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는 크게 두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포로 로마노를 중심으로 한 일곱 언덕 즉 로마 시내가 있었고, 테베레강 사이에 있는 마르스 평원도 있었다. 두 곳은 로마의 신성한 경계를 표시하는 포메리움으로 구분됐다. 포메리움은 ‘로마의 행운’을 지켜주는 일종의 종교적 국경선이었다.
마르스 평원은 캄피돌리오 광장이 있는 카피톨리노 언덕, 이탈리아 정부 건물이 있는 퀴리날레 언덕, 포폴로 광장 자리인 핀키오 언덕과 테베레 강 사이에 놓인 너른 땅을 말한다. 산탄젤로 성 앞에서 ‘ㄷ’자 모양으로 굽이도는 테베레 강 앞으로 툭 튀어나온 구역이다.
고대 로마 초창기부터 ‘로마인의 놀이터’였던 이곳은 긴 역사 덕분에 오늘날 로마의 주요한 여행지가 대거 몰려 있다. 평원 한가운데를 지나가는 비아 플라미니아(플라미니우스 가도)를 중심으로 일곱 언덕 쪽에는 트레비 분수와 스페인 광장이 있고, 맞은편에는 판테온, 나보나 광장,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원주와 라르고 디 토레 아르젠티나 등이 몰려 있다.
고대 로마 시대에 마르스 평원의 면적은 대충 242만㎡ 정도였다. 해발은 10~15m 정도였고, 바로 옆의 테베레 강보다는 3m 정도 높았다. 테베레 강은 키르쿠스 막시무스를 지나자마자 서북쪽으로 크게 굽이친 뒤 산탄젤로 성 부근에서 다시 동쪽으로 꺾어졌다. 그러다 스페인 계단 인근에서 완전히 북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땅이 그다지 높지 않은데다 테베레 강이 비비꼬인 모양을 하다 보니 비가 조금이라도 많이 오면 마르스 평원에는 물이 넘치곤 했다. 이곳에 습지와 연못은 물론 암니스 페트로니아 같은 개울이 여러 개 있었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왕정, 공화정 시대에 로마의 경계로 받아들여진 곳이 암니스 페트로니아였기 때문에 왕이나 집정관은 마르스 평원에서 켄투리온 즉 백인대장 투표를 진행하기 위해 개울을 건널 때마다 조점인 아우스피키아 페렘니아를 봐야 했다.
이 개울은 로마의 일곱 언덕 중에서 가장 북쪽에 있는 퀴리날레 언덕의 서쪽을 돌아 카티 폰스라는 샘에 물을 공급했다. 카티 폰스를 지난 뒤에는 큰 습지인 카프레아로 흘러들어갔다. 이곳에는 유황 온천이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 제정 시대에 아우구스투스 초대황제의 친구이자 장군이었던 아그리파가 카프레아 습지에 이른바 아그리파 목욕탕을 만들었다.
마르스 평원의 유래
마르스 평원이라는 이름은 이곳이 마르스 신에게 바친 땅이어서 붙여졌다. BC 1세기~서기 1세기 로마 역사학자였던 티투스 리비우스는 이렇게 말한다.
‘원래 마르스 평원은 에트루리아 출신이었던 타르퀴니우스 가문의 땅이었지만 로마의 마지막 7대 왕인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가 로마에서 쫓겨난 뒤 몰수돼 국유지로 변했다. 이 땅이 마르스 신에게 헌정된 것은 이때였다.’
BC 1세기 그리스 역사학자 할리카르나수스의 디오니시우스는 다른 주장을 내놓는다.
‘마르스 신에게 이 땅을 헌정한 것은 그 이전이었다. 타르퀴니우스 가문은 나중에 땅을 소유하게 됐다. 판테온 동쪽에 아라 마르티스라는 신전이 있었다. 제2대 왕 누마 시대에도 이 신전 이야기가 나온다.’
다른 주장도 있다. 2세기 문법학자 아울루스 겔리우스는 이렇게 주장한다.
‘베스탈이었던 가이아 투르키아 또는 푸페티아가 마르스 평원을 로마 시민들에게 기증했다.’
마르스 평원은 처음에는 소나 양을 풀어 키우던 목초지였다. 일부 지역에서는 곡식을 심기도 했다. 로마의 젊은이들이 운동을 즐기거나, 군인들이 군사훈련을 하던 곳이기도 했다.
마르스 평원은 로마의 신성한 경계인 포메리움 바깥이었다. 그래서 집정관은 로마 시내를 벗어나 포메리움을 지나 마르스 평원에 가면 아무런 법적 권한도 행사할 수 없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대에 포메리움이 넓어져 마르스 평원 일부구역까지 포함하게 됐지만, 아우렐리아누스 황제가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을 쌓기 전까지는 포메리움 바깥으로 간주됐다.
마르스 평원은 공유지였고 포메리움 바깥이었기 때문에 민회나 백인대 투표 장소로 이용됐다. 전쟁에 나서는 병사들의 집결지로도 이용됐다. 백인대 투표가 열리던 장소는 오빌레라고 불렸다. 원래 뜻은 ‘양 우리’였다. 또 ‘담장으로 둘러치다’라는 뜻인 사프타로 불리기도 했다. 마르스 평원이 소, 양에게 풀을 뜯기던 장소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런 이름을 붙인 이유를 알 수 있다.
왕정 시대부터 로마 시민들의 공유지였던 마르스 평원은 BC 1세기 공화정 말기 독재자였던 코르넬리우스 술라에 의해 민영화되기 시작했다. 그는 오리엔트 왕국인 폰투스의 미트리다테스 왕과 전쟁을 하러 나가기 위해 필요한 재원을 확보하려고 마르스 평원의 땅을 민간에게 불하했다.
물론 그 이전부터 마르스 평원이 일부 귀족들에 의해 불법적으로 이용되고 있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카르타고의 한니발을 꺾고 포에니 전쟁을 승리로 이끈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이곳에 빌라와 정원을 짓고 살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집이 그렇게 많지 않았지만 술라가 땅을 분양한 이후에는 사정이 달라졌다. BC 1세기 정치가, 철학자였던 키케로에 따르면 마르스 평원에는 연립주택인 인술라가 2천777채, 단독저택인 빌라가 140채 들어섰다.
빌라 푸블리카와 세 신전
포에니 전쟁 이전만 해도 마르스 평원에는 건물이 드물었다. 빌라 푸블리카 말고는 신전 세 개가 전부였다.
마르스 평원에 가장 먼저 세워진 공공건물은 곡물창고이자 투표장이었던 빌라 푸블리카로 추정된다. 티투스 리비우스가 쓴 『로마건국사』에 따르면 BC 435년에 만들어진 이 건물은 곡물창고이면서 빈민들에게 밀을 배급하는 곳이었다. 전쟁을 벌이기 위해 병사들을 소집할 때에는 이곳에 책상과 의자를 놓고 병사들의 신고를 받는 본부 역할을 했다.
인구조사를 실시할 때에도 이곳에서 일을 진행했다. 개선식을 기다리는 장군이나 외국에서 찾아온 사절단이 로마에 들어가기 전에 며칠 기다리는 곳도 여기였다. 포에니 전쟁에서 패한 카르타고의 사절단이 BC 202년, 마케도니아 전쟁에서 무릎을 꿇은 마케도니아 사절단이 BC 197년 로마를 찾아와 대기한 곳도 빌라 푸블리카였다.
고대 로마 동전에 새겨진 그림을 보면 빌라 푸블리카는 2층짜리 직사각형 건물이었다. 로마인들은 건물 하나를 세우더라도 밋밋하게 그냥 놔두지 않았다. 곡물창고인 빌라 푸블리카도 마찬가지였다. 타렌티우스 바로의 『농업론』에 따르면 이곳은 여러 가지 그림과 조각으로 장식돼 있었다.
빌라 푸블리카가 얼마나 컸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매우 중요한 자원인 곡물을 저장하는 곳이었으니 규모가 상당했 것으로 추정된다. 개선장군이나 외국 사절이 기다렸다고 하니 제법 안락한 침실이나 휴식 공간도 만들어져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창고에는 사무를 보는 직원은 물론 곡물을 지키는 경비병도 제법 있었을 것이다. 이들이 일을 하거나 쉬는 사무공간도 존재했을 것이다. 또 창고에 아무나 접근하지 못하게 담장도 세워져 있었을 것이다.
빌라 푸블리카는 베네치아 광장에서 비아 델 플레비시토, 즉 플레비시토 거리에서 산탄젤로 성 쪽으로 가면 나타나는 피아차 델 게수(게수 광장)에 자리 잡고 있었다. 17세기 교황 클레멘스 10세를 배출한 알 티에리 가문의 저택이었던 팔라초 알티에리(알티에리 궁전) 인근이다.
마르스 평원에 세워진 세 신전은 우연히 발견된 아라 프로세르피나, BC 431년에 만든 아폴로 신전, BC 296년에 건립한 벨로나 신전이었다.
제단인 아라 프로세르피나에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한 사비니 여인이 역병에 걸려 신음하는 아이를 치료하는 데 마르스 평원의 물이 좋다는 신탁을 듣고 테베레 강에 물을 구하러 왔다가 땅 밑에 묻혀 있던 아라 프로세르피나를 발견했다고 한다.
프로세르피나는 그리스신화에서는 데메테르의 딸인 포르세포네였다. 그녀는 지하세계 저승의 신인 하데스에게 납치돼 1년의 반은 그곳에서 살아야 했다. 대개 일반적으로 지하세계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유황이 넘쳐나는 곳으로 묘사되기 때문에 프로세르피나가 로마에서 샘의 여신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라 프로세르피나 인근에 있던 대전차경기장 키르쿠스 막시무스에서는 각종 경기대회인 ‘루디’가 열렸다. 루디 사에쿨라레스도 그 중 하나였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가 처음 시작한 루디였다.
발레리우스가 행사를 개최한 이유는 사비니 여인의 전설과 비슷하다. 발레리우스의 아들이 로마에 유행하던 역병에 걸려 죽을 처지에 몰렸다. 아들은 신의 도움을 받아 마르스 평원에 있던 따뜻한 물을 마신 뒤 천우신조로 목숨을 건졌다.
마르스 평원에 유황온천이 발견돼 나중에 아그리파가 대중목욕탕을 지었다는 사실을 고려해보면 이 따뜻한 물은 유황 온천수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마르스 평원은 타렌툼으로도 불렸기 때문에 이 루디는 루디 타렌티니라고도 불렸다. 발레리우스는 “아이들이 살아난 것은 프로세르피나 여신 덕분이었다”면서 여신에게 희생물을 바치고 경기대회를 열었다. 그것이 루디 사에쿨라레스였다. 이 행사가 열릴 때에는 언제나 아라 프로세르피나에 제물을 바쳤다.
아라 프로세르피나는 제정 시대에 새로 만들어졌다. 1886~87년 코르소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 거리에 있는 팔라조 체사리니 인근 지하에서 이 제단이 발견됐다. 제단은 3.40㎡ 넓이의 기단 위에 세워져 있었다. 계단을 통해 올라갈 수 있게 돼 있었다. 제단을 둘러싼 제법 높은 둔덕도 발견됐다. 제단 인근에서는 서기 17년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대와 204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시대에 치러진 루디 사에쿨라레스를 축하한다는 내용을 담은 대리석이 발견됐다.
마르스 평원의 아폴로 신전은 로마에서는 처음 아폴로에게 헌정한 신전이었다. 이 신전 역시 아라 프로세르피나처럼 역병과 관련이 있었다. BC 433년 로마에 역병이 퍼지자 로마인들은 의술의 신인 아폴로에게 역병을 사라지게 해주면 신전을 지어 헌정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신전은 카피톨리노 언덕 서쪽 아래에 세워져 있었다. 원로원은 수시로 이곳에서 원로원 회의를 열기도 했다.
벨로나 신전은 전쟁의 여신인 벨로나에게 헌정한 신전이었다. 벨로나는 마르스의 아내 또는 누이로 알려진 네리오와 동일시되기도 했다. 또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바다의 신 포르키스의 세 딸인 그라이아이 중 하나인 에니오라고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1세기 전후 로마 학자 티투스 리비우스, 가이우스 플리니우스 세쿤두스, 푸블리우스 오비디우스 등에 따르면 이 신전은 BC 296년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에쿠스가 지어 헌정했다. 지금은 잔해는커녕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정확한 위치도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키르쿠스 플라미니우스(플라미니우스 경기장) 인근에 서 있었다고 전해진다.
1~2세기 그리스 출신 로마 역사학자 플루타크로스가 쓴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따르면 벨로나 신전에는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잔혹성을 알려주는 이야기가 전한다.
오리엔트를 정벌하고 로마로 쳐들어 간 술라는 반대파인 집정관 킨나의 군대를 제압한 뒤 벨로나 신전에 원로원 의원들을 불러 모았다. 그가 연설을 막 시작했을 때 끔찍한 비명이 들리기 시작했다. 빌리 푸블리카에 갇힌 킨나의 병사들을 술라의 병사들이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소리였다. 로마 병사들이 로마의 진취적 기상을 상징하는 마르스 평원에서 한때 동료였고 동포였던 다른 로마 병사들을 무자비하게 죽이고 있었던 것이었다.
공화정 시대에는 로마의 장군이 외적을 무찌르고 로마로 귀향할 때 원로원 의원들이 벨로나 신전에서 환영의 뜻을 전달했다. 여기서 즉석회의를 열어 장군에게 개선식을 거행할 기회를 줄지 말지를 투표로 결정했다. 벨로나가 전쟁의 여신이었으니 이곳을 개선장군 영접 장소로 선택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BC 231년부터 시작해 BC 31년 악티움 해전이 벌어질 무렵까지 마르스 평원에는 신전 15곳이 추가로 건립됐다. 아우구스투스가 황제로 즉위한 이후에는 신전뿐만 아니라 열주 회랑, 목욕탕, 영묘, 판테온 등 많은 공공시설이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