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에 어둠이 내리깔린다. 아직 하늘은 푸르스름한데 손톱만한 초승달이 떠올랐다. 이국에서 보는 매우 특이한 풍경이다. 나보나 광장에는 가로등이 하나둘씩 불을 밝힌다. 언제 모였는지 광장 이곳저곳에 ‘거리의 화가들’이 모여 그림을 그려주거나 팔고 있다.
나보나 광장을 둘러싼 여러 골목에서는 끊임없이 사람들이 나왔다 들어갔다를 반복한다. 이곳이 로마여행의 주요 경로임을 입증해주는 장면이다. 테베레 강을 건너 산탄젤로 성을 거쳐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가는 길목이 바로 이곳이다. 근처에는 판테온이 있고, 선물로 주기 딱 좋은 화장품 등을 파는 ‘산타 마리아 노벨라 약국’도 있기 때문에 로마 여행객들로서는 최고의 행선지이다.
나보나 광장은 고대 로마 시대에는 마르스 평원의 가운데 지역이었다. 마르스 평원은 처음에는 양을 키우는 초원이었지만 나중에는 군인들이 군사훈련을 받는 장소가 됐다. 전쟁 승리를 축하하는 개선식 행사가 출발하는 장소로 활용되기도 했다. 이 지역은 로마 외곽에 있었기 때문에 로마를 방문하는 외국 사절들이 로마 관리들의 접대를 받는 곳으로도 사용됐다.
고대 로마인은 각종 행사를 치를 수 있는 대형 시설을 많이 건설했다. 마르스 평원에는 로마의 첫 석재 극장인 폼페이우스 대극장, 공공투표장인 사이프타 율리아, 대중목욕탕인 아그리파 욕장과 판테온 등이 들어섰다.
키르쿠스 플라미니우스
마르스 광장에는 키르쿠스 플라미니우스 즉 플라미니우스 경기장도 있었다. 폼페이우스 대극장에 앞서 BC 221년에 로마 역사상 최초로 마르스 평원에 들어선 공공체육시설이었다.
플라미니우스 경기장은 평민 출신 집정관었으며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한니발과 맞서 싸우다 목숨을 잃은 장군 플라미니우스 네포스가 평민들의 체력 향상을 위해 건설했다. 귀족들은 키르쿠스 막시무스 등에서 운동하거나 경기 관람을 즐겼지만, 평민에게는 운동 시설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안 플라미니우스가 사비를 들여 지은 것이었다. 이후 평민 집회는 항상 이곳에서 열렸다. 그는 키르쿠스 외에 오늘날 이탈리아 3번 국도인 플라미니우스 가도도 건설했다.
플라미니우스 경기장에서는 루디 플레베이이, 루디 타우리이 등 여러 경기대회가 열렸다. BC 158년에는 루디 사쿨라레스가 펼쳐지기도 했다. 민회도 늘 이곳에서 개최됐다. 행사가 열리지 않을 때에는 시장으로 사용됐다. 개선식 때 일부 행사가 치러지기도 했다.
BC 9년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의붓아들인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가 죽었을 때 이곳에서 그에게 바치는 조사를 낭독했다. BC 2년에는 아우구스투스 포럼 봉헌식을 치른 뒤 이곳에 물을 끌어들여 마치 호수처럼 만든 뒤 악어 36마리를 풀어놓고 사냥 대회를 열기도 했다.
루디 플레베이이는 매년 11월에 열리는 경기대회였다. 플레베이이는 ‘평민’을 뜻하는 단어였다. 평민 출신 조영관이 평민의 권리 신장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이 행사를 열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로마에서 경기대회를 의미하는 대부분의 루디는 키르쿠스 막시무스에서 진행됐지만, 플라미니우스 경기장은 평민 출신 집정관이 만들었기 때문에 루디 플레베이이 개최장소로 결정됐다.
로마인은 종교적, 정치적 행사는 물론 축제에서도 절차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BC 216년 루디 플레베이이 때에는 행사 도중 정해진 절차를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는 지적이 나와 축제를 세 번이나 새로 열어야 했다.
루디 타우리이는 지하세계를 다스리는 신인 디 인페리에게 바치는 축제였다. 디 인페리는 때로는 죽은 자들의 신인 마네스와 동일시되기도 했다. 로마에서는 시신을 시내에 묻지 못하게 돼 있었다. 따라서 디 인페리, 또는 마네스를 모시는 축제를 로마 시내에서 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키르쿠스 도미티아누스
서기 64년 대화재가 발생해 마르스 평원에 있던 많은 건물이 큰 피해를 입었다. 플라미니우스 경기장도 무너졌다.
도미티니아누스 황제는 화재로 소실된 플라미니우스 경기장을 대체하는 경기장을 지었다. 이것이 바로 키르쿠스 도미티아누스 즉 도미티아누스 경기장이었다.
콜로세움은 검투사 시합을 위해, 키르쿠스 막시무스는 전차 경주를 위해 지었다면, 도미티아누스 경기장은 육상 경기를 위해 만든 시설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로마에서 육상을 위해 지은 첫 상설 경기장이었다.
관중석 규모는 1만 5천~2만 명 정도로 키르쿠스 막시무스보다 작았다. 217년 콜로세움에 불이 나 당분간 시설을 사용할 수 없게 됐을 때 도미티아누스 경기장에서 검투사 대결이 펼쳐지기도 했다. 한때는 경기장 복도에서 매매춘이 성행하기도 했다.
세월이 흘러 로마가 멸망한 뒤 도미티아누스 경기장은 피난민들의 숙소로 바뀌었다. 로마 시내에서 탈출한 로마인 중 일부는 경기장 복도에 들어가 살았고, 운동장은 만남의 장소로 활용됐다. 도미티아누스 경기장은 르네상스 초기 때까지만 해도 비교적 온전한 모습으로 살아남아 있었지만 이후 귀족들이 경기장 대리석 등을 건축 자재로 마구 뜯어가는 바람에 결국 없어지고 말았다.
나보나 광장
나보나 광장은 당시 도미티아누스 경기장이 있던 곳이었다. 광장이 길쭉한 원통 모양으로 생긴 것은 이 때문이다. 경기장 시설은 모두 부서져 없어졌지만 대체적인 모양은 그대로 살아 있는 것이다.
나보나 광장에는 세 개의 분수가 있다. 가운데에는 ‘4대강 분수’가 있고, 양쪽에는 ‘포세이돈 분수’와 ‘무어인의 분수’가 물을 뿜어내고 있다. 세 분수가 있는 광장 가운데 부분이 당시 경기가 벌어지던 아레나였다. 주변을 둘러싼 건물들이 있는 곳은 당시 관중석이었다. 광장 한가운데 서서 주변을 한 바퀴 빙 둘러보면 당시 모습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당시 로마의 여러 경기장에서 열린 각종 경기를 ‘아곤’ 또는 ‘아고니아’라고 불렀다. 도미티아누스 경기장에서 벌어진 행사도 마찬가지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곳의 아곤은 ‘인 아고네’로 이름이 바뀌었고, 다시 세월이 지나면서 ‘나보네’로 변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오늘날의 이름인 ‘나보나’가 됐다.
나보나 광장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4대강 분수’와 ‘포세이돈 분수’, ‘무어인의 분수’다. 세 분수가 한꺼번에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오랜 세월에 걸쳐 하나씩 건설돼 오늘날 모습을 갖게 됐다.
8세기 무렵 교황 하드리아노 1세는 수로 복원 사업을 시작했지만 공사는 지지부진했다. 사업은 14세기 중엽 교황 니콜라오 5세 때에야 마무리됐다. 사람들이 점점 많이 살기 시작한 마르스 광장에도 물을 공급하기 위한 계획이 추진됐다. 그래서 만든 게 나보나 광장에 있는 ‘포세이돈의 분수’와 ‘무어인의 분수’였다.
두 분수를 설계한 사람은 16세기 말 교황 그레고리 13세의 지시를 받은 지아코모 델라 포르타였다. 그는 보르게세 광장, 콜로나 광장, 판테온에 분수를 만들었고, 특히 성베드로 대성당 건설에 참여하기도 한 건축가였다.
두 분수에는 처음에는 조각이 달려있지 않았다. 분수에 조각이 생긴 것은 19세기였다. 당시는 이탈리아에 통일 운동이 벌어지던 때였고, 로마가 이탈리아 수도로 결정된 시기였다. 정치인들은 사람이 모이는 분수에 정치적 의미를 담은 조각품을 달아놓으면 선전선동에 효과가 있다고 보았다. 그 덕분에 나보나 광장의 분수에도 적지 않은 변화가 생겼다.
1878년에는 포세이돈의 분수에 ‘문어와 싸우는 포세이돈’ 조각이 만들어졌다. 신화의 내용을 담은 ‘큐피드와 네레이드(바다의 여신), 그리고 바다코끼리’ 같은 조각도 덧붙여졌다. 포세이돈의 분수는 ‘칼데라리의 분수’라고도 불렀다. 각종 금속 제품을 만드는 대장간이 인근에 있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무어인의 분수에는 원래 돌고래와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반인반어의 해신 트리톤 조각만 있었다. 1673년에는 베르니니가 ‘무어인의 조각’을 만들어 세웠지만, 1874년 분수를 재건할 때 빌라 보르게세로 옮겨졌다. 지금 있는 무어인의 조각은 모조품이다.
나보나 광장이 지금처럼 세 분수 외에 여러 건물로 이뤄진 현재의 모습을 갖춘 것은 17~18세기 무렵이었다. 1644년 대주교였던 팜필이 인노첸시오 10세 교황으로 취임하면서부터 이곳은 크게 변했다. 인노첸시오 10세는 당시 나보나 광장에 대저택을 갖고 있었다. 그는 높아진 명성에 걸맞은 건물을 짓고 싶어 했다. 그래서 저택 주변 땅을 더 사들여 팜필 궁전을 건설했다. 이 궁전에는 1920년 브라질 대사관이 입주했고, 1964년에는 아예 브라질 정부가 건물을 매입해 버렸다.
인노첸시오 10세는 저택이 들어선 나보나 광장을 멋있게 꾸미고 싶었다. 그래서 당대 최고 건축가인 베르니니에게 ‘4대강 분수’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4대강은 갠지스 강, 나일 강, 다뉴브 강, 라플라타 강이다.
갠지스 강은 긴 노를 가진 조각이다. 긴 노는 배가 다닐 수 있다는 가항성을 상징한다. 나일 강은 머리에 느슨한 헝겊을 두른 조각이다. 헝겊은 당시만 해도 나일 강의 원천이 어딘지 몰랐다는 것을 뜻한다. 다뉴브 강은 교황의 문양을 갖고 있다. 이 강은 로마에서 가장 가까운 유럽의 강이기 때문이다. 라플라타 강은 동전 더미 위에 서 있다. 황금의 대륙 아메리카가 유럽에 가져다줄 부를 상징한다. 라플라타 강은 뱀을 보고 놀라는 표정을 하고 있다. 부자가 돈을 도둑맞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혀있는 것을 의미한다.
분수 가운데에는 오벨리스크가 서 있다. 꼭대기에는 팜필 가문의 상징인 비둘기가 달려 있다. 오벨리스크는 원래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명령으로 이집트의 이시스 신에게 바치기 위해 주문 제작한 것이었다. 나중에 아피아 가도에 건설된 막센티우스 경기장의 스피나에 세우기 위해 황제의 명령으로 로마로 옮겨졌다.
처음에는 이집트 상형문자가 오벨리스크 기단 부분에 새겨져 있었지만 로마로 올 때 지워졌다. 오벨리스크는 폐허로 변한 막센티우스 경기장에 계속 서 있었지만 인노첸시오 10세가 4대강 분수를 만들 때 교황의 권력을 상징하는 표식으로 삼기 위해 옮겨 세웠다.
성 아그네스 인 아고네 성당
인노첸시오 10세는 한걸음 더 나아가 교황 가족이 사용할 성당을 짓기로 했다. 그는 고대 로마 제정 시대 때 나보나 광장에서 성 아그네스가 순교했다는 전설을 떠올리고는 새 성당에 그녀의 이름을 붙이기로 했다. 성 아그네스는 순결, 양치기, 소녀, 약혼한 커플, 처녀, 성폭행 피해자의 수호성인이다.
3세기 말~4세기 초 제정 로마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대에 귀족의 딸이었던 아그네스는 대단한 미인이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기독교에 귀의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집정관 샘프로니우스로부터 아들과 결혼하라는 요구를 받지만 거절했다.
화가 난 샘프로니우스는 아그네스를 기독교 신도라는 이유로 처형시키려고 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절은 로마에서 기독교 탄압이 가장 심하던 때였다.
고대 로마법에 따르면 처녀를 처형하는 것은 불법이었다. 샘프로니우스는 아그네스를 매춘굴로 보내 부랑자들에게 성폭행하라고 지시했다. 그렇게 하면 처녀가 아니기 때문에 처형해도 합법이 된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아그네스는 천사의 도움으로 위기를 탈출했다. 여기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전설이 전해진다. 남자들이 덮치려 하자 갑자기 아그네스의 머리가 길어져 그녀의 온 몸을 덮었다고 한다. 아그네스의 몸에 손을 대려던 남자들의 눈이 멀어 화를 면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샘프로니우스는 다른 사람에게 아그네스를 재판하라고 지시했다. 아그네스에게는 사형 선고가 내려졌다. 처형장은 도미티아누스 경기장이었다. 처음에는 화형을 시키기로 했다. 그러나 관리들이 아무리 시도해도 아그네스 발밑에 쌓인 나무에 불이 붙지 않았다. 겨우 불을 붙였나 했더니 이번에는 불길이 그녀의 몸을 피해 엉뚱한 나무들만 태웠다.
짜증이 난 한 병사가 그녀의 목을 칼로 베어 겨우 처형할 수 있었다. 아그네스의 피는 경기장에 흘러넘쳐 다른 기독교도들의 옷을 적셨다고 전해진다.
로마가 기독교 세상으로 변한 뒤인 9세기 무렵 아그네스가 목숨을 잃었던 경기장 인근에 작은 성당이 하나 만들어졌다. 사람들은 성당을 ‘성 아그네스 인 아고네’라고 불렀다. 이 성당이 언제 없어졌는지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알 수 없다.
인노첸시오 10세는 당대 최고 건축가였던 레이날디 부자는 물론 보로미니와 베르니니를 끌어들여 성당을 짓게 했다. 성당 완공은 인노첸시오 10세가 죽은 뒤에 이뤄졌고, ‘성 아그네스 인 아고네 성당’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성당은 교황 가족의 개인 기도실이나 마찬가지였다. 팜필 궁전 바로 옆에 붙어있어 팜필 가문 사람들이 손쉽게 성당으로 드나들 수 있었다.
4대강 분수 뒤에 17세기 바로크 양식의 하얀 건물이 있다. 이곳이 바로 ‘성 아그네스 인 아고네 성당’이다. 성당 기도실에는 아그네스 해골이 모셔져 있다. 그녀의 뼈는 카타콤베 위에 지어진 다른 ‘성 아그네스 교회’의 제단 밑에 모셔져 있다. 성당 지하에는 콘크리트 벽과 벽돌, 석회 기둥 등 과거 도미티아누스 경기장의 흔적이 남아 있다. 또 다른 건물들의 지하에도 비슷한 흔적들이 보인다.
아그네스가 실존 인물인지 아닌지는 불분명하다. 당연히 그녀가 순교했는지 아닌지도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믿음은 역사적 사실을 넘어선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한다.