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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Nov 02. 2020

성 밖의 성 바오로 대성당(1)

성 바오로의 순교



로마 시내에서 벗어나 키르쿠스 막시무스에서 남쪽으로 길게 이어지는 비아 아벤티노(아벤티노 거리)와 비아 오스티엔스(오스티엔스 거리)를 따라 3㎞ 정도 내려가면 오스티엔스라는 지역이 나온다. 서민이나 노동자 계층이 주로 사는 지역이다.


이곳에 ‘T’자 모양으로 생긴 독특한 성당이 보인다. 이름도 재미있다. ‘바실리카 디 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번역하면 ‘성 밖의 성 바오로 대성당’이다.


도대체 무슨 성당이기에 이렇게 희한한 이름을 붙인 것일까? 이 성당은 4세기 무렵 처음 만들어진 성당이다. 성 바오로를 모시고 있는 이다. 그가 순교한 장소가 당시 로마 성 밖에 있었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성 밖의 성 바오로 대성당은 만만히 볼 곳이 아니다. 라테라노 대성당, 성 베드로 대성당,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과 함께 로마의 4대 메이저 대성당에 포함된 곳이다. 규모로 보면 성 베드로 대성당에 이어 로마에서 두 번째로 큰 곳이다. 당연히 그 위상이 엄청난 성당이다. 여기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겨있을까?





4대 메이저 대성당



성 바오로 대성당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4대 메이저 대성당에 대해 알아보자. 라틴어로는 바실리카 마이오르, 영어로는 메이저 바실리카다. 라테라노 대성당 외에 성 베드로 대성당, 성 밖의 성 바오로 대성당,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이 메이저 대성당이다. 이 가운데 성 베드로 대성당만 교황청의 주권구역인 바티칸 시국 영토 안에 자리 잡고 있다. 나머지 셋은 이탈리아 영토 안에 있지만 라테라노 조약에 따라 외국대사관처럼 치외법권 적용을 받는다.


바실리카 마이오르 제도는 1300년 교황 보니파시오 8세에 의해 도입됐다. 그는 ‘최고 신앙 보고’라는 칙령을 발표해 50년마다 돌아오는 성스러운 해를 뜻하는 성년(聖年) 제도를 만들었다. 원래는 ‘노예와 죄수가 자유를 얻고, 모든 빚은 탕감되고, 하느님의 자비가 온 세상에 퍼진다’는 유대교의 전통이었다. 보니파시오 8세가 천명한 성년은 유대교 전통과 조금 달랐다. 그는 이렇게 강조했다.


“성년에 완벽하게 죄를 회개하고 고해해야 합니다, 로마를 방문해서 세계에 기독교를 퍼뜨린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의 무덤인 성 베드로 대성당과 성 바오로 대성당을 순례해야 합니다. 그래야 죄를 사면 받을 수 있습니다.”


다음 성년이었던 1350년 교황 클레멘스 6세는 죄를 사면 받을 수 있는 성당 명단에 라테라노 대성당을 포함시켰다. 그는 “매일 세 대성당을 찾아가 예배를 드리라”고 신도들에게 촉구했다. 또 그 다음 성년이었던 1390년에는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도 여기에 이름을 올렸다. 이후 역대 교황들은 “성년에 4대 성당을 방문하는 것은 죄를 사면 받을 수 있는 중대한 조건’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슬람이 무슬림에게 메카를 평생에 한 번은 순례하도록 한 것과 비슷한 내용이었다.  


바실리카 마이오르에 포함된 네 성당의 공통적인 특징은 성스러운 문인 성문(聖門)을 각각 갖고 있다는 점이다. 성문은 평소에는 모르타르나 시멘트를 발라 안쪽으로 잠가 놓지만 교황이 지정하는 성년에 순례자들에게 개방한다. 순례자들은 이 문을 통과해야 죄를 사면 받을 수 있는 조건을 충족하게 된다.


그런데 현재 교황 프란체스코는 2015년 전 세계 모든 교구에 매우 흥미로운 지시를 내렸다. 그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각 교구는 성문을 하나씩 지정해 성년에 굳이 로마로 오지 않더라도 절대적인 사면을 받을 수 있게 하라.’


 이에 따라 스페인 갈리시아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 필리핀 마닐라의 산토 토마스 교황 대학교 예배당, 캐나다 퀘벡의 노트르담대성당 등이 교황청으로부터 성문 지정 허가를 받았다.




성 바오로의 순교

 


성 바오로는 성경에 나오는 대로 기독교도들을 박해하다 뒤늦게 깨달음을 얻어 기독교도로 개종하고, 더 나아가 예수의 말씀을 전파하는 사도로 맹활약한 인물이다. 그의 일생과 관련한 내용은 『신약성서』 <사도행전>에 상세하게 나타난다. 하지만 ‘60년 무렵 예루살렘에서 로마에 도착한 이후 가택연금 돼 2년을 보냈다’는 문장으로 서술을 멈추는 바람에 그가 로마에서 무슨 일을 하다 어떻게 죽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성 바오로는 그리스 곳곳에서 전도를 하고 다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지만 유대인들에 의해 ‘왕을 자처한다’는 이유로 기소 당했다. 위기에 몰린 성 바오로는 로마 시민권 소지자임을 이용해 ‘로마 황제에게 항소하겠다’고 주장했고, 이에 따라 로마로 끌려갔다.


고대 로마에서 로마 시민은 유죄 판결을 받을 경우 황제에게 최종적으로 판결을 내려달라고 항소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성 바오로는 로마에서 재판을 기다리는 3년 동안 많은 사람에게 예수의 말씀을 전파했다.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의 노력 덕분에 로마제국의 수도인 로마에서도 기독교가 널리 퍼질 수 있었다.


성 바오로는 64년 네로 황제 시대에 발생한 대화재 이후 처형당한 것으로 기독교는 믿고 있다. 그의 순교를 정확히 설명하면 ‘처형당했다’고 후세에 기록이 ‘정리’됐다. 현대 역사학자들은 성 바오로가 가택연금에서 풀려난 이후 죽을 때까지 3년의 기록을 확인하기 위해 여러 가지로 연구하고 있지만 아직 제대로 알려진 내용은 없다.


성 바오로가 순교한 해는 65년이라고 한다. 일부에서는 네로의 집권 마지막 해였던 68년 2월 22일이 그가 순교한 날이었다고 한다. ‘성 바오로는 네로 황제의 명령에 따라 처형당했다’는 기록도 있고, 네로가 성 바오로를 직접 죽였다는 전설도 있다. 네로가 자리에 없는 틈을 타 한 행정관이 성 바오로를 참수하라고 지시했다는 기록도 있다.


성 바오로가 어디서 처형당했는지는 불분명하다. 그의 처형 장소는 후세에 ‘세 분수 수도원’으로 번역할 수 있는 트레 폰타네 수도원으로 ‘정리’됐다. 비아 라우렌티나(라우렌티나 가도)에 있는 아쿠아 살비아 근처였다. 이 수도원은 포로 로마노에서 12㎞나 떨어진 먼 곳이다.


사형수를 그 먼 곳까지 데리고 가서 죽인 것은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다. 지금은 자동차가 있기 때문에 12㎞라고 해도 5~10분이면 갈 수 있지만, 1세기 무렵에는 함부로 다닐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전설에 따르면 성 바오로가 참수당한 뒤 그의 머리가 세 번 땅에서 튀었다. 그의 머리가 튀면서 땅에 닿은 곳에 샘이 하나씩 생겼고, 그것이 ‘세 분수’ 즉 트레 폰타네가 됐다. 이곳은 오늘날 ‘산 파올로 알레 트레 폰타네(성 바오로의 세 분수)’로 알려져 있다.


성 바오로의 몸에서 피 대신 우유가 솟아올랐다는 전설도 있다. 이런 내용의 전설은 사실 페르시아에서 생긴 마니교에서 처음 나온 것이다.


바티칸에서 순교한 성 베드로도 그랬지만 성 바오로가 순교한 뒤 시신을 수습하는 데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어떤 이유에서든 어떤 사람이든 죽으면 무덤을 갖게 하는 게 고대 로마의 풍습이었다. 순교한 기독교도의 유족들은 순교자가 세상을 버린 현장에서 가까운 곳에 시신을 묻었다. 이것도 당시 풍습이었다. 그들이 묻힌 곳은 대부분 기독교도가 소유한 부지였으며, 도시 밖으로 이어지는 유명한 도로 주변이었다.


성 바오로가 묻힌 땅의 주인은 루키나였다. 당시 성 바오로의 후원자 중 한 명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성 바오로가 죽었을 때 그의 땅에 묻었을 것이다. 루키나가 단순히 성 바오로의 후원자에게 무덤용으로 땅을 팔았을 수도 있다. 성 바오로가 묻힌 뒤 그의 무덤에는 ‘추억의 방’이라는 뜻인 추모시설 셀라 메모리아가 생겼다. 이후 많은 기독교인이 그를 추모하기 위해 무덤을 참배했다.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의 유해는 200년가량 지하 납골소에 안전하게 모셔져 있었다. 망자가 묻힌 곳은 절대 훼손하지 않는 게 고대 로마 풍습이었던 덕분이다. 하지만 258년 군인황제 시대에 상황은 돌변했다. 군인 출신으로 야만족을 물리치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무덤을 보호하는 풍습의 특권에서 기독교를 제외한다는 조치를 내렸기 때문이었다.

Dnalor_01-Wikimedia Commons-CC-BY-SA 3.0


“황제를 무시하고 로마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기독교도들은 로마에 묻힐 자격이 없다. 불손한 기독교도들의 무덤까지 보호할 이유는 없다”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의 유해가 훼손될지도 모른다고 걱정한 기독교도들은 비밀리에 두 성인의 유해를 빼내 성 바오로 대성당 인근에 있는 성 세바스티아노의 카타콤베에 숨겼다. 두 성인의 유해를 옮겼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대부분 기독교도들은 두 성인의 유해가 원래 무덤에 그대로 있다고 믿었다. 세월이 흘러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세상을 떠나고 기독교 탄압이 시들해졌을 때에야 성 베드로의 유해는 바티칸으로, 성 바오로의 유해는 비아 오스티아나로 되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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