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성당의 현재 모습
화재가 발생하자 교황청은 ‘성 밖 성 바오로 대성당’ 복구공사에 앞서 고고학적 발굴조사를 실시했다. 이때가 아니면 이런 사업을 진행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조사 결과 1~2세기 무렵의 성 바오로 무덤이 발견됐다.
2000년대 초반 바티칸박물관 소속 명문 전문가이자 고고학자인 기오르기오 필리피는 성 바오로 대성당 지하를 다시 조사했다. 그가 작성한 보고서에는 이런 내용이 담겼다.
‘성당 지하의 고대 공동묘지를 발굴했다. 최소한 390년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대리석 관이 나왔다. 석관에는 ‘사도 바오로 순교자’라고 적혀 있어 성 바오로의 유해를 모신 관으로 추정된다.’
필리피는 대성당 지하의 방 입구를 덮고 있는 돌 뚜껑을 들어낸 뒤 석관을 정밀 검사했다. 관에는 세 개의 구멍이 나 있었다. 하나는 석관 안으로 바로 연결되는 구멍이었을 것으로 추정됐다. 필리피의 분석은 이러했다.
‘물체를 집어넣어 성 바오로의 유해와 접촉하게 함으로써 이른 바 ‘제2의 유해’를 만들기 위해 이 구멍을 뚫은 것이다.’
‘사도행전’ 19장 11~12절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하느님께서 바오로의 손으로 비상한 능력을 행하게 하셨으니 그의 피부에 닿았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병이 물러갔고 악령이 나갔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성인의 유해를 떼어내거나 성인의 소지품을 가지고 있으면 복을 얻는다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성인의 유해를 사고파는 행위가 극성을 부렸다. 4세기 말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이런 상행위를 금지시켰다. 이후 사람들은 성인의 유해를 떼어내기보다는 손수건 같은 물건을 유해에 건드림으로써 ‘제2의 유해’를 만들곤 했다.
성 바오로 무덤의 평판은 창살 뒤에 놓여 있다. 방문객이 많지 많다면 교회 관계자에게 들어가 보게 해달라고 부탁할 수도 있다. 운이 좋으면 들어가 볼 수 있다. 평판의 명문에는 라틴어로 ‘사도 바오로 순교’라고 적혀 있다. 명문은 4세기 무렵 새겨진 것으로 보인다.
새로 지은 대성당은 십자가 모양이 아니라 T자 모양을 하고 있다. 성당 방향은 동서다. 대성당의 기본 골격은 벽돌로 쌓았고, 회색 회반죽을 겉에 칠했다. 중앙 신도석 양측 벽에는 작은 둥근 모양 창문 열 개가 달려 있다. 트랜셉트 끝에는 더 큰 창 3개가 달려 있다. 성당에는 통로를 가진 긴 신도석이 있다. 신도석은 10개 구역으로 이뤄졌고, 양쪽 끝은 반쪽 구역으로 구성됐다. 동쪽 마지막 부분에 양쪽으로 트랜셉트가 있고, 트랜셉트 끝에는 반원형 애프스가 만들어졌다.
교회 정면에는 정사각형 부지에 열주 회랑이 둘러싼 세워진 거대한 내부정원이 있다. 설계는 루이기 폴레티가 맡았다. 폴레티가 1869년 공사를 마무리하지 못하고 죽자 1890~1928년 구글리엘모 칼데리니가 공사를 맡아 완성했다. 과거의 내부정원과 같은 모양으로 지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구조가 더 커서 닮은 점이라고는 거의 없다. 내부정원 길이는 남북으로 70m다. 주변은 석회 담장으로 둘러쌌다. 출입구 정면에는 코린트식 기둥이 지탱하는 13개의 아치가 만들어져 있다.
대성당에는 총 150개의 기둥이 세워져 있다. 서쪽 정면에는 세 줄로 기둥들이 세워져 있다. 그 안쪽에는 13개의 아치형 채광창인 루네트가 달려 있다. 채광창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축복을 주는 모습과 열두 사도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 붙어 있다. 내부정원의 남북 쪽에는 두 줄로 기둥이 세워져 있다. 여기에는 다양한 기독교 상징이 담겨 있는 원반이 달려 있다.
내부정원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장면은 쥬세페 오비치가 만든 성 바오로 석상이다. 19세기 화재 이후 새 성당을 복원할 때 만들었다. 성 바오로는 로마인이 그의 머리를 벨 때 사용했던 모양의 칼을 들고 있다. 또 ‘진실의 설교자에게, 이방인들의 스승에게(봉헌하다)’라는 내용이 적힌 명문도 들고 있다.
내부정원을 지나면 나타나는 정문은 은세공을 덧붙인 청동으로 만들었다. 1929~31년 안토니오 마라이니가 만든 작품이다. 옛 정문은 1070년 교황 그레고리 7세가 청동으로 건립한 것인데 1823년 대화재 때 뜨거운 화염에 녹아버렸다. 새 정문은 높이 7.48m에 너비 3.35m에 이른다. 정문에 새겨진 부조는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의 인생, 사도 생활, 순교를 담고 있다.
정문으로 들어가면 가장 먼저 황금색 모자이크를 볼 수 있다. 평소에도 매우 깊은 인상을 주는 모자이크이지만, 아주 햇살이 좋은 날이나 경관조명이 비치는 저녁에는 더욱 아름답다는 평가를 받는다. 원래 이곳에 있던 모자이크는 19세기 대화재 때 애프스 너머 아치로 옮겨져 보관됐다.
정문 페디먼트의 삼각 면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베드로와 바오로와 함께 서 있는 모습이 담겨 있다. 아래 부분에는 천국의 산에 있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 새겨져 있다. 여기에는 네 개의 강이 보인다. 네 강은 복음을, 강에서 물을 마시는 열두 마리 양은 12사도를 상징한다. 여기에 등장하는 도시는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이다. 가장 아래쪽 부분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예지자 이사야, 예레미아, 에제키엘, 다니엘을 보여준다.
성 밖 성 바오로 대성당에는 ‘성스러운 문’인 성문(聖門)이 있다. 교황이 지정하는 ‘성스러운 해’인 성년에만 열리는 문이다. 성년에 성문을 여는 행사는 교황이 주재한다.
원래 이곳에는 나무로 만든 성문이 달려 있었지만 2000년 엔리코 만프리니가 청동으로 새로 만들어 설치했다. 성문에는 부조로 여섯 장면이 새겨져 있다. 왼쪽 위에서부터 오른쪽 방향으로 볼 경우 그리스도의 부활, 누가복음에 나오는 탕아와 선한 사마리아인, 교황의 자비, 성령강림절에 사도 사이에 있는 성모 마리아, 사도 바오로의 설교와 순교,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주교단의 설교 임무를 담고 있다. 여기에는 라틴어 문구도 새겨져 앴다.
‘평화와 구원의 선물이 영원히 성 바오로의 성전에 오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기를.’
신도석 벽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성 바오로의 생애와 선교 인생을 다룬 내용을 담고 있다. 교황 비오 9세가 그림 제작을 지시했는데, 1857~60년 사이 3년 만에 작업을 서둘러 마치기 위해 화가 22명이 동원됐다.
모두 36개의 판으로 만들어진 그림은 오른쪽 트랜셉트에서 시작해 애프스 오른쪽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신도석을 지나 트랜셉트 왼쪽 부분에서 끝난다. 원래는 카발리니가 그린 프레스코 그림이 있었지만 그림을 모두 치우고 그 자리에 대신 설치했다.
그림은 연대기 순으로 이어진다. 성 바오로가 처음 등장하는 성 스데반의 순교에서 시작해 바오로의 눈을 뜨게 하는 하나니아스와 바오로의 세례, 다마스쿠스에서 설교하고 피신하는 바오로, 예루살렘 공의회, 아테네의 아레오파고스에 간 바오로, 코린트에 간 바오로, 푸블리우스의 아버지를 치료하는 바오로, 로마에서 기독교도를 만나는 바오로로 이어지다 작별을 고하는 성 베드로와 바오로 및 바오로의 순교로 끝난다.
성 밖 성 바오로 대성당에는 성 스데반 예배당, 성체 예배당, 성 로렌스 예배당, 성 베네딕토 예배당 등이 있다. 이 중 성 스데반 예배당은 성 바오로를 개종하게 만든 초기 기독교 순교자 성 스데반에게 헌정한 예배당이다. 제단에는 리날도 리날디가 만든 성 스데반의 조각상이 있다. 성체 예배당은 애프스의 왼쪽에 있다. 원래는 십자가의 예배당으로 알려졌다. 이곳에 있는 십자가는 14세기에 만든 것인데, 1370년 스웨덴의 성 브리지타의 전설이 담겨 있다.
‘성 브리지타는 구드마르손과 결혼해 아이 여덟을 낳고 살았다. 그녀는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순례를 다녀오던 중 남편을 잃고 말았다. 이후 종교에 몸을 맡기기로 결심한 성 브리지타는 1350년 교황이 지정한 성년을 맞아 로마로 순례를 떠났다. 그녀는 교황에게 허가를 얻어 스웨덴에 새로운 수녀회를 창건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당시 교황은 프랑스 아비뇽에 갇혀 있었다. 뜻하지 않게 성 브리지타는 로마에 장기 체류하게 됐다. 그녀는 워낙 선량해서 선행을 많이 해 주변의 로마인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게 됐다.
성 브리지타는 어느 날 어릴 때 가끔 꾸던 꿈을 다시 꾸게 됐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꿈이었다.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나를 보거라, 나의 딸아!” 성 브리지타는 눈물을 흘리며 물었다. “누가 아버지를 이렇게 대접했습니까?” 예수는 이렇게 다시 대답했다. “나를 멸시하는 자들, 나의 사랑에 무관심한 자들이니라.”
성 브리지타는 수시로 성 밖의 성 바오로 대성당에 기도를 드리러 갔다. 그녀가 무릎을 꿇는 곳은 항상 바로 십자가의 예배당이었다. 항상 십자가를 붙잡고 전날 꾸었던 꿈 이야기를 되풀이하곤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십자가는 그녀의 이야기에 답을 해주면서 가끔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이곳에 있는 십자가 기단에는 라틴어로 이렇게 새겨져 있다.
‘성 브리지타는 하늘에 매달려 있는 하느님의 말씀을 귀로 들었을 뿐만 아니라 가슴으로 새겨들었다.’
성 밖 성 바오로 대성당 입구 오른쪽에는 14~15세기에 만든 성 바오로의 목제 조각상이 있다. 조각상에는 흠집이 많이 생겼는데, 조각을 떼어내 가져가려는 순례자들이 만든 흠집이라고 한다. 반대편에는 17세기에 만든 성 브리지타 조각상이 있다. 그녀가 십자가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담았다.
로렌스 예배당은 합창의 예배당으로 불린다. 베네딕토 수도사들이 찬송가를 부르고 미사를 올린 곳이 바로 여기였다. 유물의 예배당에는 성 바오로가 순교하기 전 며칠 동안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묶였던 사슬이 보관돼 있다.
애프스에서는 13세기 베니스 예술가들이 만든 모자이크가 유명하다. 19세기 대화재에서도 살아남아 눈길을 끈 모자이크이다. 예수가 꽃과 작은 동물이 가득한 들판에 12사도인 베드로, 바울, 누가, 안드레와 함께 서 있는 장면을 담고 있다.
예수 발밑에는 아주 작은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모자이크를 만들라고 지시한 당시 교황 호노리오 3세다. 당시에는 교황이 예수와 12사도를 새긴 모자이크나 그림에 함께 등장하는 게 관행적이었다. 호노리오 3세처럼 아주 겸손한 모습으로 담긴 게 오히려 이례적이었다. 예수의 발아래에는 수난의 도구들을 새긴 왕관과 보석을 새긴 십자가가 놓여 있다. 십자가 가운데에는 설교하는 예수를 담은 장면이 있다. 왕관 옆에는 두 천사가 있고, 영광의 찬가 내용을 담은 두루마리를 나르는 12사도도 있다.
이 모자이크 아래에는 교황의 왕관이 있다. 코린트식 기둥 4개가 왕관을 에워싸고 있다. 양쪽 명판에는 1854년 재봉헌식 때 참석한 주교 명단이 담겨 있다. 왕관은 폴레티가 만든 것이다. 베드로에게 열쇠를 넘겨주는 예수를 새긴 부조는 피에트로 테네라리가 조각했다.
트랜셉트 오른쪽 끝에는 중세 시대 회랑을 갖춘 수도원이 있다. 수도원의 주요 부분은 동쪽에 자리 잡고 있다. 꽤 길면서 엄숙해 보이는 3층 건물이다. 이 중세 시대 회랑 남쪽에는 더 큰 회랑이 또 하나 더 있다. 두 수도원 서쪽에도 커다란 정원이 있다. 대성당에서 보면 남쪽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이곳에서는 대성당과 수도원의 관리 주체가 다르다는 점이다. 대성당은 바티칸에서 임명한 사제가 관리하지만 수도원은 자체적으로 선출한 수도원장이 모든 종교적 업무를 처리한다. 다만 행정 업무는 담당하지 않는다. 그래서 수도원장은 공식적으로 ‘비카리오 페르 라 파스토랄레’라는 직책을 갖는다. ‘사제 업무를 담당하는 목사’라는 뜻이다.
20세기 들어 성 밖 성 바오로 대성당은 외로운 처지에서 벗어났다. 전기로 움직이는 트램이 비아 오스티엔스를 따라 설치된 덕분이었다. 1955년에는 첫 지하철역이 개통했다. 라인B의 산파올로 역이었다. 이로써 로마 시내에서 오가기 어려웠던 대성당 여행이 손쉬워지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