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날은 BC 44년 3월 15일이었다. 그는 사흘 뒤 로마의 숙적인 파르티아를 치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원정에 나설 예정이었다. 출정에 앞서 이날 마르스 평원에 있는 폼페이우스 대극장에서 열리는 원로원 회의에 참석해 여러 가지 소회를 밝힐 작정이었다.
로마에서는 오래 전부터 원로원 회의장을 고정적으로 정해놓지 않았다. 회의장이 한 곳으로 굳어진 것은 제정 시대 후반기부터였다. 이전에는 수백 명이 모일 수 있는 장소라면 어디에서라도 원로원 회의가 열렸다. 중요한 회의는 카피톨리노 언덕의 유피테르 신전에서 개최했다. 카이사르 시대에 원로원 회의는 폼페이우스 대극장의 회랑에서 주로 열렸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그리스에서 벌어진 파르살로스 회전에서 폼페이우스가 이끄는 반군을 꺾고 오랜 내전을 승리로 마무리했다. 폼페이우스는 이집트로 달아났지만 이집트 왕이 보낸 자객에게 목숨을 잃었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를 죽일 생각이 없었으나, 결과적으로 그를 저승으로 보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어지간한 사람이었으면 옛 정적의 이름을 붙인 대극장에서 회의를 열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지만 카이사르는 그런 평범한 부류의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폼페이우스 대극장에서 원로원 회의를 개최하는 것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원로원 회의가 열리기 며칠 전 한 점쟁이가 카이사르를 찾아가 경고했다.
“3월 15일에 무서운 일이 벌어질 것이니 조심해야 합니다.”
점쟁이의 예언뿐만이 아니었다. 3월 15일 이전에 여러 가지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하늘에 불이 날아다니고 밤중에 물건 두드리는 소리가 났는가 하면, 날아가던 새가 포로 로마노에 떨어지기도 했다. 카이사르가 제사를 지내려고 짐승을 잡았는데 묘하게도 심장이 없었다고 한다.
이런 일도 있었다. 카이사르는 원로원 회의가 열리기 전날인 3월 14일 갈리아전쟁과 이어진 내전에서 부하 장수였던 마르쿠스 레피두스의 초대를 받아 저녁을 함께 먹었다. 대화 도중에 어떻게 죽는 게 가장 좋으냐는 주제가 나왔다. 카이사르는 껄껄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갑작스럽게 죽는 게 가장 좋지.”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저녁을 먹고 집에 돌아와 잠을 잤다. 그런데 아내 칼푸르니아가 평소 잘 하지 않던 잠꼬대를 했다. 이상히 여긴 카이사르는 귀를 기울여 잠꼬대를 들어보았다. 아내는 꿈속에서 남편의 시체를 부둥켜안고 울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칼푸르니아는 남편의 손을 붙잡고는 회의 참석을 만류했다.
칼푸르니아는 원래 미신을 믿지 않는 여성이었다. 카이사르도 지난밤의 일로 마음이 심란해서 제관들에게 점을 치게 했다. 그런데 불길한 징조가 나왔다. 카이사르에게 나쁜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내용이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회의를 미루려고 원로원에 사람을 보내기로 했다. 이때 그가 어느 누구보다 믿고 있던 데키우스 브루투스가 집으로 찾아왔다. 당시 원로원 회의가 열릴 때면 젊은 의원들이 원로원 최고 의원의 집을 찾아가 회의장까지 모셔가는 게 관례였다. 데키우스 브루투스는 회의에 가야 한다고 우겼다.
“원로원 의원들이 회의장에 모여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금 회의를 연기하면 무례하다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데키우스 브루투스는 카이사르가 미리 써놓은 유언장에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의 후견인으로 지정할 정도로 믿었던 사람이었다. 카이사르는 그의 말을 듣고는 회의를 연기하려던 마음을 바꿔 폼페이우스 대극장에 가기로 했다.
하지만 카이사르가 모르는 게 있었다. 데키우스 브루투스는 이미 마르쿠스 브루투스, 카시우스 등과 함께 카이사르 암살 음모에 가담하고 있던 핵심 인물이라는 사실이었다.
카이사르가 데키우스 브루투스의 안내를 받아 폼페이우스 대극장으로 출발한 직후였다. 평소 카이사르를 존경하던 아르테미도로스라는 그리스 철학자가 있었다. 그는 이날 원로원 회의에서 카이사르를 암살하려는 음모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카이사르에게 알려주기로 했다.
카이사르가 이미 회의장으로 출발했다는 이야기를 칼푸르니아에게서 들은 그는 서둘러 뒤를 쫓아갔다. 다행히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 대극장으로 가던 길에 만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르테미도로스는 카이사르에게 ‘음모가 벌어지고 있다’는 내용을 상세하게 담은 쪽지를 건네주었다.
카이사르는 평소 침착하던 아르테미도로스의 표정이 다급한 것을 보고는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는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 궁금해서 쪽지를 꺼냈다. 하지만 사람들이 연이어 그에게 몰려들어 인사를 건네는 바람에 손에 든 쪽지를 펼 수 없었다.
머뭇머뭇하는 사이에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 대극장에 도착하고 말았다. 이날 원로원 회의가 열릴 폼페이우스 회랑에는 폼페이우스 동상이 서 있었다. 카이사르가 들어오는 문을 바라보는 위치였다. 그가 도착했을 때 대다수 의원들은 의자에 앉거나 구석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경호원을 대동하지 않고 혼자 극장으로 들어갔다. 그때 여러 의원들이 그에게 인사를 하러 모여 들었다. 카이사르는 그들과 웃으면서 인사를 나눴다. 잠시 후 브루투스 등 젊은 의원 14명이 그의 주위에 모여들었다. 카이사르는 환한 미소로 그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카이사르가 인사를 마치자마자 나스카가 먼저 칼을 뽑아 카이사르의 목을 찔렀다. 카이사르는 뜻하지 않은 기습을 받고 깜짝 놀랐지만 카스카를 손으로 밀어 넘어뜨렸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른 음모자들이 일제히 덤벼드는 게 보였다.
카이사르는 피할 길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토가 자락을 끌어올려 얼굴을 감싸고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카이사르는 스물세 군데에 상처를 입고 쓰러졌다. 나중에 한 의사가 그의 시신을 살펴본 결과에 따르면 치명상을 입힌 상처는 단 하나였다고 한다. 그가 쓰러진 곳은 폼페이우스 동상 바로 앞이었다. 이런 것을 운명이라고 하는 걸까?
아우구스투스는 BC 32년 폐허 상태였던 폼페이우스 대극장을 재건했다. 하지만 카이사르가 살해당한 현장인 폼페이우스 회랑에 있었던 폼페이우스 석상은 극장 한쪽으로 치워버렸다.
폼페이우스 대극장은 서기 21년에는 화재 때문에 피해를 입었다. 그의 가문에서는 대극장을 수리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 당시 황제였던 티베리우스가 수리 업무를 떠맡았다. 하지만 그는 극장 수리 작업을 마무리하지 못했다.
일부 역사학자는 ‘수리를 마쳤지만 봉헌식을 열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어쨌든 기록상으로 수리 작업 완료의 공은 다음 황제인 칼리굴라 또는 클라우디우스에게 돌아갔다.
80년 다시 불이 나는 바람에 폼페이우스 대극장 무대가 타버렸다. 이때에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가 나서 보수 작업을 진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247년 카리누스 황제 시대에 다시 불이 났는데, 사두정치를 창안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보수했다고 전해진다.
폼페이우스 대극장은 플라미니우스 경기장의 북동쪽에 서 있었다. 정확한 위치는 지금도 남아 있는 무대장치 초석인 오푸스 레티쿨라툼 잔해로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오푸스 레티쿨라툼은 고대 로마 건축의 벽체구축법인데, ‘그물코 쌓기’라고 부른다. 라르고 디 토레 아르젠티나에는 피아자 디 그로파틴타라는 광장이 있다. 이곳에도 폼페우스 대극장의 흔적과 이름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