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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Oct 30. 2020

테르메(4)

카라칼라 욕장과 디오클레티아누스 욕장



카라칼라 욕장



카라칼라는 오현제 시대에 막을 내린 황제 코모두스가 암살당한 뒤 제위에 오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아들이었다. 아버지 세베루스가 212년 브리타니아 원정 도중 눈을 감자 그는 동생 게타를 살해하고 단독 황제 자리에 올랐다. 폭정으로 인기가 없었던 그는 불과 5년 뒤 파르티아 원정에 나섰다 근위대에 암살당하고 말았다.


이처럼 재위 기간이 짧다 보니 카라칼라에게는 남긴 업적이 거의 없었다. 그나마 평가를 받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로마 시민권을 개방해 로마제국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나눠줬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로마가 멸망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하는 단초를 제공했다는 비난에 시달린다.


다른 하나는 카라칼라 욕장이다. 현재 위치로 설명하면 지하철 치르코 맛시모 역 바로 인근에 있다. 콜로세움에서 걷는다면 팔라티노 언덕 앞 도로를 10분 정도만 가면 된다.


아그리파 욕장과 네로 욕장은 거의 흔적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된 반면 카라칼라 욕장은 원형을 상당 부분 보존하고 있다. 추정컨대 아그리파 욕장과 네로 욕장은 로마 시내 한복판에 위치하고 있었고, 카라칼라 욕장은 변두리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게 다른 결과를 낳은 이유가 아닐까?


카라칼라 욕장은 로마의 첫 고속도로였던 아피아 가도 인근에 만들어졌다. 면적은 121만㎡에 이른다. 5년 동안 9천여 명을 동원해 공사를 진행한 끝에 카라칼라 암살을 전후해 완공됐다. 원래 이곳에는 낮은 언덕이 있었다. 카라칼라는 언덕의 높은 부분을 깎아내고 낮은 다른 쪽에는 흙을 쌓는 방법으로 땅을 평평하게 만들어 공사를 진행했다.


이 욕장은 아쿠아 마르키아의 지류 격인 아쿠아 안토니니아나에서 물을 공급받았다. 따로 저수조를 만들지 않고 욕장 안으로 바로 물을 받아들였다.


카라칼라 욕장은 네로 욕장처럼 우리나라의 온돌인 히포카우스트 방식으로 열을 올려 실내를 데웠다. 욕장이 깔끔한 상태였을 때를 그린 그림을 보면 우리나라의 사우나가 금세 떠오른다.


욕탕 안에 벽돌을 쌓아 계단처럼 만들어놓은 실내 공간에 사람이 앉아 화덕에서 나온 열로 땀을 뺐다. 바닥을 데운 열은 욕실 벽에 만들어놓은 빈 공간을 타고 올라가면서 실내를 데웠다. 열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한 대책이었다.


카라칼라 욕장에는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는 조각이 특히 많았다. 원래는 욕실이나 벽 곳곳에 마련된 벽감에 설치돼 있었다. 조각은 단순히 장식용으로만 사용된 것은 아니었다. 분수로도 사용했다. 수도관이 설치돼 있어 물이 흐르게 돼 있었다. 조각은 대부분 대리석으로 만들어 색칠했거나, 아니면 청동으로 만들기도 했다.


석재로 만든 카라칼라 욕장의 조각은 로마 멸망 이후 중세에 이를 때까지 대부분 부서졌고, 청동으로 만든 조각은 녹여져 다른 용도로 재활용됐다. 부서지거나 녹은 것은 조각뿐만이 아니었다.


카라칼라 욕장 벽이나 천장, 담장을 꾸몄던 많은 장식도 마찬가지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테베레강 건너편 트라스테베레 지역의 산타마리아 성당에는 대리석 기둥 네 개가 있다. 1140년 무렵 교황 인노첸시오 2세의 명령에 따라 카라칼라 욕장에서 뜯어간 것이다.


카라칼라 욕장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조각은 파르네스 헤라클레스다. 16세기 중엽 파르네스 가문 출신인 교황 바오로 3세는 오래 된 가문 저택인 파르네스 궁전을 화려하게 꾸미기로 했다.


‘고대 로마, 그리스 조각을 찾아내 궁전을 장식하는 게 좋겠군. 카라칼라 욕장을 뒤지면 뭔가 나오겠지.’


바오로 3세는 카라칼라 욕장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했다. 그렇게 해서 유일하게 찾아낸 게 헤라클레스 석상이었다. 파르네스 가문이 석상을 발견했다고 해서 파르네스 헤라클레스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석상은 지금은 나폴리의 고고학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바오로 3세는 석상을 찾아내 가져가거나 여러 가지 장식을 뜯어가는 것 말고 카라칼라 욕장을 재건하거나 유지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발굴조사 이후에는 다시는 욕장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 욕장은 17~18세기에는 경작지로 사용되기도 했다.




카라칼라 욕장은 19세기에 복원을 빙자해서 실시된 발굴조사 때문에 한 번 더 망가졌다. 그때도 교회나 귀족은 여전히 욕장의 대리석이나 여러 장식품을 떼 가는 게 일상적이었다. 한쪽에서는 욕장을 복원한다면서 땅을 파 발굴조사를 벌이고, 다른 한쪽에서는 발굴조사에서 찾아낸 장식품을 가져가는 게 당시의 현실이었다.


당시 카라칼라 욕장에서 뜯어간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장식품은 모자이크였다. 원래 카라칼라 욕장의 모자이크는 개장 당시부터 매우 화려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모자이크의 모양과 무늬는 장소에 따라 다양했다. 바닥에 깔린 모자이크가 있는가 하면 벽을 장식한 모자이크도 있었고, 천장을 예쁘게 꾸민 모자이크도 존재했다.


가장 유명한 모자이크는 팔라스트라 바닥을 장식한 운동선수 모자이크였다. 1824년 발굴조사 도중 발견된 이 모자이크는 바로 뜯겨 나가 라테라노 대성당을 장식하는 데 쓰였다. 1960년대에는 바티칸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지금 바티칸 박물관에 가면 운동선수 또는 운동과 관련된 내용의 모자이크를 볼 수 있는데, 카라칼라 욕장에서 뜯어온 것이다.


20세기 중반 카라칼라 욕장은 음악 공연 등을 개최하는 장소로 인기를 누리기 시작했다. 마치 독일 하이델베르크의 고성처럼 현대의 로마인은 카라칼라 욕장이 주는 폐허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혀 버린 것이었다.


그런데 그때까지도 로마인은 문화유적 보존에 무관심했다. 오페라 공연을 한다면서 카라칼라 욕장에 코끼리를 입장시켜 일부 시설에 피해를 주는 일도 있었다. 그나마 완전히 붕괴하지 않고 조금이라도 살아남은 게 카라칼라 욕장으로서는 다행인 셈이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욕장



 “이 엄청난 시설이 욕장이라고?”


디오클레티아누스 욕장은 건국 초기부터 목욕을 즐겼던 로마인에게도 충격적일 정도로 엄청난 규모의 목욕시설이었다. 욕장과 운동시설만 있는 게 아니라 거대한 도서관과 너른 정원까지 갖춰 책을 읽고 토론을 하거나 산책까지 하면서 육체건강은 물론 정신건강도 지킬 수 있는 다목적 공간이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욕장 공사를 시작한 사람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친구로 사두정치에서 동방 지역 황제를 맡았던 막시미아누스였다. 298년 시작한 공사는 305~306년 사이에 끝났다. 욕장 곳곳에서 발견된 명문에는 막시미아누스가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 욕장을 헌정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욕장은 비미날레 언덕 꼭대기에 건설됐다. 당시에는 땅값이 상당히 비싼 고급주택지였다. 포로 로마노 같은 시내 한복판에서는 약간 떨어져 있었지만 아그리파 욕장이나 네로 욕장보다는 시내에 가까웠다.


현재 위치를 보면 테르미니 역 바로 인근에 있는 원형의 레푸블리카 광장을 중심으로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 에 데이 마르티리 성당과 성당 뒤에 있는 국립로마박물관, 성당 맞은편에서 반원형으로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두 건물이 모두 디오클레티아누스 욕장이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욕장의 규모는 카라칼라 욕장과 비슷했다. 아그리파 욕장, 네로 욕장보다는 훨씬 컸다. 대충 가로 356m, 세로 316m였다. 본 건물 크기만 가로 280m, 세로 160m에 이를 정도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욕장이 생긴 이후 로마인은 매일 이곳에 들러 시원하게 목욕을 즐기는 게 일상이 됐다. 단 하루도 가지 않는 날은 드물었다. 로마인은 번잡한 포로 로마노 등 로마 시내에서 벗어나 한가한 디오클레티아누스 욕장에서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곤 했다.


욕장 남쪽에 있는 반원형 테라스에 서면 로마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욕장에서 얻는 감각적 즐거움이 얼마나 짜릿했던지 이곳에 한번이라도 다녀온 사람은 반드시 그 다음날 다시 들르지 않을 수 없었다. 한마디로 마치 마약 같은 시설이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아그리파, 네로와 달리 당시로서는 시내에 가까운 비미날레 언덕에 초대형 욕장을 만든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로마 시민들이 수시로 욕장에 들러 건물 정면에 붙은 디오클레티아누스라는 이름을 보면서 황제에게 늘 감사한 마음을 느끼게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로마에 상주하지 않은 그로서는 이렇게 하는 것이 로마인의 마음을 안정시키고 자신이 창안한 사두정치의 안정을 유지하는 지름길이었다.


로마인이 디오클레티아누스 욕장을 애용하게 된 것은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시설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욕장에서는 보기 힘든 엄청난 양의 물 순환 시설, 현대 욕장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다양한 수온 및 물 배송 시스템은 놀라울 정도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욕장의 물은 아쿠아 마르키아에서 공급받았다. 물은 별도의 저수조에 담아놓았다. 저수조의 위치는 현재 테르미니 역 근처였다. 테르미니 역과 레푸블리카 광장 사이에 시티투어 등 대형 관광버스가 주차하는 구역이 있는데, 바로 그곳이 저수조 자리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욕장은 먼저 만들어진 카라칼라 욕장에서 많은 부분을 모방했다. 건축가들은 공간감각을 극대화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각 욕실 천장은 매우 높게 만들어졌고, 거대한 기둥이 연이어 세워졌다. 벽을 따라 수많은 벽감(움푹 들어간 부분)이 만들어져 마치 욕실이 끝없이 이어지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메인 건물 주변에는 너른 정원이 조성됐으며, 정원 주변을 부속 건물이 빙 둘러싸고 있었다. 건물은 주로 벽돌로 만들었지만, 외벽은 소석회 등 화장도료로 덮는 스투코 기법으로 마감해 마치 석재로 만든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욕장에는 대형 도서관도 있었다. 본관의 끄트머리에 붙어 있는 건물이 도서관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도서관의 규모나 정확한 기능은 분명하게 규명돼 있지 않은 상태다. 고대 서적이나 각종 기술 관련 서적을 많이 보관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만 나온다. 젊은이들은 이곳에서 책을 읽거나 반원형 담화공간인 엑세드라에 둘러앉아 다양한 아이디어를 서로 교환하기도 했다. 욕장 본관과 도서관은 조용한 정원으로 나뉘어 있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욕장은 고대 로마가 멸망한 이후인 537년 로마로 쳐들어온 토틸라의 동고트족이 아쿠아 마르키아를 파괴하면서부터 피폐해지기 시작했다. 중세시대에 고대 로마를 지켜온 대부분 건축물이 파괴돼버렸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 욕장이 그나마 과거 모습을 일부라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판테온이 그랬던 것처럼 교회로 바뀐 덕분이었다.


1561년 교황 비오 4세는 카르투시오 수도회에 디오클레티아누스 욕장을 보호하면서 교회로 바꾸라고 지시했다. 이 사업을 책임지게 된 사람은 르네상스 시대 최고 건축가였던 미켈란젤로였다. 그는 욕장을 바실리카 데 산타 마리아 데글리 안젤리 에 데이 마르티리라는 긴 이름의 교회로 리모델링했다. 그는 욕장 부분을 수도사 숙소와 회랑으로, 다른 공간은 여러 종교 활동을 진행할 수 있는 행사장으로 바꾸었다.


교황이 디오클레티아누스 욕장에 교회를 세우려 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기독교를 탄압한 황제였던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목욕장을 건설할 때 기독교도 4만 명을 강제로 노역에 동원했다는 전설 때문이었다. 실제 그 정도 규모는 아니었지만 일부 기독교도가 강제로 목욕장 공사에 끌려간 것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이름도 ‘성모 마리아와 천사와 순교자의 교회’다.


‘성모 마리아와 천사와 순교자의 교회’는 활처럼 휘어진 모양이다. 욕장의 열탕과 온탕을 구분했던 벽을 그대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교회 안은 과거 온탕이다. 본체는 과거 냉탕 구역이다. 교회는 가로로 긴 십자가 모양이다. 교회 설계를 맡은 미켈란젤로가 원래 상태를 많이 남기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욕장은 오늘날에는 국립로마박물관, 레푸블리카 광장, ‘성모 마리아와 천사와 순교자의 교회’, 에스드라 광장으로 바뀌었다.


16세기 말~17세기 초에 살았던 베니스 출신의 화가 지아코모 라우로는 당시 남아 있던 디오클레티아누스 욕장 전경을 그림에 담았다. 물론 그의 그림은 고대 로마 시대 디오클레티아누스 욕장의 원래 모습은 아니다. 그 이후에 덧붙여진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림을 보면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만든 욕장이 얼마나 굉장했을지 상상하기에 전혀 부족하지 않다.



서구인은 과거에도 그렇고 지금도 로마의 목욕 문화를 이해하지 못한다. 황제나 원로원 의원이 평민, 노예와 같은 욕장에서 벌거벗은 몸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면서 서로 땀을 흘리고 대화를 나누고 밥을 먹는 것을 퇴폐한 로마 사회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집안을 지켜야 하는 여성이 옷을 다 벗은 채 서로 깔깔 웃고 장난을 치는 모습도 이해하지 못한다.


로마를 연구하는 많은 유럽, 미국 역사학자, 고고학자도 표면적으로는 로마 목욕 문화를 이해하는듯하면서도 실제로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사생활을 매우 중시한 서구인에게 목욕은 그 중에서도 특히 은밀한 사생활의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인이 만약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로마의 욕장에 들어가 본다면 다들 배꼽을 잡고 웃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한국의 목욕탕, 사우나와 똑같은 풍경이 이미 2000년 전 로마에서 태연하게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해본다. 운동을 하거나 등산을 다녀온 뒤 함께 목욕탕에 가는 게 일상적인 한국인이 로마인을 만나 대화를 나눈다면 다른 서구인보다 훨씬 더 말이 잘 통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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