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의 초상화와 세계의 종말 전설
성 베드로부터 15세기까지 역대 교황들의 전기를 모은 『교황 연대기』에 따르면 성 바오로의 무덤 위에는 처음에 아주 작은 성당이 만들어졌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건설을 시작했고 324년 11월 18일 완공된 성당이었다. 이 성당은 비아 라우렌티나 가도와 비아 오스티엔시스 가도가 만나는 접경지에 아주 애매한 모양으로 세워졌다.
4세기 말 발렌티니아누스 2세, 테오도시우스 1세, 아르카디우스 황제는 기존의 성당을 없애고 더 큰 대성당을 새로 짓는 일에 착수했다. 공사를 맡은 건축가는 키리아데스였다. 옛 성당의 개선문에 있던 명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새 대성당은 390년 교황 시리치오 시대에 봉헌됐고, 실제 준공은 395년 호노리우스 황제 시대에 이뤄졌다.’
새 대성당 건설의 핵심은 성 바오로의 무덤과 기존에 있던 작은 성당을 가능하면 보존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성당이 있던 곳을 지나는 고대 로마 시대 길의 방향이 바뀌어버렸다. 로마 속주 타라코넨시스 출신의 기독교 시인 프루덴티우스는 대성당 외관을 이렇게 설명했다.
‘도금한 청동타일을 붙인 지붕으로 덮였다.’
성 밖 성 바오로 대성당은 지진, 화재 등으로 여러 차례 큰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가장 큰 고비는 8세기 무렵 랑고바르드 족과 이슬람 해적의 침입이었다. 이탈리아 북부에 롬바르드 왕국을 세운 랑고바르드 족은 739~773년 사이 여러 차례 대성당을 약탈했다. 843년에는 이슬람 해적이 테베레 강을 타고 올라와 역시 성당을 약탈했다. 전설에 따르면 세르지오 3세가 미리 은폐용 벽을 쌓아둔 덕분에 성 바오로의 무덤은 파괴되지 않았다.
연이은 약탈로 성 밖 성 바오로 대성당이 큰 피해를 입자 교황청은 883년 성당을 보호하기 위해 성벽과 성탑을 쌓았다. 이 덕분에 성벽으로 둘러싸인 작은 마을이 하나 만들어졌다. 사람들은 성벽 건설을 주도한 교황 요한 8세의 업적을 기리는 뜻에서 마을에 ‘요한의 도시’라는 뜻인 요하니폴리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성벽은 이후 대성당을 보호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특히 1083~84년 로마로 쳐들어온 동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의 침공 때 대성당이 약탈당하지 않도록 막아주었다.
하인리히 4세는 즉위 후 평소 신뢰하던 궁정 신부를 직접 대주교로 임명했다. 교황이 이에 반발해 파문 카드를 꺼내들자 그는 교황이 머물고 있던 이탈리아 북부 카노사에 부인을 데리고 가 눈발이 흩날리는 성문 앞에서 맨발로 무릎을 꿇은 채 용서를 빌었다. 이른바 ‘카노사의 굴욕’이었다. 하인리히 4세는 나중에 지지 세력을 모아 다시 교황과 맞섰다. 교황이 또 파문 카드를 이용하자 아예 로마로 쳐들어간 것이었다.
1305~78년 교황이 프랑스에 끌려간 이른바 ‘아비뇽 유수’ 기간 동안 원래 교황 거주지였던 라테라노 대성당이 정치적, 건축학적으로 큰 피해를 입은 반면 성 밖의 성 바오로 성당은 큰 이익을 얻게 됐다. 이곳의 수도원장이 교황 직무대리 역할을 맡음으로써 대성당과 수도원은 프랑스에 있는 교황을 대신해 가장 중요한 종교적 기관이 됐다.
“불이야! 성당에 큰 불이 났다.”
성 밖 성 바오로 대성당은 1115년 대화재로 큰 피해를 입었다. 1349년에는 지진으로 다시 엄청난 피해를 봤다. 하지만 이런 일들은 19세기에 발생한 화재에 비하면 단순히 전조에 불과했다.
1823년 7월 15~16일 성 밖 성 바오로 대성당 역사에서 잊을 수 없는 끔찍한 대화재가 발생했다. 지붕으로 연결되는 구간에서 수리 공사를 하던 일꾼이 화로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은 게 화재의 원인이었다.
성 밖 성 바오로 대성당은 이 화재 때문에 완전 붕괴나 마찬가지 피해를 입었다. 신도석 천장이 내려앉았고, 불길이 얼마나 뜨거웠던지 신도석 대리석 기둥은 화학적 변화를 일으켜 생석회가 될 정도였다. 신전을 떠받치고 있던 반암 대리석은 아예 무너져 내렸다.
“교황께는 화재 소식을 알리지 맙시다. 그분의 심려가 무척 클 것이오.”
당시 교황이던 비오 7세는 성밖 성 바오로 대성당을 무척 아꼈다 그런데 불이 발생했을 당시 그는 중병이 들어 병석에 누워 있었다. 화재 사건이 줄 충격을 걱정한 교황청 궁무장관 콘살비 추기경은 교황에게 불이 났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교황은 화재 소식을 알지 못한 채 7월 20일 눈을 감았다.
“서둘러 대성당을 재건하도록 합시다.”
같은 해 11월 18일 교황으로 선출된 레오 12세는 가장 먼저 대성당 재건을 시작했다. 교황은 쥬세페 발라디에르를 주 건축가로 임명했다. 그는 현대적 분위기를 담은 혁신적 안을 내놓았다.
“대성당의 트렌셉트(십자가형 교회의 좌우 날개 부분)을 주요 부분으로 삼고, 신도석은 고대 신전처럼 지붕을 없애야 한다.”
발라디에르의 혁신적 건축안을 본 교황청 안팎에서 반대 여론이 거세게 일어났다.
“전통을 무시한 발라디에르의 설계는 전혀 성스럽지 못합니다. 성 바오로에게는 모욕입니다.”
발라디에르의 안은 결국 거부당했다. 그는 2년 뒤에는 주 건축가 자리를 내놓아야 했다. 교황은 대성당을 현대적인 스타일로 짓기보다는 옛날 모습 그대로 재건하기로 결정했다. 그 결과 공사는 거의 100년이나 걸려 1930년에야 완공될 수 있었다.
공사를 실질적으로 시작한 건축가는 파스쿠알레 벨리였다. 교황청은 전 세계적으로 기금 모금 운동을 벌였다. 그래서 공사는 1826년 시작될 수 있었다.
“성하! 벨리의 공사 진행이 이상합니다.”
벨리는 교황청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교황청이 예상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공사를 진행했기 때문이었다. 벨리는 모자이크를 떼어내 다른 곳으로 옮기더니 옛날부터 서 있던 개선문은 허물어버렸다. 열주 회랑과 종탑도 마찬가지였다.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신도석 열주를 아예 허물어버렸다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카발리니가 그렸던 프레스코화도 부숴버렸다. 그는 여기에 머물지 않았다. 중세시대에 만들어진 옛 기념비, 명문 등도 잔인하게 뜯어냈다. 트랜셉트에 있던 스크린 벽과 끝부분의 벽도 허물어버렸다.
“차라리 발라디에르에게 공사를 맡기는 게 나을 뻔했습니다.”
곳곳에서 벨리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벨리는 여기에 거세게 항의했다.
“개선문, 열주 회랑, 종탑 등을 다 살리려면 더 많은 돈과 시간이 듭니다. 현실적으로 공사가 불가능합니다.”
이후 교황 그레고리 16세, 비오 9세 시대에 신도석 공사는 빠르게 진행됐다. 비오 9세는 1854년 일부 봉헌식을 거행할 수 있었다. 신도석 봉헌식을 지켜본 예술 사학자들은 공사의 결과를 잔인하게 혹평했다.
“옛 흔적이 하나도 남지 않고 사라졌군요. 새 대성당은 마치 기차역같이 돼버렸습니다.”
“새로 지은 신도석은 웅장해 보입니다. 하지만 종교적 보조물이 거의 설치되지 않아 마치 광대한 빈 공간처럼 느껴집니다. 게다가 겨울에는 고통스러울 정도로 추울 겁니다.”
일부에서는 벨리를 옹호했다.
“1823년 화재가 너무 뜨거워 현관의 청동이 녹을 정도여서 신도석에 남은 게 거의 없었습니다. 건축가도 어쩔 도리가 없었을 겁니다.”
애프스(교회 끝에 있는 반원형 공간) 뒤편에 있던 예배당 자리에 세운 새 종탑 공사는 1860년에 끝났다. 성당 정면 공사는 1873~84년에 진행됐다. 열주 공사는 1890년에 시작돼 1928년에 마무리됐다. 모든 공사의 마지막은 1931년 끝난 세례당이었다.
성 밖 성 바오로 대성당 복원 사업이 끝나갈 무렵 로마에는 희한한 전설이 퍼지기 시작했다. 세계의 종말에 관한 전설이었다. 대성당에 복원된 역대 교황의 초상과 관련된 이야기였다.
성 밖의 성 바오로 대성당에는 역대 교황 초상을 모으는 관습이 있었다. 5세기 교황 대 레오 1세의 지시로 시작된 일이었다. 초상이라고 해서 종이에 그린 게 아니라 벽에 그린 프레스코화였다. 처음에는 산발적으로 그렸다. 초상을 그린 교황도 있었고 안 그린 교황도 있었다. 게다가 어떤 교황의 초상은 서거 한참 뒤에 그려지기도 했다.
“역대 교황 초상을 시대에 맞게 복원하시오. 프레스코화로 그리지 말고 액자 모자이크로 제작하는 게 좋겠소.”
1823년 대화재 이후 대성당 복원작업을 할 때 교황 비오 9세는 역대 교황의 초상 복원도 지시했다. 이 일을 맡은 예술가는 화가 필리포 아그리콜라였다.
아그리콜라는 과거 동패에 담겨 있던 모습을 보고 역대 교황의 초상을 대부분 복원했다. 특정 교황의 얼굴이 기록에 남아 있지 않을 경우 임의로 교황에게 특정 얼굴을 부여하기도 했다. 그래도 교황의 얼굴을 잘못 그렸다고 지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프로젝트는 1875년에 끝났다. 이후 성당에는 교황의 모자이크 액자가 시대에 맞게 하나씩 내걸리기 시작했다.
교황의 초상은 성당을 빙 둘러 곳곳에 설치된 벽감에 큰 액자 모자이크로 만들어져 있다. 초상의 크기는 정확하게 똑같고, 창 아래에 일렬종대로 설치돼 있다. 하지만 액자 모자이크를 설치할 수 있는 공간은 이제 별로 남지 않았다. 이 때문에 세상의 종말이라는 전설이 만들어졌다.
“벽감의 빈 공간이 모두 채워져 교황의 초상을 걸 자리가 없어지면 세계는 종말을 맞는다.”
마지막 공간에 교황의 초상이 걸리면 다음 교황의 초상을 만들기 전에 예수가 재림하고 세상은 끝난다는 이야기다. 이 전설의 출처는 불분명하다. 최근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당연히 교회도 신빙성을 두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