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스러운 계단
로마를 넘어 전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성소였던 라테라노 대성당은 14세기 초부터 몰락의 길을 걸었다. 교황의 아비뇽 유수가 그 원인이었다. 아비뇽 유수는 라테라노 대성당에는 재앙 그 자체였다.
교황이 아비뇽으로 떠나버리자 대성당을 관리하는 다른 성직자들도 모두 함께 떠나버렸다. 교황이 로마를 버린 사이 로마 시민들과 대성당을 찾아온 순례자들은 공포에 떨었다.
“로마에는 우리를 지켜줄 지도자가 사라져 버렸어.”
이 때문에 사람들도 로마를 버리기 시작했다. 당시 로마의 인구가 얼마나 크게 줄었던지 2만 명에도 미치지 못했다고 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308년 6월 6일 라테라노 대성당에 큰 불이 났다. 사흘 동안 이어진 불로 신도석 지붕과 도무스 데이(도무스 파우스타)가 큰 피해를 입었다. 당시 아비뇽에 있던 교황 클레멘스 5세(재임 1305~14년)는 이 소식을 듣고도 재건 계획을 세우거나 로마로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재앙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1343년에는 폭풍이 몰아쳤고, 1347년에는 지진이 발생해 대성당을 뒤흔들었다. 설상가상으로 1360년에는 다시 불이 나 대성당을 붕괴 직전의 위기로 몰아넣었다. 교황 우르바노 5세(재임 1362~70년)가 1364년 시에나의 건축가 지오바니 디 스테파노에게 라테라노 대성당 재건축을 지시했지만 과거의 모습을 다시 살려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런 와중에 그레고리오 11세(재임 1370~78년)가 아비뇽 유수를 끝내고 로마로 돌아왔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라테라노 대성당에는 전혀 기쁜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대성당의 위상을 더욱 떨어뜨리는 일에 불과했다.
그레고리오 11세는 과거 교황의 처소였던 라테라노 궁전에서는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교황은 일단 산타 마리아 인 트라스테베레 성당에 거처를 마련했다. 나중에는 지금의 테르미니 역 근처에 있는 산타 마리아 마조레 성당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결국에는 성 베드로 대성당 곁에 있던 바티칸 궁전으로 침소를 다시 옮겼다. 이후 역대 교황은 라테라노 대성당으로 돌아가지 않았고, 성 베드로 대성당에 그대로 눌러앉았다. 만약 교황이 아비뇽 유수 때문에 로마를 떠나지 않고, 이후 두 차례 불이 나지 않았다면 지금 로마 가톨릭 교황청은 라테라노 대성당에 자리를 잡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라테라노 대성당의 본격적인 재건 작업은 16세기에 시작됐다. 교황 식스토 5세(재임 1585~90년)는 아끼던 건축가 도미니코 폰타나에게 라테라노 대성당 복구 작업을 맡겼다. 폰타나는 기존에 있던 라테라노 대성당 건물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새로운 건물을 지었다.
식스토 5세는 또 대성당 앞에 넓은 광장을 지었고, 광장에는 거대한 이집트 오벨리스크를 세웠다. 이집트의 파라오 투트모스 3세가 만들고, 투트모스 4세가 테베의 카르낙 사원에 세운 오벨리스크였다. 무게가 무려 455t이어서 현재 제대로 서 있는 오벨리스크 중에서는 전 세계에서 가장 크다.
이 오벨리스크는 원래 대전차경기장인 키르쿠스 막시무스에 서 있었지만 폰타나가 새로 만든 광장으로 옮긴 것이었다. 흥미롭게도 이 오벨리스크가 로마로 오게 된 데에는 라테라노 대성당을 건설한 콘스탄티누스와 그의 둘째 아들인 콘스탄티우스에 얽힌 이야기가 전한다.
‘콘스탄티우스 황제는 357년 개선식을 치르기 위해 황제로 취임하고는 처음 로마를 방문했다. 그는 영광스러운 과거를 상징하는 건물로 가득 찬 로마의 포로 로마노를 둘러보고는 깜짝 놀랐다. 또 카피톨리노 언덕의 유피테르 신전, 판테온과 인근의 네로 욕장과 디오클레티아누스 욕장을 구경하고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로마와 비교하면 콘스탄티노플은 시골에 불과했던 것이다.
콘스탄티우스는 트라야누스 포룸을 방문한 길에 ‘역대 로마 황제들은 시민들에게 공공시설을 기증하는 전통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이집트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던 오벨리스크를 가지고 와 대전차경기장인 키르쿠스 막시무스에 세우기로 했다. 아버지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콘스탄티노플로 이송하려다 사정이 여의치 않아 그대로 내버려 둔 오벨리스크였다.
콘스탄티우스는 이집트에서 가져온 오벨리스크를 키르쿠스 막시무스의 가운데 부분에 세우기로 했다.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이미 세워 놓았던 오벨리스크의 반대쪽에 마주보고 서게 했다. 제정 로마를 세운 초대 황제와 어깨를 견주게 됐으니 그로서는 감개무량한 만한 일이었다.’
라테라노 대성당 재건 사업은 식스토 5세 이후에도 이어졌다. 17세기 중엽 교황 인노첸시오 10세(재임 1644~55년)는 건축가 프란체스코 보로미니에게 라테라노 대성당을 리모델링하라고 지시했다. 보로미니는 대성당에 벽감 12개를 마련한 뒤 예수의 12사도를 상징하는 석상 12개를 만들어 세우기로 했다.
보로미니는 예산 등의 문제 때문에 석상을 끝내 제작하지 못했다. 석상을 만들어 세운 사람은 1701년 교황 클레멘스 11세(재임 1700~21년)였다. 그는 라테라노 대성당의 벽감이 빈 사실을 알고는 추기경 팜필에게 이렇게 지시했다.
“실물보다 큰 12사도 석상 12개를 만들어 채우시오.”
석상 스케치는 당시 교황이 가장 아꼈던 화가 카를로 마라타가 그렸다. 교황은 이 스케치를 여러 조각가에게 넘겨주고 그대로 만들라고 했다. 조각가 12명 중 11명은 교황의 지시를 그대로 따랐지만 피에르 르 고르스만은 거부했다.
“예술가에게는 자존심이 있습니다. 남의 스케치를 그대로 베껴 만들라는 지시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클레멘스 11세는 고르스만에게는 특별 허가를 내주어 직접 스케치를 해서 자신만의 석상을 만들게 했다.
18세기 중엽 교황 클레멘스 12세(재임 1730~40년)는 더 대담하고 야심에 찬 재건 계획을 추진했다. 그는 대성당의 새 정면을 만들기 위해 공모전을 열었다. 모두 23개 작품이 응모했는데, 대부분 당시 유행하던 바로크 양식의 작품을 내놓았다.
심사위원단은 이탈리아의 수학자이며 건축가인 알레산드로 갈릴레이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새 정면은 1735년에 완공됐다. 오늘날 우리가 대성당에 가면 볼 수 있는 바로 그 모습이다. 대성당 정면에 ‘교황 클레멘스 12세, 5년째에 구세주 그리스도에게. 세례자 요한과 복음서저자 사도 요한의 영광을 위해’라는 글을 새긴 것도 바로 이때였다.
라테라노 대성당에는 교황의 무덤 6개가 있다. 이곳에 묻힌 교황은 알렉산데르 3세(재임 1159~81년), 클레멘스 12세 등이다. 이들 외에도 교황 무덤 12개가 더 있었지만 1308년과 1361년에 발생한 화재로 모두 파괴돼 버렸다. 교황청은 신분을 확인할 수 없게 된 교황들의 유해를 발굴해 공동묘지에 함께 매장했다.
라테라노 대성당 앞 라테라노 궁전에서 길을 건너가면 산크타 산크토룸이라는 예배당이 나온다. ‘성스러운 계단’인 스칼라 산크타가 있는 곳이다.
스칼라 산크타는 나무로 둘러싼 28개의 하얀 레바논 산 대리석 계단이다. 중세 시대 전설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가 로마의 유대 총독 빌라도의 저택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기 위해 힘들게 내려왔던 계단이다.
예수가 수난을 상징하는 발자국을 남긴 곳이어서 성스러운 계단으로 받아들여진다. 두 번째, 열한 번째, 스물여덟 번째 계단에 묻은 얼룩은 예수의 핏자국이라는 주장이 있어 특히 숭배를 받는다.
중세 시대 전설에 따르면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친모 성 헬레나가 아들에게 부탁해 326년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이 계단을 가지고 왔다. 당시에는 ‘빌라도의 계단’이라는 뜻인 스칼라 필라티로 불렸다.
원래는 라테라노 대성당의 성 실베스터 예배당 근처 복도에 설치돼 있었지만 식스토 5세가 라테라노 대성당을 완전히 부수고 재건축할 때 계단을 설치하기 위해 예배당을 새로 만들었다.
스칼라 산크타가 과연 진짜 빌라도 저택의 계단이었는지, 과연 헬레나가 아들에게 부탁해서 로마로 가져온 게 맞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왜 헬레나와 콘스탄티누스는 로마제국의 새 수도인 콘스탄티노플로 예수의 계단을 가져가지 않고 이곳에 갖다놓았는지 의문이라는 것이다.
헬레나의 전설은 중세 시대에 들어서야 생겨났다는 점에서 이때 만들어진 이야기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상당수 역사학자들은 이렇게 판단한다.
“스칼라 필라티는 교황의 거처가 된 라테라노 궁전을 새로 꾸밀 때 출입구에 계단을 설치하기 위해 주변의 고대 로마 시대 도무스에서 뜯어온 계단일 가능성이 높다.”
‘필라티’는 라틴어로 빌라도를 뜻하기도 있지만 ‘투창으로 무장했다’라는 뜻도 있다. 당시 예배당 앞 계단에서는 창을 든 병사들이 경비를 섰다. 이 때문에 스칼라 필라티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주장이 나온다.
스칼라 산크타가 예수의 수난을 담고 있는 계단이라는 이야기가 퍼지자 순례자가 몰려들었다. 다들 예수의 수난을 따라 하기 위해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올랐다. 16세기 종교개혁의 선구자였던 마틴 루터도 1510년 무릎으로 계단을 오른 적이 있다. 그는 계단 하나를 오를 때마다 “하느님 아버지”를 외쳤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렇게 하면 영혼이 연옥에 가지 않는다고 믿었다. 루터는 계단 끝까지 올라간 뒤 이렇게 말했다.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작가 찰스 디킨스도 1845년 스칼라 산크타를 방문했다. 그는 무릎으로 계단을 오르는 순례자들을 보고는 ‘외양적 형식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사람들’이라고 비웃었다. 그리고 이런 글을 남겼다.
“내 인생에서 오늘처럼 웃기고 불쾌한 경험은 한 적이 없었다.”
얼마나 많은 순례자가 계단을 오르내렸던지 대리석이 닳기 시작했다. 1724년 교황 베네딕토 13세(재임 1724~30년)는 대리석 계단을 보호하기 위해 나무를 뒤집어씌우게 했다. 일부에서는 베네딕토 13세의 선임이었던 인노첸시오 13세(재임 1721~24년) 때 나무를 씌웠다고 주장한다.
2019년 4월 라테라노 대성당 측은 나무 덮개를 벗겨냈다. 21세기 들어 다시 순례자들이 너무 많이 몰려 나무 덮개조차 닳아 보수 공사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해서 예수의 대리석 계단의 거의 300년 만에 햇빛을 보게 됐다.
대성당 측은 나무 덮개를 벗겨내고 공사를 진행한 4~7월 석 달 동안 한시적으로 순례자들이 대리석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오를 수 있게 허용했다. 이것도 또한 300년 만이었다. 공사를 마친 뒤 다시 나무 덮개가 씌워졌고, 언제 다시 대리석 계단이 공개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