플랜은 중세 시대, 그리고 르네상스 시대에 교회와 귀족 저택을 짓는 데 사용되느라 뜯겨나갔다. 그 중 조각 1,000여 개가 곳곳에서 발견돼 고대 로마 시내 모습을 조금이나마 보여주고 있다. 발견된 조각은 전체 지도의 10% 분량이라고 한다.
마블 플랜에 따르면 아그리파 욕장은 판테온을 축으로 해서 남북 방향으로 세워졌다. 남북으로 길이는 100~120m, 동서로 폭은 80~100m 정도였다고 하니 엄청나게 큰 욕장이었음에 틀림없다. 북쪽 끝은 판테온이었고 남쪽 끝은 오늘날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거리였다. 그리고 서쪽은 비아 데이 체스타리 골목, 서쪽은 비아 디 토르 아르젠티나였다.
아그리파 욕장의 중간 부분에는 지름 25m의 대형 홀이 세워져 있었다. 3세기 무렵 시리아 출신 황제인 알렉산데르 세베루스가 건설한 것으로 알려졌다. 흥미로운 점은 홀에 붙어 있던 아르코 델라 키암벨라라는 이름의 돔에 자오선이 그려져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미 3세기 무렵에 로마인은 자오선을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17세기에 신분을 알 수 없는 화가가 그린 스케치 그림에 자오선이 그려진 돔이 담겨 있다. 그렇다면 17세기까지도 아그리파 욕장은 나름대로 모양을 갖추고 있었고, 이후 교회나 귀족 저택을 짓느라 뜯겨나갔다는 이야기가 된다.
아그리파 욕장 서쪽에는 대형 인공 호수인 스타그눔과 아그리파의 개인 정원인 호르티가 건설돼 있었다. 아쿠아 비르고와 연결된 스타그눔은 욕장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보인다. 스타그눔과 호르티는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거리와 코르소 델 리나시멘토 거리, 비아 델 세디아리 골목, 비아 몬테로네 골목 사이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은 호수, 정원 모두 사라져 보이지 않는다.
아그리파 욕장은 80년 티투스 황제 시대에 발생한 대화재로 큰 피해를 입었다. 이때 티투스는 물론 그의 뒤를 이은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사비를 들여 복원했다. 세월이 흘러 다시 시설이 낙후되자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재정비했다. 하드리아누스는 아그리파가 처음 만든 판테온도 완전히 새로 지었으니, 이렇게 보면 아그리파 건축의 계승자라고 불러도 좋을 듯하다.
비아 디 토레 아르젠티나 옆 골목인 비아 몬테로네에는 치에사 디 산타 마리아 인 몬테로네 교회가 있다. 이 교회 인근에서 ‘오래돼 낡은 욕장’이라고 쓰인 명판이 발견됐다. 로마 후기 황제였던 콘스탄티우스와 콘스탄스 형제가 아그리파 욕장을 수리한 기록으로 추정된다.
이제 마지막으로 아그리파 욕장의 흔적을 찾으러 가 보자. 앞부분에서 설명했듯이 라르고 디 토레 아르젠티나에서 비아 데이 체스타리 골목이나 비아 디 토르 아르젠티나 골목 안으로 들어가 걷다 보면 두 골목을 연결하는 첫 골목이 나타난다. 비아 델 아르코 델라 키암벨라이다.
이곳이 바로 자오선이 그려진 돔을 가진 홀, 아르코 델라 키암벨라가 있던 곳이다. 이곳에는 지금도 아그리파 욕장의 흔적이 조금 남아 있다. 구글맵에서 살펴보면 아그리파 욕장(Terme di Agrippa)과 아르코 델라 키암벨라(Arco della Ciambella)라는 유적 표시가 나온다. 바로 이곳이다.
아그리파 욕장은 로마 시민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로마인은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와 아그리파의 통 큰 사회 기부에 매우 감사했다.
어머니가 클라우디우스 황제를 암살한 덕에 제위에 오른 네로 황제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시민의 지지와 애정이었다. 그는 아그리파를 본받아 욕장을 만들어 시민들의 호의를 얻어내려 했다.
네로는 아그리파 욕장이 만들어져 있던 판테온 근처에 로마의 두 번째 공공욕장을 만들었다. 아그리파 욕장처럼 아쿠아 비르고에서 물을 공급받기 위해 그곳을 욕장 위치로 정했을 것으로 보인다.
성 히에로니무스가 쓴 『연대기』에 따르면 네로 욕장은 64년에 완공됐다. 네로는 체육관인 김나지움도 건설했는데, 네로 욕장 안에 설치됐을 것으로 역사학자들은 본다. 네로 욕장은 227년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황제 시대에 거의 새로 짓다시피 개축됐다. 이후 이 욕장은 공식적으로는 알렉산데르 욕장이라고 불리게 됐다.
네로 욕장은 아그리파 욕장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만든 인공호수 스타그눔 인근에 있었다. 지금 스타그눔이 있었던 곳으로 알려진 비아 세디아리 골목 바로 옆에는 산티보 알라 사피엔자 성당이 있다. 성당 다음 골목으로 건너가면 이탈리아 상원인 팔라초 마다마가 나온다.
성당과 상원 건물 사이의 조그마한 광장에 작은 분수가 나타난다. 고대 로마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성 에우스타체 광장 분수다. 네로 황제가 만든 대중욕장에 달려 있었다고 하는 분수다.
네로 욕장은 판테온과 스타디움 도미티아니(도미티아누스 경기장, 지금의 나보나 광장) 사이에 직사각형으로 만들어졌다. 가로 190m, 세로 120m여서 면적만 놓고 보면 아그리파 욕장보다 약간 더 컸다.
네로 욕장은 중세 시대에 완전히 망가져버렸다. 중앙 홀에 있던 적색 화강암 기둥 4개는 17세기 교황 알렉산데르 7세 시대에 판테온을 수리하기 위해 뜯겨 나갔다. 하얀색 대리석으로 만든 기둥머리, 터키산 대리석 파보나제토와 적색 화강암 등으로 만든 다른 열주 기둥, 지름이 6.70m나 됐다는 세숫대야 모양의 초대형 분수 등도 모두 중세 시대에 뜯겨 나가 여러 교회를 짓는 데 사용됐다.
16세기까지만 해도 열탕인 칼다리움의 기반은 남아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거의 완전히 파괴돼버린 탓에 팔라초 마다마에 벽 부분 일부를 제외하고는 남아 있는 게 없다.
모두가 네로 욕장을 잊고 있던 1871년 판테온 인근 마다마 궁전에서 우리나라의 온돌 비슷하게 바닥을 가열해서 열을 내는 시설인 히포카우스트가 발견됐다. 이곳에 사용된 벽돌에는 123년에 만들었다는 상표가 찍혀 있었다. 1907년에는 인근에서 164년, 364년, 371년, 404년 상표가 찍힌 벽돌들이 발굴됐다. 네로 욕장이 첫 건설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보수되거나 증축됐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판테온에서 나보나광장으로 가는 골목인 살리타 데이 크레센치에 있는 네로 시대의 벽에서는 수도관도 발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