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모 마리아는 왜 지오반니의 꿈에 나타난 것일까? 왜 에스퀼리노 언덕에 성당을 지으라고 한 것일까? 그 이유는 어디에도 나오지 않기 때문에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런데 기독교는 성당을 짓자마자 성모 마리아의 소망을 배신한다.
366년 교황 리베리오가 죽자 로마에서 내전이 발생했다. 새 교황을 선출하는 절차를 두고 여론이 분열됐기 때문이었다. 성 다마소 1세와 우르시키누스라는 앙숙이 각각 교황으로 선출됐다. 양측은 충돌해 상대방 지지자들을 살해했다.
다마소는 당시 콘스탄티노플에 있던 동로마제국 발렌티니아누스 황제의 지지를 받고 있었고, 라테라노 대성당을 확보하고 있었다. 반면 우르시키누스는 교회 사제는 물론 로마 평신도에게서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었고, 리베리오 대성당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다. 황제는 우르시키누스에게 엄한 지시를 내렸다.
“교황 자리를 포기하고 리베리오 대성당에서 물러나시오.”
우르시키누스는 이를 거부했다.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교황의 지지를 등에 업은 다마소는 황제의 지지를 이용해 폭력으로 앙숙을 몰아내려고 했다. 영국 신학자 존 켈리는 이렇게 주장한다.
‘다마소는 폭력배들을 동원해 포로 로마노의 바실리카 율리아에서 농성하고 있던 우르시키누스 지지자를 사흘간 학살했다.’
겨우 목숨을 건진 우르시키누스 지지자들은 리베리오 대성당으로 피신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다소스의 지지자들은 대성당을 포위해 아무도 달아나지 못하게 봉쇄한 뒤 지붕으로 올라가 벽돌과 타일을 뜯어낸 뒤 성당 안에서 농성하던 사람에게 집어 던져 137여 명을 죽였다.
다마소(재임 366~84년)는 결국 우르시키누스를 갈리아로 쫓아내고 갈등을 끝내 교황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우르시키누스 지지자가 대학살을 당한 리베리오 대성당은 바로 오늘날의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이다.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에서는 교황 납치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범인은 첸치오 프랑기파니였고, 피해자는 교황 그레고리 7세였다.
그레고리오 7세(1073~85년)는 50세에 교황으로 즉위했다. 그는 유별나게 작았고, 얼굴은 창백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의지는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강인했다. 결심을 했으면 꼭 이루는 사람이었다.
그레고리오 7세는 교황이 되기 전부터 교회 개혁을 꿈꾸고 있었다. 교황에 즉위한 이후 1년 동안 모든 힘을 다 바쳐 개혁 운동에 매진했다. 성직자의 각종 비리를 근절하기 위해 노력한 것이다. 그는 1075년 종교회의에서는 평신도가 주교, 수도원장으로 서임되는 것에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앞으로 모든 성직 선거는 왕은 물론 어떤 속세의 권력 개입 없이 자유롭게 치러질 것입니다.”
유럽 각국의 영주는 그레고리오 7세의 방침에 크게 반발했다. 특히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의 반발이 심했다. 첸치오는 당시 로마에서 유명한 프랑기파니 가문의 귀족이었다. 그는 그레고리 7세와 갈등을 빚고 있던 하인리히 4세와 절친한 사이였다.
그레고리오 7세는 1075년 12월 24일 대성당의 지하암굴 예배당에서 미사를 집전하면서 신도들에게 성체를 나눠주고 있었다. 그때 첸치오가 무장 병력을 이끌고 대성당에 난입했다. 그는 교황의 신성한 의복을 벗긴 뒤 말에 태워 끌고 갔다.
당시 로마의 대다수 기독교도는 개혁을 시도하던 교황을 매우 존경하고 있었다. 이들은 교황 납치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반격에 나섰다. 로마의 모든 성문을 닫아 납치범들이 로마 밖으로 나갈 수 없게 했다. 이어 곳곳에서 모은 정보를 분석한 결과 교황이 판테온 근처의 탑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기독교도는 서둘러 달려가 탑을 포위했다. 죽음의 공포를 느낀 첸치오는 교황에게서 돈을 뜯어내는 선에서 일을 마무리하려고 했지만 교황은 응하지 않았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첸치오는 결국 교황 앞에 무릎을 꿇고 목숨만 살려달라고 빌었다.
심성이 매우 자비로웠던 그레고리오 7세는 탑을 에워싼 기독교도들 진정시킨 뒤 첸치오를 죽이지 말라고 했다. 그는 대성당으로 돌아가 신도석에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던 다른 기독교도에게 성체를 다시 나누어주었다.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을 건설하고 40년도 채 지나지 않은 476년 로마는 오도아케르에 의해 멸망했다. 『신의 도시』를 쓴 3~4세기 기독교 신학자인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로마의 신은 로마를 재앙에서 구해내지 못했다’고 목소리를 높인 적이 있다.
그런데 사실 교회의 신도 로마를 구하기는커녕 망하는 것을 막지도 못한 셈이 되고 말았다.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을 건설한 직후 기독교도가 보인 작태를 생각하면 신이 일시적으로 로마를 버린 셈일 수도 있다.
나라는 망했지만 로마는 여전히 과거처럼 제 기능을 유지하고 있었다. 7세기까지 원로원은 물론 로마 지방정부는 살아남아 있었다. 당연히 이곳에 있던 여러 성당도 제 역할을 하고 있었다. 가톨릭 신도들은 여전히 성당에 다니며 기도를 드렸다.
엉뚱하게도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현상 때문에 로마는 방기됐고, 성당도 큰 피해를 입었다. 바로 고대 로마의 유산인 수로가 방치돼 심각하게 오염됐기 때문이었다. 우물을 직접 파서 물을 구할 수 있었던 부자들을 제외한 나머지 로마인은 아우렐리아누스 성벽 밖에 있는 테베레강 주변으로 몰렸다. 이렇게 해서 8세기 무렵에는 테베레 강과 포로 로마노 사이에 있는 마르스 평원과 옛 포룸 보아리움 일대에 많은 사람이 모여 살게 됐다.
로마 시내의 버려진 땅은 포도밭으로 변했다. 그리고 수도원이 연이어 들어섰다. 10세기 말 무렵 로마 시대 대성당은 이른바 수많은 수도회의 식민지가 됐다. 대부분 수도사는 비잔틴제국의 성상 파괴 운동 때문에 쫓겨 온 사람이거나, 이슬람의 정복전쟁을 피해 온 사람이었다.
아무도 찾지 않는 베르니니의 무덤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은 처음 건설했을 때의 기본 구조를 아직도 그대로 갖고 있다. 다만 외관은 18세기 때 새로 건설했다. 유일하게 초기 기독교 대성당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외관 부분은 명층 벽이다.
명층은 고딕식 교회에서 높은 창이 일렬로 달린 부분이다. 명층 벽은 비아 델 에스퀼리노(에스퀼리노 거리) 쪽에서 잘 보인다. 대성당의 내부는 5세기 초기 기독교 대성당 양식을 대부분 가지고 있다.
신도석은 크고 높으며, 양쪽에는 복도가 있다. 신도석은 아테네 대리석 기둥이 받치고 있는데 이 교회에서 가장 오래 된 부분이다. 역사학자들은 다른 성당이나 고대 로마 건축물에서 뜯어온 기둥일 것으로 추정한다.
신도석 양측에 있는 모자이크는 5세기에 만든 것이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로마에서는 최초로 성서 장면을 연속으로 표현한 모자이크라고 한다.
왼쪽 모자이크에는 아브라함, 야곱, 이삭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오른쪽 모자이크에는 모세와 여호수아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모자이크 대부분은 원본이지만 일부는 세월 탓에 훼손돼 16세기에 새로 만들었다.
대성당 끝에는 둥근 애프스(반원형 부분)가 세워져 있다. 애프스의 모자이크는 ‘성모 마리아의 대관’을 묘사하는 13세기 작품이다. 개선문에 새겨진 황금색 모자이크는 5세기에 만든 것이다. 예수 그리스의 초기 삶을 담고 있다.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에는 높은 연단이 있다. ‘교황의 연단’이라고 해서 교황만 사용할 수 있는 연단이다. 때로는 교황이 특별 허가를 하사한 사제도 이용할 수 있다. 교황이 매년 8월 15일 성모 승천 축일에 이곳에서 대형 미사를 여는 게 관례로 정착됐다. 연단에는 반암 항아리가 하나 있는데, 「마태복음」을 쓴 성 마태 등 여러 성인의 유해를 보관하고 있다.
연단 아래에는 무릎을 꿇은 한 비오 9세의 조각상이 새겨진 고해성사석이 있다. 옆에는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성 히에로니무스가 묻힌 베들레헴 지하묘지가 있다. 이 지하묘지는 예수가 태어난 베들레헴의 동굴과 똑같은 모양으로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이 동굴에는 또 예수가 태어난 구유 조각이 있다고 전해진다. 구유 조각은 7세기 이슬람이 예루살렘을 점령했을 때 그 도시에서 탈출한 기독교 난민이 로마로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구유 조각은 현재 시스티나 예배당에 있는 베들레헴의 동굴 어딘가에 보관돼 있다. 동굴은 원래 대성당 바깥쪽에 팠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구유와 성 히에로니무스 유해가 동굴의 어디에 있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구유 조각을 이탈리아어로 ‘라 사크라 쿨라’라고 부른다. 그런데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을찾는 관광객 중에서 가끔 발음을 실수해 ‘라 사크라 쿨로’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 이럴 때 관광안내원은 웃으면서 이렇게 영어로 이야기한다.
“There is no Holy Arse(이곳에는 ‘신성한 엉덩이’는 없답니다).”
쿨라는 ‘요람’이라는 뜻이지만 발음이 비슷한 쿨로는 ‘엉덩이’를 뜻하기 때문이다.
오른쪽 트랜셉트에는 시스티나 예배당이 있다. 아주 정교하게 만든 교황 식스토 5세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시스티나는 식스토라는 이름을 가진 교황을 뜻하는 말이다. 라틴어로는 식스티눔, 이탈리아어로는 시스티나, 영어로는 시스틴이다. 특히 식스토 4세와 5세를 이렇게 불렀다. 따라서 시스티나 예배당은 식스토 예배당이라는 뜻이다.
시스티나 예배당에는 예수가 태어난 구유의 조각을 담았다는 성 유물함을 보관하고 있다. 예배당 앞에는 17세기 로마 최고의 건축가 겸 조각가였던 지안 로렌조 베르니니와 그 가족의 무덤이 있다. 베르니니는 성 베드로 대성당의 발다키노와 보르게세미술관에 보관돼 있는 조각 ‘아폴로와 다프네’ 등을 만든 사람이다.
베르니니는 친분이 두터웠던 교황 클레멘스 9세(재임 1667~69년)의 후광에 힘입어 활동적인 작품 활동을 벌였다. 그는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의 애프스를 새로 지을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그 비용이 엄청난데다 새 애프스를 지으려면 당시에 있던 옛 모자이크를 모두 파괴해야 한다는 점이 알려지는 바람에 로마 시민의 분노를 사 결국 공사를 진행하지 못했다.
베르니니는 교황 우르바노 8세(재임 1623~44년) 시절부터 여러 교황의 호의를 사 많은 작품을 만들었다. 일부에서는 그가 지나친 특혜를 받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로마 시민으로부터도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판테온 때문이었다. 그는 우르바노 8세의 의뢰를 받아 성 베드로 대성당에 발다키노를 만들던 도중 청동이 모자라게 되자 판테온에서 청동을 대거 뜯어갔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로마인은 “야만인도 하지 않은 짓”이라며 그와 교황을 맹비난했다.
이 때문이었는지 시대를 대표하는 대 건축가인 베르니니가 1680년 11월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는데도 로마인은 그다지 슬퍼하지 않았다. 장례식은 아주 조촐하게 치러졌고, 그는 산타 마리아 마조레에 있던 아주 조촐한 부모 무덤 옆에 그다지 큰 관심을 받지 못한 채 묻혔다.
일부에서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기념비를 무덤 앞에 세우자고 제안했지만 아무도 관심을 쏟지 않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그의 무덤에는 무덤 주인이 누구라고 소개하는 간단한 명문 하나도 붙어있지 않았다. 다만 베르니니 가문의 무덤이라는 명문만 바닥에 새겨져 있을 뿐이다. 그래서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에 가는 사람 중에서 이곳에 베르니니의 무덤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대성당의 중세 시대
15세기까지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 신도석과 복도 천장은 판테온처럼 뚫려 있었다. 1455년 교황 갈리스토 3세(재임 1455~58년)는 중앙 신도석 위에 평평한 천정을 덮어 씌웠다. 이 천장은 르네상스 시대 천재 건축가이자 조각가였던 기울리아노 다 산갈로가 설계한 것으로 알려졌다. 놀라운 사실은 그가 당시 열 살에 불과했다는 점이다. 물론 그렇게 기록돼 있다는 것이지만 믿을 수는 없는 점이다.
나중에 갈리스토 3세와 같은 보르기아 가문 출신인 교황 알렉산데르 6세(재임 1492~1503년)는 천장을 금으로 도금했다. 스페인의 페르디난드 2세 국왕과 이사벨라 여왕이 신대륙의 잉카제국에서 약탈해 교황에게 선물한 황금을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결국 잉카제국의 눈물이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의 천장을 적신 셈이다.
1527년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가 교황 클레멘스 7세(재임 1523~34년)의 ‘양다리 걸치기’ 국제 외교에 화가 나 로마로 쳐들어왔다. 카를 5세의 병사들은 로마 곳곳을 약탈하고 다녔다.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도 같은 신세를 면할 수 없었다. 병사들은 대성당에 있던 구유 조각을 훔쳐갔고, 은으로 만든 제단 출입문과 금으로 제작한 제단 전면, 그리고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 금조각상을 모두 훔쳐갔다.
지금 이 유물들은 어디에 있는지 행방을 알 수 없다. 다만 유구 조각은 대성당 지하동굴 어딘가에 버려져 있을 것이라는 추정만 나돈다.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은 16세기 교황 식스토 5세(1585~90) 시대에 크게 변모하게 된다. 그는 추기경 시절 때부터 대성당 증축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이유는 하나였다. 이곳에 자신의 무덤을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식스토 5세는 르네상스 후기 건축가 겸 조각가 도메니코 폰타나에게 대성당의 성체 예배당 규모를 두 배로 키우라고 지시했다. 폰타나는 예배당의 웅장한 면모를 부각시키기 위해 당시 팔라티노 언덕에 있던 셉티조디움을 해체해서 구한 대리석을 공사에 사용했다. 공사에 쓰고 남은 일부 대리석은 피아자 델 포폴로(포폴로 광장)에 있는 오벨리스크는 물론 코르소 거리에 있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아우스 원주의 기단으로 활용했다.
셉티조디움은 203년 로마 제정 시대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만든 신전이었다. 태양과 달 외에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 등 태양계에 있는 일곱 항성과 위성의 신을 모신 곳이었다. 그래서 셉티조디움이라는 이름은 ‘일곱 태양의 신전’을 의미했다.
식스토 5세는 또 당시에는 로마 시내에서 떨어져 있던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의 접근 편의성을 높이기 위해 여러 도로를 건설했다. 먼저 대성당에서 포로 로마노 인근까지 연결되는 비아 파이니스페르나를 건설했다. 라테라노 대성당으로 손쉽게 갈 수 있는 비아 메룰라나는 물론 스페인광장에 있는 트리니타 데이 몬티 성당까지 이어지는 스트라다 펠리체도 깔았다.
대성당 앞에는 널찍한 에스퀼리노 광장을 만들었고, 광장에 아우구스투스 영묘에서 가져온 오벨리스크도 하나 세웠다. 오벨리스크는 1519년 무너지는 바람에 세 조각으로 부러져 있었다. 영묘에는 오벨리스크가 두 개 있었는데 나머지 하나는 퀴리날레 광장으로 옮겼다.
교황은 에스퀼리노 광장에 길을 내기 위해 원래 그곳에 있던 성 누가 성당을 허물어버렸다. 이 성당은 원래 로마 화가 조합의 사무실로 사용되고 있었다. 살루스 포풀리 로마니를 그린 사람이 누가였기 때문에 화가 조합은 누가를 수호성인으로 모시고 있었다. 교황은 대신 화가들에게 포로 로마노에 있는 산타 마르티나 성당을 사무실로 이용하라고 했다.
식스토 5세의 웅장한 공사에 감동 받은 교황 바오로 5세(재임 1605~21년)는 자신의 무덤도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에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파올리나 예배당을 만들기로 했다. 공사는 서임 첫 해인 1605년에 시작해 6년 만에 끝났다. 공사를 시작할 당시 바오로 5세의 나이는 53세였다. 지금은 그렇게 많은 나이가 아니지만 중세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언제 세상을 떠날지 모르는 나이였다. 실제 그는 예배당 완공 6년 뒤 눈을 감았다.
현대의 산타 마리아 마조레
20세기 말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 사제단은 불명예스럽게도 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성당 행정부에 부정부패가 만연한 게 이유였다.
사제단은 대성당 재산을 낭비한데다 대성당을 제대로 관리하지도 않았다. 대성당은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었다. 지붕에서 물이 새는 바람에 신도석 천장이 썩어 들어갔다. 신도석 측면 벽의 유리창 틀도 썩어 물이 새는 바람에 벽은 물론 그 앞에 붙어 있는 5세기 모자이크가 붕괴될 위기에 몰렸다. 이탈리아 정부는 성당에 예배를 드리러 가는 일이 위험하다다고 경고할 정도가 됐다.
엄청난 재앙이 닥쳤다는 보고를 받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재임 1978~2005년)는 1984년부터 대성당 수사신부로 일하고 있던 웨일스 출신의 딜윈 루이스를 공위 주교좌 참사회장으로 임명했다. 그에게 대성당의 구조와 기능을 복원하는 일을 총감독하게 맡긴 것이었다.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 복원 사업에는 200억 원 가량이 투입됐다. 루이스는 여러 곳에 손을 벌려 복원 사업비를 모금했다. 대성당의 종교적, 행정적 업무를 크게 개선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성격이 매우 급해 화를 잘 내곤 했다. 결과적으로 이런 성격이 당시 대성당 상황을 바로잡는 데 큰 효과를 발휘했다. 특히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종신 임기에만 의존해 빈둥거리던 대성당의 많은 사람을 다루는 데 도움이 됐다. 그는 대성당을 본궤도에 올려놓았다는 긍정적 평가를 받은 뒤 2000년 눈을 감고 말았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루이스가 세상을 떠난 다음해 새로 복원한 박물관을 개장했다. 21세기 초에는 시스티나 예배당 복원 사업도 무난하게 진행됐다. 공사를 하는 동안 예배당은 여러 해 동안 문을 닫아야 했다.
산타 마리아 마조레 광장에는 콜로나 델라 파체(평화의 원주)가 세워져 있다. 원래 포로 로마노의 막센티우스 바실리카 앞에 세워져 있었지만, 1614년 건축가 카를로 마데르노가 교황 바오로 5세의 명령으로 원주를 옮겨놓았다.
원주는 파로스 섬에서 캐낸 거대한 대리석 하나로 만들었으며, 이랑 무늬가 있는 게 특징이다. 원주에는 교황이 보르게세 가문 출신임을 상징하는 독수리 두 마리와 용 두 마리가 대좌를 장식하고 있다. 원주 꼭대기에는 무원죄 잉태설을 상징하는 동상이 세워져 있다.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은 로마 4대 메이저 성당인 만큼 성스러운 문인 성문(聖門)이 있다. 2001년 12월 요한 바오로 2세가 축복을 내린 청동 문이다.
가장 흥미로운 점은 이 문에 붙어 있는 패널의 부조 내용이다. 주 패널은 부활한 예수가 성모 마리아 앞에 나타나는 장면을 담고 있다. 성경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전설에 따르면 예수는 부활한 뒤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에게 가장 먼저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부조의 오른쪽 부분은 ‘토리노의 수의’에 새겨진 형상을 보고 만든 예수를 담고 있다. 토리노의 수의는 이탈리아 토리노 대성당에 16세기부터 보관돼 온 아마포다. 여기에는 사람 모습 같은 것이 보인다. 기독교는 예수의 모습이 각인된 것이라고 믿는다.
반대쪽에는 성모 마리아가 새겨져 있다. 살루스 포풀리 로마니의 그림을 보고 만든 부조 조각이다. 윗부분에는 성수태고지 장면을, 다른 쪽에는 성령강림절을 묘사하고 있다. 왼쪽 아래 부분에는 성모 마리아를 신의 어머니로 선포한 에페수스 공의회 장면이, 오른쪽 아래에는 성모 마리아를 교호의 어머니로 선언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장면이 담겨 있다.
전통적으로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에서는 해마다 8월 5일에 대형 미사가 열린다. 미사 도중 돔에 달려 있는 등불에서 장미 꽃잎이 눈처럼 흩날리며 떨어진다. 지오반니 파트리지오 앞에 나타나 하얀 눈이 내린다고 예언하면서 대성당을 지으라고 명령한 천사의 전설을 상징하는 행사다. 최근에는 장미 꽃잎 대신 달리아 꽃잎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꽃잎이 더 작아서 많이 하늘거리고, 위에서 아래로 바로 떨어져 내리는 효과를 내기에 좋다는 이유에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