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에는 라르고 디 토레 아르젠티나라는 광장이 있다. 베네치아광장 앞을 지나는 비아 델 플레비시토 거리와 연결되는 코르소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 거리를 따라 걷다 보면 왼쪽에 신전 기둥만 여러 개 서 있는 공간이 나온다. 엠마누엘레 2세 거리가 비아 디 토레 아르젠티나 거리와 만나는 모퉁이에 있는 광장이다.
아르젠티나라는 이름은 16세기 초 교황청 의전 담당관이었던 요하네스 부르카르트라는 사람 때문에 붙여졌다. 그는 라르고 디 토레 아르젠티나 맞은편에 있는 작은 골목인 비아 델 수다리오에 ‘카사 델 부카르도’라는 집을 하나 지어 살았다. 오늘날 타지아노호텔 뒤에 있는 골목이다. 부르카르트는 갈리아의 아르겐토라툼(오늘날 스트라스부르) 출신이어서 ‘아르겐티누스’라는 별명으로 불렸기 때문에 그의 집 주변에 토레 아르젠티나라는 이름이 붙었다.
19세기 말 이탈리아 통일 이후 정부는 토레 아르젠티나를 부수고 주변을 재개발하기로 결정했다. 이 지역에 유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어 재개발하더라도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게 이탈리아 정부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1927년 무솔리니 정권 시절에 철거 작업을 하던 도중 거대한 동상의 팔과 머리가 발견됐다. 즉시 발굴 조사단이 파견됐고, 조사 결과 고대 로마 공화정 시대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엄청난 건물, 즉 폼페이우스 대극장이 있던 자리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또 폼페이우스 대극장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서는 신전 4개가 발굴됐다. 로마인들이 깜짝 놀란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재개발은 없던 일이 되고 말았다.
마르스 평원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바로 폼페이우스 대극장이다. 테아트룸 폼페이로 불리는 이 대극장은 로마 최고의 장군 그나우에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가 두 번째 집정관직을 맡았을 때인 BC 55년에 세운 로마 최초의 상설 극장이었다. 이전까지 로마에는 행사 때마다 임시로 사용하기 위해 목재 등으로 만든 가설 극장은 있었지만 석재로 만든 영구적 극장인 하나도 없었다.
폼페이우스는 로마에 늘 맞섰던 폰토스의 미트리다테스 왕은 물론 아르메니아, 시리아, 이집트 등을 정벌하기 위해 오리엔트 원정에 나섰다. 타란툼(오늘날 타란토)에서 대군을 이끌고 아드리아해를 건너 그리스에 상륙한 그는 군대를 이끌고 행군하다 아테네는 물론 그리스 곳곳에서 아름다운 대리석 극장을 보게 됐다. 1~2세기 그리스 출신 로마 역사학자 플루타르코스는 『영웅전』에서 폼페이우스가 그리스에서 겪은 이야기를 통해 폼페이우스 대극장이 세워진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폼페이우스는 오리엔트 원정에 나섰을 때 그리스 레스보스섬의 미틸레네를 방문했다. 그곳에서는 엄청난 환영행사가 열렸다. 폼페이우스는 저녁에 엄청난 규모의 석재 상설극장에서 열린 전통적인 시 경연대회를 관람했다. 그리스의 극장에 처음 가 본 그는 그 규모에 놀라고 아름다움에 반하고 말았다. 그는 그리스인들에게 극장 그림과 설계도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 나중에 로마로 돌아가면 더 크고 아름다운 극장을 만들 생각이었다.’
이미 지중해를 누비던 해적을 소탕했던 폼페이우스는 오리엔트 원정에서 폰토스는 물론 아르메니아, 시리아, 유대 등을 차례로 평정한 뒤 화려하게 개선했다. 그 덕분에 ‘위대하다’는 뜻인 ‘마그누스’라는 별명을 얻었고, 신에게 약속한 대로 자신의 이름을 붙인 대극장을 건설했다.
그런데 로마에서 상설 대극장을 처음 접한 로마인들은 엉뚱하게도 폼페이우스 대극장을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먼저 이런 이유가 있었다.
“폼페이우스가 ‘로마에서는 처음’이라는 엄청난 영광을 직접 챙겨가는 게 정말 거만해 보이는군.”
이런 비난을 피하기 위해 폼페이우스는 베누스 여신에게 바치는 신전을 건설했다. 베누스 신전은 극장 청중석 중앙부분에 세워 마치 청중석이 신전으로 가는 계단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핵심은 신전이고 극장은 부수적이라고 알리려 했던 것이었다. 극장 문을 처음 열 때에도 극장 개장식이 아니라 신전 봉헌식을 거행해 로마 시민들의 삐딱한 시선을 피하려고 애썼다. 1~2세기 로마 역사학자 카시우스 디오는 『로마사』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일부에서는 폼페이우스 대극장을 폼페이우스가 건설한 게 아니라고 한다. 그의 해방노예였던 데메트리우스가 주인을 따라 갔던 전쟁터에서 챙긴 전리품으로 대극장을 만든 뒤 주인의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이렇게 하면 폼페이우스가 사람들로부터 불필요한 비난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고금을 불문하고 정치인들은 유권자들의 눈치를 봐야 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모든 것을 대신해주면서 모든 욕을 뒤집어쓰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터무니없지만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1~2세기 역사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타키투스의 『연대기』를 보면 그 이유가 나온다.
그때까지는 해도 각종 행사가 열릴 때마다 임시극장을 만들어 사용했기 때문에 관중석 없이 누구나 서서 경기나 연극을 관람해야 했다. 다리가 아프거나 피곤해지면 행사 도중에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이 많았다. 청중석을 갖춘 상설극장이 만들어지자 로마인은 이렇게 생각하게 됐다.
“경기나 연극을 편안하게 앉아서 볼 수 있으면 아무도 집에 가지 않을 것이다. 로마 사회에 나태를 불러올 수 있다.”
우여곡절 끝에 문을 연 폼페이우스 대극장은 테아트룸 폼페이라는 이름 외에 테아트룸 폼페이아눔, 테아트룸 마그눔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렸다. 나중에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마르켈루스 극장을 지을 때까지만 해도 로마에서 유일한 석재 극장이었기 때문에 단순히 테아트룸으로 불리기도 했다.
폼페이우스 대극장의 지름은 150~160m, 폭은 95m정도였다. 1세기 로마 시대 학자 가이우스 플리니우스 세쿤두스에 따르면 청중석은 4만여 석이었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1만여 석에 불과했을 것이라고 본다.
극장 개장식 때에는 야생동물과 검투사의 대결, 신기한 전시회 등 다양한 오락거리가 행사 참석자들에게 제공됐다. 카시우스 디오는 『로마사』에 이렇게 기록했다.
‘폼페이우스 대극장 개장 행사에는 사자 500마리, 코끼리 80마리가 동원돼 검투사들과 목숨을 건 싸움을 벌였다.’
폼페이우스 대극장을 봉헌과 관련한 재미있는 해프닝도 있었다. 2세기 로마 문법학자 아울루스 겔리우스가 쓴 『아티카의 밤』에 나오는 이야기다.
‘폼페이우스에게는 극장 개장을 앞두고 걱정이 있었다. 극장 정면에 건설자 이름을 써서 명판에 새겨 붙여야 하는데 ‘집정관을 세 번 경험한’이라는 표현을 라틴어로 어떻게 써야 정확한지 알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의 고민은 ‘콘술 테르티움(consul tertium)’이 맞는 것인지 ‘콘술 테르티오(consul tertio)’가 정확한 것인지 모른다는 데 있었다. 당시 학자였던 마르쿠스 바로는 그가 고민했던 내용을 이렇게 설명했다.
“테르티움과 테르티오 모두 ‘세 번째’라는 뜻이다. 테르티움은 ‘세 차례 경험했다’는 뜻의 ‘세 번째’인 반면 테르티오는 ‘앞에서 순서를 따져 세 번째’라는 뜻이었다. 따라서 콘술 테르티오를 ‘3등으로 당선된 집정관’이 돼버린다는 것이었다.
장군 출신이어서 어휘력과 문장력이 약했던 폼페이우스는 두 단어의 차이를 알 수 없어 당시 ‘로마에서 가장 학식이 풍부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듣던 철학자 키케로에게 질문 편지를 보냈다.
키케로는 아주 교활하게 대처했다. 그는 아무리 정확한 뜻을 적어 보내더라도 나중에 오해를 살 수 있다고 생각해 아주 애매한 답변을 보냈다.
“테르티움과 테르티오 모두 쓰지 말고 ‘3’을 의미하는 테르(tert)만 사용하시오”
폼페이우스 대극장 무대 남동쪽에는 포르티쿠스 폼페이라고 불린 열주 회랑이 만들어져 있었다. 비가 내릴 경우 관객들이 피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었다. 이곳이 바로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장소였다. 회랑은 직사각형이었는데, 가로 180m, 세로 135m 규모였다.
회랑에는 네 줄로 이뤄진 기둥이 서 있었다. 중앙에는 그늘이 진 산책로를 가진 정원이 있었다. 또 다양한 예술작품이 놓여 있었다. 이 중에는 이집트에서 태어난 그리스 화가 안티필루스가 그린 ‘카드무스와 유로파’라는 그림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