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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Nov 12. 2020

라테라노 대성당(1)

서방세계  최초의 기독교 성전


성당 정면 머리 부분에 이런 글이 붙어 있다.


‘옴니움 우르비스 에트 오르비스 에클레시아룸 마테르 에트 카푸트.’


사전을 꺼내 번역해보니 재미있는 내용이 나온다.


‘로마와 세계 모든 성당의 머리이며 어머니.’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일까? 글자 그대로다. 서방 가톨릭 성당 중에서 ‘어머니 성당’이라고 불릴 정도로 중요한 곳이라는 이야기다. 이곳은 바로 라테라노 대성당이다.


라테라노 대성당의 원래 이름은 무척 길다. ‘최고의 성 구세주와 성 세례자 요한 및 복음서저자 사도 요한의 라테라노 대성당’이다. 이곳은 로마교구 대성당이며 로마가톨릭 교황의 주교좌성당이다. 로마에 있는 ‘4대 메이저 대성당’ 중에서 가장 오래 됐고, 그래서 가장 순위가 높은 대성당이다. 당연히 로마는 물론 서구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성당이기도 하다.


라테라노 대성당 정면에는 라틴어로 ‘교황 클레멘스 12세, 5년째에 구세주 그리스도에게. 세례자 요한과 복음서저자 사도 요한의 영광을 위해’라고 적혀 있다. 이 글을 보면 처음에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헌정됐다가 여러 세기가 지난 뒤에 세례자 요한 등에게 공동 봉헌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곳에는 과연 어떤 역사가 담겨 있을까?


라테라누스 가문과 라테라노


라테라노 대성당 자리는 원래 라테라누스 씨족의 땅이었다. BC 1세기~서기 1세기 로마 역사학자 티투스 리비우스의 『로마사』에 따르면 라테라누스 씨족은 평민으로서 최초의 집정관이 된 루키우스 섹스티우스 라테라누스를 배출한 가문이었다. 그는 10번이나 호민관을 지내기도 한 평민의 수호자였다.


라테라누스가 집정관으로 당선되자 원로원 귀족들은 결과를 인정할 수 없다고 버텼다. 평민들은 군 복무 등 모든 의무를 거부하는 이른바 ‘제2의 성산 철수’로 맞섰다. 원로원은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로마에 큰 파장을 일으킬 만큼 평민의 집정관 선출은 정치적, 역사적으로 의미가 큰 사건이었다. 이런 영광을 얻을 정도로 라테라누스는 당시 로마 평민들에게 존경을 받은 정치인이었다.


라테라누스 가문은 제정 시대에는 집정관 등을 여러 명 배출해 명문 가문으로 성장했지만 네로 황제 시대에 몰락하고 말았다. 집정관 당선자였던 플라우티우스 라테라누스가 네로에 의해 황제를 몰아내려는 ‘피소 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기소 당했기 때문이었다. 네로는 라테라누스 가문의 재산을 모두 몰수해버렸다.


사라지는 듯했던 라테라누스 가문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시대에 다시 살아날 수 있었다. 세베루스는 황제 등극에 도움을 준 어릴 적 친구였던 섹스티우스 라테라누스에게 네로가 빼앗아 간 라테라누스 가문의 재산 중 일부를 돌려주었다. 그가 되찾은 땅에는 라테라누스 가문의 이름을 붙여 라테라노라고 부르게 됐다.


당시 라테라누스 가문은 라테라노에 큰 저택 즉 도무스를 갖고 있었다. 라테라누스 가문의 저택 외에도 이곳에는 귀족들의 대형 궁전이 적지 않았다. 현재 라테라노 대성당 뒤편에 있는 비아 데이 라테라니 거리가 궁전들이 몰려 있던 곳이었다. 일부 황제 가족도 이곳에서 살았다.


1959년 라테라노 궁전 뒤에 있는 산 지오반니 병원 지하에서 대형 도무스 흔적이 발견됐다.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오현제 중 한 명이었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어머니 도미티아 루킬라가 살았던 곳으로 밝혀졌다. 결국 이곳은 부자들이나 권력자들뿐만 아니라 황제의 가족도 모여 사는 부자동네였던 셈이다.


라테라노 대성당 앞에는 원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청동 기마상이 세워져 있었다. 지금 카피톨리노 언덕의 캄피돌리오 광장에 서 있는 기마상이다. 중세 시대 사람들은 이 기마상을 콘스탄티누스 대제로 착각했다. 그래서 기마상을 콘스탄티누스 기마상이라는 뜻인 카발루스 콘스탄티니라고 불렀다.

라테라노 대성당 인근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어머니의 사저가 있었고, 대성당 앞에 황제의 기마상이 서 있었다면 당시 이곳은 단순한 부자동네를 넘어 매우 중요한 장소로 여겨졌다고 볼 수 있다.


라테라누스 가문이 갖고 있던 저택의 원래 이름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어쨌든 세월이 흘러 나중에는 도무스 파우스타라고 불렸다. 라테라노 대성당 앞 광장에 서 있는 오벨리크스 인근에서 납으로 만든 수도관이 발견됐는데, 여기에 도무스 파우스타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문서 기록을 볼 경우 도무스 파우스타라는 이름은 4세기 아프리카 누미디아 밀레비스의 주교였던 기독교 역사학자 성 옵타투스가 작성한 책에 처음 나온다. 여기에는 ‘313년 교황 밀티아데스가 라테라노에 있는 도무스 파우스타에서 가톨릭 대 회의를 열었다’고 돼 있다.


여러 역사학자들은 ‘사두정치 때 서방의 황제였던 막스미니아누스 황제의 딸 파우스타가 이 궁전의 주인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하지만 파우스타는 어렸을 때 로마를 떠난 이후에는 로마에서 산 적이 없었다는 점에서 이런 주장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옵타투스의 기록에 나오는 도무스 파우스타가 정말 라테라노에 있던 저택이었는지 확실하지 않다고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들도 있다.


기독교 기록에 따르면 파우스타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결혼한 뒤 도무스 파우스타를 결혼지참금으로 가지고 갔다. 콘스탄티누스는 파우스타의 오빠인 막센티우스를 누르고 로마 제국의 통일 황제가 된 이후 저택을 당시 교황 밀티아데스(재임 310~314년)에게 선물했다.


그러나 파우스타가 정말 남편에게 저택을 넘겨준 것인지, 콘스탄티누스가 교황에게 선물한 것인지 둘 다 분명하지 않다. 일부에서는 황제가 교황에게 대 회의를 열도록 장소를 빌려준 것뿐이라고 말한다.  


어쨌든 콘스탄티누스가 도무스 파우스타를 밀티아데스에게 선물한 이후부터 1309년 교황 클레멘스 5세가 아비뇽에 갇혀 살게 될 때까지 모든 교황은 도무스 데이(신의 궁전)이라고 불리게 된 도무스 파우스타에서 살았다.


라테라노 대성당


콘스탄티누스는 312년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막센티우스를 꺾고 승리를 거둔 뒤 곧바로 라테라노 대성당을 짓기 시작했다. 그도 직접 공사장에서 돌을 나르며 공사 진행에 힘을 보탰다. 라테라노 대성당에는 이런 공적을 기려 지금도 콘스탄티누스 석상이 서 있다. 옵타투스는 이렇게 기록했다.


‘콘스탄티누스가 312년 막센티우스를 누르고 로마에 입성한 직후 기마 근위대 기지와 도무스 파우스타를 교황 밀티아데스에게 선물해 성당을 짓기 시작했다. 그해 11월 9일에 정문 봉헌식을 거행할 수 있었다.’


라테라노 대성당이 생기기 전까지 로마에 교황의 근거지가 있었다는 기록은 하나도 없다. 여러 차례 고고학 조사에도 불구하고 라테라노 대성당 이전 로마에는 봉헌된 예배장소조차 종류를 불문하고 한 곳도 없었다. 당시에 소규모 예배는 개인 주택에서, 대규모 예배는 상업적 건물 즉 바실리카를 빌려 치르는 게 일반적이었다.


교황은 대성당이라는 영구적 성소를 가질 상황이 아니었다. 이런 처지의 로마에 서방 세계에서는 처음 라테라노 대성당이 건설됐으니 ‘세계 성당의 어머니’라는 평가를 받기에 전혀 모자람이 없었다.


밀비우스 다리는 로마 북쪽에 있다. 오늘날 포폴로 광장에서 비아 플라미니아를 따라 북쪽으로 4㎞ 정도 쭉 올라가면 스타디오 플라미니아와 국립로마현대미술관이 나온다. 두 곳을 지나 조금만 더 가면 밀비우스 다리가 등장한다. 돌로 만든 조그마한 다리다. 차량 통행은 금지 돼 있고 사람만 걸어 건널 수 있다. 이 다리에는 콘스탄티누스가 막센티우스를 꺾고 전쟁에서 이긴 이유와 관련한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콘스탄티누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창안한 사두정치 시대에 서방의 정제였던 아버지 콘스탄티우스의 뒤를 이어 서방 부제 자리에 올랐다. 그는 서방 정제였던 막시미아누스의 제안을 받아들여 아내 미네르바와 이혼하고 막시미아누스의 딸 파우스타와 재혼했다.


그때 처남인 막센티우스가 로마에서 황제라고 자칭하고 나섰다. 로마를 통일해 한 명뿐인 황제가 되고 싶었던 콘스탄티누스는 로마로 쳐들어갔다.


콘스탄티누스는 풍부한 전쟁 경험을 갖고 있었지만 병력과 병참에서 막센티우스보다 불리했다. 만약 처남이 로마 성벽 안에 틀어박혀 장기 농성전을 벌이면 이기기가 불가능했다.


그가 처남을 어떻게 성 밖으로 끌어낼지 고민하고 있을 때 하늘에서 이상한 현상이 나타났다. ‘엔 타우토 니카’ 즉 ‘이 표식으로 승리하리라’라는 글자가 구름 사이에 새겨졌던 것이다. 그가 저녁에 잠들었을 때에는 누군가 꿈에 나타나 ‘병사들의 방패에 주 예수를 찬양하는 십자가 표식을 새겨 넣도록 하라. 이 표식이 너를 승리로 이끌어 줄 것이다’라고 말했다.


콘스탄티누스는 꿈이 시키는 대로 하라고 부하들에게 지시했다. 그러자 다음날 농성전을 할 것으로 예상했던 막센티우스가 16만 대군을 이끌고 성 밖으로 나와 밀비우스 다리를 건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콘스탄티누스는 처남의 4분의 1밖에 안 되는 군대를 이끌고 전투에 나서 압승을 거뒀다. 그가 라테라노 대성당 공사를 서둘러 시작하고 이듬해 밀라노 칙령을 공표해 기독교를 공인한 것은 하나님의 도움으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라테라노 대성당을 신축한 자리에는 기마 근위대 기지가 있었다. 원래는 네로 황제 시대에 부유한 귀족이 지은 대저택이 있던 곳이었지만,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가 저택을 허물고 카스트라 노바 에퀴툼 싱굴라리움이라는 새 기마 근위대 기지를 세운 것이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세운 것으로 알려진 기존의 기마 근위대 기지는 로마 북쪽에 있는 카스트라 프리오리아였다. 그곳에는 기마병 1천500명이 근무하고 있었다. 말 500마리를 수용할 수 있는 카스트라 노바가 생긴 덕분에 황제의 기마 근위병은 1천500명에서 2천 명으로 늘었다.


콘스탄티누스는 막센티우스를 꺾고 로마로 들어간 뒤 막센티우스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했던 기마 근위대를 폐지하고 두 요새를 없애버렸다. 이탈리아 출신 기독교 전문 고고학자인 엔리코 조시가 1934~38년 라테라노 대성당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신도석 지하에 아주 깔끔한 상태의 카스트라 노바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막센티우스에게 충성했던 근위대 기지 자리에 라테라노 대성당을 세운 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었다. 기독교가 볼 때 로마제국 황제는 이교도의 수장이었다. 막센티우스는 로마에 상주한 마지막 로마제국 황제였다. 그의 근위대 기지에 대성당을 세움으로써 한편으로는 라이벌의 근거지를 없애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교도 황제의 기반을 무너뜨려 기독교의 승리를 완벽하게 마무리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두 번째 이유는 세월이 한참 흐른 이후 기독교에서 내놓은 해석이다.


로마의 첫 대성당을 라테라노에 지은 것은 다른 의미도 갖고 있었다. 라테라노는 당시에는 로마 외곽 지역이었다.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처음부터 우대하려 했다면 로마 시내 한복판인 마르스 평원이나 포로 로마노 등에 대성당을 지어야 했다.


하지만 막센티우스를 누르고 군사적으로 로마를 평정한 콘스탄티누스였다 하더라도 로마 시내 한복판에 기독교 성소를 세웠다가는 큰 반발에 부닥칠 우려가 적지 않았다. 당시 로마는 여전히 이교도가 절대다수인 도시였기 때문이었다.



콘스탄티누스는 로마에 처음 대성당을 지었다는 사실과, 이전에 로마에 세워졌던 어떤 이교도 신전보다 건축학적으로 크고 아름다운 성소를 지었다는 사실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라테라노 대성당은 318년 11월 9일 완공돼 봉헌식을 치렀다. 4세기 종교 역사가인 카이사레아의 에우세비우스는 『교회의 역사』에서 이렇게 적었다.


‘라테라노 대성당 건립 이후 모든 기독교도가 숭앙하면서 예배하는 모습이 보였다. 여러 도시에서 봉헌 축제가 열렸고, 신도들이 새로 지은 집을 축성하는 행사는 새 대성당에서 진행됐다. 주교들이 모였고, 외국인들도 몰려들었고, 사람들 사이의 상호 사랑이 보였다.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든 사람들이 완벽한 조화로 뭉쳤다.’


라테라도 대성당은 처음에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봉헌한 성소였다. 이곳을 세례자 요한에게 다시 봉헌한 사람은 10세기 교황 세르기우스 3세였다. 그는 라테라노 대성당에 세례당을 추가했다. 원래는 대형 욕장이 있던 곳이었다. 교황은 세례당 완공를 축하하는 뜻에서 대성당을 세례자 요한에게 바치는 봉헌식을 다시 열었던 것이다. 12세기 교황 루키우스 2세는 여기에 덧붙여 『요한복음』을 쓴 성 요한에게 성당을 바치는 봉헌식을 재차 거행했다.


여기서 잠시 도무스 파우스타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자. 콘스탄티누스는 이혼한 전처 미네르바와의 사이에 아들 하나를 두고 있었다. 아버지를 닮아 전쟁에서 탁월한 실력을 발휘했던 크리스푸스였다. 그는 갈리아는 물론 게르마니아에서 야만인들을 상대로 여러 차례 전쟁을 벌여 연전연승해 로마인들로부터 영웅이라는 칭찬을 듣고 있었다.


새 부인 파우스타는 콘스탄티누스에게는 은인이나 마찬가지였다. 장인 막시미아누스가 결혼식 직후 마음을 바꿔 자신을 암살하려고 계획을 꾸미고 있을 때 이를 알려줘 대비하도록 한 사람이 파우스타였다. 처남 막센티우스와 로마를 놓고 건곤일척의 전투를 벌일 때에도 파우스타는 남편을 지지했다. 그래서 콘스탄티누스는 로마 황제로 등극한 뒤 부인에게 아우구스타라는 최고의 존칭을 하사했다.


하지만 콘스탄티누스는 크리스푸스와 파우스타에게 간통을 했다는 죄를 뒤집어 씌워 모두 죽이고 말았다. 아들은 고문 끝에 살해했고, 파우스타는 목욕탕에 가둬 쪄 죽였다.


일부에서는 콘스탄티누스가 파우스타의 음모에 속았다고 주장한다. 파우스타는 노쇠한 콘스탄티누스가 죽은 뒹도 권력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젊은 크리스푸스를 유혹하다 거부당했다. 그녀는 남편에게 의붓아들로부터 성폭행을 당할 뻔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이를 믿은 콘스탄티누스는 화가 나서 아들을 죽였다. 나중에 측근들로부터 파우스타가 거짓말을 한 사실을 알게 돼 그녀마저 살해했다. 이것이 음모론의 내용이다. 간통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부인의 거짓말 때문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콘스탄티누스가 아들과 부인을 모두 죽인 것만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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