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내리는 곳에 나의 성전을 지으시오!
358년 무렵 로마에 지오반니 파트리지오라는 귀족이 살았다. 그는 결혼했지만 아이를 낳지 못했다. 부자였던 그는 죽은 뒤 모든 재산을 성모 마리아에게 바치기로 결심했다. 어느 날 지오반니의 꿈에 성모 마리아가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내일 눈이 내리는 곳에 나를 위한 성당을 짓도록 하세요.”
꿈에서 깬 지오반니는 반신반의했다.
‘지금은 8월 중순이야. 원래 로마에는 눈이 잘 내리지 않아. 게다가 지금은 한여름이잖아? 눈이 올 리가 없지. 내가 눈을 보고 싶어 했나? 허허. 개꿈을 꾼 거로군.’
지오반니는 다음날 일 때문에 우연히 에스퀼리노 언덕 꼭대기로 올라갔다. 그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곳에 하얀 눈이 수북이 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가슴은 성령으로 차올랐다. 그는 무릎을 꿇고 성모 마리아에게 기도를 드린 뒤 서둘러 그곳에 성당을 지었다.
로마의 관문인 레오나르도 다빈치 국제공항에서 열차를 타고 테르미니 역에 내린다. 역을 등지고 왼쪽으로 5분 정도만 걸어가면 웅장한 성당 하나가 보인다. 5세기에 만들어진 로마의 4대 메이저 성당 중 하나인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이다.
찾는 관광객이 그렇게 많지 않은 곳이지만 이 성당은 역사적으로 깊은 의미를 가진 성소다. 서방 세계에서 성모 마리아에게 헌정된 성당 중에서 가장 오래 된 성당이기 때문이다. 로마에는 성모 마리아에게 헌정한 성당이 26곳 있다.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은 이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그래서 ‘가장 크다’는 뜻인 마조레라는 이름이 붙었다.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은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한 성당이다. 그래서 이곳에는 성모 마리아와 관련한 이야기가 많이 전한다. 성모 마리아가 예수를 낳은 구유 조각이 있었다는 전설이 있는가 하면 로마를 전염병에서 구한 성모 마리아 성화의 전설도 전한다.
성모 마리아의 전설을 기록한 첫 문서는 1288년에 만든 것이었다. 당시 로마에는 8월이라도 가끔 우박이 쏟아지는 경우가 있었다. 폭풍을 동반한 우박 때문에 로마에 큰 피해가 발생하자 지오반니는 신이 노여워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성모 마리아에게 바치는 성당을 지은 것일 수 있다.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 건설 시기는 고대 서적에 따라 다르다. 『폰티피칼레 로마눔』에는 4세기에 건설됐다고 적혀 있다.
‘산타 마리아 마조레라고 불리는 리베리오 대성당은 원래 교황 리베리오(352~366) 시절에 건설됐다. 나중에 식스토 3세가 보수하고 확장했다.’
16세기에 작성된 로마 가톨릭 교회 서적인 『브레바리움 로마눔』은 그 시기를 100년 정도 늦춘다.
‘431년 에페소스 공의회에서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신의 어머니’로 공표된 이후 교황 식스토 3세는 로마의 에스퀼리노 언덕에 ‘성스러운 신의 어머니’에게 헌정하는 성당을 하나 짓기로 했다. 나중에 이 성당은 산타 마리아 마조레라고 불리게 됐다.’
대다수 역사학자는 『브레바리움 로마눔』의 손을 들어준다. 5세기 초 공사를 시작해 식스토 3세(432~440) 때에 완공됐다는 것이다. 이 무렵 로마제국 전역에서 성모 마리아의 인기가 매우 높아져서 곳곳에서 성모 마리아에게 헌정하는 성당을 짓는 바람이 불었다는 이야기다.
다른 주장도 물론 나온다.
“4세기에 리베리오 교황이 건설한 성당과 식스토 3세가 지은 성당은 다른 건물이었을 것입니다.”
“첫 성당을 지은 뒤 나중에 새로 지은 성당으로 옮겼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니면 첫 성당을 부수고 그 위에 신축했을 수도 있습니다.”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은 에스퀼리노 언덕에서 가장 높은 키시푸스에 건설됐다. 에스퀼리노 언덕은 고대 로마의 일곱 언덕 중에서 가장 높은 곳이었다. 지금은 에스퀼리노 언덕이 깎이고 깎여 높아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과거에는 달랐다.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은 로마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성소가 되는 셈이다.
이 대성당의 종탑 높이는 75m로 중세시대 로마의 모든 종탑 중에서 가장 높았다. 이 종탑에 올라가면 로마 시내가 한눈에 들어왔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은 산타 마리아 델라 네베(눈의 성모 마리아), 산타 마리아 리베리아나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렸다. 예수가 태어난 베들레헴의 구유 일부를 얻은 뒤에는 산타 마리아 델 프레페세(구유의 성모 마리아)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러다 마지막에는 로마의 26개 산타 마리아 성당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고 해서 마조레라는 이름을 붙였다.
로마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에스퀼리노 지역의 영향력은 크게 줄었고, 그에 따라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의 영향력과 역할도 마찬가지로 감소했다.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이 세워진 곳은 원래 고대 로마의 여신 키벨레를 모신 신전이 있던 곳이었다. 키벨레는 원래 아나톨리아 지역의 여신이었다. 이 여신은 그리스에서는 대지의 여신 가이아 또는 데메테르와 동일시되기도 했다. 이후 로마에서는 ‘위대한 어머니 신’이라는 뜻인 마그나 마테르가 돼 로마인으로부터 숭앙받았다. 로마인들이 키벨레 여신을 받아들이게 된 이유와 관련해 재미있는 역사와 전설이 전한다.
제2차 포에니 전쟁 때였다. 로마는 당시 카르타고의 한니발 장군에게 연전연패해 위기에 몰렸다. 게다가 유성 비가 쏟아지는가 하면 흉년이 들어 기근이 발생하기도 했다. 로마인들은 신들로부터 버림을 받아 멸망할지도 모른다며 울부짖었다.
로마 원로원은 궁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빌 예언서에 신탁을 구했다. 이런 답이 나왔다.
‘그리스에서 마그나 마테르 여신을 모셔온다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
로마인은 신탁을 더 확실하게 알아보기 위해 그리스 델피의 아폴로신전에 사절단을 보냈다. 이곳에서도 같은 답이 나왔다.
로마는 페르가몬 왕국에 신통한 효험을 가진 마그나 마테르 석상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뒤 이 왕국의 왕에게 동의를 구해 석상을 로마로 가져왔다. 그때가 BC 204년이었다.
배가 로마에 도착했을 때 여신 석상을 맞아들일 로마 대표는 중년 부인이었던 클라우디아 퀸티아와 한니발을 누르고 로마를 구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조카인 스키피오 나스카였다.
클라우디아 퀸티아는 당시 로마인들로부터 문란한 여성이라고 손가락질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가 대표로 선정된 걸 두고 비난의 목소리가 적지 않았다.
그런데 마그나 마테르 석상을 싣고 온 배가 테베레 강 사주에 걸려 옴짝달싹못하는 일이 벌어졌다. 클라우디아 퀸티아는 배 주변에 모인 사람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간 뒤 뱃머리에 손을 대고는 기도를 올렸다.
“마그나 마테르 신이시여! 로마를 도와주시고 저를 구해주소서!”
클라우디아 퀸티아의 기도가 끝나자마자 신기하게도 배는 사주에서 빠져나와 안전하게 부두에 정박했다. 그녀는 이 기도 한번으로 정숙하지 못하다는 오명을 벗었음은 물론 로마인로부터 위대한 부인으로 칭송받게 됐다.
마그나 마테르 신전은 팔라티노 언덕에 만들어졌고, 세월이 흐르면서 키르쿠스 막시무스(대전차경기장) 등 다른 곳에도 건설됐다.
1931~33년 고고학 발굴조사에서는 현재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의 애프스 밑에서 오푸스 비타툼이 발굴됐다. 오푸스 비타툼은 4세기 무렵 도입된 건축기법이었다. 포로 로마노에 있는 막센티우스-콘스탄티누스 바실리카가 대표적이다. 발굴 당시 전문가들은 ‘리베리오가 건설한 대성당의 일부’라고 추정했다. 하지만 이 건축물이 키벨레 신전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30여 년 뒤인 1966~71년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에서 실시된 새 고고학 발굴조사 결과 1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다른 건물이 발견됐다. 성당은 아니었다. 건물은 큰 정원과 열주 회랑, 그리고 부속실 등으로 구성됐다. 건물은 가로 37m 세로 30m 크기였으며 지하 6m 깊이에 파묻혀 있었다. 입구는 현재 대성당의 애프스 아래에 있었다. 이 건물 벽은 원래 대리석으로 덮여 있었지만, 4세기 무렵 달력과 전원 풍경을 담은 프레스코화 그림으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금석학적 자료에 따르면 이 건물은 네라티우스 가문의 복합주택 중 하나인 것으로 추정됐다. 네라티우스 가문은 평민 출신 귀족이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대에 이 가문의 이름이 기록에 나타나기 시작하지만,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때 마르쿠스 네라티우스가 이 가문 역사상 처음 집정관이 되기 전까지는 그다지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가문이었다.
이 가문 사람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인사는 오현제의 전성기였던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절에 로마에서 가장 유명한 법률 전문가였던 루키우스 네라티우스 프리스쿠스였다. 이런 건물이 발견된 점으로 봤을 때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 자리에는 키벨레 신전 외에 여러 건축물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에는 성 파올리나 예배당이 있다. 아주 화려한 장식을 가진 예배당이다. 교황 바오로 10세와 클레멘스 8세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이곳은 교황의 무덤보다는 ‘로마 백성의 건강 또는 구원’이라는 뜻의 ‘살루스 포풀리 로마니’로 알려진 성모 마리아 성화로 유명한 곳이다. 대부분 학자는 13세기에 만들어진 그림이라고 분석하지만, 전설이 전하는 이야기는 다르다. 살루스 포풀리 로마니는 「누가복음」을 쓴 성 누가가 그렸다는 것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세상을 떠나자 성모 마리아는 개인 소지품 몇 가지를 챙겨 사도 요한의 집에 갔다. 그 중에는 성 요셉의 작업장에서 목수였던 예수가 직접 만든 탁자도 있었다. 성모 마리아는 그곳에서 성 누가에게 초상화를 하나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성 누가는 그림을 그리는 동안 성모 마리아가 들려주는 예수의 인생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여기서 들은 이야기를 나중에 「누가복음」에 담았다.
성화는 예루살렘에 보관돼 있었다. 4세기 무렵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성 헬레나가 예루살렘에 성지 순례를 갔다가 성화를 발견했다. 그녀는 다른 성 유물과 함께 성화를 챙겨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갔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어머니가 가지고 온 성화를 보관하기 위해 성당을 건설했다. 성 헬레나는 나중에 로마로 올 때 성화를 가지고 왔다.’
가톨릭 서적인 『폰티피칼레 로마눔』에 따르면 살루스 포풀리 로마니는 처음에는 라테라노 대성당에 걸려 있었다. 나중에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으로 옮겨졌다. 이 책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리베리오는 교황청 예배당에 걸려 있어 여러 사람으로부터 공경 받던 그림 한 점을 골라 새 성당에 걸었다. 이 그림은 성 헬레나가 로마에 가져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적혀 있다.
역사학자들은 12세기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에 걸기 위해 성화를 그린 것으로 추정한다. 이후 신도에게 큰 인기를 끈 덕분에 「누가복음」을 쓴 성 누가가 그렸고, 로마의 역병을 퇴치한 기적을 이뤘다는 전설이 나돌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1256~59년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 양측에 고딕 양식 예배당 두 개가 새로 건설됐다. 왼쪽의 예배당은 성모 마리아의 성화인 살루스 포풀리 로마니를 걸기 위해 원로원과 로마 시민이 돈을 모아 건립한 것이었다.
살루스 포풀리 로마니에는 6세기 말 발생한 역병과 산탄젤로성의 탄생에 얽힌 전설도 담겨 있다.
‘590년 무렵이었다. 고대 로마제국은 멸망했고, 아직 르네상스 시기가 오기까지는 먼 시간이 필요한 시대였다. 로마에 페스트가 번져 수많은 사람이 쓰러졌고,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 로마 시내에는 병에 걸려 숨진 사람들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병에 걸릴까 겁나 아무도 시체를 치울 생각조차 못했다.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로마 시내를 내려다보던 교황 그레고리우스 대제는 하느님의 힘을 빌려 전염병을 몰아내기로 했다. 그는 아가타 수부라라고 불리는 로마의 한쪽 끝에 있는 교회까지 살루스 포풀리 로마니를 들고 행진하기로 했다.
아가타 수부라의 교회에는 이교도는 물론 일부 기독교도까지 몰래 신봉하는 우상이 있었다. 기독교도도 머리를 숙인 덕분에 우상은 파괴되지 않고 비밀리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교황은 교회에 도착하자마자 우상에게로 걸어가더니 큰소리로 외쳤다.
“악마의 상징아! 로마에서 떠나도록 하라!”
그때 갑자기 천둥 같은 큰 소리가 우상에서 터져 나오더니 우상이 산산조각 나버렸다. 교황은 이 장면을 침착하게 지켜보고는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교황은 귀가하는 길에는 하드리아누스 영묘 앞에 있는 폰스 아일리우스 다리를 건너게 됐다. 그는 다리 위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고대 로마제국의 전성기를 이끈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묻혀 있는 영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미 오래전부터 아무도 돌보지 않아 무척 황폐해진 상태였다.
교황이 다리를 건너려는 순간 갑자기 길고 가느다란 칼을 든 천사장 미카엘이 영묘 꼭대기에 모습을 드러냈다. 깜짝 놀란 교황은 그가 미카엘임을 알아보고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드렸다. 미카엘은 망토로 칼에 묻은 피를 닦더니 칼집에 집어넣고는 사라져버렸다. 교황은 그 모습을 보고 이렇게 선언했다.
“하느님이 드디어 분노를 푸셨다. 더 이상 희생을 원하지 않으신다.” 교황의 말이 끝나자마자 거짓말같이 로마에서 페스트는 사라져버렸다.
성 베드로 대성당에 돌아간 그레고리우스는 영묘 꼭대기에 서 있던 하드리아누스의 사두마차 석상을 폐기하고 대신 천사장 미카엘 석상을 만들어 세우게 했다. 그는 또 고대 로마의 건축물들을 이교도의 흔적이라고 부르면서 모두 파괴하라고 했다. 그래야 로마에 하느님의 분노가 재발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로마인은 그레고리우스 대제가 로마의 비밀 우상 숭배를 막은 덕분에 페스트를 사라지게 했다고 믿었다. 그들은 천사장이 나타난 하드리아누스 영묘를 ‘천사의 성’이라는 뜻인 산탄젤로성으로 부르기로 했다.’
살루스 포풀리 로마니는 교황 그레고리 대제(재임 590~604년) 시절이던 590년 크레타에서 로마로 도착했다. 교황은 직접 테베레 강의 부두로 나가 꽃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배에 실려 온 성화를 영접했다.
이후 수 세기 동안 성화는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 세례당의 입구 문 위에 걸려 있었다. 1240년 무렵부터 성화는 여러 공식 문서에 레기나 카엘리(하늘의 여왕)로 표기되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대성당의 신도석으로 옮겨졌고, 13세기에는 대리석으로 만든 이동식 예배당에 보관됐다. 1613년 이후에는 성화 보관을 위해 특별히 만든 파올리나 예배당의 제단에 안치됐다. 영어를 사용하는 순례객은 이 예배당을 ‘레이디 채플(성모 마리아 예배당)’이라고 불렀다.
여러 기록에 따르면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에는 살루스 포풀리 로마니 외에 다른 성 유물도 여럿 있었다. 이 중에서 14세기에 만든 십자가 모양 성 유물함에 보관돼 있는 성 십자가 조각은 아직도 이곳에 있다. 11세기에 쓴 것으로 알려진 『로마의 경이』라는 책에는 이런 내용이 남아 있다.
‘성모 마리아의 모유와 주 예수의 피 또한 크리스탈 컵에 담겨 있다.’
하지만 책에 나오는 이런 성 유물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성 누가가 그렸다는 성모 마리아 성화와 관련된 전설은 다른 곳에서도 전해 내려온다. 동로마제국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의 한 성당에 성모 마리아 성화가 걸려 있었다고 한다. 거기에도 성 누가가 그렸다는 전설이 담겨 있었다. 역사학자들은 ‘콘스탄티노플 성당에서 가져온 것은 성화가 아니라 성화에 얽힌 전설’이라고 주장한다.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니우스에 있는 성 삼위일체 수도원에도 성모 마리아 성화가 걸려 있다. 여기에도 역시 성 누가 전설이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